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8 09:02:30

김철수(독립운동가)

파일:낫과 망치.svg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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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김철수
[1]洙로 등재되어 있다.]
파일:external/japanese.joins.com/20050803165029-2.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김동재(金銅再, 金東宰)·김초봉(金初峯)
김창률(金昌律)·김창근(金昌根)
초봉(初峰)·지운(芝雲, 遲耘)
본관 광산 김씨[2]
출생 1893년 5월 25일
전라도 고부군 백산면 원천리
(현 전라북도 부안군 백산면 원천리 128번지)
사망 1986년 3월 16일 (향년 92세)
전라북도 부안군 백산면 원천리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516호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1. 개요2. 생애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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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회주의 운동 사상 최초의 비밀결사 '사회혁명당'을 조직하다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본관 광산. 이복동생 김창수 자유당 소속으로 제3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한국 사회주의 독립운동사에서 이동휘, 여운형과 어깨를 나란히 견줄 정도의 1세대 독립운동가였다.[3]

2. 생애

1893년 5월 25일 전라도 고부군 백산면 원천리(現 전라북도 부안군 백산면 원천리)의 소지주 양반가에서 아버지 김영구(金永九)와 어머니 신안 주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부령면 외하리(현 부안읍 외하리)로 이주해 거주하기도 했다. 아버지 김영구는 소지주로 전라북도 옥구부(현 군산시)에서 쌀 위탁 판매업에 종사했는데 재력이 대단했다고 하며, 부안군에서 가까운 이웃 동네인 고창군 인촌 김성수 집안의 재력과 견줄 정도로 부잣집이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대한제국 때 구례 군수를 지낸 한학자 서택환(徐宅煥)[4]의 문하에서 공부하면서 '한국의 독립운동'과 민족주의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이후 1907년 태인군 용산면 화호리(현 정읍시 신태인읍 화호리)에 있던 사립 용문학교[5]에 입학했다가, 이듬해인 1908년 아버지의 가게가 있던 옥구부 금호학교(金湖學校)[6]에 전학했다.

금호학교 졸업 후 그는 금호학교 선배 김성수가 그의 부모를 설득해준 덕에 1912년 일본 와세다대학 전문부 정치과로 유학을 갈 수 있었고, 여기서 그는 사회주의 사상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유학 생활중이던 1915년 봄 윤현진(尹顯振), 장덕수, 김철수(金喆壽), 전익지(全翼之), 김효석(金孝錫) 등과 함께 도쿄 인근의 타마가와(多摩川) 계곡에서 목욕을 하고 손가락을 베어 피를 돌려 마심으로써 열지동맹(裂指同盟)을 맺었다. 이들은 이 동맹을 통해 장차 상하이, 싱가포르, 만주, 시베리아 등지로 흩어져 서로 연락하면서 독립운동에 종사할 것을 결의했다.

이어 1916년 봄에는 열지동맹원들을 비롯해 조선인 유학생 김명식(金明植)· 김양수(金良洙)·최익준(崔益俊)·하상연(河相衍)·정노식(鄭魯湜), 중국인 유학생 황각(黃覺)·나활(羅豁)·등결민(鄧潔民)·사부아(謝扶雅), 대만인 유학생 팽화영(彭華榮) 등 40여 명과 더불어 ' 아시아에서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새 아시아를 세우자'는 목적 아래 비밀결사 신아동맹당(新亞同盟黨)을 조직하고, 제국주의의 지배를 받고 있던 같은 처지의 인도 및 베트남 출신 유학생들을 가입시키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집회 연설, 각종 단체 조직, 독립운동 자금 모금 및 『한국통사』 등 반일서적 배포 등의 활동을 하며 반제국주의 운동을 전개했다.

일본 유학 시절에 우장춘과 교류하며 그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도 하였다. 1916년 도쿄제국대학 농과대학 실과에 입학한 우장춘은 조선의 도지사가 방일하여 조선계 학생들을 대상으로 친일연설을 하는 강당에서 유학생 김철수가 단상에 뛰어올라 그 도지사의 멱살을 잡고 항의하는 모습에 충격을 받는다. 당시 신입생이던 우장춘은 이 사건을 계기로 김철수를 수시로 만나게 된다. 김철수는 우장춘에게 '너의 부친 우범선이 매국한 것에 대해 속죄하려면 조선의 독립과 조선을 위해 네가 배운 바로 봉사해야 하고, 절대로 너의 조선인의 성을 갈아서는 안된다'는 민족주의 의식을 심어준다. 그 이후 김철수와 우장춘 박사는 서로가 작고할 때까지 오랜 우정을 유지하고 지냈다고 한다.

1916년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그는 국내에서 3.1 운동을 겪은 뒤 1920년 6월 장덕수· 최팔용(崔八鏞) 등과 함께 신아동맹당을 사회혁명당으로 개칭했고, 1921년 중국 상하이로 가서 이동휘·안병찬(安秉讚) 등의 한인사회당과 조직적으로 결합해 고려공산당 상하이파를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1922년에는 고려공산당 통합 대회에서 간부회 임원으로 선임되었다. 이 시기 김철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도 직간접적으로 활동하였으나, 국제공산당 자금사건에서 발생한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의 내분을 목격했고, 특히 1923년 국민대표회의에서 개조파의 일원으로 생계위원 및 비서에 선출되어 재직하면서 이때 일어난 창조파와의 심각한 파벌 대립에 크게 실망했고, 결국 곧 국내로 귀국했다. 이 시기 김철수는 '이게 무슨 독립운동이냐? 차라리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회고할 정도로 무기력감에 빠졌다.

국내로 귀국하면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다가 검거되어 1년간 거주 제한령을 받기도 했으며, 1924년 전라북도 민중운동자동맹에 가입해 활동하다가, 1925년 12월 조선공산당에 가입해 조직부장에 선임되었다. 1926년 2월에는 중앙집행위원, 선전부원, 조직부 위원 등에 선임되었고, 6.10 만세 운동 이후 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이 일어나 주요 간부진이 검거되자 그해 9월 제3차 조선공산당, 즉 ML당을 결성하고 책임비서에 취임해 12월까지 활동했다. 1926년 12월 코민테른에 파견할 대표자에 선임되었고, 이듬해인 1927년 5월 코민테른으로부터 조선공산당 제2차 대회 승인을 받고 귀국했다.

한편, 그는 여성 독립운동가인 김마리아와 가까운 사이였고 주위 사람들도 두 사람의 결혼을 권유한 적이 있었으나, 김철수에게는 고향에 이미 본처가 있던 관계로 혼인이 이어지지는 못했다. 당시에는 가문에서 억지로 맺어주는 중매 결혼을 하는 구시대 풍습과 자유 연애를 통한 결혼을 하는 새로운 풍습이 공존하는 과도기여서 지식인들의 경우 고향에는 가문에서 맺어준 본처가, 그리고 활동하는 도시에는 자유 연애를 통해 결혼한 새로운 처를 두는 사례도 있었다.

1928년 제3차 및 제4차 조선공산당 조직이 와해될 조짐이 보이자 만주로 망명했고, 1929년 3월, 중화민국 길림성 돈화현(敦化縣)[7]에서 윤자영(尹滋瑛)· 김영만(金榮萬)·김영식(金泳植)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 조직에 참여하여 위원장에 취임했다. 그해 12월 강문수(姜文秀)·박원진(朴元鎭) 등과 함께 다시 국내로 잠입해 조선공산당 재건 활동을 하다가 1930년 2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갖은 고초를 겪다가 1931년 10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이 사건을 맡았던 김병로 변호사는 1심에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자 그에게 공소할 것을 권유했지만, 그는 "나는 포로일 뿐, 일본 제국주의 법률을 인정할 수 없다"며 공소를 거부했다.

그 뒤 약 8년간 옥고를 치르고 1938년 10월 출옥해 항일운동을 계속하다가, 1940년 여름 ' 시국대응 전선사상보국연맹(時局對應全鮮思想報國聯盟)'이라는 친일 전향자 단체 가입을 거부해 또다시 서대문 예방구금소에 투옥되었다. 그리고 공주형무소에 이감되어 8.15 광복을 맞을 때까지 옥고를 치러야 했다.

1945년 8월 17일 출옥해 과거 서울청년회 정파 동지였던 이영(李英)[8]과 함께 경기도 경성부 종로2정목 서울YMCA 빌딩 바로 옆의 장안빌딩에서 조선공산당을 결성하는데, 이를 '장안파 조선공산당'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장안파 조선공산당은 구조적으로 매우 취약했다. 이들의 문제점은 강령과 규약 및 당면 활동 목표를 제시하지 못했고, 중앙당 기구 이외에는 일정한 수의 당원 및 하부조직을 갖추지 못했으며, 1920년대 해체된 조선공산당과의 계승 관계가 불분명했었기 때문이다. 결국 8월 20일, 박헌영의 주도로 결성된 조선공산당 재건파 세력이 '장안파는 일개 파벌집단에 불과하므로 인정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그 해체를 요구했고, 결국 결성한지 10여일만에 장안파 조선공산당은 해체되고만다. 그래서 장안파 조선공산당은 '15일당'이라 불리기도 한다. 김철수는 일제강점기부터 박헌영과 사이가 최악이었는데 이 때는 김철수도 조선공산당 재건을 오래 염원해왔기 때문에 별 거리낌없이 재건파에 합류했다. 그 후 계속 박헌영 지지자들과 갈등했지만 대회파가 등장하기 이전까지는 김철수도 재건파로 분류된다.

김철수는 박헌영하고 사이가 대단히 안좋았는데, 박헌영의 독선적이고 교조주의적인 노선에 문제가 있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는 박헌영의 독선적인 방식을 대놓고 성토하는 글을 발표했다는 이유로 조선공산당 내에서 당원자격의 무기한 정지처분을 받기까지 했을 정도다. 김철수와 같이 당 대회를 열라는 주장을 펴다 제명당한 사람들을 조선공산당 대회파라고 부른다.

김철수는 광복 후 좌익과 우익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좌우합작운동에 동조하며 통일정부 구상을 위해 노력하였다. 사회노동당을 주도적으로 창당한 것이 김철수를 비롯한 조선공산당 대회파이다. 여운형이 1947년 7월 19일 암살당하여 좌우합작 운동이 실패하게 된 이후에는 정치에 환멸을 가지게 되어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다만 김철수는 여운형과 광복 후 좌우합작이라는 노선이 같았을 뿐 여운형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여운형은 박헌영과 평생 친했고 일제강점기에 이르쿠츠크파로 노선을 같이하다가 말년에만 갈라선 것인데, 김철수는 상해파이고 일제강점기부터 박헌영과 더불어 이르쿠츠크파인 여운형과도 사이가 안 좋았다.

이승만 정부가 노동부 장관 제의를 했지만 김철수는 거절하였다. 동생도 농림부 장관 제의를 받았는데 김철수가 거절하라고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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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의 김철수

이후 고향인 전라북도 부안군 백산면 원천리로 낙향해 농사로 생계를 이어갔다. 은둔 생활을 하다가 1986년 3월 16일 별세했다. 본인이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조용히 산 것도 있지만, 광복 후, 6.25 전쟁 후, 좌익 전력이 있는 사람들은 엄청난 고초를 겪고 살아야 했기 때문에 더욱 더 은둔할 수 밖에 없었다.

김철수가 자신의 "비문 앞에는 <공산당원 김철수>라고 적으면 된다."라고 말해 주위 사람이 "'애국지사' 또는 '독립투사 '이런 것 앞에 붙이셔야지요" 라고 하니 "공산당원이란 이름보다 더 크고 좋은 것은 없다"라고 했다고 한다. 출처: 김철수 기념사업회 운영자의 블로그 반공이 대한민국 이념이 된 이후에 태어난 국민들에겐 낯선, 조선공산당이 얼마나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이 염원하던 독립운동 단체였는가를 알려주는 인상적인 말이다.

2005년 광복절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그의 유해는 당초 부안군 백산면 하청리 123-23번지에 안장되었다가, 2012년 5월 15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에 이장되었다.

3. 여담

  •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다.
    • 장녀 김금남은 일본 메이지대학을 다니다가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나자 대학을 중퇴하고 귀국해 이에 호응해 활동했다. 광복 후 여수·순천 10.19 사건에 남편과 같이 관여하다가 남편이 총살당했고, 본인은 이 때 당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고통받다가 1960년대 초 병사했다. #
    • 차녀 김용화(1919 ~ 2018)는 부안군 계화면 의복리 돈지마을에서 삼성약방을 운영하며 독신으로 김철수를 부양하다가 2018년 2월 별세했다.
    • 장남 김용선은 전라북도 정읍시에서 농업에 종사했다.
    • 차남 김용일은 월북했다.
    • 3남 김용덕은 광복 후 소련으로 유학 갔다가 행방불명되었다.
  • 유력한 사회주의 계열 인사였음에도 불구하고 반공주의가 강한 대한민국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인사였는데 이는 이승만과 관련이 있다는 얘기가 있다. 이 얘기에 따르면, 김철수가 중국 상하이에 있을 때, 이승만이 독립운동 자금의 횡령 혐의로 살해 위협을 받을 당시 김철수는 코민테른으로부터 받은 자금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대납해 목숨을 구해준 적이 있었다. 이 때문에 이승만은 정계에서 은퇴해 낙향한다는 조건으로 김철수를 건드리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목숨만 건진 것에 불과한지라, 이후에도 그와 가족들은 경찰에게 린치를 당하는 등 잦은 고초를 겪었다고 한다. 6.25 전쟁 때는 집이 불태워졌고, 빨갱이로 몰려 사형장까지 끌려갔던 수모를 겪기도 했었다. 다행히 현장 지휘관이 그를 알아보고 사지에서 구해줬지만, 집이 불타며 평소 틈틈이 써오던 항일운동 수기를 비롯한 모든 것을 잃었다고 한다.[9]

    다만 김철수는 사회주의 사상에 대해서 어디까지나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받아들였을 뿐이었지, 구체적으로 마르크스주의, 레닌주의, 스탈린주의 등은 깊이 신봉하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이와 관련해 한 가지 일화를 소개하자면, 1930년 일본 경찰에 체포당한 후 재판 과정에서, 예심판사가 '누구를 사숙했냐'[10]고 묻자, 김철수 자신은 유학자인 서택환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라고 주장하여 재판정에 모인 사람들이 서택환이 누구냐며 수군거렸다고 한다. 서택환의 이름을 굳이 언급할 정도면, 마르크스주의 자체에 대해 그다지 깊이 신봉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일화다.
  • 부안군 백산면 대수리에는 그가 노년에 오랫동안 기거하던 토담집 이안실(易安室)이 남아 있다.
  • 성격은 외모에서도 보이듯 그린 듯한 고매한 선비였다. 언제나 향을 피워 그가 있는 곳에서는 향기가 났다고 한다. 서예 작품을 많이 남겼다. 오래 살아서 그에 대한 증언자가 많기 때문에 여러 블로그 등 인터넷에서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쉽게 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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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31년 10월 28일 수형인명부에는 [2] 37세 수(洙) 항렬. [3] 김철수는 중국에 건너갔을 때, 무려 중국공산당의 지도자인 마오쩌둥과 직접 만나 그와 친구가 된 인물이었다. [4] 1894년 궁내부 주사(主事), 1895년 궁내부 내사과 주사(內事課 主事) 3등, 궁내부 관제조사위원(官制調査委員), 1896년 봉상사 주사(奉常司主事), 상의사 주사(尙衣司主事), 내사과 주사, 1897년 구례군수 등을 역임했으나 부친상을 당해 3년상을 치르기 위해 사직하고, 고향 고부군 답내면 마항리(현 정읍시 이평면 마항리)에 은거하며 서당을 세우고 후학 양성에만 전념했다. 이후 1901년 품계가 정3품에까지 올랐다. [5] 이후 화호초등학교로 개편되었다가 2000년 학생 수 부족으로 신태인초등학교에 통폐합되었다. [6] 1910년 폐교되었다. [7]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돈화시. [8] 여운형 근로인민당이 와해된 뒤 월북했다. [9] 하지만 보도연맹 학살사건 때, 사회주의 계열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군인과 경찰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일에 비하면 그나마 살아남은 것도 운이 좋았다고 봐야 한다. 당장 이승만부터가 공산주의자라면 부모형제라도 용서 없이 모두 처단해야 한다고 말할 만큼, 강경한 반공주의자였기 때문이다. [10] 누구의 영향을 받았냐, 내지 누구의 학풍을 따르고 있냐의 의미로 그 사람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는다는 뜻인 사사(師事)하다와는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