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07 20:14:31

신돌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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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훈장 대통령장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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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돌석 장군 기념관 내의 충의사에 있는 초상화
출생 1878년 11월 26일
경상도 영해도호부 축산면 도곡리
(現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신돌석장군1길 31)
사망 1908년 12월 11일 (향년 30세)
경상북도 영덕군 북면 눌곡리
(現 경상북도 영덕군 지품면 눌곡리)
본관 평산 신씨[3]
순경(舜卿)
신장 170cm[4]
부모 아버지 신석주(申錫柱)
어머니 분성 김씨 부인
배우자 한재여
자녀 장남 신만이
서훈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1. 개요2. 생애3. 행적에 대한 낭설과 반박4. 기타5. 가족6. 대중매체에서7. 같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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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제국 시기 항일 의병 활동을 한 중인[5] 출신 의병장. 본명은 신태호(申泰浩), 자는 순경(舜卿), 별명은 태백산 호랑이.

2. 생애

경상북도 영덕군[6] 축산면 출생으로, 축산면에 생가가 보존되어 있다. 어린 시절부터 건강하고 용감하기로 소문이 났고 거리가 되는 시내를 단번에 뛰어넘을 정도로 몸이 튼튼했다 한다. 1896년 을미사변 단발령에 반발해 일어난 의병들처럼 19살의 나이에 궐기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후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의병들이 다시금 일어나자 신돌석 역시 의병을 일으켰는데, 전선주 파괴와 전선 가설을 방해한 활동들이 이 시점에서 이뤄진다. 야사에 따르면 일제가 전선을 잇는 작업을 하는 중 단숨에 총을 가진 왜병들을 때려눕힌 뒤 나무 전신주 여러 개를 뽑아서 패대기치고 사라졌다고 한다. 단신으로 행했다는 것은 설화적인 면이 강하고 의병들과 함께 전투를 거쳐 성과를 거둔 것이 이처럼 전해졌을 가능성이 높다. 공격 대상이 전신주였던 이유는 당시 전신주가 일제 침략의 첨병으로 여겨져 의병들의 주요 공격 목표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1907년 울진에서 의병을 모집해 영덕의 관공서들을 습격하며 활동했고 원구에서는 일본군과 전투하며 성과를 보였다. 그의 병력은 산악 지역에서 주로 유격전을 펼치며 지세에 능하지 못한 일본군을 상대로 큰 성과를 보였다. 1896년 시작한 의병 활동을 바탕으로 능력을 인정받아 자연스럽게 추대되어 활동했는데 신출귀몰한 그의 작전에 경악한 일본군은 신돌석을 크게 경계했으며, 회유책이나 현상금을 걸어서 그를 포획하려 했다.[7]

최후에는 그의 부하였으나 일본이 내건 투항자 면책 선언에 마음이 꺾여 투항한 김상렬 형제의 손에 살해당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3. 행적에 대한 낭설과 반박

야사가 풍부한 인물로 현대 한국인들이 그에 갖는 인식 대부분이 신장군실기, 신의장전 같은 행장기류, 야사에 편중되어 있고 실존 인물 신돌석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일본 경찰이 남긴 공식 기록과 한국의 행장기, 야사들이 엇갈리는데, 당연히 전자가 우선된다. 한국측이 별 검토도 없이 무비판적으로 모아놓은 기록을 믿으면 신돌석은 1907년에 3만의 의병을 거느리고 강원도와 경기도까지 세력을 뻗쳤다고 하는데, 3만명이면 13도 의병 총 병력보다 많은 과장이며 300명 전후로 본다.

여러 공식 매체에서까지 가명인 신돌석을 본명인 것처럼 소개해서 평민이라는 인식이 퍼져 있으나 실제로는 향리 가문으로 명백한 중인 계급이다. 다만 "아전에서도 밀려나 갓을 쓸 수 없는 형편에 이르렀다", "영양군 출생으로 보통농가에서 자랐다"라는 기록에서 보듯이 출신 자체는 중인이나 큰 의미가 없었다고 한다. 조선 후기 사회가 그러했듯이 평민과 다를 바가 없었던 중인이라는 것. 조선시대에 평민은 본관이나 를 가질 수가 없었다. 신돌석이 평민이라는 인식을 퍼뜨린 것은 체제 특성상 하층민 중심의 무장 투쟁을 강조하는 북한 학자들이고 이를 과거 남한 학자들이 무비판적으로 수용했기 때문이다.

1907년 13도 창의군이 창설될 때 평민이라 합류 거부당했다는 설이 퍼져 있는데 신돌석은 상술했듯 중인이고 퇴계 종가의 지원도 받았으며 양반 부하들도 여럿 있었다. 또한 13도 창의군에는 평민 의병장 김수남같은 이들도 당당히 포함되어 있었다. 합류하지 못한 이유는 경북 영양 일월산 방면으로 밀려나 포위되어 있어 양주에 가지 못했던 것일 뿐이다. 신돌석의 봉기 자체가 간접적으로 고종의 궐기 독려에 의해서였고 퇴계 종가에서 자금 지원을 받은터라 신분 문제로 배제되었다는 주장은 편견에 찌든 낭설에 불과하다. 양주까지 갔는데 거부당했다는 주장은 양주와 영해 지역 물리적 거리, 점검 감소해가던 의진의 전력, 일본측 기록을 감안하면 성립될 수 없다.

국가보훈처를 비롯한 독립유공자 공훈록, 독립운동사 자료집에서 실어놓은 신장군실기, 신의장전 등의 행장기, 야사류 기록들은 흔히 알려졌듯이 신돌석의 고종사촌들이 포상금을 노리고 신돌석을 살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외에도 이름이 다른 김씨 형제들이 포상금을 노리고 신돌석을 살해했다는 형제에게 살해당한다는 기본 바탕은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영덕 눌곡에서 김상렬과 김상근 형제에게 독주를 권해받아 이에 취한 채 사망했다는 기록, 밤중에 암살당했다는 기록, 옛 부하인 김상렬의 간청으로 투숙하다 암살당했다는 기록 등이 있다. 이후 형제는 신돌석의 머리를 들고 일본군 앞으로 갔지만, 오히려 일본군은 사로잡아 오라고 했는데 죽여서 가져왔다는 이유로 그냥 내쫓아버렸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 부분도 사실일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아무튼 공통적으로 김상렬 형제들이 등장하고 있으며, 에 취하게 한 뒤 살해했다는 것도 비슷한 양상으로 펼쳐지고 있다.[8]

실제로는 1906년부터 일본이 토벌과 투항자 면책이라는 회유책을 반복해 신돌석 의진을 몰아붙였는데, 이로 인해 1907년에 이미 신돌석 의진의 전력은 크게 줄어든 상황이었다. 이들 형제도 이때 일본의 압박과 회유에 의진에 마음이 떠난 사람들이었다. 신돌석이 살해된 것도 정확히는 형제 중에 동생 쪽이 그의 부하였는데 신돌석이 그를 다시 의병진으로 데려가기 위해 형의 집을 찾아가 강권하나 형이 완곡하게 거부하자 격분하여 형을 집 근처 계곡으로 끌고 가서 구타한 뒤, 이웃집에 숨어있다가 뒤쫓아온 옛 부하인 동생에게 짱돌로 머리를 가격당해 사망한 것이다. 신돌석의 사망 직후 신고를 접수한 영덕경찰서장이 올린 보고서에 의하면 형을 구하려고 신돌석을 살해한 동생은 겁에 질려 그대로 달아나 숨어버렸고 형이 신고를 해서 경찰 측에서 신원을 확인하고 과정을 조사했단다.

청산리 전투를 더 이상 대첩이라고는 칭하지 않는 시대에 보훈처가 아무 생각없이 인용해 놓은 행장기나 야사에서 벗어나 역사속 신돌석에 대해 제대로 알고 싶다면 절판된 책이지만 안동대 김희곤 교수의 저작이 추천된다.

김교수는 당시 재판 기록과 신문, 일본 토벌대 자료 등을 샅샅이 뒤져 신돌석 관련 부분들을 하나하나 꿰어맞춤으로써 하나의 ‘설’로 전해진 부분을 ‘사실’로 입증하거나 실제와는 다르다는 것을 확인했다. 연구에 의하면 신돌석 의진의 규모는 대략 300여명 이었고, 활동 범위도 남쪽으로 영덕과 포항 및 경주 접경지, 북으로 강원도 삼척 남부, 서쪽으로 일월산에서 영양을 거쳐 청송을 잇는 선으로 경기도까진 애초에 갈 수도 없었다. 일본 경찰이 남긴 신돌석 사망기록을 바탕으로 신돌석 사망지를 찾아냈다. 평민 의병장 차별 운운하는 주장도 신돌석 의진에 투신한 양반들의 기록과 양반가의 신돌석 지원기록을 찾아내 반박한다.

4. 기타

  • 평해 월송정에 올라 읊은 시가 남아 있다.
    登樓遊子却行路(누각에 오른 나그네 문득 갈길을 잊어)

    可歎檀墟落木橫(낙목이 가로누운 단군의 폐허를 탄식하노라)

    男子二七成何事(남아 이십 칠세에 이룬 일이 무엇인가)

    暫倚秋風感慨性(문득 가을바람이 부니 감개만 이는 구나)
  • 다른 야사에 따르면 어떤 옹기장수가 신돌석의 죽음을 알게되자 옹기를 전부 깨버리면서 대성통곡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 그의 아내였던 한재여(韓在汝)[9] 여사의 묘가 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 포산리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 주민과 신돌석 후손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녀는 신돌석 사후 일본 경찰에 의해 모진 고초를 겪었으며 작고할 때까지 불에 탄 집에서 생활할만큼 힘든 삶을 살았다고 한다. 당시 일제 치하에서 항일 의병장의 가족을 도와주는 것만으로도 헌병의 의심을 살만한 행동이었기 때문에 마을 주민들도 선뜻 신돌석의 후손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 없었다고 한다. 다행히 한재여 여사는 독립을 지켜보고 1952년 75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 순국 이후 신돌석의 시신은 생가 인근 선산에 잠들어 있다가, 1971년 국립서울현충원에 예우를 갖추어 이장되었다.
  • 2021년 2월 경북남부보훈지청은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에 자리한 신돌석 유적지를 2월의 현충 시설로 지정하기도 했다.
  • 1871년생 동명이인 독립운동가가 있으며, 의병활동으로 2018년 건국훈장애국장을 수여받았다. #

5. 가족

  • 부 : 신석주 - 모 : 분성 김씨
    • 제 : 신우경(도환)
    • 제 : 신태범
    • 매 : 평산 신씨 - 매제 : 박수찬
  • 처 : 청주 한씨 재여
    • 자 : 신만이[10]
    • 양자 : 신병욱 - 자부 : 김분연[11]
      • 손 : 신재식
      • 손 : 신경식

6. 대중매체에서

파일:external/cine114.net/shszone_3541.jpg * 신돌석의 일대기를 그린 < 태백산 호랑이>라는 비디오 애니메이션도 나왔다. 1994년 대영팬더에서 자체 제작을 하였으며 1994년 광복절 MBC에서 방영하였다.[12] 그런데 본명인 '신태호'가 아닌 별명인 '신돌석'이라는 이름으로 나온다.[13]
  • < Why? 한국사 시리즈>의 주인공 중 1명인 신천지의 선조로 언급되었다.
  • 2012년 KBS 드라마 < 각시탈>에서는 서커스단의 사회자 신난다가 그 '옆집 사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 네이버의《2016년 한국만화 거장전: 만화 보물섬 특집》에서 2화 <고래>라는 백성민 작가의 작품이 신돌석을 그렸다.

7. 같이보기


[1] 본명은 신태호(申泰浩), 일명은 신태을(申泰乙), 신태홍(申泰洪), 신대호(申大浩). [2] 錫 자 대신 石을 표기하기도 한다. [3] 문희공파 32세 태(泰) 항렬. [4] 출처 [5] 교과서나 인물사전 등에서 평민으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아 평민 출신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중인이다. 자세한 사항은 낭설과 반박 목차에 후술. [6] 당시 행정구역상으로 영해(寧海)도호부다. [7] 한 번은 자수하면 평생 먹고 살게 해 줄테니 항복하라는 내용의 편지까지 보냈지만, 오히려 신돌석은 넘어가지 않고 교활한 놈들이라고 불같이 화를 내며 편지를 불 속에 집어던져버렸다. 신돌석의 깊은 나라 사랑을 대변해 주는 부분이다. [8] 흔히, 잠들었거나 취한 상태에서 공격을 받곤, "형님! 누가 나를 찔렀소!"하고 외쳐, 그것이 결국 유언이 되었다고 하는 류의 민담들도 여기에 해당된다. [9] 생몰년도 : 1878년 ~ 1952년 [10] 1908년 사망 [11] 생부 : 신태범 [12] 대영팬더판에 MBC 전속 성우들이 출연하였다고 KMDB에서 기록되어 있고 발매한 바로 그 해에 MBC에서 방영한 것으로 봐서 MBC와 대영팬더의 협력으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13] 어린 시절 씬에서 자기 소개할 때 본명이 아닌 신돌석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