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竹嶺 / Jungnyeong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과 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 사이에 있는 백두대간상의 고개이다. 높이는 해발 696m.
고개 북동쪽에는 소백산이 있는데, 고개 대부분이 소백산국립공원에 속한다.
신라 아달라 이사금 때의 죽죽(竹竹)이라는 사람이 닦아서 '죽령'이라 불린다는 이야기가 전한다.[1] 이후로도 삼국시대 당시 신라의 북쪽으로 통하는 주요한 길목이자, 낙동강 유역에서 한강 유역으로 통하는 생명선이었다. 고구려의 전성기였던 장수왕 때는 고구려가 남쪽으로 세력을 뻗쳐 죽령이 고구려 남쪽-신라 북쪽 국경선이었고, 이는 진흥왕 때 신라가 고구려를 쳐서 빼앗는다. 이 때 죽령 입구에 성을 쌓으면서 만든 비석이 단양 신라 적성비. 고구려의 온달 장군이 "죽령 이북의 땅을 찾고야 말겠다"고 달려나갔다가 유시로 유명을 달리했을 만큼 고구려와 신라를 가르는 주요한 경계가 되기도 했다. 나중에 김춘추가 연개소문과 교섭하기 위해 고구려를 찾았을 때도 연개소문은 죽령 이북 땅을 돌려주면 백제를 칠 군사를 빌려주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삼국통일 이후에도 9주 5소경 행정구역을 구분할 때 원신라 영역(현 경상도) 상주와 원고구려 영역 명주, 삭주의 경계선이었다.
이후 김헌창이 세운 장안국의 판도에도 들어갔으나 김헌창의 장안국은 빨리 망해 이 중요한 지역의 이점을 전혀 살리지 못하였다. 그러나 궁예의 태봉에게 이 중요한 지역이 넘어갔으며, 이후 고려에게 계승되어 신라가 고려 상대로 상당히 불리한 처지의 협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 바 있다. 다만 이 일대가 고려가 후백제군을 막기 위해 군사를 보내는 통로로 자주 활용된 게 신라에겐 불행 중 다행. 고구려가 과거 신라의 종주국이 되었을 때 주로 죽령을 통해 지원군을 보냈는데, 고려가 죽령을 장악하면서 비슷한 구도가 사백 년 만에 다시 성립된 것. 다만 후백제와 고려의 쟁패 과정 중 후백제가 아주 잠깐 죽령을 장악한 일이 일어났는데, 경북의 다른 주요 요지는 고려에게 넘어갔고 후백제의 다른 북쪽 국경 일대가 꽤 남하한 상황이라 신라는 또 다시 위기를 벗어난다.
과거 영남대로 가운데서 우로(右路)의 고비에 속하는 곳으로 한양에서 안동, 경주를 거쳐 울산광역시 북구 염포로 통했다.
역사적으로도 여러차례 중요한 길목이었으나, 전근대 시절 충청도와 경상도를 오가는 제1간선은 문경새재였고, 죽령은 제2, 제3간선의 역할을 맡았다.
예천 지역민들의 구전에 의하면 6.25 전쟁때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민간인들을 많이 끌고갔는데 죽령 고개에서 폭격을 맞고 몰살당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2. 교통
조령과 충주를 거쳐 서울과 부산을 잇는 영남대로를 기준으로 그 우로(右路)의 지나는 고개지만, 구한말때 경부선 개통으로 주요 고개가 추풍령으로 넘어가기 전에, 주로 조령과 이화령이 경부 간 교통에 적잖은 역할을 했고, 죽령은 고개 자체가 험할 뿐더러,[2] 거의 우회길에 가까웠기 때문에, 한산한 고개였다. 그래도 추풍령보다 선전했는지, 20세기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죽령 밑자락에 창락(昌樂)이라는 이름의 역참(驛站)이 있어서 # 많은 여행객과 물산 등이 머물고 쉬었다 가는 큰 길목이었다고 전하나[3] 구한말 고종의 우정정책 도입과 갑오경장 등으로 역참 제도가 폐지되면서 급속히 쇠락해갔고, 그나마 마필을 끌고 조금이나마 드나들던 길손들마저 일제 말기 중앙선 철도가 개통한 뒤로는 인적이 끊겨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고 전한다. #[4] 그러나 중앙선 철도와[5] 중앙고속도로가 옛 죽령과 거의 같은 구간을 나란히 달리도록 개통되었으므로, 여전히 현대인들도 비록 걸어서 지나지 않을 뿐 죽령 구간을 자기도 모르게 많이 지나가고 있다.현대에 와서, 죽령을 따라 건설된 5번 국도( 죽령로)는 차량들이 별로 없어 한산하다. 가끔 명절 때는 죽령터널에 정체에 못이겨 우회하는 차량들도 인해 여기까지 막히는 경우가 있으며 또한 죽령터널에 사고 등으로 인해 막힐 시에는 우회도로로 쓰인다. 풍기, 단양 양쪽 모두 도로가 고개 입구까지만 확장되어 있기 때문이고 급커브에 헤어핀 천지이기 때문이다. 중앙고속도로와 중앙선 철도가 해당 고개 밑을 관통하여 건설되었다. 특히 중앙고속도로의 죽령터널은 2012년 3월 3일 현재 대한민국 도로 터널중 두 번째로 길다(4,600m)였지만 계속 경신되어 2019년 기준 6번째가 되었다. 경부고속도로의 추풍령과 비교되는 점. 그래도 소백산 정상으로 가는 입구 중 하나라 주말 아침에는 많은 산악회 차량이 오고간다.
죽령터널 개통 전에는 안동, 영주 사람들이 서울을 가기 위해 반드시 넘어가야할 길목이였는데, 구불구불한 산길이라 시간을 매우 잡아먹었다. 터널 개통 전과 개통 후의 서울 도착시간이 거의 1시간 정도 차이 날 정도.. 지금은 정상 즈음에 주막이 자리하여 드라이브 코스로 인기가 있다.
백두대간 종주나 소백산 종주를 하는 사람들이 주로 죽령 정상을 시종점으로 삼는다. 그래서 주말 아침에 오면 산악회 차량이 대단히 많이 다니며 등산객들을 위해 단양과 영주 양쪽에서 죽령행 버스가 운행중이긴 한데 차 시간이 묘하다. 차라리 택시를 타던가 버스가 조금 더 자주 다니는 희방사 쪽으로 올라가던가 하는게 낫다. 또한 영주 방면은 버스가 2회 밖에 다니지 않는다.
다만 죽령을 들머리로 삼을 시에는 제2연화봉을 거쳐 소백산천문대까지는 계속 임도를 걸어야 한다. 이 구간이 꽤 긴편이라 꽤 오랫동안 임도를 걸어야 한다. 단, 환경보호를 위하여 허가 받지 않은 차량의 통행은 금지된다.[6] 소백산천문대 이후에는 본격적인 일반 등산로가 시작된다.
죽령이 전근대시절 주요 교통로 였던 조령이나, 이화령에 비해 한산한 이유가 고개가 험한 것과 우회길이라는 것이 주요 원인이지만, 과거 제도가 시행될 당시에 수험자들은 죽령을 경유하지 않았다. 죽령 건너면 죽죽 떨어진다는 속설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추풍낙엽 마냥 쓸려나갈 거라고 믿었던 추풍령도 똑같다.
대중교통으로는 단양군 농어촌버스와 영주시 시내버스( 25번)가 각각 일 2회씩 운행하고 있다.
3. 관련 설화
죽령과 관련된 설화로 다자구 할머니가 있다. 죽령에 산적떼가 창궐하여 주민들을 괴롭혔는데, 관군들이 이들을 소탕하고자 해도 죽령이 워낙 험해 쉽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초라한 행색의 노파와 여자아이가 관아에 찾아와 묘안을 제시하는데, 그 묘안인 즉슨 기회를 봤다가 산적들이 깊은 잠에 들었을 때 기습하는 것. '더자구야'는 산적들이 아직 보초를 서고 있으니 기다리라는 뜻이고, '다자구야'는 산적들이 잠을 다 자고 있으니 빨리 기습하라는 뜻의 암호를 정해 놓았다. 그리고 죽령에 가서 '다자구야 더자구야'를 반복적으로 외쳤다.이렇게 '다자구야 더자구야'를 죽령 산중에서 매번 외치는 노파의 이야기가 산적떼의 귀에 들어가 이를 수상히 여긴 산적 두목이 노파를 잡아다가 물으니 '다자구'는 이 여자아이의 아버지고 '더자구'는 오래전 잃어버린 나의 아들인데. 애타게 찾던 차에 여기서 산적이 되었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둘러대었다. 이에 두목은 노파를 불쌍히 여겨 노파와 여자아이가 식모 일이라도 하게 했다. 며칠 후 두목의 생일이 되어 술과 여러 음식들을 푸짐하게 차려놓고 잔치를 벌였다. 그 날 밤 술기운에 모두들 완전히 곯아떨어지자 이 때다 싶어 "다자구야 다자구야"를 외치니 숨어서 기다리던 관군들이 별안간 습격하여 산적들은 꼼짝없이 붙잡혔다. 그 후 노파는 어디론가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이에 사람들은 그 노파가 죽령산신이었음을 깨닫고 '다자구 할머니'라 부르며 해마다 사당에서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 용부원리에 위치한 죽령산신당이 바로 이 설화와 관련되어 있다.
4. 죽령옛길 유래
죽령옛길은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과 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의 경계에 있는 고갯길로 조령, 추풍령과 더불어 영남과 충청도를 이어주는 3대 관문 중 하나였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아달라왕 5년(서기 158)에 죽령 길이 열렸다"는 기록이 있고, 동국여지승람에는 "아달라왕 5년에 죽죽이 죽령 길을 개척하다 지쳐서 순사했다"는 기록이 전해지는 오랜 역사를 지닌 옛길이다. 유구한 역사와 온갖 애환이 굽이굽이 서려 있는 죽령은 삼국시대 한동안 고구려와 신라가 대치하던 국경지역으로서 삼국의 군사가 불꽃 튀는 전투를 벌이는 격전장이었다. 소백산국립공원 내에 위치한 죽령옛길은 우리가 소중하게 지키고 보존해나가야 할 중요한 역사 자원이다.
[1]
삼국사기에 따르면 아달라 이사금 5년(서기 158) 3월에 죽령을 열었다고 한다.
[2]
지금도
5번 국도에서 제일 꼬불꼬불한 길이며 전국적으로도 꼬불꼬불한길로 유명하다.
[3]
창락역의 존재는 현재의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창락리라는 지명의 유래가 될 정도로 번화했던 역참이었다고 한다.
[4]
당시의 창락역사의 토대에 자리하던 주춧돌 등은 90년대 초까지 민가 밑에 묻혀있다가 어느 한 자유기고가와 향토사학자가 찾아냈고, 현재는 관련 역사를 담은 공원을 조성하여 주춧돌 위치를 그쪽으로 옮겨 전시하고 있다고.
[5]
2020년에 한번 이설되었다.
[6]
예전에는 허가받지 않은 차량의 통행이 가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