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아 카잔의 주요 수상 및 헌액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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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골든 글로브 시상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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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 194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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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회 ( 194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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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회 ( 194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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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카프라 ( 멋진 인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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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아 카잔 ( 신사협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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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휴스턴 ( 시에라 마드레의 황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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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회 ( 195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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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회 ( 195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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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회 ( 195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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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드 진네만 ( 지상에서 영원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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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아 카잔 ( 워터프론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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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슈아 로건 (피크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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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회 ( 196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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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회 ( 196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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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회 ( 196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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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린 ( 아라비아의 로렌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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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아 카잔 ( 아메리카 아메리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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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큐커 ( 마이 페어 레이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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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51538><colcolor=#ffffff> 엘리아 카잔 Elia Kaz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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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명 |
Elias Kazantzoglou 일리아스 카잔즈올루[1] |
출생 | 1909년 9월 7일 |
오스만 제국 코스탄티니예 | |
사망 | 2003년 9월 28일 (향년 94세) |
미국 뉴욕 주 뉴욕 시 |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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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윌리엄스 칼리지 (학사) 예일 대학교 |
직업 | 영화감독, 작가, 배우 |
활동 | 1934년 ~ 1976년 |
배우자 |
몰리 데이 대처(1932년~1963년 사별) 바바라 로든(1967년~1980년 사별) 프랜시스 러지(1982년 결혼) |
자녀 |
3남 2녀 아들 니콜라스 카잔(1945년생) |
손자 |
손녀
조이 카잔(1983년생) 손녀 마야 카잔(1986년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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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영화감독.할리우드의 황금기였던 50년대를 대표하는 명감독이자, 연극 역사에 남는 위대한 연출가라는 찬사를 받는 인물. 더불어 현대 연기방법론의 대세인 메소드 연기를 할리우드에 도입한 선구자로도 꼽힌다.
1909년 9월 튀르키예 이스탄불의 그리스계 집안에서 태어났다. 카잔의 가족은 그가 4살이었던 1913년에 미국으로 이민했으며, 1926년 매사추세츠의 윌리엄스 대학교에 입학했다. 대학 졸업 후 브로드웨이에서 연극을 연출하다가 할리우드로 뛰어들어 영화감독으로 활동했다.[2]
1940년대 후반 리 스트라스버그와 함께 액터스 스튜디오를 설립하였다. 이 시기 메소드 연기법을 처음으로 도입하고 신예 할리우드 스타들을 대거 발굴하기 시작했다.
카잔의 특기는 등장인물의 내면과 심리 묘사에 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블랑쉬 드부아의 무너진 내면을 깨진 거울로, 워터프론트에서 테리 말로이의 내면 변화를 장갑으로, 에덴의 동쪽에서 칼의 불안한 내면을 흔들리는 촛불로 표현하는 등 은유적 장면이 유명하다.
2. 동료 밀고 사건과 아카데미 공로상 수상
그러나 이후의 잘못된 선택 하나 때문에 그의 명예는 나락으로 떨어져 버리게 된다.1950년대 미국은 레드 컴플렉스[3]로 인한 매카시즘 광풍이 거세게 불어닥치는 중이었고, 이는 할리우드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그런 와중에 카잔은 1952년 4월, 미국 의회 반미활동조사위원회[4]의 청문회에 2번 소환되었고, 첫 번째 소환 당시엔 자신의 공산당 활동만 증언하며 다른 당원들 이름 대는 것을 거부했다. 그러자 HUAC는 엘리아 카잔을 다시 소환해 다른 당원들 이름 대기를 강요했고, 두 번째 증언에서 자신이 과거 공산당원이었음을 고백했고 옛 동료들의 공산당 활동을 밀고했다. # 다만 이는 HUAC의 명백한 완장질로 청문회에 소환 명령을 받은 사람이 참석해 자신의 혐의를 순순히 인정했음에도 답변이 자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다시 출석하란 명령을 내릴 권리 따윈 없다. 1950년~1954년 사이 HUAC의 힘이 막강했기에 가능했던 월권행위다.
사실 당시 미국 사회가 워낙 심각하게 우경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카잔 외에도 매카시즘을 공개적으로 지지한 영화인들은 제법 있었다. 존 웨인, 게리 쿠퍼, 월트 디즈니, 로널드 레이건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들은 원래부터 보수 성향이어서 매카시즘에도 휩쓸린 것이기 때문에 훗날의 결과론적인 비판을 제외하면 그 자체로 욕을 먹지는 않는다. 그러나 카잔은 자기도 공산당원이었으면서 동료들을 배반하고 자신만 살아남기 위해 밀고라는 비겁한 길을 택한 것이었기 때문에 경우가 전혀 달랐고, 때문에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5] 참고로 엘리아 카잔은 위증죄, 무고죄 등등의 타인에게 누명을 씌운 죄를 지은 적이 없다. 근데 한국에선 이상하게 이런 인식이 강하다.(...)
그가 밀고한 동료는 모두 8명[6]이었는데, 심지어 이들은 생판 남도 아니고 카잔 본인과 아주 가깝게 지냈던 사람들이었다. 엘리아 카잔 본인은 “이미 신문을 통해 이름이 다 알려진 사람들의 이름을 댔는데, 그래서 별일 없을 줄 알았는데…”란 말을 남겼다고. 출처 이 중에는 훗날 영화배우가 되는 숀 펜의 아버지인 배우 겸 영화 감독 리오 펜(Leo Penn)도 엮여 있었고,[7] 심지어 액터스 스튜디오를 믿고 맡길 정도로 가까웠던 친우인 리 스트라스버그의 아내 폴라 스트라스버그까지 포함되어 있었다.[8] 이 과정에서 카잔은 가난한 조합원들의 월급을 활동비라는 명목으로 잔인하게 뜯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환멸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동정심 따위는 느끼지 않는다고 변명했다.[9]
다만 엘리아 카잔은 1952년 4월, 청문회 소환되어 강제로 이름 대기를 강요받을 당시 폴라 스트라스버그가 이미 1935년 리 스트라스버그와 결혼해서 슬하에 1남 1녀를 두고 있었음에도 카잔은 청문회에서 1934년 공산당원으로서 그녀를 만났을 당시에 그녀의 처녀 적 이름인 폴라 밀러(Paula Miller)로 그녀의 이름을 댔을 정도로 고심 끝에 마지못해 증언한 정황도 있다.
이 일련의 과정은 상당히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다. 액터스 스튜디오는 브로드웨이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배우 양성소였고, 따라서 출신 배우들 상당수가 할리우드에도 진출해 스타로서 자리잡아 가고 있던 상황이었는데 하필 그 액터스 스튜디오가 주력으로 가르쳤던 메소드 연기법의 창시자인 콘스탄틴 스타니슬랍스키가 러시아인(당시 구소련인)이라는 것이 트집잡혀 그 설립자인 카잔이 불려가게 된 것이다. 당시에는 굳이 액터스 스튜디오 출신이 아니더라도 스타니슬랍스키의 연기법을 공부하기 위해 러시아 유학을 하거나 러시아 예술인들과 교류하며 친분을 쌓은 연극인들이 많았는데, 문제는 이들 중에서 엘리아 카잔이 단순히 대중적으로 가장 유명하다는 이유만으로 대표로서 증언을 강요받게 되었다는 것이다.[10] 더구나 엘리아 카잔은 액터스 스튜디오의 설립자일 뿐, 모든 권한은 동업자인 리 스트라스버그에게 있었다. 당연히 영화계 인사 중에서 카잔이 인지도와 영향력이 컸다는 것일 뿐, 그가 무슨 미국 영화계를 대표할 자격이 있는 것은 전혀 아니었다.
심지어 이 청문회 때는 액터스 스튜디오와 라이벌 관계였던 스텔라 애들러의 '스텔라 애들러 연기 스튜디오'와도[11] 한통속으로 엮여서 두들겨 맞는 촌극까지 벌어졌다. 애초에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도 전이었던 1938년에 죽은 양반인 스타니슬랍스키를 한참 훗날인 1952년에 와서 꼬투리잡았다는 것은 그냥 영화계를 들쑤시기 위한 핑계였을 뿐이고, 재수없게 카잔이 거기에 딱 코가 꿰인 것이다. 사실은 카잔도 매카시즘의 피해자였던 셈.
그렇다고 당시 반미활동조사위원회의 영화계 숙청이 객관적이고 일관성 있었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매카시즘이 한창 창궐하던 시절에도 세계 3대 영화제 수상작인 유럽 예술영화, 특히 사회주의 색채가 진한 프랑스, 이탈리아 영화들은 당시 미국에서도 잘만 개봉됐다. 그리고 할리우드 영화인들이 직접 유럽으로 건너가서 이들과 함께 협업하거나, 반대로 유럽 예술영화인들이 할리우드에서 영화를 제작한 사례도 많다. 그런데 이들은 내버려두고 할리우드에서 오랫동안 활동한 영국인 찰리 채플린은 해외추방 및 입국금지를 때리는 등 도무지 원칙도 뭣도 찾아볼 수 없는 엉망진창 행정이었다. 카잔 본인 입장에서도 자신은 저런 사례들 중에 하나도 해당되지 않는데 괜히 트집잡혀서 반미활동조사위원회와 얽히게 되었으니 정말 억울했을 것이다.
어쨌든 이 밀고로 인해 그는 해외로 추방당하거나[12], 미국 감독 조합에서 탈퇴당하거나, 혹은 자신의 작품들을 상영 금지당해 로스트 미디어가 되는 등의 추가적인 핍박을 받지 않을 수 있었고, 더불어 액터스 스튜디오도 오롯이 지켜낼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액터스 스튜디오는 폴 뉴먼, 마릴린 먼로, 제임스 딘, 워렌 비티[13], 더스틴 호프먼, 제인 폰다, 알 파치노, 로버트 드 니로[14] 등의 영화사에서 손꼽히는 명배우들을 배출한 연기파 신인의 요람으로 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카잔이 비난을 받는 이유는 단순히 밀고를 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 매카시즘의 광풍이 지나갈 때까지 꿋꿋이 참고 견뎌내거나, 최소한 한동안 할리우드를 떠나 있는 등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은 영화인들도 많았음에도 카잔은 '거짓 증언을 하면서까지 타협을 했다'는 점 때문에 순수한 피해자가 될 수 없게 된 것이다. 애당초 카잔이 공산당에 가입하고 탈퇴한 시기는 1934년~1936년 사이, 즉 1년 6개월이라는 짧은 시간뿐이어서 그가 공산당의 자세한 내막을 알 수 있는 입장도 아니었고, 공산당에서도 잠깐 발이나 담갔다가 탈퇴한 카잔을 동지라고 인정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가 비난을 받는 이유는 '배신자'라기보다는 '기회주의자'였기 때문이라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결정적으로 상술되었듯 남도 아니고 친밀한 관계였던 동료들을 자기 살자고 같이 엮은 것이 업보가 되어, 자신의 편이 되어 줄 수 있었던 영화계에서조차 인망을 잃어버렸다.
다만 카잔은 이후 단 한 번도 공식적으로 매카시즘이나 미국 공화당 지지 선언을 하지 않았고, 이와 관련된 프로파간다 영화를 찍은 적도 없다. 어찌됐든 본인도 매카시즘의 피해자로서 고초를 겪은 입장이므로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또한 이 사건을 기점으로 카잔의 작풍도 많이 바뀌었다. 카잔의 대표작이자 할리우드 최초로 반유대주의를 다룬 영화로 꼽히는 < 신사협정>이나, 에밀리아노 사파타의 생애를 영화화한 <혁명아 자파타>[15] 등 정치적인 소재를 사용한 작품이 많았다. 하지만 이후의 영화부터는 그러한 소재의 파격성이 많이 줄어드는 경향을 보인다.
이 사건으로 인해 카잔의 명예는 완전히 땅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심지어 먼 훗날 손녀인 조이 카잔조차 할아버지가 한 짓을 좋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인터뷰를 남겼을 정도다. #[16]
이 사건 이후 카잔은 < 워터프론트>(1954)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거머쥐게 된다. 이는 < 신사협정>에 이은 두 번째 수상이었다. 하지만 매카시즘 열풍이 끝난 뒤 서서히 회복을 시작하고 있었던 할리우드는 그에게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찰리 채플린, 존 휴스턴, 줄스 다신, 조셉 로지[17], 존 가필드, 스털링 헤이든 등 재능 있는 인재들이 무고로 인해 미국을 떠나거나 영화계를 떠났고, 심지어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경우도 있었다. 설령 이들이 실제 공산당원이었다 하더라도 이런 대우가 부당한 인권침해인 것은 마찬가지이다. 다만 엘리아 카잔은 이들을 밀고한 적이 없다. 이때 입은 인적 자원의 피해로 1950년대의 미국 영화계는 심각한 침체기를 겪었으며, 당시 막 가정에 보급되기 시작했던 TV로 인해 입지가 더욱 좁아지게 되었다. 이후 할리우드는 1960년대 아메리칸 뉴웨이브 시네마가 나오고 나서야 겨우 다시금 활기를 찾게 된다. 이처럼 매카시즘으로 가장 심각한 피해를 입었던 업계 중 하나인 할리우드에서는 그 선봉에 섰던 엘리아 카잔이 결코 좋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 미국에서 밀고자가 어떤 취급을 받는지를 생각하면 더더욱 그러하다. 덕분에 양심과 고발을 주제로 다룬 < 워터프론트>의 메세지조차 감독의 자기변명, 모순이라고 보는 시각이 많다.
1999년, 제71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그가 아카데미 공로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을 때 아카데미는 그 선정의 대가로 상당한 논란에 시달렸다. 시상자는 마틴 스코세이지, 로버트 드 니로. 이 공로상 시상을 추진했던 사람 중 한 명이 카잔이 감독한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 미치 역으로 출연했던 배우 칼 말든이다. 영상에서 엘리아 카잔 등장에 가장 먼저 기립 박수를 치는 백발노인이 바로 칼 말든이다. 당시 그는 아카데미 의장을 맡고 있었다. 다만 이날은 시상식 때 으레 쳐 주는 기립박수마저 절반도 쳐 주지 않았다. 에드 해리스, 닉 놀테 등은 냉담한 태도로 팔짱을 낀 채 앉아 있었으며.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짐 캐리 같은 이들은 무표정하게 앉아서 박수만 쳐 주었다.[18] 기립한 사람들조차도 미소 지으며 진심으로 축하하듯이 박수쳐 주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나마 메릴 스트립 정도가 밝은 미소를 지어 주는데, 스트립도 진보 성향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상당히 의외이긴 하다. 아무튼 훈훈함으로 가득차 있어야 할 시상식장은 냉랭함과 어색함으로 가득하였다. 다만 매카시즘 당시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할리우드를 떠나있다가 돌아온 감독, 작가, 배우 등등의 영화인들과 함께 작품을 해봤거나, 이런 영화인들의 AFI 평생 공로상 시상식 같은 곳에서 개인적 친분으로 참석해 경의를 표한 적이 있는 영화인이라면 저 상황에서 현실과 타협해 무사히 할리우드 영화인으로서의 삶을 이어나간 엘리아 카잔에게 우레 같은 기립박수 쳐주면 상당히 앞뒤가 이상해지긴 한다.(...) 그리고 시상식장 밖에서는 그의 수상을 강력히 규탄하는 시위가 있었다.
미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Arthur M. Schlesinger Jr.는 시상식의 해당 장면을 본 뒤 "매카시즘 당시 침묵, 외면으로 일관한 자들, 그 시절을 겪어 보지 못한 자들이 왜 엘리아 카잔에게만 십자가를 지우려 하는가?"라고 거세게 비판했다. #
또 엘리아 카잔과 오랜 친구였으나, 매카시즘 당시 현실과 타협하며 청문회에 출석한 엘리아 카잔에게 실망하여 카잔과 절교를 선언한 카잔의 오랜 친구 아서 밀러는 끝까지 매카시즘에 저항했고, 갖은 고초를 직접 겪었으나 엘리아 카잔의 아카데미 공로상 수상을 지지하며 당시 시상식에서 카잔을 냉대하던 이들을 “an orgy of self-righteous frenzy.”(독선적인 광란의 난교)라고 비판했다. # 참고로 엘리아 카잔은 아서 밀러에게 몹쓸 짓을 정말 많이 했었다.(...) 아서 밀러에게 마릴린 먼로를 소개해 준 엘리아 카잔이었지만, 카잔과 먼로는 한때 불륜 관계(...)였었다. 당시 카잔은 유부남에 자식도 있었다. 또 젊은 시절부터 함께했던 카잔과 밀러이기에 카잔이 밀고한 8명 중 상당수는 아서 밀러의 친구들이기도 했다.(...) 즉, 엘리아 카잔은 공적으로, 사적으로 아서 밀러에게 직접적으로 피해를 준 사람이다. 아서 밀러는 이 모든 사실들을 알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아 카잔의 수상을 지지해 준 것이다. 다만 이때 한번 엘리아 카잔의 수상을 지지해 준 것일 뿐, 이후 이 두 사람 사이엔 어떤 만남도 일절 없었다. 간혹 엘리아 카잔이 밀고한 8명 중 아서 밀러가 있었다는 잘못된 정보가 있다. 엘리아 카잔은 상술된 8명 외에 그 누구의 이름도 대지 않았다. 애당초 엘리아 카잔이 청문회에 참석한 1952년 4월과 아서 밀러가 청문회에 참석한 1956년 6월은 시간 상 맞지가 않다. 다만 엘리아 카잔이 밀고한 8명 역시 청문회에 소환되었고, 이들 역시 다른 누군가의 이름을 댔다. 이런 식으로 줄줄이 사탕식으로 엮여 아서 밀러까지 갔을 것이란 분석은 있다. 청문회는 비공개가 원칙이지만, 엘리아 카잔의 경우 그를 사랑하고 지지하는 사람들의 취재와 조사, 그들의 요구로 공개된 문서 등을 통해 어느 정도 전말이 드러나 있는 상태다. 엘리아 카잔은 아서 밀러를 밀고한 적이 없다.
간혹 엘리아 카잔을 매카시즘의 부역자로 치부하는 견해도 있다. # 이는 틀린 말이다. 부역이란 '국가에 반역이 되는 일에 동조하거나 가담함'을 의미하거나 '전쟁 중의 점령당한 지역에서 점령군에 협조하거나 식민지에서 지배 국가에 협조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일단 매카시즘은 전쟁이 아니다. 또 매카시즘 당시엔 매카시즘에 동참하지 않은 이들이 국가에 반역자로 규정되던 시절이다. '엘리아 카잔이 매카시즘의 부역자'란 견해는 아예 전제 자체가 틀린 견해다.
사실 이 모든 일의 원흉 조지프 매카시가 1957년 비겁하게 죽어서 내빼버려 엘리아 카잔이 억울하게 독박 쓴 것이다. 애초에 엘리아 카잔은 경제 대공황으로 자본주의에 회의를 느껴 미국 공산당에 가입했던 당시 수많은 지식인들 중 한 명으로 엘리아 카잔은 이들 모두를 대변해 주는 사람이 아니다.
또 배우 스털링 헤이든이 배신자로 낙인찍힌 이유는 청문회 강제 소환 당시 스털링 헤이든은 미국 공산당 소속 당원이었기 때문이다. # 헤이든에겐 자기 혼자서만 살아남으려는 추악한 속셈으로 빨갱이 동료들을 밀고해 몰락시켰던 적이 있다고 말할 순 있어도 엘리아 카잔이 공산당을 탈퇴한 1936년은 청문회가 열린 1952년 보다 무려 16년 전의 일이다. 엘리아 카잔의 사례와 동일선상으로 놓고 비교하기엔 무리가 있다.
스콜세지는 유명한 뉴욕 토박이이며, 따라서 리버럴 성향이다. 다만 칼 말든의 주장에 따르면 당시 엘리아 카잔의 공로상 시상을 부탁하자 스콜세지는 기뻐하며 이를 수락했다고 한다. 물론 진짜 속내가 어땠을지는 스콜세지 본인만 알겠지만.[19]
이후로도 카잔은 공식 석상에서 자신의 치부가 거론될 때마다 자신이 1년 6개월 가량 공산당 소속이었고, 함께 일했던 동료 8명을 고발했다는 대답만을 기계적으로 반복했다. 그러나 말만 그랬을 뿐 이 8명에게 그 어떠한 사죄도, 반성하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의 선택은 정의로웠다고 생각한다는 발언을 하는 등 정당화하기에만 급급한 모습을 보였기에 그 대가로 카잔은 죽을 때까지 평생 영화계에서 왕따를 당해야 했다. 특히 상술되었듯 끝까지 매카시즘에 저항하며 할리우드를 떠난 지조있는 영화인들과 비교되기에 더욱더.
이로 인해 결국 그는 레니 리펜슈탈, 로만 폴란스키와 함께 재능과는 별개로 한 인간으로서는 존경할 수 없는 영화인이라는 불명예를 얻게 되었다.[20]
다만 영화계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피해를 덜 입은 브로드웨이에서는 카잔에 대한 악감정이 비교적 적은 편이며, 현대까지도 여전히 영향력이 지대한 인물로 손꼽힌다.[21]
3. 주요 연출작 일람
||<tablewidth=100%><tablebordercolor=#181818><tablebgcolor=#181818>
엘리아 카잔 감독 장편 연출 작품
||- 1951년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 1954년 워터프론트
- 1955년 에덴의 동쪽
- 1961년 초원의 빛
4. 여담
- 어디서부터 시작된 루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카잔을 유대인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과거에는 카잔을 유대인으로 잘못 소개한 기사나 책도 종종 있었다. 상술되었듯 카잔은 유대계와 무관한 그리스계 튀르키예인 혈통이다.
- 아버지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본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에덴의 동쪽의 사이 나쁜 부자에 빗대어 그 관계를 표현하기도 했다.
- 대부 촬영 당시 파라마운트 스튜디오가 감독인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를 해고할 경우를 대비하여 엘리아 카잔을 대부의 백업 감독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물론 코폴라가 해고되는 일은 없었다.
[1]
튀르키예식 표기는 İlyas Kazancıoğlu. 그리스식 이름으로는 일리아스 카잔조글루(Ηλίας Καζαντζόγλου).
[2]
아서 밀러,
테네시 윌리엄스 등 당대를 대표하는 작가들이 집필한 연극들을 연출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와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 등이 대표작.
[3]
미국 현지에서는 Red Scare(적색 공포)란 용어를 쓴다. 레드 콤플렉스는
한국식 영어다.
[4]
HUAC 또는 HCUA라고도 불린다. 정식 명칭은 House Un-American Activities Committee이다. 1938년 5월 26일에 창립되었고, 매카시즘이 한창 난리를 치던 1950년~1954년까지가 전성기였다. 1975년 1월 14일 공식 해체되었다.
#
[5]
카잔이 해당 청문회에 회부되기 직전에 그의 작품 <
신사협정>에서 주연 배우를 맡았던
존 가필드와
앤 리비어 등이 매카시즘 청문회에 찍혀 배우 경력이 끝장났는데, 이 때문에 카잔이 지레 겁을 먹고 밀고한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6]
Clifford Odets, J. Edward Bromberg, Lewis Leverett, Morris Carnovsky, Phoebe Brand, Tony Kraber, Ted Wellman, Paula Strasberg
[7]
숀 펜의 회상에 따르면 1976년에 엘리야 카잔이
말리부에서 영화 '마지막 거물'을 촬영할 때 마침 촬영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 리오 펜의 자택이 있어서 우연히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카잔이 리오 펜에게 인사를 건넸지만 리오 펜은 대꾸도 않고 아예 그를 못 본 척 무시하고 지나쳐 버렸다고 한다. 당시 어린아이였던 숀 펜은 이를 두고 "아버지는 늘 따뜻하고 예의바른 분(very warm, polite person)이셨는데 충격이었다"고 회고했다. 이 때문인지 훗날 카잔이 아카데미 공로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을 때 비판 성명을 낸 배우 중에 숀 펜도 포함되어 있었다.
#
[8]
리 스트라스버그 본인을 직접 밀고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어쨌든 자기 아내를 밀고하는 짓을 당했음에도 스트라스버그와 카잔의 동업은 스트라스버그가 사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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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월급 강탈 설은 어디까지나 카잔 본인의 주장일 뿐 증거는 전혀 없다. 당시는 물론이고 현재까지도 교차검증된 사실이 없어서 카잔이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거짓 증언이라는 논란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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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카잔은 스타니슬랍스키의 메소드 연기를 받아들인 것 이외에는 러시아와 별다른 인연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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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애들러와 카잔은 동업자였으나, 후에 의견 차이로 갈등을 겪고 갈라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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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례로 엘리아 카잔이 <
신사협정>으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한 바로 다음 해에 같은 상을 받은
존 휴스턴은 매카시즘에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여 추방을 당했고, 멕시코로 건너가서 활동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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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렌 비티는 상술된 스텔라 애들러 연기 스튜디오 출신이지만 카잔의 영화 '초원의 빛'으로 스타덤에 올랐고, 미국 본토에서도 카잔이 발굴한 엘리아 카잔 사단 배우로 분류된다. 카잔은 한창 인기가 하늘을 찔렀던 워렌 비티에게 "너 무슨 스타병 걸린 것처럼 굴지 마라"라고 꾸짖을 정도로 허물없는 사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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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 니로 역시 스텔라 애들러 연기 스튜디오에서 처음 연기를 배웠고, 이후에 '액터스 스튜디오'로 옮긴 케이스이므로 100% '액터스 스튜디오' 출신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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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카잔이 청문회에 회부되기 직전에 완성되었음은 물론 제5회 칸 영화제 출품도 확정되었고, 당시 이미 뉴욕이나 마이애미 같은 대도시에선 상영 중이었다. 50년대는 지금처럼 동시 개봉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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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한편으로 조이 카잔은
예일 대학교에 진학한 이유가 할아버지의 모교이기 때문이라고 발언한 적도 있다. 예술가로서의 할아버지와 인간으로서의 할아버지를 구분짓고 평가하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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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다신과 로지 두 사람은 영원히 미국 영화계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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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짐 캐리는 열성적인 민주당 지지자이자 진보주의자이기에 더욱 못마땅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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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콜세지는 사비를 들여 카잔의 영화들을 디지털 복원시키기도 했다. 카잔의 인간성과는 별개로 그의 작품들은 진심으로 아끼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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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폴란스키도 영화
피아니스트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여받았다. 단 아동 성범죄로 인해 미국에 입국하면 체포되기 때문에 대리수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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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례로 영화
결혼 이야기에서는 젊은 시절에 엘리아 카잔과 같이 작업했던 경험을 자랑스럽게 회고하는 늙은 연극배우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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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유방암으로 사망했다. 엘리아 카잔 사이에 2남을, 전 남편 사이에 1남을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