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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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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전의 저자 허균[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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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실제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후대 인물 허균이 창작한 의적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논란이 있지만 간접적인 언급으로 소설 홍길동전에서 대중화된 의적 이미지를 노래 가사로 사용했으므로 저자 허균을 생각하고 언급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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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
全琫準
파일:JeonBJ.jpg
<colbgcolor=#94153e'><colcolor=#ffc224,#db9e00> 출생 1855년 1월 10일[1]
전라도 태인현
(現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태인면)
사망 1895년 4월 24일[2] (향년 40세)
한성부
(現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본관 천안 전씨 (天安 全氏)[3]
부모 아버지 전창혁(全彰爀)[4], 어머니 언양 김씨[5]
자녀[6] 장녀 전옥례(全玉禮)
차녀 전성녀(全聖女)
장남 전용규(全龍圭)
차남 전용현
사인 사형 ( 교수형)
신체 152cm[7]
종교 동학 천도교(天道敎)
별명 녹두 장군 (綠豆 將軍)
명좌(明佐)[8]
해몽(海夢)

1. 개요2. 생애
2.1. 동학 혁명 이전2.2. 동학 농민 혁명2.3. 최후
3. 기타4. 대중매체에서5.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조선 후기 동학 농민 운동 혁명가이다.

2. 생애

2.1. 동학 혁명 이전

전봉준은 백제(百濟) 개국공신(開國功臣) 환성군(歡城君) 천안 전씨 시조 전섭(全聶)[9]의 후손이며, 서당이나 한약방 등을 운영한 것을 보면 조선 말기에 흔했던 몰락한 중인 또는 양반 집안으로 보인다.

전봉준의 부친은 1827년생으로 창혁(彰赫), 형호(亨鎬), 승록(承祿) 등의 이름과 함께 족보명은 기창(基昶)으로 나오고(세간에 알려진 이름은 창혁), 모친은 1821년생으로 언양(彦陽) 김씨(金氏)라고 되어 있다. 전봉준의 부친 전창혁은 고부 마을에서 향교의 장의를 했다고 한다. 촌로들에 따르면 전창혁은 장의가 아니라 동리의 일을 보는 사람(지금의 이장)이었다고도 하였다. 전봉준은 이런 아버지 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다른 아이들처럼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다. 유난히 키가 작아 5척(약 152cm)에 불과했고 성인이 되어서도 녹두(綠豆)[10]라는 별명을 들었는데 가장 유명한 별명인 녹두 장군도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젊었을 때의 가정 생활은 상당히 곤궁했으며〈전봉준공초(全琫準供草)〉에 보면 땅은 논밭을 다 합쳐 세 마지기[11]밖에 되지 않았다고 하는데 당시 빈농층이 소유했던 평균적인 수준이기는 하나 한 가족이 살아가기에는 턱없이 모자라는 면적이다[12]. 공초에 따르면 태인에서 살다가 30살 즈음 고부 마을[13]로 들어와 서당을 열어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한약방을 차려 한의사 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풍수지리를 보거나 사람들의 길흉사에 날을 잡아주기도 했으며 편지를 대필해 주기도 했다.

30대 때 동학에 들어가 접주가 되었고 1890년대 초반에는 운현궁에 있으면서 2년 남짓 흥선대원군의 식객으로 있었던 적도 있다. 이에 연이 닿아 동학농민운동 과정에서 흥선대원군이 밀사를 보내어 전봉준과 밀통하려고 시도하기도 하였다.[14]

고부 봉기 직전 전봉준의 가장 두드러지는 행보는 1893년의 김제 금구(金溝)집회 참여이다. 금구집회는 '척왜양창의'를 외친 보은집회와 유사하게 '척양척왜'를 구호로 내세웠으나, 최시형의 교주신원운동의 연장선인 보은집회와는 맥을 달리했다. 애당초 보은이 아닌 금구에 별도로 집결했다는 뜻은, 남접 세력들이 조정과 타협적이었던 최시형의 북접과 분리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손화중(孫華中) 대접주와 서장옥 접주 등을 중심으로 한 금구집회 세력은 보은집회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긍엽을 파견하기도 하였다.[15] 전봉준도 접주로서 금구집회에 참석했다가, 보은집회가 해산하자 같이 해산하였다. 전봉준의 고부 봉기는 단순히 학정으로 인해 우발적으로 터져나온 봉기가 아닌, 동학도들의 조직화와 정치 세력화라는 맥락 안에서 해석되어야 한다.[16]

2.2. 동학 농민 혁명

이 무렵 유명한 탐관오리였던 고부군수 조병갑[17]의 횡포가 극심했다. 조병갑이 모친상을 당한 후 부조금으로 2천 냥을 거둬오라는 요구에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이 마을 대표로 나서 항의하다가 화가 치민 조병갑한테 곤장을 맞아 죽는 일이 벌어진다. 이후에도 조병갑의 횡포는 계속되어 자기 아버지의 공덕비를 세우는 비용을 백성들에게 전가했는데 만석보라는 이름의 저수지를 백성들의 노동력을 동원해 건설하고 사용료도 백성들에게 강제로 징수하여 착취하며 지방 토호들에게도 돈을 빼앗는 등 점입가경으로 치달았다. 결국 분노한 전봉준은 이때부터 나라를 개혁하겠다는 뜻을 품게 되었는데 1894년 농민 1천여 명을 이끌어 민란을 일으켰으며 만석보를 헐어버리고 관아를 습격해 빼앗긴 곡식을 되찾아 농민들에게 나눠주었다.[18]

조선 정부에서는 부랴부랴 조병갑 등의 부패한 관리를 처벌하고 새로이 박원명을 고부군수로 임명한 후 안핵사 이용태를 보내 잘못을 시정하겠다고 하였는데 사태를 추스르기 위하여 파견된 이용태 또한 극심한 횡포를 부렸다. 전에 왔던 새로운 군수 박원명은 할 수 있었던 일이 없어 별 도움은 안 되었어도 농민들을 달래주기라도 했지만 이용태는 전혀 아니었으며 농민들을 고문하고 처형하는 행패를 부렸다.

이에 분노한 전봉준은 1894년 3월 각 지역의 동학 접주에게 글을 보내고 손화중, 김개남 등을 끌어들여 전라도 무장에서 기포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동학 농민 혁명이다. 전봉준은 보국안민을 내세워 첫 목표로 전라도의 중심지인 전주부성으로 진군했고, 황토현과 장성 황룡촌에서 전라도 감영군과 경군을 격파한 뒤 전주부성을 무혈함락하는 기염을 토한다. 그러나만 뒤늦게 쫓아온 홍계훈의 경군이 완산에 주둔하여 전주성을 공격하고, 이걸 물리치러 출정했다가 되려 막대한 피해만 입고 전봉준 본인도 총상을 입는 위기에 빠진다.

그런데 고종이 청군을 불렀다가 일본군까지 진주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조정은 다급하게 화의로 태세를 전환했고 더 이상 싸우기 어려워진 전봉준도 화의에 나선다. 이것이 바로 전주 화약으로, 농민군은 전주 화약 이후 전주성에서 퇴거하여 해산한다. 이후 각지에 농민군이 자발적으로 집강소를 설치하자 전봉준은 관찰사 김학진을 만나 집강소를 공인받고, 전주에 집강소의 총본부인 대도소를 설치한 뒤 전라좌도의 집강소를 총괄했다.[19] 하지만 집강소가 전봉준의 지시가 아니라 농민들에 의해 동시다발적으로 난립하다보니 전봉준도 집강소를 통제하는 데 애를 먹었다. 어쨌든 전봉준은 김학진과 협력하여 관민상화에 입각한 개혁에 나선다.

이후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청일전쟁이 발발하자[20] 민심이 들끓었고 김개남처럼 재봉기에 나서려는 자들까지 나타났다. 전봉준은 세 가지 이유를 들어 재봉기를 반대했지만 김개남이 먼저 기포하려하자 더는 재봉기를 늦출 수 없었고 9월 초에 삼례에 대도소를 설치하고 2차 봉기에 나선다. 이번에는 1차 봉기 때 전봉준에 적대적이었던 최시형의 북접도 가담하였으며, 전봉준은 논산대회에서 동학농민군의 총대장으로 선출되었고 스스로를 양호창의군의 영수로 칭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은 한성 탈환을 위해 북상하다가 공주 우금치 고개에서 조일연합군의 막강한 화력 앞에 패배한다. 전봉준은 두 차례나 공주 공략을 시도했지만 모두 막혔고, 1만이 넘던 농민군은 전투가 끝나자 겨우 3천여명 밖에 남지 않았다. 전봉준은 퇴각하면서 계속 병력을 모아 논산, 원평, 태인에서 결전을 시도했지만 모두 패배했고 더 이상 싸울 수 없다 여겨 농민군을 해산했다.

2.3. 최후

전봉준은 몇몇 부하만 데리고 태인에 있는 김개남을 만나려 했지만,[21] 순창군 피로리에서 옛 부하 김경천의[22] 밀고로 한신현(韓信賢)이 이끌고 온 마을 장정들에게 포위당하고 말았다. 전봉준은 황급히 주막을 빠져나갔지만 담을 넘다가 장정이 휘두른 몽둥이에 맞아 고꾸라지는 바람에 붙잡히고 말았다.[23]

전봉준은 며칠 동안 순창 관아에 붙잡혀 있다가 12월 7일 일본군에게 신병이 인계되어 나주로 압송된 뒤 한양으로 가서 재판을 받았다.[24] 사형 선고를 받아 3월 30일 동지인 손화중(1861~1895)[25], 최경선(1859~1895)[26], 성두환(1845~1895)[27], 김덕명(1845.10.29~1895.4.23)[28]과 함께 1895년 3월 29일(음력) 사형을 선고받고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아 30일 새벽 2시 한양 무악재 아래에서 교수형으로 생을 마쳤다.[29][30]

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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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과서 등에 자주 나오는 대표적인 전봉준의 사진.[31] 1895년 2월 27일 일본 영사관에서 취조를 받고 조선의 법무아문으로 이감될 때에 찍힌 사진이다. 사진에서 가마에 타고 있는데 이유가 체포될 때 다리를 몽둥이에 세게 맞아 걷기가 힘들 정도로 다쳤기 때문이다. 후대에서는 사진으로 인해 본의 아니게 상투머리의 대명사가 되었다. 아기들의 윗올림머리나 여성들의 소위 똥머리를 전봉준 스타일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너에게 묻는다>라는 시로 유명한 안도현 시인은 사진을 보고 <서울로 가는 전봉준>이라는 시를 지었는데 안도현 시인의 등단 작품이다.
    눈 내리는 만경 들 건너가네

    해진 짚신에 상투 하나 떠 가네

    가는 길 그리운 이 아무도 없네

    녹두꽃 자지러지게 피면 돌아올거나

    울며 울지 않으며 가는

    우리 봉준이

    풀잎들이 북향하여 일제히 성긴 머리를 푸네


    그 누가 알기나 하리

    처음에는 우리 모두 이름 없는 들꽃이었더니

    들꽃 중에서도 저 하늘 보기 두려워

    그늘 깊은 땅속으로 젖은 발 내리고 싶어하던

    잔뿌리였더니


    그대 떠나기 전에 우리는

    목 쉰 그대의 칼집도 찾아주지 못하고

    조선 호랑이처럼 모여 울어주지도 못하였네

    그보다도 더운 국밥 한 그릇 말아주지 못하였네

    못다 한 그 사랑 원망이라도 하듯

    속절없이 눈발은 그치지 않고

    한 자 세 치 눈 쌓이는 소리까지 들려오나니


    그 누가 알기나 하리

    겨울이라 꽁꽁 숨어 우는 우리나라 풀뿌리들이

    입춘 경칩 지나 수군거리며 봄바람 찾아오면

    수천 개의 푸른 기상나팔을 불어제낄 것을

    지금은 손발 묶인 저 얼음장 강줄기가

    옥빛 대님을 홀연 풀어헤치고

    서해로 출렁거리며 쳐들어갈 것을


    우리 성상(聖上) 계옵신 곳 가까이 가서

    녹두알 같은 눈물 흘리며 한 목숨 타오르겠네

    봉준이 이사람아

    그대 갈 때 누군가 찍은 한 장 사진 속에서

    기억하라고 타는 눈빛으로 건네던 말

    오늘 나는 알겠네


    들꽃들아

    그날이 오면 닭 울 때

    흰 무명띠 머리에 두르고 동진강 어귀에 모여

    척왜척화 척왜척화 물결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 오랫동안 동학 농민군 강경파 지도자였던 김개남 효수된 사진이 전봉준의 시신이라고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32] 전봉준의 유일한 사진은 이 문서에 첨부된 사진으로, 체포되어 압송되는 모습이 사진으로 남은 것이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 전봉준의 봉기와 실패는 조선 백성들의 기억에 남았고 노래를 불렀는데 이 민요 파랑새이다. 호남 지방에서는 광복 후에도 자주 불려졌다고 한다. 들어보기[33]
  • 1980년대 전두환 전 대통령이 전봉준 장군 유적 정화 사업을 지시해 관련 사적지에 거창한 기념비들이 들어선 걸 두고 혹자는 같은 전씨 가문의 장군이라는 부분에서 연결점을 찾기도 한다. 하지만 전봉준의 본관인 천안 전씨와 전두환의 본관인 완산 전씨는 뿌리는 같을지언정 갈라진 지 천 년이 넘는 남남이나 마찬가지인 씨족이다.
  • 전봉준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의외로 없다. 본인의 자료가 남아있는게 없고 가계에 관한 1차 사료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1차 재판 기록에서는 부인과 2남 2녀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아들들은 전부 후처 남평 이씨 이문기(李文琦)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고 딸들은 전부 1851년 8월 16일에 태어나서 1877년 4월 24일에 죽은 전처 여산 송씨 송두옥(宋斗玉)의 딸[34] 사이에서 태어났다. 장남 전용규는 후손 없이 사망, 차남 전용현은 행방불명이 되어 남계 후손이 모두 단절된 줄 알았으나 전용현이 자신의 이름을 바꾼 채 족보와 호적도 은폐하여 숨어 지내면서 대를 이어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여계 후손으로는 장녀 전옥례는 아들 둘, 차녀 전성녀는 딸 하나를 뒀다고 알려져 있다. 전옥례는 1963년 갑오 동학 혁명제가 열리자 세상에 전봉준의 딸이라고 나타났으며 1970년 사망했다. 2004년 특별법 제정에 따라 유족이라는 사람들 4~5명이 유족 신청을 했으나 전봉준의 시신이 수습되지 않아 유전자 감식이 불가능하고 관련 증빙 자료가 없어 인정받지 못했다. 확실한 후손들이 남아 있어 유족으로 지정되고 제사도 받고 있는 다른 동학 간부들과 달리 전봉준은 후손이 불명확하여 천안 전씨 종친회에서 1954년 제사를 대행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전봉준의 후손을 자처하는 사람들도 별도로 제사를 지내고 있기는 하다.
  • 그의 먼 친척인 전정운은 동학농민운동 당시 그의 친척이라는 이유로 그의 명성만 들먹이고는 제대로 된 활동도 안 하고 뺀질거리다 전봉준에게 제대로 혼난 적 있었다. 그런 전정운이 전봉준이 죽고 나서 세운 사이비 종교가 백도교이고, 전정운이 죽어 백도교가 와해되자 그 차남 전용해가 백도교 잔당들을 모아 다시 세운 종교가 그 백백교이다.
파일:2018042409880001300_P4.jpg }}}||
  • 2021년 2월 28일 전라북도 정읍 황토현 전적지에 있는 동상이 철거됐다. 머리는 상투를 튼 끌려가는 모습이지만 몸 부분은 창조해서 만들어 어색한 데다가 제작자가 친일파인 김경승[36]이기 때문에 철거를 결정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새로 조형물을 만들 것인지 문화재청과 대안을 논의하기로 했다고 한다.

4. 대중매체에서

  • 1972년 개봉한 영화 '경복궁의 여인들'에서는 배우 황해가 연기했다.
  • 일본 만화 야스히코 요시카즈의 < 왕도의 개>에서도 등장했다. 전반적으로 동학농민운동 자체를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고 전봉준 역시 구시대적 충효 윤리에 얽매인 감이 있지만 호락호락하지도 않고 세상 물정을 모르지도 않는 인걸(人傑)로 그려진다. 주인공인 카노에게 '반제국주의'를 눈뜨게 했다는 점에서 사상적으로 김옥균 다음으로 영향을 끼쳤다고도 볼 수 있다. 일본 극우들은 당시 일본군의 침략을 '동학 폭동을 막고자 정당하게 개입한 것이다'라고 주장하는데 동학농민운동을 인용하는 수준이나 이 만화는 극우 내지 혐한과는 완전히 거리가 멀다. 애초에 작가부터 좌파 운동권 출신으로 일본의 급격한 팽창 정책과 제국주의에 비판적이다. 위의 만화에 등장한 전봉준과 일본인 주인공 카노의 만남은 역사적 근거가 있는데, 우치다 료헤이 등이 가담한 일본 대륙낭인들의 단체인 '천우협'이 동학 농민군에게 근대적 전술 훈련과 무기를 지원하겠다고 접촉해와 전봉준과 회견한 적이 있고, 훗날 이 인연을 바탕으로 동학 지도자들 중 일부가 친일파로 변해 일진회에 참가하게 되는 뒷사정이 있다.
  • 2004년 동학혁명기념 사업회에서 "녹두장군 전봉준"이란 제목으로 만화책을 출간했다. 작가는 안춘회
  •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에서는 바뀐 역사의 혜택을 보았고 원래 역사보다 훨씬 일찍 일어난[38] 1차 세계대전이 터질 즈음에 학생으로 공부하던 도중 애국주의와 민족주의 기류에 휘말려 학업을 중단하고 자원 입대했다가 고종의 눈에 들어 고종의 호위 무사로 출세한다. 다만 미국을 방문했을 때는 자연사 박물관에서 인디언 가죽으로 만든 동상을 보고 기겁하게 되고 아버지로부터 들은 "강국의 강군은 도적이나 다름없다. 이 나라가 지을 죄는 상이 명할 것이고 군이 따를 것이며 관이 뒤를 봐줄 것인데 너는 거기에 들어갈 필요가 없지 않았느냐"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게 된다. 이후 근위대장 겸 고종의 최측근이 되고 하나의 법도가 세상을 아울러서 국가를 단죄할 수 있는 관아가 만들어진다면 세계 평화를 이룰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품지만 본인도 현실성이 없다고 생각하는 듯. 애초에 이 세계관에서는 벨 에포크조차 없고 주인공인 고종만 해도 즉위 10년도 안 됐는데 1번의 세계대전을 포함해 전쟁을 4번이나 치러야 했고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에도 러시아-오스만 튀르크 전쟁, 페르시아 전쟁, 시베리아 국지전, 러시아 내전, 영불 전쟁, 미국의 캐나다 침공으로 촉발된 2차 미영 전쟁 등 전쟁이 끊이지를 않는 세상이다. 1~2년에 1번씩 전쟁이 터지는 데다 최초의 참호전인 조러전쟁과 이게 본격적으로 발전한 파리 방어전 이후에는 전쟁만 나면 참호전 내지는 유격전이 벌어지는 판이라 국가 연합을 통한 평화의 유지가 공허하게 들릴 수밖에 없다. 천주교 신자로 베르뇌 추기경[39]에게 큰 감명을 받아 자주 찾아가다가 세례를 받았다. 자세한 내용은 전봉준(폭군 고종대왕 일대기) 참조.
  • 2019년 SBS 드라마 녹두꽃에서는 배우 최무성이 연기했다. 키가 작고 외소한 체격의 실제 전봉준과 달리 담당배우는 182cm의 키에 덩치가 크다.
  • 고종, 군밤의 왕에서 동학을 알기 전에 공산당 선언을 접하고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그리고 아직 산업화가 충분히 진척되지 못한 조선의 풍토에 맞는 사회주의 이론을 고안하기 위해 흥선대원군의 지원을 받아 영국으로 가서 칼 마르크스 밑에서 사회주의를 공부했다. 이후 마르스크의 딸 엘리노어와 결혼에 성공, 공부를 끝내고 조선으로 돌아와 만민공산당의 새로운 영수가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전봉준(고종, 군밤의 왕) 참조.
  • 조선에는 쿠데타가 필요해요에서는 특이하게 주인공의 적대자 포지션으로 등장한다. 미래 전술을 잘 아는 주인공의 개입으로 우금치도 못가고 이인-효포가도에서 털려버리고 다른 동학군도 1895년이 다 가기 전에 전멸된 뒤 생사불명이 되었다고 언급된다.

5. 관련 문서


[1] 1980년대 교과서 위인전에서는 1854년생으로 표기되어 있기도 한데 음력 기준으로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2] 음력 3월 30일. [3] 24세손. 족보명 전영준(全永準) 또는 전병호( 족보) [4] 이명(異名) 전승록(全承祿), 전형호(全亨鎬), 전기창(全基昶), 보명(譜名) 전기창(全基昶) [5] 광산 김씨 설이 있다. [6] 족보에는 차남 밖에 올라가 있지 않는데 그 이유는 당시 딸들은 족보에 적지 않았고 장남은 일찍 죽었기 때문. [7] 5척. 키가 작아서 녹두장군이었다는 말도 있다. 오늘날의 기준으로도 아무리 높게 잡아야 164~5cm 정도에 불과하다. [8] 출처: 《천안전씨족보》 [9] 일본에 문물을 전해주며 깊은 관계를 맺었던 백제의 초창기 개국공신(開國功臣)이며, 천안 전씨 집안은 백제 최후의 국보급 불상을 남긴 흔치 않은 백제인의 후손이다. [10] 콩과의 작물. 요즘에도 한국에서 키가 작은 사람을 "쥐콩만하다"고 놀리기도 하는데 이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11] 약 6백 평(0.19ha) [12] 성인 한 사람이 하루에 소비하는 식량을 산출하는 땅 면적 단위가 1평이다. 순수하게 곡물만 따지면 1마지기를 1년 식량 소비량을 산출하는 단위. [13] 지금의 전라북도 정읍시 고부면 소재 [14] 전봉준은 재판 과정에서 흥선대원군과의 관계를 완강히 부인했는데 흥선대원군을 보호하려고 한 건지는 알 수 없다. [15] 재미있는 대목인데, 서장옥은 전직 승려 출신의 접주였고 긍엽은 아예 승려였다. 이처럼 동학과 갑오농민혁명에는 승려들의 참여도 적지 않았다. [16] 물론 학자에 따라 남접 세력을 북접과 별도의 '변혁지향세력'이라고 규정하는 건 지나치게 개연성으로만 전개된 주장일 뿐, 논리적 인과가 없다고 보는 경우도 있다. [17] 양주 조씨 가문으로 영의정을 지낸 백부 조두순의 빽을 믿고 날뛰었다. [18] 정작 모든 일의 원흉인 조병갑은 달아난 상태라 잡지 못했다. 그는 1898년 최시형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기도 하였다. [19] 전라우도의 집강소는 남원에 근거지를 둔 김개남이 통솔했다. [20] 얼마 전 발굴된 일청 전쟁 선전 조칙 초안에서 이토 히로부미는 이때 청나라뿐 아니라 조선도 선전 포고 대상에 포함하고 있었다는 게 밝혀졌다. [21] 전봉준 본인은 상경하여 서울의 정세를 정탐하려 했다고 진술했다. [22]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을 한 김경천 장군과 동명이인으로, 본래 전봉준 밑에서 서기를 맡던 자였다. [23] <녹두 전봉준 평전>에 따르면 전봉준의 젊은 시절에 어느 스님이 "장차 백만 대군을 통솔할 상이다. 다만 경천을 조심하라"라고 했는데 결국 스님의 예언이 맞았다는 야사가 있다. [24] 재판장이 갑신정변의 주역 서광범이었다. [25] 전라북도 정읍시 출생으로 본관은 밀양(密陽), 이름은 손정식(孫正植), 자는 화중(華仲·和中·化中), 호는 초산(楚山). 언제부터 접주가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1892년 벌어진 전라북도 삼례의 교조 신원 운동에 참여한 것으로 인해서 접주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1894년 동학군의 전주 화약 후에는 전라남도 나주 지방에서 폐정 개혁을 주도하였고 우금치 전투가 끝나자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에서 붙잡혔다. [26] 본명은 영창(永昌), 자는 경선(卿宣). 동학 농민군 영솔장으로 1893년 11월 고부 인근의 동학 접주들이 중심이 되어 농민 봉기를 준비했던 사발통문(沙鉢通文) 거사 계획에 참여하였으며 이후 고부 민란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우금치 전투 패배 이후 마지막 전투인 태인 전투에서 7천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2차 봉기에 참여하였고 12월 전라남도 동복현 벽성에서 농민군의 모집을 시도하다가 발각되어 체포된다. [27]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서 활약한 지도자로 충청도 청풍(현 충청북도 제천시 청풍면) 송계리 출신. 1893년 청풍 대접주로 동학에 가담하여 1894년 7월 충청도 단양 제천 지역을 대표하는 동학 집강에 임명되어 수많은 활동을 전개해나갔다. 1894년 8월 탐관오리를 처벌하는 등 폐정 개혁 활동을 벌였고 우금치 전투 이후 강원도 지역에서 영월 평창의 농민군과 연합해 10월 15일 정선을 점령하고 평창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28] 전라북도 김제 출신으로 본관은 언양(彦陽), 초명은 김준상(金峻相), 자는 덕명(德明), 호는 용계(龍溪). 손화중에 버금가는 동학 농민군의 2인자로서 42세 때인 1886년 동학에 입문하여 최시형의 제자가 되었으며 삼례 집회에서 교주 신원 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우금치 전투 이후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장흥리 안정사동으로 피신했다가 체포되었다. [29] 전봉준의 사형은 교수형으로 집행되었는데 최초로 근대적 교수형이 집행된 사례였다. 갑오개혁 이후였고 민간 범죄에 대해서는 교수형만 가능하도록 했기 때문에, 각본 재판이라고 해도 사형은 서양식 교수형으로만 집행해야 했다. 이후 정식 재판에 넘겨진 동학 지도자들은 전원 교수형에 처해진다. 사실 조선에서는 시체의 형상을 보존하는 형벌로서 효수보다 격이 높고 사약보다는 낮은 교형이 사형제도로 존재했던지라, '도적의 수괴'인 전봉준을 참수를 하지 않고 교형을 처했다며 분개하는, 매천 황현 같은 유림도 있었다고 한다(정작 서구에서는 참수와 총살형이 교수형보다 떳떳한 형벌로 취급되어, 전범의 경우엔 일부러 교수형에 처하는 전통이 있었다. 참수보다 할복을 높게 치는 일본은 또 달랐다.). [30] 사형 집행이 되기 전에 죽력고를 마시게 해달라고 요구했으며 죽력고를 마시고 난 뒤 기력을 회복했다는 일화가 있는데, 당당하게 요구해서 일본군들이 쫄았다고 한다. [31] 한동안 전봉준이 찍힌 유일한 사진으로 알려졌으나 2015년에 새로운 사진이 발견되었다. 기존에 알려진 사진과 불과 몇 초 간격으로 찍힌 사진이라 큰 차이는 없지만 본래 알려진 사진보다 화질이 좋고 전봉준의 눈빛이 살짝 누그러진 것을 볼 수 있다. [32] 한때 위인전에도 버젓이 사진이 실려 있었는데 출판사(특히 금성출판사)에 따라 김개남의 생전 모습이 같이 실려 있는 것도 함정. [33] 1970년대에 녹음해서 컴퓨터로 옮긴 것. 녹음 또는 파일 변환 때 문제가 있었는지 소리를 크게 해놔야 겨우 들린다. [34] 경허의 여동생이다. 묘는 전라북도 정읍시 산내면에 있다. [35] 서울 영풍문고 앞에 전봉준 동상 건립 [36] 후에 백범 김구 선생의 동상과 부산의 이순신 장군 동상 등을 만들기는 했지만 평가는 여러 가지 부분에서 그다지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37] 2000년 KBS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능애 역. [38] 벨 에포크가 보불 전쟁에서 나폴레옹 3세의 전사로 인한 나비 효과로 요단강 너머로 날아갔고 민족주의 기류에 휘말린 전쟁의 확전으로 오스트리아, 러시아, 오스만 튀르크, 덴마크, 에스파냐, 포르투갈, 영국, 대한제국 등이 줄줄이 참전해 유럽 전체를 휩쓰는 1차 세계대전으로 확전되었다. [39] 원래 역사에서 순교했던 베르뇌 주교로 조선이 개항한 뒤 천주교 신자를 크게 늘렸을 뿐 아니라 대한제국 황실과 좋은 관계를 맺고 2황자 의친왕 이강이 유아 세례까지 받는 등 승승장구해 교세가 명동 대성당을 황실 후원으로 지을 정도로 천주교 교세를 급성장시킨 공로로 조선 교구 추기경이 되었다. 영국 왕실의 빅토리아 멜리타 공주와 의친왕 이강의 결혼식 때 주례를 서주기까지 할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