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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김시화(金時化), 윤추암(尹推岩) |
호 | 유암(維岩, 維巖) |
본관 | 무송 윤씨[1] |
출생 | 1893년 9월 10일 |
경상도
밀양도호부 부내면 노하리 (현 경상남도 밀양시 내이동) |
|
사망 | 1968년 11월 17일[2] (향년 75세) |
경상남도 의령군 의령읍 중리 자택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438호 |
서훈 |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1893년 9월 10일 경상도 밀양도호부 부내면 노하리(현 경상남도 밀양시 내이동)에서 태어났다. 이후 경상남도 부산부(현 부산광역시)로 이주하였다. 고향에서 한학을 수학하다가 일본으로 유학하여 구마모토현립공업학교(熊本縣立工業學校)를 졸업했다.[3]그는 1913년 경상남도 밀양군에서 안확· 이수택·황상규 등과 함께 비밀결사 일합사(一合社)를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했다. 1919년 2월 고종황제가 붕어하자 인산 행렬에 참여하기 위해 족제(族弟) 윤세주와 함께 상경했다가 당시 파고다공원에서 일어난 3.1 운동을 목격하고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그는 만세시위가 끝나자 당시에 습득한 기미독립선언서를 들고 귀향하였고, 이를 동화학교(同和學校) 교장 전홍표에게 전한 뒤 3월 13일 밀양면 장날 있었던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후 일본 경찰의 수배를 받자 윤세주와 함께 중화민국 길림성으로 망명했고, 1919년 4월 14일 부산지방법원 밀양지청에서의 궐석재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형을 선고받았으나 그는 이미 만주로 망명한 상태였다.
같은 해 그는 11월 9일 의열단에 가입하여 결사대원이 되었으며, 1920년 조선에 잠입하였다. 같은 해 의열단원 최수봉이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할 계획을 실행하려 하자, 거사에 사용할 폭약을 구입하여 국내에 반입하는 데에 기여하였다. 이 때문에 그해 12월 27일 소위 '밀양 폭탄 사건'이 일어난 직후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며, 1921년 6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폭발물 취체벌칙 위반 혐의로 징역 5년형(미결 구류일수 중 150일 본형에 산입)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밀양군에 협동조합을 창설하여 조합장으로 활동하다가 1934년 다시 만주로 망명하였고, 1937년 8월에는 하북성 북평시(北平市)[4] 동서패루(東西牌樓) 다복항용(多福巷用)으로 이주하여 김원봉과 함께 독립운동에 종사하다가 8.15 광복을 맞아 귀국했다.
광복 후에는 경상남도 의령군 의령면으로 이주하여 농업에 종사했다. 그리고 1946년 우익 정치인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대한독립촉성국민회에 입당하였으며, 의령군지부 위원장을 역임하다가 대한청년단에도 입단하여 의령군단 단장을 지냈다. 그 뒤 의령군수에 임명되어 1년간 재직하기도 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후보로 경상남도 의령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이시목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5년 민주당이 창당되자 입당하여 민주당 의령군당 위원장에 취임하였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주당 후보로 경상남도 대한민국 참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고, 같은 해 12월 신민당이 창당되자 이에 입당했다. 그러나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국회가 강제 해산되었고, 1962년에는 정치활동 금지대상자가 되었다.
1967년 신민당이 다시 출범하자 입당하였고, 그해 열린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상남도 함안군·의령군 선거구에 출마하고자 했으나 조홍래 후보에 밀려 공천에서 탈락하였다.
1968년 11월 17일 오후 6시 경상남도 의령군 의령면 중동(현 의령군 의령읍 중리) 자택에서 사망했다. 영결식은 11월 23일 오전 10시 의령면 읍내에서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윤치형에게 1963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그리고 1992년 12월 11일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에 이장했다.
3. 선거 이력
연도 | 선거종류 | 소속정당 | 득표수(득표율) | 당선여부 | 비고 |
1950 | 제2대 국회의원 선거 ( 경상남도 의령군) |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대한독립촉성국민회 ]]
|
2,801표 (7.48%) | 낙선 (7위) | |
1960 | 제5대 국회의원 선거 ( 경상남도 참의원) |
|
236,428 (15.40%) | 당선 (5위) | [5] |
4. 둘러보기
경상남도 초대 참의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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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선거구 | ||||
<colbgcolor=#a0a0a0,#5f5f5f> 제1부 | |||||
안호상 | 오위영 | 김용주 | 설창수 | ||
제2부 | |||||
윤치형 | 김형두 | 정상구 | 김달범 |
}}} }}}}}} |
]
[1]
대사성공파(大司成公派)-밀양 문중 25세 치(致) 항렬.
[2]
독립유공자 공적조서에는
1970년
11월 16일에 사망한 것으로 오기되어 있다.
[3]
구마모토고등학교(熊本高等學校)를
졸업했다고도 한다.
[4]
1928년
동북역치로
봉천군벌이
중화민국 국민정부에 복종하자 기존의
북경시는 북평특별시(北平特別市)로 개칭되었다. 1930년 6월에는
하북성 관할의 북평시로 강등되었다가 같은 해 12월 다시 승격되었다. 하지만 1937년 7월
루거우차오 사건으로 북경이 점령당하자 다시 하북성 북평시가 되었다.
[5]
1960. 12. 14 탈당 후
신민당 입당, 1961. 5. 16
5.16 군사정변으로 의원직 박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