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6 13:51:29

이수택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a11, #a11 20%, #a11 80%, #a11); color: #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단장
김원봉
고문
김대지 황상규
단원
강세우 강인수 고인덕 곽재기
권정필 권준 김광추 김기득
김방우 김병현 김상옥 김상윤
김성숙 김시현 김익상 김지섭
김철호 나석주 남정각 박문희
박자혜 박재혁 박차정 박희광
배동선 배중세 배치문 서상락
송천흠 신악 신영삼 신채호
신철휴 오성륜변절 유자명 윤세주
윤치형 이구연 이병철 이병희
이성우 이수택 이육사 이종암
이태준 정이소 최수봉 황옥불확실
최용덕 한봉근 한봉인 홍가륵
유시태 이원대 이원기 윤병구
유석현 정율성불확실 문시환 이춘암
공약 10조
① 천하의 정의의 사(事)를 맹렬히 실행하기로 함.
②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신명을 희생하기로 함.
③ 충의의 기백과 희생의 정신이 확고한 자라 함.
④ 단의(團義)에 선(先)히 하고 단원의 의(義)에 급히 함.
⑤ 의백(義伯) 1인을 선출하여 단체를 대표함.
⑥ 하시(何時) 하지(何地)에서나 매월 1차씩 사정을 보고함.
⑦ 하시 하지에서나 매 초회(招會)에 필응함.
⑧ 피사(被死)치 아니하여 단의에 진(盡)함.
⑨ 1이 9를 위하여 9가 1을 위하여 헌신함.
⑩ 단의에 배반한 자는 처살(處殺)함이다.
5파괴
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매일신보사
④ 각 경찰서
⑤ 기타 왜적 중요기관
7가살
조선총독 이하 고관
② 군부 수뇌
대만총독
④ 매국노
⑤ 친일파 거두
적탐(밀정)
⑦ 반민족적 토호열신(土豪劣紳)
조선혁명선언 황옥 경부 폭탄사건 }}}}}}}}}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이각(李覺)
자 / 호 덕윤(德潤) / 일몽(一夢)
본관 광주 이씨 (廣州 李氏)[1]
출생 1891년 2월 17일
경상도 칠곡도호부 파미면 이동
(현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 귀바위마을)[2]
사망 1927년[3] 7월 4일 (향년 36세)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 귀바위마을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488호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이항진은 그의 조카이다.

2. 생애

이수택은 1891년 2월 17일 경상도 칠곡도호부 파미면 이동[4]에서 아버지 이정환(李珽煥)과 어머니 광산 김씨 김기(金沂)의 딸 사이의 2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일찍이 약목면 소재 동락의숙(同樂義塾)과 경성부 소재 보혜학교(普惠學校)에서 수학하였다. #

그는 1913년 경상남도 밀양군에서 항일비밀결사 일합사(一合社)를 조직했으나 동지들이 체포되어 활동을 중단하였으며, 같은 해 경상북도 풍기군에서 채기중· 한훈· 유창순· 유장렬 등과 더불어 광복단(光復團)을 결성하여 군자금 모금 및 친일반민족행위자 처단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19년 3.1 운동 직후 박중화 등과 함께 만주로 건너가 같은 해 11월 10일 길림성 길림현에서 김원봉· 곽재기· 이종암 등과 의열단을 조직하였으나, 그해 겨울 모친의 병환소식을 듣고 귀국하였다.

그후 국내에서 자금 조달과 무기 관리를 맡았으며, 1920년 3월 곽재기·이성우(李成宇) 등과 더불어 밀양군 김해군 하계면(下界面)[5]의 주요기관을 폭파하려고 폭탄 권총을 밀반입하려다가 발각되자, 피신하였다.

그러나 곧이어 1920년 12월 이종암·구영필(具榮泌)· 김상윤 등과 더불어 밀양경찰서를 폭파할 계획을 모의하고, 같은 달 27일 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여 순사부장(巡査部長)에 상처를 입혀 죽게 하였다. 이 사건 직후 피신한 그는 부산부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벙어리 행세를 하여 7일만에 석방되었다.

그후 계속 의열단원으로서 활동하던 중 이종암·김상윤· 서상락 등과 군자금을 모금하려다 1924년 1월 25일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같은 해 5월 1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폭발물 취체벌칙 위반 및 다이쇼 8년( 1919년)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6개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7년 2월 19일경 병보석으로 석방되었으나 #, 가혹한 고문의 여독으로 끝내 그해 7월 4일 칠곡군 자택에서 37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같은 달 10일에는 왜관면 각 사회단체의 연합장으로 거행될 예정이었으나, 일제 당국의 금지로 간소하게 치러졌다. #

8.15 광복 1951년 12월 9일 사회부에서 그의 유가족들에게 생활비를 지급하였다. #

196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으며, 이어 1977년 건국포장이,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 그리고 그의 유해는 2007년 5월 30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이장되었다.

[1] 좌통례공파(左通禮公派, 칠곡파)-첨정공파 21세 수(壽) 항렬. [2] 인근의 매원리와 함께 광주 이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이항진도 이 마을 출신이며, 이수일은 관터마을 출신이다. [3] 대전현충원묘적부에는 1924년에 별세한 것으로 오기되어 있다. [4]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 귀바위마을 [5] 1928년 진영면으로 개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