최근 수정 시각 : 2023-12-31 21:13:50

제임스 카그니

제임스 캐그니의 주요 수상 및 헌액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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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I 선정 가장 위대한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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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9년 미국 영화 연구소(AFI)가 선정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남, 여배우 순위이다.
1위 2위 3위 4위 5위
험프리 보가트
캐서린 헵번
케리 그랜트
베티 데이비스
제임스 스튜어트
오드리 헵번
말론 브란도
잉그리드 버그만
프레드 아스테어
그레타 가르보
6위 7위 8위 9위 10위
헨리 폰다
마릴린 먼로
클라크 게이블
엘리자베스 테일러
제임스 캐그니
주디 갈런드
스펜서 트레이시
마를레네 디트리히
찰리 채플린
조안 크로포드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게리 쿠퍼
바버라 스탠윅
그레고리 펙
클로데트 콜베르
존 웨인
그레이스 켈리
로런스 올리비에
진저 로저스
진 켈리
메이 웨스트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오슨 웰스
비비안 리
커크 더글러스
릴리안 기시
제임스 딘
셜리 템플
버트 랭카스터
리타 헤이워드
막스 형제
로렌 바콜
21위 22위 23위 24위 25위
버스터 키튼
소피아 로렌
시드니 푸아티에
진 할로우
로버트 미첨
캐롤 롬바드
에드워드 G. 로빈슨
메리 픽포드
윌리엄 홀든
에바 가드너
같이 보기: 영화, 사랑 영화, 뮤지컬 영화, 영감을 주는 영화, 배우, 영화 음악, 명대사 }}}}}}}}}}}}

AFI 평생 공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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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5px -1px -11px"
1973년 1974년 1975년 1976년 1977년
존 포드 제임스 캐그니 오슨 웰스 윌리엄 와일러 베티 데이비스
1978년 1979년 1980년 1981년 1982년
헨리 폰다 앨프리드 히치콕 제임스 스튜어트 프레드 아스테어 프랭크 카프라
1983년 1984년 1985년 1986년 1987년
존 휴스턴 릴리안 기시 진 켈리 빌리 와일더 바버라 스탠윅
1988년 1989년 1990년 1991년 1992년
잭 레먼 그레고리 펙 데이비드 린 커크 더글러스 시드니 푸아티에
1993년 1994년 1995년 1996년 1997년
엘리자베스 테일러 잭 니콜슨 스티븐 스필버그 클린트 이스트우드 마틴 스코세이지
1998년 1999년 2000년 2001년 2002년
로버트 와이즈 더스틴 호프먼 해리슨 포드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톰 행크스
2003년 2004년 2005년 2006년 2007년
로버트 드 니로 메릴 스트립 조지 루카스 숀 코너리 알 파치노
2008년 2009년 2010년 2011년 2012년
워렌 비티 마이클 더글러스 마이크 니콜스 모건 프리먼 셜리 맥클레인
2013년 2014년 2015년 2016년 2017년
멜 브룩스 제인 폰다 스티브 마틴 존 윌리엄스 다이앤 키튼
2018년 2019년 2022년[1] 2023년
조지 클루니 덴젤 워싱턴 줄리 앤드류스 니콜 키드먼
[1] 2020년 시상 예정이었으나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확산으로 인해 시상식 개최가 2년 연기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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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디 센터 공로상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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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수상자
{{{#!wiki style="margin:0 -10px -5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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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6px -1px -11px"
<colbgcolor=#000000> 1978년 <colbgcolor=#fff,#1f2023>매리언 앤더슨, 프레드 아스테어, 조지 발란신,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리처드 로저스
1979년 에런 코플런드, 엘라 피츠제럴드, 헨리 폰다, 마사 그레이엄, 테네시 윌리엄스
1980년 레너드 번스타인, 제임스 캐그니, 애그니스 데밀, 린 폰탠, 리언타인 프라이스
1981년 카운트 베이시, 케리 그랜트, 제롬 로빈스, 헬렌 헤이스, 루돌프 세르킨
1982년 조지 애벗, 릴리안 기시, 베니 굿맨, 진 켈리, 유진 오르만디
1983년 캐서린 던햄, 엘리아 카잔, 프랭크 시나트라, 제임스 스튜어트, 버질 톰슨
1984년 레나 혼, 대니 케이, 잔카를로 메노티, 아서 밀러, 아이작 스턴
1985년 머스 커닝햄, 밥 호프, 아이린 던, 앨런 제이 러너, 프레더릭 로, 베벌리 실즈
1986년 루실 볼, 레이 찰스, 제시카 텐디, 험 크로닌, 예후디 메뉴힌, 앤서니 튜더
1987년 페리 코모, 새미 데이비스 주니어, 베티 데이비스, 네이선 밀스타인, 알윈 니콜라이
1988년 앨빈 에일리, 조지 번즈, 마이어나 로이, 알렉산더 슈나이더, 로저 L. 스티븐스
1989년 해리 벨라폰테, 클로데트 콜베르, 알렉산드라 다닐로바, 메리 마틴, 윌리엄 슈만
1990년 디지 길레스피, 캐서린 헵번, 라이즈 스티븐스, 줄리 스턴, 빌리 와일더
1991년 베티 콤덴, 로이 에이커프, 아돌프 그린, 헤럴드 니콜라스, 로버트 쇼, 그레고리 펙
1992년 라이어널 햄프턴, 폴 뉴먼, 조앤 우드워드, 진저 로저스,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 폴 타일러
1993년 자니 카슨, 아서 미첼, 게오르그 솔티, 스티븐 손드하임, 매리언 윌리엄스
1994년 커크 더글러스, 아레사 프랭클린, 모튼 굴드, 해럴드 프린스, 피트 시거
1995년 자크 당부아즈, 메릴린 혼, 비비 킹, 시드니 푸아티에, 닐 사이먼
1996년 에드워드 올비, 베니 카터, 조니 캐쉬, 잭 레먼, 마리아 톨치프
1997년 로렌 바콜, 밥 딜런, 찰턴 헤스턴, 제시 노먼, 에드워드 빌렐라
1998년 빌 코스비, 프레드 엡, 존 칸더, 윌리 넬슨, 앙드레 프레빈, 셜리 템플
1999년 빅터 보르게, 숀 코너리, 주디스 재스민, 제이슨 로바즈, 스티비 원더
2000년 미하일 바리시니코프, 척 베리, 플라시도 도밍고, 클린트 이스트우드, 안젤라 랜스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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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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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 2001년 <colbgcolor=#fff,#1f2023> 줄리 앤드류스, 밴 클라이번, 퀸시 존스, 잭 니콜슨, 루치아노 파바로티
2002년 제임스 얼 존스, 제임스 리바인, 치타 리베라, 폴 사이먼, 엘리자베스 테일러
2003년 제임스 브라운, 캐럴 버넷, 마이크 니콜스, 로레타 린, 이작 펄만
2004년 워렌 비티, 오시 데이비스 & 루비 리, 엘튼 존, 조앤 서덜랜드, 존 윌리엄스
2005년 토니 베넷, 수잔 파렐, 줄리 해리스, 로버트 레드포드, 티나 터너
2006년 주빈 메타, 돌리 파튼, 스모키 로빈슨, 스티븐 스필버그, 앤드루 로이드 웨버
2007년 레온 플라이셔, 스티브 마틴, 다이애나 로스, 마틴 스코세이지, 브라이언 윌슨
2008년 모건 프리먼, 조지 존스,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트와일라 사프, 더 후
2009년 멜 브룩스, 데이브 브루벡, 그레이스 범브리, 로버트 드 니로, 브루스 스프링스틴
2010년 멀 해거드, 제리 허먼, 빌 존스, 폴 매카트니, 오프라 윈프리
2011년 바바라 쿡, 닐 다이아몬드, 요요마, 소니 롤린스, 메릴 스트립
2012년 버디 가이, 더스틴 호프먼, 레드 제플린, 나탈리아 마라코바
2013년 마티나 아로요, 허비 행콕, 빌리 조엘, 셜리 맥클레인, 카를로스 산타나
2014년 알 그린, 톰 행크스, 퍼트리샤 맥브라이드, 스팅, 릴리 톰린
2015년 캐롤 킹, 조지 루카스, 리타 모레노, 오자와 세이지, 시실리 타이슨
2016년 마르타 아르헤리치, 이글스, 알 파치노, 마비스 스태플스, 제임스 테일러
2017년 카르멘 드 라발라데, 노만 레어, 글로리아 에스테판, LL 쿨 J, 라이오넬 리치
2018년 셰어, 필립 글래스, 레바 매킨타이어, 웨인 쇼터, 해밀턴 팀 ( 린 마누엘 미란다, 토마스 카일, 알렉스 라카뫄르, 앤디 블렝큰불러)
2019년 어스, 윈드 앤 파이어, 세서미 스트리트, 샐리 필드, 린다 론스태드, 마이클 틸슨 토머스
2020년 데비 엘렌, 조안 바에즈, 가스 브룩스, 미도리, 딕 반 다이크
2021년 저스티노 디아즈, 베리 골디, 론 마이클스, 베트 미들러, 조니 미첼
2022년 조지 클루니, 에이미 그랜트, 글래디스 나이트, 타니아 레온, U2 ( 보노, 디 에지, 애덤 클레이튼, 래리 뮬렌 주니어)
2023년 퀸 라티파, 르네 플레밍, 빌리 크리스탈, 디안 워윅, 배리 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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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배우조합 평생 공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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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6px -1px -11px"
1962년 1964년 1965년 1966년 1967년
에디 캔터 스탠 로렐 밥 호프 바버라 스탠윅 윌리엄 가건
1968년 1969년 1970년 1971년 1972년
제임스 스튜어트 에드워드 G. 로빈슨 그레고리 펙 찰턴 헤스턴 프랭크 시나트라
1973년 1974년 1975년 1976년 1977년
마샤 레이 월터 피전 로절린드 러셀 펄 베일리 제임스 카그니
1978년 1979년 1980년 1982년 1983년
에드가 버겐 캐서린 헵번 레온 아메스 대니 케이 랄프 벨라미
1985년 1986년 1987년 1988년
폴 뉴먼 조앤 우드워드 나네트 페브레이 레드 스켈튼 진 켈리
1989년 1990년 1991년 1992년 1993년
잭 레먼 브록 피터스 버트 랭카스터 오드리 헵번 리카르도 몬탈반
1994년 1995년 1996년 1997년 1998년
조지 번즈 로버트 레드포드 안젤라 랜스버리 엘리자베스 테일러 커크 더글러스
1999년 2000년 2001년 2002년
시드니 푸아티에 오시 데이비스 루비 디 에드워드 애스너 클린트 이스트우드
2003년 2004년 2005년 2006년 2007년
칼 말든 제임스 가너 셜리 템플 줄리 앤드류스 찰스 더닝
2008년 2009년 2010년 2011년 2012년
제임스 얼 존스 베티 화이트 어니스트 보그나인 메리 타일러 무어 딕 반 다이크
2013년 2014년 2015년 2016년 2017년
리타 모레노 데비 레이놀즈 캐롤 버넷 릴리 톰린 모건 프리먼
2018년 2019년 2020년 2021년
앨런 알다 로버트 드 니로 취소[1] 헬렌 미렌
[1]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으로 인한 시상 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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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아카데미 시상식
파일:oscar_logo.svg
남우주연상
제14회
( 1942년)
제15회
( 1943년)
제16회
( 1944년)
게리 쿠퍼
( 요크 상사)
제임스 캐그니
(성조기의 행진)
폴 루커스
(라인의 감시)

{{{#!wiki style="margin:-10px -10px" <tablewidth=90%><tablebordercolor=#fff,#1f2023> 파일: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로고.svg 파일: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로고 화이트.svg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입성자
Hollywood Walk of Fame St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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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ff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colbgcolor=#d4a1a1><colcolor=#FFD700> 이름 제임스 캐그니
JAMES CAGNEY
분야 영화
입성날짜 1960년 2월 8일
위치 6504 Hollywood Blvd.
}}}}}}}}}}}} ||

}}} ||
<colbgcolor=#000000><colcolor=#efd88f> 제임스 카그니
James Cagney
파일:James_Cagney_profile.jpg
본명 제임스 프랜시스 캐그니 주니어
James Francis Cagney Jr.
국적
[[미국|]][[틀:국기|]][[틀:국기|]]
출생 1899년 7월 17일
미국 뉴욕주 뉴욕시 맨해튼 로어 이스트 사이드
사망 1986년 3월 30일 (향년 86세)
미국 뉴욕주 스탠퍼드
묘지 미국 뉴욕주 뉴욕시 천국의 문 공동묘지
직업 배우, 무용수
활동 기간 1921년 - 1984년
영화 데뷔 1930년, 'Sinners' Holiday'
경력 미국배우조합 6대 협회장(1942년 - 1944년)
신장 165cm
배우자 프랜시스 버넌(1922년 - 1986년 캐그니 본인의 사망)
자녀 슬하 1남 1녀(모두 입양)
종교 가톨릭
지지정당

링크 파일:IMDb 로고.svg

1. 개요2. 생애 및 활동3. 주요 작품4. 정치관5. 가족
5.1. 입양 자녀 논란
6. 기타

[clearfix]

1. 개요

미국의 배우.

2. 생애 및 활동

고전 할리우드 시절 악한 연기로 유명했던 최고의 배우 중 한 명이다.

1899년 7월 17일 뉴욕시 맨해튼 빈민가 다세대 주택에 살던 제임스 캐그니 시니어와 캐럴린 넬슨 캐그니 부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술집을 운영하는 바텐더이자 아마추어 권투선수였다.

형제 중 두 명[1]이 의사가 되었다. 동생 윌리엄 "빌" 캐그니[2]는 훗날 제임스 캐그니의 사업 동료가 되어 출연작들의 계약 및 제작에 관여했다. 여동생 진 캐그니[3]는 배우로 활동했다.

14살 때부터 신문 "뉴욕 선"의 사환, 뉴욕 공공도서관 장서관리인 등 다양한 일을 학업과 병행했다.

1919년 워너메이커 백화점 점원으로 있을 때 심심해서 춤을 추다가 동료에게서 보드빌 극단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오디션을 통과한 캐그니는 "Every Sailor"에서 여장 코러스로 배우 생활을 시작했다. 어머니는 싫어했지만, 캐그니는 즐거운 경험이었다고 술회했다. 브로드웨이 롱에이커 극장(Longacre Theatre)의 쇼 " Pitter Patter"에서 코러스 보이가 되면서 탭댄서로 일했다. 캐그니는 자신의 연예인 정체성은 무용수가 먼저였으며, <성조기의 행진>(1942)에서 보여준 춤솜씨들은 전부 이때의 경험에서 비롯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비뮤지컬 영화에서 워낙 큰 인기를 끌었기 때문에 춤을 활용한 출연작이 거의 없다.

케리 그랜트는 아직 이름이 아치볼드 리치일 적에 "파커랑 랜드랑 리치"(Parker, Rand, and Leach)란 이름의 삼인조 보드빌 공연팀에 있었는데, 그랜트가 나가면서 캐그니가 1921년 오디션을 통해 이 팀에 새로 뽑히게 된다. 캐그니가 들어온 뒤로는 이 팀의 이름은 "파커랑 랜드랑 캐그니"(Parker, Rand, and Cagney)가 되었다.

1930년 머리 바우머(Marie Baumer)가 쓴 연극 "Penny Arcade" 개작의 주연을 맡았다. 이 연극을 본 앨 잔슨(Al Johnson)은 영화화 판권을 산 뒤 워너 브라더스에 팔았다. 그래서 나오게 된 영화가 데뷔작인 <Sinner's Holiday>였다. 캐그니는 이미 이때부터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대사는 연기를 거부하는 등 고집 센 면모를 보였다. 겨우 3주 단기 계약으로 시작된 워너와의 관계는 7년 짜리 장기 계약으로 이어졌다. 이 영화에서 보여준, 어딘가 동정을 자아내는 악한은 이후 캐그니의 경력 전체를 지배하는 이미지가 되었다.

다섯 번째로 찍은 영화 윌리엄 A. 웰먼의 < 공공의 적>(1931)을 통해 스타 지위에 등극했다. 한때는 가제가 "Beer and Blood(맥주와 피)"였던 이 영화에서 캐그니는 정서 불안의 악한을 연기했다. 캐그니가 메이 클라크의 얼굴에 대고 자몽을 뭉개는 장면으로부터 여성을 상대로 한 폭력 묘사가 암묵적으로 허용되기 시작했다.[4] 에드워드 G. 로빈슨과 출연한 <스마트 머니>(1931)에선 아예 여성의 얼굴을 주먹으로 친다.
파일:public_enemy_1931.jpg

악한 연기에 대한 높은 대중선호도로 워너는 계속 캐그니를 "깡패 영화"에 출연시켰다.

1930년 워너와 계약한 첫 해엔 주급이 500 달러였고, 일 년에 다섯 편을 찍는다는 조건이었다. 1931년에 <Blonde Crazy> 직후 주급이 1,000 달러로 올라갔다. 1932년 <Winner Take All>을 찍고 나자 더글러스 페어뱅크스 주니어 에드워드 G. 로빈슨 수준이 돼 주급 3,000달러를 받게 됐다.

1935년 워너가 일 년에 탑 빌링 네 편씩만 찍기로 해놓고 <Ceiling Zero>를 개봉하면서 팻 오브라이언의 이름을 제일 위에 올리자 캐그니는 워너를 계약 위반으로 고소해 승소했다. 캐그니는 훗날 자신이 워너에 반항한 전적이 있었기 때문에 후에 베티 데이비스, 올리비어 더 해빌런드, 미리엄 합킨스가 워너와 싸울 수 있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1938년 잭 워너는 캐그니와 한 편당 150,000 달러 계약을 맺고 흥행 수익에 따른 추가 보상까지 약속했다.

미국배우조합에서 한참 업계에서 마피아를 몰아내려고 애쓰던 1942년 협회장이 됐는데, 마피아로부터 살해 협박이 시작됐다. <성조기의 행진>을 찍으려고 촬영장에 들어서자마자 머리에 아크등이 떨어진 적도 있다고 한다. 캐그니의 인터뷰에 따르면 당시 마피아 조직에서 범죄일에 가담하고 있던[5] 동료 배우 조지 래프트가 캐그니는 건드리지 말라고 얘기해 협박이 끝났다고 한다.

1961년 은퇴했던 캐그니는 뇌졸중을 겪은 뒤 1981년 치료비에 보태기 위해 밀로쉬 포맨의 < 래그타임>으로 복귀하면서 말년에 컬트적인 인기를 얻었다.

1984년 이후 완전히 은퇴했고 1986년, 뉴욕의 농장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항년 86세. 추도사는 절친 로널드 레이건이 맡았다.

3. 주요 작품

<rowcolor=#ffffff> 연도 작품 배역
1930 천국의 새 해리 델러노
The Doorway to Hell 스티브 마일어웨이
1931 Other Men's Women 에드
공공의 적 탐 파워스
스마트 머니
Blonde Crazy 버트 해리스
1932 Taxi! 맷 놀런
Crowd Roars 조 그리어
Winner Take All 지미 케인
1933 Hard to Handle 마이런 C. "레프티" 메럴
풋라이트 퍼레이드 체스터 켄트
Lady Killer 댄 퀴글리
1934 Jimmy the Gent 지미 코리건
He Was Her Man 플리커 헤이즈
히어 컴스 더 네이비 체스터 "체스티" 오카너
1935 Devil Dogs of the Air 타머스 제퍼슨 "타미" 오툴
The Irish in Us 대니 오해러
한여름 밤의 꿈 닉 보톰
Frisco Kid 뱃 모건
G Men 제임스 "브릭" 데이비스
1936 Ceiling Zero 디지 데이비스
1937 Something to Sing Abou "테리" 루니
1938 Boy Meets Girl 라버트 로
더럽혀진 얼굴의 천사 윌리엄 "라키" 설러번
1939 The Oklahoma Kid 짐 "디 오클러호머 키드" 킨케이드
Each Dawn I Die 신문기자 프랭크 로스
포효하는 20년대 에디 바틀렛
1940 The Fighting 69th 제리 플렁컷 이등병
Torrid Zone 닉 버틀러
City for Conquest 대니 케니
1941 더 스트로베리 블론드 비프 그라임스
The Bride Came C.O.D. 스티브 칼린스
1942 성조기의 행진 조지 M. 코핸
Captains of the Clouds 브라이언 맥클레인
1943 Johnny Come Lately 탐 리처즈
1945 백주의 피 기자 닉 컨든
1946 13 루 매들렌 라버트 에멧 "밥" 샤키
1948 The Time of Your Life 조지프 "조" T.
1949 화이트 히트 아서 "코디" 재럿
1951 컴 필 더 컵 루 마쉬
Starlift 본인
1952 What Price Glory 플래그 대위
1953 A Lion Is in the Streets 행크 마튼
1955 사랑하거나 떠나거나 마튼 스나이더
미스터 로버츠 "선장" 모튼 소령
1956 Tribute to a Bad Man 제러미 로덕
1957 천의 얼굴을 가진 사나이 란 체이니
1959 Shake Hands with the Devil 숀 레너핸
1961 원, 투, 쓰리 C.R. "맥" 맥너매러
1981 래그타임 경찰국장 라인랜더 왈도
1984 Terrible Joe Moran 조 머랜

4. 정치관

  • 캐그니는 자신이 개인/시민으로서의 자유 외에는 그 무엇도 좇지 않는다고 늘 강조했지만 1930년대에 공산주의자라는 의심을 샀고 정부의 조사를 받기도 했는데, 그 이유는 여럿이다.
    • 1918년 노동운동가 타머스 무니(Thomas Mooney)가 명백히 조작된 증언과 증거에 근거해 억울하게 무기징역형을 받자 상류층과 할리우드에서 1939년 무니가 사면될 때까지 장기 구명 운동을 펼쳤는데, 캐그니 역시 변호 비용을 지원했었다.

    • 할리우드 전체가 좌익 성향을 의심 받던 시절인 1933년 영화배우조합에 들어갔다.

    • 고전 할리우드 시절 제작사 수장들은 소속 탑스타들의 하루치 급료를 "세금" 형태로 제해 제작사 자금을 정치인들에게로 은밀히 이동 시키고 있었다. 특히 1934년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선 총 50만 달러가 공화당 후보 프랭크 메리엄[6]에게 흘러들어갔다. 캐그니는 이 "메리엄 세금(Merriam tax)"에 반대하는 반란에 참여해 진 할로우와 함께 이 세금을 내는 걸 공개적으로 거부했다. 캐그니는 워너 브라더스에 이 세금을 중단하지 않는다면 경쟁 후보 업튼 싱클레어의 캠프에 일주일치 급료를 기부하겠다고 선포했다. 여담이지만 이 선거에선 결국 메리엄이 이겼다.

    • 1935년 캘리포니아 샌 와킨 밸리(San Joaquin Valley) 목화 채취 노동자들의 시위를 지지하며 기부를 한 적이 있는데, 이를 주관한 단체가 좌파였다.

    • 1931년 앨라배마주에선 9명의 흑인 청소년들이 2명의 백인 소녀를 강간한 혐의로 기소된 스카츠보로 소년 사건(Scottsboro Boys)이 있었다. 나중에 소녀들이 흑인 소년들과 시비가 붙었던 백인 소년들의 위압 때문에 위증했음을 인정했는데도 결국 3명이 수감됐다. 흑인들은 참정권이 없어 배심원도 할 수 없던 시절이었다. 풀려난 흑인 소년들이 린치 위기에 몰리자 1936년 캐그니는 이들의 후원에 참여했는데, 이 후원의 중심에 있던 게 미국 공산당이었다. 미국 공산당은 샌프란시스코 사무실 벽에 대표 후원자들 중의 하나로 캐그니의 이름을 걸어놓기도 했다.

5. 가족

1920년에 "Pitter Patter"의 코러스 보이가 되면서 같은 극장에서 "버넌과 나이(Vernon and Nye)"라는 그룹의 댄서로 일하던 아내를 만나 첫눈에 반했다. 1922년 결혼했고 평생 부인에게 충실했던 걸로 유명한데 무려 64년 동안 결혼생활을 했다. 아내의 중간 이름인 윌러드(Willard)에서 따온 윌리(Willie)와 빌(Bill)이 애칭이었는데, 동생도 마침 빌로 불렸기 때문에 아내를 빌이라고 할 때는 반드시 "My Bill(나의 빌)"이라고 했다.

5.1. 입양 자녀 논란

아버지로서는 실격이어서 1940년에 입양한 아들 제임스 프랜시스 캐그니 3세(James Francis Cagney III), 역시 입양한 딸 캐슬린 "케이시" 캐그니(Cathleen "Casey" Cagney) 둘 모두와 절연했고, 말년엔 자식들과 전혀 왕래가 없었다. 부부 사이엔 사랑이 넘쳤으나 입양한 자식들은 아껴주지 않았다는 점은 메리 픽포드 부부와 같다. 픽포드의 경우처럼 소문도 날만큼 나있었다.

입양 아들은 1984년 제임스 캐그니보다 먼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향년 42세.

제임스 캐그니는 출생 당시 풀네임이 제임스 프랜시스 캐그니 주니어(James Francis Cagney Jr.)였는데 아버지 제임스 캐그니 시니어 사망 후엔 본인이 제임스 캐그니 시니어가 되었고, 입양한 아들인 제임스 프랜시스 캐그니 3세가 제임스 프랜시스 캐그니 주니어가 되어 입양 아들이 사망했을 시점엔 손자가 제임스 캐그니 3세(James Cagney 3d)로 불리게 되었다. 입양 아들은 손녀 신디 캐그니(Cindy Cagney)도 남겼다.

이때 제임스 캐그니의 조수는 입양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제임스 캐그니가 "매우 속상해했다"고 언론에 전한 것으로 알려졌었다. 제임스 캐그니는 사망 직전에 가졌던 인터뷰에서 기자가 가족 제도가 붕괴되고 있는 오늘날의 세태에 대해 의견을 묻자 이를 비판하고 자신이 형제들을 얼마나 잘 돌봤는지를 강조하기까지 했다.[7]

그러나 제임스 캐그니는 2년 뒤인 1986년 사망하면서 당시 생존해있던 입양 딸 케이시 캐그니는 물론 손주들 전체를 유산 상속에서 제외했다. 그나마 메리 픽포드는 자녀들에게 명목상의 소액 유산을 분배하기라도 했는데 제임스 캐그니는 그마저도 없었다. 입양 아들 사망 시에 조수가 했던 말은 그저 흉흉했던 여론을 잠재우려는 시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딸은 캐그니를 용서했던 것으로 보인다.

6. 기타

  • 젊은 시절 경작에 관심을 보였고 말과 보트 타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성인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자동차를 탑승해봤다고 할 정도로 말을 애용한듯. 뉴욕주 북부에 농장을 소유해 한때 가축 두수가 175에 달했다.
  • 많은 고전 할리우드 동료들처럼 말년에 취미로 그림을 그렸다. 배우로서의 명성이 있어 그림 한 점당 65,000 달러까지 제안 받았는데, 젊은 화가들의 기회를 빼앗는 짓이라고 생각해 팔지 않았다고 한다.
  • 시쓰기도 취미였다.
  • 에드워드 G. 로빈슨이 다른 배우들에게 잘난체를 하고 독재적으로 지시하곤 했다고 말했다. 하루는 화가 난 조지 래프트가 때려서 로빈슨이 나가 떨어진 적이 있다고 한다.
  • 험프리 보가트는 배우로서 존재감이 있었으며 요구 받는 모든 걸 해냈지만 인간적으론 좋아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보가트는 사람들을 멀리했는데, 자신이 그들을 먼저 싫어해 거리를 둔다는 인상을 분명히 했다고 한다.
  • 과거 할리우드 황금기의 제작사 중심 체계를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제작사 윗선들 역시 그저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 생전부터 전기 영화 시도가 있었다. 본인도 <성조기의 행진>(1942)에서 업계 실존인물을 연기해 아카데미상을 탄 전적이 있는만큼 자신의 삶을 영화화하려는 시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고 했다. 미하일 바리시니코프가 연기하고 싶어했는데, 캐그니는 그의 억양을 문제 삼으며 만류했다. 트리트 윌리엄스[9]도 의사를 밝혔다. 존 트래볼터에게도 제안이 갔었는데 트래볼터는 내가 그걸 어떻게 해낼 수 있겠냐며 마이클 J. 폭스를 추천했고, 폭스가 최종 낙점 되었으나 결국 흐지부지 되었다. 폭스는 캐그니를 다룬 다큐멘터리 <James Cagney: Top of the World>(1992)에서 해설을 맡기도 했다.

[1] 해리(Harry)와 에디(Eddie). [2] William "Bill" Cagney. [3] Jeanne Carolyn Cagney. 1919 - 1984. [4] 자신의 건강을 염려하는 애인을 불합리하게 괴롭히는 장면이기 때문에 악랄한 폭력성이 더 부각되었다. 이 영화에 나왔던 조운 블란델이 <스파이 인 더 그린 햇(The Spy in the Green Hat)>(1967)에서 이 장면을 오마주했다. [5] 범죄 현장에서 도망칠 때 차량을 이동시키는 역할을 하는, 소위 운전수("driver") 역할을 하고 있었다. [6] Frank Merriam. 1865 - 1955. [7] 물론 해당 기자는 캐그니를 돌려까기 위해 일부러 질문을 던졌던 것이다. [8] 그마저도 자선 활동을 포함하여 수상한 사람들이 많다. [9] Treat Williams. TV 드라마 "Everwood"(2002-5)의 주인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