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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4a1a1><colcolor=#fff,#000> 이름 |
노마 시어러 Norma Shear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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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파일: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영화 심볼.jpg 영화 | ||
입성날짜 | 1960년 2월 8일 | ||
위치 | 6636 Hollywood Blvd. | }}}}}}}}} |
<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노마 시어러 Norma Shear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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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이디스 노머 쉬어러 Edith Norma Shearer |
출생 | 1902년 8월 10일 |
캐나다 자치령 몬트리올 | |
사망 | 1983년 6월 12일 (향년 81세) |
미국 우들런드 힐즈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캐나다| ]][[틀:국기| ]][[틀:국기| ]] |
신체 | 155cm |
직업 | 배우 |
가족 |
앤드루 시어러(아버지) 더글러스 시어러(오빠) 애소울 시어러(언니) |
배우자 |
어빙 솔버그(1927 ~ 1936년 사별) 마틴 애루제이(1942 ~ 1983년 사별) |
자녀 | 슬하 2명 |
활동 기간 | 1919년 ~ 194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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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과 캐나다의 배우.무성영화 시기부터 유성영화 시기를 거치며 강하고 독립적이며, 때때로 반항적인 여성 역을 맡아 큰 인기를 끈 배우다. 그녀의 경력은 훗날 할리우드 주요 여배우들의 활동에 있어 밑바탕이 되었다.
2. 활동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태어난 노마 시어러는 어릴 적에 상당히 부유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을 거치고 부친의 투자 실패로 가세가 기울면서 그녀의 인생도 바뀌었다.노마 시어러의 어머니는 딸들이 연예계에서 활동한다면 무너진 가세를 일으킬 수 있을 것이라 여겼고,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자녀들이 모두 뉴욕의 브로드웨이로 오게되었다. 처음에는 너무 짧고 통통한 다리와 선천적인 사시로 인해 브로드웨이의 유명한 사업가인 플로렌스 지그펠트로부터 박대를 당했지만, 몇몇 영화에서 단역을 맡으며 경력을 쌓아나갔다.
1920년, 노마 시어러는 미래의 남편이자 MGM 부사장이 되는 영화 제작자 어빙 솔버그가 보는 앞에서 영화 주연으로 활약했다. 여기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그녀는 1923년 MGM과 5년 계약을 맺었고, 1927년엔 어빙 솔버그와 결혼하며 영화계에서 입지를 다지기 시작했다.
1929년, <메리 듀건의 재판(The Trial of Mary Dugan)>을 통해 유성영화 데뷔를 성공적으로 마친 시어러는 이후 MGM의 간판 여배우로서 활동하며 "MGM의 여왕(The Queen of MGM)", "MGM의 영부인(The First Lady of MGM)"으로 불리게 된다.
1930년 영화 <이혼녀>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였으며 1938년에는 <마리 앙투아네트>로 베네치아 영화제 볼피컵 여우주연상을 수상하였다.
금슬이 좋았던 남편 어빙 솔버그가 죽은 뒤 크게 상심해 영화계를 바로 은퇴하려 했으나 MGM 측에서 영화 6편만 더 찍자고 말하며 만류하여 은퇴가 미뤄졌다. 이 시기에 여자들 같은 작품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1942년, <Her Cardboard Lover>라는 작품을 끝으로 영화계에서 은퇴했다. 이후 베티 데이비스가 <Old Acquaintance>(1943) 출연을 직접 부탁하는 등 다시 영화 현장으로 불러들이려는 시도가 많이 있었으나 전부 거절했다.
은퇴한 해에 부유한 스키강사와 재혼하였으며, 사망할 때까지 대외활동을 하지 않았다.
3. 출연작
<rowcolor=#ffffff> 연도 | 작품 | 배역 |
1924 | 뺨 맞은 남자 (He Who Gets Slapped) | 콘수엘로 |
1925 | 밤의 여인(Lady of the Night) | 말리 헬머/플로런스 배닝 |
1928 | A Lady of Chance | 달리 "에인절 페이스" 모건 크랜들 |
1929 | The Trial of Mary Dugan | 메어리 듀건/모우너 트리 |
The Last of Mrs. Cheyney | ||
Their Own Desire | 루시어 "랠리" 말렛 | |
1930 | 이혼녀(The Divorcee) | 제리 마튼 |
Let Us Be Gay | 캐서린 "키티" 브라운 | |
1931 | Strangers May Kiss | 리즈베스 |
자유의 혼(A Free Soul) | 잰 애쉬 | |
1932 | Strange Interlude | 니너 리즈 |
1934 | Riptide | 레이디 메어리 렉스퍼드 |
The Barretts of Wimpole Street | 일리저버스 배릿 | |
1936 | 로미오와 줄리엣(Romeo and Juliet) | 줄리엣 |
1938 |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 | 마리 앙투아네트 |
1939 | 여자들(The Women) | 메어리 헤인즈 |
1942 | We Were Dancing | |
Her Cardboard Lover | 칸수엘로 크로이든 |
4. 사망
1983년 기관지 폐렴으로 사망하였다.5. 여담
- 한때 하워드 혹스가 형부였다. 혹스가 28-40년에 언니 애소울 시어러의 남편이었기 때문이다. 언니 애소울 시어러는 혹스와의 사이에서 두 아이를 낳았다.
- 오빠 더글러스 시어러는 아카데미 음향상을 다섯 차례 수상했고 열 차례 후보 지명됐던 저명한 사운드 디자이너다. 아카데미 시각효과상 부문에서도 두 차례 수상했으며 특수음향효과 부문에도 네 차례 후보 지명됐다.
- 삼촌 크레즈월 시어러도 이름이 알려진 동물학자다.
- 안네 프랑크가 은신처에 붙여둔 영화배우 사진들 중 하나에 노마 시어러의 사진이 있었다.
- 은퇴한 뒤에 스키 리조트에서 접수원의 딸 사진을 보고 MGM에 추천했는데, 그 여자가 바로 자넷 리였다.
- 조안 크로포드와 사이가 썩 좋지 않았다.
- 배우로 활동하던 시절, 외모에 신경쓰는 걸 넘어 엄청 투자하는 편이었다. 사시 교정을 위해 안과에 수많은 돈을 쏟아부었고, 수영 교습과 마사지를 집중적으로 받으며 몸매를 유지했다.
- 영화를 찍을 때도 항상 어빙 솔버그와 함께 맞춘 결혼반지를 꼈고, 화면에 반지가 잡히지 말아야 할 때는 살구색 테이프로 감아서 가렸다. 그녀는 어빙 솔버그에게 헌신적이었는데, 평소에 건강이 좋지 않은 어빙 솔버그를 정성스럽게 간호했고 자녀 생각도 없었으나 남편이 강력히 희망하자 두 명이나 가졌다. 게다가 유대인인 어빙 솔버그와 결혼하기 위해 유대교로 개종하기까지 했다.
-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 역을 제의받은 적이 있는데, 이를 거절하면서 "스칼렛 오하라 역은 매력적이긴 하지만, 그것보다 레트 버틀러[1] 역할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 은퇴하고 한참 지난 뒤, 선셋 대로의 노마 데스몬드 역할도 제의받았다. 노마 데스몬드 자체가 무성영화 시기 스타였다가 유성영화가 개막한 후 몰락한 배우라는 설정이라 나름 노마 시어러의 처지랑 비슷했지만 그녀는 이것도 거절했다.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를 지지한 열성적인 공화당원이었다.
-
여자들 촬영 당시 로잘린드 러셀의 이름을 포스터 상단에 넣지 말라고 했다.[2] 러셀은 화가 나서 병가를 내고 출근하지 않았고, 노마 시어러가 그녀의 이름을 포스터 상단에 넣겠다고 약속한 뒤에야 돌아왔다.
사실 노마 시어러는 <여자들> 촬영 당시 현장에서 이런저런 간섭을 많이 했다. 애초에 당대의 유명 감독이 그녀의 형부였고, 과부가 되긴 했지만 불과 3년 전까지 MGM 최고위층 영화 제작자였던 어빙 솔버그의 아내였기 때문에 업계에서 영향력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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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노마 시어러의 <이혼녀> 출연은 남편 어빙 솔버그를 포함해 모두가 반대했다. 이전까지 그녀는 사회적으로 '올바른' 여성 역할만 맡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고 주인공 배역을 따내기 위해 란제리만 걸친 채 도발적인 포즈를 취하는 사진을 어빙 솔버그에게 보냈다. 어빙 솔버그는
아내의 섹시 화보에 눈이 돌아가기라도 한 건지이혼녀 출연을 승낙했고 그녀는 오스카를 거머쥐었다. 원래 <이혼녀>에 출연할 예정이었던 조안 크로포드는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뭘 기대해요? 그녀는 자기 상사랑 같이
자는걸요
- 데이비드 니븐에 따르면 하루는 캐롤 롬바드가 베벌리 윌셔 호텔(Beverly Wilshire Hotel)에서 흰색 복장만 허용하는 파티를 열었는데, 유독 노마 시어러가 이를 무시하고 새빨간 드레스를 입고 왔다고 한다. 이를 보고 화가 난 롬바드는 파티 참석자들이 다 들을 수 있을 정도의 큰 소리로 "노마는 X나 자기가 뭐 포주인줄 아나봐?"라고 외쳤다고. 이 당시 시어러는 "MGM의 여왕"이라고 불리고 있었다.[3]
- 어빙 솔버그와 사별한 이후 제임스 스튜어트, 조지 레프트[4] 같은 남자 배우들과 사귄적이 있다. 조지 레프트는 노마 시어러와 결혼하고 싶다고 말한 적도 있으나 그의 아내가 이혼을 반대했고 MGM 사장 루이 B. 메이어도 반대해 무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