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명 | 김태연(金泰淵) |
이명 |
김주(金柱)·김추성(金秋星) 김단치(金丹治)·김달연(金達淵)·김계(金桂) |
본관 | 김녕 김씨[1] |
출생 | 1901년 1월 16일 |
경상북도
개령군 부곡면 동부동 (현 경상북도 김천시 개령면 동부리) |
|
사망 | 1938년 2월 13일 |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 |
종교 | 무종교( 무신론) |
상훈 |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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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0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2.1. 초년기
김단야 본인의 자백서에 따르면, 그는 1901년 1월 16일 경상북도 김천에서 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한다. 그의 가계에 대해선 정확히 알려진 바 없지만, 아버지 김종원(金鍾遠)이 본래 한의사였으나 면허가 강제로 취소되어 그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는 1908년 4월 고향에 있는 기독교 계열 학교인 개진학교(開進學敎)에 입학했고, 이듬해 4월엔 진명학교(進明學敎)로 옮겼다가 1910년 4월에는 영진학교(永眞學敎)에 들어가 1914년에 졸업했다.이후 1915년 3월 대구 기독교 학교인 계성학교(啓聖學敎) 고등보통과에 편입했는데, 3학년 때 미국인 교사와 일본인 교사의 한국인에 대한 차별대우에 분노해 동맹 휴학을 주도했다가 퇴학당했다. 그 후 1917년 1월 일본 도쿄로 건너가 세이소쿠 영어학교에서 6개월 동안 공부했고, 그해 9월 서울의 배재학교에 입학해 공부하다가 1919년 초 <반도의 목탁>이란 이름의 비합법신문을 발행하던 지하청년 학생 서클에 가담했다.
2.2. 공산주의를 받아들이다
1919년 3월 말, 김단야는 고향에서 3.1 운동에 가담해 만세시위를 주도하다 체포되어 같은 해 4월 15일 대구지방법원 김천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태형 90대를 선고받고 형에 처해진 뒤에 풀려났다. 그해 8월 김교훈 등과 지하 비밀 신문 <신한별보(新韓別報)>를 발간하다 발각되기도 했으며, 비밀결사 적성단(赤星團)에 들어가 조선에 파견된 만주군정서 요원에게 군자금 813원을 내주는 등 왕성하게 활동하다가 일본 당국의 감시에 시달린 끝에 상하이로 망명했다. 이때 그는 박헌영과 임원근을 만났고, 세 사람은 이후로 삼인당(三人黨)이라 불리며 같이 활동했다.1920년 2월, 김단야는 저장성 항저우에 있는 배정학교(培正學敎)에 입학하여 영어와 중국어를 배우고, 다시 이 곳에 있는 안성중학교에 입학했다.[2] 그 뒤 상하이 프랑스 조계 보창로로 이주하여 1921년 3월엔 상하이 고려공산청년단 결성에 참여하고 집행위원이 되고 기관지 <벌거숭이> 편집인으로 일했다. 8월엔 고려공산청년단 책임비서로 선임되었고, 화동학생연합회 서기가 되었다. 또한 10월엔 이르쿠츠파 고려공산당 상하이지부에 입당하고 상하이 상과대학에 입학했다.
1922년 1월, 김단야는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대회와 극동청년대회에 고려공산청년단 대표로 참가했다. 그는 후에 극동청년대회에서 블라디미르 레닌을 만났을 때의 소감을 밝힌 <레닌회견인상기>를 조선일보에 게재했다. 그 내용 중엔 레닌이 동양인들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음을 암시하는 일화가 소개되었다.
김규식씨가 담화 중에 잠깐 막힌 말이 있었다. 그때에 레닌은 얼른 그 막힌 말을 일러주었는데, 그것은 곧 도움(SURPORT)란 말이었다. 물론 김규식 씨가 영어에 대한 어학이 부족해서 그랬을 것은 아니다. 서로 도와달라는 말을 하기는 좀 거북하셨을 것이다. 그래서 잠깐 주저하는 동안에 눈치빠른 레닌이 얼른 그 말을 대신 해준 것이다.
조선일보 1925년 1월 31일자 기사 <레닌회견인상기-그의 서거일주년에>(8회)
조선일보 1925년 1월 31일자 기사 <레닌회견인상기-그의 서거일주년에>(8회)
그는 이런 레닌에게 존경심을 품었고 그가 죽자 그에 대한 그리움을 절절하게 표현했다.
아! 레닌이 살던 그런 나라가 그립다. 레닌이 죽은 그 땅이 그립다. 아! 언제나 과연 나의 앞에도 평탄한 길이 열릴 것인가.
조선일보 1925년 2월 3일자 기사 <레닌회견인상기-그의 서거일주년에>(11회)
조선일보 1925년 2월 3일자 기사 <레닌회견인상기-그의 서거일주년에>(11회)
김단야는 극동인민대표대회와 극동청년대회를 마친 뒤 3월에 상하이로 돌아와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총국을 결성하고 집행위원이 되었다. 그리고 4월에는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총국을 국내로 이전하기 위해 입국하다 신의주에서 체포되었고, 1922년 5월 11일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서 소위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신의주지방법원에 이송되었다.
그 뒤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형을 선고받았으며, 이에 공소하였으나, 1922년 10월 28일 평양복심법원에서 미결 구류일수 중 100일이 본형에 산입되었을 뿐 형기는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2.3. 조선공산당 결성
그러다가 1923년 1월 2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위 혐의에 대해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처분을 받고 출옥한 김단야는 잠시 고향에 있다가 다시 상경하여 박헌영, 임원근과 함께 동아일보,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했다. 또한 1924년 2월 신흥청년동맹에 참여해 집행위원으로 선정되었고, 한양청년연맹과 화요회에 가담했다. 이때 그는 박헌영, 임원근과 함께 '화요파 트로이카', '화요 3인조'로 불리며 화요회, 신흥청년동맹에서 열렬히 활동했다. 한편, 그가 동료 3명과 함께 의주경찰서 관내의 영산결찰관주재소를 습격하고 도피했다는 설이 제기되지만 이것이 사실인지는 명확하지 않다.1925년 4월 17일, 화요회와 북풍회, 그리고 노동당이 모여 조선공산당을 조직했다. 이 날을 창당일로 정한 것은 그날 전조선기자대회와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가 대대적으로 열려서 일본 경찰의 감시가 그곳으로 집중된 틈을 노렸기 때문이다. 다음날인 4월 18일에는 박헌영의 서울 훈정동 집에서 조선공산당의 청년전위조직인 고려공산청년회 창립식이 열렸다. 박헌영은 책임비서 겸 중앙위원회 비서부를 맡았고, 김단야는 연락부, 임원근은 교양부를 맡았다. 이때 박헌영과 막 결혼했던 주세죽도 여성으로서는 유일하게 참석해 중앙위원 7인 후보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얼마 후 코민테른이 조선공산당을 승인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고려공산청년회는 첫 사업으로 모스크바에 유학생을 파견하기로 했다. 이에 김단야는 유학생으로 당시 그의 애인이었던 고명자를 추천했다. 고명자는 1925년 10월 서울을 떠나 모스크바로 갔다. 그러나 그로부터 한달 후인 1925년 11월 22일, 신의주의 한 식당에서 식사를 하던 신의주 청년회 간부와 회원들이 친일 변호사와 일본 경찰과 패싸움을 벌여 경찰에게 연행돼 조사를 받다가 신의주청년회 간부 집에서 박헌영이 상하이에 거주하는 조봉암에게 보내는 비밀 서실이 발각되었다. 이에 일본 경찰은 공산당원 체포에 착수해 11월 29일 서울에서 박헌영, 임원근, 주세죽 등을 체포하여 12월 3일 신의주형무소에 수감했다. 주세죽은 3주 만에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지만 박헌영과 임원근은 서울로 압송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온갖 고문을 받았다.
당시 김단야는 고향에 있다가 이 사실을 알고 상하이로 피신했다가 국내를 드나들며 공산 활동을 이어갔다. 일제는 그를 잡으려 애썼지만, 그는 매번 경찰을 따돌렸다. 또 1926년 1월부터 7월까지 조공 기관지 <불꽃(火花)> 주필이 되어 공산주의를 선전하는 사설들을 게재했고, 조선 공산당 해외부 설립에 참여하여 국내 공산당의 재정을 조달했다.
그러던 1926년 4월 순종의 사망 소식을 듣고 "상(喪)에 복(服)하고 곡(哭)하는 민중에게 격(檄)함" 등의 격문을 제작하고 대중시위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국내로 잠입했다. 순종의 인산일인 6월 10일, 그는 작성한 격문을 전국 각처에 발송하려다가 경찰에 발각되어 격문이 압수되었고 관련 인사들은 줄줄이 끌려갔으며 조선 공산당은 해체되었다. 하지만 그는 이번에도 검거망을 따돌리고 상하이로 달아났다.
2.4. 스캔들
1926년 8월 모스크바로 간 김단야는 그곳에서 고명자와 재회한 뒤 사실상 부부로 살았다. 그는 국제레닌학교에 다녔고 고명자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했다. 이후 1928년까지 대학을 다니던 두 사람은 코민테른이 1928년 12월 조선 공산당 운동의 기조를 바꿔 인텔리들의 결사체였던 조선공산당을 해체하고 공장과 농촌으로 들어가 노동자와 빈농을 조직해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주도하는 계급정당으로 재건하라는 내용의 '12월 태제'의 임무를 받들어 1929년 1월 모스크바를 떠났다.고명자는 1929년 2월 조선으로 잠입했고, 김단야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코민테른 비서부에서 당 재건 작업에 전념하다가 그해 7월 국내로 잠입, 11월 박민영, 권오직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 재건조직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그러나 1930년 2월 일제 경찰의 검거령이 내려지자, 그는 검거망을 피해 다시 국내를 떠나 모스크바로 돌아갔다. 그가 모스크바에 돌아왔을 때, 동지 박헌영과 주세죽도 모스크바로 망명해 있었다.
박헌영의 아들 원경 스님이 자신의 후견인이었던 한산 스님에게 들었다는 내용에 따르면, 박헌영 부부는 하나뿐인 하숙집에서 김단야와 함께 숙식했는데 얼마 후 주세죽이 김단야의 아이를 낳았다고 한다. 원경 스님에 따르면 박헌영은 이 사실을 알았지만 김단야의 친구이자 혁명동지로서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주세죽과도 형식적인 부부관계를 지속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아이는 몇 년 뒤 죽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증언이 사실임을 입증할 증거는 없다.
세 사람은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상하이로 가서 고려공산당 기관지 '콤뮤니스트'를 발행했다. 그러던 1933년 7월 5일, 박헌영이 상하이에서 일본 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때 박헌영이 시간을 끄는 사이 김단야와 주세죽은 가까스로 탈출해 체포를 면했다. 박헌영은 심한 고문을 받았지만 과거 행적을 감추기 위해 자신이 5년 전에 체포되었던 박헌영과 동일 인물이 아니라고 계속 잡아똈다. 결국 일본 경찰은 동일인물이라는 증거를 찾지 못하고 1934년 1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녁 6년형을 선고했다.
한편, 주세죽은 박헌영이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죽었을 거라 여기고 모든 걸 체념했다. 이때 김단야가 함께 모스크바로 가자고 제안했고 주세죽은 이에 동의했다. 이후 김단야는 1934년 주세죽을 데리고 모스크바로 돌아간 뒤 결혼했다. 당시 그는 박헌영이 살아있다는 걸 알았지만 이를 주세죽에게 알리지 않고 숨겼다. 또한 그에겐 아내 고명자도 있었지만[3], 그는 그녀의 존재를 무시하고 주세죽과의 결혼을 감행했다.
당시 공산주의 운동가들은 이 추문을 두고 김단야와 주세죽을 맹비난했다. 하지만 정작 박헌영은 신경쓸 것 없다며 넘어갔다. 훗날 1939년에 출옥한 박헌영에게 친척들이 주세죽의 행방을 물었을 때, 그는 주세죽이 죽었다고 답했다고 한다.
2.5. 최후
1934년 2월, 김단야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의 한국학부장을 맡았다. 그러나 2년 6개월 후인 1936년 8월, 그는 면직 처분을 받았다. 그리고 한국학부가 폐지되자, 김단야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떠났다. 이후 그는 소련 당국으로부터 일본 밀정이라는 의심을 받았고 직장을 잃은 후 별다른 직업을 구하지 못해 곤궁한 살림에 시달려야 했다. 그는 이런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 1937년 2~3월 이력서, 해명서 등 여러 편의 글을 작성해 자신이 밀정이 아님을 밝히려 애썼다.1937년 3월 2일, 동방부 임원 벨로프는 내무인민위원부 간부 폴라체크에게 조선공산당의 당면 사업을 위해 김단야를 현지 파견 대표로 선임했으니 그 집행 여부를 회신해달라는 내용의 공문을 발송했다. 벨로프는 폴라체크가 답신을 보내지 않자 6월 7일에 다시 회신을 독촉하는 내용의 공문을 발송했다. 또한 그해 6월 4일 코민테른 동방부의 밀러와 최성우가 연명으로 코민테른 간부국 알리하노프에게 "김단야를 조선공산당 방면의 실제 사업에 활용하려는 데 그의 정치적 경력에서 한 부분이 아직 해명되지 않았으니 이 문제의 결론을 되도록 속히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1937년 8월 2일, 내무인민위원부는 동방부에 회신을 보내 김단야를 조선에 파견하는 것은 권고할 만한 일이 아니라고 답했다. 그후 9월 28일, '김춘성'이라는 가명의 조선인[4]이 코민테른 비서부에 김단야를 고발하는 의견서를 제출했다. 의견서에 따르면, 김단야는 화요파 위주의 종파주의자이고 가까운 동료들 중에는 김찬, 조봉암, 박헌영, 김한, 고명자 등 밀정으로 전락한 자가 많았다고 한다. 또한 김단야는 검거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체포되지 않은 극소수에 속했고, 두세 차례 체포되었을 때도 다른 동료들보다 현저히 낮은 형량을 받고 풀려났다고 주장했다.
결국 내무인민위원부 경찰은 1937년 11월 5일 김단야를 '반혁명 스파이, 테러단체 결성' 혐의로 체포했다. 그는 고문에 시달린 끝에 자백서를 제출했고, 체포 3개월 후인 1938년 2월 13일 총살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선고받은 바로 그날 총살형에 처해졌다. 그가 매장된 장소에 대한 기록은 없다. 주세죽은 반혁명 스파이의 아내로 낙인찍혀 5년간의 카자흐스탄 유배형을 선고받았고, 김단야와의 사이에서 낳은 어린 아들은 그 과정에서 병사했다.
해방 후, 김단야의 아버지 김종원은 아들이 아직 살아있다고 여기고 아들 소식을 들으러 서울로 향했다. 조선인민보는 그와 인터뷰한 뒤 이 소식을 기사에 실었다.
위대한 혁명투사인 그리운 아들을 찾는 아버지! 지금으로부터 17년 전, 조공 재건의 사명을 띠고 암암리에 활약하다가 사전에 탄로되자 외국으로 망명한 김단야씨의 소식을 찾아 서울에 올라온 김종원씨(70)는 지난 19일 본사를 찾아 그리운 아들의 옛 모습을 회상하며 혁명투사 때의 아들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그 애를 만난 지는 서울에서 열린 첫 박람회 때인데 그때 만난 것이 5년 만이었소. 차부동(車部洞. 경북 김천군 개령면)에 있는 내 집에 들어오지 못하고 근처 칠곡군 인동면 옥계동에서 만나게 되었을 때 나는 아무 말도 못했고, 그저 내 아들의 모습이 깊이 보고만 싶었지요. 헌 바지저고리를 입고 있는 꼴이 독일꾼같이 보이는데도 어쩐지 꼭만 자갈 위에 핀 해당화만 같고 고난의 암해(暗海)에서 혈투하는 용사같이는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두고 보면 볼수록 일제의 무서운 총칼이 눈앞에 번뜩이는 것만 같고 해서 몸서리가 납니다. 그래서 너는 머무를 것이냐 국경을 넘어갈 테냐 하고 물어봤지요. 그랬더니 국경을 넘겠다고 명언(明言)합디다. 눈물도 없고 말도 없는 이 상봉의 종결이 그동안 16년, 작년 겨울 그 어미는 죽고 말았습니다. 해방은 맞이하였으나 아들을 못 만난 그 어머니의 설움은 나에게도 전염이 되었는지 아들 생각이 나서 서울에 와 보니 자세한 것은 모르고 막부에서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풍문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태연(泰然·김단야 본명)이 동무들도 많이 만나보고 안심했소.”
조선인민보 1946년 5월 2일자 기사
“내가 그 애를 만난 지는 서울에서 열린 첫 박람회 때인데 그때 만난 것이 5년 만이었소. 차부동(車部洞. 경북 김천군 개령면)에 있는 내 집에 들어오지 못하고 근처 칠곡군 인동면 옥계동에서 만나게 되었을 때 나는 아무 말도 못했고, 그저 내 아들의 모습이 깊이 보고만 싶었지요. 헌 바지저고리를 입고 있는 꼴이 독일꾼같이 보이는데도 어쩐지 꼭만 자갈 위에 핀 해당화만 같고 고난의 암해(暗海)에서 혈투하는 용사같이는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두고 보면 볼수록 일제의 무서운 총칼이 눈앞에 번뜩이는 것만 같고 해서 몸서리가 납니다. 그래서 너는 머무를 것이냐 국경을 넘어갈 테냐 하고 물어봤지요. 그랬더니 국경을 넘겠다고 명언(明言)합디다. 눈물도 없고 말도 없는 이 상봉의 종결이 그동안 16년, 작년 겨울 그 어미는 죽고 말았습니다. 해방은 맞이하였으나 아들을 못 만난 그 어머니의 설움은 나에게도 전염이 되었는지 아들 생각이 나서 서울에 와 보니 자세한 것은 모르고 막부에서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풍문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태연(泰然·김단야 본명)이 동무들도 많이 만나보고 안심했소.”
조선인민보 1946년 5월 2일자 기사
김단야의 아들과 딸은 살아생전에 아버지의 소식을 듣지 못했고, 여러 학자들의 연구결과로 러시아에서 사망한 사실을 알게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김단야(손녀가 대신 받음)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