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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 | 강팔수(姜八壽)·양검(楊儉) |
본관 | 진주 강씨 |
출생 | 1900년 12월 29일 |
경상남도
밀양군 부내면 남부리 (현 경상남도 밀양시 내일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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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92년 2월 26일 (향년 91세) |
대만 |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203호 |
서훈 | 건국훈장 독립장 수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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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2. 생애
1900년 12월 29일 경상남도 밀양군 부내면 남부리(현 경상남도 밀양시 내일동)에서 태어났다. 중화민국으로 건너간 그는 김원봉이 조직한 의열단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1924년 10월 군사훈련의 필요성을 느끼고 국민혁명군 간부 양성 학교인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 제4기 보병과를 졸업하였다. 그후 그는 국민혁명군 장교로서 교관, 국민혁명군 배련영장(排連營長) 부단장 주임(副團長主任) 등을 역임하며 대일전에 참여했다. 1940년 7월부터는 조선의용군, 조선민족혁명당 특파원 등으로 활동하였고, 1940년 9월에는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자 창군요원으로 입대하여 광복군 총사령부에서 근무했다.8.15 광복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환국을 결정하면서 일본군 내의 한적 사병 접수 업무 및 광복군의 확군 문제와 일본군 무장해제의 협조, 그리고 한국 교포들의 생명, 재산 보호를 위한 임시정부와 중국 정부간의 합의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 장군의 명령에 따라 광복군 각 지대에서 일본군 점령지역에 군사특파단을 파견하도록 하였으며 동시에 일본군 내 한적 사병을 접수하여 잠편지대(暫編支隊)를 주요 도시에 설치하였다. 그의 계획은 한적 사병이 약 10만 명일 거라고 예상하고 기설 3개 지대 외에 7개 잠편지대를 증설하여 도합 10개지대로 확장하며 각 지대는 완전한 사단 편제로 조직한다는 것이였다. 이때 광동 잠편지대에 참모로 배속되어 지대장인 최덕신과 함께 활동하였다. 1951년 중화민국 육군 소장으로 승진하여 복무하다가 1965년에 퇴역하였다. 이후 대만에 거주하다가 1992년 2월 26일 자택에서 노환으로 사망했다. 출처.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으며, 1992년 3월 20일 그의 유해를 국내로 봉환하여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