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아치볼드 해리슨 바커(Archibald Harrison Barker) |
한국명 | 박걸(朴傑) |
생몰 | ? ~ 1927년 |
출생지 | 캐나다 토론토 |
사망지 | 캐나다 토론토 |
추서 | 건국훈장 독립장 |
1. 개요
캐나다의 장로회 선교사.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아치볼드 해리슨 바커는 캐나다 토론토 출신이지만 출생년도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그는 닉슨 대학교와 토론토 대학을 졸업하고 1909년 레베카와 결혼한 뒤 1911년 캐나다 장로회 선교사의 자격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이후 1912년 2월 회령으로 향한 그는 그곳에 갓 마련된 교회와 학교에서 목회 활동을 시작했고, 곧 용정 지역에서 개척 임무를 맡았다. 그는 그렇게 회령과 용정 일대를 오가며 선교 개척 사업을 벌였다. 그는 용정촌에서 예수교학교 교사로 활동하던 강봉우와 친분을 다졌다.1914년 바커와 아내 레베카는 용천동 동산에 제창병원을 설립했다. 이 병원은 한인 독립운동가들의 정치적 피난처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지하실에는 북간도 독립선언서와 독립신문이 인쇄되기도 했다. 또한 간도에서 만세시위가 벌어졌을 때 일본군의 저격으로 쓰러진 한인들이 이곳에서 치료를 받았고 시체가 안치되기도 했다. 또한 바커는 이 병원에서 빈곤자에 대해 무료 진료를 실시했고, 순회 의료 진료도 시행해 오지에 있는 한인 이주촌을 찾아다니면서 환자를 치료해줬다. 또한 바커는 명신여학교와 은진중학교를 설립해 교육 활동에도 매진했다.
1919년 2월 2.8 독립 선언 소식을 접한 강봉우는 서울로 내려가서 조선 동포들의 민심을 살펴본 뒤 2.8 독립 선언서를 몰래 입수해 2월 26일 함흥으로 가서 교회 계통 인사들에게 전달하고 만세 운동에 가담할 것을 권고했다. 이후 용정으로 돌아가던 그는 회령에서 바커를 만나 항일 운동을 지원해줄 것을 부탁했다. 바커는 흔쾌히 승낙했다.
“이번이 절호의 기회이다. 여럿이 의견을 나눈 바 있지만, 나는 찬동한다”라고 말하면서 강봉우를 격려했다.
1919년 4월 30일자 조선총독부의 보고서에 따르면, 그는 당시 함경북도 회령에 거주하면서 교인들을 선동한다는 혐의를 받았다. 그는 3.1만세운동 관계자들의 인원, 직업, 사상자 및 구금자의 성명, 연령, 인원, 처형 및 시위 상황, 사진 등을 여러 차례 서울 주재 영국총영사에게 보고하였다. 1919년 6월 25일부터 원산에서 개최된 캐나다장로회 한국선교부 연례회의에 참석했다. 7월 10일에 열린 연례회의에서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항의서를 하세가와(長谷川好道) 조선총독에게 보냈다.
이후 용경선교지부로 전임하고 은진중학교 교쟝을 겸하고 있던 바커는 1920년 10월 일본군이 간도 참변을 단행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가 돌보던 교회들은 이 사건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이에 바커는 12월 20일 연길현의 도윤(道允)을 찾아가 일본군의 주둔에 대한 중국의 방침과 경신참변 시 한인들이 입은 피해 조사 결과에 대해서 문의하고 국자가 형무소에 구금되어 있던 명동학교 교장 김약연의 석방을 교섭해 김약연을 일본 측에게 넘기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으며, 일본인들의 방해와 중국 군경들의 질시 때문에 기독교 포교가 어렵다고 호소하기도 했다.
1923년 중병에 걸려 캐나다로 귀국한 바커는 1927년 토론토에서 생을 마감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아치볼드 해리슨 바커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