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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 전투 ,19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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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군 중화민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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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하자 전투 ,19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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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 전투 靑山里 戰鬪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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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독립운동의 일부 | ||
|
||
날짜 | ||
1920년 10월 21일 ~ 10월 26일 | ||
장소 | ||
중화민국
지린성
화룡현 삼도구 청산리 일대 (現 중국 지린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화룡시 칭산촌 일대) |
||
교전국 |
[[틀:깃발| 대한독립군 북로군정서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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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김좌진 김규식 나중소 서일 이범석 홍범도 안무 허근 강창대 방우룡 김연군 |
가노 노보테루 타카시마 토모타케 아즈마 마사히코 이소바야시 나오키 시마즈조 기무라 |
병력 | 보병 약 1,200~3,000여 명 | 5,000여 명 |
피해 규모 |
전사 60명 부상 90명 |
전사 11명, 부상 24명 (평가 문단 참조) |
결과 | ||
일본군의 독립군 토벌 목표 실패 독립군이 추격을 피해 러시아 방면 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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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20년 10월 21일부터 10월 26일까지 만주 간도 지역에서 벌어진 한일간의 전투. 김좌진이 지휘하는 북로 군정서군, 홍범도가 지휘하는 대한 독립군 등이 연합하여 중화민국 지린성 화룡현 삼도구 청산리 백운평, 천수평, 완루구 등지에서 10여 차례에 걸쳐 구 일본군과 교전한 일련의 전투다.다만 전투의 전개와 결과에 대해 인용되는 매체마다 정보가 달라 이런저런 의문점이 많은 전투이기도 하다. 전과나 병력의 규모부터 신문이나 증언, 사료에 따라 중구난방인 데다 일각에서는 전사했다는 지휘관 등 군인이 다른 출처에서는 멀쩡하게 살아 있는 등, 진위여부가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기록이 많다.[1]
2. 배경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난 후 만주에서의 독립 투쟁은 더욱 활발해졌고 이에 일제의 대만주 독립운동 탄압도 점차 강경해져 갔다. 이 과정에서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에서 독립군과 교전한 일제는 마침내 '간도지역 불령선인 초토계획'을 세워 간도지역에 대한 초토화작전을 계획하는 데 이르게 되었다.2.1. 독립군의 준비
일본에 맞서 북로군정서를 비롯한 독립군은 무기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여기 도움을 준 이들은 체코인들과 슬로바키아인들의 독립군인 ' 체코슬로바키아 군단(Československé legie)'이었다.원래 이들은 러시아군 소속으로 유럽 러시아 일대에서 독일 제국 및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맞서 싸우고 있었다. 그러나 1918년 파우스트슐라그 작전을 발동한 독일군과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러시아 서부로 물밀듯이 들어오자 이들은 시베리아로 밀려났고, 러시아 내전이 벌어지자 백군 편으로 가담하여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장악했다. 하지만 마침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조국 체코슬로바키아가 독립하자 귀국을 준비 중이었다.
1920년 2월 항구도시 블라디보스토크에 집결한 이들 군단은 소련 적군과의 휴전 협정이 성립된 후 쓸모가 없어진 무기를 처분하고자 했고 마침 독립군은 무력으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무기가 절실하게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에 양측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체코슬로바키아 망명 군대의 일부 병사들이 자신들이 보관하던 무기를 북로 군정서에 판매하였다.
다만 일각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체코 군단 자체가 한국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한 것은 아니다. 애초에 이들은 일본군을 포함한 연합군의 후원을 받았기 때문에 일본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으므로 이는 일부 군단원들의 일탈 행위였다. 실제로 일본은 군단원들의 무기 판매 행위를 알고 군단 사령부에 이를 근절하라며 압박을 가했고 군단 사령부는 이 점을 매우 우려했다. 그리고 그들의 고객은 한국인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잔존 백군 잔당, 중국 만주의 봉천군벌[2]등 다수의 구매자들이 있었다. 결국 일부 군단원들이 무기도 처분할 겸 이범석의 말마따나 동병상련의 민족도 도울 겸 규율을 어기고 응원과 함께 개인적으로 판매한 것.
무기 거래는 깊은 숲에서 한밤중에 이뤄졌고 동년 7월 독립군은 체코슬로바키아군에게서 매입한 무기인 권총, 기관총, 탄약 200정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간도로 수송했다. 이때 획득한 무기는 흔히 알려진 것처럼 체코제 무기가 아니라 모신나강 소총, 게베어 1871 등의 타국 소총들이었다. 만리허 소총 같은 체코제 무기는 군단의 적인 오스트리아군이 사용했고 군단은 미국에서 위탁생산해 지원해준 모신나강을 주력으로 사용했다. 참고로 모신나강은 러시아의 독자적인 단위체계로 설계되었기 때문에 야드파운드법을 쓰는 미국에서 라이센스 생산할 때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미제 모신나강은 성능이 영 시원찮다는 평가를 받았다.
2.2. 일본군의 준비
이렇게 독립군이 무장을 구입하는 동안 일본군은 '간도지역 불령선인 초토 계획'에 따라서 19사단 병력과 시베리아 파견군 28여단, 그리고 관동군 부대를 동원하고 산포, 비행기 등의 무장을 보강하며 훈춘-경원에 전산선을 설치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이후 일본군은 19사단 예하 병력을(73연대, 74연대, 27기병연대) 히가시 마사히코 소장 하에 병력을 동원하여 청산리의 독립군을 포위 섬멸하려고 하였다.2.3. 양측의 조우
양측이 서로 전력을 강화해 나가던 1920년 8월 하순 왕칭현 서대파에 주둔하던 북로 군정서의 주력 부대는 훈춘에 있는 일본 영사관을 습격해서 얻은 정보로써 시베리아에 파견되었던 제14, 13사단의 일부가 장고봉을 거쳐 남하하고 나남의 제21사단이 도문강을 건너 북상하며 만철의 수비대가 송화강을 건너 서진해 북로 군정서군을 3면에서 토벌하려는 작전이 진행 중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마침 독립군 탓에 대일 관계에 난처한 처지에 있던 중국 당국의 권고도 있었으므로 북로 군정서는 일단 안도현으로 이동해 서로 군정서와 합류한 다음 백두산 지역에 기지를 새로이 건설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9월 17일 이동을 시작했다. 대한 독립군도 봉천성의 경계 지역인 화룡현의 이도구, 삼도구 방면으로 이동했다.연길현을 거쳐 화룡현 서부 지역으로 이동한 북로 군정서 부대는 10월 10일경 안도현 경계 지역인 삼도구 청산리에 도착한 후 부근에 있는 이도구로 이동했던 홍범도 부대와 일본군의 간도 출병 대책을 협의했다. 10월 19일의 회의에서는 주전론과 피전론이 맞섰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피전론이 채택되었으나 이 때는 이미 일본군이 부근까지 다가온 상황이었다. 김좌진 부대는 계속 일본군의 동태를 파악하면서 전투를 자제하였으나 결국 추적을 따돌릴 수 없다고 판단해 일본군과 일전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2.4. 독립군 책임론
청산리 전투와 관련하여 독립군 책임론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청산리 전투의 원인에 대해 독립군이 경거하여 일본이 독립군에 대한 직간접적인 압박을 가했다는 주장과 청산리 전투의 일본군은 청산리 전투에서 망신을 당해서 분풀이로 학살을 자행하게 되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우선 전자를 보면 김경천 장군은 청산리 전투가 발생하기 전 일본이 중국군에게 독립군과 관련하여 압박을 가하여 중국 군대로 하여금 독립군을 해산하라고 했는데 "독립군의 경거함에도 원인이 있다"며 독립군한테도 잘못이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10월 4일...전하는 이야기를 들으니 북간도 한국군을 일본의 부추김을 받은 중국군대가 해산하라 한단다. 이는 우리 독립군에 대단히 중요한 사건이다. 그러나 그 독립군의 경거함에도 원인이 있다.
김경천, 경천아일록 읽기(탈초 및 현대어역 김병학, 학고방, 2019), 121.
김경천, 경천아일록 읽기(탈초 및 현대어역 김병학, 학고방, 2019), 121.
1920년 봄부터 독립군이 북간도 지역에서 연합과 통합을 반복하고 국내 진입 작전까지 시도하면서 일제 입장에서 북간도 독립군이 굉장히 '불편한' 존재로 보이게 된 것은 사실이고 이에 따라 간접적인 압박 뿐 아니라 직접적인 공격에까지 나서게 된 것도 사실이지만 북간도의 독립군 입장에서 보면 느긋하게 준비할 시간이 있는 것도 아니고 느긋하게 준비하더라도 일정 이상 세를 불리면 일제가 간섭할 것은 뻔한 이치이므로 빠르게 전력을 모아 공격에 나서는 것도 꼭 틀린 선택지라고 할 것은 아니다. 이는 독립운동가끼리 노선의 차이를 보인 수많은 사례 중 하나일 뿐 한쪽이 특별히 잘못했다고 해석할 사안은 아니다.
그리고 간도 참변이 봉오동, 청산리 전투에서의 패배에 대한 일제의 무자비한 보복이란 주장에 대해서는 일본은 배경 항목에도 나와 있듯 일찍이 간도지역불령선인초토화계획을 세우고 19사단과 28여단, 기타 관동군 부대를 동원한 상태였다. 따라서 일본은 독립군을 토벌하려다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해서 화풀이로 간도 참변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작정하고 간도의 조선인 세력을 초토화시키려고 계획까지 세워놓고도 청산리에서 목적 달성에 실패한 것이 된다. 그동안 선후 관계가 바뀌어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학살이 화풀이성이라고 알려졌던 것이다.
그리고 간도지역불령선인초토화계획이 청산리 전투보다 먼저 세워진 이상, '청산리 전투에서의 일본군의 작전 목적 달성 실패가 간도 참변으로 이어졌다'는 주장은 옳지 않은 것이 된다. 위에서 서술하였듯 이미 일본은 청산리 전투가 일어나기도 전에 간도 지역에 대한 초토화작전을 결심하고 대규모 부대를 간도로 투입하였기 때문이다.
3. 전투
|
청산리전투 상상화 |
교전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되었다. 굶주림! 그러나 이를 의식할 시간도 먹을 시간도 없었다. 마을 아낙네들이 치마폭에 밥을 싸 가지고 빗발치는 총알 사이로 산에 올라와 한 덩어리 두 덩이 동지들 입에 넣어 주었다.
―이범석, “우등불”
10월 21일 비전투원들로 편성된 제1제대와 전투요원으로 편성된 제2제대는 각각
김좌진과
이범석의 지휘 하에 청산리 백운평 바로 위쪽의 고개마루와 계곡 양쪽에
매복해 전투준비에 돌입하였다. 청산리 계곡은 동서로 약 25km에 달하는 긴 계곡으로서 계곡의 좌우는 인마의 통행이 곤란할 정도로 울창한 삼림지대였다.―이범석, “우등불”
오전 9시경 야스가와가 이끄는 추격대가 계곡의 좁은 길을 따라 매복 중이던 이범석 부대와 교전을 벌였다. 뒤이어 야마다가 지휘하는 본대가 그곳에 도착하여 이들과 독립군 사이에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김좌진은 이범석에게 명령을 내려 부대원을 이끌고 갑산촌으로 철수를 지시했다. 독립군은 이 전투에서 유리한 지형을 이용해 일본군에 큰 피해를 줬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일본측 기록에 따르면 독립군을 격퇴하였다고 한다.
김좌진 부대가 철수하던 시각에 그곳에서 얼마 안 떨어진 이도구 완루구에서는 홍범도 부대가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이때 독립군과 일본군의 군복 색깔이 거의 비슷하여 일본군이 자기들끼리 서로를 오인 사격하는 상황이 벌어져 독립군이 전과를 올렸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일본측 기록에 따르면 아예 전투 자체를 벌이지 않았다고 한다.
한편 22일 새벽 갑산촌에서 합류한 김좌진 부대의 제1·2지대는 그곳 주민들로부터 부근의 천수동에 일본군 기병대가 머물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곧 그곳으로 이동하여 일본군 기병 연대와 교전을 벌였다.
곧 일본군 대부대의 반격이 있으리라 생각한 김좌진은 부대원을 어랑촌 부근의 고지로 이동시켜 오전 9시부터 포위 공격해 오는 일본군을 막아내었다. 이때 독립군을 공격한 일본군은 우회 공격에 실패하여 어랑촌으로 이동한 가노 노부테루 대좌가 지휘하는 27기병연대 병력이었다. 당시 부근에 있던 홍범도 부대도 포위되어 있던 김좌진 부대를 도와 일본군과의 전투에 참가했다. 이에 일본군은 야포까지 동원하여 독립군을 공격하였고 전투는 해질녘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날이 저물자 탄약부족과 일본군 증원 부대를 우려한 김좌진과 홍범도의 부대는 어랑촌 부근 고지에서 철수했다.
다음 날 23일부터 이들은 추적하는 일본군 수색대와 산발적인 접전을 벌이면서 고동하(古洞河)를 따라 상류로 이동하였다. 대체로 독립군은 흩어져서 이동했다.
24일 저녁 8시 천보산의 광산을 지키던 일본군 중대와 전투를 벌였고 25일 새벽 식량을 수집하러 갔던 독립군이 재차 전투를 벌였다.
한편 독립군의 행방을 추적하던 일본군은 25일 밤 고동하 계곡의 독립군 야영지를 포착하여 급습했다. 추위로 인해서 불을 피운 것 때문에 발각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로 인해 난전이 벌어졌다. 독립군은 반격을 가해 이 습격을 저지했다고 기록했으며 이후 새벽 무렵 방어 태세에 들어간 일본군을 피해 안도현 지역으로 부대를 옮겼다.
이후 독립군은 일본군의 포위망이 좁아져 오자 동북쪽의 밀산으로 대거 후퇴하였고 이동휘의 제안에 따라 소련으로 올라갔다가 자유시 참변 문제가 불거지기까지 하는 등 악재 속에서 투쟁 역량을 상실해 갔다.
또 전투에서 독립군이 일정한 목적을 달성한 것과는 별개로 전략적으로는 일본군이 간도참변을 자행하는 동안 동포 사회를 보호할 방법을 내놓지 못한 임시정부의 권위가 크게 실추되는 계기가 되었다.
청산리대첩 이후 일본군에 의해 '간도참변'이 야기될 때 상해임시정부가 효과적 대응책을 내놓지 못했고, 더구나 서·북간도의 동포사회를 궁극적으로 보호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임시정부의 권위가 크게 떨어지게 되었다. 내외에서 비판여론이 적지 않게 일어났고, 북경과 상해의 반임시정부 세력들은 반임시정부 운동을 강화하게 되었다. 성립 초기에 임시정부 지지와 봉대를 표명했던 연해주의 국민의회 역시 반임시정부적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장세윤, 중국동북지역 민족운동과 한국현대사(2005, 명지사), 163. 재인용
장세윤, 중국동북지역 민족운동과 한국현대사(2005, 명지사), 163. 재인용
4. 평가
해방 이후 일선 교육 현장에서는 이 전투를 독립군이 압도적인 교환비로 일본군을 물리쳤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에 대첩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으며 오랜 기간 동안 일제강점기 무장 독립 투쟁의 아이콘으로 기능해 왔다. 1990년대 이전까지 중고등학교를 다닌 사람들은 청산리 전투보다는 대첩이라는 단어가 더 익숙했을 것이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90년대부터 반박이 나왔으며 민간에서도 2000년대 이후 한일 양국 네티즌 간의 정보 공유가 활발해지고 여러 사료를 통한 교차검증이 행해지면서 대승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결론이 도출되었으며 이는 심한 논쟁과 논란거리를 낳았다. 워낙 민감한 주제다 보니 공론화되지는 않았지만 21세기 들어 이 사건을 가리키는 용어로 '대첩'이 쓰이는 빈도는 확실히 줄어들었으므로 암묵적으로 한국 역사학계도 이 사건의 사실 관계가 대첩과는 달랐음을 시인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과거 한국에서는 독립군 측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제출한 보고서를 근거로 하여 1,000여 명을 사살한 대전과를 올린 것으로 기록했지만 여러 연구를 통해 이 정도의 성과를 올렸는지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한국 역사학계도 많아졌다. 한국과 일본에서 제시하는 자료를 교차시키면 내용 자체가 상이한 부분이 다수이며 부정확한 요소가 많아 독립군의 전과가 과장됐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보통의 경우 10% 손실만 나도 보충병을 받으며 버티든지, 아니면 퇴각한 다음 재편성하는 등 어떤 식으로든 조치를 취하는 게 정상이다.
어쨌든 독립군이 추격하는 일본군과 교전을 벌여서 발목을 잡은 다음 이들을 피해 다른 지역으로 계속 이동하는 형태로 전투를 수행했고 그 과정에서 대단한 전과를 거두기보다는 일본군을 상대로 교전의 의의와 약간의 전술적 성과를 올렸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최초로 전과 부분에 대한 묘사가 나온 것은 박은식이 쓴 독립 운동의 사기 진작을 위한 일종의 역사서인 "한국독립운동지혈사"다. 여기서 가노 연대장 이하 1,600명을 사살했다고 했지만 박은식 역시 목격담을 듣고 쓴 것이기 때문에 명확한 근거는 없었다. 해방 후 이범석이 쓴 자서전에서는 3,300명까지 전과가 점점 늘어났다. 1,000명~3,300명의 사망자를 냈다는 설은 반론이 제기되는데 박창욱 연변대 교수의 반론을 들어보도록 하자.[3]
「야스가와 소좌가 인솔하는 1개 중대 병력을 선두부대로 추격하여 백운평에서 약 1천미터 남짓 되는 지점에서 김좌진 부대와 접전하게 되었다.
……전투는 야스가와가 인솔하는 1개 중대와 적을 견제하기 위한 북로 군정서 후속 부대 사이에 오전 9시 반경부터 시작되었다. 북로 군정서 부대는 우세한 지세를 차지하여 적을 급습한 결과 비록 약 30분 동안의 전투였으나 적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적들의 정보 자료에 의하면, 그날(21일) 전투 후 야마다지대는 오후 2시 반 가량까지 북로 군정서 부대를 추격하여 노령까지 갔으나 산림을 이용하여 이동한 북로 군정서 부대를 잃어버리고 철군하였다고 한다. 이를 역사상 '백운평 전투'라고 부른다.
그런데 문제는 일부 서술에서 이 21일의 백운평 전투를 대서 특서하여 수다한 적을 섬멸하였고, 이에 덧붙여 적들은 자기들끼리 서로 맞불질하여 막대한 손신을 입었다고까지 하였다.
21일 전투의 전 과정을 보면 실제 전투 시간은 불과 한 시간도 못 되며 적들의 추격·수색 시간까지 합하여 약 4시간 정도이다. 그런즉 이런 짧은 시간에, 그것도 약소한 후속 부대가 그렇게 수다한 적을 섬멸할 수 있었겠는가? 적들의 손실도 야스가와 소좌가 인솔한 선두 부대에 불과하다. 가령 야스가와가 인솔한 1개 중대가 전멸되었다고 하여도 그 수는 백여 명 남짓일 것이다.[4] 특히 적들 상호간에 맞불질이 있었다고 하는 것은 당시의 적 병력배치를 놓고 봐도 근거가 없는 과장이다.」
(중략)
「전투에서 북로 군정서군의 교성대를 직접 인솔하여 전투에 참가한 이범석 씨는, 대한민국의 국무 총리를 담당한 국가 수뇌의 신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좌진의 공로를 과대 평가하고 홍범도와 그 연합 부대의 공로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도리어 홍범도군은 청산리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다고까지 역사를 왜곡하였다. 청산리 전투의 전과도 지난날의 독립 신문 보도에는 가노 기병 대좌 이하 950여 명으로 기재되던 것이, 그에 의하여 1,200명, 그 후에는 3,000명으로까지 엄청나게 과대되었다.
청산리 전투의 현장이 백운평이나 야지골, 완루구나 고동하 현장에 가본 이들은 그러한 큰 전투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백운평에서 노령으로 가는 삼림 도로가 잘 수축되어 자동차가 왕래하고 있으나, 전투 당시에는 청산리 송월평으로부터 냇물을 따라 진동나무 삼림 속으로 오솔길이 있었을 뿐이다. 당시 일본군들도 자기들의 작전 지도에 "청산리 서쪽부터는(죽평양촌) 야포도 통과할 수 없고 보병도 일렬 종대로 통과"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 즉 약소한 병력으로서 1,000명 ~ 3,000명의 일본군을 섬멸하였다면, 그 많은 일본군이 원시림과 습개지로 이루어진 협소한 계곡을 일렬 종대로 들어가는 데는 대단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또 그 많은 군대는 좁은 골 안에서 미처 산개할 여지도 없었을 것이다.
당시 실제 병력을 고찰하면 백운평 전투에 참가한 야마다 지대는 보병 5개 중대, 기병 1개 소대 그리고 기관총대와 보병 포대였는데, 이들은 22일 노령 방면으로 추격하느라 어랑촌 전투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22일 완루구 전투에는 아즈마 지대 1개 대대와 기관총 소대 2, 보병 포대 그리고 천보산에서부터 우회하여 남양촌에서 숙영하고 서쪽으로부터 진공한 이이노 2개 중대였다. 기병 27연대의 2개 중대는 처음 아즈마 지대와 함께 홍범도 부대를 포위하기 위하여 송평령, 차창자로 우회하여 21일 어랑촌에서 숙박하였다. 22일에는 아침부터 아즈마 지대 예비대(2개 중대)와 함께 어랑촌 전투에 참가하여 김좌진 부대와 싸웠고, 오후 2시 반부터는 아즈마 지대와 이이노 부대도 어랑촌에서 홍범도 부대와 싸웠다.
이렇게 보면 21일 백운평 전투에 투입한 적의 총병력은 650명을 초과하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 싸운 것은 야스가와가 인솔한 1개 중대이다. 22일 어랑촌 야지골에서 아침부터 김좌진 부대와 싸운 일본군은 기병 27연대의 2개 중대와 예비대(2개 중대)이고, 오후에는 홍범도 부대도 이 전투에 참가하다보니 아즈마 지대 1개 대대와 이이노 2개 중대 합계 850여 명으로 계산된다. 그런즉 백운평 전투에서 일본군을 전멸시켰다고 하여도 600여 명밖에 안될 것이고, 만약 야스가와 소좌의 선발대를 전멸시켰다면 100여 명 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사실 전멸시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22일 어랑촌 전투에서 김좌진 홍범도 부대가 일본군을 전부 섬멸하였다고 하여도 800여 명일 것이요. 청산리 전투 전체에 동원된 일본 병력은 후(24일 이후)에 2개 대대가 증가되었으니 2,500명을 초과하지 않았을 것인데 어떻게 1,200명 ~ 3,000명을 섬멸했었다는 것일까.
상술한 전과에 대한 과장은 비록 당시 상해 독립 신문에서는 직접 현지 사찰을 못하고 원지에서의 투고에 따라, 그리고 당시 정세에서 민족의 반일 투지를 고무하고자 다소 과장한 것은 양해할 수 있다손치자, 그러나 광복 이후 당시 전투에 직접 참가하였던 분이 사실을 왜곡 과장하여 세상 사람들을 미혹시킨다는 것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 박창욱 , 김좌진 장군의 신화를 깬다, 역사 비평, 1994년 2월, 182 - 183, 186 - 187
……전투는 야스가와가 인솔하는 1개 중대와 적을 견제하기 위한 북로 군정서 후속 부대 사이에 오전 9시 반경부터 시작되었다. 북로 군정서 부대는 우세한 지세를 차지하여 적을 급습한 결과 비록 약 30분 동안의 전투였으나 적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적들의 정보 자료에 의하면, 그날(21일) 전투 후 야마다지대는 오후 2시 반 가량까지 북로 군정서 부대를 추격하여 노령까지 갔으나 산림을 이용하여 이동한 북로 군정서 부대를 잃어버리고 철군하였다고 한다. 이를 역사상 '백운평 전투'라고 부른다.
그런데 문제는 일부 서술에서 이 21일의 백운평 전투를 대서 특서하여 수다한 적을 섬멸하였고, 이에 덧붙여 적들은 자기들끼리 서로 맞불질하여 막대한 손신을 입었다고까지 하였다.
21일 전투의 전 과정을 보면 실제 전투 시간은 불과 한 시간도 못 되며 적들의 추격·수색 시간까지 합하여 약 4시간 정도이다. 그런즉 이런 짧은 시간에, 그것도 약소한 후속 부대가 그렇게 수다한 적을 섬멸할 수 있었겠는가? 적들의 손실도 야스가와 소좌가 인솔한 선두 부대에 불과하다. 가령 야스가와가 인솔한 1개 중대가 전멸되었다고 하여도 그 수는 백여 명 남짓일 것이다.[4] 특히 적들 상호간에 맞불질이 있었다고 하는 것은 당시의 적 병력배치를 놓고 봐도 근거가 없는 과장이다.」
(중략)
「전투에서 북로 군정서군의 교성대를 직접 인솔하여 전투에 참가한 이범석 씨는, 대한민국의 국무 총리를 담당한 국가 수뇌의 신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좌진의 공로를 과대 평가하고 홍범도와 그 연합 부대의 공로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도리어 홍범도군은 청산리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다고까지 역사를 왜곡하였다. 청산리 전투의 전과도 지난날의 독립 신문 보도에는 가노 기병 대좌 이하 950여 명으로 기재되던 것이, 그에 의하여 1,200명, 그 후에는 3,000명으로까지 엄청나게 과대되었다.
청산리 전투의 현장이 백운평이나 야지골, 완루구나 고동하 현장에 가본 이들은 그러한 큰 전투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백운평에서 노령으로 가는 삼림 도로가 잘 수축되어 자동차가 왕래하고 있으나, 전투 당시에는 청산리 송월평으로부터 냇물을 따라 진동나무 삼림 속으로 오솔길이 있었을 뿐이다. 당시 일본군들도 자기들의 작전 지도에 "청산리 서쪽부터는(죽평양촌) 야포도 통과할 수 없고 보병도 일렬 종대로 통과"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 즉 약소한 병력으로서 1,000명 ~ 3,000명의 일본군을 섬멸하였다면, 그 많은 일본군이 원시림과 습개지로 이루어진 협소한 계곡을 일렬 종대로 들어가는 데는 대단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또 그 많은 군대는 좁은 골 안에서 미처 산개할 여지도 없었을 것이다.
당시 실제 병력을 고찰하면 백운평 전투에 참가한 야마다 지대는 보병 5개 중대, 기병 1개 소대 그리고 기관총대와 보병 포대였는데, 이들은 22일 노령 방면으로 추격하느라 어랑촌 전투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22일 완루구 전투에는 아즈마 지대 1개 대대와 기관총 소대 2, 보병 포대 그리고 천보산에서부터 우회하여 남양촌에서 숙영하고 서쪽으로부터 진공한 이이노 2개 중대였다. 기병 27연대의 2개 중대는 처음 아즈마 지대와 함께 홍범도 부대를 포위하기 위하여 송평령, 차창자로 우회하여 21일 어랑촌에서 숙박하였다. 22일에는 아침부터 아즈마 지대 예비대(2개 중대)와 함께 어랑촌 전투에 참가하여 김좌진 부대와 싸웠고, 오후 2시 반부터는 아즈마 지대와 이이노 부대도 어랑촌에서 홍범도 부대와 싸웠다.
이렇게 보면 21일 백운평 전투에 투입한 적의 총병력은 650명을 초과하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 싸운 것은 야스가와가 인솔한 1개 중대이다. 22일 어랑촌 야지골에서 아침부터 김좌진 부대와 싸운 일본군은 기병 27연대의 2개 중대와 예비대(2개 중대)이고, 오후에는 홍범도 부대도 이 전투에 참가하다보니 아즈마 지대 1개 대대와 이이노 2개 중대 합계 850여 명으로 계산된다. 그런즉 백운평 전투에서 일본군을 전멸시켰다고 하여도 600여 명밖에 안될 것이고, 만약 야스가와 소좌의 선발대를 전멸시켰다면 100여 명 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사실 전멸시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22일 어랑촌 전투에서 김좌진 홍범도 부대가 일본군을 전부 섬멸하였다고 하여도 800여 명일 것이요. 청산리 전투 전체에 동원된 일본 병력은 후(24일 이후)에 2개 대대가 증가되었으니 2,500명을 초과하지 않았을 것인데 어떻게 1,200명 ~ 3,000명을 섬멸했었다는 것일까.
상술한 전과에 대한 과장은 비록 당시 상해 독립 신문에서는 직접 현지 사찰을 못하고 원지에서의 투고에 따라, 그리고 당시 정세에서 민족의 반일 투지를 고무하고자 다소 과장한 것은 양해할 수 있다손치자, 그러나 광복 이후 당시 전투에 직접 참가하였던 분이 사실을 왜곡 과장하여 세상 사람들을 미혹시킨다는 것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 박창욱 , 김좌진 장군의 신화를 깬다, 역사 비평, 1994년 2월, 182 - 183, 186 - 187
이게 1994년에 나온 글임을 감안하면 학계와 민족주의 사관으로 서술된 교과서의 괴리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다. 물론 그 기저에는 독립군에 대한 한국 여론의 지나친 신격화가 있다.
또 김경천 장군 역시 '청산리 대첩' 보도에 대해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한 바 있다.
3월 21일...상해에 있는 우리 임시정부 군무부에서 출판한 북간도군정서 총재 서일군의 격고문 및 북로군 전투상보라 하는 것이 왔기에 나는 큰 희망으로 읽어보니 심장을 끊어지게 하는 매우 통분한 어구도 있다. 그러나 그 중에 좀 과도한 난리를 당한 일이 있는가 한다. 물론 이번 북간도 사건은 나도 대개 아는 것이다. 그 상보에 씌었기를 일본군은 죽은 자가 연대장 1인, 대대장 2인, 장교이하 1254인, 부상자가 장교이하 200여인이라 하며 그 군정서 군대는<총 숫자가 400여명이다> 죽은 자 1인이요 부상자가 5인이요 포로 된 자 2인이라 한다. 그런즉 이 군대는 능히 400으로 적의 연대<혼성으로 포병과 포 몇 문이 있다>와 접전하며 400의 3배 이상을 전멸시킨 것이라. 동서양전쟁사에 그런 예가 있기는 있다. 그러나 이 군대는 일본군의 공격과 포위를 당해서 도피한 것인가 하였더니 이같이 공개할만한 승리를 얻은 것이라 한다.
나는 우리 민족이 허례를 좋아하며 실행이 여기에 따르지 않는 인성이 있음을 한하는 바러니 지금도 역시 그렇다. 우리의 앞길이야말로 실로 딱하다 할 수 있다. 아아, 저 그리스 왕 레오니다스는 600명의 군인을 이끌고 본대를 떠나 적진 깊숙히 들어가 외로이 성을 지키다가 수만 명의 페르시아군의 포위공격을 당해 전멸할 때까지 악전하였으므로 전 그리스민족에게 대 분노를 일으키며 대 단체를 짓게 하여 그리스인이 문득 대군을 모아 페르시아군을 대파하고 그 왕 레오니다스 및 부하가 전사한 곳에 비를 세우고 새겼으되
"그리스인아 우리는 너희를 위하여 그 명령대로 죽노라"하였다.
아아 이 전례와 군정서의 조란이 어찌 같은가. 이것뿐 아니라 이전부터 외지에 나와서 나라의 일을 도모하는, 우리보다 먼저 온 무리들이 모두 이런 식으로 일을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아무 하는 일 없이 상심만 한다. 깊이깊이 우리 명심할 것이다. 우리 민족같이 일에 단련 없는 민족은 세계에서 드물다. 공명하고 올바른 성질은 매우 적다. 무엇을 하든지 정직하지 않고 허명에 만족한다. 나는 이로써 장래를 많이 염려한다.
...왼쪽 여백의 글: 북간도에서 이 군정서가 당한 난리를 친히 겪고 들어온 사람을 만나서 자세한 소식을 들으니 청산리에 우리 민가가 10호인데 여기에 독립군이 있는 줄 알고 일본병사가 들어오기에 독립군이 미리 알고 아래로 피하니 일본병사가 와서 주민에게 탐문한즉 위로 갔다 하니 일본병사가 위로 올라가는 것을 아래에 있는 독립군이 후방에서 사격하고 도망하니 일본병사가 그 주민이 자기를 속였다 하여 그 동네에 여자 7명만 남기고 싹 죽였다 하니 아아 무슨 범벅인지.
경천아일록 읽기(탈초 및 현대어역 김병학), 133-134.
나는 우리 민족이 허례를 좋아하며 실행이 여기에 따르지 않는 인성이 있음을 한하는 바러니 지금도 역시 그렇다. 우리의 앞길이야말로 실로 딱하다 할 수 있다. 아아, 저 그리스 왕 레오니다스는 600명의 군인을 이끌고 본대를 떠나 적진 깊숙히 들어가 외로이 성을 지키다가 수만 명의 페르시아군의 포위공격을 당해 전멸할 때까지 악전하였으므로 전 그리스민족에게 대 분노를 일으키며 대 단체를 짓게 하여 그리스인이 문득 대군을 모아 페르시아군을 대파하고 그 왕 레오니다스 및 부하가 전사한 곳에 비를 세우고 새겼으되
"그리스인아 우리는 너희를 위하여 그 명령대로 죽노라"하였다.
아아 이 전례와 군정서의 조란이 어찌 같은가. 이것뿐 아니라 이전부터 외지에 나와서 나라의 일을 도모하는, 우리보다 먼저 온 무리들이 모두 이런 식으로 일을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아무 하는 일 없이 상심만 한다. 깊이깊이 우리 명심할 것이다. 우리 민족같이 일에 단련 없는 민족은 세계에서 드물다. 공명하고 올바른 성질은 매우 적다. 무엇을 하든지 정직하지 않고 허명에 만족한다. 나는 이로써 장래를 많이 염려한다.
...왼쪽 여백의 글: 북간도에서 이 군정서가 당한 난리를 친히 겪고 들어온 사람을 만나서 자세한 소식을 들으니 청산리에 우리 민가가 10호인데 여기에 독립군이 있는 줄 알고 일본병사가 들어오기에 독립군이 미리 알고 아래로 피하니 일본병사가 와서 주민에게 탐문한즉 위로 갔다 하니 일본병사가 위로 올라가는 것을 아래에 있는 독립군이 후방에서 사격하고 도망하니 일본병사가 그 주민이 자기를 속였다 하여 그 동네에 여자 7명만 남기고 싹 죽였다 하니 아아 무슨 범벅인지.
경천아일록 읽기(탈초 및 현대어역 김병학), 133-134.
김경천 장군 기록의 요지는 그리스( 스파르타)의 왕 레오디나스는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실제로 압도적인 병력 차의 페르시아군을 상대로 포위되어 전멸할 때까지 싸워 그리스인들의 결집을 이끌어냈는데 청산리 전투의 독립군은 다수 일본군의 포위 시도를 좌절시켰으면 그걸 솔직하게 말하면 되는 걸 굳이 없는 말을 지어내서 대첩 같은 소리를 하니 세상에 이런 민족이 어디 있겠느냐는 것이다. 민족주의적인 시각 때문에 청산리 대첩이라고 과장한 게 아니라 오히려 민족주의적인 시각 때문에 대첩이란 과장에 분노한 것이다.
다만 테르모필레 전투는 달랑 600명끼리 적진으로 쳐들어 가서 죽을 때까지 싸우고 끝난 전투가 아니라 후방에서 주민들을 소개시키고 병력을 결집할 행정력을 가진 폴리스들이 있는 상황에서 페르시아군의 전진을 막아 시간을 벌기 위해 7000여 명의 그리스 연합군이 길목을 막고 지연전을 펼치던 중 우회로가 발각되자 1500여 명이 남아 후위를 지킨 싸움으로, 레오니다스 왕과 1500 결사대의 행적이 영웅적이었던 것은 맞지만 이들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세력 간 전면전에서 아군 후방의 행정력이 발휘될 시간을 벌기 위해 나선 싸움이었다. 독립군처럼 전멸할 때까지 싸워 민족을 각성시킨다 해도 후방에서 대 단체, 대군을 지을 행정력을 가진 기관이 없는 게릴라와는 상황이 다르며 오히려 게릴라 전술에서 가장 피해야 할 것은 정규군 주력과 정면으로 충돌하여 소모되어 주는 것이다.
4.1. 한국 측의 주장
일본 측의 주장 역시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 있는데 첫 번째 근거로 일본군이 자신들의 패배를 축소, 은폐한 사례들이 실존한다는 것을 들 수 있다.[5] 청산리 전투가 대첩이었는데 일본이 날조했다는 것이 아니라 게릴라를 상대로 인명피해를 내면서 목표 달성에도 실패한 일본군 입장에서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아 사실대로 서술하지 않았을 가능성은 상존하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대목이 바로 일본 측 기록인 간도출병사에서도 나타난다.- 첫 번째, 간도출병사에 따르면 일본군은 500명~600명 규모의 기관총을 보유한 무장 조직을 상대로 1개 기병 연대는 퇴로 차단을, 1개 보병 연대는 추격을 맡았으므로 확실한 병력의 우세를 점한 상태였으며 실제로 600명 규모의 숙영지 흔적을 발견함으로써 첩보가 사실이라는 것까지 확인한 상태였다. 그런데 이후 본격적인 추격에 나선 것은 고작 1개 보병 중대 메이지 23년 육군 정원령에 명시된 1개 중대의 정원은 장교와 부사관까지 포함해서 136명이었고 이들은 30분 이상 단독으로 교전한 후에야 연대 주력의 구원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본대와 멀리 떨어진 상태였다. 600명 규모의 무장 조직을 상대로 4:1 이하의 열세에 처한 상태로 교전을 벌였는데 오히려 1대 4의 압도적인 교환비를 보이며 적을 물리쳤다고 한다. 그러니까, 일개 중대가 고립된 상태에서 지리적으로도 열세에 놓이고 수적으로 4배 이상 많은 적에게 기습을 받아 핀치에 몰려 있었으나 용전분투하여 오히려 4대 1의 유리한 교환비로 교전을 마무리했다는 것인데, 정규군과 게릴라의 질적 차이를 감안해도 과장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반론으로 제기한 예시들은 모두 정규군이 기습의 묘를 살려 들이치거나 높은 훈련도나 병종의 이점을 살려 자유롭게 기동할 수 있었던 상황이었는데 거꾸로 정규군 쪽인 일본군이 기습당하고 병종의 이점도 없었으며 높은 훈련도를 살려 빠르게 기동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으니 그것이 똑같이 일어날 것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예시로 든 전투들과 같은 전쟁인 왜란과 호란에서 벌어진 수많은 전투에서 비정규군인 의병들이 숫적 / 지리적 / 전술적으로 모두 우세한 상황에서도 항상 모랄빵을 터트리며 달아나기 바빴는가?
- 두 번째, 일본 측은 야스쿠니 신사에 기록된 인원과 후생성 자료, 제19사단 사령부 보고서의 내용이 일치한다는 것을 근거로 들지만 애초에 앞의 두 자료는 2차 사료에 가깝다. 제19사단 사령부 보고서를 바탕으로 전몰자를 봉안한 것이 야스쿠니 신사고 같은 보고서를 채택하여 연금 수혜자를 결정한 것이 후생성의 자료다. 서로를 참고한 자료들이 같은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이지, 같은 말을 하고 있다고 신빙성이 늘어날 이유는 전혀 없는 것이다. 또 야스쿠니 신사가 모든 전몰자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전후에도 살아 있던 사람이 야스쿠니 신사의 명부에 오른 경우가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기 때문. # 야스쿠니 신사가 자체적인 조사단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럼 대체 무엇을 근거로 집계했길래 이런 말도 안 되는 오류가 있는 것인가?
청산리 전투의 전사자에 관한 한국 측 주장을 정리하면 첫째, 현대로 올수록 한국 측 자료의 추정치 역시 납득 가능한 선에서 모이고 있고 둘째, 이 정도의 인명 피해라면 재편성을 위한 인사 명령까지는 갈 필요가 없으며 셋째, 일본 측 사료를 전적으로 따른다 하더라도 세부적인 기록에서 믿기 어려운 부분이 많고 넷째, 후생성 자료와 야스쿠니 신사, 제19사단 사령부 보고서는 서로를 바탕으로 작성된 것이므로 상호 간의 일치가 신뢰성의 근거로 작용할 수 없고 다섯째, 야스쿠니 신사의 전몰자 기록이 정확하지 않으니 일본 측이 주장하는 손실비가 사실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일본어 위키백과의 도표에서도 전술적으로는 승리했지만 전략적으로는 실패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2018년 9월자 기사에 따르면 신효승 동북아역사재단 연구 위원은 계간지 '역사 비평' 최신호에 기고한 '보고에서 석고화한 기억으로 - 청산리 전역 보고의 정치학'이라는 글에서 청산리 전투의 실체는 다분히 불투명하다고 지적했다. 다만 당시 독립군의 상황과 전장환경 속에서 특수한 환경임을 감안했을 시 오류가 있을 수 있으며 청산리 전투의 실상과 의의와 달리 근본적으로 확인하기 어려운 전과 논쟁에 매몰된다면 본질이 변질할 수 있다고 보론했다. '청산리 전투 기록, 과대 평가 가능성 고려해야'
그것과 별개로 전투 결과가 일본 측 기록과 같다고 해도 전투에서 소기의 전술적 목적을 이룬 쪽은 독립군 측에 가깝다. 조직을 온존하여 이동하는데 성공하였고 포로도 나오지 않은 것으로 보아 추격전의 목적 달성에는 완전히 실패했다고 봐도 된다.[6] 일본군 전사자가 적다고 해도 저 전투 결과는 상부에서 문책을 하면 했지 칭찬을 받을 결과가 절대 아니다.
다만 이후까지 보자면 일본군은 목적을 달성했다. 봉오동-청산리 전투는 1919년부터 이미 진행되고 있었던 일본군의 대대적인 연해주 일대 항일 세력 토벌 작전의 일환에서 발생한 작은 무력 충돌에 불과했으며, 청산리 전투를 끝으로 일본군은 만주 일대에서 독립군을 일소하는 데 성공한 반면 여러 군소 조직으로 이뤄져 있던 독립군은 그간 어렵게 다져 온 본거지를 완전히 상실하고 약 8개월 간 이곳저곳을 떠돌다 자유시 참변으로 몰살당했기 때문에 전략적 관점에서는 일본의 작전 성공이라 할 수 있겠다. 또 봉오동-청산리 전투 후 벌어졌던 간도 참변도 연해주 참변의 연장선에 있었던 토벌이었지, 단순히 패전해 대한 분풀이로 저지른 학살은 아니었다.
교과서에 따라서는 구체적인 전과는 언급하지 않고 청산리 전투의 의의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는 듯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당시의 토론 주제는 '일본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청산리 대첩이 대첩이냐 아니냐'였기 때문에 논쟁에서 주장을 관철당하고 이렇게 최소한의 의의를 찾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만큼 기존 사관에서 후퇴한 건 사실이라는 점이다.
4.2. 일본 측의 주장
- 일본군이 정말로 수천 명 규모에 달하는 피해를 입었다면 일본군은 마땅히 그 피해를 보충받았어야 하는데 수천 명이나 되는 보충인원이 일본에서 만주까지 이동하는데도 행정 문서 등의 기록이 남지 않았다는 것은 한국 측 기록을 믿기 어렵게 만든다. 또 한국 측의 주장대로 일본군이 졸전을 펼쳐 독립군을 섬멸시키기는커녕 대량의 사상자만 낸 전투였다면 당연히 사단장을 보직 해임시키는 등의 인사조치가 취해지는 것이 정상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런 인사조치 역시 확인되지 않는다.
- 그리고 유일하게 실명이 거론되는 '연대장 가납'과 이름이 비슷한 사람은 가노 노보테루 연대장인데 간도 출병사에 따르면 가노 연대장이 지휘한 제27기병 연대는 퇴로 차단을 위한 기동에 나섰으나 습지가 너무 많아 퇴로 차단은 실행하지도 못하고 어랑촌에 포진한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가노 연대장이 설령 전사했다 하더라도 우리가 익히 아는 '계곡 속에 들어온 일본군을 섬멸'하는 과정에서 전사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또한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가노 노보테루는 청산리 전투 이후인 1922년까지 군 생활을 계속한 것으로 나온다. 가노 연대장은 제3자인 중국 기록에서도 전투 이후인 11월 13일 중국의 지방 군경들이 조사한 보고서에 생존한 상태로 등장한다. 295페이지 무료 다운받아서 볼 것
- 또 한국 측의 주장에서 1:4의 압도적인 수적 열세 속에서도 전상자 교환비가 1:4라는 전과가 과장이 아니냐고 하지만 군대라는 조직은 조직 체계가 제대로 잡혀 있어야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17명밖에 안 되는 금 제국 기병에게 송군 2,000여명이 털린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 오합지졸들이 숫자만 많다고 해서 제대로 된 싸움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 역사만 살펴보더라도 1,500여 명의 일본군에게 5만 ~ 8만 명의 징집병들이 모랄빵 터지고 달아나기 바빴던 용인 전투가 있다. 당시 일본은 비록 말석에나마 열강 자리에 들 수 있었던 근대 국가로, 일본군은 그런 근대 국가에서 제대로 조련한 집단이었다. 훈련도나 체제, 기강, 무장 등 모든 면에서 열정은 높았지만 기강은 잡히지 않았던 독립군이 숫적, 지리적 우위를 점했다고 해서 그것이 그대로 교전 결과로 이어진다는 보장은 할 수 없는 것이다.
- 야스쿠니 신사의 기록에 부정확한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대부분은 일본의 행정력이 취약해지는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인 1945년에 집중되어 있고 청일전쟁이나 러일전쟁, 전간기, 중일전쟁, 할힌골 전투 시기는 행정력이 유지되었기 때문에 실제와 별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일본군이 대패를 감추기 위해 3,000명을 11명으로 줄였다면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지 못한 2,989명의 유족들의 항의는 어떻게 감당할 건가?[7]
1979년과 1985년에 나온 일본의 군사 사학자 사사키 하루타카의 청산리 전투 연구 논문에 따르면 일본 제19사단 사령부의 보고서를 근거로 일본 측에서는 청산리 전투의 일본인 사상자를 전사 11명, 부상 24명으로 파악하였다. 그리고 이 수치는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된 전사자 명부와 일치한다. 따라서 일본 측은 이 기록을 바탕으로 청산리 전투의 사상자를 파악했다. 일본군의 조선군(조선 주둔 일본군) 사령부에서 편찬한 『간도출병사(間島出兵史)』도 피해가 미미했다고 적었는데, 간도 출병사는 일본군이 본토에 보고하는 비밀보고서를 바탕으로 쓰여진 것으로 여기서도 피해를 줄인다는 것은 상식에 맞지 않다.
청산리 전투의 전사자에 관한 일본 측의 주장을 정리하면 첫째, 한국 측 자료의 추정치가 지나치게 들쭉날쭉하여 그대로 신뢰하기 어려우며 둘째, 수천 명이나 되는 대규모 인명 피해가 있었는데도 군을 재편한 흔적이 보이지 않으며 셋째, 유일하게 사료에서 사망자로서 이름이 거론된 가노 노보테루는 청산리 전투 이후에도 활동한 기록이 있고 넷째, 일본 19사단 사령부의 보고서를 근거로 파악한 사망자의 숫자가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된 전사자 명부와 일치하며 다섯째, 야스쿠니 신사 명부에 오류가 있으면 유족들의 항의를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근거로 청산리 전투의 일본군 피해는 전사 11명, 부상 24명으로 그리 크지 않다는 것이다.
5. 인터넷상에서의 논쟁과 시선
당시 기사화된 한일 네티즌간의 논쟁. #인조이재팬 시절에 인조이재팬을 투기장으로 둔갑시킨 분기점이 청산리 전투에 관한 논란이다.
당시 일본의 네이버 총독부를 위시한 네티즌들은 일본 대본영의 대외비 문서를 근거로 한국 측이 주장하는 '대승'이 사실이 아니며 결과는 반대였다고 주장했는데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 대본영의 대외비 문서에 '일본군 3명 사상 독립군 60명 사살. 다수한 총포를 노획'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 한국 측 주장대로 네 자리수 인원이 전사했는데도 모든 전사자를 안치하는 야스쿠니 신사의 기록이 없다.
- 독립군이 사살했다는 당시 일본군 연대장 가노가 이후에도 멀쩡하게 살아 있었다.
- 3,000여 명이나 전사했는데도 병력 충원이 없었고 오히려 일본군 연대들이 증원도 받지 않고 추격을 지속했다.
- 3,000여 명이 사망한 특기할 만한 결과인데도 어느 곳에도 기록이 없다.
- 청산리 전투 패잔병의 사진이라고 알려진 들것에 실려 나가는 일본군의 복식[8]이 1930년대 이후의 것으로 해당 사진은 청산리 전투의 사진이 아니라 중일전쟁 시기에 찍힌 것이다.[9] 1997년에 작성된 청산리 대첩 문서에 그 사진이 있다.[10][11] 당시 이 사진은 한국의 전쟁 박물관에도 관련 자료로서 전시되고 있었고 한국 측에서는 당연하게 여겼기 때문에 해프닝으로 끝날 오해였지만 타격이 컸다.
거기에 편승해 기존 한국의 민족주의 사관에 반감을 품은 한국인들이 합세하였다. 이들은 다음과 같은 논거로 청산리 전투 대승이 사실이 아니며 독립 전쟁의 사기를 고취하고자 당시 독립운동가 등이 윤색, 과장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 독립군의 전과가 신문이나 사료마다 중구난방이다.
- 청산리 전투 관련 연구 사료에서 일본군 사상자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계속해서 감소하였다.
- 한국 측의 전과가 과장됐다는 언급이 독립군의 자서전에서도 나온다.
- 독립운동가이자 조선의용대 출신 김학철 선생의 자서전 '우렁이 속 같은 세상'등의 저서에서 항일 무장투쟁사가 과장되거나 부풀려졌다고 지적했으며 하루하루 힘들게 싸우는 무장투쟁 운동가들에게 힘이 되기 위해서 과장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는 언급이 나온다. 더불어 독립운동가 김경천 장군도 자서전에서 청산리 전투가 과장됐을 거라는 언급을 남겼다. #
- 독립군이 공세인 상황에서 후퇴했으며 일본군의 활동이 전혀 위축되지 않고 되려 독립군 활동이 위축되었다.
- 인터넷 등지에서 북로군정서의 사진 혹은 청산리 전투 직후 기념 승전 사진이라고 출처불명의 사진이 돌아다니는데 이 사진은 여러 사이트와 다큐멘터리, 자료집에 청산리 전투 직후 승전 사진이라고 인용되어 있다. 그러나 신효승 동북아재단 연구위원에 따르면 이 사진은 출처가 불분명하다. 기사[12]
3명밖에 죽지 않았는데 군사 25,000명을 간도로 끌고와서 민간인을 학살했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었다. 실제로 간도참변의 시작은 청산리 대첩보다 일렀지만 10월 20일, 즉 청산리 전투 이전에는 독립군 소탕이 목적이었으나 청산리 전투 이후에 한인사회 초토화로 작전 방향을 바꾸었다. 그러나 일본군이 적게 죽었으니 토벌군을 적게 투입하고 많이 죽으면 많이 투입한다는 논리를 적용할 수 있는 것인가도 의문이다. 테러범 몇 명을 수색하고 잡기 위해 엄청난 규모의 인원이 동원되거나 유해 조수를 잡기 위해 전국적 규모의 구제 사업을 하는 등 투입 자원은 당국의 필요성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고 피해자 수에 비례하는 건 아니다.
2004년부터 2005년 경 디시인사이드 역사 갤러리의 네임드 유저였던 '고람거사'가 기존 사관으로 일본인과 맞섰다가 패퇴했으며 같은 시기 서울대학교 교수 이태진이 인조이재팬에서 활동하다가 일본 넷 우익한테 대패[13]하면서 인조이재팬의 한국인과 한국사 사이트의 분위기는 초토화되었다. 네이버 총독부의 활동이 더 활발해짐은 물론이요 한국의 일뽕과 국까들도 이에 물타기에 돌입했으나 '고람거사'는 기존의 네이버 총독부에서 자료로 들었던 일본 후생성의 문서가 날조된 자료라는 사실을 파악했다면서 이 점을 들어 반격에 나섰다. 네이버 총독부에서는 이에 제대로 답하지 못하고 말 돌리기에 들어가 싸움은 한국 측 승리로 간주될 뻔했으나 익일 일본 측에서 후생성에 직접 전화해 문서가 사실임을 확인했다. 고람거사는 일본 측이 논거로 드는 후생성 사망자 명단보다 실제 사망자가 많다는 일본 측 자료를 보고 반격에 나선 것인데 실상은 고람거사가 '사상자'를 '사망자'로 혼동한 탓에 나온 오해였다. 이 부분은 당시 활동하던 역사 사이트 회원 일부의 기록으로만 전해질 뿐 인터넷상에서는 이전 패배만큼 주지하지 않았으나 해프닝에 가까운 이유로 어이없게 패배한 사례라서 역사 사이트에서 인조이재팬을 언급하면 이것을 금기로 다루거나 분노에 휩싸이곤 했다.
논쟁이 발생한 지 15년도 더 넘었지만 한국 역사학계는 일본인들이 제시한 대외비를 비롯한 실제 자료들과 지표에 대해 반박을 내놓지 못한 채 박은식의 주장이나 신문 기사만을 인용하고 있다(대표적으로 신용하 서울대학교 교수). 단, 신용하 교수는 옛날 이론을 아직도 고수하면서 자기 전공 분야뿐만 아니라 고대사까지 건드려 입지가 좋지 못하다.[14] 그리고 이 사건은 몇몇 사람들에게 기존 국사 교과서의 내용에 회의적인 시선을 갖게 하는 원인이 되는 등 나비 효과는 현재진행형이다. 이 논쟁의 전말과 논쟁을 통해 밝혀진 사실들이 솔직하게 공유되고 합리적으로 탐구되지 않는 한 기존의 사관만을 가지고 일본 측 주장을 접했을 때 정반대로 주화입마하는 사람들은 계속 생겨날 것으로 우려된다.
한편 이 싸움은 한국사 포럼 및 사이트에 쇄신의 필요성을 환기하기도 했다. 당시의 논쟁을 보면 한국 측엔 학술 논쟁을 하면서 논문을 인용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10대에서 20대가 절대 비중을 차지하던 이용자와 달리 일본 측은 30대에서 50대로 추정되는 인물까지 참여했다는 점에서 일본 측이 좀 더 진지하게 논쟁에 참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 사건 이후 20년이 지나도록 역사학계에서 인터넷 논쟁을 통해 유의미한 결론을 내려는 시도는 일절 없으므로, 좀 더 학술적으로 진지한 논쟁으로 발전시키자는 의견은 힘을 발휘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6. 대중매체에서
1982년에 KBS1을 통해 방영된 3부작 기록드라마 <우둥불>의 메인 스토리이기도 하며 이때 김좌진 역은 베테랑 탤런트 문오장이 맡았다.1983년 이장호가 감독한 <일송정 푸른 솔은>이 본격적으로 이 전투를 그린 영화로 당시 막대한 제작비를 들였으나 서울 관객 7만 3천에 그치면서 흥행은 실패했다. 이 영화에서 김좌진 역을 배우 김기주(1940~2001)가 맡았는데 이 사람은 1991년 MBC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에서 무다구치 렌야를 연기했다! 이 작품의 마지막에 당시 청산리 전투 참전용사로 유일하게 살아 있었던 이우석(1896년 - 1994년)이 나와서 잠깐 내레이션을 한다.[15][16]
"그때 엄호를 맡았던 동지들은 모두 전사를 했거나 실종을 했어요. 이제 나도 머지 않아서 저세상으로 가겠죠. 헌데, 이 늙은이 죽기 전에 한가지 아쉬운 것이 있어요. 나라가 반쪽으로 갈라졌단 말이에요. 요즘 젋은이들은 그래도 마음이 편할지 모르겠는데, 우리같이 반평생을 남의 땅에서 고생한 사람들은 그게 자꾸 서럽단 말이오. 우리 후손들, 모두 똑똑하고 능력도 많은데, 어서 이 나라, 한 나라로 합쳐지게 힘들 좀 써 봐요."
2002년작 SBS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는 미와 와사부로의 남동생이 이 청산리 전투에서 숨을 거두었으며 이로 인해 미와가 조선인을 증오하게 되었다는 설정이 붙어 있다. 독립군은 겨우 2500명, 일본군은 무려 5만명이며 연대장을 포함해 3300명의 전사자를 남겼다는 황당무계한 나레이션이 붙어 있는데 원작 나레이션이 심영물합성처럼 들릴 정도.
영화 봉오동 전투 끝자락에서 황해철이 "다음 목적지는 어딥니까"라고 물어보자 홍범도는 "다음 목적지는 청산리다"라고 말하며 간접적으로 언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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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철기 이범석의 회고록인 우등불 초판에서 당사자가 밝힌 내용에서는 실제로 일제가 마적떼를 사주하여 자작극을 벌이려고 한다는 첩보를 듣고 이를 역이용하여 반일 성향의 마적단과 한인 자경단과 함께 일제의 사주를 받은 마적단으로 위장하여 유유히 훈춘영사관 등을 쓸어버렸다고 소개했다.
[2]
참고로 체코 군단은 이들에게
르노 FT
전차 36대를 팔았다. 이 전차들은
장쭝창 휘하에 편성되었다.
[3]
기갑 갤러리 글에서 재인용
[4]
당시 일본군의 기병중대 정원은 총 159명이었고 보병중대는 136명이었다.
[5]
일본군은 태평양 전쟁 말기의 대만 항공전에서도 엄청난 날조 보고를 올린 적이 있다. 다만 일본군이 잘나가던 전쟁 초중반에는 사실대로 잘 정리되어 있기 때문에 과연 당시 상황이 거짓 보고를 해야 할 정도로 심한 상황이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6]
만약 충분한 목표를 달성했다면 추격을 계속할 필요가 없다.
[7]
같이 싸우다 죽었는데 11명만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어
후생성 명부에 올라 유족 연금을 받고 나머지는 못 받는다면 이는 일본에서 크게 논란이 될 일이다. 인조이재팬에서 논쟁할 때 한국 측도 이 부분을 반박하지 못하고 일본 측에 완패했다. 야스쿠니 신사가 부정확하다는 논리는 2차대전 때의 일로 청산리 전투 시기랑 비교하는건 넌센스다.
[8]
1932년에 제식화된 군모(태평양 전쟁영화을 보면 흔히 보는 그것)와 98식 군복 등.
[9]
그동안 복식을 근거로 대한민국에서 중일전쟁 시기 사진으로 추정해 왔는데 2020년 동북아역사재단 등 대한민국의 학자들에 의해 1938년에 발간된 지나사변화보 68호에 실렸던 사진으로 확인되었다.
[10]
해당 문서는 과거 한국인들의 주장이자 해당 논란이 붙거졌을 때의 한국인들의 인식을 그대로 담았다. 들것 사진을 포함해 연대장 전사와 같은 주장들이 있으며 이는 한국에서는 정설이었고 교과서적인 내용이었으나 이런 기존에 알고 있던 사실들을 가지고 토론에 임했다가 반박을 받았다.
[11]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의하면 독립기념관에서 받은 자료를 그대로 인용한 것이라고 한다. 이후 해당 사진의 출처가 밝혀짐에 따라 수정 요청을 받아들여 2023년 6월 중순에 해당 사진을 삭제했다.
[12]
사실 독립운동사를 심도 있게 파던 사학과 전공자들에게는 이미 출처가 불분명한 사진으로 알려져 있는 사진으로 위의 중일전쟁 사진과 함께 과거부터 의문의 사진으로 알려져 있었던 사진이다. 이 사진은 청산리 전투 시기 사진이 아니라 이전에 국내에서 독립운동하던 시기의 사람들로 추정되는 사진으로 앞에 앉아있는 사람도 신원을 알 수 없는 인물인데 어느새 김좌진으로 둔갑해 버렸다. 청산리 전투는 일본군과 격전 끝에 독립군이 크게 한바탕 싸우고 전역에서 회피하던 전투로 한가롭게 기념 사진을 찍을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13]
단 이태진의 경우 청산리 전투가 아닌
을미사변 관련 떡밥이었다.
[14]
점잖게 서술되어 있어서 그렇지
환빠적 요소가 매우 짙은 '유럽으로 간 고조선 문명'이란 사설을 중앙일보에 연재하다 보니 스페인 현지 언론에서도
유사역사학이라며 성토하는 보도를 했을 정도였다.
[15]
이전에 알려진 내레이션 내용은 실제 내용과 전혀 다른 말이 들어가 있었다. 요즘 젋은이들이 과거의 고생을 기억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는데 실제 내용은 보다시피 분단에 대한 슬픔이다.
[16]
덧붙이자면 이우석은 1994년 6월 26일 사망했는데 말년에 행상과 막노동을 하면서 무허가 철거민촌에서 고생하면서 살았다. 그런데도 독립유공자 신청을 안 했는데 그걸 하기 위한 서류에 한일협정 찬성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었고 그 서류에 도장을 찍는 행위를 나라를 다시 팔아먹는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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