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1 09:12:57

김성숙(18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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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석현 정율성불확실 문시환 이춘암
공약 10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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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천하의 정의의 사(事)를 맹렬히 실행하기로 함.
②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신명을 희생하기로 함.
③ 충의의 기백과 희생의 정신이 확고한 자라 함.
④ 단의(團義)에 선(先)히 하고 단원의 의(義)에 급히 함.
⑤ 의백(義伯) 1인을 선출하여 단체를 대표함.
⑥ 하시(何時) 하지(何地)에서나 매월 1차씩 사정을 보고함.
⑦ 하시 하지에서나 매 초회(招會)에 필응함.
⑧ 피사(被死)치 아니하여 단의에 진(盡)함.
⑨ 1이 9를 위하여 9가 1을 위하여 헌신함.
⑩ 단의에 배반한 자는 처살(處殺)함이다.
5파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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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매일신보사
④ 각 경찰서
⑤ 기타 왜적 중요기관
7가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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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 이하 고관
② 군부 수뇌
대만총독
④ 매국노
⑤ 친일파 거두
적탐(밀정)
⑦ 반민족적 토호열신(土豪劣紳)
조선혁명선언 황옥 경부 폭탄사건 }}}}}}}}}
파일:김성숙.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초명 김성암(金星巖)
이명 김규광(金奎光)·김충창(金忠昌)
김창숙(金昌淑)·김성숙(金成淑)
법명 태허(太虛)
운암(雲巖)
출생 1898년 4월 29일[1]
평안북도 철산군 서림면 강암동[2]
(現 평안북도 염주군 삼개리)
사망 1969년 4월 12일 (향년 70세)
서울특별시 성동구 구의동 자택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임시정부요인 묘역-21호
본관 상산 김씨(商山 金氏)[3] #
가족 아버지 김문환, 어머니 임천 조씨
배우자 두쥔후이
슬하 3남
서훈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국내 항일 활동2.3. 해외 항일 활동
2.3.1. 베이징2.3.2. 광저우2.3.3. 상하이2.3.4. 난징2.3.5. 조선의용대2.3.6. 대한민국 임시정부
2.4. 광복 이후
2.4.1. 좌우합작운동2.4.2. 6.25 전쟁2.4.3. 독재 정권 투쟁2.4.4. 5.16 군사정변2.4.5. 쓸쓸한 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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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승려, 정치인.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고려공산당· 조선공산당, 중국공산당에서 활동하였다.

2. 생애

2.1. 초년기

1898년 4월 29일 평안북도 철산군 서림면 강암동(現 염주군 삼개리)의 빈농가에서 부친 김문환(金文煥)과 어머니 임천 조씨(林川 趙氏) 사이의 3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의 농사일을 도우면서 틈틈이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했다. 1908년, 10살의 나이에 고향인 철산에 설립된 신식학교인 대한독립학교에 입학해 공부하다가 1910년 한일병합 후 일제가 식민지교육을 실시하자, 평소 일제에 반감을 품고 있던 할아버지에 의해 학교를 그만 둔 뒤 할아버지가 가르치는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했다.

그는 일찍이 불교, 천도교, 기독교에 관심이 많았고 신식학교에서 익힌 애국심과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배일의식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 그러던 1916년 봄, 김성숙은 18살의 나이로 중국에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가담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훗날 이때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독립군 얘기를 들으면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만주 신흥학교로 가겠다고 마음을 먹고 집을 나왔다. 마침 집에서 땅을 판 돈이 있어서 그 돈을 몰래 갖고 왔다. 집안 어른들께 죄송했지만 독립을 위해 쓴다면 용서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아버지가 땅을 판 돈을 몰래 가지고 집을 나선 그는 열차를 타고 만주 봉천으로 가려 했지만 원산에서 일본군의 경비가 삼엄해 월경이 쉽지 않았다. 김성숙은 원산에서 월경할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기로 하고 어느 여관에 묵었는데, 마침 부처님오신날이 되자, 김성숙은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리기로 하고 서강사라는 절을 찾아갔다. 그는 절에서 하룻밤을 묵으면서 앞으로 어찌해야 할 지를 고민했다. 도저히 월경할 길이 보이지 않았고, 이대로 집에 돌아가면 아버지에게 면목이 없었다.

그러다가 새벽에 절을 나서는데, 마침 산등성이에서 한 스님을 만났다. 김성숙은 스님에게 자기도 승려가 되게 해달라고 청했다. 그러자 그 스님(경기도 용문사. 풍곡신원 스님)은 승려가 되려면 자기를 따라오라고 했다. 김성숙은 그 길로 그 스님을 따라 양평 용문사로 가서 승려가 되었다. 그는 사미계를 받아 태허(太虛)라는 법명을 얻었다. 그는 용문사에서 일을 열심히 하고 불경을 빠른 속도로 익혔다. 그러다가 2년 후인 1918년 경기도 광릉에 있는 봉선사로 보내져 그곳에서 불교 내전(內典)을 정식으로 공부할 기회가 주어졌다.

그는 봉선사에서 홍월초 스님[4]을 만나 사미계를 받았다. 홍월초는 불교연구회 회장, 명진학교 교장 및 이사장 등을 역임했으며 민족 교육에 열성적으로 참여한 인물이었다. 그는 김성숙을 무척 아끼고 그가 불교 경전에 전념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특히 김성숙의 사정을 알게 되자 철산에 거주하는 김성숙의 가족을 봉선사 말사인 수국사 인근 마을로 이주해서 수국사 소유의 땅을 경작하여 생활할 수 있도록 해줬다. 그는 그런 홍월초를 자신의 스승으로 여기고 홍월초가 사망(1934년)한 후엔 매년 그의 제사를 지내줬다.

2.2. 국내 항일 활동

봉선사에서 불교와 철학, 사회과학 서적을 읽으며 인식의 폭을 넓혔고, 홍월초 스님과 가까운 사이였던 손병희, 한용운, 김법린 등과 교류하며 그들로부터 애국 의식을 익혔다. 그러다가 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개최된 독립선언식에 참석한 그는 경기도 양주, 포천 지역으로 가서 3월 29일 조선독립임시사무소 명의로 " "지금 파리강화회의에서는 12개국이 독립국이 될 것을 결정하였다. 한국도 이 기회에 극력운동을 하면 독립을 달성할 수 있다"는 내용의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이에 약 1,000여 명이 광릉천시장에서 벌어진 시위에 참가했다.

그는 만세시위가 다음 날에도 이어질 수 있도록 미리 부평리의 이재일에게 격문의 내용을 편지로 써서 보냈다. 이재일은 3월 31일 광릉천 자갈마당에서 제2차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했다. 전날의 만세시위로 많은 이들이 일본 헌병대와 경찰서로 연행되었지만, 100여 명의 군중이 광릉천 자갈마당에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이에 일본 경찰은 시위 확장을 막기 위해 헌병을 출동시켜 진압에 나섰다. 김성숙은 이재일, 김순만, 최대봉[5], 양상돌, 이순재, 강완수, 김석로 등과 함께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일제는 1919년 5월 19일 경성지방법원 공판에서 이순재와 김석로에게 각각 1년 6개월 징역을 선고했고 김성숙은 징역 1년 2개월, 강완수를 징역 1년에 선고했다. 이들은 경성복심법원에 공소하여 같은 해 7월 10일 이순재 징역 1년 6개월, 김석료 징역 1년, 김성숙, 강완수는 각각 징역 8개월형에 처해졌다. 이후 고등법원에 상고했으나 같은 해 9월 1일 모두 기각되었고, 김성숙은 징역 8개월 형이 확정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1년 4월 28일, 만기 한 달을 앞두고 가출옥했다. 그는 출옥 후 봉선사로 가서 홍월초를 만나 인사를 드리고 불경 공부에 전념했지만 한편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그러던 1921년 12월 20일, 서울 간동 불교청년회관에서 사찰 승려 대다수가 발기하여 불교유신회를 조직하고 그 동기와 목적을 일반 사회에 공포했다. 그는 여기에 가담했고 1922년 2월 20일 호남선으로 파견되었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중일 때 금강산 유점사에서 승려 생활을 하다가 만주로 망명 후 만주와 러시아에서 항일운동을 하다가 귀국하여 독립운동을 벌이다가 체포되었던 김사국(金思國)을 만났다. 두 사람은 출옥된 후에도 자주 만나 사상을 교류했는데, 김사국이 사회주의 이론을 김성숙에게 설파하면서 김성숙은 사회주의 사상과 운동에 공감했다. 그리하여 1922년, 김성숙은 무산자동맹회, 조선노동공제회 등에 참여하여 활동했다. 그는 충청북도 괴산에서 발생한 소작쟁의 진상을 조사하여 서울의 조선노동공제회 본회 및 각 지방의 지회에 알리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으며, 김한, 조봉암, 유자명 등과 교류했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를 받고 있던 김성숙은 1923년 초 중국으로의 망명을 결심하고 김규하, 김봉환, 김정완, 윤종목, 차응준 등 5명의 젊은 승려들과 함께 베이징으로 유학가는 형식으로 망명했다.

2.3. 해외 항일 활동

2.3.1. 베이징

중국으로 망명한 김성숙 등 봉선사 승려 6명은 각자의 대학에 입학했다. 김성숙은 민국대학에 입학했고 '김충창'이라는 가명을 사용했다. 그는 승려의 신분을 유지했지만 불교적 가치관에 머물지 않고 민족혁명을 위한 방도로서 사회주의를 수용하는 한편 그것의 실천적 방략을 모색했다. 김산, 님 웨일즈가 공동 집필한 <아리랑>에 따르면, 김성숙은 1923년 봄 북경 YMCA 회관에서 개최된 한인 유학생들의 난상토론회에 참가해 사회주의에 관한 해박한 지식과 이론을 앞세워 청중들을 압도해 크게 이름을 떨쳤다고 한다.

또한 당시 민국대학 유학생 오남기, 정래동, 국순엽 등이 선전하는 아나키즘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아나키스트 유학생들의 집단 거두지인 대련공우(大連公寓)를 숙소로 삼았고 유자명, 신채호의 추천으로 의열단에 입단해 선전부장을 맡았다. 그러면서도 1923년 10월 베이징으로 같이 망명한 불교 유학생들과 함께 북경불교유학생회를 조직하여 학생 운동을 전개했다. 불경불교유학생회는 친목도모, 학술연구와 더불어 자유, 평등의 신사회 건설을 목표로 삼았다. 이 단체는 단순한 불교 학술단체가 아니라 사회주의 성향을 띈 단체였다.

북경불교유학생회의 활동 중 가장 주목할 것은 1924년 2월 기관지 <황야>의 발간이다. <황야>의 주요 집필자는 김성숙, 김봉환, 윤종묵, 차응준, 김규하, 김천, 한봉신, 김봉수 등이었다. 이들 중 한봉신, 김봉수 등은 1년이 채 안되어 사회주의 사상과 불교간의 심리적 갈등을 이기지 못하고 귀국했다. <황야>는 문학과 학술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성향을 띠고 있었으며, 국내에도 전해져 사회주의 사상을 널리 전파했다. 김성숙과 함께 '황야'를 발간한 핵심 인물들은 일본 공산주의자 카와카미 하지메의 유물사관 번역물을 탐독하는 등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했다.

1923년 겨울, 김성숙은 님 웨일즈와 여덟 동지들과 함께 베이징에서 최초의 공산주의 잡지인 <혁명>을 발간했다. 이 잡지는 공산당 동조자 좌익 민족주의자, 무정부주의자들에게 지지를 받아 6개월 이내에 3천 명의 고정독자를 확보했다. 또한 중국, 민주, 시베리아, 호놀룰루, 캘리포니아, 유럽에 거주하는 한국 학생들에게 발송되었고 1926년까지 지속적으로 발간되었다. 김성숙은 이 잡지의 주필이였으며 수많은 논문을 기재했다. 님 웨일즈에 따르면, 베이징에 한국문자 인쇄소가 없자 김성숙이 전지면을 직접 판을 짜서 석판으로 인쇄하다가 거의 눈이 멀어 베이징협화의학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23년 말~1924년 초에 들어 북경 한인사회에서는 사상의 분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유학생들 사이에서도 갈등이 증폭되어 갔다. 민족주의 '구파(舊派)'와 사회주의 '신파(新派)가 그것이었다. 이때 민족주의자들이 주도한 '북경조선유학생회'의 잡지 <신인물>에서 소완규가 독립운동가들에게 경고하는 글을 올렸다. 그러자 조선유학생회는 그를 제명하고 집단 구타했다.

그는 이 상황에 실망해 윤종묵, 김봉환, 심용구 등 불교유학생회에 속한 사회주의 계열의 학생들과 함께 1924년 2월 별도의 '학생구락부'를 조직하고 북경조선유학생회에서 이탈했다. 학생구락부는 회원이 백여 명에 이르면서, 조선유학생회를 능가하는 위세를 떨쳤다. 김성숙을 비롯한 불교유학생회가 학생구락부의 핵심을 이루는 가운데, 김성숙은 동회의 회장을 맡으며, 사회주의운동의 중심적 인물로 부상해 갔다. 그리고 북경지역 한인 유학생사회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1925년 1월, 학생구락부를 고려유학생회로 바꾸고 확대 개편해 강기봉, 유기석 등 기독교청년회 출신들까지 포용했다. 고려유학생회는 3월에 간행한 기관지 <해외순보>에서 제국주의를 타파하고 조선민족 고유한 문명을 발휘시키며 동서의 최고 학설을 소개하여 민중의 신문화를 건설하여 정치상 경계상 평등한 새 사회를 세우는 것을 복표로 삼았다.

여기에 더해 유자명을 비롯한 아나키스트들과 함께 반역사(反逆社)를 조직했다. 반역사는 북경 유학생 가운데 고학생회 등이 주도한 의열적 비밀결사단체로, 일제를 비롯한 세상의 모든 제국주의에 대한 '반역'을 목표로 삼았다. 반역사는 1924년 <메이데이>란 선전서를 발표했고 1925년 1월 22일 고학생들에게 반일을 선전하는 취지서를 배포하는 등 반일활동을 전개했다. 반역사는 고학생회, 고려유학생회 등 베이징 한인 유학생 대다수가 참여한 단체였고 의열단과도 관련이 있었다.

1924년 무렵, 장건상, 양명과의 만남을 계기로 공산주의 노선을 택했다. 그는 장건상, 김산, 양명, 김용찬, 김봉환, 이낙구 등과 함께 공산주의 세력을 하나로 결집시키기 위해 창일당(創一黨)을 조직했다. 이 창일당은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의 북경지부로, 지도자는 장건상이었고, 김성숙은 유학생들과 공산당 조직을 연결시키는 교량 역할을 했다.

그러나 1920년대 국내외 공산주의 이념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에게 쉽게 해결되지 않는 하나의 난제가 있었으니, 바로 공산주의를 통해 곧바로 조국해방을 쟁취해야 하는가, 아니면 조국 해방을 먼저 해야 하는가의 문제였다. 김성숙은 <혁명>에서 현 단계에서 계급혁명보다는 민족혁명을 추구해야 한다는 소신을 역설했다. 그는 조선혁명과 러시아 혁명의 차이점을 구분하여 조선혁명은 식민지 혁명으로서 먼저 일제의 침략을 구축하기 위한 협동전선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볼셰비키적 폭력 운동 만이 아니라 아나키즘적 폭력 운동도 필요하다는 논지를 폈다. 또한 아나키즘적 폭력 운동은 아나키즘을 혁명적 공산주의로 변형시켜야 한다고 덧붙였다. 즉, 그는 아나키즘을 연합의 대상으로 인식한 것이다.

또 코민테른 극동국 책임자 보이틴스키와 중국공산당 창립자 리다자오를 만났을 때 조선공산당 각파의 통합을 강력하게 주장했고 조선공산당의 창당을 반대했다. 그리고 1925년에 열린 3.1운동 6주년 기념회에 고려유학생회 대표로 참가해 이념으로 분리된 베이징 지역 한인민족운동 진영의 통합을 강력하게 주장했으며 원세훈, 신숙 등 민족주의 진영 인사들과 통합을 위한 실천 방안을 모색했다.

2.3.2. 광저우

1925년 6월, 중국 동북 지역과 베이징 일대를 통치하던 장쭤린 군벌 정권과 일제 사이에 이른바 삼시협정(三矢協定)이 체결되면서 한인독립운동에 대한 탄압이 강화되었다. 중국 경찰은 베이징에 거주하는 한인들에 대한 감시와 통제를 강화하고 '요시찰' 독립운동가들에게 신원증명을 위한 사진을 제출하도록 요구했다. 김성숙은 1926년 9월 말 사진 제출을 하지 않아 베이징 경찰청에 소환되어 다음과 같은 진술서를 작성했다.
나는 한국인이고 26세이다. 북경에 와서 남구연 60호 대연공우(南溝沿 六十號 大連公寓)에 거주하고 지금 민국대학에서 수업하고 있다. 이석화·계완순은 나와 동향이다. 관할 구서(區署)의 순경이 누차 나에게 사진을 제출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나는 일본공사관이 중국경찰에 공문서를 보내어 대신 한국인에게 사진을 요구하여 전해달라고 한 것을 염려하여 누차 버티고 제출하지 않았다. 이제 일본영사관이 시킨 것이 아니라 중국경찰서가 향후 참고를 위해서라는 사실을 알게 되니 사진관에 가서 사진을 찍고 3~4일 내에 제출하겠다.

그는 이런 상황에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광저우로 피신했다. 그가 광저우에 도착할 무렵, 광저우에는 60여 명의 한인이 있었는데 대부분 의열단 단원이었다. 이들 중 대다수는 황포군관학교에 입교해 군사적 지식을 갖췄지만 이론가, 조직가로서의 정치간부도 필요했다. 이에 국민당의 지원을 받으며 1926년 7월 중산대학으로 전학했다.

중산대학 법학과에 재학하면서 베이징 시절과 달리 공개적으로 의열단 간부의 신분으로 혁명운동을 펼쳐나갔다. 그는 우선 한인 유학생들을 황포군관학교에 입학시키기 위해 힘을 기울여 나갔다. 1926년 봄, 김성숙은 김원봉과 함께 황포군관학교 부소장을 맡고 있는 손두환을 만나 장제스 교장을 방문하고 한인 학생들의 황포군관학교 입교 및 학비 면제 승낙을 받아냈다. 그리고 1926년 3월 손두환, 김원봉 등이 조직한 여월한국혁명군인회에 관여했다. 여월한국혁명군인회는 시베리아, 북만주 및 기타 지역에 산재한 한인들을 황포군관학교에 입학시키기 위해 격문을 발송하고 입학생들의 학비와 여비를 보조하여 광저우를 한국 독립운동의 중심지로 발전시키고자 했다.

광저우에서도 한인 민족운동 세력 통합을 위해 노력했다. 그는 김원봉, 장지락 등과 함께 의열단을 중심으로 민족운동 통일지도부를 구상하고자 <유월한국혁명동지회>를 조직했다. 김성숙은 기관지 <혁명운동>의 주필을 맡아 이론가 겸 문장가로서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당시 한인 청년들의 중산대학 입학은 유월한국혁명동지회의 추천을 받아야 했다. 한인 학생은 동지회 회원임을 조건으로 수업료와 식비를 무료로 보장받을 수 있었다. 이후 중산대학은 동지회에게 입학생들의 자질을 위해 한문, 수학, 영어 과목의 입학자격 시험을 실시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날로 격심해지는 중국 대륙의 정세 변화에 따라 광저우 한인 사회에도 변화의 물결이 일었다. 1925년 3월 쑨원이 사망한 뒤 국민당 내 반공 세력이 공산당 배척 운동을 전개했고 급기야 1927년에 제1차 국공합작이 깨지고 말았다. 그 과정에서 의열단, 중국공산당 지부, 상하이파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등 파벌이 난립하면서 한인 독립운동 단체들의 대립과 갈등이 심화되었다.

그 같은 파벌을 타파하기 위해 장지락 등과 함께 주, 시베리아, 상해, 북경, 국내 등 각지에서 온 한인 공산주의자들을 상대로 'KK'[6]를 조직하였다. kk는 광저우 한인 세력 통합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을 만큼 결속력이 강했고, 김성숙은 공산주의자들을 이 단체로 결집시키기 위해 힘을 기울였다. 그는 1927년 1월 1일자로 발행한 기관지 <혁명운동> 제2호에서 야광(夜光)이란 필명으로 <1927년을 맞이하여>를 게재했다.
1927년에 접어들고 있는데, 우리는 과연 어떠한 책략을 주로 하고 어떠한 전술을 사용해야 할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의론이 분분하지만, 적어도 올해 안에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사업을 실현하고자 한다.
1. 사회운동가를 완전히 통일시키고 공산당의 영도 아래 기율적ㆍ조직적으로 운동을 개시할 것.
2. 민족적 대혁명당을 조직함으로써 일반 혁명민중을 이 당내에 결집시키고 당의 지도로부터 의식적이고 기율적인 운동을 개시할 것.
3. 국내에 있는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할 것.

또한 정치단체로의 전환을 내걸고 의열단의 개편을 추진하여 민족주의 세력의 결집을 시도했다. 그는 1927년 3,4월 광저우에서 열린 제2차 의열단 전국대표회의에서 광저우 본부의 집행위원으로 선출된 뒤 중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독립운동 단체를 규합하는 '대독립당촉성회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다가 국민당 북벌군이 반년 사이에 중국 남방의 각 성을 점령하고 국민정부의 수도를 광저우에서 무한으로 옮긴 뒤, 김성숙은 의열단 멤버들과 함께 활동 근거지를 무한으로 옮겼다.
파일:김성숙(1927년).png
1927년 5월 17일, 모 경찰서 형사과에서 복사된 사진.[7]

무한에 도착한 뒤 교도단 제2영 제5련의 중국공산당 조직 책임자를 맡았다. 그가 언제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지만, 중국공산당 조직 책임자를 맡았으니 그 이전에 가입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후 그는 중국공산당의 지시로 교도단을 이끌고 장발규 부대를 따라 남하하여 10월에 광저우로 돌아왔다. 그는 광저우로 돌아온 후 중산대학에서 학업을 계속하면서 중국인 여학생 두쥔후이를 만나 사랑에 빠졌고, 두 사람은 연인으로서 서로 깊이 교류했다.

한편, 그는 장지락을 비롯해 광저우에 남아있던 한인들과 함께 장제스의 쿠데타로 침체 상태에 빠져 있던 한인독립운동단체 재건을 위해 매진해 의열단 대표회의를 개최했다. 그러던 1927년 12월 11일 중국공산당의 주도로 광저우 폭동이 일어났다. 그는 제5련 중국공산당 조직의 책임자로서 5련의 한인들을 인솔하여 포병련과 함께 사하를 점령했다. 이후 5련의 한인 전사들과 함께 사하에 남아 전장을 수습하고 경계임무를 수행했다. 12월 12일 광저우 소비에트 정부가 설립되고, 장지락 등과 함께 광저우 소비에트 정부 창립대회에 참석했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의 광저우 점령은 3일 천하로 막을 내렸고, 그는 두쥔후이와 함께 중산대학 학생숙사에 남아있던 한인 학생들의 광저우 탈출을 도왔다. 국민군은 한인들을 "적파당"으로 지목하고 탄압을 강화했다. 그는 잠시 두쥔후이의 집에 숨었다가 1928년 홍콩을 경유하여 상하이로 탈출했다.

2.3.3. 상하이

상하이에 도착한 후 그곳에 은둔했다. 그의 동료 오성륜과 김산 등이 중국공산당 활동에 적극 참여했던 것과 달리, 그는 중국공산당과 거리를 두고 한동안 한인독립운동의 무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1929년 두쥔후이와 결혼한 후 원고 집필 및 번역 활동으로 생활했고 김산, 오성륜 등 어려운 처지의 동지들에게 경제적 도움을 줬다. 이후 광저우에 잠시 들러 민국일보 기자로 활동하다가 상하이로 다시 돌아온 그는 1930년 8월 두쥔후이와 함께 중국창작비평위원회에 가입했다. 그는 창작비평위원회 소속으로 문학 창작 및 이론 비평 활동을 전개했다.

1932년 1월 일본군이 상하이를 침략하자, 그는 중국좌익작가연맹의 지도자들과 함께 일제의 상하이 침략과 민중학살을 비난하는 선언서를 발표했다. 또 <반일민보> 신문의 편집을 맡아 항일전쟁의 현활을 널리 알리고 중국인들의 항일정서를 고취하는 논설을 게재했다. 또한 1928년 이후 <일본경제사론>, <통제경제론>, <산업합리화>, <중국학생운동>, <변증법전정> 등의 책을 번역했다.

1935년 일제가 중국 화북 지역을 침략해 중국민의 항일열기가 고조되자, 김성숙 부부는 1935년 12월 12일 중국좌익작가연맹 및 문화계 인사들과 함께 연명으로 <상하이 문화계 구국운동선언>을 발표했다. 그는 이 선언서에 부인 두쥔후이와 함께 서명했다. 또한 그는 두쥔후이가 활동하고 있던 상하이 여성구국회에도 가입해 중국 여성계의 항일구국운동에도 참여했다.

한편, 그는 중국공산당을 탈당하고 한인 공산주의자들을 규합해 조선공산주의자동맹을 조직했다. 그러다가 제2차 국공합작운동이 급속하게 전개되자, 그는 상하이에서 박건옹, 김산 등 공산주의자 20여 명과 함께 조선공산주의자동맹을 조선민족해방동맹으로 개편했다. 조선민족해방동맹은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중국을 위한 혁명이 아닌 조선을 위한 혁명, 곧 민족혁명을 지향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그는 후에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조선민족해방동맹을 만들 때 이런 생각을 가졌어요.
"우리 공산주의자들이 전부 중국공산당원이 되어 버렸다. 조선공산당 중국공산당이 되었다. 이래서는 안 된다. 나 혼자만이라도 조선혁명을 하도록 노력해보자. 그런데 나 말고도 중국공산당에 들어가지 않은 채 조선의 공산운동이나 조선의 혁명에 몸바치려는 동지들이 있지 않느냐? 이들이 함께 일할 곳을 만들자."
이래서 조선민족해방동맹을 만들었지요. 이 이름 안에 공산주의라는 말을 넣지 않았습니다. 나는 공산주의보다 조국의 해방이 더욱 중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이 단체를 공산주의 단체로 본 것은 사실입니다. 임정에서도 우리를 그렇게 인정했습니다. (중략) 그때 우리나라의 사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은 민족주의라는 것을 무시하고 있었어요. 민족주의를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라고 단정하고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강조한 마르크시즘-레닌이즘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지요.
여기에 맞서니 나와 내 동지들은 "민족문제가 더 크다. 민족이 독립된 뒤에야 공산주의고 사회주의고 무엇이든지 되지 민족의 독립이 없이 무엇이 되느냐"라고 역설했지요. 그리고 "우리가 독립하기 위해서는 전 민족이 단결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민족주의이다. 이 민족주의와 합작해서 자본주의와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지요.
'혁명가들의 항일회상' 中

2.3.4. 난징

1937년 8월 일본군의 공격으로 상하이가 함락 위기에 처하자, 김성숙이 주도하는 조선민족해방동맹은 상하이를 떠나 난징으로 옮겼다. 좌파세력은 난징에서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했는데, 여기엔 김원봉의 조선민족혁명당, 김성숙의 조선민족해방동맹, 그리고 류자명의 조선혁명자연맹이 결합되었다. 김성숙은 조선민족전선연맹 상임이사 겸 선전부장으로 활동하며 기관지 <조선민족전선>의 편집을 맡았다.

1938년 3월 10일 안창호가 서거하자, 김성숙은 창간호에 애도문을 발표했다. 애도문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위대한 민족해방운동가이자 지도자인 안창호 선생이 3월 10일 적군의 감옥에서 세상을 떠나셨다는 비보를 들었다. 조선민족, 특히 선생과 혁명사업을 책동안 오랜 동지들과 도산 선생의 지휘하에 혁명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무수한 청년들은 선생의 오랜 해외 망명생활 중에 만난 잔혹한 조운과 그에 대한 비통함을 감추지 못했다.

도산선생은 향년 61세로 원로 혁명가셨다. 선생은 30여년간의 망국생활 하면서 줄곧 조선 민족의 자유독립을 위해 끈질긴 투쟁을 했다. 특히 나라를 잃은 후에도 해외로 망명해 만주, 상해 및 미주 각지에서 혁명동지들을 도우며 사단을 조직해 혁명사업을 이끌어 나갔다. 1919년 3.1운동 대혁명 당시, 선생은 한국 임시정부에 가입하여 국민대표대회를 소집했다. 이는 혁명운동의 통일을 도모하기 위함이었고, 그 후 한국독립당을 조직하여 통일된 독립운동을 지휘하기 위한 책략이었다.

1.28 전쟁 후 윤봉길 열사의 폭탄 투여 사건으로 상해 파견군 사령관인 시라카와 요시노리를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도산선생은 상해에서 왜적에게 체포되어 경성의 감옥으로 이송된 후 5,6년 간의 처참한 철창생활을 하다가 병환으로 석방되었다. 하지만 이번 중일전쟁 발발 시 선생은 적군의 총독부에 의해 체포되었고 노병으로 적군들의 심문을 더 이상 버텨낼 수가 없었던 바 결국 우리 곁을 떠나셨다. 우리는 민족의 자유독립 투쟁을 위해 희생된 도산선생을 기억해야 한다.

선생은 혁명운동 중 전 민족의 힘을 모으고 "착실하고 열심히 일해야 한다."라는 정신을 가지고 전진해 나가야 함을 주장하셨다. 왜적이 대대적으로 중국을 침략하고, 전 조선민족 반일반전운동의 기운이 일어나게 된 오늘날 특히 전 민족 반일통일전선운동이 막 고조되었을 때, 선생의 육체는 비록 적군들에 의해 잃게 되었지만 선생의 혁명 정신이 모든 혁명가 마음 속 깊이 영원히 새기며 혁명운동을 지속적으로 이끌어갈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도산선생을 애도해야 하고, 전 민족 단결의 힘을 모아 전 민족의 통일전선을 건립하고자 했던 선생의 유지를 계승하여 일본 제국주의를 무찔러야 한다.

2.3.5. 조선의용대

1938년 10월 10일, 한커우에서 조선민족전선연맹의 무장조직으로 조선의용대가 창설되었다. 조선의용대는 중국군 6개 전구 남북 13개 성 전지에 배속되어 일본군 포로 심문, 대일본군 반전 선전, 대중국민 항전 선전활동을 전개했다. 김성숙은 조선의용대 창설에 참여했고, 조선의용대 지도위원회 위원 및 정치조장에 선임되었다. 정치조는 대원들의 정치, 사상 교육을 담당했다.

조선의용대 창설 직후인 1938년 10월 25일, 무한이 일본군에게 점령되었다. 이에 조선의용대는 광서성 계림으로 이동했다. 김성숙은 12월 3일 계림에 도착한 뒤 대원들의 사상교육을 담당하는 동시에 기관지 <조선의용대통신>에 한국독립운동을 알리고 중국인의 항전의지를 고찰하는 글들을 게재했다.

1939년, 김구와 김원봉은 중국 관내지역 독립운동 진영의 단일당 결성을 추진하고 기존의 모든 단체를 해체하고 강력한 단일대당의 건립을 촉구하는 내용의 <동지, 동포 제군에게 보내는 공개통신>을 발표했다. 이때 김성숙은 여기에 가담하기로 하고 조선의용대를 떠나 1939년 8월 말 기강에서 개최된 한국광복군 통일 7당통일회의에 '조선민족해방동맹 대표'로 참석했다. 그러나 1939년 말 7당통일회의가 결렬되자, 그는 이해 5월 임정 옹호세력이 한국독립당을 창당하는 시기를 전후해 충칭으로 이동했다.

2.3.6.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한민국 임시정부 참여를 결심한 데에는 그의 통일 민족 운동에 대한 갈망이 컸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1941년 11월 1일에 <조선민족해방동맹 재건 선언>을 발표해 중국공산당의 지휘를 받지 말고 임시정부의 주관하에 통일된 민족전선을 구축해야 함을 주장했다. 이후 그는 1942년 1월 22일 제22차 국무회의에서 선전위원으로 선임되었고, 같은 해 1월 26일 임정 국무회의에서 3.기념 준비위원으로 선임된 데 이어 선전조 주임으로 부임했다.

1942년, 임시정부 선전위원 겸 편집부 주임을 맡았으며 1943년 1월 5일 국무회의에서 외교위원으로 선임되었다. 또한 그의 아내 두쥔후이도 1943년 2월 3일 국무회의에서 외무부 부원으로 선임되었다. 그리고 1943년 3월 4일엔 김성숙이 내무차장으로 임명되었으며, 3월 30일에는 두쥔후이가 외무부 외사과 과원으로 선임되었다. 그리고 4월 24일 회의에서 임시정부 국무위원 선거에 참가해 국무위원에 당선되었다.

1944년 1월 한국독립당과 조선민족혁명당의 임정 주도권 경쟁이 권력투쟁 양상을 띠게 되자, 양당은 임시의정원의 선거방식과 관계없이 조완구, 박찬익, 유동열, 김원봉, 김성숙은 국무위원으로 선출하는 데 합의했다. 이는 김성숙의 정치적 위상이 임정에서 확고해졌음을 의미한다.

그의 임시정부에서의 활동 가운데 쟁점이 된 부분은 이승만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의 외교 활동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는 1945년 4월 25일 ~ 6월 26일 유엔 창립총회인 샌프란시스코회의에서 이승만의 반소, 반공 활동이 국제사회에서 임시정부의 입지를 좁혔고, 더 나아가 국제 반파시즘 통일전선 및 대일 연합국 체제의 일원이 되고자 하는 임정의 외교 활동에 장애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김구 주석에게 국무위원 사퇴서를 제출하는 동시에 이승만 면직안을 제출했다. 그러나 당시 대미 외교에서 이승만을 대체할 인물이 없었기 때문에, 김성숙의 이승만 면직안은 통과되지 않았다. 훗날 김성숙은 이승만 탄핵 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이승만이는 그때 어떤 처지에 놓여 있었느냐 하면 미국에서 그 사람은 본래 공화당 쪽하고 가까운 사람입니다. 그때 공화당에서 민주당에 대한 반발이 굉장히 심할 때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공화당의 충동을 받아가지고 굉장히 나쁜 짓을 많이 했어요. 샌프란시스코회의에서 말이지. 나중에 동필무가 돌아와서 하는 얘기가 "이제는 너희 다 틀렸다. 이젠 모든 일이 다 틀렸다" 뿐이야.

그동안 내가 동필무나 주은래와 가깝게 사귀면서 그들을 통해 소련과 임정과의 관계를 많이 좋게 만들어 놓았던 것이지. 그래 중경에서 소련대사관이 리셉션을 베푼 때가 있었는데 임정 요원들도 많이 청했었지. 중공 친구들은 소련이 임정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으니까 이런 기회를 통해 임정을 이해하도록 중간에 서서 애를 쓴 것이지.

그런데 동필무 얘기로는 이승만이 샌프란시스코에서 모두 망쳐 버렸다는 거야. 무슨 얘기냐 하면, 샌프란시스코회의에서 이승만이가 단장이라 해 가지고서 삐라를 돌리고 성명서를 내고 했는데, 소련이 1945년 2월에 열렸던 얄타회담에서 한반도를 다 팔아먹었다고 야단을 치는 내용이더란 거야. 이런 짓을 했는데, 웬 여자가 돌리드래요. 그때 그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 동필무 자기 자신도 그것을 받았다는 겁니다.

자, 이래 놓으니, 그때 소련은 전승국으로서 참가할 때이고 소련 대표단장 몰로토프 ( Molotov) 외상은 굉장한 우위를 과시할 때였거든. 몰로토프가 화가 나서, "이게 뭐냐?"고 집어던지고, 화가 굉장히 났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결국 소련이 임정을 굉장히 반대하고.

그러니까 그때 공화당으로서는 민주당을 곤란하게 만드느라고 이런 짓을 했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이승만이 앞장서서 그런 일을 했거든요. 자, 그래 놓으니 그 동안은 그래도 임정에 대해서 소련에서 좋게 생각을 했는데, 아! 갑자기 그런 일이 떡 나타나니까 소련에서 그만 화가 났지.

소련은 그때 『전쟁과 공인계급(工人階級)』이라는 외교 잡지를 발간했는데 거기에다가 임정에 대한 그런 것을 써냈는데 욕을 무지무지하게 했어. 그 잡지는 소련말로 된 것인데 중국에도 다 나돌고, 그래서 임정은 꼼짝 못하게 됐어요. 이런 일을 중국 대표단이 돌아와서 다 얘기했지.
'혁명가들의 항일회상' 中

한중 연대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그는 중한문화협회 창립대회에 참석해 김규식, 김원봉, 유자명과 함께 한국측 이사로 선임되었다. 중한문화협회는 3ㆍ1독립기념강연회,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25주년 기념 강연회, 전쟁 후에 있어서의 한국독립문제 좌담회, 대한민국임시정부 승인 좌담회 등 각종 행사를 주관했다. 또한 1945년 3월 15일 충칭의 중앙문화운동위원회 문화회당에서 열린 한국구제총회에 참석해 감사로 선임되었고 아내 두쥔후이는 이사로 선임되었다.

2.4. 광복 이후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하면서 한국이 광복을 맞이했다. 그는 훗날 당시의 심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1945년 8월 초순에 미국의 원자탄은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되었다. 일본의 패망과 한국 해방의 운명의 시일은 드디어 닥쳐왔다. 이것은 전 인류를 깜짝 놀라게 한 공전 최대의 뉴스였다. 이 뉴스를 전해 듣는 순간 필자는 경악과 황홀한 정신으로 낚싯대를 내던지고 미친 사람 모양으로 "한국독립 만세"를 고창하면서 날뛰었다. 나는 혼자서 피눈물을 머금고 광환(狂歡)한 것이다.

정신을 가다듬고 숙소로 돌아와 곰곰이 생각하니 가슴이 터지도록 기쁨과 슬픔이 복받쳐 오름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동거하는 두쥔후이 여사와 깊은 이해와 정성어린 격려를 받아가며 나의 낚시의 획득물인 붕어 튀김을 안주로 독한 대국주를 대량 마시며 형언할 수 없이 격동된 감정을 달래었다. 일본이 패망하고 민족 해방의 꿈이 실현되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기쁜 일이냐. 그러나 30여 년간 온갖 고난을 겪어가며 반일독립투쟁에 헌신한 임정의 앞길, 전 민족이 함께 걸어나가야 할 앞길은 먹구름 같은 외세에 가로막혀 캄캄하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슬픈 일이냐. 나는 대국주에 대취하여 기쁨과 슬픔을 모두 잊어버리고 다음날 새로운 생활을 전개를 기다리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다음날 조소앙 선생은 친서와 함께 여러 동지들을 보내어 필자의 즉각 충칭 귀환을 요구하였다. 요지는 속히 들어와서 임정의 입국 문제를 의논하자는 것이었다. 필자는 이에 다시 한번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미 해방된 이상 임정의 전도가 아무리 캄캄해졌다 하더라도 나는 고국으로 돌아가야 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30여 년간의 망명 생활을 청산해야 하겠고 자나 꺠나 잊을 수 없는 사랑하는 부모 형제와 처자를 만나봐야 하겠고 임정의 앞길과 민족의 앞날을 위해서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최후까지 해봐야 할 것이 아니냐.
'월간 중앙' 1968년 8월호, <아아! 임정 30년만에 해방하다>

그러나 그는 미국이 임정요인들에게 개인 자격으로 한국에 입국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에 탄식을 금치 못했다. 게다가 그는 가족 문제로 골치를 앓았다. 그는 1929년 두쥔후이와 결혼하여 슬하에 3명의 아들 두건, 두견, 두련을 두었다. 그는 한국으로 가는 교통편을 마련하지 못해 두쥔후이와 세 아들들을 중국에 남겨둔 채 홀로 한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12월 1일 임정 요인들을 싣고 상하이를 떠난 주한미군 수송기는 저녁 무렵에야 옥구비행장에 도착했다. 김성숙의 마음은 벅차 올랐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땅에 엎드렸다. 흙을 한 움큼 손에 쥐고 코에 대어 보고 흙냄새를 맡았다. 다른 원로 독립운동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들의 환국은 별다른 환영을 받지 못했다. 사전에 이들의 귀국을 통보받지 못한 시민들은 그들을 환영하러 나오지 못했고, 임정 요인들의 호송을 맡은 미군의 태도도 거칠었다. 그들은 점심을 거린 요인들에게 저녁식사도 대접하지 않은 채 헤드라이트를 켠 군용 지프차에 실어 밤길의 서울행을 재촉했다.

하지만 뒤늦게 환국 소식을 들은 국민들은 열렬히 환영했다. 요인들이 머문 경교장과 혼마치 호텔 주위에는 연일 인파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김성숙도 숙소에서 나와 야수적인 일제치하를 견뎌낸 동포들을 위로하면서, 광복이 되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2.4.1. 좌우합작운동

1945년 12월 4일, 김성숙은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한국의 대중이 기대하는 완전독립을 못 가져온 것은 심히 불안하다. 돌아온 나로서는 도리어 일본제국주의 살인적 압박 밑에서 착취당해온 인민 대중을 위안하고 싶다. 우리는 모든 외적 힘을 버리고 대중과 힘을 합하여 대중이 옹호하는 전국적 통일정권을 수립하려고 한다. 우리 임시 정부에 대해서는 국내의 진보적 대중이 과소 또는 과대 평가하지 말고 정당히 평가하기를 바란다.

우리가 표방하는 바는 어느 일개의 계급을 대표하는 정강 정책과는 다르다. 오직 새로운 건설을 위해서 진보적 정책 정강을 내세우는 곳에 진실한 사명이 있고 스스로의 살길이 있을 것이다. 우리 임시정부 속엔 진보적인 사람도 많이 있을 뿐 아니라 그 혁명적 성질로 보아 민족 반역자와 친일파의 처단 문제는 조금도 소외되지 않을 것이니 그 구체적 방법은 아직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오직 내가 희망하고 주장하는 우리의 완전 독립을 관철하는 계획은 본질이 있어 계급을 합체시킨 전민족의 단결이다. 우리 임시정부는 진보적 정강 정책을 내세우는 동시에 친미 반소, 친소 반미 그 어느 것도 아닌 친미 친소로서 모든 모순을 해소시키는 데 있으며, 우리 임시정부의 국무위원 대다수도 이것을 위해 엄정히 노력하고 있다.
'자유신문' 1945년 12월 4일자 기사, <국무위원 김성숙씨 발언>

이후 경교장에서 열린 임시정부의 첫번째 국무위원회에서는 우선 좌우익 각 정당 대표자를 소집하여 비상정치회의를 조직하고, 이 회의에서 다시 비상국민대표자회의를 소집하자는 의견이 다수로 결정되었다. 김성숙은 그 대표자 회의를 위한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는 곧 회의에서 임시정부 요인의 우익 편향을 지적하고 회의에서 탈퇴했다. 결국 비상정치회의는 정상대로 이행되지 않고 1946년 2월 미군정의 자문기관인 남조선국민대표 민주의원에 임시정부의 참여로 귀결되었다. 그는 임시정부가 남조선 과도민주의원에 참가하는 것을 극렬 반대하다가 급기야 임시정부에서 이탈했다. 이에 대해 훗날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그래 내가 막 떠들었지요. "우리가 지금까지 민족을 대표해서 정부 행세를 하고 다니다가 외국 군정의 자문기관으로 기어들어간다면 국무회의도 그만두고 말아라. 회의는 무슨 회의냐? 무엇으로 국무회의를 여는 거냐? 개인 자격으로 들어간다면 임시정부를 없애고 들어가라. 이게 뭐냐?" 막 떠들었지요.
'혁명가들의 항일회상' 中

임시정부를 떠난 뒤 좌우 합작 노선을 가겠다고 표방한 민주주의민족전선에 참여해 민전의 중앙의원, 중앙상임의원, 부의장에 피선되었다. 이후 그는 자주, 민주, 통일, 독립의 4대 원칙을 제시하면서 민족 내부의 총단결을 강조하는 입장을 제창했다. 그는 이러한 정치노선을 구현하고자 각처를 돌아다니며 강연했다.

그러던 1946년 3월 25일, 그는 정읍, 부안에서 연설을 하던 중 임시정부가 민주전의원에 가담한 것은 본래의 노선을 이탈한 것이며, 심지어는 미군정의 앞잡이가 되었다고 비난했다. 그의 이 발언은 미군정을 비판한 것으로 간주되었고, 결국 3월 30일 미군에 체포되어 6개월간 구금되었다. 이후 1946년 9월 말 풀려난 그는 좌우합작운동에 매진하면서 민전을 11월 말에 탈퇴했다. 그는 민전을 탈퇴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민전회의라는 것이 늘 짜고 나와서 하니, 나는 그게 싫더군. 공산당 놈들이 미리 토의해서 결정해 놓은 것, 이걸 우리는 앉아서 민전 이름으로 결정해 주는 것이야. 그때 내가 여운형씨를 자주 만났어요. 내 정견을 쭉 이야기했더니 참 옳다고 해요.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중간 노선을 걷자는 것입니다. 그래 민전을 함께 탈퇴하기로 하고 나왔지요. 그리고 그 이듬해인 1947년 4월에 그이와 근로 인민당, 약칭 근민당을 함께 조직했지요.
내가 원래 민전에 들어갈 때도 "민전은 문호를 개방해 모든 양보와 타협으로 우익 각 당파와 합작해야 한다."는 것을 조건을 내세웠었어. 그랬었는데 민전의 정책이 점점 좌익소아병적으로 수행되어 민족적 단결은 고사하고 민족의 분열을 더욱 격화시키기에 탈퇴했던 것이지. 그러니 근민당을 새로 시작하면서 좌우 합작의 깃발을 들지 않을 수 없었지. 나는 그래서 여운형 선생과 김규식 박사가 추진하는 좌우 합작운동을 적극 지지했어. 좌우 합작위원회를 민족통일전선으로 재편성하자고 주장하기도 했고.
'혁명가들의 항일회상' 中

그는 정당통일 운동도 전개해 남북 주요 정당 대표자회의를 추진했다. 그러나 북한 측이 실무 협의를 일방적으로 주도하고 여운형이 암살당하자, 북한 측과 협의해봐야 소용없다고 판단하고 김구, 김규식과 함께 회의가 열리는 평양으로 가지 않고 서울에 남았다. 이후 1948년에 열린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 불참했지만, 이듬해 김구가 암살당하자 좌우합작운동을 완전히 포기하고 1949년 12월 근로인민당 해체를 선언함과 동시에 북한정권 반대를 선언했다.

2.4.2. 6.25 전쟁

그 후 1950년 5월 30일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경기도 고양군에서 민족자주연맹 소속으로 출마했으나 현역 국회의원인 최국현에 밀려 낙선을 면치 못했다. 그리고 한달 후 6.25 전쟁이 일어났다. 그는 미처 피난을 떠나지 못하고 서울에 남았다. 유가족의 증언에 따르면, 남로당의 거물인 리승엽이 사람을 보내 협조를 요청하자, 그는 단호히 묵살했다고 한다.

1.4 후퇴 때 서울을 떠나 부산으로 간신히 피난했지만, 이승만 정권은 그가 서울에 남아서 북한군에게 부역했다는 혐의를 씌워 그를 체포했다. 그는 한 달 동안 부산 형무소에 갇혀 지내다가 한 달 만에 무혐의로 풀려났다.

2.4.3. 독재 정권 투쟁

전쟁이 끝난 뒤 몇년간 조용히 지내던 그는 1955년 9월 1일 자유당 정권의 전횡을 못마땅하게 여긴 정치인사들과 함께 광릉에서 회합을 갖고 여러 갈래의 혁신 세력이 대동단결할 수 있는 길을 찾았다. 이 광릉회합에는 조봉암 서상일을 비롯한 혁신계의 지도급 인사들이 참가했으며, 같은 해 11월에 진보당추진위원회가 조직되었다.

그는 광릉회합에 참가했고 진보당추진 위원회에도 관여했지만, 진보당 창당에 그다지 열성적이지 않았다. 1955년 12월에 발표된 진보당추진위원회 12인의 명단에 그의 이름은 없었으며, 1956년 12월 진보당이 창당되었을 때도 참여하지 않았다. 이후 그는 서상일과 박기출, 이동화, 고정훈, 신숙 등과 함께 1957년 10월 민주혁신당을 창당했다. 이 과정에서 정치위원으로 피선되었고, 혁신세력 대동통일준비위원회를 조직해 통합운동에 나섰다.

그러나 자유당 정권은 여기에 철퇴를 가했다. 1957년 11월 16일, 당국은 "전 근로인민당 조직국장 김성숙 외 9명이 간첩 박정호와 접선하여 근로인민당을 재건하려고 압박했기 때문에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체포되었다"고 발표했다. 이후 그는 재판에 회부되었고, 검찰은 12년형을 구형했지만 1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아 6개월 만에 풀려났다. 검찰은 이에 불복해 항소했지만, 1958년 11월 18일 대법원은 재판에 회부된 21명 모두에게 무죄를 판결했다. 애당초 날조된 사건이라 증거가 없었기에 당연한 판결이었다.

이후 자유당 정권은 진보당 사건으로 조봉암 세력을 해체시켰고 그는 이같은 당국의 전횡에 짓눌러 정치 활동을 완전히 중단했다. 급기야 중국에 남아있던 세 아들이 아버지를 찾아 배를 타고 인천에 돌아왔지만, 정부는 그들을 인천 월미도에 있는 수용소에 가두었다가 중국으로 추방했다. 이 일로 실의와 좌절에 빠져 동지들과 만나서 밤을 새워가며 폭주를 한 탓에 건강이 몹시 악화되었다.

그러던 1960년 4월, 4.19 혁명이 성공하면서 자유당 정권이 붕괴되고 이승만이 하와이로 망명했다. 그는 4.19 혁명 직후 사회대중당 창당준비위원회에 참여했고 11월 24일 출범된 사회대중당의 정치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 고향 후배이자 독립운동을 함께한 동지인 김중섭의 후원으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한편 그는 '백범 김구선생 시해진상규명투쟁위원회'에 참여해 김구 암살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려 했지만 후술할 5.16 군사정변으로 무산되었다.

2.4.4. 5.16 군사정변

1961년 5월 16일 새벽 박정희 육군 소장이 주동한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 이후 통일사회당 인사들이 줄줄이 체포되었는데, 그 역시 5월 18일에 체포되어 성동 경찰서로 끌려갔다. 군부는 통일사회당 자체를 불순조직으로 규정하고 당의 활동이 북한 정권을 이롭게 하는 이적 행위로 몰아붙였다.

그는 서상일, 정화암, 이동화, 윤길중, 송남헌 등 혁신계 원로들과 함께 포승줄에 묶여 군사법정에 섰다. 공소장에 적힌 사건의 요지는 "동서냉전의 희생에서 해방되고 미소양국의 세력권에서 벗어나는 정치적, 군사적 완충지대 즉 영세중립화만이 통일독립을 가능케 한다"는 취지의 중립화 평화통일론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북한을 이롭게 했다는 혐의였다.

이렇게 구속되어 군사재판에 회부된 그는 1962년 2월 14일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10개월 만에 풀려났다. 그러나 1962년 3월 16일 '정치활동정화법'에 의해 정치 활동이 6년 간 금지되면서 그의 정치 생명은 끝장났다.

2.4.5. 쓸쓸한 말년

그러던 1964년, 정치 활동 재개를 허락받은 그는 민중당에서 분리된 윤보선이 '선명야당'의 기치를 들고 주도하는 보수 야당 신한당에 입당했다. 신한당이 다시 합류하게 되어 야권 대통합이 이루어지면서 신민당이 탄생하게 되고 운영위원, 지도위원을 역임했다.

당시 혁신 정당의 활동이 완전히 금지된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길은 보수야당일 지언정 독재자 박정희에 맞서는 당에 몸을 담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무렵 생활고에 시달렸다. 그가 1964년 1월부터 1년간 작성한 '혁명일기'에는 "집에 쌀이 떨어지고 돈 한 푼 없어서 탁발하러 외출"이라는 기록이 자주 나온다. 또한 그는 이무렵에 심한 천식을 앓았고 4월부터 '나의 혁명 생활'이라는 원고를 쓰기 시작했지만 건강 악화로 많이 진척되지 않았다.
만약에 식생활 문제만 해결하게 되면 안심하고 독서와 저작에 노력해보고 싶다.
'혁명일기' 1964년 3월 17일.

그의 혁명 일기는 매일 200자 원고지 2~3매 분량의 국한문으로 쓰였다. 짧은 일기에는 생활, 가족, 교우, 국내외 정세 등이 진솔하게 담겼고, 중국에 남아있는 아내와 자식들이 꿈에 나온 이야기도 담았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독립유공자 표창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는 다음과 같은 감상을 남겼다.
항산의 전언에 의하면 나와 소해 선생은 독립유공자 표창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한다. 나에게는 무가무불가(無可無不可)한 소식이다. 표창을 해도 좋고 안 해도 무방한 일이기 때문이다. 첫째 나는 독립무공자(獨立無功者)임을 자인하는 사람이므로 표창하지 않는다고 해서 조금도 불평할 리 없는 것이고 또 현정권이 나를 유공자라고 해서 표창한다는 것을 굳이 거부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의 일관한 주장은 우리나라가 아직도 독립이 되지 못하고 외국세력 하에서 전 민족이 신음하고 있으므로 독립운동을 계속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직은 논공행상할 때가 아니다.
'혁명일기' 1964년 12월 23일.

그는 말년에 셋방살이를 전전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동지, 후배들이 그와 같은 혁신계 인사인 구익균의 집마당 한 모퉁이에 건평 11평의 집 한 채를 마련하고 문 위에 '피우정(避雨亭)'이라는 목각 현판을 걸었다. 그 후 김성숙은 약값을 마련하는 것도 힘겨워하는 처지에 짓눌리며 천식에 시달리다가 1969년 4월 12일 서울특별시 성동구 구의동[8] 피우정에서 노환으로 향년 70세의 나이에 세상을 등졌다. #

김성숙의 장례식은 서울 조계사에서 사회장으로 치러졌고 파주군 조리면 장곡리(現 파주시 조리읍 장곡리)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리고 1982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고, 2004년 7월 28일에 그의 유해를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 임시정부요인 묘역으로 이장했다.


[1] 1927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는 3월 10일생으로 기재되어 있다. [2] 인근의 내산동·향봉동과 함께 상산 김씨 집성촌이다. [3] 상산군파 32대손. [4] 법명은 거연(巨淵) [5]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최대봉과 동명이인이다. [6] 독일의 'Koreaner Kommunismus'의 약자로 '조선인 공산주의'를 뜻하는 것이다. [7] 당시 우리나라 주소지는 경기도 고양군 지도면 대장리(현 고양시 덕양구 대장동)였다. [8] 1995년 3월 1일 성동구에서 광진구가 분리되면서 광진구 구의동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