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642년)
1. 개요
신라의 진골 귀족. 김춘추의 사위이자 김법민의 매제였다.2. 생애
백제와 신라를 잇는 요충지에 있는 대야성[1]의 도독으로 부임했는데, 색욕을 자제하지 못하고 부하 검일의 부인을 빼앗아 원한을 샀다.[2] 부하의 마누라를 건드리다가 털린 것이 마치 삼국지의 인물인 여포의 행적과 비슷하다. 642년에 백제의 장군 윤충이 대야성에 쳐들어와서 김품석은 수성을 준비했는데 화가 치민 검일이 창고에 불을 지르고 백제군에 항복해 버리면서 신라군의 사기가 크게 떨어졌고, 결국 대야성은 함락당하고 김품석은 아내 고타소를 죽이고 자살했다. 이 때문에 김춘추와 김법민( 문무왕), 김유신, 선덕여왕은 고타소의 죽음에 대해 백제에 깊은 원한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3] 시신은 나중에 김유신이 붙잡은 8명의 백제 장수와 교환해서 수습했다.백제에 투항한 모척과 검일은 백제에서 머물면서 백제와 고구려의 신라 공격을 도왔고, 훗날 백제가 멸망하고 사비성이 함락될 때 붙잡혀 처형당했고, 태자 김법민( 문무왕)은 붙잡은 백제 왕자 부여융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대야성의 원수를 갚았음을 천명했다.[4] 단 원문에서 김품석을 애도하는 말은 없으며, 오히려 김법민의 입장에서 김품석은 개짓거리해서 대야성 말아먹은 주제에 여동생을 죽이기까지 한 천하의 개쌍놈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3. 평가
가히 한국사 최악의 낙하산 인사라고 부를 만한 인물.[5] 요충지인 대야성을 담당해야 하는 장수의 중요한 임무를 망각하고 색욕에 미쳐 부하들 부인들을 욕보이는 행위로 본인 목숨과 부인 고타소를 죽음에 이르게하고 요충지 대야성을 잃어버려 자국을 위기에 몰아넣었으니 삼국사기나 여러 역사서들에서도 하나같이 악평 일색이며, 당연히 오늘날에도 평이 상당히 나쁘다. 예나 지금이나 오히려 부인을 빼앗긴 복수심에 나라를 배신한 모척과 검일 둘을 두둔하는 의견이 대세다. 매국노들을 두둔해줄 정도로 그 원인 제공을 한 김품석이 피도 눈물도 없는 희대의 쓰레기라는 것.[6]특히 백제군이 쳐들어오자 천혜의 요새 대야성과 정예 부대를 거느리고 있었음에도 윤충의 회유에 넘어가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바로 항복하여 목숨이나 구걸하는 그의 째째한 최후가 끝까지 싸우다가 전사한 죽죽과 비교된다. 그야말로 실제 역사에 일어난 현실판 막장 드라마의 주인공 격 되는 인물. 신라 왕실에서 김품석이 사고 친 것을 알았으면 김품석도 김유신의 아들 김원술과 똑같은 꼴이 났을 것이다. 김원술은 그래도 당대인들조차 동정할 정도로 그럴 만한 이유라도 있었지, 김품석은 대야성이 함락당한 이유부터 가관인 데다 대야성이 함락당했다는 이유로 김춘추의 어린 딸인 고타소를 죽이기까지 했으므로 만약 대야성 함락 때 죽지 않고 살아남았으면 오히려 김춘추와 김법민의 손에 죽었을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특히 김법민은 고타소의 죽음에 심한 트라우마가 생겨 훗날 백제를 멸망시키고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융에게 대신 분풀이를 할 정도였는데, 김품석은 고타소를 죽인 장본인이므로 김법민은 절대로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다.
김품석 사후 김춘추가 직접 고구려, 왜국, 당나라를 왔다갔다하며 감옥에 갇히거나 죽을 고비를 넘기는 등 몸을 사리지 않는 활동을 한 것도 김품석의 수치스러운 전사에 정치적 타격을 입고 이를 직접 수습하기 위해서라는 해석이 있다. 김품석은 당연히 장인 김춘추와 본인 가문의 어른인 김유신 계파의 직계 핵심 인물이었을 테니 신라 정계에서 김춘추에게도 상당한 책임을 입혔다고 유추할 수 있다. 신라 정계는 김춘추가 즉위하기 전까지는 비담, 알천으로 대표되는 귀족 견제 세력이 존재했고 이들 계파와 경쟁하는 구도였기 때문이다.
여담으로, 고타소는 문무왕의 여동생이라서 참변을 당했을 당시 10대[7]였을 가능성이 높은데, 정황상 김품석 역시 젊은 나이에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 어찌 보면 인맥빨로 대야성 같은 요충지에 들어온 철부지 젊은이가 개념 없이 행동하다가 나라를 멸망 위기에 빠트리는 초대형 사고를 친 셈. 비슷하면서 스케일이 더 거대했던 인물로 낙하산도 아니고 아예 황제였다가 나라 자체를 말아먹은 후연의 말제이자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원수였던 모용희가 있다.[8]
4. 대중매체에서
하나의 일화만 기록에 남긴 인물이지만 임팩트 있어[9] 삼국통일전쟁기 드라마에는 곧잘 등장한다.- 2006년 SBS 드라마 < 연개소문>에서는 잠시 나오는 악역 포지션으로 등장하며 부인 김고타소는 당당한 여걸로 등장하는데 원래 역사대로면 김품석은 악역이 되는게 맞다. 김춘추는 사위인 김품석을 출세시키기 위해 대야성의 성주로 보냈으나 김품석은 성주로서의 권력을 남용하다가 결국 장군들과 부장들의 아내들을 술자리에 불러 희롱하거나 잠자리까지 한다. 결국 자신의 수하인 검일의 아내를 희롱하며 술자리까지 불러냈는데 검일은 이를 참지 못하고 백제군 윤충 부대에 협력해 나중에 대야성의 식량 창고와 무기고에 불을 지르고 백제군에게 성문을 열어 주었다. 극 중에서는 김품석이 뛰어난 인물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선덕여왕의 중재로 김춘추의 딸 김고타소와 혼인하였기에 아무리 못난 사위라도 앞길을 열어주기 위해 억지로 대야성이라는 중요한 관문의 성주로 보낸 것이 김춘추의 오판이었다. 결국 김고타소와 함께 윤충에게 그대로 목이 잘리고 목이 잘린 몸만 신라로 보내져서 김춘추가 딸과 사위의 복수에 이를 갈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 2011년 MBC 드라마 < 계백>에서는 배우 지일주가 연기했다. 윤충이 조기 퇴장하고 의자왕이 친정해 김품석과 김고타소를 직접 참한 뒤에 그들의 시신을 감옥 아래 묻어 죄인들이 밟고 지나가게 하는 것으로 나온다. 성왕의 목을 계단 밑에 묻었다는 기록에서 따온 것으로 보이는데 정말 그랬을 가능성은 없다.
- 2012년 KBS 드라마 < 대왕의 꿈>에서는 배우 김홍표가 연기했다. 최후까지 터무니없을 정도로 왜곡되어 미화되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김품석은 김춘추의 사위에 김유신 가문의 인물이였던만큼 김춘추-김유신 계열의 인재였을 가능성이 높은데 이 사람을 역사대로 표현하면 양대 주인공인 김춘추와 김유신의 역대급 실책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1]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2]
물론 당시 시대상 부인 이외의 여자들을 첩으로 들이거나 한다고 문제가 될 가능성은 적다. 그렇지만 그 여자들이 엄연히 유부녀, 그것도 자기 부하들의 부인들이라는 게 문제지. 게다가 그렇기 때문에 유혹이 아니라 강간을 했을 가능성이 크며 이에 반발이 커진 것.
[3]
무열왕은 이 소식을 듣고 마치 하루종일 정신나간 사람처럼 기둥에 선 채로 있었으며, 앞에 뭔가 지나가도 알아채지 못했다고 한다.
[4]
“예전에 너의 아빠가 억울하게 나의 여동생을 죽여 옥중에 파묻었던 일이 나로 하여금 20년 동안 마음이 고통스럽고 머리가 아프도록 하였더니, 오늘에야 너의 목숨이 내 손 안에 있게 되었구나."
[5]
조선의
원균도 최악의 인사지만, 그래도 경상우수사 전부터 부사, 수사를 역임했을 정도로 경력 정도는 있었고, 적어도 기록할 만큼의 눈에 띄는 공적은 없지만, 본인과 함께 임명된
이순신,
권율 등을 보면 그들처럼 뭔가 공적 정도는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며, 이순신과 함께 싸울 때는 혼자서 공적에 열을 올려 죄 없는 백성들을 죽일지언정 도망치거나 항복하거나 하는 치사한 짓거리들은 하지 않았다. 다만 그가 과거에 급제한 건 어느 정도 낙하산인데, 그의 부친 원준량(덜 알려진 인물이라서 그렇지 이 자도 아들 뺨치는 막장 인간이다.)에 의해 부정이 자행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급제하고 나서 바로 경상우수사가 된 건 아니니 김품석에 비하면 그래도 새 발의 피다. 그나마
김경징 정도가 비할 만하다.
[6]
애초에 매국노든 배신자든 개인적 사익을 위해 배신한 경우에는 어느 시대건 욕먹기 십상이지만
오자서,
틀락스칼텍 등 그래도 명백히 어쩔 수 없이 배신할 수밖에 없던 이유가 있다면 평가가 엇갈리거나 옹호받을 수 있다. 현대인들의 눈이라면 모를까 당시에 그 당사자들은 그런 선택을 강요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7]
문무왕은 626년 생이고, 삼국사기에서 문무왕이 부여융에게 침을 뱉으며 모욕할 때 고타소를 분명히 '나의 여동생(我妹)'이라고 칭하고 있다. 즉, 고타소는 아무리 나이를 많이 잡아도 16세를 넘기지 못한 셈인데, 아예 시집간 직후 이런 끔찍한 참변을 당했을 수도 있다.
[8]
허나 모용희도 능력이 아예 없는건 아니다. 황제가 되기 전, 하간공 시절에 당시 후연 황제인 모용성의 명령으로 고구려의 남소성과 신성을 쳐 함락시켰는데 이 때 당시 나이가 15세였고 이 일로 모용성은 웅장하고 영리하여 모용수(후연의 건국자)의 풍모가 있었다고 평했다. 당시 고구려 왕이 광개토대왕이며 광개토대왕 시기 고구려는 단 1번을 제외하면 이렇다할 패배가 없었는데 그 1번이 바로 모용희의 남소성과 신성의 함락이다.
[9]
내정자의 사위라서 요직에 앉은 낙하산 인사, 아내를 빼앗긴 것에 대한 복수라는 막장 스토리. 신라의 폐쇄적인 신분제인 골품제의 폐단, 부족한 리더십의 결과, 일방적으로 강요되는 애국심에 대한 회의를 전부 다룰 수 있는 매력적인 소재이다. 대중매체에서 부정적으로 다루어지는 경우가 적은
김춘추과
김유신의 핵폭탄급 실책이기에 기존의 인물상을 비틀어 버리는 소재이기도 하며
태종 무열왕과
문무왕의 인생에서도 중요한 사건이기 때문에 크게 다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