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립대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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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관립대학(官立大学)은 구제대학[1] 중 1918년 12월 6일에 공포된 대학령[2]에 의거 일본 제국 정부에서 설치하고 운영한 국립대학들을 일컫는다.[3] 관립학교는 칙령[4]에 근거를 두고 설치되어 제국 정부의 관할에 있는 소관 학교였으며, 공립(公立)학교는 제국정부의 직접 관할이 아니라 지방의 도도부현이 설립 주체가 되어 현지 재정과 기부금으로 운영한 것이었다.따라서 광의의 관립대학은 제국대학까지도 포함하나, 제국대학은 대학령이 아니라 별도의 법령인 제국대학령에 의거하여 설립된 종합대학으로서[5] 고급 관료와 학자의 육성을 목표로 한 데 반해, 여타 관립대학은 국가가 나서서 상과, 공과, 의과, 문리과[6] 등 사회 각 분야의 실무 관리와 전문가를 육성하는 데 초점을 두고 단과대학으로 설립되었기 때문에 보통은 양자를 구별하고 일반적으로 쓰이는 관립대학의 의미에는 제국대학을 포함시키지 않는다. 애초에 제국대학은 당연히 관립이다.
따라서 구 관립대학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구 상과대학[7], 구 문리과대학, 구 공과대학, 구 의과대학 등 관립단과대학을 뜻한다.
2. 설립
대학령에 따라 기존의 제국대학 외에도 각종 관립단과대학과 공립/사립대학의 설립이 가능해졌다. 다만 공립/사립대학 설립은 문부대신의 허가만 받으면 가능했으나(제8조), 관립대학 설립은 제국대학과 마찬가지로 대학관제와 같은 별도의 칙령 공포가 필요했다. 아래는 설립 칙령.- 도쿄상과대학관제(東京商科大學官制)(1920.4.1)[8] - 도쿄상과대학[9](1920.4.1)
- 관립의과대학관제(官立醫科大學官制)(1922.3.31)[10] - 니가타의과대학, 오카야마의과대학(1922.4.1)
- 여순공과대학관제(旅順工科大學官制)(1922.3.31)[11] - 여순공과대학[12](1922.4.1)
- 관립의과대학관제개정추가의건(官立医科大学官制中改正追加ノ件)[13](1923.3.31)[14] - 치바의과대학, 가나자와의과대학, 나가사키의과대학(1923.4.1)
- 관립공업대학관제(官立工業大學官制)(1929.4.1)[15] - 도쿄공업대학, 오사카공업대학[16](1929.4.1)
- 관립문리과대학관제(官立文理科大學官制)(1929.4.1)[17] - 도쿄문리과대학, 히로시마문리과대학(1929.4.1)
- 관립상업대학관제(官立商業大學官制)(1929.4.1)[18] - 고베상업대학(1929.4.1)
- 관립의과대학관제중개정의건(官立醫科大學官制中改正ノ件)(1929.4.18)[19] - 구마모토의과대학(1929.5.1)
- 관립의과대학관제중개정의건(官立醫科大學官制中改正ノ件)[20](1931.4.30)[21] - 나고야의과대학[22](1931.5.1)
- 신궁황학관대학관제(神宮皇學館大學官制)(1940.4.24)[23] - 신궁황학관대학[24](1940.4.24)
3. 입학
이 대학들은 구제전문학교였던 의학전문학교, 고등공업학교, 고등상업학교와 고등사범학교 중에서 각각 최고 수준의 관립학교들의 전공과/연구과[25] 등을 모체로 설립된 것이었다. 1919년 4월 시행된 대학령에 의거, 구제대학(학부)이 되자 구제고등학교 또는 대학예과를 수료한 자에게만 입학시험 응시자격이 주어졌는데,[26] 제국대학을 골라갈 수 있었던 구제고교 졸업생이 여타 관립대학에 지원하는 사례는 거의 없었기 때문에 각 관립대학에서 직접 신입생을 충원하기 위해 예과를 설치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도쿄상과대학, 여순공과대학, 도쿄공업대학(특설예과→부속예비부), 고베상업대학, 신궁황학관대학 등에 예과가 부설되었고 그 중 도쿄상대, 고베상대, 여순공대의 예과는 마쓰모토시의 구제고등학교 기념관에서 41개교로 함께 묶어 설명되기도 한다( 참조). 특히 도쿄상과대학에서는 1931년 대학예과 및 부속전문부를 폐지하려는 문부성의 계획에 맞서 격렬히 저항하여 시행을 무산시킨 농성사건(籠城事件)이 발생하기도 했다.[27]그러나 이들 대학예과만으로 신입생이 전부 충당되지는 않았으며 예과격으로 해당 관립대학 소속이 된 부속전문부를 비롯해 여타 고등상업학교, 고등공업학교, 고등농림학교 등 해당 분야의 고등실업학교 졸업생들이 학부에 입학하였다. 따라서 관립대학의 입학생은 각 분과의 구제전문학교 출신이 절대 다수를 차지했다. 예컨대 공과대학인 도쿄공업대학의 신입생 절대 다수는 고등공업학교 졸업생이 차지했으며, 상과대학인 도쿄상과대학은 고등상업학교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그 중에서도 관립대학 설립의 모체가 되어 각 대학 산하의 부속전문부로 편입된 관립전문학교(예를 들면 도쿄 도쿄상과대학의 경우는 舊도쿄고등상업학교, 도쿄공업대학의 경우는 舊도쿄고등공업학교, 도쿄문리과대학은 예하에 부속 학교로 존치된 도쿄고등사범학교 등) 출신이 가장 많았다고 한다. 도쿄상과대학 출신으로 유명한 백남운도 수원농림학교[28] 졸업 후 도쿄상과대학 설립(1920년) 이전인 1919년 도쿄고등상업학교에 입학하여 예과로 개편된 도쿄고상 과정을 마치고 1922년 도쿄상과대학(상학부)에 들어갔다.
그런데 여기서 의과대학인 구6의대만은 예외였는데,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일본 제국에서도 의사가 높은 인기를 자랑했던 데다가[29]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여 의사 면허를 받은 사람이 또다시 의과대학에 진학해야할 유인이 없었으므로[30] 구제고등학교 졸업자를 대상으로 입시를 시행하여 신입생을 선발했다고 한다. 1926년 기준 신입생 모집정원은 니가타의과대학 60명, 오카야마의과대학 61명, 치바의과대학 61명, 가나자와의과대학 60명, 나가사키의과대학 63명이었으며(구마모토의과대학은 1929년 관립 이관되기 전),[모집정원] 제국대학 의학부를 지망하나 성적이 모자라거나 안정 지원을 지향하는 구제고교생들의 지원이 쇄도했다고 한다.
4. 목록
- 구 제국대학
- 문서 참조.
- 구 상과대학
- 구 공과대학
- 여순공과대학(1922년)[34] :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소련군이 접수, 1945년 9월 폐교.
- 도쿄공업대학(1929년)[35]: 현 도쿄공업대학
- 오사카공업대학(1929년)[36] : 오사카제국대학에 1933년 신설되는 공학부의 모체가 되어 흡수
- 구 의과대학
- 오카야마의과대학(1922년)[37] : 현 오카야마대학 의학부/약학부
- 니가타의과대학(1922년)[38] : 현 니가타대학 의학부
- 나가사키의과대학(1923년)[39] : 현 나가사키대학 의학부/약학부
- 치바의과대학(1923년)[40] : 현 치바대학 의학부/약학부
- 가나자와의과대학(1923년)[41] : 현 가나자와대학 의학부/약학부
- 구마모토의과대학(1929년)[42] : 현 구마모토대학 의학부/약학부
- 나고야의과대학(1931년)[43] : 1939년 나고야제국대학 설립의 모체가 되어 의학부로 흡수
- 구 문리과대학
- 종전 후 설치된 의과대학[48]
5. 분류
구2상대(旧二商大) | |
히토쓰바시대학 | 고베대학 |
-
구 2상대(旧二商大)
구 2상대는 대학령[55]에 의해 고등상업학교에서 구제대학으로 승격이 된 2개의 관립 상과대학들을 지칭한다. 다만 오늘날 일본의 대학으로서는 공립대학이었던 시립 오사카상과대학을 포함한 구3상대[참조]가 통용된다.[57]
구3공대(旧三工大) | ||
여순공과대학 (1945년 폐교) |
오사카공업대학 (1933년 흡수) |
|
여순공과대학 |
도쿄공업대학 (도쿄과학대학) |
오사카공업대학 |
-
구 3공대(旧三工大)
구 3공대는 대학령[58]에 의해 고등공업학교에서 구제대학으로 승격이 된 3개의 관립 공과대학들을 지칭한다. 오사카공업대학은 개교 4년만에 오사카제국대학에 흡수되어 오사카제대 공학부가 되었고[59], 여순공과대학은 종전 후 폐교되었으므로 도쿄공업대학만 남아 신제대학이 되었다.
구2문리대(旧二文理大) | |
쓰쿠바대학 | 히로시마대학 |
구6의대(旧六医大) | ||
오카야마대학 | 니가타대학 | 나가사키대학 |
치바대학 | 가나자와대학 | 구마모토대학 |
7제5관(七帝五官) | ||||||
도쿄대학 | 교토대학 | 도호쿠대학 | 규슈대학 | |||
홋카이도대학 | 오사카대학 | 나고야대학 | 도쿄공업대학 | |||
히토츠바시대학 | 고베대학 | 츠쿠바대학 | 히로시마대학 |
-
칠제오관(七帝五官)
현재 일본에 남아있는 7개의 제국대학과, 관립대학 중 상과, 공과, 문리과에 속한 5개교를 합해 칠제오관(7제5관)이라고 칭한다.
신 8의대 | |||
도쿄의과치과대학 | 군마대학 | 신슈대학 | 히로사키대학 |
돗토리대학 | 도쿠시마대학 | 히로시마대학 | 가고시마대학 |
[1]
일본 제국 시대의 구제(옛 제도)하의 대학 전부를
구제대학이라고 하며, 최광의의 구제대학은 1945년 이후에도 기존의 제국대학령과
대학령이 1949년 5월 31일 국립대학설치법으로 대체되기 이전까지 구 학제에 의거 설립된 대학까지도 포함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종전 이전의 대학에 한해 사용된다. 구제대학(舊制大學)들의 후신을 포함하여 학제개혁 이후의 대학들은 신제대학(新制大學)으로 일컽는다.
[2]
다이쇼 7년 칙령 제388호.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1947년(쇼와 22년) 4월 1일에 학교교육법이 발효되고 학제개혁이 시행되며 폐지되었다.
[3]
관립(官立)이란 종전 이전
일본에서 국립(國立)의 의미로 쓰이던 용어이다.
[4]
천황의 법규명령.
[5]
제국대학령은 제국대학을 복수의 학부로 구성한다고 규정하였으므로 최소한 2개의 학부를 갖춰야했다.
[6]
고등사범학교 연구과를 근간으로 대학을 설립할 당시 사범학교로서 교육학에 집중하는 사범대학이 되어야한다는 측과 그에 얽매이지 말고 광범위한 교양교육을 강조하는 문리과대학이 되어야한다는 측이 충돌한 바 있다. 결국 후자가 승리하여 문리과대학으로 설립되었고 그 예하에 고등사범학교가 존치되었으므로 양자간의 관계가 상당히 미묘껄끄러워했다고 한다.
[7]
보통
구 3상대로 쓰이며 관립대학군 중 가장 많이 쓰인다.
[8]
다이쇼 9년 칙령 제71호
원문.
[9]
예과(3년제)+상학부(3년제)의 구제대학 과정과 함께 기존
고등상업학교 본과 과정인 부속 상학전문부(3년제), 그리고 부속 상업교원양성소(3년제)를 두고 개교했다.
[10]
다이쇼 11년 칙령 제143호
원문.
[11]
다이쇼 11년 칙령 제160호
원문.
[12]
1945년 9월
소련군에 의해 폐교.
[13]
관립의과대학관제 제1조 대학 목록 중 오카야마의과대학 다음으로 치바의과대학, 가나자와의과대학, 나가사키의과대학을 추가하는 개정.
[14]
다이쇼 12년 칙령 제93호
원문.
[15]
쇼와 4년 칙령 제36호
원문.
[16]
1931년 설립되는
오사카제국대학에 포괄되지 못하였으나, 1933년 흡수합병되어 오사카제국대학 공학부.
[17]
쇼와 4년 칙령 제37호
원문.
[18]
쇼와 4년 칙령 제38호
원문. 1920년
도쿄상과대학관제(東京商科大學官制)(
원문)를 개정.
[19]
쇼와 4년 칙령 제75호
원문. 관립의과대학관제 제1조 대학 목록 중 나가사키의과대학 다음으로 구마모토의과대학을 추가하는 개정.
[20]
관립의과대학관제 제1조 대학 목록 중 구마모토의과대학 다음으로 나고야의과대학을 추가하는 개정.
[21]
쇼와 6년 칙령 제70호
원문.
[22]
1939년 나고야제국대학 설립 당시 모체가 되어 흡수,
나고야제국대학 의학부.
[23]
쇼와 15년 칙령 제288호
원문.
[24]
국가신토 신관을 배출하던 곳으로, 2차대전 종전 후 미군정에 접수되어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신도지령에 의해 1946년 폐교되었다가 1962년 사립
고각칸대학으로 재창설됐다.
참조
[25]
본과 졸업생을 대상으로 1~3년의 추가교육을 실시.
[26]
대학령 제9조
학부에 입학할 수 있는 자는 당해
대학예과를 수료한 자,
고등학교 고등과를 수료한 자, 또는 문부대신이 정한 바에 따라 이와 동등 이상의 학력을 인정받은 자이다. 입학의 순위에 관한 규정은 문부대신이 정한다. "第九条 學部ニ入學スルコトヲ得ル者ハ當該大學豫科ヲ修了シタル者、高等學校高等科ヲ卒リタル者又ハ文部大臣ノ定ムル所ニ依リ之ト同等以上ノ學力アリト認メラレタル者トス. 入學ノ順位ニ關スル規程ハ文部大臣之ヲ定ム."
일본 국회도서관 원문 참조.
[27]
1931년 10월 1일 동경일일신문(東京日日新聞)에서 특종 보도로,
제2차 와카쓰키 내각에서 예산 절감과 행정/재정상 효율을 제고한다는 목표로 하여 "
구제고등학교가 있으므로 별도의
대학예과는 필요없고,
구제전문학교가 있으므로 역시
부속전문부 또한 불필요하다."는
대장성의 의견에 따라 도쿄상대 예과 및 부속전문부 폐지를 계획하는 정리안(원안)이 상정되었음이 알려졌다. 각 분야의 전문가를 양성한다는 목적에 부합하도록 구제고교 또는 여타
고등상업학교 졸업생들을 입학하게 한다는 구상이었으나, 이러한 계획이 알려지자
도쿄상과대학의 교수진·학생·동창회(如水会)가 단결하여 대장대신·문부대신 관저에 몰려가 항의하였으며, 특히 재학생들이 히토츠바시 캠퍼스를 점령 농성하면서 가두 데모를 실시하는 등 격렬히 반발하여 경찰과 충돌해 검속 당하는 학생들이 발생하고, 전교생 2,000명이 총퇴학을 결의하는 등 도쿄상대측의 반발이 심했기 때문에 내각은 결국 예과 및 부속전문부 폐지안을 취소하였으며, 이 사건이 바로 제2의 신유사건이라고 불리는 농성사건이다.
[28]
1918년
구제전문학교인
수원고등농림학교로 승격되기 이전인 1915년 수원농림학교 졸업
[29]
경성의학전문학교는 물론이고 지방에 1933년 신설된
대구의학전문학교,
평양의학전문학교와 1944년 설립된
함흥의학전문학교,
광주의학전문학교에도 일본인
구제중학교 졸업(예정)자의 지원이 쇄도하여 최소 과반수에서 2/3 이상을 일본인이 차지할 정도였다.
조선총독부는 당초 조선인 의학교였던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전문학교로 승격시키고 나서 일본인 수험생들이 몰려들자 조선인 비율이 떨어져서 조선의 여론이 악화되는 것을 막고자 민족별 쿼터를 설정해야했을 정도였다. 1944년 개교한 전남도립 광주의전이 그나마 조선인 비율이 가장 높은
의학전문학교였는데, 신입생 102명 중 조선인이 48명, 일본인이 54명이었다고 한다(
참조). 이렇게 의전 입학을 위해 내지의 일본인이 몰려드는 것은 조선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대만, 관동주, 만주 등 일제 전역에서 발생하던 현상이었다.
[30]
의학전문학교 4년 과정 졸업생은
구제대학
의학부에 재입학/졸업하지 않고도 쌍방추천(졸업한 의학전문학교 및 입학할 제국대학/관립대학(대학원) 교수의 추천)을 얻으면 바로 제국대학/관립대학 대학원에 입학할 수 있었다. 다만 연구생으로서 주어지는 직급은 제국대학/관립대학 의학부 졸업생보다 한 단계 낮았고, 예과 과정 만큼의 수학 연한차이에 해당하는 2~3년의 격차가 있었다.
[모집정원]
[32]
1875년 설립된 상법강습소를 기원으로 하는 도쿄상업학교가 1887년 고등상업학교로의 개편을 거쳐 1902년 제2관립 고상인 고베고등상업학교 개교에 따라 도쿄고등상업학교로 개칭. 이후 도쿄고상, 고베고상, 오사카고상(1917년 이후) 본과 졸업생을 교육하던 전공부(
구3상대 참조)가 1920년 도쿄상과대학으로 승격. 1944년 도쿄산업대학으로 개칭했다가 종전 후인 1947년 도쿄상과대학으로 복귀하고 1949년 신학제 실시에 따라 히토츠바시대학으로 개편.
[33]
1902년 제2관립 고등상업학교로 개교한 고베고등상업학교를 전신으로 1929년 고베상업대학으이 설립되면서 고베고상을 부속 상학전문부로 편입시켰다. 1944년 고베경제대학으로 개칭되었다가 1949년
히메지고등학교,
고베공업전문학교, 효고사범학교 및 효고청년사범학교와 합병하여 고베대학 창립.
[34]
1909년 설립된 관동도독부 여순공과학당을 전신으로 1922년 여순공과대학이 설치되고 여순공과학당을 부속 공학전문부로 흡수했다.
[35]
1874년 도쿄가이세이학교(東京開成學校)내에 설치된 제작학교장을 기원으로 1881년 도쿄직공학교가 설립(화학공예과, 기계공예과 2개과로 구성). 도쿄대학 공학부의 전신인 공부대학교(工夫大學校)를 제외하면 당시 유일한 공학교육기관으로 1890년 도쿄공업학교로 개칭하고 1896년 염직공과, 요업과, 응용화학과, 기계과, 전기과 5개과 구성으로 개편. 1901년 도쿄고등공업학교로 승격되며 공업도안과와 건축과를 신설. 1929년 도쿄공업대학이 설치되고 전신인 도쿄고등공업학교는 부속 공학전문부로 흡수. 종전 당시 12개 공학과와 7개 이학교실 그리고 공업전문부를 두고 있었다. 1949년 신학제에 따라 신제 도쿄공업대학으로 이행.
[36]
1896년 설립된 오사카공업학교를 전신으로 1901년 설립된 오사카고등공업학교가 1929년 오사카공업대학으로 승격. 1930년 하반기
오사카제국대학 설립이 가시화되자 이듬해 제국대학 출범과 동시에 공학부로 승격해줄 것을 요구했으나 예산 문제로 무산되어 오사카제대는 1931년 의학부와 이학부만을 설치해 개교하고, 오사카공업대학은 2년 후인 1933년 오사카제국대학 공학부로 흡수되었다. 오사카제국대학은 의학부, 이학부, 공학부 등 3개 학부 체제로 종전을 맞는다.
[37]
1870년 설치된 오카야마번 의학관이 1880년 오카야마현 의학교로 개편. 1888년 제3고등중학교 의학부, 1894년
제3고등학교 의학부로 흡수되었다가 1901년
구제고등학교 학부를 독립시킬 때 오카야마의학전문학교로 독립. 이 오카야마의학전문학교를 모체로 1922년 오카야마의과대학이 설립. 1949년 신학제에 따라
오카야마대학으로 통합되어 오카야마대학 의학부 및 부속병원이 되었다.
[38]
1873년 개설된 사립 니가타병원이 1876년 현립 니가타병원, 1879년 니가타의학교 부속병원, 1889년 시립 니가타병원으로 개편되었고 이를 모체로 1910년 관립 니가타의학전문학교 설립하고 부속의원으로 삼았다. 이 니가타의전을 모체로 1922년 니가타의과대학이 설립되며 1949년 신학제에 따라 니가타대학으로 통합되면서
니가타대학 의학부와 부속병원이 되었다.
[39]
막부로부터 의학을 가르쳐달라는 의뢰를 받은
네덜란드군 군의관에 의해 1857년 나가사키봉행소 서역소에 설립된 의학전습소를 기원으로 한다.(현재
나가사키대학 의학부의 개교기념일) 1861년 양생소가 개원하여 막부의 핵심 병원 역할을 했으나
메이지 유신 이후인 1868년 나가사키부 의학교로 개칭된 후 부침을 거쳐 1877년 현립 나가사키의학교로 개편되었다. 1887년 다시 관립으로 이관되면서 제5고등중학교 의학부가 되었으며 1890년 약학과를 설치하고, 1894년
제5고등학교 의학부를 거쳐 1901년
구제고등학교 학부를 독립시킬 때 나가사키의학전문학교로 독립. 이 나가사키의학전문학교를 모체로 1923년 나가사키의과대학이 설립되었다. 1949년 신학제에 따라
나가사키대학으로 통합되어 나가사키대학 의과대학이 되었다.
[40]
1874년 설립된 치바현 공립병원을 모체로 1882년 설립된 현립 치바의학교가 1887년 제1고등중학교 의학부가 되어 관립으로 이관되었으며 1894년
제1고등학교 의학부를 거쳐 1901년
구제고등학교 학부를 독립시킬 때 치바의학전문학교로 독립. 이 치바의학전문학교를 모체로 1923년 치바의과대학이 설립되었다. 1949년 신학제에 따라
치바대학으로 통합되어 치바대학 의학부 및 부속병원, 약학부가 되었다.
[41]
1862년 설립된 카가번 종두소를 기원으로 하는 1870년 카가번 의학관이 1873년 가나자와병원이 되며, 1879년 현립의학교로 문부성 인가를 받은 가나자와의학교는 1887년 제4고등중학교 의학부가 되어 관립으로 이관되었으며 1894년
제4고등학교 의학부를 거쳐 1901년
구제고등학교 학부를 독립시킬 때 의학과/약학과로 구성된 가나자와의학전문학교로 독립. 이 가나자와의학전문학교를 모체로 1923년 가나자와의과대학이 설립되었다. 1949년 신학제에 따라
가나자와대학으로 통합되어 가나자와대학 의과대학이 되었다.
[42]
1870년 구마모토 번주였던 호소카와가
나가사키에서 인원을 초빙해 서양의학 병원을 만들고자 하여 1871년 네덜란드인 만스 펠트를 초빙해 번립 의학소를 창설했다. 이는 곧 폐번치현으로 관립의학소 겸 병원(통칭 古城醫學所)가 되며 세이난전쟁으로 소실된 의학교는 1878년 현립으로 재건되었다. 1891년 사립 규슈가쿠인의학부를 거쳐 1896년 사립구마모토의학교, 1904년 전문학교령에 의거 사립 구마모토의학전문학교로 승격되었다. 1921년 현립 구마모토의전을 거쳐 1922년 대학령에 의거한 현립 구마모토의과대학이 되었다. 1929년 관립으로 이관되어 관립 구마모토의과대학이 되었다. 1949년 신학제에 따라
구마모토대학으로 통합되어 구마모토대학 의과대학이 되었다.
[43]
1871년 오와리번에 개설된 仮病院, 仮醫學校를 기원으로 1901년 설치된 아이치현립의학교가 1920년 대학령에 의거한 아이치현립 아이치의과대학으로 승격되었다. 이 공립 아이치의과대학이 1931년 관립으로 이관되어 나고야의과대학이 되었고, 1939년 나고야의과대학을 모체로 승격한
제국대학이 설립되면서
나고야제국대학 의학부가 되었다. 나고야제국대학은 1939년 의학부 1개 학부로 개교하고 1940년 이공학부를 설치, 1942년 이학부/공학부를 분리해 3개 학부 체제로 종전을 맞았다.
[44]
1872년 설립된 도쿄사범학교가 1886년 고등사범학교로 개편되었는데(1902년 도쿄고등사범학교), 이 도쿄고등사범학교 졸업자를 대상으로 교육을 실시하던 전공과 2년을 모체로 1929년 도쿄문리과대학이 설립되었고 도쿄고등사범학교를 그 부설 기관으로 삼았다. 1949년 신학제에 따라 도쿄고등사범학교(교육학부), 도쿄농업교육전문학교(농학부), 도쿄체육전문학교(체육학부)와 함께 도쿄교육대학으로 합병되어 문학부와 이학부의 모체가 되었다. 도교교육대학은
쓰쿠바대학(1973년)으로 재창설된 후 행정적으로 1978년 폐교되었다.
[45]
1915~1916년 주고쿠제국대학 설립 건의가 문부성에서 수용되지 않자, 서일본의 중등교원 양성을 목표로 1902년 설립된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를 대학으로 승격시켜달라는 청원이 일었다. 이에 고등사범학교 졸업자를 대상으로 2년의 교육을 실시하던 전공과를 모체로 1929년 히로시마문리과대학을 설치하고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는 그 부설기관으로 두었다. 1949년 신학제에 따라 히로시마대학 문리과대학으로 통합되었다.
[46]
1929년 설립된
관립 히로시마문리과대학을 중심으로
히로시마고등학교,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 히로시마여자고등사범학교, 히로시마사범학교, 히로시마청년사범학교,
히로시마공업전문학교를 합병하고 히로시마시립공업전문학교를 흡수하여 1949년 문학부, 이학부, 정경학부, 교육학부, 공학부, 축산학부 등 6학부 구성으로 창립. 1953년 공립
히로시마현립의과대학을 흡수해 의학부 설치.
[47]
국가신토와 관련된 성향이 강했기 때문에, 연합군 최고사령부가 공포한
신도지령에 따라 1946년 폐교된다.
[48]
원래 전문학교였으며, 도쿄의과치과대학은 1946년, 그외 5교는 1948년이 되어서야 대학으로 승격되었다. 국립대학설치법 시행 전에 설치되었기에 관립대학에 속하긴 하나, 위에 나열된 전통적인 관립대학들과는 성격이 약간 다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말하는 구 관립대학의 대학군에는 포함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49]
전신이 1928년 일본 최초의 관립 치학교육기관인 도쿄고등치과의학교(東京高等歯科医学校)로 1944년 의학과가 추가되어 도쿄의학치학전문학교(東京医学歯学専門学校)로 개편되었다가 종전 후인 1951년 신제 도쿄의과치과대학으로 승격.
[50]
1944년 설립된 마츠모토의학전문학교가 전신.
[51]
1945년 설립된 요나고의학전문학교가 전신.
[52]
1943년 설립된 마에바시의학전문학교가 전신.
[53]
1944년 설립된 아오모리의학전문학교가 전신으로 1947년
히로사키로 이전.
[54]
1943년 공립 도쿠시마의학전문학교로 설립되어 1945년 관립으로 이관.
[55]
대학령으로 제국대학, 관립대학의 설립칙령이 내려진 이후에도 고등교육에 대한 일본내 수요가 커짐에 따라, 공립 및 사립 고등학교들도 대학령에 의해 허가를 받고 대학으로 승격되었다.
[참조]
구제대학으로 승격된 당시 상과대학은 이 셋 뿐이었고, 현재도 세 학교간의 인문, 학술, 스포츠문화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다.
[57]
당초부터
문부성에서는 제2관립
고등상업학교을 설치할 장소로
고베시를 내정해놓고 있었으나,
오사카시에서 오사카에 고상 설치를 강력히 요구해 격렬한 유치전이 펼쳐졌고, 결국 1900년 11월
제국의회에서 71:70, 단 한 표 차이로 오사카를 물리치고 고베 설립이 확정되었다. 그러자 관립고상 유치에 실패한
오사카시에서는 공립 오사카상업학교를 독자적으로 시립 오사카고등상업학교로 승격 설립했다. 그리고 1918년 12월 대학령 공포(1919년 4월 1일 시행) 후 고베고상의 대학승격운동에 의해 오사카시립고상에서도 대학승격 움직임이 촉발됐음에도 불구하고 오사카고상의 구제 공립대학으로 승격은 난망했다. 본래 대학령 제5조는 공립대학의 설립주체를
도도부현으로 제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28년 1월 20일 쇼와 3년 칙령 제7호
대학령중개정의건(大学令中改正ノ件)(
원문)으로 대학령 제5조를 개정해 공립대학 설립주체에 시(市)를 포함시키면서 시립대학도 설립 가능해지자 오사카시는 1928년 3월 16일
문부성의 인가를 받아 오사카시립고상을 모체로 하는 오사카상과대학을 설립하여 고베고상의
구제대학(고베상업대학) 승격이 당초 예정되었던 1926년에서
관동대지진으로 3년 연기된 사이에 먼저 설립되었다.
[58]
대학령으로 제국대학, 관립대학의 설립칙령이 내려진 이후에도 고등교육에 대한 일본내 수요가 커짐에 따라, 공립 및 사립 고등학교들도 대학령에 의해 허가를 받고 대학으로 승격되었다.
[59]
[60]
대학령으로 제국대학, 관립대학의 설립칙령이 내려진 이후에도 고등교육에 대한 일본내 수요가 커짐에 따라, 공립 및 사립 고등학교들도 대학령에 의해 허가를 받고 대학으로 승격되었다.
[61]
대학령으로 제국대학, 관립대학의 설립칙령이 내려진 이후에도 고등교육에 대한 일본내 수요가 커짐에 따라, 공립 및 사립 고등학교들도 대학령에 의해 허가를 받고 대학으로 승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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