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11 13:42:51

장보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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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교통운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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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인민정부 교통부장
초대
장보쥔
중화인민공화국 교통부장
초대 제2대 제3대
장보쥔 왕서우다오 쑨다광
제4대 제5대 제6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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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교통운수부장
초대 제2대 제3대
리성린 양촨탕 리샤오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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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공민주당 주석
한문 章伯鈞
한국식 독음 장백균
영문 Zhang Bojun
출생 1895년 11월 17일
청나라 안휘성 안경부 동성현
(현 중화인민공화국 안후이성 안칭시 퉁청시)
사망 1969년 5월 17일 (향년 73세)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시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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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북양정부|]][[틀:국기|]][[틀:국기|]]
파일:대만 국기.svg 중화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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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무창고등사범학교 ( 영문학 / 졸업)
베를린 대학교 ( 철학 / 학사)
직업 정치가, 교수
종교 무신론

1. 개요2. 생애
2.1. 초기 경력2.2.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민주주의자2.3. 몰락
3. 어록4. 가족 관계5.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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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인. 중국 농공민주당의 창시자이며 주석으로서 중국에 민주주의를 실현시키기 위해 노력한 인물이다. 중화민국 시기 장제스의 독재에 반대했고 중일전쟁 발발 후 국민들에게 애국 투쟁에 나설 것을 호소했으며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중앙인민정부위원 정무위원, 중화인민공화국 교통부장, 광명일보 사장을 역임하였으며 제2회 전국정치협상회의 부주석, 제4회 전국정치협상회의 위원을 맡았다. 그러나 반우파 투쟁 시기에 우파의 거두로 간주되어 탄압받았고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들에게 온갖 모욕과 박해를 당했다. 또한 현재까지 '우파'라는 낙인에서 복권되지 않은 5인 중 한 사람이다.

2. 생애

2.1. 초기 경력

장보쥔은 1895년 11월 17일 청나라 안후이성 안경부(安慶府) 동성현(桐城縣)의 한 지주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가 여섯살 때 부친 장양청(章扬清)이 불행히도 물에 빠져 사망했다. 그래서 그는 둘째 동생 장백도(章伯韬)와 셋째 동생 장백인(章伯仁)과 함께 숙부에게 키워졌다. 장보쥔은 동성 중학교에 다녔고 1916년 우창고등사범학교 영문부에 입학해 1920년 졸업했다. 그후 안후이성 제4 사범학교 영어교사로 초빙되어 그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교장으로 승진되었다. 그러나 학교 측과 불화를 빛다가 1년만에 해직되었고, 1922년 안후이성장 쉬스잉(許世英)의 유학 정책에 호응해 주더, 쑨빙원(孫炳文)과 한 배를 타고 독일에 국비로 유학갔다. 그는 베를린 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하여 헤겔의 철학을 공부했다.

1923년, 장보쥔은 주더의 소개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했고 1926년 베를린 대학교 졸업 후 중화민국에 돌아간 뒤 중산대학 문과 교수로 재직했다. 그해 6월, 그는 국민혁명군의 북벌에 참가하여 국민혁명군 9군 당대표가 되었고 7월엔 국민혁명군 총사령부 정치부 선전과장이 되었다. 또한 1927년 3월엔 농업부 공동위원회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다가 국민혁명군 지휘관 장제스 4.12 상하이 쿠데타를 단행해 공산당원을 체포하고, 우한 국민정부의 수장 왕징웨이가 7월 15일에 국공결렬을 결정하자, 장보쥔은 국민당을 탈퇴하고 1927년 8월 난창 폭동에 가담해 군 총지휘부 정치부 부주임이 되었다.

그러나 난창폭동이 11월에 실패로 끝나자, 장보쥔은 홍콩으로 망명한 후 중국 공산당을 탈퇴했고 베를린에서 친분을 맺었던 덩옌다와 함께 중화혁명당을 조직했다. 그후 1930년 5월 중화혁명당을 중국국민당 임시행동위원회로 개편하였으며 8월에 중앙간사회 간사에 선출되었다. 덩옌다가 1931년 8월에 난징에서 체포된 후 11월 29일에 처형되자, 장보쥔은 덩옌다를 대신해 중앙간사회의 지도 업무를 주관했다. 1933년 11월 말, 장보쥔은 황치샹(黄琪翔), 리지선, 천밍수 등과 함께 중국 국민당 임시행동위원회를 대표하여 국민혁명군 19로군 지휘관 차이팅카이, 복건성장 장광나이가 일으킨 복건사변에 가담해 중화공화국을 수립하고 토지위원회 주임을 맡았다. 그러나 중화공화국이 불과 53일만에 장제스에게 무너지자, 장보쥔은 일본으로 망명갔다가 다시 홍콩으로 망명했다. 그러나 자신과 함께 망명온 동료들이 공산당과 인연을 끊은 것과는 달리, 그는 여전히 공산당과 협력해야 한다며 공산주의자들과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2.2.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민주주의자

1935년 8월 1일 중국 공산당이 발표한 8.1 선언[1]에 적극적으로 응한 장보쥔은 같은 해 11월 홍콩에서 중국 국민당 임시행동위원회를 중화민족해방 행동위원회로 개칭하여 '항일, 연공, 반장'을 총지침으로 하고 당의 지도사상을 확립하며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당의 사상무기로 삼았다. 그러다가 서안 사건 이후 장제스가 공산당 토벌을 포기하고 국공합작을 체결하자, 그는 중국에 돌아와 항일투쟁을 위해 국민들의 단결을 촉구하는 운동을 전개했고 1938년 7월 중화민족해방 행동위원회를 대표하여 제1차 국민참정회 참의원으로 초빙되었다.

중일전쟁 시기, 장보쥔은 중국 공산당의 항일민족 통일전선을 적극 지지했고 그들이 항일구국을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1939년 11월 장란(张澜), 선쥔루, 황옌페이(黄炎培), 량수밍(梁漱溟) 등과 함께 '통일건국동지회'를 공동으로 설립했다. 이때부터 그는 민주주의자로서 두각을 드러내 민주 헌정운동을 추진했다. 그러던 중 1941년 환남사변이 발발하자, 그는 장제스의 독재를 규탄하며 중국민주동맹 수립해 참여해 중앙상무위원, 조직부장을 역임했다.1945년 2월, 그는 '중화포럼' 잡지를 설립하고 편집장을 맡아 국민들에게 항일전쟁 승리와 민주주의 쟁취를 위해 투쟁할 것을 촉구하고 국민당의 일당 독재와 반공 활동을 비판했다.

1945년 7월 1일, 장보쥔, 황옌페이 등 6명의 중국민주동맹 일원들은 옌안을 방문해 중국 공산당의 지도자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류사오치, 주더 등의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7월 3일,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는 특별히 장보쥔과 주오순셩(左舜生)을 면담해 자신들은 국민당과 협조해 중국을 평화롭게 이끌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 이에 장보쥔은 충칭으로 돌아간 뒤 중국 공산당과 적극 협조할 것을 촉구하며 국민당 단독 국민대회 개최에 반대했고 국민참정회 참석을 단호하게 거부했다.

1946년 7월 13일, 장보쥔은 국민당의 전국정치협력회의 개최에 대해 "이것은 일당독재의 대회"라며 민주연맹이 이 대회에 참가하지 않도록 노력했다. 이후 1947년 2월, 장보쥔은 중국 농공 민주당을 창당해 주석에 당선되었고 그의 부인 이건생(李健生)은 중앙집행위원회 후보위원에 당선되었다. 그후 그는 국민당의 독재를 규탄했다가 1947년 10월 27일 장제스가 민주연맹 해체 명령을 내리자 홍콩으로 피신한 후 11월에 선쥔루와 함께 제1기 3중전회를 주재해 중국 공산당과 협력하고 국민당 독재 정부를 타도하기로 결정했다.

1948년 가을, 장보쥔 등 민주연맹 인사들은 동북 해방구에 들어갔다. 1949년 1월 22일, 장보쥔, 선쥔루 등 각 민주당파 지도자 및 기타 민주인사 55인은 중국 공산당의 영도 아래 단결하여 혁명을 끝까지 견지하고 중국 공산당과 함께 민주연합을 수립할 것을 선언했다. 1949년 9월 중국 임민정치협상회의 제1차 전체회의에 참석한 그는 전국정치협상회의 상무위원, 중앙인민정부 위원에 선출되었다.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행사에 참가한 장보쥔은 이후 전국정치협상회의 상무위원, 중앙인민정부 정무원 정무위원, 중국 민주동맹 부주석, 농공민주당 주석, 중화인민공화국 교통부장, 광명일보 사장 등을 역임했다. 그는 공산당의 주도하에 사회주의 국가가 수립되는 것에 찬성했지만 정치 체제는 민주주의의 원리에 따라 다당제와 다수결의 논리를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몇년 후, 그의 정치생명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된다.

2.3.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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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하순 교통부 임원들에게 규탄받으며 괴로워하고 있는 장보쥔.

1956년 4월25일에 열린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확대회의에서, 마오쩌둥 공산당 주석은 "10대 논제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연설을 하여 지식인들의 자유발언을 허용하는 문제를 논의했고 4월 28일 정치국 확대회의에서는 '백화제방(百花齊放),백가쟁명(百家爭鳴)'이라는 방침을 제시했다. 마오쩌둥은 예술상에서는 '백화제방', 학술상에서는 '백가쟁명'을 우리의 방침으로 해야 한다며 공식적으로 "쌍백방침"을 제기했다. 이에 1956년 9월 중국 공산당 제8기 전국대표대회에서 백화제방, 백가쟁명을 당의 공식 방침으로 정하기로 합의했다.

이에 장보쥔은 1957년 3월에 개최된 정치협상회의에서 사회주의 사회에서의 민주제도 확립을 강조하고, 그것에 기초한 민주당파의 장기공존의 문제, 조직공작의 문제,반혁명 숙청의 문제, 공작임무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만주당파와 공산당과의 관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민주당파는 정치자유, 조직독립 및 지위의 평등을 갖는다고 하지만, 다른 한편 공산당의 지도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한다. 이것은 모순인가, 아닌가? 민주당파와 공산당원이 공존하기 위해서는 양자간의 거리를 없애야 하고 민주당파나 무당파는 주인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하면서, 공산당이 인민 내부의 일상적인 비판과 자기비판의 생활방식으로 감독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그리고 민주의 범람은 부르주아계급 사상과 유심주의가 들어올 것이라고 불안해하지만 오히려 민주생활을 풍부히 하고 민주제도를 강화해서 사회주의 건설에 참가시키는 것이야말로 마르크스 레닌주의 진리를 발양하는 것이다. (중략) 정치협상회의를 전국인민대표대회와 같은 지위로 끌어올려, 이원제를 구성해야 한다."

그는 나중에 자신의 이같은 주장을 정치설계원(政治設計院) 개설론으로 정의하고 정치설계원의 필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현재 많은 정치시설에 설계원이 없다. 나는 정협, 인민대, 민주당파, 인민단체를 고려해 정치상에 네개의 설계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설계원에게 권한을 많이 부여해주고 많은 일을 하게 해줘야 한다."

그해 5월 중공중앙통일전선부가 주관한 좌담회에서, 장보쥔은 공산당의 특권의식을 비판하고 당외 인사의 직위와 권한을 요구했다.
""직위, 권한, 책임 세 가지는 불가분으로 당외인사가 직위와 권한을 가지도록 하려면, 동시에 당외인사가 책임을 지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만 현재 당외인사가 지도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실제로는 당조직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 책임을 지는 것으로 되어 있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권한을 필요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이 당외인사의 '유직무권(有職無權)'의 근본원인으로 되어 있다. 당은 행정에 관한 직위와 권한을 확실히 해야 한다."

또한 장보쥔은 통일전선부가 모든 정파를 동등하게 대우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통일전선부의 처리 방법이 집중에 대해서는 강조하지만 민주에 대해서는 소홀히 한다. 특정한 파를 지지하고 다른 풍부한 의견을 가진 사람이나 집단을 억압하며, 처리를 명확히 하지 않고 시비를 구별하는 것이 명확하지 않다. 때문에 약간의 독재적 작용과 가부장적 작용을 증장시키고, 스스로 종파주의 활동도 조장하였다. 따라서 민주당파에 대한 직접 관리를 보다 느슨하게 해야 한다.”

한편 장보쥔은 대학교 당위원제에 대해서도 "지금 대학에서는 당위제에 불만이 있으니 제도 보완이 필요하다. 이렇게 하면 민주 생활의 내용이 풍부해진다"며 보완을 촉구했고 삼반오반운동 당시 억울하게 처벌받은 이들을 복권시킬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그의 이와 같은 주장은 공산당의 분노를 샀고, 마오쩌둥은 6월 초 각 성장들에게 우파의 공격에 대응하라는 지시를 내리면서 반우파 투쟁을 개시했다. 장보쥔은 1957년 하순에 교통부가 주관한 '장보쥔 규탄대회'에 끌려가 이전까지 그를 '부장님'으로 극진하게 모시던 부하들로부터 야유 세례를 받았다. 이때 그가 당혹스러워하는 모습이 찍힌 사진은 반우파 투쟁의 상징이 되었다.

1958년 1월 26일, 장보쥔은 모든 직무에서 해직되었고 정계를 은퇴했다. 그래도 장관급 대우는 받았고 전국정치협상회의 명예 상무위원으로서 경비원을 데리고 다닐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시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66년 문화대혁명이 발발한 후, 장보쥔은 모든 재산을 몰수당하고 그의 온 가족은 홍위병들로부터 갖은 모욕과 핍박을 당했다. 중앙문혁소조는 "장보쥔의 재산을 몰수 할때 수십 트럭을 잇달아 몰고 가야 했다", "장보쥔의 며느리가 집에서 뛰쳐나갔다가 홍위병들에게 끌려갔다"고 폭로해 장보쥔을 파렴치한 자산계급 수괴로 몰아갔다.

이러한 육체적, 정신적 박해는 장보쥔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결국 그는 1969년 5월 17일 위암으로 사망했다. 향년 73세. 문화대혁명이 종식된 후, 중국 공산당 11기 3중전회에서 장보쥔의 혐의는 모두 풀렸지만 끝내 '우파의 거두'라는 오명은 벗겨지지 않았다. 그래도 그의 유골은 1982년 11월 15일 베이징 바바오산 혁명공묘에 안치되었다.

1985년 11월 11일 중국 농공민주당 중앙과 민맹 중앙에서는 전국 정협 강당에서 '장보쥔 탄생 90주년 기념 좌담회'가 열렸다.양징런(杨静仁) 중국 공산당 중앙통전부장은 "장보쥔 선생은 유명한 애국민주 전사이자 정치활동가로, 그의 일생 동안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진리를 추구하며 경험을 교훈으로 삼았다. 장보쥔 선생의 모든 역사와 모든 일을 통틀어 그가 애국적이고 진보적이며 우리 민족과 국가를 위해 좋은 일을 한 것은 기념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장보쥔은 현재까지도 복권되지 않고 있다.

3. 어록

진정한 사람이 되려면 적어도 최소 조건과 최종 요구 사항이 동일하고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우환이 생기든 실의에 빠진 상황에 처하든, 어리거나 늙든 이 문제에 대해서는 한시도 긴장을 늦춰서는 안 된다.
근대 중국의 패인은 권력에 몰두하는 사람이 너무 많고 늘 이상에 충실한 사람은 적은 데 있다. 스스로 비판하지 못하는 비판은 권력 획득의 또다른 형식이라고 생각한다.
사상과 정치에 대한 의견은 사람마다 똑같을 필요가 없고, 똑같을 수 없는 것이다. 강자가 같게 만들려고 협박하는 것은 헛수고일 뿐이다. 왜 서로 다른가?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까? 오직 민주정신을 준수하고 민주정치를 확립하는 태도, 자신과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비판을 겸허하게 수용하는 것, 남의 장점을 취하여 보탬이 되는 것을 따라야 한다. 단지 선을 택하되 다른 것을 공격하지 않아도 된다.
가난한 나라에서 경제는 곧 정치다. .현재 우리의 사회주의는 기형적인 것인데, 나는 마오쩌둥 본인조차 사회주의가 어떤 모습인지 알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정치적으로는 거인이나 경제적으로는 왜소한 유생이다. 또한 우리는 늘 소련을 좋아하여, 군비 지출을 제일로 친다.지금은 잠시 알아채지 못했다.갓 태어난 엄마의 기형처럼, 몇 년 후면, 우리는 사회의 모든 세포로서 이런 기형적인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 공산당에 대한 최대의 위협은 무엇인가? 항미원조는 아니고 제3차 세계대전도 아니다. 국문이 활짝 열리면 백성들이 바깥 생활이 자신보다 나은 것을 발견할 때, 한 집권당에 대한 진정한 위협이 도래하게 된다.
자유를 운용하고 자유를 누리는 것은 본래 인류사회가 공유하고 있는 합리적인 권리이자, 인류 이성 생활의 숭고한 표현이다. 그것은 폭력의 지배를 받지 않으며, 폭력의 침범에 영원히 반항할 것이다. 폭력은 비록 때로 실현되었지만, 결국은 실패하고 말았다. 민주자유의 신은 여전히 무고하다. 본래 자유의 획득은, 하늘이 내린 것이 아니며, 누구의 허락에서 나온 것도 아니다. 인류가 장기간 투쟁한 결과는, 점점 더 어렵고, 먹는 것이 더 달게 되었고, 사랑은 더욱더 간절해졌다.

4. 가족 관계

장보쥔은 1920년 안후이성 쭝양현에서 구이츠현 출신의 린전화(林振華)와 결혼해 이들 장시밍(章師明, 1922년 5월 6일생)을 낳았지만 얼마 안가 이혼했고 1927년 우한에서 이철민(李哲民)과 결혼했지만 이철민은 1932년 베이핑에서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1년 후인 1933년 상하이에서 이철민의 여동생 이건생(民之妹)과 결혼했고 1939년 홍콩에서 장녀 장이학(章詒學)을 낳았고, 1942년에 충칭에서 차녀 장이허(章詒和)를 낳았다.

이건생은 일찍이 베이징 대학 의학과를 졸업했으나 의학의 길을 포기하고 정치에 전념했고 장보쥔의 활동을 보조했다. 그녀는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베이징 시 위생국 부국장을 역임했으며 전국정치협상회의 상무위원을 역임하다가 1990년 사망했다.

장이학은 베이징대학 물리학과를 줄업했으나 문화대혁명 시기 탄압받다가 문화대혁명이 수그러든 시점부터 베이징 제2광학기기 공장에서 일했다. 그녀는 중국 광학분석기구의 연구 개발에 공로를 세워 '모범 노동자로 불렸다. 장예학은 퇴직 후 고향으로 돌아가 엔지니어 교육을 맡았다.

파일:장이허.jpg

장이허는 1963년 중국 희곡연구원 희곡문학과를 졸업했으나 문화대혁명 시기 혹독한 박해를 당했고 징역 20년에 처해졌다가 10년만에 구사일생으로 석방되었다. 그녀는 현재 중국 예술학교 드라마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며 여류 작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한편 그녀는 아버지와 자신이 억울하게 박해당한 이야기를 담은 책을 출판하고 정부에 아버지의 억울함을 호소하며 복권을 줄기차게 요청하고 있다.

5. 참고 문헌


[1] 일본에 대항하고 장제스를 타도하자는 동정항일을 제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