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3 16:08:23

비담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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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0C0FF><colcolor=#222> 비담의 난
(毗曇—亂)
장소
시기 647년 1월 초 ~1월 17일
장소 명활성 · 월성 일대.
원인 조정에 불만을 품은 비담의 반란.
교전 세력 신라 파일:신라 상징 초승달(삼국사기 및 대구신문 기반 창작).svg 비담의 반란군
지휘관 조정수반
선덕여왕
진덕여왕
김춘추[1]
지휘부
김유신
반란 주동자
비담
염종
병력 불명 불명
피해 불명 비담 및 관련 주동자들의 구족을 멸함.
결과 왕군의 반란군 진압.
영향 신라의 중앙집권 강화.
김춘추 김유신의 정치적 입지 상승.

1. 개요2. 전개3. 여왕은 정말 나라를 다스릴 수 없었는가?4. 비담의 난에 대한 여러가지 견해들
4.1. 근왕파 vs 대귀족4.2. 대당 의존파 vs 자립파?4.3. 용수를 겨냥한 왕위 쟁탈전?
5. 의의6. 대중문화에서의 반영7. 같이보기

[clearfix]

1. 개요

여주불능선리(女主不能善理) : 여왕은 선정을 베풀 수 없다.
비담이 내세운 반란의 명분
신라 선덕여왕 때인 647년 1월 초 상대등 비담 염종 등이 일으킨 반란. 반란 도중에 선덕여왕이 붕어해 진덕여왕 때인 1월 17일 김유신에게 진압되었다. 그리고 공방이 10일이 넘게 멈추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비담의 난은 짧으면 10일 전후, 가장 길게 잡으면 17일 동안 진행된 사건이었다.

화백회의를 중심으로 했던 귀족 세력이 몰락, 반란 진압 와중에 선덕여왕이 승하하면서 진골 근왕파 세력인 김춘추 김유신 진덕여왕 시대를 주도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평가가 있다.

2. 전개

파일:e1f1735a1003461b867f3ff573ea23bf_1567994247682.png
대구 부인사 숭모전에 안치된 선덕여왕 표준영정 [2]
16년 봄 정월에 비담, 염종 등이 " 여왕은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며 병사를 일으켜 모반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3]
삼국사기 신라본기中 선덕여왕 16년 기사

비담은 ' 여왕은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라는 논리를 펴 반란을 일으켰다. 비담과 염종이 경주 외곽의 요충지 명활성에 주둔하자 선덕여왕은 월성에 군영을 두어 열흘 가량의 공방전을 펼쳤다. 전투 중에 월성에서 별이 떨어졌는데, 이 때를 놓치지 않고 비담은 '듣기로는 별이 떨어진 곳은 반드시 피가 흘릴 일이 있다고 한다. 이것은 마땅히 여주가 패배할 조짐이리라.' [4]고 외쳤다. 이에 사졸들의 함성이 땅을 뒤흔들 정도로 사기가 올랐다. 선덕여왕 또한 징조를 듣고 몹시 두려워하여 어찌 할 바를 몰랐다. 이에 김유신이 선덕여왕을 뵙기를 청하고 그를 위로해주며 말했다.
길흉()은 정해진 것이 아니며 사람이 부르는대로 오는 것입니다. 까닭에 봉황이 날아들었음에도 ( 주 문왕이 이를 얻음으로) 은 주왕은 망하였고, 노나라기린을 얻었으나 (이를 사냥함으로) 쇠해졌는데, 고종은 (부친의 제사를 지내는 도중) 꿩이 울었음에도 흥하였고, 정공은 용과의 싸움이 있었으나 (신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음으로) 오히려 창성했다고 합니다. 까닭에 덕은 요물을 이긴다는 것을 알수 있으니, 별의 변이는 두려워하기엔 지나친 일이니 바라건데 왕께서는 근심하지 말아주십시오.[5]
삼국사기中 김유신 열전

김유신은 별이 떨어져서 이기고 진다는 이런 미신을 진지하게 믿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일반 병사들의 믿음과 반란군의 선전을 역이용해 분위기를 반전시키기 위한 책략을 짜냈다. 바로 허수아비를 싣고 이를 불태워 올려, 어두운 밤하늘에 보기에 마치 떨어진 별이 다시 하늘에 오르는 것처럼 보이도록 연출하고, 다음 날 '어제 떨어진 별이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는 말을 반란군 군영 내에 퍼트리는 심리전을 감행하여 반란군의 사기를 떨어뜨렸다. 이어 백마를 잡아 제사를 지내며 다음과 같이 제문을 올렸다.
천도(天道)는 양이 강하고 음이 약하며, 인도(人道)는 군(君)이 높고 신(臣)이 낮은 법입니다. 혹여라도 이것이 바뀐다면 진실로 큰 어지러움이 닥치게 될 것입니다. 지금 비담의 무리들이 신하임에도 군(君)을 꾀하고 스스로 아래에서 위를 범하려 하니, 이른바 난신(亂臣)이자 도적의 아들로서 사람과 신이 미워하는 바요, 하늘과 땅이 용서 못할 바입니다. 지금 만약 하늘이 무심하여 이와 같이 오히려 별의 괴이함을 왕성에 보이신것이라면 신(臣)은 의혹이 되어 (그 이치를) 깨닫지 못하겠습니다. 오직 하늘의 위엄으로 백성의 바람을 좇아 선(善)을 선하게 악(惡)을 악하게 여기시어 신(神)으로써 부끄러움을 없게 하소서 [6]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
이어 김유신은 비담의 반란군에게 들이닥쳤고, 비담은 이 전투에 패해 달아났다. 김유신은 비담을 쫒아가 목을 베고 구족을 멸했다.

반란은 열흘 만에 진압되었지만, 이렇게 싸우던 와중이던 1월 8일 선덕여왕이 세상을 떠났고, 김춘추 김유신 세력의 후원 아래 진평왕의 막내 동생 국반 갈문왕의 딸인 승만이 진덕여왕으로 즉위하게 된다.

3. 여왕은 정말 나라를 다스릴 수 없었는가?

선덕여왕은 신라 최초의 여왕이고, 한국사에서 (기록이 남아있는) 최초의 여군주다. 진평왕에게 아들이 없어 이루어진 일인데, 전례가 없는 일에 대해 반발도 심했을 것이다. 이미 진평왕 말년인 631년에 일어난 이찬 칠숙, 아찬 석품의 모반 등이 구체적 예로 논급되어 왔다.

삼국유사 등에서 계속 강조되는 여왕의 현명함 등은, 역으로 재위 내내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한 선덕여왕과 그 근왕 세력의 노력을 어느 정도 설명해주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7] 그런데, 643년 당태종" 신라는 여자가 왕위에 있기 때문에 남들이 우습게 본다"는 식의 발언에 " 당나라 황실 종친을 보내어 신라 왕위에 오르게 하면 어떻겠느냐"는 드립이 나오면서, 가뜩이나 여왕 즉위에 불편한 감정이 있을 신라의 중신들에게는 대단히 수치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거기다가 백제· 고구려의 연이은 공격으로 나라 사정도 뒤숭숭하니 말이다.[8][9]

그리고 645년 5월, 당태종 고구려 공략에 호응하여 병사를 동원했지만, 백제에게 옆치기를 당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게다가 당나라는 신라의 그런 도움을 받고도 고구려 정복에 실패했으니 결국 도와줘서 얻은 이득은 당장엔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10] 이런 병크에 불만이 더 커질 수 밖에 없었을 테고, 무엇보다 선덕여왕은 혼인은 한 적 있지만 후계자가 없었다. 성골의 남자가 없어 여왕이 즉위하였는데, 같은 논리대로라면 '다음 왕도 여왕이 되는 것이 아니냐'라는 주장이 나올 만했다는 것. 사실 선덕여왕이 나이도 많고 이미 건강이 좋지 않은데 딱히 태자가 있는 것도 아니므로, 다음 왕은 진덕여왕이라는 것이 이미 정해져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주보돈 교수도 " 선덕여왕 재위 중에 진덕여왕이 이미 다음 왕위 계승자로 정해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진골 귀족들의 불만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647년 정월 초 상대등 비담을 중심으로 한 반란이 터진 것이다. 선덕여왕의 죽음에 대해서는 별다른 사인이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반란군에 피살된 게 아니라면[11] 이 무렵에는 여왕은 병을 깊게 앓았을 것이다. 급사했을 수도 있지만… 여왕이 중병에 들어 쓰러졌다면 반란을 일으키기엔 아주 적절한 시기다. 앞서 진덕이 다음 계승자로 정해졌을 가능성이 크다는 설에 따라, 마찬가지로 주보돈은 "이 '여자가 해먹으면 안 된다'는 구호는 재위 16년차인 선덕여왕의 다음 계승자인 진덕을 겨낭한 것 같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일본 측 기록인 일본서기에서는 일본 사신 타카무코노 쿠로마로(高向玄理)가 646년 9월에 신라에 사신으로 왔다고 하고, 이에 화답해 김춘추가 647년 일본에 사신으로 넘어간 기록으로 미루어보아, 이미 646년 겨울에 김춘추가 신라를 떠나있었고 비담의 난은 김춘추의 부재를 틈타서 일으킨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비담의 난과 관련된 사료에는 김유신의 역할만 강조될 뿐 김춘추가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12]

4. 비담의 난에 대한 여러가지 견해들

비담의 난의 성격에 관해서는 여러가지 견해가 적지 않게 학계에서 제출되었다. 그런데 사실 정작 비담의 난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 자체는 터무니 없이 적다.

우선 비담의 지위가 상대등이라는 점, 그리고 그 난을 진압하는 주축이 김유신이라는 것 자체는 명명백백한 사실이다. 또한 김유신과 김춘추가 깊이 연결되어있는 것도 확실한데, 대체로 김유신은 지방 출신이고, 김춘추는 귀족회의에 의해서 폐립된 진지왕(眞智王)의 손자라는 점,[13] 반란군 측이 내세운 '여왕 반대'의 명분, 난을 진압한 뒤에 김춘추와 김유신이 실권을 잡고 급속하게 중앙관서조직 확대 등이 일어난 것이 일단 역사적 사실이다. 이를 바탕으로 무엇을 중시하고, 또 무엇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다른 견해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4.1. 근왕파 vs 대귀족

상대등은 최고 귀족회의인 화백회의의 의장으로 여겨진다. 본래는 왕( 마립간)이 귀족회의의 의장이었는데, 법흥왕(法興王) 시기에 상대등이 설치됨에 따라 왕은 귀족회의의 직접적인 제약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상대등의 설치는 왕권 강화를 나타낸다. 또한 동시에 귀족회의가 약화되었지만 여전히 국정운영에서 주요 기능을 담당하였다는 데서, 상대등의 존재는 당대 왕권 강화의 한계를 나타내는 면을 지녔다. 처음에는 상호보완적 관계였던 왕과 상대등은, 6세 중반 신라의 왕권 강화와 이에 나타난 귀족회의의 진지왕 폐립 사건 등 양자 간에 갈등이 발생하였다.

비담의 난을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이 과정의 연장선 끝에 비담의 난이 벌어졌다는 의견이다.

진흥왕 대에 확고하게 자리잡은 신라 왕가를 중심으로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려는 개혁파, 그리고 토착 대귀족 중심의 옛 과두정으로 돌아가려는 복고파 간의 갈등을 축으로 삼아, 신라의 중고기(中古期) 정치동향을 파악하려는 것은 장기적 측면에서 보면 타당성이 있을 것이다. 실제로, 비담의 난 이후 진덕여왕 태종 무열왕 시기를 거치면서 신라의 중앙집권화는 진전되었고, 그것은 이전과는 다른 정권의 성격을 나타내었다.

물론, 김춘추와 김유신으로 대표되는 근왕세력도 따지고보면 진골이니 명목상으로는 대귀족이기는 했다. 그러므로 '귀족세력'이라고 하더라도 그 안에는 여러 분파가 있을 수 있다.[14] 또한 왕권과의 관계에서도 차이가 발생할 수 있다. 이는 곧 당시 귀족세력의 면모에 대해 더 구체적인 파악이 요구되는 점이다. 그리하여, 귀족세력 안의 여러 정파를 추출해 보려는 시도가 행해졌다. 그 기준으로 제시된 것은 크게 2가지인데 하나는 친족관계이고, 다른 하나는 경제적 관계이다.

후자의 견해를 먼저 보자면 비담의 난은 대량의 사병을 보유한 토착귀족 세력인 비담 등과, 김유신 같은 화랑(花郞) 출신의 징집병을 지휘하는 신흥 귀족 세력의 대결이었으며, 후자가 토착귀족들에 의해 철저히 견제당한 왕실의 후손인 김춘추를 지원하여 중앙집권적 봉건사회를 구축하는 토대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반란을 고대에서 중세로 넘어가는 과도기에서 나타난 사건이라고 성격을 규정하였다.[15]

당시 김춘추와 김유신 세력이 중앙집권화를 추진하는데 긍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중앙집권화의 구축이 곧 중세사회의 도래를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각자의 견해가 다를 것이다. 그리고 비담과 김유신, 김춘추가 각각 지닌 세력 기반이 근본적으로 성격을 달리한 것이었는가, 에 대해서도 의문들이 있다.

다른 견해로, 김춘추계를 하급귀족 또는 몰락귀족으로 보고 김유신 세력을 지방 세력으로 파악하여 이들이 왕권 강화를 통해 서라벌의 문벌귀족과 대결을 벌인 것이 비담의 난이라고 파악하는 설이다.

이 설은 신라 중고기 정치정세를 파악하는 기본 틀에서 수긍할 점이 있는데, 지방 출신이나 하급귀족이 왕권과 연결되었고 이들의 뒷받침을 받아 왕권이 강화되는 추세를 보였으며, 그 연장에서 무열왕 이후 중대의 왕실이 성립되었음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은 정치세력의 분류를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위험성이 있다.[16] 구체적으로 김춘추는 어머니 천명공주 선덕여왕의 자매이고, 아버지는 비록 폐위된 왕이지만 진지왕의 태자로서 내성사신 같은 고위적을 역임하였던 유력한 진골귀족이었다.

다른 기준으로 제시된 것은 친족관계이다. 즉, 귀족들 간의 세력 결집의 토대가 친족관계와 그것에 바탕을 둔 혈연의식이었다는 주장이다. 계보친족은 세대의 진전에 따라 포괄 범위가 달라지는데, 7세기 중엽 진골 귀족 사이에서 가장 큰 범위의 계보친족(maximal lineage)이 내물왕(奈勿王)을 시조로 한 것이고[17], 이보다 작은 범위의 계보친족이 지증왕(智證王) 후손들의 그것이며, 하위의 소(小) 계보친족이 태자 동륜계와 진지왕계인데, 내물왕계의 대(大) 계보친족회의에서 선덕여왕 폐위를 결의하였는데 이를 김유신 등이 반발하여 비담의 난이 발생했다는 설이다. 또한 진흥왕의 두 아들의 후손인 진지왕계와 태자 동륜계 사이의 대립에서 난의 배경을 찾는 설도 발표되었다.

두 설 모두 계보친족 사이의 혈연의식에서 당시 귀족들의 세력 결집의 구체적인 동인을 찾았다는 점에선 동일하다.

원시 및 고대사회에서 혈연이 개인 간의 연결과 결속에 매우 중요한 기능을 미쳤으며, 어느 경우엔 개인의 생존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중고기 신라사회는 이미 고대사회에서 사회분화가 크게 진전되었고 부체제가 해체되는 등 정치구조와 운영에서 새로운 바람이 형성되고 있었다. 그런만큼 혈연적 의식은 그 전대에 비해선 훨씬 약화되었을텐데, 자칫 혈연의식을 정치적 성향과 동일시할 경우, 그것이 실제 상황과 부합할지도 의문이 갈 수있다.

원래 김유신의 집안은 신라에 병합된 김해 금관가야 왕실의 후예였고, 진골로 편입되었지만 정통 진골 귀족들에게는 냉대를 받았다. 김유신의 아버지 김서현(金舒玄)이 숙흘종(肅訖宗)의 딸인 만명부인(萬明)과 결혼하려 하자 여자 집안의 반대에 봉착하여, 만노군(萬弩郡) 태수로 발령 받은 김서현이 밤에 담장을 넘어 보쌈을 하여 김유신을 탄생시켰다. 게다가 김유신이 자신의 여동생인 문희(文姬)를 김춘추와 고생고생해서 결혼시키는 모습 등은 금관가야 왕족인 김유신 집안이 경주로 이주한 뒤 진골 신분에 편입은 되었지만, 정통 진골귀족사회에서 여전히 아웃사이더 처지였음을 말해주는 일일 수 있다.

애초에 김유신 집안은 진골신분을 통해보다도 조부 김무력(金武力) 대부터 김서현, 김유신에 이르기까지 무장으로서 탁월한 능력을 통해 두각을 나타내었다. 그로 말미암아 김유신은 사람을 대할 때에 상대적으로 신분보다도 능력을 중시하는 경향에 있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며,[18] 나아가 이들을 자신의 세력 기반으로 규합하여 국가의 공적 질서에 포괄하기 위해 관료조직의 확충과 왕을 정점으로 하는 집권체제 확립을 지향하였다. 비담의 난도 그러한 과정에서 벌어진 대립과정일 가능성이 있다.

4.2. 대당 의존파 vs 자립파?

귀족들 간의 뚜렷한 파별성을 확인하기 힘든 상황에서, 비담의 난의 동인을 내부에서 찾으려는 데 반대하고, 외부의 영향에서 찾으려는 시각이 제기되었다. 이 견해에서 "여자가 잘 다스리지 못한다."는 반군 측의 구호를 중시하고, 여왕 교체안이 다름 아닌 당태종의 발언에서 제기되었음을 주목하여, 난의 성격을 규정하는데 대당 의존파와 자립파로 나누고 후자가 왕실을 지지한다는 식이다. 당시 신라가 대내외적으로 곤경에 처해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의 지도력에 대한 신뢰가 크게 흔들리는 상황이었으므로, 여자가 해서 말아먹는다는 논리는 여왕에 반대하는 귀족 세력에 영향을 주었을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여왕 반대파와 지지파를 대당 의존파와 자립파로 그 성격을 규정할 수 있는 가이다.

여왕에 대한 불만은 그 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국가적 위기는 여왕과 다음 왕위 계승자로서 여왕의 등장 가능성에 대한 반대를 촉발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굳이 여왕 반대파를 '대당 의존파'라고 규정하는가의 문제다. '자립파'라는 세력 또한 당과의 동맹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정책을 전개하였기 대문이다. 따라서 이는 지나치게 외인론에 의거해 신라 정치를 설명하는 주장일 수 있다. 오히려 역으로 비담 일파가 여왕의 친당정책에 반발하여 일어난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름에 있어서도 비담은 불교적 색채의 이름인데 김춘추와 김유신 및 두 사람의 가까운 일가 인명들은 하나같이 유교적 색채가 강하다.[19] 한 사람이 평생 사용할 이름을 짓는 기준은 그 가문이나 부모의 사상적 성향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생각해보자.

4.3. 용수를 겨냥한 왕위 쟁탈전?

한편, 비담의 이름이 불교적 색채를 띄고 있는 것과 당시 신라 왕실 일원이 대부분 불교에서 유래한 인명을 사용했던 점에 착안해 그가 비담의 난을 일으킬 때 진덕여왕을 제외하면 왕위에 오를 가능성이 가장 높았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그의 이름인 아비달마(阿毘達磨, abhidharma)라는 표현은 부파 불교의 대명사와도 같은 명칭으로 대승 불교의 창시자인 나가르주나, 즉 용수와 대척점을 이룬다. 이러한 연유로 원래 비담 용수는 모두 진지왕의 아들로, 비담이 형으로 먼저 생겨난 부파 불교에서 이름을 따고 용수가 동생으로 나중에 갈라져나온 대승 불교에서 이름을 따 비담이 정통성 측면에서 앞섰으나 성골의 일원인 천명공주 비담이 아닌 용수와 혼인하면서 왕위 계승 순위가 밀렸고, 이에 반발해 난을 일으킨 것으로 해석한다. 이렇게 놓고 보면 보희- 문명왕후 고발기- 산상왕 관계와도 비슷하다.

진덕여왕 진평왕의 동생 국반갈문왕의 딸로 선덕여왕과는 사촌관계이고, 무열왕은 가깝게로는 선덕여왕의 자매인 천명의 자식이자 부계로는 진평왕의 숙부인 진지왕의 손자이다. 일단 진평의 아비인 동륜의 계통에서는 孫子가 없는 것이 확실하고, 폐위된 진지왕 계통에서는 용춘과 그의 아들 춘추가 적통이고, 비담 앞에는 진덕여왕말고도 춘추라는 서열 우선 순위가 존재하여야 했다. 또한 진흥왕의 동생인 숙흘종 계통일 수는 있지만, 숙흘종은 김유신의 외조부이니 여기도 맞지는 않다. 따라서 진흥왕- 진지왕- 진평왕과 혈연적으로 연관이 있어야만 김춘추에게 정통성 면에서 뒤쳐지지 않았을 것이다.

5. 의의

비담의 난으로 인해 김춘추 일파의 행보에 제동을 걸 주요 귀족세력이 대부분 소멸했으므로[20] 이후 즉위한 진덕여왕 재위 기간 중에는 김춘추의 성향대로 대대적인 정치 개혁이 단행되었다. 이 때 신라의 중앙집권화와 중국화( 당나라화)가 크게 진전되었고, 김춘추 김유신 세력 등의 진골세력이 정국을 주도하였다.

비담의 난이 진압되고 그 후 진덕여왕 재위 기간 중 신라에선 중앙관서조직이 크게 확충되었다. 진덕여왕 5년인 651년에는 재정 지출을 담당하는 창부(倉部)와 형률과 입법을 관장하는 좌리방부(左理方部)가 창설되었으며, 국가의 기무를 총괄하는 최고집행기구로서 집사부가 개설되었다. 집사부는 왕에 직속되어 정치적으로는 강력한 왕권과 중앙 집권력을 뒷받침하는 기관이었다.

6. 대중문화에서의 반영

KBS 대하드라마 삼국기에서 비담의 난이 최초로 그려진다. 비담이 김유신의 아버지 세대의 노회한 정객으로 그려지기 때문에, 무쌍을 찍는 이후 작품들과 달리, 아들인 미오랑의 죽음에 슬퍼하다가 김유신을 보고서 칼을 들고 죽이려 달려들다가 한명도 못죽이고 죽는다.

선덕여왕에서는 비담( 김남길)과 김덕만( 이요원)의 관계, 특히 미실과의 관계의 연장선상에서 이것이 잘 그려진다. 매우 로맨틱하게 재해석되어 있으니 문서들을 참고할 것. 다만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지 비담이 여왕을 사랑해서 난을 일으키고 어쩌고저쩌고 하는 사람들은... 반면 염종은 쓰레기로 나온다...[21]
대왕의 꿈에서는 세세한 부분은 각색이 많이 들어갔으나 선덕여왕보다는 비교적 역사에 가깝게 묘사한 편이다. 다만 여기서 비담은 자신이 신라의 지배자가 되어 신라 중흥을 하겠다는 야망을 이루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는 설정. 역사기록에 비담이 스스로 왕이 되겠다고 명확하게 언급한 부분은 없지만, 성골이 병든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이 될 김승만 둘 뿐이고 비담은 여왕 반대를 내세웠으니 성골을 제외하면 남은 고위귀족들 중 진골 상대등인 비담이 직접 왕위를 노린다는 건 부자연스러운 설정은 아니다. 유성이 떨어지는 것과 김춘추 측에서 연을 날리는 장면도 그대로 나온다. 결국 비담이 김유신의 군세에 패하여 백제 국경까지 밀리게 되고, 신라의 내란을 이용하려는 의자왕의 지시를 받은 계백이 백제로 망명하라고 비담을 설득했으나 비담은 이를 거절하고 마지막에 진 신라무쌍을 찍다가 힘이 다해 김법민의 손에 최후를 맞는다.

7. 같이보기


[1] 추후 태종 무열왕. [2] 2018년에 그려졌으며 대구시 부인사에서 안치하였는데, 여기서는 실제 복식에 가깝도록 외관만을 그렸다. # 실제 선덕여왕의 용안에 대해서는 대한민국의 보물 제198호 경주 남산 불곡 마애여래좌상, 일명 남산 감실부처로 불리는 불상이 선덕여왕을 본떠 만들었다는 설이 있다. [3] 十六年春正月 毗曇廉宗等謂女主不能善理因謀叛擧兵不克. 《三國史記 卷第五 新羅本紀 第五》 [4] 吾聞落星之下 必有流血 此殆女主敗績之兆也 《 三國史記 김유신 열전》 [5] 吉凶無常 惟人所召 故紂以赤雀亡 魯以獲麟衰 高宗以雉雊興 鄭公以龍鬪昌 故知德勝於妖 則星辰變異 不足畏也 請王勿憂《三國史記》 [6] 天道則陽剛而陰柔 人道則君尊而臣卑 苟或易之卽爲大亂 今毗曇等以臣而謀君 自下而犯上 此所謂亂臣賊子 人神所同疾 天地所不容 今天若無意於此 而反見星怪於王城 此臣之所疑惑而不喩者也 惟天之威 從人之欲 善善惡惡 無作神羞《三國史記 중 김유신 열전》 [7] 이는 삼국사기에도 적혀 있다. 다만 김부식은 개인적으로 선덕여왕의 즉위에 회의적이다 못해 비판적이었다. [8] 사실 의자왕 대에 당나라 백제가 망했기에, 의자왕은 나라 말아먹은 병신이고 동시대 인물인 선덕여왕은 위대한 명군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당시 백제는 왕과 귀족 간 내부적 갈등이 있긴 했지만 무왕 시절부터 신라를 전방위적으로 압박해, 신라는 엄청난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당연히 당시 왕이던 선덕여왕에 대한 불만으로 번질 수 있었다. [9] 당나라의 도움을 요청하기 전에 김춘추의 사위인 김품석 엄청난 일을 저지른 것도 한 몫 했을 것 이다. 김품석이 그야말로 살려달라고 하다 죽고, 그의 반해 죽죽을 포함한 이들이 결사항전을 해버렸다. 김품석이 대야성 성주로 간 것은 그만큼 장인인 김춘추와 같은 가문의 김유신이라는 배경이 크게 작용했을 것 인데,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치정 문제로 성이 함락되어버렸다. 거기에 싸우다 죽지도 않고 말이다. 당연히 신하들 입장에서는 선덕여왕의 무능함으로 비치기 쉬웠을 것 이다. [10] 다만 이 때 백제와 달리 당을 지원한 것이 신뢰도를 쌓아서 이후 당나라가 한반도의 세 나라 가운데 신라를 최종 파트너로 삼는 중요한 명분과 계기가 되었다는 해석도 있다. 이때까지 당나라는 백제나 신라 중 어느 하나를 동맹으로 선택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물론 이건 결과적인 이야기이고 당장에는 신라가 아무 이득이 없이 피해만 본 상황이었으니 귀족들은 불만을 가질 만 하다. [11] 그리고 선덕여왕이 비담군에 피살되었다면 월성이 함락당했다는 말인데, 딱히 그런 기록도 없고, 선덕여왕은 당연히 김유신이 이끄는 근왕군의 제1순위 호위대상이었을텐데 김유신은 멀쩡하고 선덕여왕만 피살되는 상황을 상정하기 어렵다. [12] 김유신 본인도 비담이 난을 일으켰을 당시에는 압량주 군주였기 때문에 서라벌에는 없었던걸로 보인다. 이에 대해서는 신라본기와 김유신 열전이 미묘하게 어긋나는데 신라본기에는 김유신이 644년 대장군으로 임명 되었다고 하나, 김유신 열전에서는 진덕여왕 2년까지 압량주 군주로 있었다고 나오기 때문. 그러나 어쨌든 압량주가 서라벌과 가까운 편이었기 때문에 김유신이 비담의 난 소식을 듣자마자 서라벌로 달려왔을것으로 추측된다. [13] 이는 조금 더 생각해 볼 점이 삼국사기에는 진지왕의 폭정이 아니라 국경을 잘 방비하고, 백제의 대군을 물리치는 등의 업적이 더 크게 서술되어 있다. 그리고 폐위된 왕자가 진평왕의 사위가 되는 등 여러 모로 단순 폐위라고 보기에는 복잡한 면이 많다. [14] 김춘추파와 비담파 외에 기록에서 드러나는 제 3의 분파로 예를 들면 알천이 있었다. 알천은 비담의 난에는 가담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김춘추파를 착실히 따르지도 않아 지지세력을 따로 가지고 훗날 김춘추와 차기 왕위를 두고 경쟁했다. [15] 『조선통사』 상,pp.83~85, 1956 [16] 정치세력의 분류를 극단적으로 단순화할 경우 이덕일 부류와 같은 폐해를 낳는다. [17] 비슷하게 프랑스의 발루아 및 부르봉 왕조에서 카페 왕조 후기의 소위 성왕이라 불리는 루이 9세의 후손들만 광의의 왕족으로 보아 '혈통친왕' ( prince du sang)같은 왕족의 작위, 혜택 등을 주는 범위에 포함시켰고 그 바깥은 같은 위그 카페의 후손인 카페 계열이라도 광의의 왕족으로 쳐주지 않았다. [18] 가령, 662년 대 고구려 원정에서 돌아온 김유신은 문무왕에게 자신이 임의로 9등급인 급찬의 관위를 수여한 열기(裂起)와 구근(仇近)에게 8등급 사찬을 수여해줄 것을 요청하였고, 문무왕이 지나치다며 난색을 표하자 김유신이 "작록(爵祿)은 공기(公器)로서 공로에 대한 보수로 주는 것이온데, 어찌 과분하다고 하겠습니까?" 하자 문무왕이 이를 따랐다. 구근은 지방의 출신이고, 열기는 사서에 족성이 전해지지 않음을 보아 평민이나 하급 귀족 출신으로 여겨진다. 김유신은 평소 이들의 능력을 평가하여 국사(國士)로서 대우하였다. 출신 신분이 아니라 능력을 평가해 포용하고 발탁하는 자세를 견지함에 따라, 김유신의 문객으로 당시 소외되었던 유능한 지방 출신 인사나 하위 골품 출신 인사들이 많이 모여들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한국고대사의 이론과 쟁점, 노태돈.) 대백제전에서 김유신의 수하로 큰 공을 세우고 장렬하게 전사한 비령자(丕寧子)도 그러한 인물이었다. [19] 다만 정작 덕만, 승만은 불교적 색채의 이름이였다. [20] 물론 알천과 같이 여전히 살아남아서 김춘추와 어느 정도 경쟁하는 귀족세력도 있었으나, 알천과 김춘추의 관계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있지만 어쨌든 비담보다는 덜 적대적이었던 건 확실하다. [21] 그것도 사후 700여년이 지나서 고려에도 엄청난 악영향을 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