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0 00:27:31

금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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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 전투
金城戰鬪
Battle of Kumsong
파일:The_Archive_of_Korean_Histoy_(24).jpg
흑운토령 반격작전에서 중공군 저격수를 생포한 대한민국 육군 제8사단 소속 병사들
시기 1953년 6월 10일 ~ 7월 21일[1]
장소 강원도 김화군 화천군 일대
교전 국가 및 세력 [[틀:깃발|]][[틀:깃발|]][[유엔군|]]
[[틀:깃발|]][[틀:깃발|]][[대한민국|]]
[[틀:깃발|]][[틀:깃발|]][[미국|]]

지휘관 [[틀:깃발|]][[틀:깃발|]][[마크 클라크|
마크 클라크
]]
[[틀:깃발|]][[틀:깃발|]][[정일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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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틀:깃발|]][[틀:깃발|]] 덩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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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틀:깃발|]][[틀:깃발|]][[미8군|]] 최초 10만 명, 이후 18만 명까지 증강 파일:중국 국기.svg 9병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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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일:중국 국기.svg 54군
  • 파일:중국 국기.svg 60군
  • 파일:중국 국기.svg 67군
  • 파일:중국 국기.svg 68군
24만 명
피해 전사 및 실종
11,057명
부상
15,698명
총합 약 26,755명 손실
전사
33,816명
부상
49,858명
포로
262명
총합 약 83,936명 손실[2]
결과 금성 돌출부, 교암산 상실
금성천 이남 수복
파일:jpLesiD.jpg
현재 강원도 화천군 상서면 마현리[3]에 있는 금성지구전투전적비.
1. 개요2. 전투 전 상황3. 전투 경과
3.1. 6월 중공군의 대공세
3.1.1. 묻혀버린 승리
3.2. 중공군의 준비 (7.13 대공세)3.3. 국군의 준비 상황3.4. 금성 돌출부 좌견부
3.4.1. 1연대의 상황 7·5·6중대(회고개 상황)3.4.2. 중공군의 침투와 10중대 투입3.4.3. 중치령 전투
3.4.3.1. 512-522고지 지원 (기갑연대 소속 3대대)
3.4.4. 26연대의 분투와 철수3.4.5. 1연대 지휘소 와해(중공군 203사단 609연대 2대대의 공격)3.4.6. 육근수 대령의 전사 (역습부대 2대대의 피습)3.4.7. 최후의 예비대(7.14)
3.5. 금성 돌출부 우견부( 제3보병사단 제5보병사단)
3.5.1. 여문리 격전(제3사단)3.5.2. 공세 초기 전투3.5.3. 부대 수습과 제22연대 수색중대의 독전3.5.4. 예비대 전환3.5.5. 백암산 전투(제5사단)
3.6. 금성 돌출부 선단부
3.6.1. 교암산 전투(제6사단)
3.6.1.1. 전초 진지의 공격3.6.1.2. 대공세 직전3.6.1.3. 7.13 대공세3.6.1.4. 교암산 포기와 6사단의 전과
3.6.2. 8사단의 지형능선 전투
3.6.2.1. 중공군과 국군의 상황
3.6.3. 201사단의 공격
3.6.3.1. 16연대의 상황3.6.3.2. 10연대의 전황3.6.3.3. 7월 14일
3.6.3.3.1. 16연대 전황
3.6.3.4. 10연대의 전황
3.6.4. 별우지구 철수작전
3.7. 신주저항선 구축과 군단의 반격
3.7.1. 군단 총반격3.7.2. 5사단 백암산 지구 반격작전
3.7.2.1. 전투의 끝
3.7.3. 8사단 별우지구 반격작전
3.7.3.1. 흑운토령 탈환
3.7.4. 11사단 삼현지구 반격작전
3.7.4.1. 602고지 전투3.7.4.2. 전투의 끝
3.8. 수도사단 횡격실 능선 쟁탈전
3.8.1. 횡격실 능선 전투
3.8.1.1. 재반격과 진지확보 실패
4. 전투 이후 상황5. 결과6. 여담7. 대중문화

1. 개요

"내가 의심치 않는 건 공산군 공세의 주요 혹은 유일한 이유는 대한민국 국군에게 코피를 흘리게 하기 위해서, 그들과 전세계에 (이승만 대통령의) "북진" 구호가 말뿐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란 거다." # 466p
- 마크 클라크 장군
6.25 전쟁 끝무렵인 1953년 6월에서 7월 사이에 한국군 UN군 중국 인민지원군을 상대로 금성 돌출부를 두고 벌인 전투. 휴전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 양측 합쳐서 40만 명이 넘는 병사들이 동원된, 총 3년 1개월의 6.25 전쟁의 대미를 장식한 최후의 대규모 전투였다.

2. 전투 전 상황

금성 돌출부는 1951년 10월 유엔군의 가을공세[4]의 일환으로 중부전선의 미군 제9군단[5]이 폴라-노메드선[6]으로 진격하면서 얻은 지역으로 이 돌출부는 금성 전투 이전까지는 철원 서쪽부터 시작되어 양구군 해안면 북쪽 고지대까지 이어지는 일직선 상의 전선에서 유일하게 북쪽으로 돌출된 지역이었다.

당시 북한강을 기준으로 서쪽은 미 9군단, 동쪽은 미 10군단이 맡았는데 미 10군단은 자신들에게 예속된 한국군 8사단을 (미 9군단 예속인) 6사단과 연계시켜, 지도상으로 현재 군사 분계선이 있는 북한강 물줄기가 ㄱ자로 꺾이는 지점의 동쪽 유역과 그 너머(어은산 남쪽)로 진출해 그곳을 맡게 했다.

이후 52년 봄에 유엔군의 전선 조정으로 재창설된 한국군 2군단은 미 9군단이 담당하던 금성 돌출부 서쪽과 이를 지키는 국군 사단 등을 인수받고, 미 9군단은 미 1군단의 전선 동쪽인 철원 서쪽 - 김화 사이의 지역을 맡게 된다.

그런데 1953년 3월, 그간 휴전에 반대하여 전황을 지지부진 끌어오던 원인 중 하나인 이오시프 스탈린이 사망하자 전쟁에 염증을 느낀 양측 수뇌부들은 휴전 협정을 추진, 1953년 4월 즈음엔 양측 모두 휴전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일 정도가 된다. 하지만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단독 북진을 외칠 정도로 이에 거세게 반대했다.

중국 역시 휴전이 맺어지기 전 마지막 공세를 펼쳐 승리를 거둔 후 대내외에 과시하려고 했는데 중공군 방면으로 툭 튀어나와 있으면서 미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한 한국군이 담당하는 금성 돌출부는 이 마지막 공세에서 승리를 거두기에 아주 좋은 먹잇감이었다. 물론 한국군 역시 금성 돌출부가 중공군의 최우선 목표라는 걸 인식하고 중공군의 갱도진지를 벤치마킹하여 미로 수준으로 여러 겹의 참호진지를 판 후 각종 부비트랩을 설치해놓고 정예병과 가용가능한 포병전력, 대부분의 물자를 금성지구로 보내는 등 곧 있을 공세에 대비하고 있었다.

3. 전투 경과

3.1. 6월 중공군의 대공세

파일:3040.png
6월 공세 경과도
중공군이 하계공세를 시작한 5월 초 무렵, 중공군의 공세는 미 제9군단과 국군 제2군단이 위치해 있는 금성 돌출부쪽으로 공세방향이 지향되었는데 이는 4월 말에 개시한 소규모 공격과는 다른 대규모 공격이었으며 이 때문에 8사단의 마제형 고지가 피탈당하고 중공군은 789명 전사, 8사단의 피해는 전사 181명, 부상 262명, 실종 23명등의 막대한 손실을 내었다.[7] 이후 중공군은 5월 23일에 수도사단 회고개를 공격하는 것을 끝으로 5월 26일 제1차 하계공세를 끝냈고 다음날인 5월 27일 하계공세의 제2단계 작전 즉, 6월 공세 준비에 들어갔다. 이 공세는 공격목표를 대대급 진지로까지 확대할 뿐만 아니라 전(全) 전선에서 공세를 개시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중공군은 중부전선의 9병단 예하 제23, 24군과 20병단 예하 제60, 67군 및 19병단 예하 제1, 46군은 물론 동부전선 일대에 배치된 북한군까지 동원해 1951년 춘계공세 이후 최대 규모의 전력으로 6월 공세를 개시하고자 했다.

더 나아가 중공군은 이 공세의 주목표를 미군으로 지정했고 이를 수행하기 위해 중공군 각 부대들은 5월 27일, 미 제1군단의 전초진지인 후크고지와 네바다 고지를 공격하는 것을 시작으로 중동부 미 제10군단의 우측 854, 812고지 및 제1군단의 351고지를 각각 공격하였다. 그러나 6월 1일, 중공군 지휘부에서 공격 주목표를 기존 미군에서 한국군으로 바꾸라는 지시를 하달하였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앞서 말했듯이 이승만 정부의 휴전반대와 북진통일 주장 때문이었다. 당시 휴전회담에서 유엔군측은 "5.25 최종안"을 제시하여 포로 의제의 타결을 이끌었으나 이 안은 "포로의 자유송환원칙은 고수하되 반공포로도 중립국 송환위원회에 인도한다"는 내용문이 있었으며 이 때문에 휴전반대와 중립국 송환위원회 후송에 대해 반대를 표하던 한국정부는 크게 분노했고 결국 이승만 정부는 '휴전반대'. '북진통일'을 하자는 성명문을 발표했으며 이에 중공군 사령부측에서는 한국정부에게 현실을 깨닫게 해주겠다며 작전계획을 변경하라고 지시했던 것이었다.

이후 중공군은 작전이 변경됨에 따라 기존에 구성되었던 공격 부대편성도 더 강하게 바꾸었다. 먼저 제16군을 제9병단에 배속시켜 제23, 24 양개군의 1개 사단 방어임무를 인수하도록 해 방어편성을 더 강화시켰고 그 다음에 제21군을 모두 곡산지역으로 이동시킴에 따라 제21군을 지원군의 예비대로 둠으로써 중부전선 및 금성돌출부 지역 좌익 중공군 전력을 한층 더 강화시켰다. 이로써 중공군은 6월 공세 공격편성을 모두 끝냈고 그 다음에 주공인 제20병단은 6월 4일 작전회의를 열어 반격작전 계획에 대해 심도있는 연구를 하였다. 이 회의에서 20병단은 예하의 제60, 67 양개군의 총전력을 집중해 북한강 동서 양측의 국군 제8, 5사단을 공격하고 차후 2개 사단 이상의 국군 부대가 반격할 가능성을 대비하여 면밀한 방어편성 할 것을 결정했다. 또한 20병단은 군으로부터 추가적인 포병지원을 받아 약 1주간의 준비기간을 가졌으며 6월 10일을 공세 개시일로 정했다.

그리고, 1953년 6월 10일 중공군은 6개 사단과 예비대인 4개 사단, 34개 대대 포병 390문의 야포 및 보급을 위한 말 1만필과 마차 1500대를 동원한 6월 공세를 개시하였다. 중공 제20병단 60군은 한국군 5사단 주저항선인 949-973-883고지를, 제67군은 한국군 8사단의 지형능선-수도고지를 각각 공격했다.

당시 금성돌출부 좌견부에는 미 제9군단 중앙우익인 9사단 1개 연대, 군단 우익 수도사단, 돌출부 선단과 우견부에는 국군 제2군단의 6사단, 8사단, 5사단이 배치되어 있었다. 여기에 미 제8군 예비대로 3사단이 돌출부 어디든 3시간 내 도착할 수 있도록 2군단 지역 내에서 대기중이었다. 사단의 편제 지원부대 외에는 2군단의 1개 전차대대, 야전공병단, 군단포병 2개 155mm 포병대대, 미 제5포병단이 있었으며, 미 제9군단의 국군 사단들은 9군단포병 10개 포병대대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여하튼 공세 직후 제2군단은 급속도로 전선에서 밀리게 된다. 먼저 8사단의 경우 6월 12일에 전개된 수도고지-지형능선 전투에서 수도고지를 상실함과 동시에 지형능선의 제1, 2방어선을 모두 상실했고 결국 제2방어선으로 후퇴하였다. 그리고 제5사단 경우에도 역시 949-973-883고지 전투에서 중공군 181사단의 공격으로 인해 6월 11일 973고지와 883고지를 상실하였다. 이후 5사단과 8사단은 빼앗긴 고지들을 탈환하기 위해 반격작전을 펼쳤으나 이중 8사단은 오히려 중공군에게 역습을 받아 각 부대들이 와해되는 등 반격작전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으며 제5사단도 3차례에 걸친 역습을 감행했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이에 제2군단 사령부는 6월 14일 밤, 제5사단과 8사단 21연대에게 현 방어진지를 포기하고 전면철수하라는 명령을 하달하였다. 더 이상의 반격은 무의미 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5사단과 8사단은 군단이 지정한 신 주저항선(아이슬란드)으로 철수하고 5사단은 제3사단에게 좌측방 구역을 인계한 뒤 부대 재편성에 들어갔다. 이렇게 금성돌출부에서 전개됐던 6월 공세는 끝났고 2군단은 전선에서 약 4km 정도 밀려나게 되었다.

해당 전투에서 중공군의 포격은 11일에 하루에만 6만발을 기록하는 등 전쟁에 참전한 이래 최고치를 기록하였으며 유엔군과 미군의 전투기 출격횟수 또한 2143회를 기록함으로서 참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8] 6월 18일까지 이어진 전투에서 중공군은 금성 돌출부 일부를 점령하는 소기의 목적을 이룬다. 이 공세로 한국군은 1만명의 손실과 중국군은 2만명의 손실로 합쳐서 총 3만 명의 사상자를 낸 것으로 보인다.

3.1.1. 묻혀버린 승리

중국은 비록 전선을 완전히 밀어내지는 못했으나 연일 북진통일, 휴전반대를 외치던 이승만 대통령의 기세를 꺾고 전쟁에서 자신들이 우세하다는 점을 대내외에 과시하는데 성공했다. 실제로 당시 북한 주둔 중공군 부사령관이었던 훙쉐즈의 회고록에 따르면 이 전투가 있은 후 유엔군 측은 회담에서 다소 양보하려는 태도를 보였고, 이에 만족한 중공군도 이 상태로 휴전을 맞이하려 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6월 18일 이승만은 반공포로 석방 사건으로 맞불을 놓으면서 휴전협상을 파토낸다. 중공군의 승리를 더 큰 사건으로 묻어버린 셈. 격분한 마오쩌둥은 한국의 도발을 응징하고 휴전에 응하게 만들기 위해 "석방된 포로의 수만큼 남조선군을 죽이라"는 극단적인 지시를 내렸다. 이에 따라 중공군은 일부 북한군과 합세하여 6월 초의 공세 규모를 뛰어넘는, 1951년의 춘계 공세 이후 최대규모의 공격을 감행하기로 결정한다.

3.2. 중공군의 준비 (7.13 대공세)

'한반도 정전을 실현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적에게 거센 타격을 가하자!'

'전력을 다해 전선의 물자 보급을 보장하고 반격전의 완전한 승리를 쟁취하자!'
금성전투 직전 중공군 제20병단의 구호
베이징에 머물고 있던 중국인민지원군 총사령관 펑더화이는 원래 1953년 6월 19일 한반도로 돌아가 정전협정에 서명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그 전날 이승만이 반공포로를 석방하자, 펑더화이는 마오쩌둥, 저우언라이와 회의를 한 후 20일 21시 리커눙. 덩화 등과 각각 전화통화를 하고 22시 마오쩌둥에게 다음과 같은 건의사항을 전달하였다.
현재 상황에 따르면 정전의 체결을 월말로 미루는 것이 유리하다. 적의 내부 모순을 더욱 심화시키고 이승만의 한국군에게 다시 타격을 입히고 한국군 15,000(6월 선보름에 덩화가 한국군 1만 5,000명을 섬멸하자고 말한 것에 따름)을 섬멸하면 좋겠다. 이 의견은 이미 덩화와 협의한 것이다. 내일 21일 김일성 수상을 접견할 것이고 22일 지원군 사령부에 가서 정전 후의 각종 사안에 대한 논의를 할 것이다. 여기에 대한 지시를 기다리겠다.

이에 대해 마오쩌둥은 다음날 21일, 펑더화이의 건의를 수용하면서 동시에 다음과 같은 지적을 하였다.
정전협정의 체결은 반드시 미루어라. 언제까지 미룰 것인가는 상황의 변화에 따라 결정하도록 하라. 한국군 1만여 명을 다시 섬멸하는 것은 아주 필요하다.
파일:external/1813.img.pp.sohu.com.cn/11ceaadd4beg215.jpg
모택동과 팽덕회의 모습

이러한 답변을 얻은 펑더화이는 같은 날 김일성의 동의를 얻어냈고, 덩화, 양더즈, 제방과 교체해 새로 지원군 참모장을 맡은 리다는 펑더화이의 명령에 따라 20일 저녁 23시 30분 제1선 부대들에 다음과 같은 공격 명령을 하달함과 동시에 인민군 전방 사령부와 개성 회담 대표단에게도 이를 통보하였다.
이승만 비적 도당이 전쟁포로에 관한 협의를 파괴하고 다수의 북한인민군 전쟁포로를 석방했다. 이런 무리한 행동은 정전협정의 서명을 늦춰지게 할 것이고 세계 여론도 이미 큰 반향을 보이고 있다. 적에게 더욱 큰 압력을 가하여 판문점 회담과 연계시키기 위해, 펑더화이 총사령관의 동의를 거쳐 군사적으로 계속해서 이승만 군대에 타격을 가하기로 결정했다. 이를 위해 각 군은 즉각 미리 선정한 목표에 근거해 만약 준비가 완료되었으면 즉각 적을 공격해 섬멸하고 만약 새로 목표를 선정했으면 시간을 다투어 준비를 진행하라 갱도가 구축된 새로운 진지를 끝까지 사수하고 적의 반격을 이용해 대량의 적을 섬멸하라 미군과 외국군대에 대해서는 주도적인 공격을 하지 말라. 그러나 우리를 공격하는 적은 어느 누구든 반드시 결사적으로 타격하라.

이에 따라 제1선 각급 부대는 자신들이 마주한 적군, 즉 국군 2군단에 대해서 상황과 지형등을 분석하였으며 동시에 작전 계획도 수립하였다. 이리하여 중공군 하계전역 제3단계의 작전 준비가 시작되었다. 이때 중공군 20병단이 방어하고 있던 전선은 서쪽의 김화에서 동쪽으로 북한강 금성 이남 지역으로 미 제9군단 예하인 수도사단과 한국군 제2군단 예하 3, 6, 5, 8사단 등 모두 5개 사단이 방어하고 있었고 방어지역은 모두 북으로 돌출되어 있었다. 이때 한국군의 진지는 중공군의 하계전역 제1, 2단계 작전에서 타격을 입어 손상되어 있었는데 여기서 20병단은 금성돌출부에 형성된 약 300여개의 진지를 순조롭게 돌파하기 위하여 이러한 점을 이용해 국군 방어진지의 특징을 대부분 파악하는데 성공한다.

또 당시 중공군 제20병단의 예하 4개 군과 별도 33사단의 포병전력은 82mm 박격포 이상 화포 약 1,000문을 갖추고 있었는데 그중에서 산포, 야포, 유탄포가 약 400문이었으니 이로써 중공군의 포병전력은 한국군으로부터 마침내 포병 숫적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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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병단장 양용의 모습

한편, 제20병단은 지원군 사령부가 6월 20일 23시에 내린 지시에 따라 6월 22일, 작전회의를 개최하고 현황에 대해 분석을 진행한 다음 금성전역을 실행시키도록 결정을 하여 전역에 대한 배치를 확정하였다. 이때 제20병단 사령부는"북한강 서안 지역을 중점으로 계속해서 한국군 제8사단 잔존부대와 제6, 3사단과 수도사단 주력에게 치명적 타격을 가하고, 교암산과 금성천 이북 지역을 점령한 다음 1~2개의 제2선 사단의 반격에 대한 준비를 진행하고 동시에 한국군 수도사단 정면의 몇 개 지점을 공격 점령하여 적의 반격을 막아내고 다시 상황에 따라 동서에서 수도사단, 제6사단의 연대급 진지 한 곳씩을 협공하여 적을 섬멸하여 금성 정면의 전선을 직선으로 만든다. 전역이 개시되면 먼저 소규모 전투를 진행하여 조건을 만들고 그 다음에 다시 대규모 전투를 진행하여 마지막에 상술한 목표를 실현한다"라는 목표를 정했다. 그 후, 6월 23일 17시, 제20병단장 양용과 전임 사령관 대리 장웨이산, 그리고 신임 정치위원 왕핑, 참모장 샤오원쥬, 부참모장 자오관인은 제20병단 예하 각 군에게 지시를 하달하고 동시 에지원군 총사령부와 중앙군사위원회에 통보한 뒤, 휘하의 4개 군과 별도의 1개 사단으로써 서(西), 중(中),동(東) 약 3개의 작전 집단군을 편성하도록 했다. 총사령부는 6월 30일 이전에 소규모 전투 임무를 부여하며 이후 임무를 완수하면 7월 5일 대규모 전역을 위한 작전준비를 완료한 뒤, 7월 10일 전후로 총공격을 개시하기로 결정하였다.

해당 지시에서는 각 집단군 편성과 임무에 대해 명확한 구분을 하고 각 부대가 연속해서 작전을 수행해 치열한 전투를 치른다는 생각을 한다는 것을 요구하였다. 또한 사전에 충분한 준비를 진행해서 장병들에게 적을 경시하거나 대의를 소홀히 하는 문제 등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라고 요구했고 또 장병들에게 "충분한 준비로 적을 철저히 타격한다"는 정신을 주입해 먼저 소규모 전투를 전개한 뒤 다시 대규모로 발전시켜 "싸우면 반드시 섬멸하고 공격하면 반드시 무너뜨리고, 수비하면 반드시 사수한다"는 원칙을 지키라고 강조하였다.

이와 동시에 중공군 제9병단, 제19병단과 제1, 24, 60, 67군도 작전계획을 수립하여 이를 지원군 총사령부에 보고 및 전달하였다. 이때 지원군 사령관 대리 덩화, 부사령관 양더즈, 참모장 리다는 다시한번 제1선 각급 부대에게 한국군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할 것을 지시했다. 이어 제20병단이 전역 임무를 완수하면 약 2~3개 군을 동원해 종심 방향으로 제한적인 확장 작전도 진행할 것을 지시했다. 이때 내용문은 다음과 같다.
첫째, 현재 한국의 정치와 군사적 형세가 우리에게 모두 유리한 점에 근거해, 적군 제1선의 제1, 제24, 제67, 제60군은 지원군 사령부가 6월 20일 내린 갑사 178호 작전 명령에 따라 이승만 한국군에 대해 철저한 준비와 주도면밀한 작전을 진행하고 모든 준비가 완료된 다음 한국군에게 광범위한 타격을 가하라. 기타 정면의 각 군단은 현재 기본적으로 방어태세를 취하며 공격할 준비를 진행하라. 만약 적군(한국군이나 미군, 혹은 기타 외국군대는 상관없음)이 대담하게 위를 공격하면 그들을 굳건하게 섬멸하라. 제20병단은 병단의 6월 23일 제2차 전역 반격작전에 근거해 제67군과 제60군의 공격이 성공한 다음 유리한 상황에서 2~3개 군을 동원해 적의 종심인 화천 방향으로 제한적인 종심 확대 작전을 진행하라 제20병단은 현재 지휘하고 있는 5개 군(21군 포함)에 의거해 전역 제1차 작전 계획 및 적의 종심에 대한 확장 공격작전인 제2차 작전 계획을 수립하여 지원군 사령부에 보고하라. 이를 위해서 제60군의 제1차 작전이 종료된 후, 제21군이 신속하게 이를 대체하고 제60군은 다시 병단 제2선 지역으로 이동하여 적의 종심에 대한 확장 공격 작전을 준비하라.

둘째, 제20병단의 작전을 강화하기 위해 제23군에서 고사포 제61사단에서 1개의 중장거리포 연대와 다른 곳에서 2개의 공병대대를 선발해 제20병단에 배속시키기로 결정하고 구체적인 임무는 제20병단에서 지정하도록 하라.

이상을 각 병단에서 잘 이행하기를 바라며 수립된 계획과 배치등의 상황을 전문으로 보고하라.

이와 같은 지원군 사령부의 명령으로 제20병단은 6월 26일 종심 방향에 대한 작전 방안을 수립하고 해당 내용문을 지원군 사령부에 보고하였다. 27일 18시, 덩화, 양더즈, 리다는 제9병단에게 전문을 보냈으며 동시에 군사위원회 총참모부에 이를 보고하고 이후, 총참모부로부터 제20병단의 기본적인 작전방안에 대한 동의를 받았다. 그러나 총참모부는 제20병단 종심 방향과 작전 배치에 대한 구체적인 의견을 제시하고 다음과 같은 지적을 하였다.
제20병단이 종심 방향으로 작전을 펼칠 때 제24군은 상, 하구정 이남 김화에서 금성 사이의 도로를 장악하고 김화 방향에서 들어오는 적의 지원병과 전차부대를 막아 제20병단의 우측 안전을 보장하라

7월 5일과 6일, 제20병단은 5개의 군과 사단급 이상 간부 회의를 소집하도록 명했다. 이 회의에서는 포병사령관 가오춘신, 후방병참사령부 부사령관 장밍웬이 회의에 참석하였다. 해당, 작전회의에서 나온 결론은 먼저 각 부대의 작전 준비 상황을 점검하고 전역의 구체적인 방안을 연구한 뒤, 3개의 집단군 구성과 임무에 대해서 조정을 취한다는 것이었다. 또 원래 계획된 7월 10일 총공격 작전도 13일로 변경했다.

한편, 지도부는 제20병단이 작전을 개시하였을 때 병단과 연계시키기 위하여 제1선의 인근 각 군단이 몇개의 지점을 선정해 소규모 공격을 감행하도록 명령해달라는 것도 건의했다. 이에 따라 7월 6일, 병단은 구체적인 작전 방안을 지원군 총사령부와 중앙군사위원회에 보고하였다. 같은 날, 21시, 총참모부는 제1, 제24군의 휴전회담 연계와 한국군 타격을 목표로 한 예정된 작전 상황을 중앙군사위원회에 보고하고 개성의 대표단에게도 이를 통보하였다. 그리고 하루가 지난 7일, 16시에는 제20병단의 작전방안과 전역 개시 시간을 승인하고 "제24군은 동시에 연계해서 행동하고 나머지 각 군은 준비 상황에 따라 결정하라"는 추가 지시도 덧붙여서 하달하였다.

마침내 7월 10일 19시 30분, 제20병단 사령관 양용, 정치위원 왕핑, 참모장 샤우원쥬, 부참모장 자오관잉은 각 군과 각 집단군에 정식 작전명령을 하달하였다.
당면한 적의 정황과 지원군 사령부의 작전 의도에 따라 병단은 '중, 동, 서'의 세 개 작전 그룹으로 나누어 금성 서남쪽 이실동 북정령에서 이선동, 금성천 이북 지역의 한국군 제6사단 전체 제8사단의 주력, 수도사단의 1개 연대와 별도의 1개 대대 제3사단의 1개 연대를 공격하고 점령한 진지를 굳게 사수하며 적의 반격을 격퇴시키고, 적의 반격을 격퇴시키는 과정에서 적의 제2선 연대와 사단 및 증원이 예상되는 적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한다.

공격 집단군 편성은 다음과 같다.[9]
제20병단의 작전계획

제1단계
금성서남쪽 이실동-북정령-배선골 및 금성천 이북의 국군을 포위 섬멸.
섬멸 후 전선을 직선으로 만들고 이후 상황에 따라 2단계로 전환

제2단계
삼천봉-적근산-장고봉-흑운토령-백암산을 공격하고 이후 작전이 성공한다면 적의 반격을 격퇴할 준비를 하되 작전기간중에 다시 .대량의 적군을 섬멸한다.

서부집단 작전

서부집단은 제68군, 제54군 예하 130사단으로 편성하고 외야동-회고개 간의 공격을 담당하며 1단계 작전에서 서부집단은 522고지와 552고지 일대의 국군 수도사단 1연대를 섬멸하고 이어서 이실동-북정령-월봉산-개야리 이북지역의 국군을 공격 및 섬멸한다. 2단계는 중부 및 동부집단과 협조하여 배선골 서쪽과 서북쪽에 주둔하고 있는 국군을 공격한다.

중부집단 작전

중부집단은 제67군과 제54군 제135사단 제68군 예하 202사단으로 편성하고 관대리와 교암산 간의 공격을 담당하도록 한다. 제1단계에서 중부집단은 교암산 방면 국군 8사단 제10연대와 6사단 19연대 1개 대대 등을 섬멸하며 이후 동산리-상산리 일대의 국군을 공격한다. 제2단계는 동부 및 서부집단과 협조하여 배선골 서쪽 및 서북지역의 국군을 섬멸한다.

동부집단 작전

동부집단은 제60군, 제21군 예하 33사단, 제68군 예하 제605연대로 편성하여 송실리-용호동 간의 공격을 담당하도록 한다. 제1단계에 있어서 동부집단은 송실리 및 용호동 서쪽고지의 국군을 섬멸하고 이어 광대공-세현리 방향으로 공격을 확대하여 금성천의 교량과 포구 및 금성-화천 간 도로를 장악하고 적의 반격 및 증원을 차단한다. 제2단계에서 동부집단은 중부 및 서부집단과 협조하여 동쪽 및 동남쪽으로부터 배선골의 적을 공격한다.

예비대와 작전개시 시간

제54군 제134사단은 병단의 예비대로 편성하고 세포리 부근에 위치한다.
각 부대는 12일 저녁 모든 공격 준비를 완료하고 13일 19시 동시에 공격을 개시(11일 18시 공격시간을 13일 21시로 변경)한다.
각 집단편성은 다음과 같다.
  • 중부집단
  • 제54군(제135사단)
  • 제68군(제202사단)
  • 제67군(제199, 200, 201사단)
  • 합계: 5개 사단
  • 서부집단
  • 제54군(제130사단)
  • 제68군(제203, 204사단)
  • 합계: 3개 사단
  • 동부집단
  • 제21군(제61, 63, 33사단)
  • 제60군(제179, 180, 181사단)
  • 제68군(제202사단 제605연대)
  • 합계:6개 사단
  • 예비대
  • 54군(134사단)
  • 합계:1개 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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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20병단이 작전계획을 수립하자 중공군 사령부는 제20병단에게 고사포병과 로켓포병 각 1개 연대, 유탄포병 1개 연대와 1개 대대, 대전차 포병 3개 중대, 공병 4개 대대를 강화시켰다. 이에 따라 금성 방면에 주둔한 중공군의 군의 수는 총 6개 군이 되고 82mm 박격포 이상의 화포 1,483문을 갖추며 병력은 3:1로 우세하고 화포 역시 중공군이 국군에 비해 무려 1.6:1이나 앞서는 매우 기이한 상황이 된다.[10]

또 20병단은 금성 작전에 있어서 도하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여 도로를 긴급 보수하고 도하 장비를 예하 부대들에게 분배하였는데 먼저 6월 28일에 병단은 공정보장(工程保障)에 관한 지시를 하달했고 모두 13개 보병연대와 각 군의 완편 공병 및 배속 공병 50여개 중대를 동원하여 도로 452km, 임시 군사도로 61km, 가교 72개[11]를 복구하였다. 이와 동시에 병단은 날씨로 인한 하천 범람을 대비하기 위하여 중공군 총사령부로부터 각종 주교 47조, 소련식 부교 2조, 중형 고무보트 및 이동식 보트 36척, 고무 보트 200m, 소련식 구명복 1,240여벌을 받아내어 분배하였다.

그리고 작전 시, 후방작전을 위해 후방병참사령부는 부사령관인 우셴언을 현장으로 파견했다. 병참사령부는 10개의 수송연대와 포병 수송용 차량 2,700여대를 제공하여 운송을 지원하도록 조치했고 물자 15,000톤을 현장으로 수송하였다. 또한 각종 포탄 130만발과 폭약 234,000kg를 준비했으며 7월 11일까지 제60군, 제68군에 필요한 주식과 부식 및 유류를 7월 20일까지 사용 가능하도록 보급하고 기타 물자는 7월 말까지 사용 가능할 정도의 분량을 보급하였다. 그러나 막상 전투시기 때 부대 각 병사들에게 전투식량 및 탄약을 보급했으나 작전개시 단 4~5일만에 대부분 소진되어 전선에서 기아 현상과 탄약 부족 현상이 벌어지는 현상이 발생했다. 이는 중공군의 자체적인 보급 역량 한계와 기상악화 때문이었다.[12] 당시 폭우는 거의 허리까지 물에 잠길 정도로 심했고 때문에 금성천에 설치된 교량을 건너 보급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고 한다. 이후 날씨가 풀린 7월 16일부터는 미군의 대대적인 폭격으로 말미암아 금성천 교량이 틈마나면 박살나 추가 보급이 사실상 차단 상태에 놓여 있었다.[13]

한편, 이때 금성 방면에 주둔중이던 중공군의 각 군의 신병과 고참 비율은 다음과 같다.[14]
부대명 신병 고병
제68군 30% 70%
제60군 55% 45%
제67군 45% 55%
제54군 10% 90%

먼저 68군은 전체 구성원중 신병이 60군, 67군에 비해 적은편이지만 전체 구성원중 무학력자가 50% 정도이며 2~3년의 교육을 받은 자는 15% 정도이고 소졸 또는 중졸의 학력을 가진 자는 매우 적은 수이다. 이 중, 60군은 6월 공세를 거쳐서 고참병이 매우 심하게 손실되어 있었기 때문에 신병 비율이 무려 절반을 넘는 55%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군사교육을 거의 받지 못하여 전투력이 매우 낮아 2군단의 큰 위협이 되지 못하였다.

그리고 금성 전역 작전 당시 중부집단을 맡은 67군은 하남성 출신이 대다수고 이외에 안휘성 호북성, 산과성 출신도 포함되어 있었다. 다만 67군 역시 구성원중 농민이 대다수였지만 소졸이 30%, 무학력자 30%, 중학교에서 2~3년을 교육받다 중퇴한 이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중, 장교들은 1년 이상의 전투경험과 3개월 이상의 정치교육을 받은 이들로 대부분 구성되었기에 손실이 적은 편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6월 공세 직후 보충된 사병들은 그 어떠한 군사훈련이 없었고 그저 간단한 훈련만을 시킬뿐이었다. 마지막으로 54군은 20병단이 가진 최정예 군으로 구성원은 절강성 출신이 가장 많았으며 기타 출신지는 광동성, 하남성, 호북성이 있고 산과성, 흑룡강 부근 출신자도 다수있었다. 이들의 전투력은 오랜 기간 전투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매우 강력하였다. 특히 이들중 70% 이상이 2년 이상 전투경험자들인데다 3개월 이상의 기초훈련과 2년 가까운 정치훈련을 받았고 기타 중화기 교육도 약 6개월간 받았다. 이는 곧 국군에게 있어서 가장 강력한 위력을 투사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따라서 20병단과 대치중이던 국군 2군단은 제54군을 굉장히 큰 위협으로 바라보았다.

이처럼 중공군은 7월 공세를 위해 엄청난 노력을 가하여 준비했으며 7월 10일에 국군 2군단 전방 진지에 각각 연대급 병력을 동원하여 공격을 개시하였고 마침내 7월 13일 21시, 24만의 대군을 동원한 최후의 작전이 개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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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병단의 7월 공세 작전지도

3.3. 국군의 준비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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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금성 돌출부를 방어하던 국군 제2군단의 참호선 지도
'피대신 땀을 흘리자'
당시 2군단의 훈령
이 시기 금성 돌출부를 방어하던 국군 제2군단의 병력과 포병전력은 다음과 같다.
  • 군단사령부: 1,671명
  • 지원부대 병력
    • 제60헌병단: 165명
    • 제1전차대: 621명
    • 제1103 야포단: 3,450명
    • 제11포병단: 1,289명
    • 제15포병단: 1,252명
    • 제12포병단: 557명
    • 제88포대대: 609명
    • 제96포대대: 597명
    • 제628포대대: 560명
  • 계: 10,771명
  • 전투부대 병력
    • 제3사단: 11,419명
    • 제5사단: 11,101명
    • 제6사단: 11,889명
    • 제7사단: 14,291명
    • 제8사단: 11,616명
    • 제11사단: 14,294명
  • 계: 74,610명
총합: 85,381명

* 포병전력
* 60mm 박격포: 487문
* 81mm 박격포: 187문
* 4.2인치 박격포: 56문
* 105mm 곡사포: 60문
* 155mm 곡사포: 54문
* 계: 844문
2군단은 7월 공세 이전 총 8만여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화포는 총 844문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이중 약 60%가 고참병, 40%가 신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또 군단 병력과 미 제9군단의 지휘를 받던 수도사단과 9사단까지 포함한다면 병력은 총 10만명이 넘는데 군단은 이 부대들을 전부 동굴진지에 배치하였다. 당시 동굴진지가 무려 300여개가 넘었기 때문이다. 다만 동굴진지들은 한가지의 심각한 문제점을 소유하고 있었다. 바로 예비대 배치 문제로 인해 중공군에게 후방을 공격 당하면 지휘체계가 마비될 수 있다는 단점이었다.
금성 돌출부 지역의 전반적인 방어 편성의 강도는 사단당 약 300개에 이르는 동굴화된 유개 엄체호를 구축하여 주저항선상의 진지는 타지역에 비해 그 강도가 높은 편이었으나, 통상 예비대의 병력이 배치되어 있는 전초진지를 과도하게 확보하고 있어 충분한 국자 예비대를 보유하지 못한 취약점을 안고 있었다.
金城戰鬪, 22p
다만 진지자체로는 매우 강력해서 공격해 오는 중공군에게 엄청난 출혈을 강요하였다. 일례로 6월 공세 때 5사단 진지로 몰려왔던 중공군 15,000여명 중 약 4,527명이 전사했고 8명은 포로가 되는 매우 큰 타격을 입었다. 이에따라 중공군은 이러한 피해를 막기 위해 폭약을 무려 243,000kg이나 준비하였다. 그리고 중공군은 토치카를 일거에 파괴하는 파괴통을 병사들에게 각각 대량으로 보급했고 파괴통으로써 진지에 육박해 파괴하는 전술을 쓰도록 훈련시켰다.[15] 즉, 동굴진지는 예비대의 문제 등이 있었지만 진지 자체로는 매우 강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제2군단이 중공군의 공세로부터 어찌저찌해 초기방어에 성공하더라도 보급로 문제로 인해서 추가 보급이 굉장히 어려워 작전을 오래 지속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는 2군단 작전일지 및 8사단 전투상보에도 아주 잘 나와 있다.
山岳이 險峻하여 敵으로부터 瞰制되어 있지 않는 良好한 交通路이나 然而나 이 交通路를 3個師团과 約 10餘隊나 되는 砲兵团及 約 10 餘隊되는 陸軍本部 直轄砲隊等 多數部隊의 使用으로 말미암아 大端히 混雜함을 避할 수 없었음.

해석:산악이 험준하여 적으로부터 감제되어 있지 않는 양호한 교통로이나 연이나 이 교통로를 3개 사단과 약 10여대나 되는 포병단 급(및) 약 10 여대되는 육군본부 직할포병등 다수부대의 사용으로 말이암아 대단히 혼잡함을 피할 수 없었음.
戰鬪詳報, 步兵第八師團, 16~17p
攻击時 敵에게 有利点은 我主抵抗線后方의 陵線과 溪谷은 大部分이 南北으로 向하였으며 我方의 主補給路의 缺乏한 弱点을 들 수 있다.

해석: 공격시 적에게 유리점은 아주저항선 후방의 능선과 계곡은 대부분이 남북으로 향하였으며 아방의 주보급로의 결핍한 약점을 둘 수 있다.
作戰詳報, 第二軍團司令部, 8p

당시 군단의 주보급로는 금성 돌출부 특성상 험준한 산악 지형으로 인하여 좌우로 이동하는 보급로가 없었고 오로지 북한강 계곡의 동안을 따라서 보급로를 사용하거나 아니면 북한강 수로를 활용하는 하천 보급로를 활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렇게 신설된 군단 보급로인 6번 도로와 17번 도로는 군단이 매번 작전 할 때마다 혼잡하였다.[16] 즉 이를 통해 당시 제2군단이 가지고 있는 방어편성 문제점은 크게 2가지로 볼 수 있다.

1.동굴진지로 인한 예비대 부재
2.지형으로 인한 보급로 문제

여기에는 당시 휴전체결 직전이라는 시대적 상황도 작용됐다. 이는 군단이 반격작전을 할 때 더욱 두드러졌고 그 결과 반격작전이 제한적인 수준에서 머무르는 것에 그치는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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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단 보급로 상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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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전투 직전 촬영된 군단보급로인 6번 도로의 모습
해당 도로는 17번 도로와 함께 기갑부대가 기동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도로였다.

한편, 6월 공세 이후의 전황은 매우 조용하여 전투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러나 6월 24일부터 전황이 갑자기 변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중공군의 7월 공세 개시를 위한 조치로 군단은 이를두고 중공군이 곧 대규모 공세를 개시할 것이라고 예측하였다. 그러나 2군단은 당시 악화된 날씨로 인해 원거리 관측을 전혀 할 수 없었고 이로 인해 공격부대의 규모와 보급 상황도 몰랐으며 또한 공격이 정확히 언제 시작되는지에 대해서도 몰랐다. 다시말해 군단은 7월 11일 수도사단에서 붙잡힌 중공군 포로의 진술이 나오기 이전에는 그저 7월 초 무렵에 공세가 개시할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이때, 전선의 전황은 24일에 시작된 9사단 28연대의 북진능선 전투, 29연대의 지형능선 전투 그리고 26일에 시작된 3사단의 관망산 전투와 화살머리고지 전투 및 한신전투단의 습격 등 중공군의 탐색공격이 점차 강화되고 있었고 이를 본 미 제8군에서는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 제24사단을 급히 한국으로 보내도록 조치했으며 7월 11일에는 중공군 포로의 증언으로 중공군의 7월 공세 개시일자가 정확히 밝혀졌기 때문에 제11사단을 급히 2군단 예비로 배속시켜 수도사단과 9사단의 방어전면을 축소시켰다.

이후 군단은 중공군을 맞이할 준비를 개시했고 7월 10일에 시작된 연대급 공격을 받아내며 버티다가 3일이 지난 13일에는 마침내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가 시작되어 이를 방어하게 된다.

3.4. 금성 돌출부 좌견부

우리 9연대와 수도사단 1연대는 꼼짝없이 당하고 말았는데 아군전선을 돌파한 중공군은 그냥 물밀듯이 밀려오고 만 거예요.
나는「지프」를 몰아 적근산 고개를 넘어오다가 최창언 수도사단장을 만났습니다. 얼굴이 상기된 채 고마루턱에 서 있는 최 장군에게 수도사단은 지금 어떠냐고 물었더니 통신이 모두 끊겨 상황조차 파악할 수 없는 지경이라는 거에요.
새벽에 보니 수도사단지역의 미군포병진지도 완전히 포위가 돼버렸더군요. 적근산 앞까지 내리밀렸던 아군은 사투를 거듭한 끝에 주 저항선을 방어하는데 성공은 했지만 당시 전황은 정말 비참했었어요.
▲이창정씨(당시 제11사단 부사단장·대령)
1953년 7월 13일 밤 9시, 금성 돌출부 좌견부에 배치된 수도사단은 중공군의 엄청난 포격을 받기 시작한다. 이 포격은 지난 일주일 동안 실시된 파괴사격과는 차원이 다른 포격이었고 이 포격으로 수도사단 전 구역이 초토화가 된다. 이후 중공군은 포격과 동시에 우일선 1연대 진지에 약 1개 군단급 병력을 보낸다. 한편 좌일선 26연대 진지에는 74사단을 내보내 맹공격을 가한다.

이때 1연대 진지는 전부 동굴진지로 편성되어 있었는데 수도사단을 공격한 4개 사단 즉 1개군 규모의 중공군은 이 동굴진지에 대해 매우 잘알고 있었고 이윽고 이것을 역이용하여 일부병력으로 한국군의 주저항선 거점을 공격하게 한뒤 국군을 동굴 내부로 들어가게 유도하고는 주력을 장애물 지대로 투입시켜 이를 침투하는 전법을 펼쳤다.

그 결과 68군은 이러한 전법을 통해 주저항선을 돌파, 및 주저항선 1-2km 후방에 위치한 예비대, 대대OP, 연대OP 그리고 4km 후방의 이천동에 위치한 연대CP등을 기습 공격하여 연대를 와해시켰으며 후방이 와해되어 지휘관이 사라진 주저항선의 각 병사들은 지휘관이 사라졌기에 호에서 뛰쳐나와 싸우기보단 그대로 호 속에 남아 끝까지 싸울 수밖에 없어 결국 괴멸 또는 포로가 되는 매우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였다.

물론 이 동굴진지는 소규모 부대의 공격에는 매우 효과적이었지만 중공군의 6월 공세, 7월 공세와 같은 대규모 공세에서는 포격을 잠시 피하였다가 고개를 들고 다시 싸울수 있는 토끼굴식 개인호보다 못하다는 것이 이곳 금성전투에서 다시한번 증명되었고 수도사단의 1연대는 이 문제점이 많은 동굴진지를 그대로 사용하는 바람에 단 이틀만에 연대가 붕괴되는 사태를 초래하고 말았다.

3.4.1. 1연대의 상황 7·5·6중대(회고개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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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 1연대의 진지 침투도

한편 중공군은 26연대 쪽으로 집중하던 포격을 1연대의 주저항선인 미주리선의 약 2km 후방에 떨어진 대대OP지역에 집중하기 시작하였고 이와 동시에 1개 대대급 병력을 연대 우익 대대인 2대대의 7중대 좌측방으로 투입한다.[17] 게다가 1연대의 우측진지인 회고개 우일선에도 1개 대대와 전차 2대를 보내 회고개를 지키는 5중대의 진지를 무자비하게 공격해 오기 시작하였고 이에 5중대는 이들을 향해 전화력을 쏟아부으며 격렬하게 저항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은 기존 1개 대대에서 2개 대대로 증강되 다시 공격해 들어오기 시작하였고 결국 5중대의 진지 지표면을 중공군에게 넘겨주고 만다.

이후 중공군은 회고개를 넘어 500m 후방에 약간 높은 423고지를 연하는 능선의 제2저지선에 배치된 6중대 진지 우단부를 공격해 6중대와 결전을 벌이게 된다.

3.4.2. 중공군의 침투와 10중대 투입

이때 우인접 사단 쪽의 인접 대대장이 전화로 "나 옆에 있는 6사단 한 중령 입니다. 적 약 1개 연대 쯤 되는 중공군 병력이 우리 진지 앞을 지나서 당신네 진지쪽으로 쏟아지는 것 같구만 빨리 조치하시오"라고 하는 통보가 있었는데 이는 1연대 소속 우일선 2대대의 상황이 급격하게 기울어졌다는 걸 알려주는 꼴이었다. 이에 대대장 김영길 중령은 주저항선 1.8km 후방의 552고지에 위치한 대대OP의 자체 경계를 강화하도록 조치를 취한뒤 오후 10시 20분에 연대장의 허락 승인을 받아 7중대의 약 500m 후방의 예비 진지에 배치된 기갑연대 10중대를 전방의 7중대 진지로 보내 지원하도록 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10중대는 가는 도중 중공군 대부대와 조우해 붕괴되어 후퇴하였고 중대는 서둘러 방어준비를 하였다. 하지만 중공군은 그런 시간조차 주지 않고 바로 공격해 들어왔기 때문에 중대는 대대OP가 위치한 552고지로 후퇴하게 된다. 이후 대대장은 연대장과 통화를 하여 연대장에게 따지는데 통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김영길 중령: "연대장님 내 진지에 쳐들어온 적이 6개 대대나 됩니다. 또 다시 1개 연대 병력이 더 들어오고 있습니다. 야포사격은 어찌 됐습니까?"
연대장 최세인: "이것 참 야단 났군 연대 지원포는 말이요, 1대대가 급해서 그 쪽으로 돌리고 있는데 3대대 진지에도 기어들고 있고. 곧 때려 줄테니 우선 자대 힘으로 버티시오."
김영길 중령: "그러면 예비 병력이라도 주십시오."
연대장 최세인: "에, 연대 수색중대를 배속하겠소."
- <전장>, 김영길 저

이와 같이 대대는 연대로부터 제대로 된 화력지원을 받지 못해 중공군의 인해전술을 그대로 맞아야만 했다. 다만 연대가 아예 손 놓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 연대장 최세인 대령이 대대장과 통화 하면서 화력지원이 좀 늦는 대신 대대에 연대 수색중대를 배속시켜 주겠다고 말했고 실제로 이를 실행에 옮겨 수색중대를 대대에 배속 시키는 등 최선을 다하였기 때문이다. 다만 상황이 따라주지 못할 뿐.
2대대장 김영길: 연대장님. 현재 시간으로 적 1개 연대 병력이 연대 CP 쪽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무슨 대책이 있습니까?
연대장 최세인: 아아...글쎄 나는 현재 예비병력이 하나도 없소.[18] 기갑연대 3대대장은 자기 대대를 데리고 방금 1대대 진지로 떠났소....이것 참! 야단났군 그리고 1대대와 3대대는 통화가 안되는데 어찌된건지 알아봐 줘요.
- <전장> 김영길 저

한편 대대에서는 막 도착한 수색중대원들이 후속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에 대대장 김영길은 이들을 대대OP에 배치하도록 지시하였는데 그때 한 위생병이 막 허겁지겁 대대장에게 달려와 "1대대 진지 옆에 연대본부 가는 도로로 중공군 몇개 대대나 되는 병력이 마구 지나갑니다! 우리가 사격을 해도 놈들은 끄덕도 않고 그냥 가던데요!"라고 말하며 대대장에게 상황 보고를 하였다. 이 위생병은 양 대대 사이에 있는 신작로에 자리잡고 있던 임시 구호소 요원이었다. 대대장은 곧바로 연대장을 찾아가 이 사실을 알린 뒤, 서둘러 예비병력을 배치하려 하였다. 그러나 연대는 이미 예비병력을 모두 써버린 상태. 결국 연대장 최세인 대령은 사단에 연락을 취한 뒤, 결과를 지켜보도록 했다. 이후 사단장의 답변이 왔다. 사단장은 기갑연대 1개 대대를 출동시키겠다고 답변했다. 기갑연대장 육근수 대령과 그가 지휘하는 1개 대대였다. 이어 사단장은 역습방안 모의를 위해 부사단장 임익순 대령도 연대cp로 보내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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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근수 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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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익순 대령 (백마고지에서)

3.4.3. 중치령 전투

연대의 중앙 일선을 맡은 제1대대는 사단의 방어요충인 중치령을 넘어 샛별고지(직목동 남쪽 1km)와 번개고지(율동 동남쪽 500m, 샛별고지 서남쪽 1.1km)로 몰려온 중공군 203사단을 맞이해 서로 격돌하게 되고 회고개 전투때 처럼 1대대 역시 중공군 203사단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한다.

7월 13일 오후 10시, 중치령 접근로상의 473고지에 주둔한 1대대 3중대 정면과 우인접 신작로 쪽에서 중공군 2개 대대가 출현해 인해전술을 펼쳤다. 이에 1, 3중대는 전부 호속으로 들어가 진내사격을 가했고 중공군은 이를 피하기 위해 좌우의 계곡 접근로를 침투하였다. 그리고 중공군은 473고지 300m 후방에 위치한 제2저지선에 배치된 2중대의 진지로 쳐들어갔고(약 40분뒤) 이후 이들과 전투를 벌인 오후 11시에는 지상부를 완전히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그 후, 그들은 1, 3중대를 그대로 고립시켜 맹공격을 가한다.
3.4.3.1. 512-522고지 지원 (기갑연대 소속 3대대)
때는 중공군의 공격이 임박하기 직전인 13일 오후 9시 50분에 있었던 일이었다. 당시 연대장 최세인 대령은 제1대대OP가 있는 512고지 배사면에 집결시켜 놓은 예비 기갑연대 3대대를 출동시켜 주저항선의 약1km 후방에 떨어진 대대OP를 연하는 능선(512고지-522고지)에 제2저지선을 구축하도록 조치를 취했는데 기갑연대 3대대장 이준화 소령은 연대장의 명령에 수긍해 제 3대대 예하 제9중대를 1대대OP가 있는 512고지로 진출시키도록 명령을 내리고 제11중대를 512고지의 좌측방에 있는 522고지로 보낸도록 한뒤 1대대OP로 지프차를 몰아 떠났다.

​그러나 11중대는 예정대로 522고지에 도착하였지만 1대대OP쪽으로 가던 제9중대는 가던 도중 중공군 대부대와 조우, 격돌하여 대부분의 장교가 전사하고 중대원은 분산되고 말았다. 이후 제3대대장 이준화 소령은 이들을 찾기 위해 고지에서 내려오다 중공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전사하였다. 당시 9중대장이었던 이덕화 중위는 뒷날 이때의 정황을 알 수 있도록 증언록을 남겨 놓았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나는 대대장의 명령을 받는 즉시 TS-10으로 각 소대장을 불러 제1대대OP로 진출하도록 명령하였다. 출발 순서는 제2소대를 선두로 제3소대, 제1소대 순으로 하고 화기소대를 현지에 남겨 진지와 보급품을 경계하게 하였다. 그러나 막상 기동을 시작하자 , 중공군의 포탄이 점차로 많이 떨어져 각 소대의 진출이 늦어졌다. 그래서 나는 직접 연락병과 함께 선두로 나서 칠흑같은 야음의 우중을 헤치며 포탄이 작렬하는 산복을 타고 제1대대OP를 향해 나아갔다. 7부능선에 이르렀을 때 낙탄으로 나와 연락병이 부상을 입었다. 나는 복부에 파편을 맞았고 연락병은 다리를 다쳤다. 나는 위생병을 불러 응급처치로 지혈한 다음 중대의 기동을 계속 독려하였다. 이때 선임하사관 고순봉 이등상사로부터 '제2소대장 부상, 제3소대장 부상, 제1소대장 전사'라는 보고가 연달아 들어왔다. 중대의 전열이 완전히 무너지고 만 셈이었다.
선임장교가 대책을 혐의하는 중에 중대의 취사 반장이 사색이 되어 달려오더니, 후방이 이미 중공군에게 차단되어 중대가 포위되었다고 하였다. 나는 사태가 결정적으로 기울었다고 판단하고 곧 선임장교에게 '각 소대의 잔여병력을 수습한 후 중공군 포위망의 한곳을 돌파하여 결정하라'고 지시하였다. 수습된 병력은 통틀어 80명 정도였다. 날이 밝기를 기다려 선임장교로 하여금 중공군의 포위망 돌파를 지휘하도록 하고, 나는 병사들의 부축을 받으며 대대CP가 있는 하동포 쪽으로 남하하였다.
나는 1km쯤 떨어진 길양편 능선위에서 중공군 기마병이 우리를 보고 사격을 가하여 중대가 분산된 그때부터 중대 주력에서 이탈되어 나 혼자 부상당한 배를 움켜 잡고 기다시피하면서 하진현을 향해 낮에는 아무데서나 자고 밤에는 걸었다. 여름철에 비를 맞았더니 상처가 이내 곪기 시작하였다. 철수 도중 두번이나 중공군에게 발각되었지만 상처가 곪아 썩는 것을 보더니 모두들 나를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그리하여 3일만에 승암고개의 미 제3사단 지역으로 넘어와 생환하였다.''

이와 같이 당시 9중대의 상황이 정말 비참했다는 걸 알 수 있으며 또 전반적인 상황과 각 역습부대의 전투경과가 어떠하였는지도 알 수 있다.
한편 일선의 1대대OP(512고지)에 있던 대대장 이중록 중령은 새벽 3시쯤 수화기를 들고 고립된 제2, 3중대장들과 함께 애국가를 애창하였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대대장은 일행을 이끌고 대대장호와 전사면의 관측호를 연결한 유개교통호의 중간에 있는 통풍구 부근에 이동해 모여 있다가, 중공군의 파괴통 공격으로 기절하였다.

이후 대대장은 일출이 되고서야 깨어났고 깨어난 대대장은 김주안 상사(정보, 작전, 선임하사)와 무전병과 함께 서둘러 호에서 빠져나와 산 아래 개울을 건너 연대CP로 남하했고 남하 도중 낙오병력 150명을 추가로 수습해 연대 뒷산인 419고지를 건너 새 저지선을 구축하고 있는 미 제3사단쪽으로 생환하였다.

한편 제1연대 좌일선에 배치된 3대대는 대대의 주저항선 전방에 흐르고 있는 남대천과 남대천 남안에 위치한 천연장애물 덕분에 초전에 중공군의 포격만 받았을뿐 보병공격은 전혀 받지 않았다. 그러나 오후 10:20분이 지나자 중공군은 9중대 진지 정면에 중대규모로 출몰하여 보병공격을 감행했으며 이에 대대는 이들을 포격으로 격퇴시켜 버린다.

이후 중공군은 한 시간만에 반격해 들어왔으나 중대의 강력한 탄막사격 및 저지사격으로 이들 역시 모두 격퇴당한다.

3.4.4. 26연대의 분투와 철수

사단의 좌일선인 26연대는 7월 13일 저녁에 좌인접 9사단의 3대대(좌일선 대대) 진지를 인계한 후 주저항선 보강을 위해 부대 재배치를 하다 중공군의 공세를 받았는데 이때가 13일 오후 9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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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연대 3대대 진지 교대 상황도

13일 오후 9시, 제26연대 1대대는 약 1개 중대 규모의 중공군이 나타나 서둘러 포격을 실시하였고 그들을 모두 격퇴시켰으나 1시간뒤에 2개 대대규모로 증강되더니 각 중대 진지를 1개 중대로부터 1개 대대에 이르는 병력으로 일제히 공격을 감행하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대대는 연대급 병력을 맞이해 처절한 혈투를 벌이게 되었고 결국 철수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대대는 끝까지 분투하였고 그렇게 시간이 지나 오후 11시가 되자 예상했던 대로 대대의 주저항선은 중공군에게 뚫려버리고 말았고[19] 연대는 서둘러 좌일선 대대 진지를 좌인접 사단에 인계하고, 1대대 우반부를 인수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는 3대대장을 따로 불러 진지 교대를 중지하고 1대대를 서둘러 증원하라는 명령을 지시한 다음 예비대인 2대대를 1대대로 증원하도록 조치하였다.

그러나 이들 양개 대대는 가는 도중 중공군과 조우해 격돌하여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하였고 비가 엄청 내리는 폭우속에 결국 분산되어 남대천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이 전투로 2대대와 3대대는 엄청난 피해를 입어 잔존병력이 겨우 100여명 정도로 줄게 되었고 중대장이 3일동안 실종되거나 소대장이 부상을 입어 겨우 빠져나오는등 사실상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게 되었다.

한편 1대대의 상황은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는 상황이었으며 승산도 전혀 없는 상태였다. 당시 1대대 주저항선에 배치된 4개 중대는 연대의 지원이 실패하면서 고립상태에 빠졌고 그나마 남아있는 것 조차 진내사격이 전부로 사실상 전멸직전에 몰려있었다.

이후 중공군은 곧바로 행동을 개시해 좌단에 배치된 1중대 전초로 나가 있는 황신수 소위가 이끄는 2소대를 우회하여 주저항선을 공격하였고 2소대를 완전히 포위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2소대는 소대장을 포함한 전병력이 호속으로 들어가 저항했기 때문에 탈출하지 않았으며 결국 호가 차례차례 파괴 당한 끝에 소대원 전원이 전사하게 된다.

한편 1중대의 우측에 있던 3중대는 오전 4시경에 대대OP로 몰려온 중공군들을 상대로 맞서 싸웠으나 중공군이 대대OP 호 속으로 수류탄 2발을 던졌기 때문에[20] 3중대는 서둘러 주저항선을 포기하고 남대천 남안으로 철수한다.

그리고 3중대 우측방에 있는 연대의 수색중대도 중공군의 공격를 받아 격렬한 전투를 벌였고 그 결과 중대장 조한길 대위가 전사하고 중대원 158명중 78명의 사상자가 발생해 중대는 전멸 직전에 몰리게 된다. 하지만 중대는 철수하는데 성공하였고 이후 남대천 서안에 집결하였다.

끝으로 맨 우단에 배치된 2중대또한 중공군과 조우해 중대장이 부상을 입고 소대장이 전사하는등 많은 병력 손실을 입었지만 남대천 너머로 철수하는데에는 성공한다.

한편 연대에 배속되어 남대천 남안의 제2선으로 배치된 사단의 수색중대와 기갑연대 수색중대는 일선대대와 역습대대의 철수를 엄호한 다음 오전 6시에 2km 남쪽 462고지-노동 선으로 철수한 일선대대를 엄호하여 그 후방으로 철수하였다.

여기서 1연대를 증원하러 간 육근수 대령이 이끄는 기갑연대의 상황은 다음과 같다. 당시 연대장은 사단장의 명령에 따라 14일 새벽 12:50분에 사단 사령부 우측방에 있는(1.2km) 연대CP로 집결한 다음 제2대대를 사단에서 지원된 22대의 차량에 태워 1연대 2대대CP로 보냈다.

이때 연대장 육근수 대령은 본대보다 한발 앞서 1연대CP로 간 상태였고 연대장 최세인 대령과 역습부대 투입에 대하여 협의하였다. 그러나 이 협의에서 1연대장 최세인 대령은 정면 공격을 주장하였다. 이에 기갑연대장 육근수 대령은 중공군의 남진 대열의 우측방 공격을 주장했다. 양측간의 의견출돌이 발생한 것이었다. 그러던 도중, 기갑연대 제2대대가 육근수 대령의 지시대로 중공군의 공격 대열을 우측방을 공격할 위치를 잡기 위해 우인접 사단 지역내에 있는 월봉리 쪽으로 계속 이동하였다.

하지만 수도사단의 부사단장인 임익순 대령이 1연대CP에 도착하면서 반격계획은 연대장 최세인 대령에게 돌려지게 되었다. 그 결과, 기갑연대의 제2대대는 1연대의 지침에 따라 차량을 돌려 철수하게 돠었다.

이후 오전 3시 30분경, 2대대는 177A도로에서 연대CP로 갈라지는 삼거리에 도착하고 1연대CP로 이어진 주보급로에 도착한다.. 그러나 2대대가 행군해 가고 있는 이 도로는 바로 중공군 대부대가 6열 종대로 남하하고 있는 도로였다. 즉 중공군은 이 도로를 따라 남하하고 있었고 대대는 그 위로 올라가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에 기갑연대장 육근수 대령은 급히 연대CP를 떠나 이천동으로 달려가 먼저 도착해 있는 8중대장을 만난 뒤, 중대가 선정한 진지를 정찰하라고 지시하고 후속 중대의 도착을 기다리도록 지시했다.

3.4.5. 1연대 지휘소 와해(중공군 203사단 609연대 2대대의 공격)

이때 1연대장인 최세인 대령은 연대CP의 경계를 하기 위해 연대의 경비소대를 제외한 본부 및 근무중대 병력을 1km 북쪽의 교량을 지키도록 조치하고 기갑연대의 2대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 도로를 따라 남하하고 있었던 중공군 대부대가 연대CP에 도착하여 근무중대의 저지선을 통과하고 일부병력을 연대CP의 뒷산으로 보낸뒤 연대CP를 완전히 포위하고 있었고 이후 오전 4시가 되자 중공군은 연대CP에 총공격을 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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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연대 지휘소 피습 상황도

이 공격으로 연대CP를 지키고 있던 정문보초들은 차례차례 하나 둘씩 쓰러졌고 수송부의 차량은 불타 전소되어 기능불능이 되고 탄약고가 폭발하는 등 순식간에 연대CP가 아수라장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중공군은 연대CP뿐만 아니라 연대CP와 같이 위치한 제10포병대대CP도 공격하였고 결국 포병대대의 지휘능력은 완전히 마비되고 만다.[21]

이후 중공군은 연대상황실과 포병대대의 사격지휘본부로 들이닥치기 시작했고 이에 연대장 최세인 대령과 부연대장 김성환 중령은 연대지휘부 요원을 데리고 중공군의 포위망을 빠져나온다. 그후 그들은 연대CP의 남쪽 산복을 거슬러 올라 한참 동안 해매게 된다.

이때 부사단장인 임익순 대령은 중공군에게 포로로 잡혔고 연대병력을 포함한 대부분의 병력이 와해되어 후퇴하다 미군 포병진지가 있는 간진현 부근으로 무사히 빠져 나오게 된다.

3.4.6. 육근수 대령의 전사 (역습부대 2대대의 피습)

혈우는 이미 요잠을 휩쓸었고, 성품은 근만에 이르렀다. 이 추로를 격파치 못하면 나의 생환이 있을 수 없다. 전통에 빛나는 나의 연대 사랑하는 나의 대대의 장병들은 나의 뒤를 따르라.
육근수 대령

연대 지휘소가 피습받기 이전, 기갑연대 3대대는 제8중대의 일부병력이 정찰에 나서고, 후속부대인 7중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후 시간이 지나 7중대가 막 도착해 차량에서 차례차례 내리기 시작했고 차량에서 내리고 있던 그 순간 중공군의 기습공격이 시작되었다. 이때가 제1연대CP가 피습을 당한 바로 그 시간인 오전 4시였다.

이 기습공격으로 연대장 육근수 대령이 현장에서 전사하였고 이에 7중대 소속 무반동총반원 3명이 육근수 대령의 시신을 후송하려 나타났지만 이들 역시 모두 전사하거나 부상을 당해 결국 육근수 대령의 시신을 하풍동 부근의 이름없는 산골에 매장하고 말았다.[22]

​이후 대대장 박기순 중령은 서성은 중위에게 7중대를 지휘하도록 조치하고 대대 병력을 남쪽의 산 속으로 남하하도록 조치를 취했으며 일출후인 8시에는 3km 후방에 떨어진 119번 도로 우측에 있는 462고지에서 부대를 수습하였다.

3.4.7. 최후의 예비대(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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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갑연대 상황도

한편 출동명령이 없어 대기 상태로 있었던 기갑연대 1대대는 사단장으로부터 제59전차중대의 1개 소대를(5소대) 통합지휘하여 제26연대를 지원하란 명령을 받는다. 이것이 사단의 마지막 예비대의 투입이었으며 더이상의 예비대 투입은 없었다. 이후 1대대는 늦게 도착한(04:00) 전차소대를 이끌고 26연대의 제2저지선(노동-462고지 선)으로 출발한다.

하지만 당시 상황으로만 따지자면 26연대보다는 1연대의 상황이 더욱 급하고 암울했으며 지원이 가장 시급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수도사단은 26연대의 "중공군이 새까맣게 몰려옵니다."라는 과장보고를 굳게 믿고있었고 결국 예비대를 잘 못 투입시켰던 것이었다.

​그러나 사단장은 1연대의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간파해 26연대 저지선으로 진출한 1대대를 1연대쪽으로 돌려 1연대를 지원하란 명령을 내리고 임무를 변경시켰다. 이리하여 기갑연대 1대대는 1연대쪽으로 가기 위해 117A도로로 동진하여 6시쯤에 간진현으로 도착하는데 성공한다.[23]

이후 대대장은 119도로와 117A도로가 교차할 수 있는 요충지를 방어할 수 있는 434고지-495고지 능선으로 병력들을 배치하도록 조치하고 제1연대의 철수를 엄호하였다. 그리고 전차소대를 대대수색대로써 하진현-월봉리 간의 119번 도로를 기동 방어하도록 하였고 이들은 몰려오는 중공군들을 상대로 눈부신 활약을 해 1연대가 비교적 안전하게 철수할 수 있도록 기여하였다.[24]

이렇게 수도사단 1연대는 엄청난 피해를 입은채 철수하였으며 수도사단은 사단 헌병대를 즉시 긴급 출동시켜 말고개 쪽으로 탈출하는 병력들을 승암고개 부근으로 수용할 수 있도록 낙오자 수집소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동이 튼지 약 3시간이 지난 8시가 되자 수도사단은 지난 밤에 있었던 일들을 알게 되고 1연대를 지원하기 위해 기갑연대 2대대를 1연대로 하여금 통합 지휘하게 하고, 사단 하사관 교육대의 피교육자와 기간요원을 교육대장 장기춘 중령에게 지휘권을 넘긴 뒤 잠정대대로 편성되어 1연대에 배속하게 된다. 그리고 사단장은 제1연대장이 복귀할 때까지 참모장인 김태규 대령에게 잠시동안 연대를 지휘하도록 조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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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수 직후 찍힌 간진현에서 쉬고 있는 수도사단 1연대 장병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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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4일, 간진현에서 헌병에게 제지 받는중인 수도사단 1연대 장병들

3.5. 금성 돌출부 우견부( 제3보병사단 제5보병사단)

지날달 이후로 금성 돌출부 우견부를 방어하게 된 제3사단과 제5사단은 중공군의 대대적인 공세를 받고 무려 9km나 밀려났다. 이중 제5사단은 제3사단에게 백암산을 맡겼다가 정말로 어이없게 상실되는등의 뼈아픈 손실을 입었고 이에 따라 제5사단은 후퇴 직후 반격의 칼을 닦기 시작하였으며 모든 전선이 돌파당해 금성천 남안으로 후퇴한 제3사단은 군단의 예비대로 전환되게 된다.

3.5.1. 여문리 격전(제3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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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사단 전투상보에 기록된 7월 13일 전역도
여문리 부근 전투는 7월 13일부터 15일까지 벌어졌으며 국군 제2군단 예하 제3사단이 방어를, 중공군 제60군 예하 201사단 등이 공격을 맡은 전투이다. 당시 국군 제3사단은 금성 돌출부 우견부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중공군의 6월 공세 때문이었다. 지난 6월 공세에서 한국군을 지원하던 미 제8군 사령부는 돌파구 저지를 위해 군 예비인 제3사단을 제2군단 예하로 배속시킨 후, 전선으로 투입했다. 이리하여 1개 사단을 배속 받게 된 제2군단은 제3사단으로 하여금 제5사단의 진지를 인수하도록 하여 제5사단과 제8사단의 정면을 축소했다. 따라서 제3사단은 8사단 21연대의 지역과 제5사단 제27연대의 지역을 인수했고 마침내 금성돌출부 우견부를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3사단은 금성 돌출부 우견부를 담당한지 불과 며칠만에 중공군 제202사단과 관망산 전투를 치르게 되었으며 관망산의 주인이 무려 16번이나 바뀌는 대혈전 끝에 결국, 사단은 관망산을 내주고 후퇴한 뒤, 곧바로 재편성에 들어가게 되었다. 한편, 해당 전투 과정에서 제5사단이 제3사단 예하 제18연대 진지를 인수하는 사태등이 발생했으나 이는 군단장 정일권이 '제3사단이 관망산 전투에 더욱 더 집중할 수 있도록 한다'라는 결단 하에 내린 조치였다. 즉, 제5사단은 군단으로부터 받은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제18연대의 진지를 인수한 것이었다.

여하간 제5사단에게 진지를 내준 제18연대는 금성천 서안의 4km에 달하는 협소한 곳에다가 방어진지를 설비했다. 당시 사단의 방어편성은 사단CP를 주파령 부근의 동막동 부근에 설치하고 우일선 관망산 지역엔 제23연대를 좌일선 485고지에는 제22연대를 배치시켜 2개 연대로 하여금 주저항선을 형성하는 전형적인 일반 방어 형식의 편성이었다. 당시 제18연대는 예비대로 지정되었고 연대는 제1대대를 551고지에, 제2대대와 제3대대는 광대곡에 집결시켜 부대정비를 실시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일선의 양 연대인 23연대와 22연대는 주저항선에 각각 2개 대대를 배치시키고 1개 대대는 예비대로 확보했다.

한편, 당시 사단의 병력수는 제3사단의 전투상보와 군단 작전상보와 서로 차이가 상당히 있는 편인데 그 이유에 대해선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종합적인 판단으로 볼때 먼저 제3사단 전투상보의 경우 병력 현황표를 적었을 당시 기타 부대를 포함하지 않아 단순히 3개 연대 병력수로 사단병력를 계산한걸로 보이고 제2군단 작전상보의 경우에는 사단 내 기타부대를 전부 합하여 계산했기 때문에 병력수에 대한 차이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
제3사단 전투상보 기준[25]
* 제18연대
* 장교 119명
* 사병 2,358명
* 합계 2,477명
  • 제22연대
    • 장교 104명
    • 사병 2,792명
    • 합계 2,492명
  • 제23연대
    • 장교 129명
    • 사병 3,089명
    • 합계 3,218명

군단 작전상보 기준[26]
  • 11,419명

당시 병력 수는 총 8,487~11,419명이며 T/O에 약 95.5% 정도라고 하나 이는 단순히 제2군단 예하 각 사단과 비교하지 않은 수치인 것을 감안해야 하기에 편제와는 별개로 제3사단의 병력수는 제2군단 내에서 가장 적은 것으로 보여진다. 다만 다행인 점은 병력 수는 적지만 고참병의 비율 하나만큼은 군단 내에선 최고라는 점인데 당시 사단 내, 고참병과 신병의 비율은 68/31이었다.[27]
시기(時期) 고병 신병
5월 달 73.7 26.3
6월달 70.3 29.7
7월 초 69 31
7월 13일 68.1 31.9

그러나 위 표를 자세히 살펴보면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고참병의 비율이 점차 줄어드는 것을 볼 수 있다. 군단에 막 배속된 시점인 5월달 기준 제3사단의 고참병은 전체의 무려 73.7%였다. 하지만 6월 공세에 투입된 직후부터는 70.3%로 대략 3.4%의 고참병이 소모됐다. 이어 7월 초에 들어서는 69%, 7월 공세 직전에서는 68.1%로 고참병의 손실이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사단의 전투상보와 공간사에는 당시 3사단이 고참병이 많았다고 하지만 관망산 전투의 패배와 극심한 피해 및 사기 저하로 인해 각 부대원들의 전투력이 크게 떨어졌다고 평가했다.
경험과 교육으로 얻은 자존심과 장기간의 걸친 방어전으로부터 오는 전투의식은 극히 왕성하였으나 근 2개년간 걸친 전선의 교차상태는 전력저하에 큰 자극을 주었음.
第三師團金城川地區战斗, 10p
그러나 이때의 제3사단 장병은 그들의 공격이 임박하였음을 나타내는 여러 징후를 포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맞서 싸우기에는 사기가 너무 저하되어 있었다. 사기저하의 많은 요인 가운데 지배적인 요인은 얼마 전(6.25~7.3)에 실시된 치열한 관망산 전투에서 많은 병력손실(1,776명)을 입은 데다가 고참병의 4분의 3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제23연대는 동연대의 제5중대장 신영곤(申榮坤) 대위가 "1개 중대 병력을 이끌고 그곳으로 들어갔다가 12명만 살아 나왔다."고 말하였듯이 극심한 전투를 치른 것이다.
金城戰鬪, 139p

또 사단의 장비 수도 81mm 박격포 24문, 60mm 박격포 42문 BAR 28정, 경기관총 38정, 중기관총 18정, M2 브라우닝 중기관총 8정, 57mm 무반동포 24문 75mm 무반동포 7문 3.5인치 바주카 23문 등이었다. 그리고 지원부대의 경우에는 4.2인치 박격포 12문, 105mm 유탄포 96문, 마지막으로 전차 5대 정도였다.이는 지원부대를 제외하더라도 사단의 장비 수는 다부동 전투때 1사단의 장비 수와 비슷할 정도이다. 즉, 편제 미달이어도 너무나도 미달이란 소리이다.

당시 1사단의 장비와 제3사단 장비 및 국군 편제도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28]
총포명 편제 제1사단 제3사단
경기관총 108 37 38
중기관총 36 13 18
로켓포 638 33 23
대전차포 18 2
자동소총(bar) 162 143 28
81mm 박격포 36 26 24
60mm 박격포 54 45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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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제3사단의 보급로는 17번도로와 103번 도로였다. 당시 사단 보급 상태는 노무단의 경험 부족 및 험한 지형으로 인해서 굉장히 좋지 못하였다. 이에 사단은 보급효율을 최대한으로 극대화 시키는 조치를 통해 보급소요를 간신히 충당하였다.
지형상 기복 굴곡이 우심(尤甚)함과 동시에 탄약, 식량운반의 일부를 담당한 KSC의 전투경험 부족으로 인하여 적지않은 자극을 받았음. 그러나 보급장비의 능동적인 조직과 보급방법의 합리적인 운용은 작전에 기업한 바, 다대(多大)함.
第三師團金城川地區战斗, 10p

반면에 제3사단이 대치하고 있던 중공군 제67군 예하 제201사단은 관망산 전투 직후 대손실을 입은 제202사단을 대신해 온 사단으로 제67군 후방지역에 있는 제60군 예하 181사단과 함께 일선사단을 초월공격할 준비를 갖추고 공격개시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이들의 병력은 제201사단의 경우 9,500명, 제180사단은 9,200명 및 제181사단은 5,000~6,000명 수준으로 대략 23,700~24,700여명으로 평가되어 있었으나 부대 전체 인원중 무려 50%가 신병으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전투력은 매우 낮게 평가됐다. 이들 병력은 개인당 수류탄 6~8발을 휴대했다. 또 식사는 주식 보급의 경우, 잘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부식만큼은 충분한 보급을 받았다고 한다.[29] 이외, 사기(士氣)에 있어서는 제3사단보다 비교적 양호한 편에 속해 있었는데 이는 제201사단이 관망산 전투에서 심대한 손실을 입은 제202사단을 대신하여 온 사단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중공군의 지원화기 수는 120mm 직사포 8문과 122mm 박격포 18문, 82mm 박격포 18문, 그리고 76mm 직사포 24문, 마지막 60mm 박격포 22문 등이었다.

한편, 이 기간중 기상은 여름 계절풍의 영향으로 무덥고 습도가 높았다. 계속되는 강우와 아침저녁으로 발생하는 짙은 안개로 인하여 시계는 불과 40m에 불과했고 이에 따라서 항공지원은 물론 소로나 신설도로가 진흙탕이 되는 건 기본이고 또 산길도 차단되어 부대기동에도 큰 제한을 받았다. 즉, 이런 기상조건은 중공군이 공격하기에 최적의 조건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제3사단은 작전지역인 금성천 남안을 수비하기 위해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거라는 결심을 하였다. 이는 '중공군의 대공세를 초기에 막아 이후 곧바로 반격해 피탈 지역을 수복한다'라는 군단의 기본 방침이 작용하기도 했지만 이보다 더 큰 원인으로는 주파령-백암산을 연하는 지대가 3개 사단의 병참 및 주요도로를 연결하기 때문이다. 만일 중공군이 이 일대를 장악하게 된다면 3개 사단의 병참 및 주요도로를 책임지는 17번 도로와 103도로, 화천에서 북한강 상류에 이르는 선박 보급로까지 모두 차단되어 사실상 금성 돌출부를 유지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이 일대의 방어를 담당하게 된 사단의 입장에선 절대로 이 일대를 내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7월 초부터 13일까지에 실시된 적정 정찰활동은 그 중요성이 매우 컸다. 해당 정찰활동을 통해 사단은 7일부터 12일 사이에 보급품을 만재한 중공군 차량 62대가 남하하는 것을 관측했고 13일에는 T-34 전차 4대가 과호동 부근에 출현하는 것을, 7월 9일에는 약 46문의 중공군 직사포들이 사단 내에 포격을 실시하는 것을 목격하는 등, 많은 실적을 냈다. 하지만 당시 제3사단 장병들은 6월 25일에 시작된 관망산 전투의 충격으로 인해 사기가 극도로 저하되어 있었다. 자칫하면 부대 전체가 와해될 수 있었다.

여하간, 당시 마주한 중공군과 한국군의 지휘관 구성은 다음과 같다.
한국군
* 제3사단장 임선하(林善河)
* 제18연대장 박경원(朴敬遠)
* 제22연대장 최택원(催澤元)
* 제23연대장 박철(朴徹)
중공군
* 제60군장 위걸(韋杰)
* 제180사단장 관중정(官峻亭)
* 제181사단장 왕선한(王誠漢)
* 제201사단장[30] 마휘(馬輝)

3.5.2. 공세 초기 전투

2100 강우와 운무를 헤치고 치열한 적의 각종 포탄이 아주저항선 507고지(CT894456)와 425고지(CT887464)를 중심으로 전후방 일대에 촌토(寸土)도 상관없이 낙하하기 시작함.
第三師團金城川地區战斗, 20p
금성돌출부 우견부에 위치한 중공군은 7월 3일을 기해 529고지인 관망산을 확보하자 대규모 작전을 중단하고 소규모 정찰활동을 전개했다. 이리하여 제3사단은 일주일 동안 정찰활동을 실시, 여러 성과를 내는데 성공하자 사단은 이를 즉각 분석했고 분석 결과 활동 대부분이 관망산 일대에 배치된 우일선 제23연대 지역에 집중되어 있음을 파악하였다. 이때 사단은 중공군이 자신들의 공격대상으로 삼은 제23연대의 방어편성을 관측하여 약점을 찾으려는 것으로 판단했고 7월 1일과 3일 사이에 2개 연대로 추정되는 병력이 남하하는 것과 7일부터 12일 사이에 보급품을 만재한 차량 62대가 남하한다는 정찰 결과를 본 사단장 임선하는 중공군의 공세가 임박했음을 예상하고 다음과 같은 내용의 명령문을 하달하였다.
당면한 적은 근간에 이르러 화력과 장비를 계속 전방으로 이동시키고 있을 뿐 아니라 제23연대 전투지역에 대한 탐색이 급증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이들의 침공은 절막한 것으로 판단되며, 적의 주공은 제23연대 정면으로 지향될 것으로 예상된다. 때문에 사단은 방어중점을 우일선인 제23연대에 두고 적을 진지 앞에서 분쇄하려 한다.

1. 제23연대는 적의 주공방향으로 예측되는 100번 도로를 제압하기 위해 대전차방어 계획을 추진하고 철저한 야간경계를 실시하는 한편, 적의 조기와해를 위해 529고지 남록의 전진 진지를 강화하라, 화력의 우선권은 제23연대에 둔다.

2. 제22연대는 현 진지를 보강하고 인접부대와의 긴밀한 연계를 유지하되, 공요화기는 명령에 의해 우일선인 제23연대를 증원할 태세를 갖추라.

3. 제18연대는 저지진지를 구축하는 한편 역습계획 '가'안(제23연대 정면)에 의한 출동태세를 갖추라.

4. 제11포병단은 사격의 우선권을 제23연대에 두라.

5. 제16탐조등포대(1개반)는 제23연대 지역에서 야간전장 감시에 임(任)하라

6. 전차중대는 제23연대 지역에서 대전차방어에 임하라.

7. 공병대대는 제23연대에 2개 중대를 직접 지원하여 진지구축과 전차진입로를 개설하는 한편, 적 기계화 부대의 침공을 격파할 장애물을 설치하라. 또한 1개 중대는 제22연대를 직접 지원하여 진지구축과 적의 접근을 방해할 장애물을 설치하라.

8. 통신중대는 군단에서 지원된 1개 유선가설조를 통합지휘하여 유선을 가설하라. 또한 새로이 보급된 AN/PRC-1에 대(對)한 재교육(再敎育)을 실시하라.
이러한 명령문을 하달한 직후, 얼마 안가 7월 13일 21시가 되었는데 이때가 바로 공세의 시작을 알리는 집중포격이 시작되었다. 당시 21시를 기하여 시작된 중공군의 포격은 사단의 주진지인 507고지와 485고지 일대에 집중되었고 평소와 달리 시간이 지날수록 포격량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더 증가되어 나중에는 후방 진지까지 강타했다. 이로 인하여 사단예비인 제18연대 제2대대장이 중상을 입었고, 동대대 OP와 연대OP간 연결되어 있던 유선이 단절되기도 했다.

이후 21시 40분쯤에는 그들의 녹색 신호탄 3발이 룡호동 골짜기에서 치솟아 올랐고 이와동시에 전화력(全火力)이 제23연대의 예비진지인 445고지로 연신되었다. 이때 잠복조로 파견나간 제3중대는 1개 소대의 중공군을 발견하여 이들과 교전중이라는 긴급 보고를 올렸고 이에 제23연대장 박철 대령은 서둘러 포병 지원사격을 통해 해당 구역에 맹타격을 가하였다. 이리하여 연대장 박철 대령은 중공군의 침공방향이 자신의 연대에 지향된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으며 이에따라 전방에 설치한 모든 잠복조들을 원대복귀하라는 지시를 내리는 한편, 507고지 서남쪽에 예비대로 있던 제2대대와 연대수색중대로 하여금 좌일선인 제1대대의 후사면으로 진출시켜 유사시에 긴급 대응하라는 지시를 하였다.

그리고 이로부터 약 10분이 지난 21시 50분, 연대의 좌일선인 제3중대는 마침내 조우한 소대규모의 중공군을 격전 끝에 격퇴하였는데 여기서 격퇴당한 중공군은 22시 20분쯤 제1대대 진지로 처들어 가 무차별 포격을 가한 채 다시 재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은 제1대대의 진전에서 패퇴하고 말았다. 이는 연대장 박경원 대령이 제1대대 공격을 미리 예상을 하고 제2대대를 호출해 제1대대 진지로 보냈기 때문이었다.

이와같이 연대 좌일선 각 대대들이 중공군을 격퇴하는 동안, 507고지 남쪽에서는 금성천을 따라 침투한 것으로 보이는 중공군들이 지원사격을 하던 제3중박격포 중대와 연대CP를 기습하면서 연대 지휘부는 순식간에 혼란에 빠졌고 제3중박격포 중대는 이로인하여 지원부대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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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문리 부근 전투

한편, 이날 21시 40분쯤에 제22연대는 제9중대의 정면인 송동리 북쪽에서 은폐하고 있던 잠복조로부터 적을 만났다는 신호를 받았다. 이때 신호탄이 하늘에 치솟자 2개 대대규모로 추산되는 중공군이 송동리 앞 소로를 횡당하여 연대 주저항선의 중앙으로 침투하기 시작했고 이어서 주력으로 보이는 약 1개 연대 규모의 중공군이 주저항선을 향해 돌격하고 있었다. 따라서 연대는 최후 저지사격으로 그들의 파상공세를 측차로 격퇴했으나 중공군은 이미 1:2의 막강한 병력우세를 점한 상황이었고 결국 계속된 파상공세로 인해서 연대의 화망은 순식간에 허물어지고 22시 10분부터는 중공군과 치열한 수류탄 투척전과 백병전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서 제10중대는 연대의 중앙 돌출부에서 유개호를 방패삼아 선방하고 있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제10중대에 출현한 중공군 병력이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던터라 중대는 20시 21분에 서둘러 본대에 TOT 사격을 요청했고 그 후, 사격이 실시되자 중공군의 공격 태세를 분쇄하여 곧 격퇴시켰다.

이렇듯, 제22연대 진지에서 수많은 중공군들이 들이닥쳐 혈전을 거듭하게 되자 제22연대장 최택원 대령은 중공군의 심상치 않은 기세를 미루어 보아 주진지의 지원은 어려울 것을 판단하고 이에따라 535고지에서 저지진지를 구축중이던 제1대대에게 반격명령을 하달하였다. 그런데 제10중대와의 싸움에서 격퇴된 중공군들이 다시 병력을 보충 받았는지 곧바로 제3대대의 우측방인 제9중대와 제10중대 진지로 들이 닥치기 시작했고 이에 양중대는 십자포화로써 이들의 진격을 어느정도 저지했으나 1파,2파,3파 그리고 4파 등 미친듯이 공격을 가해오는 중공군들의 기세에 눌려 중대는 한계에 도달하고 말았다. 이에 연대장은 아까 반격 태세를 갖춘 제1대대에게 반격명령을 일단 보류시키고 먼저 제3대대 진지로 급파하라고 명하였다.

이후, 연대장은 제9, 10중대에게 연락을 취하여 제1대대가 오고 있다는 소식을 통보한 뒤, 연락을 끊었다. 이 통보는 연대의 마지막 통보가 되었다. 양중대의 유무선이 포격에 의해 두절됐기 때문이다. 여하튼 이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적진 깊숙한 663고지에서 청색 신호탄 총 3발이 하늘에 치솟아 올랐다. 이와 동시에 2개 중대 규모의 중공군이 돌연 저지진지를 구축하던 제2중대 정면에 나타나 공격하기 시작했으며 이에 제2중대는 이들과 처절한 육탄전을 전개하였다, 이렇게 2중대가 혈전을 벌이고 있는 와중 제2중대를 공격하던 중공군들 중 일부가 제2중대 진지에서 이탈하더니 제1대대OP쪽으로 가 대대OP를 기습하여 대대와 연대간의 유무선을 모두 두절시켰다. 이로 인해 제9, 10중대로 가겠다던 제1대대는 대대 지휘소가 붕괴되면서 그 지휘력을 상실하고 말았고 제9,10중대는 최악의 상태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23시 10분에는 룡호동 부근에서 청색신호탄이 하늘에 오르더니 1개 연대규모의 중공군이 또다시 출현하여 제2, 3대대의 북록전연으로 돌격하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연대를 지원하게 된 제11포병단의 양포병대대는 포신에 물을 부어가면서까지 저지사격을 미친듯이 퍼부었으나 중공군이 독전과 폭우를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각각 독립해 교통호 간의 연락로를 차단했고 이와 동시에 각대의 상하는 물론 횡적 연락로마저 차단하였으니 각 부대는 고립된 채 분전을 거듭하게 되었으며 23시 50분에는 급기야 연대의 우일선인 제3대대가 붕괴 직전에 놓였을 뿐만 아니라 제1대대도 분산되기에 이르렀으니 포병대의 지원이 끊긴 제2, 3대대는 사실상 풍전등화 상태라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따라서 사단장 임선하 소장은 당초 예상했던대로 전황이 흘러가지 않을 뿐더러 주공도 제23연대가 아닌 제22연대였기에 결국 이를 반드시 타개하겠다는 결단을 내리고 예비대인 제18연대에게 서둘러 출동태세 및 역습 준비를 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21.50 급변하는 상황을 대비하고자 사단예비대인 제18연대의 연대장은 명에 의거, 비상 출동준비를 완료하고 제2대대를(CT883453) 지점으로 제3대대를(CT889444) 지점으로 각각 진출시켜 적의 역습을 대비함.
第三師團金城川地區战斗, 20p

이리하여 하루가 지난 7월 14일, 제23연대장 박철 대령은 연대보급집적소와 제3중박격포 중대를 습격한 소수침투병력을 격멸하고자 연대본부 행정요원으로 급편한 1개 소대로 하여금 이를 격퇴하긴 했으나 전과가 부실했고 이 때문에 재공격 우려가 있어 연대장은 507고지로 증원 간 제2대대의 1개 중대인 제7중대를 차출했고 이후, 연대 후방경계에 임하도록 하는 한편, 대대주력은 다시 우일선으로 격전중인 제3대대로 보내 대대를 지원하도록 하였다. 이로써 제3대대 후방에 침투한 1개 중대의 중공군을 일시에 격퇴했는데 이들은 얼마 안가 다시 병력을 증원하여 재공격을 기도한 듯, 오전 2시 40분, 맹포격을 가하면서 동시에 일부 병력을 제1중대로, 또 일부병력을 전진 진지인 제9중대를 우회하여 제10중대로 가 피리와 꾕가리를 치면서 진지로 쇄도하였다.

바로 이때, 중공군들이 오길 기다리고 있었던 제3대대는 중공군들이 동서상응한 협격지대(제9중대와 제10중대 사이)에 돌입하자 곧바로 최후저지 사격의 신호탄을 쏘았고 이후, 전진 진지에 돌출하여 있던 제9중대가 사격방향을 반대로 전환하여 이에 협공하게 되었으니 결국 진지 내부로 침투하려던 중공군들은 진퇴양난 상태에 빠져 전멸 직전에 놓이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때마침 제10중대 좌익으로 추진되었던 제1전차소대도 나타나서 중공군의 퇴로를 차단하듯이 양 중대 사이에 계곡소로로 진입했고 동시에 무차별적 사격을 퍼부었으니 이미 만신창이가 된 중공군들은 자신들에게 포탄과 총탄을 날리는 전차를 피하려고 서로 좌충우돌하였다. 따라서 이를 포착한 대대장은 앞서 화학장교 손중수 대위가 고안해 산중복의 요지, 요부에 설치하고 또 제9, 10중대에도 설치되었던 수제 네이팜 지뢰를 산 아래에다 방투했고 이리하여 작동된 네이팜 지뢰의 화염은 곧 산야를 뒤덮었으며 이를 맞은 중공군들은 마치 불나방 처럼 떨어져 나갔다. 이후, 오전 5시 5분이 되자 동이 트기 시작했고 양 중대의 산정상에는 불탄 중공군 시신들과 동시에 악취가 풍겨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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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오전 1시 10분, 좌일선 제22연대 상황은 485고지 일대를 수호하던 제3대대가 무너져 전선을 이탈해 무질서하게 대대CP로 집결하고 동대대를 지원하기 위해 능선을 따라 485고지로 지원하러 가던 제1대대는 대대OP가 기습당해 지휘기능이 마비된데다가 이동간에 무질서하게 철수하는 제3대대 병력과 서로 혼합되어 혼란을 야기하는등의 사태들이 터졌음에도 대대CP로 집결한다는 명령은 고쳐지지가 않았다. 이는 다시말해 전투력을 보존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저 분산 상태인 채로 대대CP로 철수한다는 뜻이었다. 한편,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제2대대는 돌출한 주진지를 완강히 고수하면서 총 2차에 걸쳐 각각 1개 중대 규모의 중공군 공격을 받았으나 그때마다 중대는 강력화 포격지원으로서 그들을 격퇴시켰다.

바로 이때 사단장 임선하 소장은 분산 상태이면서 집결하려 노력중인 제22연대 장병들에게 격려를 했으며 중대장급 이상 지휘관에게는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그들을 독려했다.
1.우일선 제23연대는 주저항선을 확보하고 있고 귀연대 좌제1선의 제2대대도 현진지를 고수하고 있으며
2.제18연대가 485고지에 대한 역습을 위하여 이동중에 있다.
3.이제 우리가 일시나마 그들에게 주저항선이 돌파되기는 하였으나 신장된 그들의 측배에 칠수를 꽂을 때가 바로 절박하였다

그 다음 연대장 최택원 대령에게는 촌각을 망설이지 말고 병력을 수습해 제8사단과의 전투지경선인 535고지를 점령하여 제2대대와 연계해 이를 유지하도록 명령함으로써 현 전황을 호기로 전환시키려 했다. 즉, 사단장의 작전지도를 요약해 말하자면 먼저 공격한 중공군을 그물에 걸린 물고기로 보고 동쪽에선 제23연대로서 그리고 서쪽에서는 제22연대로서 노출된 중공군의 측방을 협격으로 강타하도록 하고 이와 동시에 제18연대로 하여금 진지 내로 침투한 중공군들을 소탕한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사단장의 역습 방침에 따라 연대는 정비할 틈도 없이 오전 5시 20분에 현지로 출발하여 제1대대는 535고지를 중심으로 남북으로 연하는 능선을 점령하고 제3대대는 이와 연계하여 남쪽 1km에 이르는 선을 확보하였다. 그리고 수색중대는 일부 병력을 445고지에 두고 또다른 일부 병력은 양 연대간의 전투지경선으로 침투 가능한 소로에 배치시켜 이를 경계하도록 하였다. 이로써 5시 40분 기준, 사단과 연대는 물론 연대와 대대간의 무선을 모두 재확보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535고지 일원에 포진한 연대는 교암산으로 침공한 중공군에 의하여 밀려난 좌익 제8사단 제16연대의 철수를 잠시동안 엄호했으나 오전 7시에 이르러서는 좌우 인접부대와 서로 단절된 상태인지라 결국 고립되게 되었는데 오전 7시가 됐을 무렵에는 1개 대대규모의 중공군이 포격을 집중하면서 제7중대를 공격해 오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또 중공군의 유격대로 보이는 일부 부대들도 출현해 연대 주보급로를 위협해 왔고 이에 사단장은 보급로가 차단 직전에 놓인 연대에게 철수명령을 하달하면서 연대는 지연전을 펼치고 오전 8시에 509고지-434고지-472고지로 연하는 능선에 우로부터 제3,1대대 순으로 급편 방어진지를 편성하라는 지시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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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문리 부근 지연전[31]

한편, 사단 예비에서 반격으로 전환되게 된 제18연대는 사단장의 명령대로 역습계획 '가'안[32]을 발동하여 오전 12시 20분에 제3대대는 기지로부터 551고지 동쪽으로 출격했고 제2대대는 동고지 남쪽으로 진출시켰으며 이후 오전 2시 20분에는 제3대대의 전위대인 제9중대를 출동시켰다. 이때 3대대 9중대가 551고지 동쪽에 이르자 중대는 그곳에서 주둔중인 중공군과 약 40분간 교전을 전개했는데 시간이 흘러 점차 상황이 불리하게 전개되자 대대장은 후속하던 제10중대를 서둘러 참전시켜 싸우도록 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의 완강한 저항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기에 연대장은 그들의 기도가 금성천을 따라 침공하여 사단주력의 보급로를 차단할 것을 우려했고 이와 동시에 사단과의 통신도 두절 상태였으므로 이를 독단으로써 저지하고자 결심한 뒤, 제9중대에게 485고지 진출을 방해하는 중공군들을 견제하도록 하고 주력은 551고지 사수하는 제1대대와 연계하여 금성천 북안을 방어하기 위해 전진하도록 하였다.

이후 연대장은 사단장에게 작전상황을 보고하였다. 하지만 사단장은 진출 도중 조우한 중공군과의 교전을 피하고 계속 485고지로 가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이는 당초 연대가 기획한 작전기도와는 완전히 상반되는 명령이었다. 이렇게 사단장의 명령을 받은 제18연대는 제3대대에게 제9중대의 교전을 즉각 중단시키면서 주력을 우회시켜 진격을 계속하라고 압력을 가했다. 이에 대대는 연대의 요구를 응한 채 485고지를 목표로 계속해서 약진을 하였다. 하지만 진출할 때마다 소규모의 중공군이 출현하였기에 대대는 이들을 모두 분쇄하면서 앞으로 나아갔고 오전 7시에는 마침내 여문리에 도착하는데 성공했으며 제2대대도 마찬가지로 여문리 서북쪽 0.5km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때 2개 대대규모의 중공군이 출현하면서 상황이 곧바로 변하였고 그렇게 연대의 진격은 잠시동안 가로막히게 되었는데 시간이 좀 더 흐른 뒤에는 중공군 일부 병력이 제1대대 진지인 551고지를 공격하고 또 그들의 주력으로 판단되는 병력은 연대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해 485고지의 동쪽을 우회하여 남하하는 등 오히려 연대에게 역습을 시도하게 되자 결국 제18연대장 박경원 대령은 '이미 485고지에 대한 역습은 무의미하게 되었으며 현재 연대는 포위직전 상태이다'라는 결심을 한채 사단장에게 역습방안 취소를 건의하기에 이르렀다. 이윽고 승인을 받자 연대장은 포위망 돌파를 결정하고 오전 10시에 제차적인 철수와 돌관을 호용한채 큰 지장없이 기지까지 물러가는데 성공하였다.

이렇듯, 일선연대들이 1개 사단 규모에 달하는 중공군의 공격을 견디는 동안 사단장 임선하 소장은 앞서 무너진 우일선 제22연대와 역습에 실패한 제18연대 그리고 우일선 연대의 붕괴로 돌파구가 확장됨에 따라 중공군이 돌파구를 타고 제23연대 구역으로 계속 침공하는 사태등 당초 계획한 작전과는 완전히 정반대로 가고 있었기 때문에 먼저 진용(陣容)을 재정비하기로 결심하고 이에따라 작지 제60호를 하달하였다.
1. 사단은 일부 주저항선 병력을 교대시키려함.

2. 제18연대는 좌일선 제22연대의 우일선 방어임무를 인수하여 551고지 일원으로부터 무명고지(509고지 북쪽 0.5km)에 이르는 선을 점령확보하라.

3. 제22연대는 계속 제2방어선(509고지-434고지-472고지간)을 확보하고 측방경계에 임하라.

4. 제23연대는 현 진지로부터 수차 철수하여 제18연대와 연계하여 등대리에 이르는 선을 점령하고 우측방 경계에 임하라.

5. 제11포병단은 각 연대의 진지 진입간 화력지원하고 11.00까지 주파리(동북쪽 1km)의 신진지로 전환하라.

해당 명령문에 의거한 각 부대는 전차와 포병의 엄호 속에 우일선에는 제23연대가 좌일선에는 제18연대등이 각각 담당하였고 마지막 제22연대는 저지진지를 인수하면서 마침내 제3사단은 금성천 북안의 최후거점을 차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늘 그렇듯, 각 부대원들은 그곳에서 호를 파거나 혹은 중공군의 침습을 저지하기 위한 장애물 설비 같은 기본적인 방어 준비조차 전혀 할 수 없었고 오로지 육탄정신 단 하나만으로 몰려오는 중공군들을 상대로 총검을 휘두르거나 아니면 주먹으로 만약 그것도 안된다 하면 다리,이빨등으로써 가장 처절한 백병전을 전개해 끝에는 반드시 분쇄한다는 불굴의 투혼 뿐이었다.

따라서 사단장은 각 연대를 순시하면서 동시에 각 연대가 차지한 현 진지는 그 어떠한 대가를 지불한다 하더라도 절대로 물러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남겼고 이후 제18연대에게 좌측방으로 침투하여 504고지를 위협하고 있는 중공군을 격멸하라고 지시하였다. 이에 제18연대장 박경원 대령은 제3대대로 하여금 504고지로 침투하려는 중공군을 분쇄하도록 하였다. 이때 18연대 제3대대는 목표, 504고지로 향하던 도중, 동고지의 능선을 따라 온 것으로 보이는 1개 대대규모의 중공군이 출현하여 종대로 남하하고 있음을 포착했고 이어 오전 9시에는 진지 전환을 앞둔 포병의 집중사격과 대대의 전화력을 출현한 중공군에게 집중하기에 이르니 기세등등하게 출현하였던 1개 대대의 중공군은 포화에 휩쓸려 그만 와해되고 말았다.

이렇게 중공군이 모두 분산되어 사라지자 제3대대장은 이들을 추격하라고 지시하였다. 전과를 확대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후속부대로 보이는 약 1개 대대규모의 중공군이 또다시 출현했고 이에 제3대대장은 이 상태에서 추격을 한다는 것은 사실상 자살공격과 다름 없기 때문에 하달한 추격명령을 즉각 취하하였다.

한편, 대대주력을 후속하던 제10중대는 509고지 동쪽으로부터 공격을 하려는 중공군의 일부 부대와 격돌하여 혈전을 치르게 되었기 때문에 연대로부터 지원요청을 전달했고 이에 연대장은 사단에 요구해 F-51 무스탕 편대 2개를 출격시켜 해당 지역에 기총소사와 네이팜탄을 뿌리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제10중대 진지에 출현한 중공군들은 순식간에 무너져 붕괴되었으며 그로부터 30분 후, 전세를 다시 갖춘듯한 일부 부대들이 551고지로 방향을 돌리고 주력인 2개 대대는 양대대의 간격을 통해 침공하기 시작했다.

이와같이 3대대가 공격받고 있을 때 제1대대는 제1중대를 551고지 주봉에서 서측으로 하고 이와 연계하여 좌측으로 제2중대와 제3중대 순으로 산개하고 있었고 한편 배속된 사단 수색중대는 551고지 서북 하단(0.7km)으로 진출하여 중공군을 차단하고 있었다. 그런데 제2대대와 연대 수색중대는 지난 역습에서 제22연대의 분산된 병력과 혼합되어 많은 차질을 빚으면서 472고지 북안에 도달했을 때에는 대대 전투력은 고작 70%에 불과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대는 그들의 파상공세를 막아 진지를 사수하고자 했는데 문제는 우일선인 제23연대가 증강된 2개 연대규모의 중공군 공격을 받고 점차 뒤로 물러나더니 나중에는 중공군 일부 부대가 제23연대의 우측방을 돌파한 뒤, 금성천 강변을 따라 배후로 침투하기에 이르렀고 결국 연대는 분산직전에 놓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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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차에 올라타는 국군 병사들

이에 앞서 사단장 임선하 소장은 우측 제5사단 전투지경선을 제정하여 사단의 작전구성을 축소한 바가 있거니와 제23연대가 붕괴직전 상황에 직면했을 때에는 저지진지를 고수하고 있던 제22연대를 금성천 남안으로 철수시키게 하고 이어 제23연대로 하여금 중공군의 공격을 이탈하게 해 551고지-472고지를 점령하여 제18연대와 연계를 이루고자 하였다.(작지 제60호)

이에 따라 사단은 우측방으로 공격해 오는 중공군을 저지하겠다는 결심으로써 금성천 북안에 교두보를 설치하게 되었으며 이후 제23연대장은 사단장의 결심대로 제1대대로 하여금 551고지로부터 472고지 간을 반드시 고수케하여 제18연대와 연계를 이뤄 근접 해 오는 중공군을 격멸하게 하였다.

그리고 제3대대에게 472고지 주봉을 포함한 금성천 강변로의 접근을 원천 차단하게 했고 마지막 제2대대에게는 연대 예비대로 지정 및 광대곡 북쪽 능선에 배치해 저지진지를 점령하도록 하였는데 이렇게 진영을 갖추었을 때는 오전 11시 20분쯤이었고 그동안 포병대의 지원은 단 하나도 없었으며[33] 더군다나 중공 제60군은 제3사단의 새 진지를 목표로 삼아 3개 방면으로써 협격을 가해왔고 이러한 대공세에 병력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던 제23연대의 방어준비는 사실상 희생자만을 속출시킬 뿐 아무런 성과도 없는 무의미한 것이었다.

그 후, 제3사단을 비롯한 전(全) 군단 전면에서 중공군의 대공세 파동을 마주함에 따라 철수가 불가피하게 되자 제3사단 역시 금성천 북안으로의 철수가 기정사실화 됐고 이에 따라 군단장 정일권 장군은 미 제8군 사령관 테일러 대장의 요구대로 사전협의를 통해 군단작명 제5호를 7월 14일 오전 11시 30분 부로 급히 발령하여 예하 사단들을 금성천 남안으로 철수케 하였으니 이로써 제3사단도 군단장의 명령에 따라 철수준비를 해야 했다.
군사극비

군단작명 제5호

지도대한 1:25000

제2군단
강원 화천 토고미(土古味)
(CT 835.207)

4286. 7.14.11.30.

1.
가. 최근정기 정보 보고 참조
나. 제8군은 현 임무를 속행한다.
다. 극동 공군은 계속 제8군을 지원한다.

2.
가. 군단은 4286. 7.14 11.30부로 제11사단을 통합지휘하여 신주저항선 진지를 점령 현진지를 수행하려 함.
나. 별지 작전 투명도 참조

3.
가. 제6사단(제9연대 배속)
⑴ 4286. 7, D일 H시 부로 신주저항선을 점령방어하라
⑵ 4286. 7.15 18.00부로 제11사단에게 현임무를 인계함과 동시에 제9연대 작전지휘권을 제11사단에게 이양하라
⑶ 4286. 7. 15. 1800부로 제6사단 지원중인 전차를 원대복귀시키라
⑷ 교대 후는 CT811101 825300 835230 860203에 위치하여 군단 예비대가 되라.

나. 제11사단(-)
⑴ 4286. 7, D일 H시 부로 제6사단 방어지역을 인계함과 동시에 제9연대를 통합지휘하라
⑵ 도로사용은 17,6번 도로를 이용하라

다. 제8사단
4286. 7 D일 H시부로 신주저항선 진지를 점령방어하라

라.제3사단
4286. 7, D일 H시부로 신주저항선을 점령방어하라

다. 제5사단(-)
현임무를 속행하라

바. 제1전차대대
4286. 7.15 1800부로 제6사단 지원중인 전차를 통합지휘하라

사. 제5포병단
4286. 7.14 1600까지 신주저항선의 부대를 지원할 수 있도록 포를 재배치하라
⑴ 기도비닉을 주의하라
⑵ 철수 간, 적과 접촉을 유지하라
⑶ 철수간 전(前), 포전 협동을 긴밀히 하라
⑷ 인접부대와 협조하라
⑸ 철수후퇴 이동의 제원칙을 이행하라

4.
가. 행정부록 참조

5.
가.
⑴ 현 SOI 유효
⑵ 철수 간 무전사용을 금(禁)한다


⑴ 변동무(変動無)
⑵ 각 사단CP는 각 사단에서 선정 후, 보고하라

군단장 육군중장 정일권
따라서 사단장 임선하 소장은 작지 제61호를 하달하여 제23연대를 예비대로 제18연대는 여내곡을 중심으로 한 신 진지를 점령하도록 했는데 해당 계획에 의거한 제23연대가 소성동 목교로써 철수하여 재집결을 했을 무렵, 중공군에게 집중포격을 받았고 그로인해 분산되어 그저 일부만이 질서를 유지한채 각 대대별로 철수하게 되었다. 이때 제23연대 예하 각 장교들은 포로가 될것을 우려하여 미리 계급장을 뗀 채 후퇴를 감행했고 이 때문에 사병들은 단순 육안으로 장교를 판단할 수가 없어 결국 지도 혹은 쌍안경을 보유한 사람을 무조건 장교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사단은 7월 14일 12.00부로 신주저항선을 점령확보하려 함.
1.제18연대는 여내곡 중심으로하여 신진지를 점령 확보하라.
2. 제23연대는 제2방어선의 우일선에서 무명고지(689고지 남쪽 0.4km)를 고수하여 사단예비로써 대기하라.
3. 제22연대는 제2방어선의 좌일선에서 529고지를 확보하여 사단예비에 임하라
작명 제61호

한편, 작명 제61호에 따라 철수하는 제23연대를 엄호하게 된 제18연대는 23연대의 철수를 좀 더 순조롭게 하기 위해 연대의 사주방어 태세를 축소했고 이후, 제23연대의 철수 엄호에 주력하게 하였으나 제23연대가 철수한 이후로는 제18연대가 표적이 되었기 때문에 제18연대는 중공군의 무자비한 공격을 받았고 결국 포위망이 더욱 압축되자 제18연대장 박경원 대령은 오후 1시 기준으로 철수를 결정한 뒤, 이를 기만하기 위하여 연대의 전화력으로써 중공군의 기세를 강타한 다음, 제1, 2, 3대대순으로 철수하도록 하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 후 철수계획에 따라 연대는 오후 1시 20분 기준 마침내 금성천을 도하하는데 성공한다.

이로써 제22연대 제2대대를 제외한 모든 부대들이 금성천 남안으로 철수하는데 성공했고 이와 동시, 제18연대는 오후 2시 30분에 신진지에 진입함에 따라 연대OP를 625고지에 두고 우일선을 제1대대로 지정하여 여내곡 부근에 배치했다. 또 18연대는 제3대대에게 제1대대와 협세하게 하여 565고지 북쪽 하단에서 동서로 지정했고 동시에 제2대대에게는 625고지 일대에 배치시켜 소성동으로부터의 계곡 접근을 원천 차단하도록 하였다.

이후, 제18연대는 폭우 속에서 저녁식사를 추진했고 저녁식사를 마친 다음에는 각 부대들에게 본래 임무구역으로 복귀하라는 지시를 하달했다. 그런데 이때 연대의 뒤를 따라 도하한 것으로 추정되는 중공군 대군이 이들 앞에 출현하였고 이들 중공군은 곧 두 갈래로 분열되어 제18연대 제1대대 진지로 침공해 왔다. 따라서 제1대대와 공격한 중공군과의 사이에서 대규모 교전이 발발했으며 시간이 지나 전투가 더욱 더 격화되는 가운데 18연대 제2대대 진지에서도 중공군들이 대거 출현함에 따라 제1대대 한정으로 끝날줄 알았던 전투는 곧 연대 전체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이에 연대장 박경원 대령은 각 대대장에게 "우리는 중과부적으로 이곳까지 이르렀으나 그간 우리는 그들에게 막심한 타격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우세한 항공력으로 신장된 그들의 보급로를 맹타함으로써 불원 교적(驕敵)의 전의를 박탈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임무는 적을 산악으로 유인하여 교착케하고 격멸하는데 있는 바 각대는 유리한 현 진지를 필승의 신념으로 고수하라"고 지시한 바와 같이 임전무퇴라는 결의를 다짐하였다.

이렇게 제18연대가 포위망에서 벗어나고 이어 추격한 중공군과 격전을 치르는 동안 사단 부대중 유일하게 철수를 하지 못한 제22연대 제2대대는 적중에 고립되어 중공군을 상대로 교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에 제2대대장은 적중에 고립된 현 상황을 보아 본대와의 연락을 닿기 이전까진 무슨짓을 하더라도 반드시 중공군의 공격을 막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윽고 대대장은 사주방어 및 경계 강화등의 조치를 취했으나 이미 본대와의 연결도 끊어진 터, 더군다나 탄약도 바닥 나버렸기 때문에 일인당 탄약 휴대량이 최소 6발에서 최대 15발에 불과해 주변에 있는 아군 시신과 중공군 시신들을 뒤져 탄약을 얻어내는 실정이었으며 식량또한 대대보급소가 지난 오후 11시에 중공군으로부터 기습을 당하여 마비된 상태라 사실상 전투 지속은 불가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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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대대장은 각 중대장에게 적중돌파에 대해 "대대는 전력으로 적의 포위망을 돌파하고 남쪽으로 향하여 전진하려 한다. 돌파로는 고지를 연하는 능선을 따를 것이며무명고지(606고지 동북쪽 0.6km)에 이르기까지는 제7, 5 및 제6중대 순으로 지원중에 있는 중대로부터 수차철수를 실시하고 해고지부터는 역순으로 606고지-585고지-439고지-세현리를 거쳐 그들의 전선을 돌파하여야 한다"고 말하였으니 제2대대는 대대장의 명령대로 먼저 기만을 위해 집중사격으로써 중공군의 기세를 견제한 다음, 전상자를 먼저 제7중대와 같이 보낸 후, 계획에 따라 중공군을 몰아내며 오후 2시 45분, 마침내 진지에서 벗어나기에 이르렀다. 대대장은 제1목표였던 무명고지에 도착하자 부대를 재정비했고 이후 606고지를 점령한 뒤에는 수색조를 편성하여 죽동으로 보내 그곳을 수색한 후 439고지로 복귀해 대대주력과 합세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출동된 대대 수색조는 죽동 부근으로 근접하여 수색을 펼치는데 성공하였으나 여기서 약 1개 중대 규모의 중공군이 출현했고 이에 수색조는 이들과 교전을 벌이다가 결국 분산됨에 따라 439고지로 복귀해 대대주력과 합세하게 되었다. 이로써 대대장은 중공군이 곧 있으면 이곳으로 공격을 가할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고 중대를 이끈채 414고지-동교량을 거쳐 17번 도로를 따라 남진함으로써 오후 7시 30분, 동막동에 집결하여 오후 8시에는 연대주력과 합세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러한 전투로써 대대가 얻은 전과는 살상자만 715명이고 노획은 체코제 기관총 11정 및 다발총 88정 그리고 기관단총 42정 등이었는데 제2대대는 이 무기들을 가져가지 않고 전부 현지에서 매몰 또는 파괴하였다. 반면에 대대의 피해는 전사자가 29명, 부상 30명등으로 전과에 비하면 매우 경미한 피해를 입었다.

3.5.3. 부대 수습과 제22연대 수색중대의 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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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단 작명 제5호에 의거한 제3사단은 사단작명 제61호로써 제18연대와 제22, 23연대도 똑같이 철수시켜 중공군의 추가공격을 대비하려고 했다. 그러나 실상 사단작명대로 성공적으로 철수한 연대는 백골연대라고 불리던 제18연대 단 하나뿐이었고 제22, 23연대는 여전히 분산 상태로써 남아 저지 진지조차 인수하지 못하니 만약 중공군이 여기서 공세를 한번 더 가했으면 사단은 완전돌파는 물론 사단자체가 소멸될 것이 뻔하였다. 특히 제3사단과 제11포병대대의 전투상보에서 밝힌대로 당시 보병부대의 무질서한 철수는 질서규율은 물론 FO와의 통신자체를 두절시키게 하였으며 이와 동시에 포병대대는 무려 20시까지 FO배치에 노력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보지 못했다고 기술하고 있을 정도로 당시 연대의 모랄빵 사태는 그야말로 다부동 전투때의 숲되미산 전투처럼 작전 자체를 무력화시켰다.
보병부대의 분산철수로 말미암아 FO와의 통신이 두절되었으며 대대는 20.00까지 FO에 배치에 힘을 썼으나 할 수가 없었다.
금성천지구전투, 제11포병대대 中

이러한 대혼란은 이날 22시까지 지속됐고 그때서야 분산 사태가 어느정도 수습되더니 사단CP를 사방거리에 이동시키는 것을 시작으로 점차 상황은 나아지는 듯 보였는데 이때 제22연대의 경우에는 사단작명 제61호를 수행하기 위하여 소성동을 지나던 도중 기습공격을 받아 분산되어 19시에 이를 다시 재수습한 뒤, 20시에는 적 포위망을 돌파한 제22연대 제2대대가 합류하여 병력 대부분을 복구하는데 성공했으며 이후 연대는 지속된 전투와 보급두절 및 철수로 인하여 각 장병들의 떨어진 사기를 채우기 위해 식량과 장비를 추진해 그동안의 잃었던 사기를 어느정도나마 충족시키게 하는등, 앞서 말한대로 상황은 문제는 있지만 점차 안정화되고 있었다.

한편 이 동안에도 중공군은 계속 공격하고 있었는데 이들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고 더군다나 사단은 예정 시간을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사단장 임선하 소장은 제22연대에게 현재 수습된 병력을 데리고 666고지-723고지간의 방어임무를 수행하라는 명령을 구령으로써 하달하여 이에 따라 제22연대는 21시부터 행군을 시작하기에 이른다.

이때 금성천 남안에서 집결하다가 중공군의 포격을 받아 분산된 제23연대는 병력을 재규합해 625고지 북안으로 가 그곳에서 재편성을 실시하도록 했고 이후 잠시나마 전투력을 끌어모으자 연대는 저지진지를 인수하기 위하여 제1대대를 먼저 출발시키도록 하였다. 그런데 행군도중 약 1개 중대규모의 중공군이 대대 앞에 출현했고 이어 대대와 교전을 벌임과 동시에 포탄도 발사하여 제1대대를 분산 직전으로 밀어 넣는다.

이에 제23연대장은 사단과의 연락을 취하려 했는데 문제는 당시 사단 연락망은 이미 두절된 상태였고 결국 연대장은 사단 연락망을 복구시키기 위해 저지진지 인수는 일단 후순위로 미루자는 판단을 내려 각 대대장에게 다음과 같은 명령을 하달하였다.
1.연대는 동막동을 목표로 전진하려함.
2.제1대대는 좌일선으로서 851고지를 거쳐 직진하라.
3.제3대대는 중앙축선을 따라 682고지를 경유하여 직진하라.
4.제2대대는 우일선으로 596고지를 거쳐 전진하라.
5.수색중대는 현 위치에서 연대의 철수를 엄호하라.

먼저 제1대대는 17시 30분에 682고지를 거쳐 동막동에 집결했으며 제3대대는 19시 30분에 동막동으로 집결하였다. 그리고 마지막 제2대대는 별우로 우회하여 17번 도로를 따라 남진 해 23시에 동막동으로 도착하는데 성공하였다. 당시 제2대대는 각 대대중에서 가장 느리게 동막동으로 도착했는데 그 원인은 당시 3개 사단이 17번 도로를 차지한채 철수를 진행하고 있었고 여기서 낀 제2대대는 꽉 막힌 17번 도로를 지났기 때문에 결국 23시가 되고서야 동막동으로 집결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30 동막동에 집결중임 제2대대는 14.50 별우(CT851421)를 경우 22.00 백암동(CT843 388) 지점에 집결중임 연대 수색중대와 제3대대는 철수하여 수색중대는 1000(CT874437) 지점에 집결 후 12.50경에 434고지(CT867436) 지점에 배치하여 아방 철수를 엄호하며 적의 후속부와 1시간 교전투가 1400(CT861428) 지점으로 도하하여 다시 15.00경 소성동에 집결하여 적정을 파악하며 적의 남하를 지연시키기 위하여 재차 도강하여(CT871432) 지점에서 수불상의 적과 30분간 교전 후(CT856424) 지점으로 철수 재차 도강하여 16.30 파수리 (CT853418)에 집결하여 596고지(CT850405)에 배치한 후 남하하는 적을 저지하고 있었음 20.30 연대CP는 사방거리에 위치함.
23.00(CT897 365) 지점에 배치중인 제2중대는(CT880 380) 지점으로 이동한 후 새로운 저지진지를 구성하여 방어에 임함.
23.40 적의 포위망을 돌파하고 철수한 제1중대 제6중대는 분산됨.
第三師團金城川地區战斗, 30p

한편, 연대의 철수를 엄호하게 된 제22연대 수색중대는 연대의 뒤를 따라 행군하던중 중공군들이 광대곡 앞에 있는 강을 도섭하는 걸 목격하게 된다. 이는 명백히 연대 진지에 대한 공격시도였고 이에 중대장 김대위는 초근접한 상황에서 역습을 하겠다는 결심을 한채 중대원들을 언덕에 산개시킨 후, 숨을 죽여 대기하도록 하였다. 이윽고 중공군의 주력이 도하하고 그중 일부 부대가 언덕에 발을 들이자 이때를 기하여 중대는 일제히 총을 난사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중공군은 이를 피하지 못한채 피격당했고 살아남은 자는 혼비백산하여 도주함으로써 전투는 잠시동안 소강상태에 돌입하였다.

이때 중대장 김대위는 처음으로 중공군을 정면에서 공격해 격퇴했고 이와같은 전과를 올리자 이 기세를 몰아 교량을 건너 북안으로 역공격하여 중공군을 분쇄하기록 다짐하였다. 이리하여 중대는 교량에 있는 중공군 시체를 뛰어넘어 북안으로 향하였으니 이 놀라운 행동에 중공군은 그 어떠한 주의도 돌리지 않았다. 이후, 중대가 북안으로 도달하자 중대장 김대위는 돌격이라는 소리를 외치며 전중대원들과 함께 총검돌격을 감행하였다.

이어, 소리를 지르며 돌격하는 중대원들을 본 중공군들은 마치 얼이 빠진듯 우왕좌앙하다가 중앙으로 돌입한 중대원들에게 살해당했고 시체 50구를 남긴채 사방팔방으로 흩어졌다. 이렇듯, 놀라울 정도의 전과를 세운 연대 수색중대는 이후, 북안을 남진한 뒤 금성천을 건너 17시에 599고지의 새 진지를 점령하고 동시에 경계에 임하게 되었다.

3.5.4. 예비대 전환

파일:대대OP.png
제3사단 금성전투 상황도[34]
수색중대가 중공군을 만나기 이전, 제2군단은 군단작명 제6호로써 각 사단으로 하여금 금성천 남단에 제2의 방어선를 편성하도록 하였다. 여기서 군단이 지정한 방어선은 각 사단이 담당하기에는 매우 큰 정면인지라 군단은 작지 제62호로써 군단 예비대인 제5사단 제27연대를 제5사단의 우일선인 제35연대 제1대대와 제18연대의 간격 사이로 투입하여 사단의 광정면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그러나 군단이 제27연대를 투입했을 시기에는 이미 제5사단도 혼전 속에 있었으므로 해당 명령문은 구령으로써 동일 14시부로 수정되었으니 원래 투입하기로 하였던 제27연대는 수정명령으로 인해 움직이지 않게되었고 이에 따라 제35연대 제1대대는 광정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채 격전을 치르게 되었다.

바로 이때 제1대대와의 연계를 유지하려 한 제3사단 제18연대는 신진지를 점령하고 곧이어 몰려오는 중공군을 상대로 격전을 치르고 있었다. 이때 연대는 중공군에게 중과부적으로 점차 한계에 부딪치고 있었으며 결국 819고지까지 밀려나 이후 사단장의 승인하에 철수하게 되어 제5사단과 협조를 유지한채 백암산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연대는 5시 30분에 백암산에서 주둔중인 제23연대와 연계했고 이와동시, 즉각 급편방어에 임하도록 하였다.[35]

한편 3사단 제22연대는 지난 14일 21시에 신진지인 666고지-723고지를 폭우를 뚫고 진입하여 신진지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도중에 중공군 약 2개 대대가 연대 정면으로 출현해 맹렬히 공격해 왔고 그 결과 사격점호도 제대로 차지하지 못한 제22연대는 오전 6시 30분 기준, 후퇴하여 어두은리에 위치한 진지에서 남쪽 6km 지점에 집결하고 역습을 노리게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제23연대는 사단장의 구령명령으로써 백암산의 새로운 저지진지를 방어하기 위하여 지난 14일 21시에 집결지인 동막동에서 출발했고 이 과정에서 병력수습을 다 하지 못한 제2대대는 행군이 늦어진 관계로 24시에 본대를 뒤따랐다. 그리하여 마침내 백암산에 도착한 연대는 백암산을 중심으로하여 오전 6시에 제1대대를 962고지로부터 서남 1km에 이르는 능선에, 제2대대는 103번 도로의 좌우측 능선에, 제3대대는 백암산 정상에 각각 배치함으로써 사주방어에 임하였다. 그러나 8시 30분 쯤 중공군이 대거 출현함으로 인하여 백암산 방어진지는 단 30분만에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이후 제1,2대대는 백암동으로 철수했고 제3대대는 고둔리에 철수해 병력을 수습하였다.

이렇게 백암산에 배치한 부대가 무너졌을 시기, 기세등등하게 공세를 가해왔던 중공군들도 점차 한계에 직면했는데 이중 특히 백암산에 도달한 중공군은 신장된 보급로와 하천 그리고 폭우에 모두 노출된 까닭인지라 보급을 거의 추진하지 못하였다. 이는 다시말해 중공군의 전투력이 저하되어 있고 1일 1식도 제대로 추진하지 못하는 상황이기에 밀려난 제2군단이 반격하기에는 딱 알맞는 시기였다.

따라서 제2군단 사령부는 화천에 있던 제11사단을 제6사단 작전지구로 투입시켜 6사단의 철수를 엄호하였다. 이후 군단은 제7사단을 미 제9군단으로부터 배속받아 군단 예비대로 두었으며 이어 군단장 정일권 중장은 7월 15일 오후 3시부로 군단작명 제6호를 하달하여 제3사단을 제외한 각 사단들에게 반격을 준비하란 명령을 내리고 제3사단에게는 군단의 예비대가 되어 동시에 제2방어선을 차지하라는 명령을 하달하였다. 이에 사단장은 작지 64호를 다음과 같이 하달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사단은 군단 예비가 되어 제2방어선을 확보하려 함.
2. 제18연대는 996고지-무명고지(989고지 서북쪽 0.5km)간을 12.00까지 확보하라.
3. 제22연대는 895고지-534고지-645고지간을 12.00까지 확보하라.
4. 제23연대는 758고지-913고지-859고지간을 18.00까지 확보하라

이로써 중공군의 공격을 무자비하게 받았던 사단의 전투정면은 우측의 제5사단과 좌익의 제8사단이 각각 인수했고 사단은 7월 17일까지 재편성에 들어가게 되었다. 사단은 중공군 제60군의 공격으로 말미암아 9km에 이르는 지형으로 물러났고 그동안 공세를 가했던 중공군에게 약 5,000명의 손실을 내게 하였으며 사단또한 마찬가지로 대략 15%의 사상자와 많은 장비의 손실을 입었다.

7월 15일 19시를 전후하여 사단 각 연대는 집결지를 향해 출발해 다음날 오전 3시에 제2방어선인 저지진지(작지 64호에 의한 것)를 인수했고 그곳에서 사단CP를 사방거리 북쪽 2km에 두고 제18연대는 996고지를 중심으로 하여 우일선에 제1대대를, 중앙에 제3대대를, 그리고 좌일선은 제2대대를 각각 배치함으로써 주봉을 방어하게 하였으며 제23연대는 사단 우일선으로 제2대대를 758고지-1048고지간에 배치, 제3대대에게는 제2대대와 연계하도록 하여 859고지에 이르는 선을 방어하게 하고 마지막 제3대대는 예비대로 지정해 우측방을 경계하도록 하였다.

한편, 제22연대는 위 연대와 연계하도록 하기 위하여 제1대대를 우일선으로 지정했고 이와 동시에 제1대대로 하여금 895고지-무명고지를 방어하도록 했으며 좌일선은 제2대대로 지정해 645고지에 이르는 능선을 방어하도록 했다. 또 제3대대에게는 연대 예비대로 지정해 배치지를 어두은리로 하여 연대의 배치 편성을 끝마쳤다.

이리하여 배치를 모두 끝마치자 사단장은 공병 1개 소대를 각 연대들에게 지원하면서 진지구축에 주력함과 동시에 부대정비에 임하도록 하였다. 이후 사단에게 배속되었던 제72포병대대가 배속이 해제되어 반격제대인 제7사단으로 가버렸고 이에 사단장 임부택 소장은 이날 예비대를 확보하고자 제23연대를 고토은리로 빼내어 사단예비대로 공치하는 한편, 제18연대에게 제23연대의 작전구역을 인수하도록 함으로써(15시) 마침내 2일간의 혈전을 끝을 내고 7월 23일, 다시 미 제8군 예비대로 전환하게 되었다. 그 후, 사단은 창촌으로 복귀한 뒤 그곳에서 훈련과 부대정비에 임하다가 7월 27일, 휴전을 맞이하였다.
부대는(제23연대) 특히 13일의 철수 작전 이후, 분산된 병력을 수집하여 재편성을 거의 완료하고 질서가 회복될 무렵. 15.00 사단작명에 의거 방어임무를 제18연대에게 인계하고 부대정비를 위하여 고토은리에 집결하려 하였으나 제1대대는 사방거리에 제2대대는(CT842 281) 지점에 제3대대는 하방골 연대CP 앞(CT849 297)에 각각 위치함.
第三師團金城川地區战斗, 33p

이 전투에서 입은 3사단의 피해와 전과는 다음과 같다.[36]

손실
구분 전사 부상 실종
18연대 16 86 150
22연대 22 189 287
23연대 71 105 199
기타 8 42 -

전과
구분 사살 추정살상 포로
18연대 200 800 1
22연대 1,150 2,100 2
23연대 1,000 1,800

금성전투 당시 사단은 대대급 이상의 피해를 입었으며 그중 실종자가 절반을 넘기고 있다.

3.5.5. 백암산 전투(제5사단)

파일:백암산 전투 상황도.png
백암산 전투 상황도
이 당시 중공군 180사단은 7월 13일 자정이 되기 전까지 3사단과 5사단의 전투지경선이 그어진 금성천이 북한강으로 유입되는 합류지점으로 포위기동 부대들을 투입하여 3사단 후방지역에 위치한 지원부대와 지휘소를 기습하였다. 이 포위공격으로 제3사단의 방어선이 붕괴되기 시작하자 중공군은 그 여세를 몰아 북한강의 천연 하천 장애물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5사단의 좌익 연대인 35연대 소속 1대대 진지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37]

다만 초반에는 중대급 공세만이 있었고 중공군은 3사단쪽으로 집중되어 공격하였으나 새벅 1시가 되면은 중공군의 숫자는 어느새 대대규모로 불어났으며 또 다른 중공군 2개 중대가 동쪽의 2중대를 공격하는등 전투보고가 잇따라 계속 들어왔다. 이때 중공군의 포격량은 완전히 폭발하였고 35연대와 대대간의 교신은 모두 두절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사단은 중공군의 공격계획을 알아내었고 이에 사단은 중공군을 저지하기 위해 5사단 포병을 비롯한 미 제5포병단 소속의 미군포병대대 등 가용한 포병의 전화력을 이곳으로 집중시켰다. 그러나 이런 공격에도 불구하고 중공군은 2시 무렵에 1개 대대규모로 증강되었고 1시간 후에는 또 다른 1개 대대 규모의 중공군이 3중대 전초로 나가있던 1소대 진지를 휩쓸고 계속해서 3중대 진지로 밀어 들어갔다.
파일:1차 싳모.png

이와 같이 중공군의 공격이 좌일선 대대에 집중되자 연대장 박창원 대령은 연대 방어책임 지역의 중앙 부근에 솟아 있는 714-780고지 선으로 배치돼있는 3대대의 10,11중대를 축차로 1대대 주저항선 후방 689고지-낡은터선으로 진출시켜 이 지역의 방어종심을 강화하였다. 그리고 3대대가 있던 자리에는 2대대에게 언제든지 명령만 있다면 점령하여 방어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는 명령을 하달하였다.

한편 5사단장 김종갑 소장은 중공군이 주력을 금성천 따라 서남쪽으로 진출시키고 무방비 지대인 사단의 좌후방을 우회하여 백암산까지 남진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걸 간파한 후 그 대응책 강구에 부심하였다. 그는 오전 6시에 군단장의 승인을 얻어 주파령 4KM 남쪽 어두운골에 대기하고 있는 27연대 2개 대대를 백암산 서측방 계곡으로 이동시켜 35연대의 상황에 따라 언제든지 투입할 수 있도록 조치하였다.[38]

이때 좌전방의 1대대는 1개 연대로 증강된 중공군의 공격을 감당하지 못하고 462고지를 포기한뒤 1중대의 엄호하에 우측방 9중대와 동서로 연한 해발 700m급 능선으로 이동하여 철수를 개시하였다.

3.6. 금성 돌출부 선단부

중공군은 금성 돌출부 좌우를 돌파하여 선단지역에 배치된 6, 8사단의 측후방으로 진출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때 중공군은 양견부에 대한 공격과 동시에 금성 돌출부 선단지역 정면에 압도적인 병력을 투입하여 압력을 가하였다. 이때 배치된 6, 8사단은 분전하였으나 측방이 노출되고 후방이 차단되자 어쩔수 없이 주저항선을 포기하고 금성천을 도하해 적근산-백암산으로 후퇴한다.

3.6.1. 교암산 전투(제6사단)

1952년 3월 28일, 현 전선으로 진출한 미 제40사단의 작전임무를 인수한 제6사단은 575고지와 금성동남쪽의 A고지 B고지 등에서 처절한 혈전을 벌여 상승사단으로서의 이름을 높인바가 있었는데 이때 6사단은 제7연대를 우일선, 제19연대를 좌일선으로, 그리고 제2연대는 예비대로 배치하여 우로는 8사단 좌로는 수도사단과 연계를 유지하고 군단의 좌익으로써 금성 돌출부의 요역을 계속 유지하였다.

그런데 사단은 교착상태에 빠진 휴전회담의 종결을 위한 미국측의 작전개념에 따라 공격보다는 방어를 위주로 둔채 미주리선을 확보하고 야간잠복과 위력수색을 강화시켜 전투정보 수집을 위한 포로획득에 주력하는 일방 전초진지와 주진지를 보강하여 적침을 대비토록 하면서 장병들의 사기 진작과 지형의 숙달 및 재정비를 위해 정기적으로 부대 교대를 실시하였다.

이에따라 2월 6일에 작명 제16호로써 예비대 2연대와 우일선 7연대를 서로 교대하도록 지시하였고 4월 1일에는 좌일선 제19연대의 진지를 인계케 하였으며 5월 17일에는 예비대로 배속된 제19연대가 우일선 제2연대의 작전임무를 인계하여 제2연대를 사단예비대로 두게 되었다. 그러나 6월 10일부터 군단우익인 제5사단 정면에 중공군의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되었으며 이후 제8사단도 중공군의 공격을 받게되어 격전이 계속 지속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자 군단은 작지 제33호를 내려 제2연대의 2개 대대를 6월 13일 12시부로 제8사단에 배속시켜 중공군의 공격을 저지한 다음 6월 16일 다시 원대복귀 시킨 바가 있다.

이렇듯 공세로 전환한 중공군이 군단 우측과 중앙에 공격을 집중해 일부 병력을 미주리선에서 아이슬란드 선까지 철수키게 만드는 등, 사태가 심각하게 흐르자 사단은 각 연대에 1개 공병중대를 배속하여 7월 7일까지 주진지와 전진기지의 동굴 및 엄폐호 그리고 교통호를 보강하도록 조치했으며 동시에 장애물지대도 보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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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6사단장 백인엽
한편, 1952년 12월 16일부로 사단을 지원하게 된 제10포병단은 1953년 4월 20일에 제15포병단과 교체되었고 6월 29일에는 제20포병단이 배속되면서 사단 포병단은 제26, 76, 77포병대대와 제96포병대대를 통합지휘하게 됨에따라 미 제5포병단과의 긴밀한 협조 하에 사단을 지원하게 되었다.

또 1953년 5월 9일에는 6사단장이 지휘권을 부사단장 김용주에게 인계했는데 이때 도미유학 후, 대기중이던 백인엽 소장은 당시 제15사단이 351고지를 상실 직후, 수많은 역습을 개시하였음에도 별다른 별다른 진전이 없는 걸 포착하고 6월 12일 부로 자신이 직접 15사단장으로 부임하여 351고지 역습작전을 지휘하였으나 작전은 성공을 보지 못하여 결국 6일만에 육본 인사전 제2696호에 의거, 다시 6사단장으로 복귀하였다.

그러나, 백인엽 소장은 7월 5일부로 김점곤 대령에게 제6사단장의 자리를 내놔야 했는데 여기서 군단장 정일권 중장은 '중공군의 7.13공세 징후가 농후한 까닭으로 인하여 사단장 교체는 곤란하다'라는 근거를 내세워 사단장 교체를 보류하도록 조치했고 이에 따라 백인엽 소장은 사단장으로 남아 제6사단을 계속 지휘하게 되었다.

이때, 제6사단이 담당한 정면에는 이미 575고지 전투에서 나왔듯, 총 4개의 주요 접근로가 존재하고 있었다.

① 장연리-율사리에서 교암산에 이르는 능선

② 오리동-장연리에서 계암에 이르는 작전로와 개활지

③ 고직목리-오리동에서 연거리-가학리로 이르는 능선

④ 경파리에서 418고지-치마고개에 이르는 작전로와 개활지

이중 ②와 ④의 접근로는 위험이 비교적 적은 것으로 판단되었다. 왜냐하면 이 접근로는 중공군이 제공권을 장악하고 동시에 막강한 포병화력도 가져야만 대량공격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단은 ①과 ③의 접근로를 더 위협적으로 바라보았고 이에 따라 사단은 가고지-394고지-마고지-407고지-418고지-424고지에 전초진지를 편성하고 특화점과 탄막을 조밀하게 조치하여 전진 진지도 주진지와 같이 고수하기로 하였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먼저 중공군의 공세를 차단하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당시 금성천의 지류로 인해서 주진지 일대의 후방이 차단되게 되면서 주저항선 직후방에 위치한 유리한 예비진지를 보유하지 못하였기에 만일 주저항선이 중공군의 공세로 인해 무너져 금성천 남안으로 철수하게 된다면 사단은 그 지류로 인해 철수가 불가능해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사단은 주저항선의 확보를 위하여 예비진지보다는 전초진지에 중점을 둬야한다는 판단을 했고 그 판단에는 당시 지형조건의 제한이 크게 작용하였다.

한편, 이 당시에는 무성기를 거쳐 본격적인 장마에 접어들게 됨에따라 아침과 저녁에는 안개가 짙게 껴 관측과 사계가 곤란을 겪게 되었으며 또 계속적인 폭우로 말미암아 항공지원에 많은 제한을 받게 되었는데 당시 기상 상황은 대략적으로 다음과 같다.
일자 7월 10일 7월 11일 7월 12일 7월 13일 7월 14일
음력 5월 30일 6월 1일 6월 2일 6월 3일 6월 4일
일기 소우(小雨)뒤 흐림 흐린 뒤 우(雨) 흐린 뒤 우(雨) 흐린 뒤 우(雨) 흐린 뒤 우(雨)
일출 05.18 05.19 05.20 05.21 05.22
일몰 19.56 19.55 19.54 19.53 19.52
월출 04.02 05.04 06.07 07.10 08.11
월몰 19.27 20.09 20.44 21.13 21.39

이때 6사단이 당면한 적은 중공군 제67군 예하 제199사단과 제200사단으로 총 2개의 사단이었다. 이중 제200사단은 제598연대를 우일선으로 전개해 성산(533고지)-옥녀봉-562고지-장연리-672고지를 연한 일대를 주 거점을 형성 후, 사단에 대한 탐색전을 이어오다가 제199사단이 이동해오자 이들과 합세해 공격 준비에 착수하였다. 이들 병력은 미 제8군의 조사 기준으로 하면 다음과 같다.

제67군 부대의 병력 수[39]
군사령부 5,000
제199사 10,200
제200사 8,600
제201사 9,500
33,300

199사단과 200사단의 총 병력은 둘다 합해 약 18,800명으로 추산되었고 화포는 199사단, 200사단등 양개 사단을 비롯하여 군 포병연대, 제40, 41, 406독립 포병연대 포를 합하여 105mm 포 36문, 76mm 포 36문, 75mm 포가 72문으로 총 144문으로 편제되어 있었다. 다만 이중 가용 가능한 포는 122문에 불과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사단 포병에 비해서는 훨신 막강하였기에 6월 공세때처럼 엄청난 화력을 투사하기에는 충분한 물량이었다. 이는 6사단 2연대의 자체적인 조사에서도 나타나는 특징인데 문제는 사단은 7월 공세 직전까지 입수한 중공군측 보고서가 없음으로 보다 정확한 수치와 보고서를 작성할 수 없었다.
(二) 적의 장비

적 공세 전, 입수된 정보가 없음으로 확실(確实)한 판단은 곤란하나 T/E (약 80%)에 충분한 장비임을 간주할 수 있음.

(三) 적의 소질

불상(不詳)
步兵第6师团第2联隊轎岩山战斗詳報目錄, 2p

여하간, 제199사단은 구성원 중 절반 이상이 고참병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중 태반이 무학력자임으로 실력이 비교적 낮게 평가되고 있었다.
3.소질

중공군 201사는 투입초기에 약 70% 이상이 고병으로 상당한 전투력을 소유하고 있었으나 장기간 전투에서 원대한 인적손실로 말미암아 대부분이 보충된 신병으로 편성되어 있었음. 연이나(그러나) 199사단은 반수 이상이 고병으로서 전투력이 강하였다고 보나 태반이 무학자로서 기(그)의 실력은 희박하다함.
戰鬪詳報, 步兵第八師團, 5p

한편, 이때 6사단의 병력은 다음과 같다.[40]
제2연대 2,944
제19연대 1,774
제7연대 2,975
사단본부[41] ?
제20포병단 ?
제2군단 작전상보 기준 11,889

제2군단 예하 사단의 고병과 신병 비율[42]
부대명 신병 고병
제8사단 40% 60%
제7사단 30% 70%
제6사단 35% 65%
제5사단 38% 62%
제3사단 31.9% 68.1%
제11사단 46.5% 53.5%

이때 6사단의 각 병력을 보면 총 병력이 11,889명으로 7월 초인 12,019명에 비해 많이 줄어든 수치이다. 이는 7월 초에 실시된 중공군의 소규모 작전으로 인하여 많은 손실을 입었던 까닭이었다. 다만 6사단 전체 병력과 2군단 예하 각 사단과 비교해 보면 새로 배속된 11사단과 7사단을 제외하면 6사단이 가장 많은 인원을 보유하고 있었다. 또한 고참병도 3사단 다음인 65%로 제2군단 내에서 가장 많은 고참병을 보유한 사단중 하나였으며 사기또한 마찬가지로 매우 높은쪽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6월 말이 되자 중공군의 포병 증강으로 인해서 사기는 점차 떨어져 갔으며 특히 보급 두절에 따른 사기 저하는 매우 심각하였다.

이를테면 제6사단 2연대는 보급선이 761고지였는데 이 고지는 산악이 험해 보급수송을 할려면 KSC(노무단)와 '케블카'를 반드시 이용해야만 가능했고 또 중공군의 포격 세레로 인해 자주 보급이 끊기는 일이 잦아 매우 취약한 보급로였다. 따라서 연대는 761고지에 방어부대를 배치하는 등의 조치를 취해 이에따른 보급 상태의 안정화를 기대하였으나 역시나 7월에 이르러서는 중공군의 막대한 포격으로 말이암아 케이블카 선이 단절되고 수송하는 노무단과 기타 병사들이 포격에 휩쓸려 사상자가 대거 증가하는 등의 문제가 터졌으며 결국 대대 보급소까지 마비됨에 따라 교암산 전투가 개시된 직후부터는 연대 내의 군수보급은 완전히 중지되었다.
아군의 보급상태는 적의 공격개시되기 직전까지는 케블카, KSC 급 대대병력으로 일상적인 보급이고 산정(山頂) 소총중대까지 잘 계획적으로 추진되였었다. 그러나 일단 적의 막대한 공격지원사격으로 케불카 선이 단절되고 포화로 운송 도중의 KSC 급 기타병력의 사상수가 증가되자 계속적인 각종 보급은 대대보급소까지 와서는 완전히 마비 상태에 놓여 전투가 개시되고 철수할 때까지의 보급은 중지되였음
步兵第6师团第2联隊轎岩山战斗詳報目錄, 5p

즉, 이러한 상황 속에서 6사단은 교암산 전투를 치러야만 했으니 교암산의 운명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3.6.1.1. 전초 진지의 공격
7월 초에 접어들게 되자 교암산 일대에는 중공군의 공세 징후가 나날이 강화되어 소규모 전투가 하루에만 무려 수차례나 진행되기에 이르렀고 이에 사단장 백인엽은 각 부대에게 교암산의 방어태세를 더욱 더 강화하라는 내용을 담은 사단작명 제23호를 하달하였다.
1.적의 공세가 멀지 않은 시일 내에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2.사단은 일부 병력을 주저항선에 증강하여 전투전초진지 및 주진지를 강화하여 적의 공세를 저지격멸하려 한다.

3. 제19연대는
가. 우일선으로서 교암산-사천리에 이르는 주저항선과 가고지-394고지-마고지-407고지 일대의 전투전초진지를 확보하라.
나. 7월 9일 19:00시를 기해 제2연대의 1개 대대를 통합 지휘하라.
다. 교암산에 대한 방어력을 강화하라.

4. 제7연대는 좌일선으로서 사천리-회고개에 이르는 주저항선과 418거지-후천리-424고지 일대의 전투전초진지를 확보하라.

5. 제2연대는
가. 7월 9일 19:00부로 1개 대대를 제19연대에 배속하라.
나. 주력은 노동리에 집결하여 측후방경계를 강화하고 출동태세를 갖추라.

6. 제20포병단은
가. 미 제5포병단과 긴밀한 화력협조를 이루라.
나. 각 연대를 105mm 포병 1개 대대씩으로 직접 지원하게 하고 155mm 포병은 사단을 일반 지원하라.
다. 화력의 우선권은 제19연대에 부여한다.

7. 제2전차중대는 2개 소대가 제19연대를 1개 소대가 제7연대를 직접 지원하게 하라.

8. 제6박격포중대는 2개 소대로 제19연대를, 1개 소대로 제7연대를 지원하게 하라.

9. 공병대대는 조속한 시일 내에 이남리 남쪽 금성천 지류의 가교공사를 완료하고 주보급로와 금성천의 교량 및 가교의 확보에 주력하라.

10. 협조지시
가. 전투전초진지도 별명이 없는 한 주진지와 같이 고수한다.
나. 동굴을 이용하여 진내사격을 적절히 활용하라.
다. 전투전초진지에는 적의 관측을 피해 대공표식을 하라.

11. 통신은 현행 SOI에 의거하되, 어떠한 경우에도 유지토록 하라.

12. 사단 CP는 거리실에 위치힌다.

해당 명령문에 의거하여 제19연대는, 배속된 제2연대 3대대를 좌일선으로 지정해 바고지의 주진지와 407고지의 전초진지를 7월 10일 3시부로 인수하도록 했고 제1대대를 교암산의 서북쪽 능선에 진입시켜 442고지의 주진지를 담당하도록 조치함에 따라 우일선 제3대대의 방어전면을 좁혀 교암산의 방어력을 강화하였다. 이와 동시에 제2대대 또한 중앙 일선으로 하여 계암 일대에 주진지를 설치하고 394고지-마고지에 전초진지를 점령함으로써 창도리로부터 주저항선에 이르는 접근로를 봉쇄하였다.

한편 사단의 좌일선인 제7연대는, 제1대대를 우일선으로 지정하여 금성천 동서 양안의 사천리 북쪽 능선과 374고지 북쪽 능선에 주진지를, 418고지에 전초진지를 점령하도록 했다. 그리고 좌일선 2대대에게는 봉화동-회고개에 이르는 주진지와 후천리-424고지 일대에 위치한 전초진지를 확보하도록 하였다.

또 다른 한편 제2연대는, 예비 제3대대를 제19연대에 배속했고, 주력은 노동리에서 출동태세를 갖춰 측후방에 대한 경계를 담당하게 하였는데 이 조치가 끝난지 단 며칠만에 중공군의 공격이 시작되어 7.13공세가 일보직전으로 다가오게 되었다.

7월 10일 오전 7시, 중공군은 200사단을 선두로 사단이 예상한 주요 접근로에 대대적인 포격을 실시한 후, 21시 30분을 기해 제19연대 정면을 향하여 총돌격을 감행하였다. 이때 이들과 교전을 벌인 7중대는 제3소대로부터 중공군이 중대규모의 병력을 끌고와 공격한다는 사실을 받았고 이를 대대장에게 보고하였다. 이후 이 급보는 연대장에게도 전달되었는데 여기서 연대장은' 이러한 공격은 연대를 교란시키려는 양공에 불과하다'라고 판단했고 따라서 '주공은 교암산쪽으로 지향된다'라는 말을 남긴 뒤, 다음과 같은 긴급작전 명령을 하달하였다.
1. 적은 드디어 1개 중대규모로써 394고지 정면으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2. 이는 양공이며 주공은 교암산 정면으로 지향될 것으로 판단된다.
3. 제3대대는 즉각 전투태세를 완비하고 예측되는 적침에 대비하여 가고지의 전초진지를 확보하라.
4. 제1대대는 현 임무를 계속 수행하면서 제3대대에 대한 지원태세를 갖추라.
5. 제2대대는 전투태세에 돌입하는 동시에 394고지에 대한 지원태세를 갖추라
6. 제2연대 제3대대는 경계태세를 강화하고 현 임무를 계속 수행하라.

이렇게 7중대가 싸우고 있을 무렵, 교암산 주진지를 확보하고 있던 제3대대장 유승원 중령은 중대규모의 중공군이 가고지를 공격하고 있다는 소식을 제9중대로부터 듣자 무전으로 중대를 독려하는 한편, 포병의 차단사격을 유도하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포병의 지원을 얻은 9중대는 일제히 화력을 집중해 진지 내로 몰려오는 중공군을 몰살시켰다. 그러나 중공군은 다시 한번 공격을 가했고 23시 30분쯤에는 그 규모가 대대규모로 늘어나 중대 전면을 향해 총돌격을 하여 결국 중대는 제96포병대대와 미 제300자주포대대의 지원을 얻어 이들을 모두 격퇴시켰다.

파일:24902k4kg (2).png

그런데 포격이 끝나자 살아있던 중공군들이 다시 한번 돌격에 나서 방망이 수류탄을 던지면서 진지에 육박하는 등의 행동을 취했고 이에 제2소대는 수류탄전을 전개했으며 곧 이들과 백병전을 벌여 싸웠는데 중과부적으로 중대는 고지 정상까지 밀리기 직전까지 갔으나, 제2소대장이 진두지휘하는 특공조가 바로 이때 달려나가 M2 카빈 소총을 난사하면서 화염방사기를 뿌리니 중공군은 분산되어 잠시 밀려나가게 되었다. 그리고 중공군이 밀려나가자마자 제2소대는 수류탄을 투척하고 사격을 집중한 다음 곧바로 돌격을 감행했고, 이에 중공군은 완전히 분산된채 후퇴하면서 사단의 포격지원에 휘말려 소멸되고 말았다.

한편, 연대의 중앙일선인 제2대대는 21시 30분경 중공군으로부터 공격을 받기 시작하였는데 중공군은 제7중대가 방어하고 있는 곳인 394고지에 들이닥쳐 이들과 격전을 벌였다. 여기서 제7중대는 화력을 최대한으로 끌어모아 방어하였으나 밀려드는 중공군에 의하여 백병전을 전개했고 육탄전을 치른 뒤, 정상부로 후퇴해 고지 피탈 직전까지 가게된다. 그러나 중대는 서둘러 진내사격을 요청해 이들을 모두 격퇴시켰고 중공군 시체 49구를 확인한 후, 대대로부터 급히 배속받은 대대수색대를 394고지 일대에 배치시켰다.
3.6.1.2. 대공세 직전
파일:EGEUGU (2).png
7월 10~11일 교암산 전투 경과도
이와 같이 교암산 부근의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되자 사단장 백인엽 소장은 교암산의 방어태세를 강화시키라는 명령인 작지 제78호를 하달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적은 사단 정면으로 공격 중이다.

2. 이는 적의 양공 견제책으로 판단되나, 그 적세로 미루어보아 교암산에 대한 지중공격 가능성을 배제 할 수 없다.

3. 사단은 일부 병력을 증원하여 교암산 및 가고지의 방어태세를 더욱 강화하려 한다.

4. 제19연대는 7월 11일 12시부로 교암산으로 진출하는 제2연대의 1개 대대를 통합 지휘하고 상황의 진전에 따라 가고지의 전초진지를 강화하라.

5. 제2연대는 7월 11일 12시부로 1개 대대를 제19연대에 배속하고 잔여병력으로 출동태세를 갖추라,

6. 제7연대는 경계태세를 강화하면서 현 임무를 계속 수행하라.

그렇게 하루가 지난 7월 11일, 사단 전면에 출현한 중공군의 규모는 대대급 규모에서 1개 연대급으로 증강되었고 공세는 가고지 일대로 집중되어 그곳에 주둔중인 9중대와 치열한 격전을 벌이게 되었다. 이때 9중대는 일인당 지급된 수십개의 수류탄을 격전중에 모두 소비했고 이후, 중공군과 총검전을 펼쳐 싸웠는데 이 백병전에서 밀려난 중공군은 다시한번 2개 중대규모로써 공격을 가해 또다시 맨몸으로 싸우는 육탄전을 펼쳐 가고지 부근 3개 능선에서 주둔하고 있던 중대원을 모두 몰아내고 이들을 가고지쪽으로 철수하게 하여 승기를 잡았다. 그 뒤, 중공군은 중대를 향해 3면 포위를 시도해 공격해 왔으며 이에 9중대는 본부로부터 서둘러 TOT 사격을 요청해 이를 모두 격퇴시켰다.

이리하여 중공군의 공격을 간신히 막은 제9중대는 중공군으로부터 빼앗긴 가고지 주변 3개 능선을 모두 탈취하기 위해 각 소대를 분산하여 공격했고 포격과 백병전을 거듭한 난투속에 마침내 중공군에게 점령된 3개 능선 전부를 탈취하는데 성공하게 된다. 이때 사단장 백인엽 소장은 중공군의 공세가 점차 확대될 것을 염두에 두고 예비대인 6사단 제2연대의 일부 병력을 교암산으로 진출시켜 제19연대에 배속하라는 작지 제79호를 하달하였다.
1. 적의 공세는 확대일로에 있다.

2. 사단은 이에 대비하여 교암산 방어력을 강화하려 한다

3. 제19연대는
가. 7월 11일 21.00부로 제2연대의 1개 대대를 통합지휘하라.
나. 담당 전투정면의 일부를 제2연대에 인계할 준비를 갖추라.

단 시기는 별명한다.

4. 제2연대
가. 1개 대대를 7월 11일 21.00부로 제19연대에 배속하라
나. 제19연대의 전투정면의 일부를 인계할 준비를 갖추라.

단 그 시기는 별명한다.

이에 따라 제2연대는 제1대대를 보냈으며 제1대대는 19연대의 명령에 따라 교암산 진지를 맡게 되고 2연대 제2대대는 19연대의 예비대가 되어 교암산 서쪽 능선에 주둔하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사단장 백인엽은 교암산 지구 방어임무를 제19연대에서 제2연대로 바꾸라는 지시를 하달하였다. 당시 2연대가 피해 수준이 적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19연대로부터 배속이 해제된 2연대 각 대대들은 연대의 명령에 따라 19연대에 잠시 배속된 제1대대는 계속 현 임무를 수행하고 제2대대는 제19연대 제3대대로부터 전초진지를 인수받도록 하는 조치를 취했으며 마지막 제3대대는 7월 12일 21시부로 제19연대 제1대대의 주진지를 인수하게 하였다.

그런데 이때 미 제8군에서는 제11사단을 제2군단에 배속시키는 명령을 내렸는데 이는 7월 10일부터 시작된 중공군의 맹렬한 공격을 곧 공세 전초전으로 인식하여 이를 타개하기 위해 내린 조치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제11사단을 배속받은 제2군단은 작명 제25호를 하달하여 제11사단에게 1개 연대를 차출해 예비대로 둘 것을 지시하였고 이에따라 11사단은 제9연대를 예비대로 두게 하였다. 하지만 7월 13일, 21시 30분부터 시작된 중공군의 대량 포격과 아울러 22시를 기해 활동을 개시한 중공군들이 제5사단을 제외한 전 군단 정면에서 몰려오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좌인접 수도사단의 전황이 위험에 빠지게 되었다. 결국 측방이 돌파될 위기에 처한 군단은 서측방을 방어하면서 좌일선을 보강하기 위해 배속된 제11사단 제9연대에게 즉시 진지 투입 명령을 하달하였다.
파일:교암산.png
7월 12일 6사단 교암산 배치도
3.6.1.3. 7.13 대공세
"적의 공격병력이 내가 쓰는 기관총 탄약 수보다 많다."
교암산에 미친듯이 몰려오는 중공군들을 본 어느 무명의 기관총 사수
이날 제2연대는 상술한대로 배속중인 19연대 제3대대의 작전임무를 인수하고 제2대대로 하여금 가고지-가막동으로 전초기지를 확대하였다. 그러나 가고지 공격을 위한 거점을 상실한 중공군은 가막동을 확보한 제7중대를 목표로 계속 공격을 가함으로써 결국 18시 10분 상산리로 물러나게 되었으며 이에 제2대대 주력은 가고지를 중심으로 전초진지를 서둘러 재편성하도록 조치하였다. 그런데 21시 30분부터 시작된 중공군의 대량포격과 22시를 기하여 시작된 중공군의 대규모 공격은 연대의 주저항선을 큰 위기에 빠지게 만들었다.

이때, 제2연대 제2대대는 가고지를 제19연대 3대대로부터 인수한 다음, 연대의 계획대로 가고지-가막동으로 전초기지를 추진키로 하여 제6, 7중대에게 이를 담당하도록 명령하였다. 이에 따라 제6중대는 1시 40분에 교암산을 출발해 3시 10분에 교암산에 도착했고 제7중대는 2시에 출발하여 3시에는 산발적으로 저항하는 2개 분대 규모의 중공군을 격파하고 가막동 능선 일대로 진출하였다. 그러자 중공군은 7시부터 포격과 동시, 개활지를 타고 공격을 가해왔고 이에 7중대는 포병지원과 6중대의 측방지원으로써 잠시 저지하였으나 17시 50분 기준, 공격해 온 중공군이 1개 대대 규모로 증강되면서 중대는 포위공격을 맞이해 결국, 진내사격 지원을 받지 못하여 전멸 직전에 놓이게 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 연대장은 대대장에게 제7중대의 철수를 명령했고 이에 철수 명령을 하달받은 중대는 제6중대의 엄호하에 세갈래의 능선으로 물러서서 그곳에서 주력과 합세하고자 철수로를 확보하기 위해 중공군과 치열한 육박전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18시 10분, 마침내 남쪽으로 철수하는데 성공했으며 이후, 21시에는 상산리에서 재편성을 하였다.

한편, 제7중대의 철수를 엄호한 제6중대 또한 대대장의 명령으로 능선에서 물러나 가고지로 물러섰고 그곳에서 전초진지를 확보하였는데 이때 중대를 추적한 1개 중대 규모의 중공군이 출현하여 이들과 교전을 벌였고 이를 격퇴한 후, 대대장에게 TOT사격을 요청하여 가막동 부근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다. 하지만 21시 30분쯤, 중공군의 맹렬한 포격이 가고지 일대로 집중되기 시작하였으며 22시 20분에는 동북쪽 능선을 타고 온 것으로 추정되는 1개 대대 규모의 중공군이 출현하여 제6중대의 정면을 향해 돌격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중대장 김교수 대위는 서둘러 진내사격을 요청해 이들을 모두 격퇴시켰는데 문제는 격퇴 직후, 1개 대대 규모의 중공군이 또다시 출현하여 동북쪽 능선으로 달라붙었고 또 2개 중대 규모의 중공군이 가막동으로 출현하였기에 중대는 진내사격을 다시 한번 요청해 이를 모두 격멸시켰다. 이후 중대는 제5중대와 합류하여 결전의 태세를 갖추게 되었다.

이렇듯 제2대대가 분전하는 동안 제2연대 제1대대는 전날과 마찬가지로 교암산을 계속 확보하고 있었으나 21시 30분부터 시작된 중공군의 대량포격과 더불어 22시 30분을 기하여 공격을 개시한 2개 중대 규모의 중공군의 공격으로 인해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이때 교전을 개시한건 제3중대 제1소대였는데 제1소대는 2개 중대 규모의 중공군을 가장 먼저 포착하여 선공을 가했고 이에 따라 포위 공격을 받기에 이르니 소대장은 서둘러 중대장에게 박격포 지원을 요청하여 이를 모두 격퇴시켰다. 하지만 격퇴 후에도 중공군은 계속 제2파, 제3파로 부대를 내보내 공격을 지속했고 결국 초접근 상태가 되어버려 소대는 백병전을 전개하게 되었으며 이 백병전에서 힘겹게 승리한 소대는 진지 재편성에 들어가 중공군의 다음 공격을 막을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이때, 교암산 북쪽에서도 중공군의 병력이 대거 출현하면서 중공군의 공격 인원수가 대폭 증강됐다. 이는 우측 8사단을 뚫은 중공군이 침투해 온 것으로 이를 본 대대장은 서둘러 중공군에게 TOT사격을 퍼붓도록 조치하는 한편, 교암산 정상을 담당하고 있던 제1중대 제1소대를 차출하여 제2, 제3중대 간격으로 진출시키도록 조치함으로써 교암산의 방어력을 더욱 더 강화시켰다.

즉, 이러한 조치 덕에 제1대대의 전황이 비교적 나아지기 시작하였다. 이때 제2연대 제3대대는 1개 중대 규모의 중공군을 마주해 이를 격퇴시키는 등의 전투만 있었고 별다른 전투는 없었다.

하지만 제19연대는 21시 30분부터 중공군의 집중 포격과 동시, 소대 규모의 중공군이 출현하여 제5중대를 향해 공격해 왔기 때문에 격렬한 전투가 전개되었고 이때 타격을 받은 제5중대는 즉각 박격포 지원으로써 이를 격퇴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기관총탄과 포탄이 제5중대 진지 내로 쏟아져 왔고 이윽고 1개 중대 규모의 중공군도 출현하여 백병전을 시도하였기에 결국 중대는 최후저지 사격을 요청해 공격해 오는 중공군들을 모두 박살내었다.

한편, 394고지에 설치된 전초진지를 확보한 제7중대 제3소대와 대대 수색대는 22시 30분부터 침공하기 시작한 1개 중대 규모의 중공군을 맞이하여 혈전을 벌이고 있었다. 여기서 중대는 대대로부터 진내사격을 수차례 요청하여 고지 일대를 초토화 하였으니 단 몇 시간만에 394고지 일대는 완전히 민둥산으로 변해버렸다. 그러나 끝내 중공군의 파상 공세에 밀려 394고지를 내주게 되었고 이후, 재빨리 후퇴하였다.
파일:rguigheugheghegoij (2).png

여기서 제1대대는 제3중대를 바고지 주진지에 배치하고 제2중대를 407고지 진지에 배치했으며 제1중대는 대대 예비대로 두게 하여 만반의 태세를 갖추었다. 그런데 당시 제3대대는 중공군의 주목표가 아니었기 때문에 별다른 교전 없이 자정을 맞이하였으며 그렇게 14일이 된다.

제19연대 제3대대가 무사히 넘기기 이전, 제7연대 2대대는 424고지 일대에서 혈전을 벌이고 있었고 수류탄전과 백병전을 거듭한 끝에 간신히 424고지를 확보한채 약 120명 사살이라는 전과를 세웠다. 이는 사단 내 거의 전 병력이 격렬한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는 것인데, 이때 새로 배속받은 제11사단 제9연대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당시 제9연대는 사단 작명 제25호에 의거, 오전 10시에 이남리로 약진한 다음, 제7연대의 좌일선 대대와 예비대대의 진지를 오전 6시부로 인수하고자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22시부터 중공군의 공세가 지향된 수도사단의 우일선 연대 즉, 제1연대가 중공군과의 격전 끝에 무너졌으며 이로 인해 측방노출이 생겨 위협을 받게 되자 제6사단장 백인엽 소장은 연대 주력으로써 측방을 방어하고 1개 대대는 주진지로 진입하도록 명령하였다. 이에 대해 제9연대장 김영하 대령은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렸다.
1. 연대는 7월 14일 06.00부로 제6사단 제7연대의 전투정면의 일부를 담당하려 한다.

2. 제2대대는 제7연대 제3대대의 주진지와 전투전초진지를 인수하라.

3. 제3대대는 제7연대 제3대대의 진지를 인계하고 주진지의 측후방을 엄호하라.

4. 제1대대는 선발대로서 하고개 일대를 점령하고 주력의 진출을 엄호하면서 사측방을 방어하라.

5. 제27포병대대 및 제11사단 중포중대가 연대를 직접지원한다.

이에 따라 연대는 23시에 제1대대를 선발대로 하여 무수히 낙하하는 중공군의 포탄세례를 뚫고 앞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사단장 백인엽 소장은 제9연대를 보내고 7월 14일 오전 6시 30분에 작명 제27호를 작성하여 전 부대에 하달했다.
1. 적은 제3사단 및 수도사단 정면을 돌파하고 있다.

2. 군단은 현 미주리선에서 철수한 다음, 새로운 저지진지를 점령하면서 반격을 감행하려 한다.​

3. 사단은 군단 방침에 따라 새로운 저지진지를 점령하면서 호기를 포착하여 반격하려 한다.

4. 제2연대는
가. 7월 14일 15.00을 기하여 미주리선에서 철수를 개시하고 19.00까지 주파리에 집결한 다음. 반격 태세를 갖추라.
나. 연대계획에 의거 현 접촉선에서 축차적으로 철수하여 제1집결지인 로동리에서 재편하는 즉시로 제2집결지인 주파리로 이동하라.
다. 철수경로는 상산리-능동-서운리-로동리-추동-주파리에 이르는 제17번 작전도로이다.

5. 제19연대는
가. 7월 14일 15.30을 기하여 미주리선에서 철수를 개시하여 19.30까지 주파리로 이동하는 즉시로 반격태세를 갖추라.
나. 연대계획에 의거 축차적인 철수를 단행하여 노동리에서 재편하고 주파리로 이동하라.
다. 철수 경로는 467고지(연거리남쪽 1.3km)남쪽에서 금성천을 도하, 죽동-서운리-노동리-추동-주파리에 이르는 제17번 작전도로이다.

6. 제7연대는
가. 7월 14일 15.30에 주저항선을 담당한 대대를 철수케하여 노동리에 집결시켜라.
나. 철수 경로는 가학리 서남쪽에서 금성천을 도하한 다음 이선동-노동리를 연하는 선이다.
다. 제9연대에 작전임무를 인계한 주력은 7월 14일 15.00까지 371고지-476고지-629고지-729고지-547고지를 연한 선에 저지진지를 점령하고 사단 주력의 철수를 엄호하라.

7. 제9연대는 7월 14일 15.00를 기하여 주저항선에서 병력을 철수시키되 일부 병력으로 15.00까지 547고지-두석동-하진현에 이르는 저지진지를 점령케 하라.

8. 제20포병단장은 7월 14일 15.00부터 자대계획에 의거 축차 철수하면서 주력의 철수를 엄호하되 18.00까지 주파리에 방렬완료하라.

9. 사단공병대대는
가. 7월 14일 15.00까지 능동-371(죽동서 남쪽)-서운리에 각각 1개 중대를 배치하여 제17번 작전로를 확보하면서 사단 주력의 철수를 엄호하라.
나. 1개 중대로써 각 연대의 도하점을 확보케하여 철수를 지원하고 철수완료 즉시로 교량을 파괴하되 그 시기의 결정은 대대장이 전결(專決)한다.

10. 헌병중대는 7월 14일 15.00까지 각 연대의 도하점을 비롯하여 죽동의 교차로 및 사단 집결지 진입로에 교통 통제소를 설치하여 철수부대를 유도하고 교통을 통제하라.

11. 협조지시
가. 각 연대는 일부로써 축차 접적을 유지하면서 적을 기만하고 그 근수를 지연시키라.
나. 상호지원에 힘쓰라.

12. 여(余)는 노동리-주파리-도로상에 배치하여 전적 사항을 통제하되 사단 CP는 7월 14일 17.00 이후 사방거리에 개설한다.

13. 통신은 현행 SOI에 의거한다.

그런데 이 명령문을 내렸을 시기, 사단 중앙 일선인 제19연대의 주저항선 일부가 중공군에 의해 돌파되었고 이에 사단장 백인엽 소장은 사단 예비대인 제19연대 제3대대를 호출하여 전선으로 내보내는 한편, 사단 수색중대를 상산리로 진출케 하여 교암산 남측을 엄호하면서 도하점을 확보하도록 지시하였다. 하지만 수도사단의 지속적인 후퇴로 말미암아 노출된 서측방의 위협이 증대해지고 있었고 또 우인접 8사단의 간극 사이로 침공한 중공군으로 인해 결국 교암산이 포위되게 되면서 사단장 백인엽 소장은 앞서 하달한 작명 제27호를 일부 수정하여 철수 시기를 앞당겼다.

이리하여 사단 주력은 저지부대가 미처 진지를 점령하기도 전에 철수를 개시하여 노동리에서 제7연대의 엄호하에 병력을 수습하고 16시 50분에는 주파리에 집결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때 하달된 군단계획 즉, 작지 제64호에 의거하여 사단장은 와이오밍선으로 가 그곳에서 저지진지를 점령하기로하고 작명 제29호를 하달하였다.
1. 사단은 와이오밍선 진지를 점령하고 7월 15일 18.00를 기하여 제11사단에 작전임무를 인계하려 한다.

2. 제2연대는 우일선으로써 주파리-장고봉-683고지에 이르는 저지진지를 점령 확보하라.

3. 제19연대는 좌일선으로써 683고지-적근산-926고지에 이르는 진지를 점령하라.

4. 제7연대는 현 저지진지에서 철수하여 추동 일대에 새로운 저지진지를 점령하고 제17번 도로를 확보하라.

5. 제9연대는 진현리 일대에 저지진지를 점령하여 적침을 저지하라.

단 원대복귀는 별명한다.

6. 제20포병단은 철퇴간의 엄호에 임하라.

이렇듯 사단장이 이러한 결단을 내리는 동안, 제2연대와 제19연대는 분전의 분전을 거듭하였으나, 끝내 고전을 면치 못하여 일부 진지를 완전히 내주고 말았다.

이때 제2연대 제2대대는 제5중대가 가고지 동남쪽 능선에, 제6중대는 가고지에 배치되어 각각 전초진지를 확보하고 있었으나 자정무렵부터 계속된 중공군 제199사단 주력의 파상 공격을 받았기 때문에 일진일퇴의 혈전만을 거듭하였다. 제5중대는 중대장 김종규 대위를 중심으로 거점을 확보한 채 거듭되는 중공군의 포위공격을 격퇴하는 시도를 지속하였다. 그러나 오전 4시에 중대의 무전기가 포격으로 인해 파괴되어 버렸고 이윽고 오전 6시에는 중공군의 병력이 1개 대대규모로 증강되어 상황은 더욱 더 악화되었다.

이에 중대는 중대가 가진 3.5인치 포 3문과 3정의 기관총을 총동원하고 또 일인당 지급된 100개의 수류탄등을 적극 사용하여 이를 격퇴하고자 했다. 하지만 일인당 지급됐던 100개의 수류탄은 이미 거의 사용되어 없어졌고 또 진지일각이 무너지면서 또다시 치열한 백병전이 전개되었다. 결국 상황이 최악으로 치닺게 되자 중대장 김종규 대위는 서둘러 진내사격을 요청하였다. 헌데 어찌된 영문인지 포병 사격은 즉각 전환되지 못함으로서 진내로 밀어닥친 중공군들이 파괴통을 든 채 호를 파괴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호에서 버티고 있던 중대원들도 전부 호에서 뛰쳐나와 중공군과 육탄전을 벌였고 그 결과 양측 사상자가 대거 발생함에 따라 제5중대장 김종규 대위는 서둘러 철수결정을 내리고 화기소대를 이끈채 개머리판과 총검을 휘두르며 혈로를 개척해 마침내 제1대대 진지로 철수하였다. 이때 뒤따른 병력은 불과 20명에 지나지 않았다.
파일:공격하는 중공군.png

한편, 제6중대는 그저 참호의 일각만을 의지한 채 중대장 김교수 대위를 중심으로 한 덩어리로 뭉쳐 자정무렵부터 무려 6차례에 걸친 중공군의 침공을 처절한 육탄전과 진내사격으로써 모두 물리치고 오전 6시부터 또다시 시작된 맹목적인 파상공격을 맞이해 사투를 거듭하였다. 하지만 5중대의 진지가 피탈되자 청색 신호탄이 계속 하늘에 오르더니 증강된 2개 대대규모의 중공군이 출현하여 3면으로 포위한 채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이에 중대장 김교수 대위는 '지금이야말로 결정적인 공격이다'라는 판단하에 진내사격을 요청했고 이후, 진내사격이 실시되자 2개 대대규모의 중공군은 순식간에 전멸하였다, 그러나 곧 2파, 3파 부대가 투입되어 몰려왔으며 중대장 김교수 대위는 다시 한번 무전기를 잡고 최후의 통신을 하였다.

'적은 참호를 파괴하고 있음 전포병의 무차별 포격을 바람.'

이 교신이 끊기자 중대의 무전기는 중공군의 포탄에 의해 산산조각 나버렸고 이로 인해 유무선이 완전히 두절되게 되었다.[43](06:30) 이후, 대대장은 전 포병의 진내사격을 요청하는 한편, 무전기를 붙들고 '김 대위!' '김 대위!'하고 김교수 대위를 불렀으나 이미 통신기가 박살난 터라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이윽고, 포병의 진내사격이 실시되어 가고지는 완전히 초토화가 되었으며 동시에 VT탄도 발사되어 제압사격을 집중하기에 이르니 차츰 총소리가 나기 시작하였으나 오전 8시쯤에는 그마저도 사라지면서 6중대는 결국 전멸하게 되었다.

이때 김두일 대대장은 훗날 당시의 전황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며칠 뒤에 가고지에서 탈출한 6명의 병사가 주력과 합세하였는데 이들의 말에 의하면 무전이 두절되어 완전고립된 상황아래 놓이게 된 중대는 적을 격파하면서 동굴로 진입하는데 일단 성공하였으나 그 특공조로 보이는 일단이 비오듯 쏟아지는 포화속에서도 엄호와 동굴을 폭파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이곳에서 앉아 죽을 수는 없다. 나가 싸우자!'라는 중대장의 호명일하에 중대는 중대장을 선두로 파괴된 입구를 헤치고 달려 나가면서 수류탄과 총검으로 사투를 거듭하였으나 중대장 김교구 대위가 장렬하게 전사하기에 이르자 전열이 흩어지면서 사상자가 속출하여 불과 10여명만이 남게 되어다. 이제는 전멸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 이들은 수류탄을 집중투척하는 즉시로 남쪽 계곡으로 굴러 떨어지면서 탈출하였는데 6명만이 주력과 합세하였다.
당시 제2대대장 김두일 중령

제2연대가 철수하기 이전, 제19연대 제2대대는 연대의 우일선으로 전날의 기세를 유지한 채 계암부근에서 주진지와 마고지에 전초진지를 확보하고 있었다. 이날 새벽 12시 10분 쯤 약 1개 대대규모의 중공군이 5중대 전면에 출현하여 공격을 가해왔다. 이에 제5중대는 포격요청을 해 격퇴하였으나 이들은 격퇴된 직후, 곧바로 제2중대 진지로 쳐들어가 일거에 중대 진지를 돌파한 뒤, 2중대 예비대인 제3소대 진지로 공격해 왔다. 하지만 제3소대의 분투로 인해 중공군은 잠시 물러섰고 제2중대와 제5중대는 그렇게 재편성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 하지만 그때 마고지 부근에서 중공군 약 1개 대대가 출현하여 돌격해 왔고 이로인해 재편성을 하기도 전에 백병전을 치르게 되었으니 그곳에서 버티고 있던 제5중대장은 중공군들을 향해 총검을 휘두르다가 그만 가슴에 총상을 입어 전사하게 되었다.

이후, 중대장 대리가 대신 제5중대를 지휘하면서 중대원들에게 돌격을 소리치며 처절한 사투를 벌였으나 오전 4시 기준 결국 완전히 분산되었다. 이렇게 마고지는 중공군에게 점령되었고 오전 5시 50분 중공군은 6중대가 주둔하고 있는 363고지로 몰려와 공격을 가하였기에 제6중대는 이들과 격전을 벌였다. 한편 증강된 1개 대대 규모의 중공군이 하천강을 따라 좌인접인 제1대대와의 간극을 통해 제6중대로 침투해 왔는데 이에 제6중대는 제3중대와 협동하여 제77, 제99 포병대대의 집중사격 엄호하에 전화력을 지향하였으나 이들은 포화를 뚫은 채 진지로 밀고왔으므로 오전 7시 30분에는 5개 중대규모가 주저항선 후방인 연거리와 가학리 중간 고지 일대를 점령했고 제1,2대대의 후방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이렇듯, 전방과 후방 모두 공격을 받게된 제6중대는 전면을 좁혀 사주방어에 임하였으나 중공군이 연막탄 지원을 쏘면서 금성천을 순식간에 도하했고 그 결과 중대는 3면으로 포위되어 공격을 받게 되었다. 이에 중대는 서둘러 진내사격을 요청하여 이를 격퇴시키려 했지만 2개 대대규모의 중공군의 격렬한 공세에 백병전이 전개되면서 이 역시 무위로 돌아갔다. 그리고 오전 8시 20분에는 완전히 분산되어 주진지를 상실하였다.

이때 우일선인 제7중대는 교암산 북쪽 능선에서 출현한 1개 중대 규모의 중공군과 사격전을 벌이고 있었는데 전투도중 제6중대의 진지를 돌파한 중공군들이 협격을 가해 옴으로써 중대는 제5,6중대의 지원하에 거점을 확보하고 사투를 이어나가게 하였다. 그러나 대대장이 부상 당하면서 상황은 점차 불리하게 전개 되었고 이후, 밀려난 뒤 대대는 제3대대의 엄호하에 병력을 수습하고 연거리 동남쪽으로 뻗은 교암산의 저지진지를 점령하여 중공군의 공격을 막으려 했으나 이 또한 중공군의 계속적인 공격으로 말미암아 결국 10시 30분, 철수를 감행하게 되었으니 그 직후 대대의 돌파구를 이용한 중공군들은 곧바로 인접부대가 맡은 교암산으로 몰려와 격렬한 전투 끝에 교암산 방어진이 뚫리게 되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고 말았다.

당시, 철수를 감행한 대대는 연대의 작명에 따라 와이오밍선을 점령, 이윽고 연대 중앙일선으로서 799고지-적근산을 잇는 저지진지를 확보함으로 며칠간의 전투의 종지부를 찍었다. 한편, 제1대대는 바고지에서 버티고 있다가 제2대대의 붕괴로 인해 후방으로 몰려온 중공군들에게 퇴로가 차단 당하게 생기자 즉각 주저항선을 버리고 후퇴했으며 다음날 오전 3시, 연대 우일선으로써 683고지-799고지를 잇는 진지를 점령하였고 마지막 제3대대는 467고지로 진출해 전부대의 철수를 엄호했고 이후 오전 11시 40분에는 퇴로를 차단한 중공군을 무찌르고 다음날 16시 30분, 주파리로 이동해 연대의 좌일선으로서 적근산-926고지를 잇는 진지를 확보하였다.
파일:19연대.png
19연대 전투 상황도
6시 20분에 수도사단과 연락을 한 결과 아(我)사단의 좌측방은 이미 4시 30분에 완전히 침투 당하였으며 적은 사단 측방으로부터 강력히 침투를 개시하게 되였다...(중략)...8시 20분 적은 완전 1개 연대로서 공세를 이 방면에 취하였으며 이어 제7연대는 포위를 당하게 되여 백병전이 전개되었다.
戰訓 第9號, 第二軍團司令部

한편, 교암산 철수 이전에 제7연대 제1대대는 전날에 이어 제3,1중대로써 금성천의 동성양안에 있는 395고지-374고지에 주진지를 점령케 했고 제2중대를 418고지 전초진지에 보내 확보케하여 중공군의 공격을 대비하게 하였다. 그런데 제2중대가 중공군으로부터 집중포격을 받고 곧 이어 인해공격까지 받기에 이르자 대대는 이를 즉각 격멸하기 위하여 04시, 제2중대 진지에 진내사격을 실시하게 하였고 이에따라 중대는 성공적으로 진지를 사수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중공군의 공격은 대대전면으로 확대되어 더욱 더 증강되었고 결국 버티다 못한 제1대대는 395고지로 철수한 뒤, 강력한 포병지원 하에 이들과 백병전을 벌여 중공군들을 모두 격퇴하도록 하였으나 이후, 또다른 중공군이 몰려오게 되자 포위망이 형성되었고 이에 대대장은 총검을 휘두르며 포위망 속에 탈출하게 되었으니 때는 햇빛이 뜬 오전 10시 20분이었다.

이리하여 제1대대는 주파리로 철수 후, 군단작명에 따라 연대의 우일선, 제2대대는 예비대, 제3대대는 좌일선으로 지정하여 제17번 국도를 방어하게 하였다. 한편, 이 시기 제9연대는 오전 6시부로 제2대대로 하여금 제7연대의 좌일선을 인수하도록 하였는데 여기서 제9연대 제2대대가 1개 대대규모의 중공군의 공격을 받으면서 치열한 전투가 시작되었고 이후, 오전 11시가 되자 중공군의 규모는 1개 연대로 증강되었으며 또 수도사단을 돌파한 중공군들도 다 같이 합세해 대대의 후방 퇴로를 차단하기에 이르자 결국 제2대대는 서둘러 진지에서 철수하여 하고개로 집결하게 되었다.

또, 인접부대인 제9연대 제3대대는 제7연대 제3대대로부터 진지를 인수 받은 뒤, 봉화산으로 가 그곳에서 중공군과 치열한 교전을 전개하였다. 대대는 이를 백병전으로써 해결하여 중공군을 격퇴시켰으며 이후, 제10중대를 봉화산에 배치시킨 다음, 제9,11중대를 475고지로 진출케하여 제7연대 3대대를 증원하게 하고 수도사단의 돌파구로 몰려오는 중공군들을 저지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오전 6시 회고개 일대에서 약 1개 대대 규모의 중공군이 공격을 가해왔고 이로인해 대대전체가 위험에 빠지자 진내사격을 즉각 실시하도록 하고 이들의 공격을 저지하였다. 하지만 오전 8시, 제1대대 진지를 돌파한 2개 중대의 중공군이 제2대대의 cp를 공격하고 후방을 위협하자 대대는 제10중대로 하여금 이를 격멸케 하고 475고지를 확보하란 지시를 하달하였으며 이에 따라 제10중대는 후방에 침입한 중공군을 몰아낸 다음, 475고지를 확보하여 주력과 연결을 유지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때 제9연대장 김영하 대령은 제2대대의 상황을 보면서 연대의 후방이 위험해지고 동시에 사단장의 철수 명령이 앞당겨졌기 때문에 결국 오전 11시 철수하라는 명령을 하달하고 오후 12시, 제3대대는 철수하는 대대를 엄호한 뒤, 21시 두목 부근에 집결하여 대기상태가 되었다. 제2대대는 중공군의 저지하면서 봉당덕리를 거쳐 수도사단의 저지선과 연계해 진현리-633고지 선으로. 물러난 제9연대는 7월 15일 18시부로 제6사단 소속에서 해제됨에 따라 제11사단으로 원대복귀하였고 제9연대는 원대복귀 직후, 곧바로 반격작전에 투입하기에 되었으니 그것은 바로 삼현지구 반격작전이었다.
파일:19연대 철수.png
9연대의 전투상황도
3.6.1.4. 교암산 포기와 6사단의 전과
파일:egkopekgeo.png
7월 14일 교암산 철수 경과도
이렇듯 제2연대 제2대대 제6중대가 전멸하였을 무렵, 제2대대 제7중대 또한 중공군의 공세에 휘말려 연대작명에 따라 교암산으로 진출 및 제1대대에 배속되어 있었다. 여기서 우인접 제8사단 제10연대의 765고지가 중공군에게 돌파당하여 그 돌파구에서 중공군이 쏟아져 나왔고 이로인해 중대는 재빨리 동남쪽 능선 상에 전초진지를 점령하고 동측을 엄호하게 하였으니 사실상 교암산 일대는 이 시기를 기점으로 중공군에 의해 포위 직전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이후, 교암산 일대를 방어중이던 제1대대가 2개 대대 규모의 중공군과의 전투로 인하여 진지가 모두 붕괴되어 포위당하게 되었고 결국 제1대대장은 연대장에게 교암산 철수 요청을 전하게 되었다. 이때 연대장은 대대장에게 요청을 받는 즉시 사단장 백인엽을 찾아가 교암산 철수 문건을 제시했고 이윽고 승낙을 받게 되자, 연대장은 그 즉시 대대장에게 연락해 '오전 11시 20분을 기하여 철수하라'는 명령을 하달하였다. 그 후, 약속시간인 오전 11시 20분이 되자 제1대대는 제2중대를 선두로 중공군과 백병전을 하면서 포위망을 헤쳐 602고지를 점령했고 그곳에서 철수중인 제2대대와 제3대대를 만나 이들과 합세해 금성천을 건너 12시 50분, 노동리에 도착 후, 계속 행군을 하여 16시에는 마침내 사단 집결지인 주파리에 도착하였으니 교암산은 결국 중공군에게 넘겨주고 말았다.[44]

이때 사단은 오전 10:30~11:30 사이에 교암산에 있는 1대대 및 3대대를 상호 엄호 하에 철수시켰고 연대는 수색중대의 엄호로 금성천 교량을 건너 오전 12시 50분에 부대를 수습한뒤 오후 4시에는 사단 집결지인 주파리에 도착한다. 그 후, 사단은 7월 15일 여명을 기하여 제2연대는 우일선으로, 제19연대는 좌일선으로 지정하여 주파령-장고봉-683고지-799고지-적근산-926고지에 이르는 와이오밍 선에 각각 배치하였다. 한편, 사단의 임시 배속된 제9연대는 7월 15일 18시 부로 사단소속에서 해제되어 제11사단으로 원대복귀했고 제7연대는 17번 도로를 방어하면서 진격로를 확보하고 있었다. 하지만 제7연대가 제8사단에서 이후, 제5사단으로 배속이 변경되자 제2,19연대는 제5사단의 진지를 인수하기 위해 17일 오후 2시, 당거리로 이동하였으며 19일 오후 12시에 사단은 제2연대를 우일선으로 지정, 제19연대를 좌일선으로 지정해 추동-구대리-양지촌-여내곡을 이르는 아이슬란드 선상의 진지를 제27,35연대로부터 인계하고 제19연대를 462고지 일대로 진출시켜 공격하게 하는 한편, 원대복귀한 제7연대를 사단에선 예비대로 지정해 미주리선으로의 진격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종전을 앞두고 무리한 희생을 원치않았던 미 제8군이 아이슬란드 선만을 고수한다는 방침을 발표하면서 결국 반격을 하지 못한 채 휴전을 맞이하고 말았다.[45]

이 전투에서 6사단이 거둔 전과와 손실은 다음과 같다.
구분 사살 추정 살상 포로
2연대 3,500 1,900 12
7연대 861 1,500 12
19연대 2,409 2,169 18
9연대 150 170
6,920 5,739 42
구분 전사 부상 실종
2연대 339 296 119
7연대 93 449 70
19연대 287 407 219
9연대 12 28
731 1,180 408

3.6.2. 8사단의 지형능선 전투

파일:8tkekswjsxn.png
1. 우리는 대한민국 국군이다. 주검[46]으로써 나라를 지키자.
2. 우리는 강철같이 단결하여 공산침략자를 처부시자.
3. 우리는 백두산 영봉에 태극기 날리고 두만강수에 전승의 칼을 씻자.

國軍盟誓
당시 지형능선은 금성 돌출부 선단지역을 방어하고 있는 양개 사단중 우익 8사단 지역 중앙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 당시 8사단의 주저항선은 이 지형능선을 중심으로 대략 +자형으로 형성된 능선에 편성되어 있었으며 그 중심부의 교차지점에는 690고지가 위치하고 있었고. 그 북동쪽에는 지형능성이 있으며 동쪽에는 612고지 능선이 위치, 남쪽에는 605고지-585고지-479고지 능선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서쪽에는 765고지가 있고 그곳을 넘으면 교암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뻗어 있었다. 이에 사단은 좌일선 10연대를 765고지 능선에, 우측의 16연대를 615고지에 배치하였고 사단의 예비대인 21연대는 585-479고지에 배치하도록 조치를 취했다.[47]
파일:1312R9IR2I9.png
3.6.2.1. 중공군과 국군의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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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당시 8사단과 대치한 중공군은 67군 소속의 199사단 및 제60군 예하 181사단이었다. 이들중 199사단은 거의 완편이 된 사단이었고 부대들 중 50~60%가 고참병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병력또한 약 10,200여명으로 추산되었다. 그러나 181사단은 장기간의 전투로 인해 병력수준이 5,000명대였고[48] 그중의 절반이 신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또 201사단도 3사단과 격돌한 관망산 전투로 인해 기존 11,000여명에서 9,500명대로 줄어들어 신병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3.素質
201師及181師는 長期间战斗에서 莫大한 人的損失을 当하여 그 大部分은 새로 補充된 新兵이었으며 199師는 約, 50~60%는 古兵으로서 3個師中 가장 战斗力이 强하였다.

해석:
3.소질
201사 급(및) 181사는 장기간 전투에서 막대한 인적손실을 당하여 그 대부분은 새로 보충된 신병이었으며 199사는 약, 50~60%는 고병으로서 3개사 중 가장 전투력이 강하였다.
<金城遠南地區撤收及別偊地區反击作战>, 3~4p
3.素質
中共軍 201師는 投入初期에 約 70% 以上이 古兵으로 相当한 戦斗力을 保有하고 있었으나 長期间戦斗에서 員大한 人的損失로 말미암아 大部分이 補充된 新兵으로 編成되어 있었음. 然而나 199师团은 半數以上이 古兵으로서 戰斗力 强하였다고 보나 殆半이 無學者로서 其의 実力은 稀薄하다함.

해석:
3.소질
중공군 201사는 투입초기에 약 70% 이상이 고병으로 상당한 전투력을 소유하고 있었으나 장기간 전투에서 원대한 인적손실로 말미암아 대부분이 보충된 신병으로 편성되어 있었음. 연이나(그러나) 199사단은 반수 이상이 고병으로서 전투력이 강하였다고 보나 태반이 무학자로서 기(그)의 실력은 희박하다함.
戰鬪詳報, 步兵第八師團, 5p

다만 포병은 절대 무시할 수가 없었는데 당시 중공군은 8사단을 공격하기 위해 박격포 270문과 야포 116문을 끌고왔고 각종 포격을 통해 8사단을 완전히 뭉게버릴 작전이었다.[49]

한편 8사단의 편제는 당시 8사단에서 적은 '金城遠南地區撤收及別偊地區反击作战'을 보면 알 수 있는데 당시 8사단의 편제는 다음과 같다.
장교 561명
사병 11,224명
105mm 3개 대대
155mm 1개 대대
4.2인치 박격포 1개 중대
전차 2개 중대

금성전투 직전 8사단의 인원수는 총 11,224명으로 편제되어 있었고 이들중 경상도 출신이 가장 많았다. 이 시기 사단 내 고참병과 신병의 비율은 먼저 신병의 경우 40%를, 고참병의 경우에는 60%로 고참병이 약 20% 정도 앞서고 있으나 이는 6월 공세 이전과 비교해보면 심각하게 낮은 수치이므로 전투력에 막대한 지장을 주었다.[50]. 한편 이 시기 8사단은 주저항선 진지 공사를 거의 끝낸 상황이었는데 당시 8사단이 미주리선에 신설한 교통로의 길이는 240500m에 달하며 이와 동시에 방어선에 구축한 산병호와 탄약호 역시 총 3,136개로 8사단이 7.13공세때 중공군의 초기공세를 막을 수 있게하는 원동력이 되어 주었다.

3.6.3. 201사단의 공격

7월 13일 오후 10시, 8사단 정면에 중공군의 포격이 실시되어 사단 내에 있는 거의 모든 유선이 두절되자 사단은 혼란 상태에 빠지고 만다.이후 중공군은 포격을 끝내나마자 약 1개 사단규모를 8사단 정면에 돌진시켰고 4개 사단을 8사단 진지로 투입시켰다. 이로써 8사단은 1개 군단급 병력을 맞이하게 되었으며 116문의 화포와 207문의 박격포의 공격을 받으면서 대혈전을 치르게 된다.
3.6.3.1. 16연대의 상황
이 당시 615고지를 방어하고 있었던 8사단 16연대 3대대 9중대는 오후 10시 20분에 1개 대대규모의 중공군을 조명탄으로 관측하였는데 이들은 4렬 횡대로 전진중이었고 강을 넘으며 오고 있었다. 하지만 이때 강은 폭우로 인해 강물이 넘쳐 흘러 도하하는데 굉장한 어려움을 겪었지만 압도적인 병력이 있었기에 비교적 순조롭게 접근하고 있었다.

그러나 1,9중대는 곧바로 화력을 집중시켜 최일선에 있던 중공군 병력을 몰살시켰고 동시에 제1,3 양대대의 화기중대도 합세하여 중공군을 모두 분쇄시켜 버리는데 성공한다. 이후 16연대는 자정때까지 연대의 진지를 지켜내는데 성공하였지만 지형능선 좌측을 방어하던 10연대는 엄청난 피해를 입으며 싸우고 있었다.
3.6.3.2. 10연대의 전황
1953년 7월 13일, 오후 10시, 765고지-695고지 능선을 방어하던 10연대는 중공군의 포탄을 얻어 맞으며 유선이 두절되었고 동시에 연대 정면에 약 1개 연대규모의 중공군이 출현하여 690고지쪽으로 들어가려하자 교전이 일어났는데 이중 2개 대대규모의 중공군은 조명탄으로 인해 밝아진 저격능선 능마루를 향해 남하하고 있었다.

이에 690고지에 배치된 FO는 제50포병대대의 직접지원과 제75포병대대의 화력우선을 유도하였고 동시에 제8박격포 중대 1개 소대도 즉각 포문을 열어 접근로 일대를 포격하였으니 그 굉음과 섬광은 저격능선을 가득매워 천지를 뒤집어 놓는듯 하였다.

아무튼 이 포격을 시작으로 10중대의 각종 진지에서 중공군이 출현하여 중공군과 백병전을 벌였는데 이중 1소대는 자정 직전까지 싸워 약 10명의 중공군을 생포하였고 수없이 많은 중공군의 시체를 5중 철조망 부근에서 발견한뒤 철수하였다. 그러나 소대는 가는도중 중공군의 공격으로 철수는 지연되었으며 동굴속에서 약 이틀이라는 시간을 보낸 뒤에야 간신히 금성천을 건너 살아 돌아오는데 성공한다.

한편 연대의 중앙에 있는 765고지-720고지에서도 중공군이 출현하여 병력이 점차 증강되어가고 있었는데 이중 특히 1중대 진지에서 중공군 병력이 빠르게 증강되어 가고 있었다. 이때 대대 정면에는 세경을 사이에 두고 직거리 700m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적진 650고지가 마주보고 있었는데 이곳에서 제1선 부대의 공격을 엄호하는 포격이 굉장히 치열하였다.

이에 대하여 제2,1대대 주력은 화기중대의 화력으로 대동하는 한편, 돌출능선의 좌우, 양측면으로 공격하는 중공군을 보병화력으로 집중하였고 이윽고 진지 주변에 설치한 네이팜 지뢰로 몰려오던 중공군들을 모두 녹여버렸다. 이 네이팜 지뢰는 한번 터질때마다 유리조각과 쇠가루를 같이 휘날렸으며 이걸 맞은 중공군들은 비명도 지르지 못한채 바로 시체가 되어버리고 말았고 이후 연대 주저항선 정면에는 네이팜 지뢰를 맞아 검게 그을려진 중공군 시신과 탄내만이 가득하였다. 그러나 이럼에도 불구하고 중공군의 인해공격은 첩첩히 이어지고만 있었고 결국 연대는 서둘러 사단장의 시급한 조치를 건의하였다.

이때 연대장이 건의한 조치란 사단의 예비병력중 1개 대대를 증원해달라는 요청이었고 이는 예비대가 부족한 10연대 입장에서 꼭 필요한 조치였다. 그러나 이 당시 사단장 송요찬 소장은 군단장과 대화를 나눈 후 철수를 하도록 명령을 내리는데 이때가 1953년 7월 14일이었다.

당시 사단 명령문은 180호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군단은 아이슬랜드 선에서 저지하고 반격으로 이전할 것이다.
2.사단은 군단명령으로 지연작전을 속행하면서 아이슬랜드 선의 일부를 점령하려 한다.

3.10연대
가.14일 13.00에 현주저항선에서 철수하라
나.동일 17.00까지 17번 도로를 경유하여 백암곡으로 집결하라

4.16연대
가.14일 14.30에 현주저항선에서 철수하라
나.연대예비로써 640고지 및 606고지에서 제10연대의 철수를 엄호케 하라
다.동일 18.00까지 집실리를 경유하여 596고지로 집결하라

5.21연대
가.현저지진지에서 제16연대의 철수를 엄호하라
나.14일 18.00까지 세현리를 경유하여 교동으로 집결하라

6.사단수색중대는 14일 18.00까지 428고지에 집결하여 사단정보참모의 지시를 받으라

7.제8중박격포 중대
가.14일 11.30에 현진지를 철수하라
나.479의 남사면에서 제10 및 제21 양 연대의 철수를 엄호하라
다.동일 15.00까지 461고지의 정사면에 집결하여 제16연대를 직접지원하라

8.공병대대
가.14일 11.00에 각 1개 소대를 각 연대에 배속케 하라
나.철수부대가 통과하는 즉시로 도로요부와 교량을 파괴하라

9.협조지시
가.각 연대는 통제선을 통과하는 즉시로 배속부대를 원대 복귀시켜라
나.각 연대는 금성천 북쪽에서 최대한의 지연전을 실시하고 포, 장비의 기동을 기동을 엄호 하라
다.철수시에는 최대한의 탄약을 휴대하되. 잉여의 탄약은 철수 전에 사소토록 하라
철수시에 휴대하기 어려운 장비 및 비재는 장교이상의 지시에 따라 매몰 또는 파괴등 적의조치토록 하라
마.엄호선에서 최대한 출혈을 강요하라
바.철수간의 통신을 유지하라
사.집결지까지 철수를 끝내는 즉시로 탄약 및 식량을 점검하고 병력 상황을 보고하라
아.통제선은 광대곡-죽동간의 금성천변으로 한다

10.사단의 전방지휘소는 주파령에 후방지휘소는 주막거리에 각각 재한다.
3.6.3.3. 7월 14일
그렇게 하루가 지난 7월 14일이 되자 8사단의 전황은 더욱 더 안좋아졌고 10연대와 16연대는 아주 급박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3.6.3.3.1. 16연대 전황
여기서 16연대장은 612고지 OP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사단장의 철수명령이 하달되자 2가지의 관점으로 전황을 우려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주저항선에서 철수하게 될 이날 14.30까지 적을 저지할 수 있겠는가?
둘째, 연대의 예비인 제2대대로써 제10연대의 철수를 충분히 엄호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연대는 현 전황을 보건대 단호한 결단을 서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리하여 연대장 안병건 대령은 오전 1시 30분으로 각 대대의 요지명령을 다음과 같이 하달하였다.
1.연대는 사단 명령으로 현주저항선을 14일 14:30까지 고수하려 한다.
2.제1대대
2.1 05:00까지 전투 전초 진지의 병력을 수용하여 주진지의 화선을 강화하라.
2.2 14:30에 현주진지를 철수하되 1개 중대를 제2대대에 배속케 하라
3.제2대대
3.1 13:00에 철수하는 제10연대를 엄호하라
3.2 제1대대의 1개 중대를 배속받아 제3대대의 철수를 엄호하라
4. 3대대
4.1 06:00까지 전투 전초 진지의 병력을 수용하여 주진지의 화선을 강화하라.
4.2 15:00에 현주진지를 철수하라
5.각 대대는 18:00까지 596고지로 집결하라
6.각 대대는 철수기간중 제21연대의 엄호를 받을 것이다.
7.전방지휘소는 15:30부터 제2대대 OP에 위치할 것이다.

이 명령은 유선으로 하달되었는데 각종 포탄이 끊임없이 낙탄하여 유지가 어렵게 되자 연대의 통신대는 연대OP와 각 대대의 OP와의 통신을 유지하기 위하여 수많을 사경을 거쳐야 했다.

한편, 1대대의 전초진지에서 끝까지 버티고 있던 1중대는 몰려오는 중공군을 수차례나 격파해 시체를 쌓아 올렸고 이중 김태열 일들중사를 필두로 하는 잠복조는 70m 앞쪽에 매설된 네이팜 지뢰 3개를 터트려 소총사격을 가하다 보니 중대 주진지로 복귀가 늦어졌고 결국 조장 이하 전원이 일환이 되어 중공군의 측방을 그냥 뚫어버린뒤 본대로 복귀하였다.

다만 3대대 9중대 예하 3소대 진지에서는 중공군의 화력이 가중되고 있었는데 이는 좌인접 10연대 10중대가 전날 23시에 690고지를 빼앗겼고 이후 오전 1시에 탈환하였으나 다시 빼앗기게 됨으로서 정면에 있던 중공군이 612고지를 향하여 일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따라서 연대장은 즉시 2대대를 전선으로 보내려 했으나 이미 2대대는 사단의 명령에 따라 10연대의 철수를 엄호하게 계획되어 있었음으로 결국 연대의 간절한 부탁에도 2대대는 오지 않았고 연대는 예비대도 없이 철수 시간인 14시 30분까지 중공군의 압도적인 병력을 버텨내야만 했다.
3.6.3.4. 10연대의 전황
한편, 전날에 사단으로부터 예비대를 받으려 했던 10연대는 사단의 철수계획에 따라 예비대 관건은 후순위로 두었고 현주저항선 유지를 위하여 13시까지 690고지를 점령해야 했다. 이는 전날에 690고지가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불리하기 때문에 3대대 10중대가 역습을 위한 철수를 하였음으로 중공군에게 점령당했기 때문이었고 이를 위해 10연대 3대대장은 10중대의 철수를 9,11중대로 엄호하게 하도록 하고 그 화력의 일부를 690-660고지 능마루로 집중케 하였다. 이 고육지계는 적황히 적중했고 대대는 서둘러 9,11중대 일부 병력을 내보내 오전 1시에 690고지 정상을 탈환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765-720고지는 연대병력을 배치시킬수 없다는 점과 6사단 2연대의 교암산 전투가 더욱 더 치열해지고 중공군의 인해공격이 도저히 끝날기미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더 이상 버틸수가 없었고 결국 오전 1시 30분에 연대장은 중공군과 치열한 백병전을 벌이던 1,2대대를 765-720고지에서 철수하도록 명령을 내린다. 또한 이때 3대대의 690고지도 다시 피탈됨에 따라 철수하였다.

바로 이때, 사단장 송요찬 장군은 전선상황이 매우 긴박하게 전개되는 걸 보자 군단 명령문 제5호를 참조하여 철수시기를 서둘러 단축시켜야 한다고 판단했고 이날 오전 11시에 사단 명령문 180호를 하달받은 연대들에게 다음과 같은 수정한 명령문을 내린다.
1.사단은 군단명령으로 신주저항선의 점령을 7월 14일 15.00까지 완료하려 한다.
2.제10연대는 14일 11.30에 현주저항선에서 철수하라.
3.제16연대는 14일 12.00에 현주저항선에서 철수하라.
4.제21연대는 14일 12.00부터 부사단장의 지휘를 받으라 .
5.사단수색중대는 14일 15.00까지 428에 집결하라.
6.제8중박격포중대는 14일 09.00에 현진지를 철수하여 엄호임무를 수행하라.
7.공병대대는 14일 10.00에 각 1개 소대를 각 연대에 배속케 하여라.

한편, 16연대는 중공군의 격퇴시켰기에 전황은 잠잠했으나 일출이 되자 주보급로의 여문리 일대에서 중공군이 출현하고 21연대 진지 측방을 공격할 수 있는 집실리에서도 중공군이 출현하였기에 연대의 퇴로가 차단될 위기에 놓이자 10시 30분에 1대대를 3대대의 엄호하에 철수를 하도록 조치하였다. 여기서 10연대또한 720고지를 1대대로 하여금 견지하도록 철수를 엄호했으며 11시 30분에 3대대를 철수, 중앙 제1선인 2대대. 좌일선 1대대 순으로 철수를 시켜 16연대의 엄호하에 철수를 하였다.
14.0115. 10연대 9중대는 690고지에 대하여 반격을 감행하였으나 성공을 보지 못하고 동일 08.40경에는 적 1개 대대가 CT874449 지점에 침투하여 도로가 차단되었으며 동 10.35에는 수미상의 적이 계속 CTS66445 지점까지 침투되어 CT875463 지점에 있는 아(我) 10연대 3대대 OP가 포위 당하였다.
作戰詳報, 第二軍團司令部, 274p

3.6.4. 별우지구 철수작전

군단장이 철수명령을 하달하였을 때 8사단의 상황은 정말로 좋지 못하였는데 그 이유는 중공군이 17번 국도를 차단하기 위하여 별우지구로 몰려왔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8사단 16연대는 지역 후방 예비대대 지역 동측방에 위치한 535고지에 중공군 1개 중대가 출현하여 이를 막기위해 수색중대를 파견했기에 이들과 결전을 벌여 치열한 난투극이 전개되었으며 11시 10분에는 21연대 3대대 지역인 504고지마저 상실했기에[51] 8사단은 두 감제고지 479, 504고지 중 우측고지를 잃어버리게 되어 큰 위기에 봉착하고 만다.

이때 부사단장은 10연대의 철수를 이끌어 이들을 주파리로 향하게 했으며 16연대는 11시 50분부터 3대대를 철수, 이후 1,2대대를 순서대로 철수하였고 14시 30분에는 금성천 남안 596고지를 연한 저지선을 점령하기 위하여 집결지로 지정한 밤성골에 집결하기 시작하였다. 마지막으로 철수하게 될 21연대는 양개 주저항선 연대의 철수를 엄호한 다음 이들을 추격하는 중공군과 맞서 지연전을 펼쳤기 때문에 많은 시간을 소모했으며 중공군 3개 대대, 1개 중대의 공격을 모두 막아낸 다음 사단의 모든 부대가 철수한걸 확인하고 18시에 금성천을 도하하여 점령할 진지인 주파령을 향해 17번 도로를 따라 계속 남하하였다.

하지만 17번 도로는 8사단 포병을 비롯한 4개 사단의 포병과 한미 지원부대의 차량등 3열로 늘어진 차량들로 꽉 매워졌으며 이들 차량 대열은 도보행군보다 느렸고 곳곳에서 헌병들이 나와 낙오자 수습과 차량 정리를 하였지만 봇물 터지듯이 밀려오는 철수대열을 통제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만약 중공군이 여기서 더 내려왔다면 제2의 현리전투가 이곳에서 재현되었을 것이며 수많은 병사들이 분산되어 사라졌을 것이다.

또한 실제로 이를 증명하듯 밤성리에 집결한 16연대 병사들이 분대 규모의 중공군의 기습을 받았으며 16연대 병사들은 마치 개미떼 흩어지듯 분산되어 사방거리를 향해 도망을 쳤다. 약 1개 연대 규모의 병력이었지만 장기간의 전투로 사기가 크게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연대는 다음날 오전 9시, 사방거리를 지나 3km 남쪽에 있는 부촌리에 집결하였는데 이때 집결한 병력은 겨우 600여명에 지나지 않았다.

3.7. 신주저항선 구축과 군단의 반격

이렇듯 중공군의 7.13 대공세로 국군은 금성천에서 후퇴하게 되었고 7월 14일, 8사단의 예비연대마저 금성천을 도하하면서 결국 금성 돌출부는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이에 미 제8군 클라크 대장은 14일에 미 제187공수연대 전투단을 한국에 파견해 9사단의 진지를 일부 인수하여 수도사단의 철수를 엄호했고 동시에 수도사단의 좌측방을 강화시켰다. 이어 클라크 군단장은 예비대인 11사단을 2군단에 배속시켜 6사단과 교대를 하도록 지시함과 동시에 3사단의 책임지역을 5,8사단에게 인계를 시키도록 지시하였다. 그리고 그는 예비가 된 3,6사단을 와이오밍선에 배치하도록 조치하였고 드디어 중공군의 공세를 저지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처음 구축된 신 주저항선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일이었기에 군단장은 15일에 6,8사단을 와이오밍선으로 보냈고 제2저지선을 와이오밍으로 지정하도록 마음을 먹는다. 다만 6사단을 제외한 8사단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1개 연대뿐이었는데 그 이유는 21연대가 신주저항선에 있고 16연대는 후방으로 철수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군단장은 6사단의 7연대를 8사단에 배속시켜 2개 연대를 와이오밍선을 보내도록 조치한다.

이리하여 6사단은 7월 15일, 19연대를 좌일선에 2연대를 우일선으로 보내어 적근산-장고봉-주파령을 잇는 주파령에서 와이오밍선을 점령하였다. 또한 8사단은 10연대를 좌일선에, 군단의 조치로 배속받은 7연대를 우일선으로 보내여 645고지-895고지-1048고지-915고지를 잇는 주파령 이동 지역의 와이오밍 선을 점령하였고 끝으로 5사단의 1개 연대를 8사단과 연결해 785고지를 연한 횡격실 능선에 배치함으로서 와이오밍선 구축을 완료하였다.

하지만 8사단이 총반격으로 전환되었기에 군단장은 8사단이 담당할 지역을 3사단 예하 2개 연대에게 교대시켰고 이에따라 3사단은 22,23연대로 와이오밍선을 인수한 뒤 18연대로 하여금 와이오밍 선에서 전방의 백암산으로 이어진 능선에 추진 배치하도록 하였다.여기서 8사단으로 배속이 변경된 6사단 7연대는 또 한번의 배속 변경 명령이 떨어졌기에 8사단에서 5사단으로 가 백암산 탈환에 선봉으로 서게 된다.

3.7.1. 군단 총반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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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군단의 총반격 상황도
이렇게 와이오밍 구축을 완료한 군단은 중공군의 상황을 파악하여 보았는데 중공군은 금성 돌출부를 빼앗았기 때문에 더 이상의 공세를 가하지 않고 병력손실을 보충하고 있었다. 이날 미8군 사령관 테일러 장군은 정일권 군단장에게 "다음날(16일)부터 총반격을 개시하여 간진현-금성천 선을 회복하라"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는 기상이 나아지면서 항공지원이 원활하게 가능해지고 중공군은 공세 당시부터 시작된 폭우로 인해 보급을 추진하지 못하여 더 이상 진격할 수가 없는 공세종말점 상황을 고려해서였다. 따라서 군단장은 군단의 총반격 계획을 수립하면서 좌인접 미 제3사단의 북방으로 돌출된 전선과 비교하며 위도상으로 8km나 쳐져있던 군단의 우익사단(5사단) 전선과의 사이에 배치된 2개 사단(11,8)의 진격을 어떻게 해야할지를 논의하였다.

여기서 군단장은 11사단에게 미 제3사단의 우인접 연대로 철수중인 제11사단의 좌일선 연대 9연대를 미 제3사단의 주저항선과 동일한 위도상에 있는 633고지를 확보하라고 지시하였고 이후 그는 군단의 신 주저항선 구축계획에 따라 15일 아침에 633고지의 우측방에 약 3.5km 정도 처져있는 750고지-567고지로 진출한 11사단의 우일선 연대 13연대를 633고지와 같은 위도상의 602고지(삼현)-425고지(별우)로 진격하게 하도록 조치하였다.

이어, 군단장은 제11사단에 우인접한 8사단장에게 우익사단 5사단과의 협조점을 기점으로 하여 예하 연대를 좌익사단(11사단)의 진출선에 맞추어 사선을 그리며 진출하도록 지시하였고 이후 5사단장을 불러 16일 6시에 총반격을 개시해 공세 이전의 북한강 서안진지를 탈환하도록 지시하는 것을 끝으로 반격계획 수립을 끝냈다.

3.7.2. 5사단 백암산 지구 반격작전

7월 15일, 5사단은 와이오밍선으로 철수하였고 이에 중공군 179사단이 백암산 서쪽 백암골로 공격해 오자 백암산은 완전히 포위된게 된다. 따라서 사단장은 주력부대를 와이오밍선에서 재정비해 반격을 준비하도록 명령을 내렸고 결국 1051고지 및 백암산은 중공군에게 넘어가고 말았으며 군단장 정일권은 이를보고 더 이상의 후퇴는 용납하지 않는다는 엄명을 전부대에 하달한다. 이에따라 5사단은 반격을 준비했으며 여기서 사단장이 교체됨에 따라 작전은 또 한번의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이때 부임한 사단장이 바로 장도영 장군이었는데 그는 용문산 전투에서 크게 활약해 중공군을 파로호에서 전멸시킨 전력이 있는 중공군이 두려워하는 장군이었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전황을 파악한 뒤 백암산과 1051고지를 탈환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명령을 하달하였다.
1.사단은 현 전선을 고수하면서 일부의 병력으로 다음 목표 1-2-3-4를 탈환하려 한다.
1. 1. 1 백암산. 2 백암산 북쪽의 1070고지, 3 1051고지, 4 1051고지의 서북쪽 돌출능선
2.제27연대는 16일 06시를 기해 1개 대대병력으로 목표 1-2를 탈취하라.
3.제35연대는 16일 06시를 기해 1개 대대병력으로 목표 3-4를 탈취하라.
4.제36연대는 현 임무를 계속 수행하라.

5사단 35연대는 876고지 공격 임무를 2대대에게 부여했으며 2대대는 6중대와 7중대를 좌우일선으로 하고 5중대를 예비로 두어 목표 3 고지인 1051고지를 향해 출발했고 목표의 동쪽으로 기습해 들어왔기 때문에 저항없이 신속하게 돌격선을 점령하여 총검돌격을 통해 12명을 사살 및 한명을 포로로 잡아 1051고지를 중공군으로부터 몰아내고 11시 50분에 고지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은 12시 30분경에 대대규모로 반격해 들어왔으며 이때문에 4 고지 공격을 일시 중단하고 이를 막고자 4고지에 향하던 화력을 3고지에 집중하도록 조치하였고 사격을 통해 막으려 했으나 점차 시간이 지나더니 그 규모가 커져 양 중대가 중공군에게 완전히 포위되었다. 게다가 5중대가 맡고있던 876고지도 공격을 받게 되어 연대의 공격지속이 어럽게 되자 연대장은 임무를 전환하여 876고지와 1051고지 사수를 지시하였고 목표 4고지 공격임무를 제1대대에게 부여하였다.

하지만 이날 2대대는 중공군의 병력 상태를 파악하지 않은채 단독 공격을 감행했으며 이때문에 스스로 적진에 고립되게 되었다. 결국 연대는 이들을 지원하러 갔지만 이때는 너무 늦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5중대의 876고지가 중공군의 공격을 받아 40분간의 혈전으로 무너지게 되었다. 또한 대대주력 역시 1051고지 공격이 매우 어렵게 되었으며 1대대는 목표 4고지를 공격했으나 수상리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다 공격이 돈좌되었다.

이에 사단장은 시급한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가 없었고 사단장 장도영은 16시를 기해 공격을 중단시켜 수상리 부근에 부대를 집결시킨 뒤 다음 전투에 대비하란 지시를 제35연대에게 하달하였다. 따라서 연대는 2대대를 1051고지에서 사동을 통해 수상리로 이동하란 지시를 내렸고 1대대를 사동 남쪽으로 급파해 2대대를 엄호하도록 조치하였다.

한편, 좌일선에서 백암산 부근의 목표 1-2를 담당한 27연대는 이 임무를 2대대에게 부여하여 2대대를 1고지로 먼저 공격하도록 조치하였다. 이 임무를 받은 2대대는 목표 1를 향해 공격을 준비했으며 5중대와 6중대를 좌우일선으로 수동령을 넘어 10시경에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백암산의 험난한 지형으로 인한 기동저하와 2개 중대규모로 추산되는 중공군이 절벽에 의지하여 수류탄을 마구 던져 완강한 저항을 펼쳤기 때문에 진격이 좀처럼 쉽지 않았으며 공격을 개시한지 2시간째인 오후 12시에도 이를 해결하지 못하다가 중공군의 포격으로 인한 사상자가 많이 발생했기에 대대장은 13시에 대대 병력을 수동령 부근으로 철수시켜 재정비를 하였다.

이후 전열을 가다듬은 대대는 14시 30분에 7중대를 선봉으로 2개 특공조 및 가용 가능한 전 화력을 통해 일제히 돌격을 감행했으나 중공군의 격렬한 저항으로 점차 밀려나가다 돌격전의 상태로 돌아왔고 결국 대대는 수동령에서 방어태세로 전환하게 되었다.

이렇듯, 공격이 먹히지 않자 사단장 장도영은 새로운 반격을 위해 다음과 같은 명령문을 하달하였다.
1 사단은 17일 5시를 기해 다음 목표 a-b-c-d-e를 탈환한 연후에 계속 전과를 확대하며 금성천까지 진격하려 한다.
목표 a 백암산 북쪽 2.3km의 무명고지, b 백암산 동북쪽 2km의 무명고지, c 1051고지, d 876고지, e 환재곡 남쪽의 무명고지
3 제35연대(수색대대 배속)는 c-b-e를 탈취한 다음 광동으로 진출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
4 제7연대는 a를 탈취한 다음 발도명령을 대기토록 하라.
5 제36연대는 임무를 계속하라
6 제15포병단은 사단을 일반 지원하되, 화력의 우선권을 제7연대에게 두라.
7 제5박격포중대는 제27연대와 35연대에 1개 소대씩 분할 배속하고 중대본부는 제35연대지역에 위치하라.
8 공격준비사격은 04:30부터 30분간 실시하라. 화력통제선은 596고지-사동-수동령 북쪽 1km선이다.
9 공격개시 후 사단장은 당거리에 위치할 예정이다.

이후 17일 05시를 기해 사단 예하 3개 연대는 제15포병단의 지원하에 일제히 공격을 감행하였고 우일선의 3개 목표를 둔 35연대는 배속된 사단 수색중대를 목표 e를 1대대에게는 목표 d를 그리고 3대대에게 목표 c를 부여하였으며 2대대에게는 예비대로 두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때 사단 수색중대가 담당하게 될 e고지는 목표물중 가장 동쪽에 위치하고 있었고 지형지물로 인하여 적정이 경미할 것으로 판단되어 4시 30분에 공격준비사격 지원을 등에 엎고 기동을 실시하여 오전 5시에 수상리에서 공격을 개시하였다.

여기서 수색중대는 산간소로를 따라 613고지 남쪽에 도달했으며 그곳에서 1,3 양소대를 좌우로 전개해 고지를 방어하던 중공군과 크게 격전을 치렀고 2시간 30분이 넘는 격전 끝에 13시 30분, 3소대가 중공군의 화력담점을 격파하며 수류탄 총검돌격을 가하면서 7명의 유기시체 확인 및 613고지를 마침내 탈환하였다. 그 후 중대는 고지를 점령하자마자 3소대를 예비로 돌리고 1,2양소대를 앞세워 목표 e고지로 달려나가 양소대를 양측방으로 전개시켜 소대규모의 중공군을 격파하여 17시 무렵에 목표 e고지를 탈환하는데 성공했고 이로써 환재곡 남쪽의 강안 주요지역을 모두 장악하게 되었다.

한편, 제1대대는 목표 d고지인 876고지를 탈환하기 위해서는 대대의 남쪽으로 연한 596고지를 먼저 탈환하여 702고지-876고지 축선으로 진격하는 계획이 좋겠다 판단하여 그 계획을 수립하였고 이후 1,3중대로 596고지 공격에 들어가는 동시에 남사면으로 돌입 및 직중격파하기로 한다.

그리고 공격 개시 신호가 울려퍼지자 선두인 3중대의 2개 소대는 동고지의 200m 직전박으로 육박했고 이에 중대규모의 중공군이 일시에 항거하여 동쪽능선 돌각부에서 기관총의 측사사격이 실시되고 박격포를 포함한 각종 소구경의 화력이 진출정면에 쏟아져 나왔다. 또한 7시 10분부터 좌측의 1중대가 수류탄 대결을 붙어 진출자체가 돈좌되었으며 이러한 상황은 무려 1시간 30분 이상 지속되었는데다 돌격선도 아예 넘지 못하였다. 따라서 대대장은 예비중대 2중대를 투입 및 2중대장에게 "596고지의 동측으로 천회하여 그 우견부를 강습하라" 는 지시를 내렸고 동시에 81mm 박격포의 전화력을 동측부위에 집중하도록 조치하였다.

이렇게 대대장의 전선 투입 명령을 받은 2중대장은 전날부터 입은 피해가 제대로 보충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3개 공격조를 편성하여[52] 그중 3조 지휘관에 중대장이 스스로 들어가 공격에 투입하였고 9시 20분에 고지의 동북사면으로 접근하여 좌우에서 1,2양조가 동시에 기습공격을 가하였다. 이때 중공군은 2중대의 기습 공격으로 소대규모로 저항을 했으나 이마저도 중대의 일진돌풍으로 인해 얼마가지 못해 무너졌고 중공군은 저항을 중단한채 모랄빵이 벌어져 분산 도주하였다.

이때 대대는 11시에 596고지를 탈환하였으며 유기시체 45구 및 포로 7명을 얻었고 그밖에도 기관총 2정을 비롯한 각종 소총 23정등을 노획하는 혁혁한 전과를 얻었다.

이후 2중대는 대대장의 명령에 따라 596고지를 방어하는 임무를 수행하였고 대대는 1, 3중대를 전개시켜 12시 30분에 북쪽의 702고지를 목표로 진격해 이를 점령하려 갔다.그러나 596고지 전투에서 패배해 후퇴한 중공군이 목표 500m 전방의 무명고지에서 사격을 가했음으로 대대는 그 무명고지로 들어가 2시간 동안 전투를 치러 16시 25분에 무명고지를 점령하였고 3중대는 15구의 시신, 2명의 포로를 붙잡는 전과를 세웠다.

하지만 무명고지에서 시간을 많이 소비한 대대는 17시에 702고지로 진격하던 도중 17시 40분에 연대의 공격중단 명령을 받고 다시 진격을 멈춰 방어태세로 돌아가야 했다. 이때 대대는 목표 남쪽 300m에 도달하였으나 일모가 가까워 이날안으로 목표 d를 탈취하기 어렵다 내다본 연대의 결정을 거역할 수 없었다. 물론 목표 약 300m까지 진격해서 702고지는 물론 목표 d를 탈환하는 건 사실상 시간문제였기에 이러한 공격 취소 결정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한편, 제3대대는 연대로부터 목표 c를 부여받았으며 2대대는 연대장의 조치로 예비대로 남았다. 그리고 3대대는 사동 북쪽에 위치한 무명고지를 중간목표로 하여 11, 10중대 좌우일선으로 하여 그 고지를 점령한 후 목표 서남쪽으로 진격하기로 결심을 하고 공격에 나섰으며 대대는 예상대로 중간목표에 갔으나 백암산이 아직 중공군 수중에 있기 때문에 9중대의 1개소대를 뽑아 장재동-상리상의 103번 도로를 따라 위력수색으로 병진을 하면서 서측방을 엄호케하고 주력은 협의를 통하여 사동으로 약진하도록 조치하였다. 그리하여 공격선두인 10중대가 사동 계곡으로 들어가자 무명고지 남쪽에서 증강된 중공군 소대규모가 진로를 틀어 막았고 이에 한차례의 충돌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이들 중공군은 어찌된 이유에서인지 적수가 전혀 되지 못해 중대 단독으로 일격에 무찔러 격파하고 말았다.

이렇게 중간목표를 대대가 점령하였는데 대대의 예상과 다르게 중공군의 저항이 전혀 없자 목표 c고지를 향해 10, 11중대로 계속 전진하였다. 그런데 사동에서 c의 서사면에 연하는 일대가 중공군의 탄막지점인지 갑자기 엄청난 총탄이 쏟아지면서 대열이 흩어져 사각지대로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졌으며 지형지물로 인해 통제와 지휘가 제대로 먹히지가 않아 1시간 동안이나 진격을 못하다가 결국 분산되어 후퇴하고 말았다. 여기에서 대대장은 6중대의 2개 소대를 차출 및 동쪽의 9중대도 합세시켜 다시 공격에 나서 일제히 수류탄을 들고 돌격을 감행해 목표고지의 8부 능선까지 접근하는데 성공 하였지만 지형지물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중공군에 의해 결국 격퇴당하고 만다.

그 이후에도 대대는 세차례의 공격을 반복하였으나 끝내 탈환하지 못하였으며 날이 저물어 연대의 공격 중지 명령 하달되어 능선에 진지를 급편하고 경계태세에 들어갔다. 그리고 2대대는 사동 동쪽으로 진출항 596고지-사동간을 연계하는 거점을 확보하였다.

이때 35연대가 공격하기 전, 27연대의 상황에 대해 설명하자면 27연대는 백암산 동북쪽 2km 지점의 무명고지인 목표 b 탈환을 부여받고 있었다. 이는 불리한 지형조건 하에서 백암산을 정면공격하기보단 우회하여 동남쪽의 b고지를 공격하고 좌일선의 7연대로 직후방의 a를 공격해 중공군의 철퇴를 강요하려는 사단의 목표였으며 이 명령을 받아 실행에 옮긴 27연대는 b고지와 백암산을 병진공격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b에 대한 공격임무를 제3대대에게 부여했으며 전날 백암산 탈환작전을 수행한 2대대에게 다시 공격할 것을 지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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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시간이 지나 7월 17일 03시 30분, 3대대는 10, 11중대를 좌우일선으로 전개해 율목동을 출발하여 북쪽의 험로를 넘어 07시 10분에 선두가 사동 서쪽의 103번 본도 부근에 도달하였고 그 과정에서 소대규모의 중공군을 맞이해 11중대가 2, 3중대를 내보내어 10분간의 교전을 치른 뒤 그들중 2명을 포로로 잡는 전과를 내었다. 이후, 대대는 계속하여 목표를 향해 진격하였는데 이 행군도중에서 1070고지에서 화력을 집중하며 관문을 지키려는 중공군 중대규모와 마주하였다. 이때 11중대 1소대장은 선두에서 중공군을 향해 돌격해 나아갔으며 3소대장도 같이 돌격해 집중 돌파를 가하였다.

그러나 관문을 사수하려는 중공군의 저항이 매우 극심했기 때문에 10중대가 동측에서 기관총 세레를 뚫고 돌입하여 합세하고 후속한 9중대가 1070고지로 전진하여 협공을 가하는가 한편 103번 도로를 따라 진격하는 전차 2대가 중공군에게 포를 쏘니 그 격렬하게 저항하던 중공군이 무질서하게 전선에서 이탈하였다.

이 기세를 놓칠수 없었던 중앙의 11중대는 그 즉시 일제돌격을 통해 행령을 점령했으며 우측의 9중대도 병진공격 끝에 마침내 1051고지를 점령하는데 성공하였으니 이때가 7월 17일 16시 20분이었다. 이 일격에서 중공군은 99구의 시신을 유기하고 정신없이 장재동으로 분산후퇴 하였고 대대는 목표 b고지로 향해 멈추지 않고 진격해 불과 1km만 남겨두고 연대의 공격중지 명령에 따라 방어태세로 전환하였다.

이와 같이 대대의 공격이 잘먹히던 시점, 백암산 공격에 임한 2대대는 좌우측 협공을 가하기 위해 5, 6중대의 병력을 나누어 전진시켰다. 그러나 백암산 공격에 나선 대대는 험준한 지형으로 인해 기동의 저하를 받아 사상자가 속출했고 혼신을 다해 돌격에 돌격을 반복했으나 끝내 돌격선을 넘지 못하였으며 결국 대대는 병력을 철수시켜 돌격대를 편성하여 16시에 재공격에 나서는 조치를 취했다. 그리고 재공격이 실시되어 대대는 가용한 모든 화력을 서쪽능선에 집중시켜 돌격대가 각개 약진을 해 중공군을 박살내는 계획을 꾀하던중 사단 주력이 배후를 차단하는 위협속에 빠진 중공군이 철수하기 시작하자 이때를 노린 대대가 즉시 총검돌격을 하여 적진에 뛰어들어 총검을 휘두르며 백병전을 치른 끝에 80여구의 유기시신을 확인 및 19시에 영봉을 제외한 모든 전역을 점령하게 되었다.

그런데 정상의 암굴속에 도사린 일부 중공군들이 아직도 기관총을 난사하여 대대의 진지 점령을 방해하였고 이에 5중대가 이를 진압하러 갔지만 날이 어두워짐에 따라 보류를 하게되었는데 다음날 6시에 미 제5공군의 F-81 전폭기 2대가 일출과 더불어 공중폭격으로 이를 분쇄함에 따라 연대는 본작전지역의 제1봉을 수중에 넣었다.

그리고 6사단으로부터 새로 배속받은 7연대는 목표 a를 부여받았는데 이곳은 무명고지이나 흑운토령과 함께 군단의 우측 고지로서 이들 고지를 장악할 시 금성천까지 일격에 진격이 가능한 곳이었다. 즉, 사단은 이 고지를 목표로 우회하여 백암산을 무혈입성할 작정이었던 것이다. 이후 a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공격을 개시한 7연대는 중간목표인 1118고지를 탈취하기 위해 기동하면서 2대대 6중대에게 백암산 서쪽의 삼차로 부근에 엄호진지를 점령하도록 지시하였으나 중대는 삼차로 부근에서 잠복하고 있던 중대규모의 중공군과 맞닥뜨려 큰 고전을 치러야만 했으며 이로부터 중공군이 박격포 야포등 약 300여발의 포탄을 쏴재꼈음으로 엄호진지의 점령은 지연되고 있었다.

이에 연대장은 2대대장 소병렬 소령에게 대대의 주력으로서 이를 격파한 다음 백암산 서측에서 공세적 엄호를 실시하도록 엄호하는 동시에 제1, 3 양 대대로서 6시를 기하여 1118고지를 목표로 서진공격을 감행하도록 조치하였고 그리하여 삼차로로 이동한 2대대는 9시 50분에 현지에 당도하는 즉시 문원식 대위가 지휘하는 7중대와 금준석 중위가 지휘하는 제5중대를 합세하여 30분 동안 걸친 격전끝에 6중대 정면에 있는 중공군을 섬멸한 다음 백암산과 1118고지의 중앙지대로 진출하여 그들의 상호간의 호응을 차단했으며 이같은 엄호하에 1, 3 대대는 12시 20분에 1118고지로 돌입 해 2개 중대규모의 중공군의 저항을 쳐부시고 올라갔다.

그러나 중공군의 저항이 여전히 심했으며 2대대는 혼전을 겪으면서 진출이 어려워지자 3대대가 서쪽으로 우회공격해 중공군의 저항을 박살내었고 중공군은 이 기세에 놀라 순식간에 무너져 15시 10분쯤 1118고지를 비롯한 좌우측 능선을 국군에게 내줌으로서 중공군은 국군에게 완전히 작살나고 말았다.[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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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암산 중공군 진지에 육탄공격을 가하는 5사단 27연대 2대대 병사들의 모습

이후 1118고지를 점령한 연대는 16시 30분을 기해 목표 a를 공격하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1대대를 선봉으로 삼고 백암산 서측에 있는 제2대대의 1개 중대를 이와 호응케하여 동북능선을 따라 밀고 올라갔으며 덕분에 대대는 큰 저항없이 일로약진한 끝에 백암산 북쪽 1.5km의 962고지로 도달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대대는 2대대에서 병진한 7중대와 합세하였고 바로 이때 사단의 공격중지 명령이 들어옴에 따라 연대는 공격을 멈춰 962고지-1118고지를 연한 진지를 급편해 방어태세로 들어갔다.
1100 사단 RCN은 950 355지점까지 진출 제27연대 9중대는 1030 927 344지점에서 CT927 3475지점에 도착하였음. 1145 제35연대 5중대는 922 366지점까지 진출 1215 돌격전을 전개하였음. 1220 제7연대는 1118고지(8885 373) 육박 중 백병전을 전개 중. 1300 제35연대 3대대(1R500)SMS 1대대의 진출에 따라 전방으로 추진.
<戰斗詳報, 華川地區 白岩山戰斗, 第五師团司令部> 中

이렇게 17일 공격은 끝났으며 이날 5사단의 전연대는 모두 하나같이 3-4km씩 북진했기에 병사들의 사기는 매우 드높았다. 따라서 사다은 일부 목표 탈취의 미진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강과 금성천 남안에 새로운 목표 선정하여 과감한 진격전을 전개키로 결론짓고 17일 22시에 다음과 같은 명령문을 전부대에 하달하였다.
1.사단은 18일 05:00를 기해 다음 목표 가-나-다-라-마-바를 탈환한 후 아이슬란드선까지 진출하려 한다.
목표 가. 595고지(외성도리 동쪽 고지),
나. 819고지 북쪽 1km 무명고지,
다. 741고지(수곳지 동쪽)
라. 구대 동쪽 무명고지,
마. 780고지,
바. 광동 무명고지
2.제35연대는 마-바를 탈취한 다음 후동-구대간의 북한강 서안으로 진격하라 .
3.제27연대는 다-라를 탈취한 다음 구대 북쪽에서 1개 대대의 전투정찰대를 진출시켜 강안까지 수색하게 하라.
4.제7연대는 가-나를 탈취한 다음 금성천으로 진격하라.
5.제11포병단은 사단을 일반 지원하되 사격의 우선을 제35연대의 정면에 두라.
7.폴라선 상의 중간 목표 a-b-c-d를 탈취한 직후부터 각 연대간의 전투지경선을 다음과 같이 조정한다.
제35, 제27연대간:소백산(1051고지)-광동 서쪽 500m-780고지 서쪽 300m-그 동북족의 북한강 서안
제27, 제7연대간:백암산-장재동 서쪽 1km-수곳지-구대 서쪽 200m 그 북쪽의 북한강 서안
8.각 연대는 목표를 탈취하면 즉시 진지를 구축하고 담당정면의 적정을 보고하라

이 명령을 받은 각 연대들은 7월 18일날 최후공격을 하니 이날은 중공군 180사단 538연대,540연대 및 181사단 각 연대 병력의 사기가 최하로 찍은 날이었다. 그 이유는 각 사병들이 금성전투때 가져온 식량이 불과 4일치에 불과했는데 문제는 금성천 교량을 건넌 직후부터는 모두 소모하였고 결국 기아 사태가 발생해 중대 규모의 탈영병이 속출하였다. 이는 미 8군 기록에서도 나타나며 당시 중공군은 모든 무기를 버리고 후퇴했다고 전해진다. 따라서 사단은 이러한 점을 이용해 북한강-금성천으로 진출할 생각을 하고 주저없이 진격전을 펼쳤던 것이다.
기간중 포로는 중공군 90명 괴뢰군이 29명으로서 계(計) 219명이다. 전기(前期) 35명에 비하면 184명이 증가하였으며 포로(PW) 진술에 의하면 적의 사기는 아래와 같다.

1. 대부분의 포로는 아군의 포격이 심한 것과 이에 따르는 사역(使役)이 많아 덤으로 간부 및 당원을 제외하고는 사기가 저하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였다.

2. 68군 포로 진술에 의하면 68군은 전반적 전투 경험이 박약(薄弱)함으로 최근 UN군 폭격 및 포격이 심하여 장교가 명령하여도 행동을 주저하며 적극성이 없이 피동적(被動的)으로 임무에 태만(怠慢)하다 함.
定期定報報告, 第202號
"당시 포로의 소대인 60mm 박격포 소대는 공격 전에 24발의 포탄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7월 16일, 현재 모두 소모되었다고 한다. 이후 포로의 중대는 모든 무기를 버리고 후퇴했다. 이 당시 포로의 진술에 따르면 중대내 모든 병사들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전투식량을 버렸다고 한다. 추가적인 식량보급이 없었기 때문이다."

22 July 1953
여기서 한편, 마-바의 공격을 담당한 35연대는 지난날 탈취하지 못한 c-d를 먼저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연대는 2대대를 d고지에 3대대에게는 c고지 공격을 부여하였으며 이에 따라 동측에서 공격에 나선 2대대는 단숨에 702고지를 장악하여 곧바로 976고지로 돌격해 증강된 중공군 소대규모를 물리쳐 오전 11시 20분에 고지를 장악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3대대는 오전 7시 25분에 목표 c인 1051고지로 쳐들어가 11중대로 2개 소대규모의 중공군을 박살내며 아울러 9명의 포로를 붙잡는 전과를 내세웠다. 하지만 곧 중공군이 중대규모로 3대대에게 반격을 가하였으니 격전은 지속되었고 이에 연대장은 수색중대를 C로 파견하여 3대대에 몰려온 중공군을 물리치게 하는 한편, D를 탈취한 2대대는 예비인 1대대에 현 점령지를 인계하고 계속 전진해 목표 마를 점령하도록 지시하였다.

이에따라 오전 10시에 d를 인계한 2대대는 이날 공격목표인 마를 향해 진격해 나아갔으며 선두 5중대를 내세워 광동부근으로 진출하는데 성공하였는데 문제는 광동부근의 833고지에서 소대규모의 중공군이 저항하여 대대의 진격을 막았고 이에 대대는 서둘러 이들을 무찌르며 약진에 약진을 거듭해 780고지 남쪽의 절벽을 넘어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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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대대의 진격속도가 매우 빠르자 연대장은 2대대장을 불러 "마 공격을 병행하여 1개 중대로써 바를 공격케하라"라는 지시를 내렸고 2대대는 연대장의 명령에 따라 5중대로 하여금 동쪽으로 진로를 바꾸어 바를 탈취케 하고 제6, 7중대로써 마를 공격케 하도록 조치하였으며 대대는 곧 병행공격을 실시 해 17시 50분, 목표 바를 5중대가 점령, 18시에는 목표 마를 탈취하여 지시된 임무를 모두 완수하였다.

이때, 35연대의 전황이 잘풀릴때 27연대는 위 사단 명령문 대로 목표 다-라 탈취를 부여받았으며 연대는 전날 점령에 실패한 목표 b를 먼저 탈취한 다음 장재동-수곳지-구대 축선을 따라 진격하기로 결정하였다. 따라서 연대는 2대대를 예비로, 3대대를 선봉으로 내세워 b를 탈취하여 그 즉시 1대대가 축차로 다-라 공격을 개시하기로 작전을 세운뒤 오전 5시에 공격을 개시했으며 공격을 개시한지 단 2시간만에 3대대가 목표 b를 탈취하였고 1대대도 103번 도로의 동쪽에서 장재동을 향해 진격하였다.

그러나 9시 40분, 목표 다를 향해 진격하던 1대대가 장재동 동남쪽의 662고지에서 중대규모의 중공군을 맞이해 격전을 벌였으며 수류탄전을 지속하다 오전 11시 20분에, 이를 격퇴하고 진격을 지속하였으나 연대에서 명령을 수정하여 3대대에게 목표 다를 부여하였기 때문에 1대대는 목표 다로 진격하지 못하였다. 이후, 3대대는 1대대의 공격선을 초월해 16시 30분, 목표 다를 점령하는데 성공하였고 1대대도 역시 780고지 서쪽으로 진출해 연대 주력과 합세하여 목표 라만을 남기게 되었다.

이 목표 라는 1대대의 2중대가 공격해 점령했으며 마침내 27연대 역시 모든 목표를 탈취하여 승전보를 울리는데 성공하였다.

한편, 7연대의 경우 목표 가-나를 부여받고 있었는데 연대는 가-나를 먼저 공격하기보다 전날에 공격하지 못한 목표 a를 먼저 탈환하고 탈취에 성공하면 즉시 가-나로 진격하기로 작전을 세웠다.그 후, 연대는 1대대에게 수색중대를 배속시켜 오전 5시에 공격을 감행하였고 수색중대가 중공군의 퇴로를 차단한 다음에 대대가 2,3중대를 전개 및 중앙을 통해 돌격을 감행하여 2개 소대규모의 중공군을 박살내 목표 a를 탈환하였다.

이어 가-나 공격에 나선 연대는 중간에 위치한 819고지를 점령하였고 2대대에게 목표 나를, 3대대에게 목표 가를 공격하도록 조치한 뒤 공격을 개시해 중공군의 탄막을 뚫고 총검돌격을 감행하여 17시 20분에 목표 나에 주둔한 2개 소대를 쳐부수고 점령 및 17시 40분에 목표 가에서 소대 규모의 중공군을 박살내 점령하는 것을 끝으로 연대는 모든 목표를 탈취하였다.

이후 연대는 일부 병력을 금성천으로 진출시켜 위력수색을 실시한 다음 방어태세로 전환하게 되었다.
3.7.2.1. 전투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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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7일~18일, 제5사단 백암산 지구 반격작전 상황도
이번 작전으로 사단은 3개 연대가 아이슬란드선까지 진출하여 실지를 회복하게 되었으며 이후 8사단과 전선을 연계해 748고지-전선 북쪽 1.8km간의 이전의 진지를 확보하면서 오늘날의 휴전선을 만들게 하였다. 그리고 전투가 끝난 7월 18일 이후 사단의 방어지점에서는 양측간의 위력수색만이 전개되었고 사단은 전선의 정비와 진지보강에 주력하던 중 군단의 지시에 따라 작전지역을 6사단에게 인계하고 춘천 북쪽으로 이동하여 부대교육에 들어갔다.
19, 12.00 사단군단 작명에 의하여 제7연대 배치 해제와 동시에 제5사단은 제6사단과 교대하였음.
<戰斗詳報, 華川地區 白岩山戰斗, 第五師团司令部> 中

한편, 이 전투에서 입은 5사단의 전과와 피해는 다음과 같다.
구분 사살 추정 살상 포로
제27연대 637 695 11
제35연대 423 530 20
제7연대 861 544 16
기타 13 7 4
1,934 1,776 51
구분 전사 부상 실종
제27연대 53 312 86
제35연대 42 387 205
제7연대 93 449 70
기타 21 54 -
209 1,202 361

3.7.3. 8사단 별우지구 반격작전

7월 15일 7시, 8사단은 주파리 서측방에 진입한 11사단,13연대와 연결하여 541고지-666고지-723고지를 잇는 신 주저항선에서 반격을 개시하였다. 군단이 정해놓은 공격목표는 5km 전방의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금성천으로 지정을 해놨지만 이를 성공하기 위해서는 851고지(흑운토령)와 1.5km 좌측방에 있는 682고지 그리고 682고지의 1.8km 서측방에 있고 17번도로를 감제하는 461고지 등의 중간목표를 달성해야만 했다. 이에따라 사단장 송요찬은 이러한 작전명령을 전부대에 하달하였다.
1.사단은 7월 15일 19:00를 기해 공격으로 이전하려 한다.
2.제21연대는 흑운토령과 461고지를 탈취하라.
3.제10연대
가. 2개 대대로써 제21연대의 진지를 인수하라
나. 1개 대대로써 와이오밍선의 좌익을 계속 방어하라
4.제16연대는 현 임무를 계속 수행하라.
5.제12포병단은 사단을 일반지원 중인 화력으로 제21연대의 직접지원을 강화하라
6.기타 부대는 현 임무를 계속 수행하라.

이 고지들중에 가장 중요한 고지는 바로 851고지인데 이 851고지를 점령하면 이후의 진격은 내린막 능선을 따라 일거에 금성천으로 진격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요충지인 흑운토령의 점령임무는 21연대가 부여 받았고 흑운토령 공격은 21연대의 우일선 2대대가 682고지는 중앙일선 3대대가 그리고 461고지는 좌일선 1대대가 공격을 맡았다.
파일:65939.png
이때 흑운토령 공격을 맡은 21연대는 공격이 개시되기 전, 4시간 동안 적정을 살펴보았고 우일선의 목표인 흑운토령에서는 약 1개 대대규모가 주둔하고 있고 좌일선 목표인 461고지에는 1개 중대규모가 주둔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따라서 연대장은 이러한 상황을 종합해 보고 이러한 작전명령을 각 대대에 지시하였다.
1.연대는 흑운토령 및 461고지를 탈취하려 한다.
2.제3대대는 흑운토령을 탈취하라,
3.제1대대는 461고지를 탈취하라.
4.제2대대는 제3대대를 지원하며 목표의 남측면을 충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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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6일, 8사단 16연대 병사들이 중공군 저격수를 포로로 붙잡아 심문을 하는 모습

연대는 흑운토령을 2개 대대로써 공격을 하는 즉, 주공으로 삼았고 좌일선의 461고지를 1개 대대로 탈취하려는 작전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18시 30분이 되자 아군의 지원포화가 목표 정상에 집중되기 시작하였고 이에 3대대는 흑운토령 서측면에 진출했으며 그곳에서 급편진지로 저항을 하는 1개 중대규모의 중공군을 단번에 박살내고 22시에 서쪽 능선의 일각을 점령하고 흑운토령 정상으로 육박하는데 성공한다.

한편 제2대대는 10연대의 1대대 진지를 인계하고 고지의 정남쪽을 충격하기 시작하였는데 여기서 대대장은 제6중대로써 공격제1선에 세웠으나 중공군의 화력으로 인해 공격개시선을 통과할 때부터 혼전을 거듭하면서 전진을 지속하였다. 게다가 이 정면은 완사면이었기 때문에 곡사화력이 집중되었고 그 결과 양중대는 무수한 박격포탄 세례를 얻어 맞았으며 이때문에 5중대장이 실신했고 화기중대 2소대장 엄재호 소위가 부대를 지휘하던 도중 파편상을 입어 다치는등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이렇듯, 혈로를 개척하면서 나아간 대대는 마침내 23시에 8부 능선을 점령하여 차폐진지를 급편하였고 고지 정상을 노리게 되었다.

한편, 좌일선에서 10연대 2대대에 진지를 인계하고 461고지를 목표로 공격개시선을 통과한 21연대 제1대대는 2중대 및 3중대를 공격 제1선에 내세워 20시 30분에 목표를 탈취하는데 성공한다.
22.10 저항을 계속하든 적은 삽타하는 포격과 더불어 돌격을 감행한 아돌격제대에 의하여 완전격멸(完全击滅)하였으며 목표 CT868 538을 점령, 계속 진출 교전개시
<步兵第八師團 戰鬪詳報> 中

그리고 사단으로부터 21연대의 진지를 인수받게 된 제10연대는 1대대로 하여금 21연대 제2대대의 진지를 인수하도록 지시 하였으며 제2대대를 21연대 제1대대의 진지를 인수케하였고 마지막 3대대를 와이오밍선 주진지에 배치케하였으니 21연대의 배후를 튼튼히 지키도록 하였는데 이는 사단의 반격작전은 순조롭게 진행되기 위한 사단장의 조치였고 이에따라 사단으 반격은 굉장히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따라서 사단장 송요찬은 이러한 상황을 살펴보고 16일 오전 12시 다음과 같은 명령을 전부대에 하달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사단은 반격위세를 강화하려 한다.
2.제16연대
가. 주력으로써 760고지를 점령하라.
나. 7월 16일 13.00에 공병 1개 소대와 제1전차중대의 2개 소대를 통합지휘하라.
3.제21연대
가. 주력으로써 625고지 및 596고지를 탈취하라.
나. 7월 16일 13.00에 공병 1개 소대와 제1 및 제3 양전차중대의 각 1개 소대를 통합지휘하라.
4.제1연대는 현임무를 계속 수행하라.
5.제461중박격포대대의 제4중대는 7월 16일 13.00부터 제16연대를 직접지원하라.
6.제1전차중대
가. 7월 16일 13.00에 1개 소대를 제16연대에 배속시키라.
나. 동일시부로 1개 소대를 제21연대에 배속시키라.
7.제3전차중대는 7월 17일 13.00에 1개 소대를 제21연대에 배속시키라.
8.사단 공병대대
가. 현임무를 계속 수행하라.
나. 7월 16일 13.00에 각 1개 소대를 각 연대에 배속시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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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16연대는 와이오밍선에서 방어중이었는데 사단장의 명령에 따라 연대는 와이오밍선에서 즉시 떠났으며 연대OP를 625고지에 설치하고 1대대를 우일선에 3대대를 좌일선에 세우며 2대대를 예비대로 두고 백암곡에 집결시켜 공격을 개시하였다. 먼저 1대대는 와이오밍선에서 떠나 목표인 760고지 정남쪽으로 진출하였고 좌일선인 3대대는 연대의 집결지에서 760고지 서남쪽으로 총검을 휘두르게 되었는데 이미 1118고지-760고지의 유리한 감제선에 진지를 급편하고 있는 중공군의 저항은 자동화력이 축을 이루어 막강하였다. 때문에 양대대의 공격 제1선은 목표의 7부 능선과 8부 능선에서 일진일퇴의 근접전을 거듭한 끝에 이날 23시에 일단 공격을 멈추고 다음 날인 17일의 여명을 기하여 결전을 전개키로 결정하였다.

바로 이때, 625고지 및 596고지 탈환 임무를 부여받은 제21연대는 전날 23시에 흑운토령 8부 능선에서 차폐진지를 급편하였던 제2대대 주력이 사격전으로써 일야를 보내는 걸 시작으로 오전 5시에 다시 공격을 재개하였다. 이 공격에서는 산정에 여명이 비추었고 아군은 정확한 지원화력이 작렬하는 적진을 향하여 총검돌격을 개시하였으며 공격에 나간 5중대 및 6중대는 혈로를 뚫고 마침내 고지정상의 주진지를 유린하는데 성공하였으니 이때가 바로 공격을 개시한지 1시간째인 오전 6시였다.

공격을 성공시키고 태양의 광명이 비추는 이 시각에 21연대 제3대대는 서사면으로 일거에 돌격하여 제9중대로 하여금 남아있는 중공군을 소탕하도록 하니 중대의 최선봉인 제1소대는 재빠르게 총검돌격을 감행하여 32명을 사살 및 확인하고 포로 3명을 붙잡는 전과를 세웠다. 이로써 연대는 흑운토령의 유리한 감제선을 확보하고 사단작명 제183호의 임무를 수행케 되었으며 이에 연대장 성정모 대령은 제3대대로써 흑운토령을 고수(固守)케하고 제1,제2대대를 게속 전진하도록 하였다. 이때 3대대만 남기고 1, 2대대를 전진시킨 까닭은 연대의 반격이 진전됨에 따라 연대의 측선이 연신되기 때문이었고 이에따라 연대는 이 흑운토령의 감제선에서 엄호하도록 대대에게 명했던 것이다. 이후 1, 2대대가 출발하자 제3대대는 중공군 약 1개 대대규모의 공격을 받아 육박전 끝에 대대의 일부진지가 피탈되었고 이에 대대는 제9중대 및 10중대를 방어, 제1선으로 하여 중공군에게 역습을 가해 이를 모두 격퇴시켰다.
06.30 CT869 383의 무명고지를 확보고수 중이든 제21연대 6중대는 말습한 적 증원된 1개 중대와 더불어 맹렬한 포격을 감행하여 왔으나 차(이)는 진전(陣前)에서 조지격멸(阻止击滅)되였다.
06.00 적은 또다시 증원되는 적 약 1개 중대와 합류재반격을 감행하여 왔으며 드디어 육박전(肉迫战)이 전개되었다. 고도(高度)로 소모되는 탄약의 결핍과 인원의 손실로 인하여 격전(激战)을 거듭하는 나머지 07.30분 고지는 적에게 피탈되였다.
07.40 피탈된 고지는 아군에 의하여 재반격전이 전개되였다.
<步兵第八師團 戰鬪詳報> 中

한편, 연대의 우일선 되어 625고지를 향한 2대대는 6중대를 선봉으로 하여 돌격에 돌격을 거듭하였다. 제6중대는 전날의 흑운토령 공격 시에 제3대대를 화력지원하는 임무를 맡았으나 이번 공격에 대대는 대대의 혈로를 타개해 앞으로 나아갔으며 중대의 선진이 된 1소대는 소대장 하동배 소위의 함성하에 전원일환이 되어 화선을 뚫었다. 그러나 9부 능선에서 완강하게 저항하던 자동화기의 특화점으로 인해 진격에 어려움을 겪자 제6중대는 5인조의 특공대를 선두로 내보내 육탄돌격을 감행하였다. 이때 특공대장이자 소대장인 하동배 소위는 특공대를 돌격시키면서 그만 포탄 파편에 맞아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한편 2소대장 대리인 강영춘 상사는 정상으로 통하는 교통호에 뛰어들면서 휴대하고 있던 M1 개런드 소총을 난사하여 중공군 6명을 사살했으며 이종오 일등중사가 지휘하는 제3소대의 선임하사인 유영관 하사는 수류탄과 자신이 차고 있던 일본도를 뽑아 중공군 진지로 뛰어들어 중공군과 백병전를 벌여 중공군을 베어넘기면서 앞으로 전진하였다. 이처럼 과감한 공격 끝에 제2대대는 중공군의 진지를 단숨에 돌파하였다.

이날 대대는 19시에 625고지를 점령하고 제5, 제7중대로써 중공군의 역습을 대비하는 전사면진지를 구축케 하여 금성천을 1.5km의 전방에서 바라보는 선에서 전열을 가다듬었다. 이렇듯, 2대대의 공격이 성공한 나머지 같이 공격을 개시한 좌일선 제1대대는 연대로부터 596고지 공격임무를 맡았으며 연대는 1대대에게 2개 전차소대를 지원토록 했다. 당시 1대대가 맡은 596고지 공격임무는 매우 막중하였는데 대대의 공격목표인 596고지는 흑운토령과 종격능선을 뻗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연대의 반격전진을 차장하는 분수령이기 때문에 이곳을 빠르게 점령하지 못한다면 2대대의 전진이 후면으로부터 위협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따라 제1전차중대의 제2, 제3전차 소대는 교동을 지나 461고지의 남쪽을 우회한 다음 596고지를 800~900m의 동북쪽으로 바라보는 길바닥에서 마침내 포문을 열어 사격을 개시하였으며 총 8문의 직사화력으로 1대대는 공격을 개시한다. 이 공격에서 대대는 제2중대 및 제3중대를 공격 제1선으로 내세워 고지의 서사면을 돌격한 끝에 중공군의 주진지를 유린하였으나 이미 시간이 너무 지난 탓에 공격을 멈추고 말았다. 결국 연대는 20시에 이곳 625-596고지선에서 멈춰 진출선을 굽혔고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은채 밤을 세우고 만다. 그러나 이미 중공군은 5차례에 걸쳐 중대-소대급의 역습만 했을뿐 이 역시 모두 격퇴당했고 며칠전의 압도적인 병력과 화력을 보여주던 7.13공세의 위력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3.7.3.1. 흑운토령 탈환
파일:98765432.png
7월 17일, 제8사단 반격작전 상황도
반격 3일째인 17일인 이날 사단의 진출(進出)은 기호지세(騎虎之勢)로 전개되었다. 각 연대의 쾌속 진격과 미제5공군 및 한국공군의 연 15개의 편대가 중공군의 퇴로를 차단했으며 미 제5 및 제12 양(兩)포병단의 포문이 일제히 열려 포효하는등 반격작전은 금성천변으로 압축되면서 마치 경천동지(驚天動地)의 섬멸전을 연출케 하였다. 또한 이날 오전 6시 기준, 2군단의 진출선을 보면 우인접인 5사단은 구대리-성동리 선에서 진격의 발판을 굳히고 있었으며 좌인접 11사단은 추동선에서 삼현지구를 바라보고 있었으므로 군단은 반격을 가한지 단 3일만에 금성천을 바로 눈앞에 두고 있었다. 게다가 여기서 군단장 정일권은 중공군 제20병단의 저항력은 이미 쇠퇴하여 저지선(沮止線)을 금성천의 북안으로 이설(移設)할 것으로 판단해 이에따른 군단작전 제7호를 전 부대에 하달함과 동시에 "궤주하는 적을 추격하여 섬멸적인 타격을 가함과 동시에 금성천을 초월공격하라"고 말하였으니 군단의 주력인 제8,제11,제5의 3개 사단은 이제 사단이 점령한 각 선에서 다시한번 공격을 가하게 되었다.

이때 8사단 송요찬은 사단작명 제184호로써 각 연대의 임무를 하달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사단은 적을 구축(驅逐)하면서 금성천 넘어 대안으로 육박하려 한다.
2.제10연대는 7월 17일 20.00까지 목표 다,라를 탈취하라
3.제16연대는 동일시부로 목표 마를 탈취하라
4.제21연대는 동일시부로 목표 가, 나를 탈취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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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7일, 제8사단장 송요찬 소장이 흑운토령 반격작전 도중 피습당한 박격포 분대원들을 보기위해 달려 나가는 모습
여기서 각 연대별로 부여된 공격목표는 금성천을 2~2.5km에 위치한 연봉이다. 여기서 연대별로 보자면 먼저 21연대의 공격목표인 가, 나는 집실리의 동쪽에 연립하여 여문리 제하는 요부이며 그 다음 제10연대의 공격목표인 다, 라는 집실리의 서남쪽에서 별우지구를 옹위하는 요관이고 마지막 제16연대의 공격목표인 479고지는 죽동의 17번 도로를 감제하는 요소이다. 즉 전략적으로 굉장한 요충지이기에 이러한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사단을 지원하게 된 미 제5 및 제12포병단의 화력배정
  • 제12포병단의 제73대대, 제10연대를 직접지원
  • 제12포병단의 제75대대, 제16연대를 직접지원
  • 제12포병단의 제50대대, 제21연대를 직접지원
  • 미 제5포병단의 제100대대, 사단을 일반지원
  • 미 제5포병단의 제987대대, 사단을 일반지원
한편, 명령을 받기 이전, 8사단의 전선상황은 제21연대 3중대 정면이 중공군의 공격으로 15분간의 교전 끝에 이를 격멸시키는 것과 수색중대가 중공군에게 공격을 받아 20분간 교전을 해 이를 격멸시킨 것 외에는 별다른 전투는 없었다. 그리고 각 연대들은 사단작명 제184명을 받아 곧바로 공격을 개시했고 이중 가장먼저 활동을 시작했던건 제16연대 제3대대였으며 그 다음은 제21연대 제1대대였다.

이때 제21연대는 사단의 우일선을 맡고있어 목표 가, 나의 탈환임무를 부여 받았고 연대는 오전 5시에 1, 3대대로써 주공을 맡게하고 2대대를 362고지까지 진출케하였다. 당시 2대대가 맡고있던 362고지는 금성천을 사이에 두고 472고지와 맞서 있었기에 연대주력이 공격하는 동안 엄호하기에 최적의 장소였으므로 2대대는 제5 및 6중대를 내보내 그곳에 주둔중인 중공군 1개 소대를 박살내고 동고지의 2개 연봉에 진지를 급편하도록 하였다. 또 3대대는 흑운토령에서 중공군의 공격을 막고 있었는데 이는 다행히 우인접 제35연대가 제5사단의 우일선이 되어 진출선을 북상시켜 중공군의 측방충격을 우려할 필요도 없이 대대는 주공의 우일선이 되었다. 또한 596고지에서 진출하기 시작한 주공의 좌일선 제1대대도 금성천 변을 향해 출발했는데 여기에서 진출중인 양대대는 처음에 2개 분대 규모의 중공군이 들어와 교전을 치름과 동시에 이를 격멸시켰지만 596고지로부터 중공군 1개 중대 병력이 반격해 왔기 때문에 대대는 이들과 교전을 치렀고 11시 25분에는 그 규모는 2개 중대규모로 늘어나 교전 시간은 30분이 넘었다. 전투 결과, 중공군은 후퇴하였으며 대대는 앞으로 나가 목표 가,나의 배사면을 횡류하는 계간에 도착하게 되지만 그곳에 주둔중인 중공군 약 1개 대대 병력이 격렬히 저항하는 바람에 대대는 고지 정착면에서 근접항공지원을 요청하게 된다.

이 근접항공지원에서 미 제5공군소속의 F-86 2개 편대가 전투현장에 출현하여 네이팜 폭격을 가하였으며 이에따라 공격 제1선의 4개 중대가 급히 돌격하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제3대대장이 목표 나의 7부 능선에서 중공군에 의해 관통상을 입고 부대대장에게 대대지휘를 인계하게 되었으며 제11중대의 선임하사인 채성률 중위는 화기중대의 기관총 소대를 이끌다 부상당했고 10중대 3소대장, 황영제 소위는 2개 분대를 이끌어 화기중대와 함께 전진하다 중공군의 박격포탄에 의하여 전사하게 된다. 또 제3중대 제1소대장 최인호 소위 또한 3명의 결사대를 이끌어 특화점으로 육탄돌격하였다가 결국 오른쪽 손에 수류탄을 쥔채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으니 이날 연대가 치른 혈전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국군 4개 중대의 공격을 받은 중공군도 결국은 무너져 버렸고 이후 연대는 596고지를 탈환하게 된다. 물론 점령 직후 중공군이 1개 대대병력으로써 다시 공격해 왔기 때문에 결국 장기간 전투로 피로해진 대대는 철수 후, 다시 반격을 가해 19시 30분에 다시 재탈환하게 된다.

한편, 21연대의 공격이 성공하기 이전인 오전 4시, 21연대의 주진지를 인수 받고 와이오밍선에서 전벽을 굽히고 있던 제10연대는 사단의 명령에 따라 공격을 개시하여 제1대대와 2대대로써 목표 다,라를 탈환하도록 조정하였다. 따라서 제1대대는 목표 다를 즉, 연대의 우일선으로 제2대대를 목표 라를 탈환하도록 하는 좌일선으로 각각 편성하였고 이후 진출 도중 중공군 1개 중대의 공격만을 제외하면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은채 손쉽게 441고지로 도달했으나 이곳에서 목표 다,라는 쌍봉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배사면의 화망이 긴밀히 협조할 수 있는 지형이었다. 즉, 중공군은 이러한 점을 이용해 441고지에 V자형으로 갈라진 두 줄기 사이에서 공격해 오는 10연대 각 대대를 상대로 완강하게 저항했으며 이때문에 접근로는 순식간에 화약냄새와 연기가 풍기는 모습으로 변해버렸다. 또한 양 대대의 진격이 가로막히자 연대는 근접항공지원으로 중공군을 타격했고 때문에 전투현장은 더욱 더 난장판이 되어가고 있었다. 여기서 전투중인 양 대대들은 무수히 떨어지는 총탄을 뚫고 적진에 뛰어나가 육탄전을 전개했는데 그 과정에서 여러 장교들이 전사 및 부상당해 대대가 진출한 곳은 곧 혈로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지속된 육탄전 및 폭격과 사단의 포격지원 덕분인지 연대가 마주한 1개 대대의 중공군도 역시 결국 분산되어 무너져 버렸으며 그 후, 10연대는 중공군을 완전히 쫓아낸 뒤, 오후 9시에 목표를 전부 장악하여 반격작전을 성공시켰다.

그리고 전날, 760고지 8부 능선에서 공격을 멈춘 8사단 16연대는 이날 오전 4시에 공격을 개시하여 760고지를 무혈입성하였는데 이는 우인접 5사단의 반격으로 인해 백암산-1118고지 선의 주둔중인 중공군이 후퇴하였기 때문이었다. 이후,16연대는 사단작명 제184호에 따라 곧바로 금성천을 도하하고 세현리에 집결한 다음 목표 마에 대한 공격대형을 갖추었으며 목표 마, 즉 479고지에 대한 공격을 신속히 진행하였다. 이때 연대는 목표 마는 17번 도로를 감제하는 도로이기에 중공군으로부터 완강한 저항이 있을 것이라고 예측하였으나 약 1개 중대규모의 경미한 저항만 부딪쳤을 뿐 연대의 주력은 신속히 진격해 19시에 목표 마를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이로써 금성천을 도하해 주저항선 절반 이상을 탈환한 8사단은 집실리-죽동선에서 진출선을 확보하고 중공군의 역습에 대비하게 된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하고 사단은 진출선에서 물러나가야 했는데 왜냐하면 군단의 주저항선이 현 군사분계선인 금성천 남안으로 조정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각 연대는 아쉬움만 남긴채 뒤로 물러나가게 되었고 이후 사단은 7월 20일에 좌측방의 596고지를 7사단 3연대에게 넘겨주고 우측방에 있는 462고지 지역을 6사단으로부터 인수한 뒤 금성천에서 중공군과 대치하다 휴전을 맞이하게 된다.

휴전 직전 8사단 각 연대의 배치상황은 이와 같다.
제16연대[54]
연대OP: 819고지
주저항선: 구대리-여내곡간
우일선: 제1대대
좌일선: 제2대대
예비대: 제3대대
예비대 배치지점: 장대-819고지-외성동리
제10연대[55]
연대OP: 흑운토령(851고지)
주저항선: 여곡리-방성곡간
우일선: 제3대대
좌일선: 제2대대
예비대: 제1대대
예비대 배치지점: 흑운토령(851고지)
제21연대[56]
연대OP: 수동령
주저항선: 백암산-1118고지
우일선: 제1대대
중앙일선: 제3대대
좌일선: 제2대대
해당 전투에서 입은 8사단 피해와 전과는 다음과 같다.

8사단 피해[57]
구분 전사 부상 실종
16연대 77 447 441
10연대 79 462 309
21연대 147 1,098 372
사령부 9 34 14
합계 312 2,041 1,136

8사단 전과[58]
구분 확인사살 추정살상 포로
16연대 1,976 3,647 6
10연대 2,925 3,903 10
21연대 2,831 4,238 23
합계 7,732 11,788 39

이때 8사단이 호출한 항공지원은 다음과 같다.[59]
횟수 대수
52회 286대

3.7.4. 11사단 삼현지구 반격작전

작전을 개시하기 이전, 제11사단은 미 제8군 직할로 소속되어 1953년 6월 14일부터 1954년 2월까지 약 8개월간의 교육훈련을 받고 있었는데 훈련도중 금성 돌출부의 상황이 굉장히 심각하게 돌아가는 바람에 7월 12일 12시부로 사단은 제2군단의 명령문에 따라 군단 예하로 들어가게 되었다.
① 군단은 7월 12일 12.00부로 미8군 명령에 의거하여 제11사단을 통합지휘하여 게속 현 임무를 수행하려 한다.
② 제11사단
㉮ 제11사단은 현 훈련임무를 계속하라.
㉯ 예하 1개 연대(사단중포 및 공병 1개중대 포함)를 7월 14일 06.00부로 제6사단에 배속하라.
㉰ 군단 역습계획에 따라 역습을 준비하라.

제11사단은 해당 명령문에 따라 제9연대 및 사단중포 그리고 공병 1개 중대를 6사단에게 배속케 하였으며 또 유사 시, 역습에 대한 준비를 전 부대에 하달하였다.
① 사단은 군단 역습에 가담을 준비하려 한다.
② 제13연대는 7월 14일 24.00까지 425고지로부터 547고지 사이(729고지 및 노동리 일대)에 대한 정찰을 완결하라.
③ 제20연대
㉮ 7월 14일 24.00까지 729고지에서부터 하현리 사이에 대한 정찰을 완결하라.
㉯ 1개 중대로써 7월 14일 24.00까지 마현 및 삼천봉 일대에 대한 기동수색을 완료하라.

이후 사단은 역습에 대한 준비를 바로 착수했는데 문제는 중공군의 7.13대공세로 인하여 제6사단이 주저항선에서 철수하게 되었고 때문에 사단은 군단작명 제5호에 의거해 제6사단의 철수를 엄호케 하였으며 철수를 엄호한 다음 6사단의 방어구역을 인수하여 새로운 신주저항선을 점령하도록 했다.
① 사단은 제6사단 방어지역을 인수하고 군단작명에 의거 신주저항선을 공격, 점령하려 한다.
② 미 제5공군 및 군단포병은 요청에 의하여 사단을 지원할 것이다,
③ 제13연대장
㉮ 7월 15일 04.00까지 주파리에 이동 즉시 신주저항선 A의 우일선을 점령하라.
㉯ D일 H시를 기하여 신주저항선 B(425고지에서 602고지에 이르는 선)을 공격 점령하라.
④ 제9연대장
㉸ 연대는 7월 15일 18.00부로 원대복귀와 동시에 적근산 북쪽 두목동 일대의 신주저항선 A의 좌일선을 점령하라
㉯ D일 H시를 기하여 신주저항선 B(552고지에서 462고지를 연결하는 선)를 공격 점령하라.
⑤ 제20연대는 7월 15일 05.00까지 화천 적근동에 이동 집결하여 사단예비가 되라.
⑥ D일 H시는 7월 15일 18.00이다.
⑦ 통신은 현행 SOI에 의거하라.
⑧ 사단 전방지휘소는 화천 상서면 산양리에 위치한다.
제6사단 작전 지휘하에 투입하였든 제9연대는 공격해온 적 약 1개 연대를 완전히 격퇴시켰으나 좌인접 부대인 수도사단 정면을 돌파한 중공군 제601연대는 제9연대 좌측방에 07.14.07.00에 공격해 왔으므로 07.00 제1대대 엄호하에 제2,3대대를 철수 개시하여 CT770380~CT770360에 배치 좌측방으로부터 드러 온 적을 저지함.
<第11師團 金城地區 戰斗詳報> 中

그리고 사단의 신주저항선 점령 명령을 들은 제13연대는 04시 주파리에 입성 후, 제1대대를 750-567고지간에 배치하였으며 제2대대는 750-797고지 서북쪽 500m선에 각각 배치하도록 했고 제9연대는 7월 15일 05시 부로, 6사단 소속에서 해제되어 사단에 원대복귀함과 동시에 사단의 명령에 따라 좌일선이 되었다. 이렇게, 제11사단은 신주저항선 a를 점령하는데 성공했으며 이후 반격을 준비하고 있다가 7월 15일 18시까지 신주저항선을 공격 점령하라는 명령문을 하달했고 이에 각 연대들은 명령에 따라 반격작전을 즉각 실행하였다.

한편, 전투 이전의 제11사단의 구성원을 보자면 사단 구성원중 무려 과반수 이상이 소졸이었으며 무학력자가 그 다음이고 중학,중퇴와 중졸은 거의 극소수에 불과했다. 또한 사단인원중 경남출신이 가장 많이 차지하고 있었으며 그중에서 이북을 제외하면 제주도 출신도 분포해 있었지만 거의 극소수였다. 그리고 각 구성원의 전투경험은 당시 사단이 후방에서 약 8개월간의 훈련을 받고 있던 탓에 신병과 고참병 비율의 격차가 거의 없어 전투경험이 굉장히 낮았다. 당시 2군단 작전상보에 기록된 제11사단 구성원중 고참과 신병의 비율은 다음과 같다.

제2군단 예하 사단들의 고참과 신병의 비율[60]
부대명 신병 고병
제8사단 40% 60%
제7사단 30% 70%
제6사단 35% 65%
제5사단 38% 62%
제3사단 31.9% 68.1%
제11사단 46.5% 53.5%
이는 타 사단에 비해 압도적으로 격차가 적은 수치이며 이 때문에 사단의 전투력에도 지대한 악영향을 끼쳤다. 물론 제11사단 사령부에서 작성된 "金城地區 戰斗詳報"에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작성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다. 소질.. 사단은 호남공비토벌 작전을 거쳐 동부전선 고착 방어전에서 강습전을 경험한 보병들이며 약간의 신병이 포함되여 있었음.
<第11師團 金城地區 戰斗詳報> 中

해당 전투상보에서는 신병의 숫자를 약간이라 표현하여 신병의 숫자를 줄이고 있지만 실제로는 위에 있는 표대로 당시 사단의 신병 숫자는 2군단 내에서 가장 많았다. 또한 제2군단 작전상보에서도 제11사단의 전투력에 대해 우려하는 내용도 나온다.
각 훈련소에서 16주간의 교육훈련을 받은 신병과 고 병들이며 해당 군단에 배속된 지 얼마 되지 않을 뿐 안이라 중부전선에 투입이 처음인 탓으로 전투 경험에 비추어서 우려되는 바가 있었으나...
<作戰詳報, 第二軍團司令部> 中

그러나 이러한 부정적인 평가에도 제11사단은 군단에 배속된 직후부터 지형에 알맞는 훈련을 함으로써 사단의 문제점을 어느정도 해결했고 이후, 사단은 곧바로 제1선에 투입되어 군단으로부터 부여된 임무를 수행해 제6사단 7연대의 후퇴를 성공적으로 이끌었으며 철수를 엄호한 다음에는 반격작전으로 전환 및 신주저항선 회복을 위한 공격을 개시하는 등의 높은 전공을 거두었다. 즉, 전투력이 낮게 평가받았지만 예상외로 잘싸웠던 셈.
③ 소질 ~ 연대는 장기간 동부전선 고착 방어전에 의한 고(故)로 중부전선의 유동전투에는 익숙지 못하였으며 대중공전투(対中共战斗)는 시초인바 제반상황를 각개 사병에 이르기까지 연구할 시간의 여유를 갖추지 못하였으나 주도면밀한 계획하에 교육훈련과 동부전선의 강습체험으로 공격 육박전(肉迫战)에 정신의 무장이 확고하였음.
<第十一師團 第二十聯隊 華川地區 戰斗詳報> 中
3.7.4.1. 602고지 전투
사단의 반격작전을 실행하기 이전 먼저 군단 작명 제5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군단은 군대구분을 일부 변경하여 작명 제5호로써 지정된 신주저항선을 조속히 점령 방어하려 한다.
2. 제11사단장
가. 7월 15일 18.00까지 신주저항선을 점령 확보하라
나. 7월 15일 18.00부로 제1전차대대로부터 1개 중대를 배속받으라.
다. 7월 15일 18.00부로 미 제5포병단으로부터 제20포병단을 지원받으라.
라. 제6사단으로부터 포병 FO를 조속히 인수하라.
3.제1전차 대대장은 전차 1개 중대를 7월 15일 18.00부로 제11사단에 배속하라
4.미 제5포병단은 제20포병단으로 하여금 7월 15일 18.00부터 제11사단을 지원케 하라.

제11사단은 군단의 이러한 조치로써 강력한 포병 지원 및 전차지원을 받게 되었으며 이외에도 군단포병과 미 제461중박격포 대대의 지원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사단은 7월 15일 05시에 사단의 신주저항선 A의 우일선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수행한 제13연대에게 425-602고지선까지 진출하라는 명령을 하달했고 이에따라 13연대는 제1대대를 주파리 서북쪽 567고지-750고지 간에 전개시켜 해당 선에서 공격을 개시하여 추동리 좌측방 무명고지에 위치한 중공군을 섬멸하고 이 일대를 점령한 다음 계속 진격하여 425고지선까지 진출하도록 명령했고 제3대대는 연대 중앙일선으로 조정해 서막동 북쪽능선에서 공격을 개시하도록 한 뒤 이후 425고지 서쪽 1km 지점에 있는 무명고지와 그 일대를 완전장악하도록 명령을 내린다.

그리고 제2대대는 좌일선으로 삼아 750고지-793고지를 점령하고 658고지를 탈취한 다음 요충인 602고지를 공격탈취토록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작전을 세우는 와중에 뜻밖에 일이 발생하고 마는데 왜냐하면 오전 10시에 제1대대 전면에서 중공군 1개 중대가 출현하여 그 주변을 정찰하고 있었음에도 대대장은 이들이 너무 기세등등하게 출현하여 왔기 때문에 적이 없다고 오판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정찰 헬리콥터 한대가 그들에 의해 격추되어 대대op에 떨어지자 대대장은 그제서야 정신을 차렸고 서둘러 사격금지령을 내린 뒤 연막탄이 하늘에 솟구치면 그때 사격을 하여 섬멸하라는 지시를 제1중대에게 하달한다.

이에따라 제1대대 제1중대는 중공군이 오길 기다리면서 몸을 수그린채 초긴장 상태가 되었는데 여기서 중대의 간절한 부탁을 들어주듯 중공군들은 아무것도 모른채 1중대 전면에 접근하여 어느새 7~8m까지 초접근하게 되었으니 이는 마치 악어 입에 스스로가 자진해서 들어가는 꼴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연막탄이 하늘에 치솟자 전 중대원들이 중공군에게 사격을 가하였으며 중공군은 이 사격에 의해 순식간에 분산되어 저항 한번 못한채 남하하면서 도주하다 중대원들의 집중사격에 결국 모두가 도륙되 거의 대부분의 인원이 죽었다고 한다.

이후 중대는 현장을 수습하며 시신을 확인하였으니 그 시신수만 무려 87구였고 그들의 무기를 모조리 노획하는 전공을 세웠는데다 포로 2명을 획득하는 전공도 세우게 된다. 당시 1중대장이었던 김영돈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참 통쾌한 일전이었다. 한놈도 놓치지 않았는데 그중 2명을 사로잡아 심문하였더니 아군은 이미 철수하여 없는 곳인줄 알고 주파리 일대의 정찰을 목적으로 출동중이었다고 하였다. 이때 시체를 확인하면서 발견한 수통에는 '위스키'가 가득 차 있었고 '파이프' 겸용의 피리를 전원이 소지하고 있었다.
김영돈, 당시 제1중대장

이와같이 중공군의 정찰중대를 섬멸한 연대는 제2대대로 하여금 602고지 일대에 거점을 두고 침입을 기도하는 중공군을 막기 위해 그들을 섬멸하도록 조치하였고 이에따라 제2대대는 16시에 제6중대를 750고지 북쪽하단에 진출시켜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후 중대는 658고지 서남 하단까지 통과해 19시쯤 목표 750m까지 접근하였을 무렵, 700고지에서 약 2개 소대규모의 중공군이 출현하여 중대의 진출을 방해하며 공격을 가하였다.

이에 중대는 60mm 포로써 그들을 모두 섬멸케하였으며 게속 진출하여 700고지의 7부 능선까지 접근하는데 성공하였는데 여기서 집중포격으로 인하여 중대는 돈좌상태에 빠져 결국 동고지의 5부 능선을 목표로 후퇴하게 된다. 그 직후, 중대는 그곳에서 다시 전열을 정비하여 먼저 고지정상에 포격을 날린 뒤, 20시, 다시 재공격에 나서 700고지의 8부 능선을 점령하는데 성공했고 이윽고 고지 정상까지 치달아 그곳을 방어하던 중공군들과 치열한 육탄전을 전개해 20시 30분에 700고지의 정상을 탈환하는데 성공한다.

이렇게하여 700고지를 탈환한 중대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더 나아가 200m 북쪽에 위치한 무명고지까지 쇄도해 교전거리 50m가 채 되지도 않는 육박전에서 약 1시간 간의 격전끝에 이를 탈환했고 그 결과 700고지 주변 일대를 완전장악하게 되었다.

그 뒤, 제2대대장은 제6중대로 하여금 중공군의 역습을 대비케 하였고 7,5중대를 무명고지 능선에 추진시켜 야간공격을 대비하도록 하면서 602고지에 대한 공격준비를 완료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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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동리 전투 경과도, 7월 16일~17일까지
이후 하루가 지난 7월 16일, 제13연대장 박응규 대령은 제2대대에게 602고지를, 제3대대에 602고지 동쪽 1km 지점의 무명고지를 각각 공격하도록 명하였으니 제3대대는 이러한 연대장의 명령에 따라 오전 06시를 기해 우일선의 제9중대를 동막동 서쪽의 금성천 연안을 따라 전진하도록 지시를 내린다. 이에 중대는 금성천 서안의 만곡부까지 진출하여 그곳에서 우로부터 제1,2,3소대 순으로 산개한 다음 진출한 전차대의 지원을 통해 전차포로써 전방 200m에 위치한 무명고지를 순식간에 제압하였고 제9중대는 제1소대로 하여금 제2,3소대의 지원을 받으면서 공격케 하여 오전 10시에 동고지를 점령하는데에도 성공한다.

한편, 제3대대 제10중대는 오전 06시에 LD선(567고지 북단)을 통과하고 목표 475고지를 향해 진출하다가 10시에 동고지 서단에서 중공군의 맹렬한 포격을 받음과 동시에 중공군 2개 소대가 출현하여 중대의 진출을 방해하고 있었고 이리하여 중대는 이들과 전면으로 격돌해 혈전을 치르게 되었으나 중공군의 치열한 집중포화로 인하여 결국 중대는 10시 50분에 567고지 북쪽 능선으로 물러서게 되었고 그곳에서 재정비를 해 다시 재공격에 나섰지만 중공군의 포격으로 인해 또다시 실패하고 만다.

이렇듯, 제10중대의 진출이 중공군의 저항으로 인해 가로막히게 되자 대대장은 중대를 475고지 서측방으로 우회시켜 9중대가 점령하고 있는 진지의 남쪽 1km에 위치한 무명고지를 탈환하도록 조치하였으며 이에 우회공격을 시도한 중대는 21시 50분에 목표 무명고지를 탈환하는데 성공하였고 이로써 475고지 퇴로가 막힌 중공군들은 이후 야음을 틈타 금성천 너머로 퇴각시도 중 그곳에 매복하고 있던 연대 수색대들에게 걸려 궤멸하게 되었다.

이때, 제11중대는 06시에 LD선을 출발하여 15시에 목표 602고지 동남쪽의 무명고지를 탈환했고 제10중대의 공격이 끝나자 진출한 예정선에서 방어진지를 구축하며 공격준비를 갖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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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2고지 전투 경과도

하여튼, 이러한 방식을 통해 제3대대는 이날 공격에 성공하였고 예정선에서 병력과 방어를 재정비하는 동안 제2대대는 기도비닉을 유의하여 야간공격을 하도록 연대장에게 제의했는데 이에 연대장은 제2대대의 야간공격을 그 즉시 승인했고 이후 23시에 대대는 목표 602고지 일대는 물론 중공군의 후방 보급로도 차단하면서 제7중대를 공격제대로 삼고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때 7중대는 5중대의 지원하에 공격을 감행하였는데 이에따라 7중대는 제1소대를 우일선으로하여 동쪽을 우회 공격토록 했고 제3소대를 예비대로 둔 다음 2소대를 좌일선으로 지정해 23시 LD선을 통과한 다음 각 소대들에게 기동을 실시토록 해 야음을 타고 계속 진출하였는데 여기서 우측 우회를 한 제1소대가 0시 30분, 목표 70m 이내까지 접근하자 곧 중공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결국 교착상태에 빠지고 만다.

물론 제2소대가 협공을 해 공격의 진전이 있는듯 했으나 상술한대로 중공군은 방망이 수류탄과 자동화기를 무차별적으로 퍼부었기에 화망을 뚫지 못하였고 이후 남쪽으로 철수를 감행해 그곳에서 다시 공격을 재개할 준비를 하게 되었다. 이때 대대가 마주친 중공군은 고참병만 무려 전체인원의 90%에 달하는 제54군의 예하 135사단이었다.

이렇게 제13연대 602고지 공격작전이 어렵게 진행되기 이전, 제9연대는 7월 16일 09시까지 제3대대를 봉닥덕리-633고지에, 제1대대를 633고지 북단-간진현까지 전개토록 하고 제2대대를 633고지-735고지 간에 종심으로 배치하여 중공군의 침투를 차단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633고지와 462고지 사이에 돌출한 587고지에 주둔한 중공군이 이를 방해하고 있었고 연대는 이를 격멸시키기 위해 제3대대에게 567고지에 주둔한 1개 중대규모의 중공군을 격퇴하도록 지시를 하달했다. 그렇게 14시 30분을 기하여 공격에 나선 제3대대 제11중대는 돌격을 감행해 8부 능선을 차지 후 고지 정상을 향해 공격을 가하였으나 중공군의 치열한 저항에 부딪쳐 약 30분간의 교전끝에 이를 격퇴시키고 고지를 점령하였다.

이 공격이 성공하고 하루가 지난 7월 17일, 사단은 각 연대의 반격상황을 종합해 보았는데 각 연대의 상황은 먼저 13연대의 경우 목표 602고지 일대를 탈환하지 못했으며 제9연대는 587고지를 탈환하였으나 552고지는 탈환치 못하였기에 사단은 제9연대에게 633고지 서측방의 462고지를 점령하여 미 제3사단과 연결한 뒤 552고지에 대한 공격계획을 세우도록 지시하고 제13연대에게는 602고지를 탈환하라고 지시하였다.

따라서 사단 우일선 제13연대는 우일선의 제1대대로 거리실과 금성천 만곡부 서안에 접한 406고지를 점령하라고 지시했으며 중앙의 3대대는 425고지를 그리고 좌일선 2대대에게는 602고지를 점령하라고 지시하였다. 이렇게하여 연대의 명령이 하달된 바로 그 순간 서측방으로 우회한 일부병력이 중공군의 후방으로 잠입하여 돌격을 감행하고 이와 동시에 대대주력이 정면공격을 개시하자 수류탄전과 백병전이 전개되었고 이윽고 중공군을 몰아내어 3시 55분, 602고지를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더불어 대대는 602고지를 점령 후 고지 북쪽의 A, B, C고지마저 점령하였다.

여기서 602고지가 탈취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제13연대장은 제1대대의 1중대에게 1개 전차 소대를 배속케 하였는데 여기서 제1대대는 제1중대를 우일선으로, 제2중대는 예비대로, 제3중대는 좌일선으로 전개해 목표 거리실과 406고지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이후 시간이 지난 오전 06시, 대대는 공격에 나서게 되었는데 제1중대는 연대장의 조치에 따라 전차 1개 소대를 받아 전차 소대를 전방으로 내세우고 금성천 연안을 따라 목표로 달려가기 시작하였는데 여기서 금성천 연안의 지형적인 문제가 발생하였다.

당시 금성천 연안은 전차와 보병이 함께 기동하기에는 용이한 지형이었으나 어느곳에서나 감제 가능한 곳이고 또 그로인해 중공군의 직사화력에 당할 수 있는데다 전세가 불리해지면 퇴로마저 차단될 위험이 매우 높았다. 따라서 제1중대장은 다음과 같은 조치를 취하였다고 진술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러한 위험을 무릅쓰고 금성천 연안을 공격로로 택하기 보다는 후동리 동북쪽 능선의 배사면을 타고 공격하는 것이 기도비닉에 있어서나 적의 직사화력을 피하기에 용이할 것으로 판단하고 후자로 택하기로 주장하였지만 전차와의 협동공격이 안된다는 이유로 전자를 택하도록 지시를 받았다.
김영돈, 당시 제1중대장

중대는 퇴로차단 및 적의 직사화력등 여러가지의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전차협동 공격을 위해서는 금성천 연안 공격로를 이용해야한다는 상부의 반응에 의하여 결국 금성천 연안을 이용하여 목표로 치닫게 된다. 당시 공격을 개시한 중대는 금성천 만곡리에 도달했을 무렵에 중공군이 406고지,425고지에서 일제히 포문을 열어 집중사격을 퍼붓고 이와동시에 1개 중대 병력이 배사면에 출현하여 격렬히 저항하는 바람에 중대의 진출이 돈좌되어 이들과 혈전을 벌이게 되었는데 아까 말했듯 지형적인 요소로 인하여 중대의 퇴로가 차단될 위기에 놓였고 중대는 사실상 진퇴유곡(進退維谷)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러한 혼란한 상황 속에서 제1중대장 김영돈 대위는 신속한 조치로써 전차의 엄호를 받으면서 서북쪽 능선에 치달려 위급상황을 피하였으나 전차소대는 중공군의 직사화력을 정면으로 얻어 맞았기 때문에 전차 대부분이 손상되어 있었고 그중에서 2대는 완전히 파괴되어 버렸다. 이는 2군단 작전상보에서 사단의 전차 손실로 기록되어 다음과 나타난다.

2군단 전차부대 피해[61]
부대 제6사단 제8사단 제5사단 3사단 7사단 11사단
전사 1 3 1 - -
부상 - 21 12 3 6 5
실종 - 4 - - - 2
전차 - 7 3 - - 2

여하간 중공군의 집중사격과 역습으로 인해 공격이 좌절된 중대는 이후 명령에 따라 철수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중공군의 차단사격에 의하여 중대는 곤경에 빠졌다가 간신히 원위치까지 철수하게 되었으며 이후 대대는 작전을 변경해 야간공격을 감행하려고 했으나 여기서 425고지를 공격한 제3대대가 중공군의 역습에 밀려 1km 아래로 밀려나게 되자 연대장은 406고지 공격을 일단 보류하고 제1대대에게 425고지 공격임무를 변경 및 부여하였기에 제1대대는 406고지 공격을 425고지로 변경하게 된다. 또 연대는 406고지 공격 실패를 대대장에게 책임지어 대대를 기존 대대장의 지휘에서 부대대장 지휘로 변경조치하였고 이렇게 공격목표와 지휘체계가 바뀐 제1대대는 제1중대로써 공격제대로 삼아 18시를 기점으로 425고지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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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5고지 전투 경과도

이때 제1중대에서는 425고지에 대한 공격작전을 하나 세웠는데 먼저 제1, 2소대를 후동리 북쪽 능선의 동서 양사면을 타고 전면으로 진출케 하도록 하며 제3소대는 예비로 있다가 양소대의 공격이 좌절되면 이를 초월키로 하는 것이다. 따라서 공격을 실행한 제1, 2소대는 전면으로 돌격해 나가 425고지 8부 능선까지 접근하게 되었는데 이곳에서 중공군의 저항이 매우 치열함에 따라 중대장은 예비대 3소대를 이끌고 나가 목표 서측방을 우회하여 측면에서 깊숙히 잠입한 다음 때를 마쳐 소대장의 돌격 소리가 울리니 잠입하고 있던 소대원들은 이 돌격소리를 듣자마자 총검을 휘두르며 적진으로 쇄도하게 되었으니 중공군의 화망으로 인해 고전중인 1, 3소대도 그 소리에 의거하여 전부 돌격해 나아갔다. 결국 그토록 지독하게 저항하던 중공군들도 중대의 힘찬 돌격에 의해 순식간에 무너져 버렸고 더 이상 버틸수가 없다고 판단한건지 시신 27구를 현장에 방치한 채 분산도주하고 말았다.

이렇게 425고지를 탈취한 중대는 시간을 확인하여 보니 자정에 가까운 20시라서 서둘러 병력을 재정비하도록 조치했고 그 뒤, 사주방어에 들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자정이 가까워질 무렵부터 중공군의 포격이 시작되었으며 곧 중공군이 역습을 가하여 425고지를 탈취하려고 달려들었다. 이에 중대장은 반사주방어로써 이를 해결해 달려들은 중공군들을 분쇄하였다.

한편, 제3중대도 이날 13시에 거리실까지 접적 없이 진출하여 목표 고지 약 200m에 이르게 되었으나 이곳에서부터 시작되는 중공군의 포화력으로 결국 더 이상 전진할 수가 없었기에 중대장은 지원포를 유도해 강행케 하고 15시에 1소대를 서쪽을 우회하여 측배에서 협공을 하도록 하였다. 또 제2, 3소대를 중대장이 직접 지휘하여 전면에 진출시키도록 조치를 취했다.

이리하여 중대주력은 우비와 같이 쏟아지는 중공군의 포탄세례를 뚫고 7부 능선에 접근하는데 성공하였으며 곧바로 돌격을 감행하려 했으나 중공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인해 돌격 개시가 어렵게 되어 이후, 교착상태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이때 서쪽으로 우회한 제1소대가 측면에서 화력을 집중시켜 돌입하자 중대장은 돌격을 외치며 주력을 휩쓸고 나아갔고 여기에 중공군들은 그 기세에 눌린듯 당황하여 제대로 된 저항도 못하다 유기시체 23구를 남기고 전투현장에서 도주하였다.

중대는 이러한 공격으로써 마침내 목표를 탈환했으며 20시 30분, 중대는 고지를 탈취하면서 생긴 흩어진 병력들을 정비하면서 동시에 사주방어에 돌입하였는데 얼마못가 22시쯤 제2중대에게 임무를 인계하고 제2중대는 해고지 북쪽 200m에 위치한 무명고지를 탈환하여 탈환구역을 더욱 더 넓혔다. 제3중대는 임무를 인계한 후, 후동리 전진하여 대대의 예비대가 되었다.

이번 작전으로 생긴 피해와 전과는 다음과 같다.
사살 629 전사 14
포로 3 부상 123
기관단총 12 실종 11
다발총 47 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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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연대 제1대대OP에서 전황을 시찰하는 사단장과 참모들

후동리 전투가 끝날때쯤 제13연대 제2대대도 602고지를 탈환 및 전방의 솟아난 3개의 봉우리인 A, B, C등을 모두 점령하여 재정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17시 30분부터 중공군의 포격이 시작된 이래 22시경에는 무려 3,000여발의 포탄이 602고지와 대대OP 일대에 낙하했고 이후 30분이 지났을 때에는 증강된 1개 대대규모의 중공군이 602고지와 A, B, C고지 정면에 출현하여 3면에서 포위망을 좁혀오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대대장은 A, B, C고지를 방어하던 제5중대를 602고지로 철수시켜 제6중대와 함께 중공군을 차단하라고 지시하였으나 제5중대가 602고지로 가기도 전에 602고지에 주둔중인 제6중대가 고지 동측방으로 침투한 중공군들의 공격으로 인하여 철수하게 됨에 따라 602고지는 중공군에게 피탈되고 말았다. 즉 제5중대는 퇴로인 602고지마저 차단되었기에 완전히 포위되었던 것이다.

이 상황에서 제5중대장은 602고지 탈환작전에서 입었던 부상으로 인하여 정신을 그만 잃고 말았고 제1소대장이 흔들어 깨우고 나서야 명령을 내릴 수 있게 되었는데 당시 소대장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그를 깨웠다고 한다.
중대장님! 적세가 날로 증강되어 분초를 다투는 위국입니다. 이대로 포위망 속에서 떼죽음을 당할 수는 없습니다! 어서 용단을 내려주십시오!
제1소대장 정상영 소위

이에 중대장은 중상을 입은 몸으로 이러한 유언을 남기게 되었다.
중대를 정 소위에게 맡긴다. 포위망을 뚫고 살아거던 대대장님께 중대장은 최후까지 싸우다 죽었다고 전해다오
제5중대장 김길상

중대장은 이 한마디를 끝으로 과다출혈로 결국 운명하게 되었으며 그의 죽음으로 곁에 있던 소대장은 그의 유언대로 반드시 포위망을 뚫기 위해 즉각 중대 선임하사관에게 특공대 5명을 선발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리하여 선임하사관을 조장으로 한 특공대가 서남쪽 포위망을 격파할 기세로 화력을 집중하는 사이 정 소위는 중대를 이끌고 동남쪽 포위망을 돌파하고 활로를 열기 시작하였는데 때마침 제7중대가 동고지 남단에서 중대의 퇴로를 엄호했으며 이와 동시에 포병의 연막탄 지원도 오게 되면서 중대는 무사히 포위망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렇게 중대가 포위망을 벗어난 직후, 대대는 다시 602고지에 대한 역습을 준비하였으나 연대장은 제2대대가 602고지를 다시 탈취하기에는 매우 어렵다고 판단했고 대대의 602고지 공격을 유보시키도록 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그리고 연대장은 공격을 유보시킨 다음 사단장에게 증원요청을 했으며 이에따라 사단장은 다음과 같은 작전지시를 하달해 제20연대 1개 대대를 제13연대 예하로 배속시키게 되었다.

제13연대 제2대대의 전과와 피해[62]
사살 120 전사 58
추정 살상 241 부상 206
노획무기[63] 76 실종 90
포로 2 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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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단은 7월 D일 H시를 기하여 602고지를 탈환하려고 한다.
2. 제13연대장
가. 7월 18일 12.00부로 제20연대 1개 대대를 통합 지휘하라
나. 7월 D일 H시를 기하여 602고지를 탈취하라
3. 제20연대장은 7월 18일 12.00부로 예하 1개 대대를 제13연대에 배속하라.
4. D일 H시는 7월 18일 16.00이다.

제20연대 3대대는 해당 명령문에 의거해 13연대로 배속되어 16시에 602고지 남쪽 500m 무명고지로 추진되었고 약 1시간이 지난 16시를 기점으로 포병의 지원과 함께 공격에 나서게 되었다. 공격에 나선 대대 주력은 3시간이 경과한 후 고지의 8부 능선까지 접근하는데 성공하였으나 고지 뒷편에 숨어있던 중공군들이 수류탄과 기관총을 난사하는등의 격렬한 저항을 펼쳐 결국 6부 능선으로 물러서게 되었으며 약 30분 후, 포격지원을 등에 업고 공격을 재개해 중공군과 백병전을 전개하여 20시 30분, 602고지를 탈취하였다.

그런데 1시간 후 중공군이 후속병력을 대동한 채 3면에서 압박을 가하면서서 공격을 가하여 왔으므로 대대는 박격포를 적극 이용하여 저항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결국 밀려나게 되면서 602고지는 피탈되게 된다. 이러한 소식은 곧 사단장에게도 바로 알려졌고 사단장은 격노하여 연대장들을 질책했으며 602고지 탈환임무를 13연대에서 20연대로 교체하게 되어 이에따라 제20연대 1대대를 602고지 남단인 삼현으로 출동시키게 한다.

한편, 제9연대는 새벽 1시 30분쯤 633고지 서북쪽에서 중공군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았으나 포병의 지원하에 이를 모두 격퇴시켰고 연대 수색대에게 552고지에 대한 공격임무를 수행토록 하였다. 수색중대는 정면공격과 동시에 동서 양측방에서 배후를 공격하도록 공격임무를 배정했으며 이어 지원포격과 항공기 지원을 얻은 뒤, 20시를 기점으로 총공격을 가해 22시 30분경에는 8부 능선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이때부터 중공군은 바위와 수류탄을 던지면서 격렬하게 저항했고 돌격을 차단해 중대를 교착상태에 빠지게 만든다. 이에 중대장은 특공대를 편성하여 중공군의 후방을 공격하기로 결심했고 그리하여 선정된 7명의 특공대가 포복으로써 배후로 잠입해 곧 돌격을 감행하면서 정면에 진출한 중대 주력이 돌격시키도록 하였다.

이로써 돌격에 성공한 중대는 552고지 정상에 순식간에 쇄도했고 정상 부근에서 격전을 벌이다 23시 50분쯤 522고지를 탈환하는데 성공한다.

이렇게 9연대가 522고지를 탈취하는 무렵, 제2군단장 정일권 중장은 중공군이 후방보급과 함께 병력을 증원하여 압력을 가중할 것으로 판단하고 군단예비인 7사단을 투입해 제11사단의 우일선의 일부 주진지와 8사단 좌일선의 일부진지를 인수토록 명령하였다. 또한 군단의 명령에 따라 제11사단은 제13연대 진지를 7사단에게 인계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사단은 군단작명 제8호에 의거 제13연대 작전임무를 제7사단에게 인게하려 한다.
2. 제13연대장
가. 7월 20일 04.00까지 주진지를 제7사단 제8연대에 인계하라.
나. 교대완료 후 서막동에 집결하여 사단 예비가 되라.
다. 7월 19일 06.00부로 예하 1개 대대를 제20연대에 배속하라.
라. 7월 20일 08.00부로 사단수색중대의 배속을 해제한다.
3. 제20연대장
가. 연대는 현 담당지역을 조속히 점령 확보하라.
나. 제13연대에서 7월 19일 06.00부로 배속되는 1개 대대를 통합 지휘하라.
4. 제9연대장은 현 임무를 계속 수행하라.
5. 사단수색중대는 7월 20일 08.00부로 제13연대로부터 배속을 해제, 사단 지휘 하에 복귀하라

제13연대는 위에 나왔듯, 602고지 임무를 20연대에게 인계하고 20연대 3대대도 원대복귀 조치를 취한 뒤, 사단의 예비대가 되었다. 그리고 제20연대는 제1대대를 602고지 남단 500m까지 진입시키고 연대 전방 지휘소도 658고지로 이동 조치하였으며 사단으로부터 사단 박격포 중대를 배속받아 화력도 더욱 강화되었다. 아울러 연대장은 602고지에 대한 공격 재반 상황을 검토한 후 제1대대에게 602고지 남쪽 기슭에서 역습을 준비중인 제3대대와 함세하여 목표를 탈환하라고 지시함과 동시에 제1대대장은 제1중대와 제3중대에게 공격임무를 부여하는 한편, 현존 병력이 1개 중대에 불과한 제3대대에게는 측방지원을 요청하였다.

이후, 시간이 지나 12시 31분이 되자 각종포화가 602고지 정상에 집중되었으며 제1대대 제1중대는 목표 고지 전방으로 진격하여 100m 전방에 도달했으나 중공군의 측방화력으로 인하여 결국 7부 능선으로 철수하게 되었다.[64] 중대는 7부 능선에서 다시 전열을 가다듬어 다시 공격에 나섰으나 이번에도 중공군의 탄막을 돌파하지 못하여 중대는 다시 물러나 근접항공지원을 요청해 F-51 편대가 목표지점에 약 3차례에 걸쳐 폭격하도록 하였고 대대장에 의해 합류한 제3중대와 같이 연대장의 지시대로 서측방으로 즉시 이동하여 그곳에서 돌격을 감행하게 되었다. 이때 동측방과 정면에서는 1대대가, 서측방에서는 3대대가 다 같이 함께 돌격을 가하였으며 이때문에 완강히 저항하였던 중공군도 결국 대대의 총검돌격에 의해 완전히 분산되어 A고지 방면으로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제1대대는 즉시 A고지와 B고지로 돌격하여 A,B고지 모두를 점령하게 되었으니 제13연대가 잃은 실지의 절반 이상을 회복한 셈이었다. 당시 602고지를 점령한 대대의 전과는 다음과 같다.[65]
사살 200
추정살상 404
경기관총 3
소총 50

다만 이때 상황은 그야말로 처참하기 그지 없었는데 당시 제1대대의 1중대의 경우 전투가 끝나자 잔존 병력이 중대장 포함해서 총 8명 뿐이었고 제3대대의 경우에는 42명의 전사자와 249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여 말이 대대지 실제로는 1개 중대도 채 되지도 않았다.
3.7.4.2. 전투의 끝
파일:rgekopgoprkrego.png
금성남방 삼현지구 전투 경과요도

이 무렵, 제9연대 수색중대는 오전 2시 30분부터 약 3,000여발의 포탄을 받고 있던 상황이었는데 그 과정에서 증강된 2개 중대 규모의 중공군이 출현하여 중대는 이들과 결사적으로 저항하였으나 탄약부족으로 인해 결국 철수하게 되었으며 철수 후, 중대는 탄약을 보급받은 후 오전 7시에 다시 재공격을 가하였으나 중공군이 진지를 보강하고 규모도 1개 대대로 늘어난 터라 실패하고 518고지로 철수하게 되었다.

이처럼, 불리한 전세가 이어지자 제9연대장은 수색중대를 현장에서 철수시키고 제3대대의 일부병력으로 552고지를 탈환하라고 지시를 내렸으며 이에따라 대대장은 제9중대를 486고지 남단으로 보내여 오전 10시를 기해 공격을 개시하게 된다. 그런데 중대가 목표 전방 약 70m까지 접근했을 때부터 중공군이 양측에 기관총을 설치하고 집중사격을 퍼부었기에 중대의 돌격은 순식간에 돈좌되었으며 이에 중대장은 5명의 특공조를 급히 편성하여 중공군의 배후로 침투시키도록 하였고 특공대는 중대장의 명령에 따라 배후로 잠입하여 이후, 중공군의 기관총 진지를 수류탄과 화염방사기로써 파괴하기 시작하였다.

바로 이때 중대장은 중대 주력을 적진으로 돌격시켰고 중공군은 이들과 육박전을 벌이다 다음날 0시 50분쯤 552고지를 버리고 도주하여 552고지를 중대에게 내주고 만다.

이렇게, 602고지와 552고지 모두 탈취 성공한 사단은 예정대로 13연대 진지를 7월 20일 4시부로 제7사단 8연대에게 인계하도록 했는데 여기서 중공군이 이날 3시에 462고지 정면에 1개 대대를 투입하여 피아간의 교전이 전개됨에 따라 교대시간이 지연되었고 오전 6시 40분쯤에서야 제7사단 8연대에게 진지인계를 하였다. 이후, 그들은 425고지-406고지 전투를 치르게 되었으며 제11사단은 현 전선을 유지하도록 노력을 가하도록 했으나 7월 20일 오전 2시 50분쯤, 602고지에서 중공군 약 2개 대대가 출현해 602고지를 방어중이던 1,3대대가 중공군과의 백병전 끝에 무너져버렸고 제9연대의 552고지 또한 마찬가지로 대대규모로 출현한 중공군과의 교전으로 무너져 결국 602고지와 552고지를 상실하고 말았다.

이에 사단장은 예비대로 전환한 제13연대를 불러 552고지와 602고지를 탈환하라고 지시했고 제13연대는 제1대대를 602고지로, 제3대대를 552고지로 각각 공격목표를 배정하여 공격을 가해 이를 모두 탈환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시작된 중공군의 반격으로 인해 또 다시 밀려나고 만다. 이후에도 정전을 맞이할 때까지 상호간 포격전이 계속되어 결국 602고지를 회복하지는 못한채 절반만을 확보하는 선에서 전투가 종료되었다.


제11사단 피해표
부대명 전사 부상 실종
제13연대 186 386 90
제9연대 98 479 67
제20연대 83 495 29

제11사단 전과표
부대명 사살 추정살상 포로
제13연대 725 1,426 18
제9연대 913[66] - 9
제20연대 140 687 2

3.8. 수도사단 횡격실 능선 쟁탈전

한편 미 제9군단장 젠킨스 중장은 수도사단을 방문하여 수습방안을 논의하였다. 여기서 수도사단장은 주저항선이 무너지고 부사단장과 1연대장, 기갑연대장의 행방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꺼냈고 "병력을 수습하여 117A도로를 연한 동서능선에 제2저지선을 구축하려 한다."라는 것을 보고하면서 군단장에게 포병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1개 연대 증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군단장은 수도사단장의 요구에 응했고 토성리 부근에 예비로 있던 미 제3사단 사단장에게 "사단 포병과 보병 1개 연대로 수도사단을 지원할 것이며, 금일(14일) 12:00까지 117A도로 남쪽의 수도사단 전투지역에 대한 방어책임을 인수하라"라고 말하며 수도사단을 지원하란 명령을 내린다.

따라서 미 제3사단장 스미드 소장은 포병 제9,10,38, 58대대의 지원을 받는 미 제15연대를 수도사단 지역에 형성된 중공군의 돌파구 남단에 투입하였고 그 후 미 제8군 사령관 테일러 장군이 사단CP에 들러 중공군이 수도사단 우인접인 6사단의 배후로 진출하는 걸 막기 위해 117A도로의 확보를 강조하고 돌아갔다.

이렇게 미 제3사단은 14일 오후 수도사단 지역으로 이동하였으며 이후 미 제65연대를 수도사단 좌익에 배치시키고 다음날 미명에 미 제15연대를 간진현-신목동 사이의 117A도로 남쪽의 동서로 뻗은 횡격길 능선에 좌로 부터 제1대대, 그리스 대대, 2대대 순으로 배치하고 3대대를 예비대로 두었다. 그리고 15일 12시에는 미 제3사단이 수도사단의 작전지역을 인수하였다.

이렇듯 미군이 177A도로 남쪽 능선에 강력한 제2저지선을 만들고 있는동안 수도사단은 도로 북쪽에 도로와 병행한 북안 능선인 434고지-395고지를 확보하기 위한 반격을 개시한다.

3.8.1. 횡격실 능선 전투

제1연대는 기갑연대의 3개 대대와 사단 하교대, 제59전차중대를 배속받아 6시 50분에 횡격실 능선을 목표로 반격을 개시하였다. 이때 1연대는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횡격실 능선을 점령하였는데 이는 당시 중공군이 횡격실 능선으로 진출하기 전이라 그랬다고 한다.

이렇게 기갑연대 1대대는 능선을 점령해 전방에서 철수하는 병력들을 수용하여 이들을 모두 후송하였다. 이후 대대는 더 진출하려고 노력해 보았으나 이들 능선 북쪽에 있는 D,G.L고지에서 중공군이 출현해 차지함으로써 더 이상 진출하지 못하였고

그 후 중공군이 하교대가 배치된 E고지를 공격하고 하교대를 몰아내는데 성공하였으며 이에 대대는 전차 2대를 끌고와 반격을 개시 해 E고지를 다시 탈환하는데 성공한다.(11:00) 그리고 대대는 전장정리에서 중공군의 유기시체 28구를 확인하여 수습하였다.

이처럼 기갑연대 1대대가 중공군을 상대로 버티는 동안 기갑연대와 제1연대의 예하 대대들은 하루종일 부대재편에 들어갔으며 미 제15연대 또한 수도사단 지역으로 이동하여 117A도로 남방의 능선에 새로운 저지선을 만들수 있었다.

파일:664005007.png

그러던 중 17시가 되자 추격해 온 중공군의 주력이 117A도로 북변진지로 진출하여 정면에서 압력을 가하기 시작하였고 다른 중공군 부대가 우측방 간진현 도로를 돌파하려 시도하게 된다. 이에 기갑연대 1대대는 미 제15연대 소속 1대대의 지원하에 117A도로 남쪽을 철수하여 중공군의 진출을 봉쇄하게 되었는데 이날 1연대 3대대는 좌인접 26연대 쪽으로 우회하여 일몰경에 제1연대 CP로 복귀하였으며 이 대대는 피해가 별로 크지 않아 병력이 매우 부족했던 1연대에겐 매우 큰 힘이 되어주었다.

한편 26연대는 방동 남쪽 연대CP를 집결지로 삼아 부대들을 재편성하고 있었고 이후 병력들이 속속 도착해 총 천명을 넘었다. 이에 수도사단장은 26연대가 비교적 피해가 적은 것을 보고 495고지-395고지를 탈환할 것을 명한다. 이렇게 26연대는 수습된 병력 천명을 데리고 117A도로 남쪽에 우로부터 제1,3,2대대를 전개시킨 뒤 야간 공격을 감행, 이후 117A도로를 넘어 북변 능선 하단으로 진출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중공군의 강력한 포격로 인해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였고 결국 26연대는 우인접 1연대가 117A도로 남쪽으로 철수하고 있다는 걸 사단장에게 보고 한뒤 방어로 전환할 것을 건의하며 승인을 받아 이후 자정을 기점으로 연대는 예하대대들을 전부 공격 개시 이전의 위치로 되돌려 놓고 추가명령을 기다리도록 조치를 취한다.
3.8.1.1. 재반격과 진지확보 실패
파일:수도사단 (100).jpg
7월 16일, 금성전투에서 부상을 당한 수도사단 소속 병사의 모습

공격을 한지 시간이 좀 지나자 사단은 오후부터 날씨가 풀린다는 예보에 따라 공격개시 시간을 12시 30분으로 정하고 좌,우 연대를 117A도로 북쪽의 4km에 달하는 횡격실 능선으로 진출하는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은 오전 8시경에 완성되었으며 때마침 군단장 젠킨스 중장과 미 제3사단장 스미드 소장이 도착해 15일 12시까지 전선을 미 제3사단에게 인계하고 이동 부근으로 진출하여 군단예비가 된 다음 부대를 재편하라, 단 사단포병은 동시부로 제2사단에 배속되어 동사단을 지원하도록 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에 사단장은 적진에서 탈출중인 장병들을 구하기 위해서는 계획된 공격을 끝낸 뒤 철수하는 게 옳다고 생각하고 공격 후 부대교대를 제의하며 군단장의 승인을 얻었다.

이후 7월 15일 9시가 되자 수도사단은 병력이 많은 26연대를 먼저 공격하도록 조치한뒤 중간목표를 점령하게 한 다음 12시 30분에 그 선에서 좌우 연대의 공격보조를 맞춰 최종 목표인 434고지-495고지를 향한 공격을 개시하도록 한다. 이때 수도사단의 양공격 연대는 한미 포병과 근접 항공지원에 힘 입어 단숨에 모든 목표 고지들을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이로써 수도사단은 자신들이 점령한 진지들을 미 제3사단에게 인계한뒤 후방으로 빠져 군단의 예비가 되는 일만 남게 된다.

파일:최초부대_상황도.png

그러나 수도사단이 임무를 완수할 당시의 미 제3사단은 117A도로 남쪽 능선에 주저항선을 구축하고 있는 중이라서 수도사단이 점령한 117A도로 북쪽 능선을 인수할 여력이 없던 상태였다. 결국 중공군의 반격이 시작되자 수도사단은 미 제3사단에게 진지를 넘겨주지 못한채 철수하였으며 이후 각 연대를 원진지로(1연대는 승암리,26연대는 원동으로) 돌려보낸뒤 사단은 군단의 예비가 되어 잔존병력을 수습하는데 열중한다.

금성전투에서 거둔 수도사단의 전과와 피해는 다음과 같다.

전과와 피해[67]
구분 사살 추정 살상
1연대 870 3,500
26연대 887 1,500
기갑연대 270 1,500
2,027 6,200
구분 전사 부상 실종
제1연대 748 192 448
26연대 94 466 497
기갑연대 35 411 359
포병단 17 40 72
기타 12 78 42
906 1,117 1,418

4. 전투 이후 상황

7월 19일, 2군단은 총반격을 한 지 단 3일 만에 별우지구를 수복하고 동시에 금성천 이남도 탈환하는 등 지정된 목표를 모두 성공적으로 탈환하자 반격작전을 중단시켰다. 그 후 군단은 6사단으로 하여금 5사단의 진지를 인수하도록 명하고 7사단을 11사단과 8사단 사이에 투입하여 전선을 강화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하지만 각 전방 사단장들은 금성천 이북 수복을 부르짖으며 금성천 이북 진출 시도를 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시도는 모두 취소됐는데 이는 미 제8군이 휴전이 바로 앞에 둔 상황에서 막대한 병력손실은 안 된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26일 이후의 전황은 산발적인 정찰전만 지속되었을 뿐 중대-대대규모의 고지전이나 전투는 전개되지 않았다.

한편, 7월 19일 금성천 이남 탈환이 성공하자 중국은 휴전회담에 복귀했으며 이 휴전회담은 매우 급진적으로 이루어져 마침내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됨에 따라 3년 1개월간 진행되었던 한국전쟁은 휴전으로서 마무리를 짓는다. 이 7월 금성전투에서 군단이 입은 피해는 총 14,373명이며 중공군도 최소 25,000여 명이 전사하는 큰 피해를 입었다.
"예하 사단 내에서 신속하게 통제를 회복하고 군단 전체가 시간 지연을 최소로 한 뒤 곧바로 공세를 취할 수 있었던 것은 군단의 공이다"
금성전투 당시 국군 2군단과 있었던 한미 고문관의 전체적인 평가.

이때 전과는 당시 2군단 전투상보에서 기록되어 있는데 작성된 전과는 다음과 같다.

종합전과 합계[68]
구분 확인사살 추정살상 포로
6사단 9,129 7,869 35
8사단 7,026 9,730 40
3사단 2,362 4,861 1
5사단 3,294 4,061 40
7사단 2,770 4,773 32
11사단 614 1,203 38
합계 25,189 32,497 186

당시 군단의 전과는 사살 25,189명으로 여기서 미 제9군단의 지휘를 받고 있는 수도사단의 전과까지 합하면 국군의 중공군 사살수는 27,216명으로 늘어나고 또 수도사단의 6,200명의 추정살상까지 합한다면 중공군 추정살상수는 총 38,697명으로 늘어난다. 따라서 금성전투때 국군이 추산한 중공군의 총 피해는 65,913명이다.[69]

노획무기 현황
무기명 노획수
RR 172
PPSH 972
LMG 137
HMG 10
SMG 53
60mm 박격포 10
로켓트 포 23
신호발사기 47
권총 1

금성전투 직후, 제2군단은 손실을 보충하고자 대규모 보충병력을 받았는데 그 수는 다음과 같다.[70]
계급/부대명 교체 복귀 기타
장교 780 34 - 814
사병 12,898 1,698 - 14,596
미 제5야전포병단 252 71 12 335
13,930 1,803 12 15,745

5. 결과

파일:별우.png

7월 공세로 금성 돌출부 피탈과 반격작전 상황도.

이 전투로 인해 한국군과 유엔군은 당초 전선보다 4km 정도 밀려났으나 애초에 금성 돌출부의 특성상 보급로는 한정되어 있기에 방어는 매우 어려웠으므로 이는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한국군 2군단은 중공군의 반격을 물리치고 금성천 이남을 탈환하였지만 공세 초기에는 제3사단이 후방 예비대 부족으로 인해 무질서한 퇴각 및 거대한 돌파구를 형성하는 등 큰 실책을 저지르고 말았다. 물론 군단은 군단의 재빠른 조치와 미8군의 지원을 합하여 신속한 반격작전을 전개했다는 커다란 의의도 있지만 그 전에 했던 행동들에 대해서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또한 군단 예하 각 사단들은 인접사단과의 연락을 전혀 하지 않았고 그 결과 제8사단이 인접사단의 붕괴로 인해 중공군에게 포위당하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설령 보고를 했다고 한들 왜곡을 섞은채 보고하였다. 당장 8사단의 경우, 공세 초기 중공군의 공세에 의해 전선이 완전히 돌파당했지만 다음날(14일) 9시 30분까지 군단에게 전선 상황은 건재하다는 왜곡된 보고를 했고 때문에 군단은 이 왜곡된 보고를 믿어 버리게 되었다. 이는 6월 공세 당시 미 고문단이 지적한 문제중 하나인데 당시 지적내용은 '한국군 장교들은 자신들의 체면을 굉장히 중요시하여 상세한 보고를 하지 않거나 또는 지연시켜 보고한다'는 내용이다. 즉, 군단은 6월 공세 이후에도 이러한 문제점을 전혀 고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군단은 상술한 바와 같이 중공군의 제1차 하계 공세 등을 모두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전쟁 말기에도 4개 사단을 전부 주저항선에 투입했지 군단의 자체적인 예비대를 두지않아 3사단의 붕괴와 더불어 군단 전체의 돌파구를 생성시키게 하였다.[71]

한편, 중공군의 피해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지만 먼저, 미8군의 경우에는 중공군에게 최소 7만명의 피해가 났다고 추정했고 국군은 중공군에게 6만명의 피해가 났다고 추정하였다. 다만 중국측에서는 금성전투에서 2만명의 피해가 났다고 주장하지만 공산권 자료 특성상 전과 과장 및 자국 피해 축소가 밥먹듯이 일어나는 터라 이 자료에 대한 신뢰성은 매우 낮다.[72] 따라서 중공군이 입은 피해를 정확하게 추산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로 가장 합리적인 추산치는 최소 5만명에서 6-7만일 것이다.

아무튼 이 전투 이후 전선은 소규모 정찰전과 포격만이 지속되었으며, 7월17일 공산측은 휴전체결을 수락하고, 24일 휴전감시위원회가 입국하고, 쌍방 연락회담이 열렸다. 그러나 7월 26일까지 일부구역에서 땅 한뙤기를 더 뺏으려는 혈전은 계속 지속되었다. 백암산 서쪽 별우지구에서는 7월 20일 ~ 24일 425, 406 고지를 노린 중공군이 최후의 공세를 가했으나 격퇴되었으며( 425고지-406고지 전투), 서부전선 사미천 유역 후크 고지(Hook)에서도 7월 26일 밤까지 UN군과 중공군의 전투가 벌어졌다. 이 사미천 전투를 끝으로 7월 27일에는 포격만 지속하다 오후 10시에 휴전이 발효되어 현재 휴전선에서 남과 북, 양측이 대치중인 상태에 놓여있다.

6. 여담

금성전투 당시 국군의 포탄 소모량은 그야말로 엄청났는데 당시 미 8군 군수쪽에서만 집계한 소모 포탄의 수는 105mm 포탄만 무려 200만발이며 이외에 각종 포탄까지 합하면 최대 400만발을 뛰어넘는 엄청난 포탄 소모량을 보여주었다.[73] 물론 중공군도 이에 맞서 190만발의 포탄을 준비했으나 그중 소모한 포탄은 고작 20만발 정도로 한국군의 포탄소모량에 비해 현저하게 적은 수치였다.

한국전쟁 말기때부터 연합군은 몰려오는 중공군을 상대로 네이팜 지뢰와 푸가스 지뢰를 고지 곳곳에다 설치하였는데 금성전투때에도 국군이 이를 자주 이용해 중공군의 대대급 병력을 한순간에 녹여버려 격퇴했고 이때문에 고지 주변에는 검게 그을린 중공군의 시신만이 가득했다고 한다.[74]

중공군의 대공세로 전선에서 무려 9.5km 밀린 2군단은 즉시 전열을 재정비하여 단 하루만에 반격을 가해 3일만에 금성천 이남을 탈환하였다. 이는 현리전투때와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당시 미8군 사령관 테일러 장군이 이를두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아예 문제가 없었던건 아니었는데 당시 2군단은 자체적인 예비대를 두지 않고 4개 사단 전체를 군단 주저항선에 배치함으로써 결국 중공군의 공세에 의해 3사단이 붕괴되자 순식간에 주저항선이 무너지는 초유의 사태를 내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국군포로 장무환이 이 전투로 인해 포로로 붙잡혔다.

당시 포로로 붙잡힌 수도사단 부사단장이었던 임익순 대령은 훗날 이러한 말을 남겼는데 국군포로를 이송하던 중공군이 걷지 못하는 포로들을 학살했다고 한다. 게다가 임익순 대령이 이에 항의하자 중공군은 이러한 말로 대꾸했다고 한다. “걸을 수 없는 자는 어디 가나 죽기는 매일반이야”

8사단 16연대 정원복 대위와 홍덕헌 중위가 중공군에게 포위되어 포로로 붙잡혔는데 휴전 이후 포로교환에서 무사히 돌아왔다고 한다. 백암산 전투에서 전사한 국군 장병들을 기리기 위해 백암산에 비목이 세워져 있다. 금성전투에서 붙잡힌 국군포로들이 포로교환때 제외되었다는 얘기가 떠돌고 있는데 이는 금성전투에서 포로로 붙잡힌 임익순 대령과 8사단 16연대 홍덕헌 중위, 정원복 대위의 사례를 보면 알수일듯 일부만 돌아온 것으로 보인다.

당시 상황을 보면 신병들이 주로 돌격을 주저하였기에 지휘관이 나서서 즉결처분을 하겠다고 협박하고서야 돌격을 감행했다고 한다. 당시 2군단 내에는 고참병이 약 60% 정도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신병도 이에 못지않은 40%를 차지하고 있었기에 이러한 문제가 많이 있었다. 이때 백선엽 육군참모총장이 이 전투에 개입하여 제2군단의 후방 및 행정업무를 맡았다고 전해진다.

LA 김태환 회장은 최대 3만명이 희생되었다는 취지의 주장을해 화제가 되었는데 자세한 내용은 링크 참조. #, #

다만 이 주장에 대해서는 상당한 무리가 있다. 먼저 김태환 회장이 근거로 제시한 미 8군 월간 보고서는 당시 한국전선의 전체를 통들어 피해를 계산했기 때문에 그 피해가 3만명이나 달한다는 뜻이지[75] 오로지 금성전역에서만 발생한 피해를 말한다는 뜻이 아니며 6월 공세도 마찬가지로 수많은 격전에서 발생한 피해와 금성전구(金城戰區)에서 발생한 피해도 합했기 때문에 국군 피해가 총 2만명으로 나온 것이다. 다시말해 금성전투에서 국군 피해가 3만명이란 소리는 사실상 무리에 가깝다 물론 국방부에도 문제가 있긴 있다. 당시 국방부가 피해를 계산한 1차 사료는 제2군단 작전상보인데 국방부는 해당 작전상보만으로 가지고 국군 피해를 계산했고 그로인해 금성전투 국군 피해가 총 1만 4천명이라는 수치가 나온 것이다. 하지만 금성전역에서 싸웠던 미 제9군단 예하 수도사단과 제9사단의 피해를 모두 합하더라도 피해 수치는 1만 8천~1만 9천명대 수준에 불과하니 김태환 회장이 주장했던 피해에는 전혀 못미친다.

유엔군 사령관이었던 마크 클라크 장군은 당시 금성전투에 대한 전황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고했는데 이에 이승만 대통령은 전황에 대해 큰 불만을 표하면서 그에게 북진통일을 외쳤다고 한다.[76]

해당 전투 직후 휴전이 발효되자 제2군단 내 각 사단장들은 크게 실망했다고 하는데 이중 특히 제3사단장 임선하 소장은 정일권 군단장에게 휴전협정 소식을 듣고 "생각 좀 해봐야겠습니다. 모두 울고 있습니다."고 답변했으며 제5사단장 장도영은 "군단장 각하! 마지막으로 한번 만 기회를 주십시오. 이대로는 사격 중지를 시킬 수 없습니다"고 군단장에게 크게 항의했다고 한다.

수도사단 제1연대가 공세 단 하루만에 완전붕괴된 이유중 가장 큰 원인은 예비대 문제와 사단장의 오판으로 인한 잘못된 화력배정 때문이었다고 한다.[77] 결국 중공군의 기도비닉에 넘어간 수도사단은 후퇴 직후 남은 병력이 1,500여명이라는 최악의 상황에 맞이하기 이르렀다. 하지만 전투 후에 수도사단 병력은 총 10,809명이었는데 이는 수도사단이 미 제9군단 예비대로 있으면서 잔존병력 수습과 동시에 신속한 신병보충을 했기 때문이었다.[78]

제3사단 제18연대 제1대대장 김종민씨는 해당 전투에서 금성천을 건널때 총탄이 마구 빗발치는데 그저 터벅터벅 걷고만 있어서 그의 부관이 크게 당황했다고 한다.
그는 후에 내게 이렇게 술회를 한 바 있다. 금성천 다리 위에 아군의 시체가 즐비하고, 적탄은 빗발치며 복부 관통상을 입어 죽어가는 헌병이 내 다리를 잡고 "장교님 나 좀 쏴주십시오"하는 상황인데도 무슨 불사신인 양 한 발자국도 뛰지 않고 그저 터벅터벅 걷고만 있는 대대장이 돌아버렸나 싶을 정도로 밉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먼저 뛰어 달아날수도 없으니 간이 다 탈 지경이었다고.
대전쟁, 김종민 저, 218p

공식적으로 한국군 2846명이 사망하고 8141명이 부상(영구장애)를 입었으며 미군 사망자도 305명이 나왔다. 중국측 자료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만도 한국군 2766명과 미군 70명을 포로로 잡았다고 주장한다. (공식적으로 4136명 실종 및 미송환) .

중국측 위키에서는 공산군 포로들을 일방적으로 송환거부하고 정전협정에 서명하기 거절하는 (자력으로 더 싸우겠다고 위협하는) 이승만 정부를 벌하기 위해 발생한 전투로 기술하고 있다. 간진현~602/552고지~425/406고지~금성천 남단 (경계선)을 최종 저항선으로 하여금 더 이상의 진격은 절대로 할 수 없었다. 국군의 해당 구역 철수 직후 보급상태는 매우 좋지 않았기에 군단은 사방거리에 낙오자 수습소를 설치하고 보급을 추진해 건빵을 나눠줬다고 한다. 돌출부에는 특별보급으로 카라멜도 줬다고 한다.[79]

파일:중동부전선 지도.png

현재 제7보병사단/칠성부대 관할구역이며 회색부분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영토에 속한 비무장지대. 이전에는 한국군의 전선이 옛 금성군 도로(민가)까지 돌출하였으나 우리 정부가 정전협정 체결을 의도적으로 연기시키는 바람에 돌출부 재점령에 혈안이된 북중연합군의 7.13 대공세를 유발, 결국 유엔군은 적근산/백암산 방면으로 황급히 후퇴해야 했고 금성천 하류지역을 되찾아오는 선에서 최종적으로 휴전이 성립되었다.

7. 대중문화

  • 1969년 발표된 가곡 비목(한명희 작사, 장일남 작곡)은 금성 전투 당시 전사한 무명용사의 비목을 소재로 한 노래로, 가사가 새겨진 기념비가 당시 격전지였던 백암산 OP 정상에 세워져 있다.
  • 2011년 영화 《 고지전》의 애록 고지가 금성 일대에 위치하고 있다.[80] 다만 당시 있었던 여러 고지전들을 섞어 연출했기에 유의.


[1] 그러나 실제로는 425고지-406고지 전투로 정전협정 체결 직전까지 계속됨 [2] 다만 이건 국군측 추산이고 중국측 집계를 보면 매우 적은 수치이나 공산권 자료의 특성상 신뢰성은 낮다. [3] 정확히는 철원군과 화천군 사이에 있는 말고개 대전차방호벽에서 화천군 쪽으로 계속 주행하다 보면 볼 수 있으며, 제3보병사단에서 관리하고 있다. [4] 유엔군이 6.25 전쟁에서 마지막으로 실행한 공세로 휴전회담에서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는 공산 진영에 압박을 가하기 위해 모든 전선에서 대략 10km씩 북상하였다. 이 공세를 끝으로 쌍방은 완전히 진지전(요충지를 요새화하고 싸우는 것)으로 방침을 바꾸게 된다. [5] 작전에 투입된 부대는 한국군 2사단(군단 좌익/김화 동쪽지역과 돌출부 서쪽), 미 24사단(군단 중앙,돌출부 중앙으로 폴라선까지 진격함, 후일 미 40사단과 교대됨), 한국군 6사단(군단 우익/교암산~북한강 서쪽 지역) [6] 노메드 선은 북한강과 금성천이 연결되는 지점을 중심으로, 폴라선은 더 위쪽으로 금성 남쪽 2km 까지 설정한 전선이다. [7] 이 공세를 시작한 원인에는 1953년 6월 21일에 작성된 육본기록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알 수 있다. "5월 18일 체포된 46군 133사단 소속 포로 진술에 의하면 현재 적은 공격을 감행할 기도를 충분히 갖추고 있으며 이번 공격이 결과로 휴전회담에 대하여 압력을 한번(一番) 더 가하자는 것과 국군 및 유엔군을 시험해보자는 것과 북진을 절제하고 있는 한국군에게 미리 일침을 주어 북진기도를 봉쇄하는데 있으며 전(全) 전선에 걸쳐 모색전을 시도하려는 말을 중대 정치지도원(政治指導員)으로부터 들었다 함." [8] 6월 공세 시기 한국군 8, 5사단이 소모한 포탄은 총 38만발인데 중공군은 이보다 살짝 적은 31만발의 포탄을 소모하였다. [9] 제20병단의 이와 같은 계획은 단계별로 3개 방향에서 금성돌출부의 국군부대를 섬멸하는 것이었다. 즉 동부와 서부집단이 견부에서 돌파공격을 실시하고 이후 중앙집단과 협조하여 돌출부 중앙의 국군을 포위섬멸하는 작전인 것이다. [10] 하지만 중화기 부분에서는 확실히 밀렸는데 특히 60군 예하 180사단은 75mm 포 12문만 보유하고 있었고 76mm 포는 아예 없었으며 그나마 가용가능한 75mm 포도 12문 중 10문에 불과했다. 또 중공군은 금성전투를 위해 약 190만발의 포탄을 준비하였지만 국군은 중공군에 비해 그야말로 차원이 달랐으며 이때문에 국군은 금성에서 105mm 포탄만 무려 200만발 이상 날리는 위엄을 보여주었다. [11] 길이 1320m [12] 물론 국군이 보급로를 끊은 것도 있다. [13] 당시 미 제9군단의 월간 전투보고서를 보면 군단의 근접항공지원에 대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는데 당시 근접항공지원은 7월 한달동안 무려 844번이나 있었고 국군 9사단쪽에 356번의 근접항공지원을, 수도사단은 92번, 미 제2사단에 23번 마지막으로 미 제3사단에 270번으로 총 741번의 근접항공지원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그중에서 교량 파괴가 2번, 도로 파괴 10번, 또 9개의 포병진지를 폭격으로써 파괴하였다. [14] 출처:第二軍團作戰詳報, 18~21p [15] 당시 파괴통 사용법은 1951년 2월 5일, 제27군에서 발간된 <步兵野外攻擊戰術動作>에 아주 잘 나와 있다. [16] 또 포병도 이 2개의 도로에 많이 다녔기에 후에 엄청난 리스크로 작용하게 되었다. [17] 이때 중공군의 일부병력이 중대본부가 있는 467고지로 향할 때, 주력은 좌인접 1대대와 전투 지경선을 이루고 있는 진목동 계곡으로 몰려왔다. [18] 당시 연대는 예비대를 모두 써버려 예비대가 없었다. [19] 그리고 1대대 우단부에 배치된 3중대의 전차들마저 3대중 1대가 격파되는 상황에 이르고 말았다. [20] 화기 중대장 이덕로 대위가 전사하고 미군 관측반원 전원이 부상을 입음. [21] 당시 중공군은 박격포를 미친듯이 쏴재졌고 피리와 나팔을 부르는등 국군의 사기를 저하시켰다. [22] 이 때문에 국립서울현충원에 장성급 장교중 유일하게 위패만 안장되어었다. [23] 이후 대대는 그곳에서 1연대CP 피습 사실과 기갑연대 2대대의 피습상황을 참모장 김태규 대령으로부터 듣는다. [24] 이때 간진현에서 탈출하지 못한 미제424포병대대는 1대대 전차소대의 엄호로 8인치 4문을 안전하게 끌어내리는데 성공한다. [25] 출처: 第三師團金城川地區战斗, 9p [26] 출처: 作戰詳報, 第二軍團司令部, 33p [27] 출처:作戰詳報, 第二軍團司令部, 39p~40p [28] 출처: 第三師團金城川地區战斗, 9p, 조봉휘 (2015) 6.25전쟁시기 다부동지역에서 한국군 총기 및 탄약 보급실태, 290p [29] 第三師團金城川地區战斗, 8p [30] 제67군 소속 [31] 사진 출처: 6.25전쟁사 제11권,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408p [32] 연습 시 4개 (가, 나, 다, 라)을 발동시켰는데 '가'안은 485고지에 대한 역습이다. [33] 당시 사단 포병대대는 오전 9시에 17번 도로상의 추동에 위치한 예비진지로 이동했는데 이들 포병대대가 도착한 시기는 2시간 후인 오전 11시였으며 그동안 포병지원은 이루어지지 않아 지원화력에 약화를 초래하였다. [34] 사진 출처: 금성전투, 국방부, 138p [35] 그러나 백암산으로 철수한 3사단 각 부대들은 제대로 된 방어진지 연결도 못했고 또 지휘관의 방어계획도 서로 맞지 않는지라 결국 중공군이 공격한지 단 30분만에 백암산을 피탈 당하고 후퇴하게 된다. [36] 출처: 第三師團金城川地區战斗, 38p [37] 당시 1대대는 좌로부터 제3중대를 금성천 남안에 제2, 9중대를 북한강 남안에 배치시켰고 예비인 1중대를 2중대 직후방에 배치하고 있었다. [38] 이에 따라 27연대는 오전 8시 20분에 목적지에 도착하여 대대별로 산개한뒤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39] 출처: 12 July 1953, U.S. Army Operational, Tactical, and Support Organizations, 16p [40] 출처: 步兵第6师团第2联隊轎岩山战斗詳報目錄附錄. 2p, 步兵第6师团第7联隊白岩山地區战斗詳報, 30p, 步兵第6师团第19联隊華川地區462高地战斗詳報 16p, 作戰詳報, 第二軍團司令部, 33p [41] '?'로 표시된 경우는 해당 전투상보가 없기 때문에 작성함. [42] 作戰詳報, 第二軍團司令部, 36~40p, 陸軍戰史 第七券, 陸軍本部, 361p [43] 출처: 步兵第6师团第2联隊轎岩山战斗詳報目錄, 20~22p [44] 이때, 군단장 정일권 중장은 6사단 일부 부대의 무질서 후퇴를 수습하기 위하여 사단장 백인엽 소장에게 지휘책임을 지고 질서있는 철수를 하도록 강조하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45] 경기일보 보도에 따르면 금성천과 북한강이 연결되는 462고지까지만 사수한채로 휴전을 맞았고 한다. 당시 관찰병에 의하면 교암산에 주둔하던 19연대 수색중대 병력들 12명만 구사일생으로 생환한채 모두 전사하거나 포로되어 북한으로 붙잡혀 갔다고 한다. 이후 추가적인 인명손실을 막기위해 주파리 (칠성전망대) 방면으로 재빠른 철수를 명령했고 이때 교암산과 돌출부를 잃게 되었다. https://www.kgnews.co.kr/news/article.html?no=367128 참고 [46] 죽음 [47] 한편 각 연대의 주보급로는 좌일선 10연대가 17번 도로를 주보급로로 사용했고 우일선 16연대는 집십리-광대골 도로를 주보급로로 사용하였다. [48] 전투상보에는 6,000명으로 기록됨 [49] 애초에 당시 중공군은 1만 5000톤의 물자와 190만발의 포탄을 준비해 금성전투를 시작했고 하루에만 1,900톤의 포탄을 소모하여 엄청난 포탄 소모량을 보여주었다. [50] 5월 기준 8사단의 고참병 비율은 전체의 70% 정도였는데 6월 공세를 겪은 이후로는 이중 10%가 사라진 60%였다. [51] 이후 15시 30에야 탈환 [52] 3조는 중대장 2조는 백호을 1조는 금종남이 지휘하였다. [53] 이때 10중대는 탄우를 뚫고 선두에서 적진으로 돌격하여 목표탈취의 전공을 세웠으며 10중대장은 앞으로 나가 "돌격 앞으로!"라는 소리를 치며 적진을 휩쓸었다. [54] 사단 우일선 [55] 사단 좌일선 [56] 사단예비대 [57] 출처: 金城遠南地區撤收及別偊地區反击作战 [58] 출처: 戰鬪詳報, 步兵第八師團 [59] 출처: 金城遠南地區撤收及別偊地區反击作战 [60] 출처: 作戰詳報, 第二軍團司令部, 36~40p, 陸軍戰史 第七券, 陸軍本部, 361p [61] 출처: 作戰詳報, 第二軍團司令部, 53p [62] 출처: 第十一師團 第十三聯隊 金城地區 602高地 戰斗詳報, 4p [63] 중기관총 2정, 경기관총 2정, PPSh 기관단총 30정, 기관단총 3정, 동탄창(同彈倉) 12개, 수류탄, 10발 [64] 이때 시기에 대해서는 군단 작전상보와 11사단 20연대 전투상보랑 상당히 차이가 나는데 먼저 군단 작전상보의 경우, 1,3대대가 LD선을 통과한 시기는 12시 31분이며 13시 30분에 602고지에 대한 총검돌격을 개시했다고 서술한 한편, 연대 전투상보에서는 12시 20분에 LD선을 통과했고 이후 13시 10분에 돌격을 개시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는 아마도 보고체계에 혼돈이 빚어져 발생한 일로 추측된다. [65] 출처:作戰詳報, 第二軍團司令部, 296p [66] 추정살상+확인사살을 합한 값 [67] 출처: 수도사단 전투상보 [68] 출처:作戰詳報, 第二軍團司令部, 309p [69] 여기서 186명의 포로까지 합할 경우 피해는 66,099명이다. [70] 출처: HEADQUARTERS II ROK CORPS Personnel Statistic Reports Period 1 thru 31 July 1953, 1p [71] 다만 7월 15일 18시 기점으로 미 제8군의 11사단이 2군단에 배속되어 11사단은 군단의 예비대로 배속되게 된다. 그리고 전투 직후에는 3사단이 군단의 예비대가 되었다. [72] 당시 소련 고문단의 기록에 따르면 금성 지구 전투에서 발생한 중공군 피해가 나오는데 당시 고문단에게 보고받았던 제20병단의 피해는 7월 13일~16일까지 발생한 사상자가 총 8,653명이고 17일~20일까지 발생한 사상자는 고작 193명이라 나온다. 이는 중국 공간사의 주장과 완전히 다른 내용으로 제20병단이 당시 현장에서 자신들의 피해를 축소보고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73] 게다가 미 제9군단의 경우에는 7월달에 금성에서 소모한 포탄이 531,045발이었다고 한다. [74] 다만 포격이 떨어지면 불능이 되었기 때문에 완전한 위력을 보여주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남은 네이팜 지뢰와 푸가스 지뢰들이 그걸 무시할만큼 엄청난 위력을 보여주었다. 대표적인 예가 3사단 23연대 9중대의 방어이다. [75] 특히 국군 제2사단은 7월달에 발생한 사상자만 무려 1,112명이었다. [76] 다만 7월 19일에 제2군단이 금성천 이남을 완전탈환하면서 이승만도 어느정도 기분이 풀렸는지 이후 제2군단으로 전선 시찰을 해 국군 장병들을 격려했다. [77] 한국전쟁사 제9권 603쪽을 보면 당시 수도사단 포격지원 현황은 다음과 같다. "13일과 14일 새벽중 1연대 정면에 소비한 포탄은 27,000발 26연대 정면은 66,000발 14일 중 소비한 포탄은 1연대 정면 13,000발 26연대 39,000발" [78] 당시 미 제9군단 사령부에서 작성한 'Hq IX Corps, Combat Operations Command Report, July 1953'을 보면 당시 미 제9군단에 보충된 병력은 23,820명이었으며 그중 국군 9사단은 1,738명의 보충병을, 나머지 대부분의 병력은 수도사단쪽에 대거 집중되었다. [79] 출처:作戰詳報, 第二軍團司令部, 84p [80] 이는 초반부 판문점에서 군사분계선을 정할 때 잠깐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