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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世記
1. 개요
고구려의 승려인 도현(道顯)이 편찬했다고 전해지는 역사서. 일본으로 건너간 후 당시 덴지 천황의 요청에 따라 다이안지(大安寺)라는 절에서 역사서를 편찬했는데 이것이 바로 일본세기다. 현존하진 않아 총 몇권인지, 어떤 내용을 담고있는 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일본서기에 각주로만 그 존재가 확인 되는데, 총 4번 인용되었다. 최소 일본서기가 편찬된 8세기 초반까지는 남아있었으나 이후에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책을 쓴 도현에 대해서는 별다른 기록이 남아있지 않으며 일본으로 건너가 고구려의 멸망을 예언하거나,[1] 일본 대신의 죽음을 기리는 등 일본의 고위 승려로 활동한 것으로 보여진다.
2. 인용문
2.1. 제명기
고구려 승려 도현(道顯)의 일본세기(日本世記)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7월에 운운.
춘추지(春秋智)가 대장군
소정방(蘇定方)의 도움을 얻어
백제를 협공하여 멸망시켰다. 혹은 백제는 자멸하였다. 왕(
의자왕)의 대부인이 요사스럽고 무도하여 국정을 좌우하고
현명하고 어진
신하를 주살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화를 초래하였다.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주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신라의
춘추지가 내신
개금(蓋金)에게 원하는 바를 얻지 못하자, 다시 당에 사신을 파견하여 자국에서 사용하던 의관을 버리고
천자에게 아첨하여 이웃 나라에 화를 미치게 함으로써 그 뜻을 이루었다.
『일본서기』 권26 사이메이 덴노 6년 7월 고구려의 하취문 등이 돌아가고 도화라인들도 돌아가기를 청함
『일본서기』 권26 사이메이 덴노 6년 7월 고구려의 하취문 등이 돌아가고 도화라인들도 돌아가기를 청함
여름 4월에 백제의
복신이 사신을 보내 표를 올려
왕자 규해(糺解)를 맞이하고 싶다고 요청하였다【승려 도현의 일본세기에서는 백제의 복신이 글을 올려 그 왕 규해를 일본에 청하였다고 적고 있다. 어떤 책(或本)에서는 4월에 천황이 아사쿠라노미야(朝倉宮)로 거처를 옮겼다고 한다.】.
『일본서기』 권26 사이메이 덴노 7년 4월 백제의 귀실복신이 왕자 규해의 송환을 요청함
『일본서기』 권26 사이메이 덴노 7년 4월 백제의 귀실복신이 왕자 규해의 송환을 요청함
2.2. 천지기
12월에
고구려가 “이번 12월에 고구려국(高麗國)은 몹시 추워
패강(浿江)이 얼었습니다.
당군(唐軍)은 운차(雲車), 충붕(衝輣)을 끌고 북과 징을 울리며 진격하였습니다. 고구려의 군사는 용감하고 웅장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다시 당(唐)의 두 보루를 빼앗았습니다. 다만 두 진터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것은 밤에 빼앗을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의 군사가 무릎을 껴안고 울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날카로움이 둔하여지고 힘이 빠져 빼앗을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보고하였다. 후회막급이라는 것이 이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승려 도현이 말하였다.
김춘추(金春秋)의 뜻은 본래 고구려를 치는 데 있었다. 그런데
먼저 백제를 쳤다. 근자에 백제가 침공당해서 몹시 괴로움을 당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렇게 한 것이다.】.
『일본서기』 권27 덴지 덴노 즉위기 고구려가 당을 물리쳤다고 알림
『일본서기』 권27 덴지 덴노 즉위기 고구려가 당을 물리쳤다고 알림
신유(16일)에 후지와라 내대신(藤原 內大臣)이 죽었다(薨)【일본세기(日本世記)에 말하였다. “내대신은 춘추 50에 사제에서 죽었다(薨). 산남으로 옮겨 빈소를 만들었다. 하늘은 어찌하여 억지로라도 이 노인을 남겨 놓지 않았는가? 아아, 슬프다. 비(碑)에 「춘추오십유육이훙(春秋五十有六而薨).」이라고 적고 있다.】.
『일본서기』 권27 덴지 덴노 8년 10월 등원내대신이 죽음
『일본서기』 권27 덴지 덴노 8년 10월 등원내대신이 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