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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종석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곽종석
郭鍾錫[1]로 개명했다. 현풍(포산)곽씨세보 하권 300쪽에도 곽도(郭鋾)로 등재되어 있다.]
파일:곽종석.jpg
[2]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아명 곽석산(郭石山)
명원(鳴遠) → 연길(淵吉)
회와(晦窩) → 면우(俛宇)
본관 현풍 곽씨[3]
출생 1846년 6월 24일
경상도 단성현 사월면 사월리 초남촌
(현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초포마을)[4]
사망 1919년 8월 24일
경상남도 거창군 가동면 다전동 자택
묘소 경상남도 거창군 가조면 장기리 창덕사(彰德祠)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2. 생애
2.1. 초야에 묻혀사는 선비2.2. 고종과 대면하다2.3. 구한말-일제강점기 시기 행적2.4. 파리 장서 사건과 사망
3. 사상
3.1. 심즉리설3.2. 의병과 순절을 부정하다3.3. 개방적 위정척사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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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유학자. 자는 명원(鳴遠), 호는 면우(俛宇)이며, 본관은 현풍(玄風)이고 경상도 단성현(현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출신이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독립유공자 곽윤은 그의 장조카이다.

2. 생애

2.1. 초야에 묻혀사는 선비

곽종석은 1846년 6월 24일 경상도 단성현 사월면 사월리 초남촌(현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초포마을)에서 아버지 곽원조(郭源兆, 1795 ~ 1857)와 어머니 해주 정씨 정광로(鄭匡魯, 1766 ~ 1819. 6. 13)[5]의 장녀 사이의 2남 5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위로 형 곽정석(郭廷錫, 1840 ~ 1894)이 있었다.

그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어릴 때부터 영특했다. '면우년보'에 따르면, 그는 4살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5살 때 십팔사략을 읽었고 8, 9세에 사서와 시경, 서경을 다 읽었다고 하며, 9살때부터 과거에 응시하기 위한 공부를 준비했고 12살 때 부친상을 당해서는 예를 다해 발상하여 주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고 한다. 이후 19살 때 향시에 합격했지만 20세 때 전시에서는 합격하지 못했다.

곽종석은 21살 때 당호를 회와(晦窩)라고 짓고 성리학 공부에 전념하여 20대 초반에 선진시대의 유가 경전은 물론 도가와 불가의 경전까지 섭렵하여 이미 학자의 명성을 떨쳤다. 1870년, 곽종석은 25살의 나이로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을 찾아가 성리학적 문제에 대해 토론하고 그 내용을 '지의록(贄疑錄)'에 정리했다. 이진상은 지의록을 읽어보고는 크게 칭찬했고, 이후 곽종석은 이진상의 가장 독실한 제자가 되었고 스승의 학설이 안동 일대의 유림들에게 배척당할 때 스승을 적극 옹호했다.

곽종석은 과거에 한 번 떨어진 뒤 과거에 뜻을 두지 않았지만 어머니의 권고에 따라 과거에 응시하다가 30세 때 과거를 완전히 포기하고 호를 면우(俛宇)로 고친 뒤 안동부 춘양(春陽)에 묻혀 지내며 제자를 기르고 성리학을 연구했다. 1887년 스승 이진상이 사망하자, 그는 장례식에 참석하여 제문을 지어 스승을 잃은 슬픔을 표현했고, 장례를 마치고 돌아와서는 태백산 아래로 들어가 움막을 짓고 살았다. 50세 때인 1895년 조정에서 비안현감(比安縣監:종6품)을 제수했지만, 곽종석은 사양했다.

1895년 을미사변 이후 안동 일대에서 을미 의병이 일어났다. 이때 곽종석은 의병에 가담해달라는 제의를 수차례 받았지만 모두 거절했다. 이후 1896년에 진주부 거창군 가동면 다전동(현 경상남도 거창군 가북면 중촌리 다전마을)로 이주했고, 그해 2월에 사람을 한성부로 보내 각국 공사에 이웃 나라를 노략질하는 일본의 죄악을 성토하는 글을 전달하게 했다.

2.2. 고종과 대면하다

1899년 2월, 고종은 곽종석에게 중추원 의관에 제수했다. 그러나 곽종석은 이번에도 사양하고 학문에 전념하며 한주집(寒洲集)을 편찬하고 남명집(南冥集)도 일정 부분 수정했다. 1903년, 고종은 다시 곽종석을 중추원 의관에 제수했다. 이에 곽종석이 상소를 올려 사양 의사를 밝히자, 고종은 다시 비서원 승에 제수했다. 곽종석은 이번에도 거절 의사를 밝혔으나, 고종이 연이어 칙서를 보내 서울로 와서 자신을 보필해줄 것을 요청했다. 고종이 3차례나 칙서를 보내 서울로 올 것을 권고하자, 곽종석은 결국 서울로 상경해 1903년 10월 18일 고종과 대면했다. 곽종석은 고종을 알현한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신이 삼가 폐하께서 지난날 내리신 칙유(勅諭)를 읽어보니, ‘내가 밤낮으로 훌륭한 정치를 구한 지 40년이 되나 국사(國事)가 날로 잘못되어간다.’라고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의혹이 없지 않습니다. 폐하께서 진실로 훌륭한 정치를 구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어찌 40년 동안 훌륭한 정치를 구해 왔는데 아직도 훌륭한 정치의 효험이 없었겠습니까? 대개 임금의 마음이 매양 어려운 시기에는 깨우치고 훈계하지만 편안한 시기에는 안일해져서 심법(心法)이 끊기고 정령(政令)이 무상(無常)하여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날로 어렵게 되어 갑니다. 그러니 나라의 흥망이 어찌 ‘심(心)’ 한 글자에 달린 것이 아니겠습니까? 폐하께서 오직 마음에 돌이켜 구하시기를 엎드려 바랄 뿐입니다.

고종은 이에 대해 "훌륭하구나, 그 말이여! 참으로 치국(治國)의 좋은 약이로다."라고 칭찬했고, 곽종석은 뒤이어 정치에 대해 재차 건의했다.
신이 ‘심’이라는 글자로 시작하였습니다만, 요(堯)·순(舜)의 훌륭한 정치도 또한 ‘인심유위 도심유미 유정유일 윤집궐중(人心惟危道心惟微惟精惟一允執厥中)’이라는 16자(字), 즉 인심은 오직 위태롭고 도심은 오직 은미하니 오직 정밀하고 한결같아야 그 중도를 잡을 수 있다는 말에 불과합니다. ‘심’은 하나지만 그것이 인의예지(仁義禮智)와 충효경자(忠孝敬慈)에서 발현되는 것이 도심(道心)이며, 음식 의복(飮食衣服)과 성색 화리(聲色貨利)의 사사로움에서 발현되는 것이 인심(人心)입니다. 폐하께서는 하나의 생각에서도 반드시 인심과 도심의 공사(公私)의 단서를 살펴서 그것이 도심의 공적인 것이라는 것을 알면 반드시 확충시켜 밀고 나가고, 그것이 인심의 사적이라는 것을 알면 반드시 억제하여 없앤다면, 요·순의 정치를 아마 이루실 수 있을 것입니다.

고종은 그런 그에게 "세상을 구제할 방책을 깊이 품고 임금께 충성하고 백성들을 윤택하게 하는 것이 선비의 일이다. 시골에 묻혀 자기 몸만 선하게 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 모르겠다."라며 서울에서 자신을 보필해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곽종석은 자신의 역량이 부족해 황제를 보필할 수 없다며 거듭 사양하면서 유학을 진흥시키는 데 힘써줄 것을 요청했다.
신이 듣건대 폐하께서 경연(經筵)에 나가시지 않은 지 이미 오래이고 황태자(皇太子)의 서연(書筵)도 따라서 해이해졌다고 하니, 혹 국사가 다난하여 겨를이 없는 탓이어서입니까? 글이란 치국(治國)의 근본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유신(儒臣)을 초치(招致)하여 경연(經筵)에 두어 득실(得失)을 묻고 의리를 강구하여 폐하의 덕을 돕도록 할 것입니다. 그리고 박식하고 도덕이 높은 선비를 뽑아 원자를 보도(輔導)하는 책임을 맡겨서 보고 듣고 익히는 것들이 하나라도 올바른 것에서 나오지 않음이 없게 하면 국가의 근본이 튼튼해지고 영명(永命)을 간구할 수 있으니, 이는 실로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에 끝없는 복입니다. 근본을 튼튼히 하고 말단(末端)을 다스리면 어떤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다음날, 고종은 곽종석을 의정부 참찬에 임명했다. 그러나 곽종석은 사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고, 자신에게 집 한 채를 하사하는 지시 역시 취소하도록 청했다. 고종은 그의 사직을 윤허하지 않았고 집 한 채를 마다하는 것 역시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곽종석이 병이 들어서 관직 생활을 할 수 없다며 재차 사직을 청하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2.3. 구한말-일제강점기 시기 행적

이후 초야에 묻혀 지내던 곽종석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외교권이 일본에 넘어가자 즉시 상소를 올려 일본의 보호를 거부하고 국체를 밝혀 바로잡을 것을 촉구했으며, 을사조약 체결에 앞장선 을사오적을 척살할 것을 촉구했다. 이듬해 2월, 최익현이 서신을 보내 의병을 함께 일으키자고 요청하자, 곽종석은 답신을 보내 거부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1908년 63세에 20년간 집필하던 '한주행장'을 완성하니 총 1만 4천자에 달했다. 또한 이진상의 수제자 장석영(張錫英)이 망명을 제의했지만, "군주를 욕되게 했는데 신하된 자가 어찌 달아날까"라며 국내에 남아 죄인으로서 고행의 길을 걷겠다고 밝혔다.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이 선포되면서 조선의 국권은 일본에게 넘어갔다. 이 소식을 접한 곽종석은 여러 날을 통곡하며 음식을 들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한일병합 이후 자살을 택하는 유림들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밝혔다.
대개 옛날부터 자살하는 성현은 없었다. 오직 평소의 절도를 더욱 잘 지키고 옛날부터 하던 학문을 더욱 독실하게 하면서 밝은 하늘이 회복되기를 기다려야 한다. 이것이 오늘 할 수 있는 대의일 따름이다.

다만 망국의 비애를 견디기 어려워서 이듬해(1911년)에 이름을 도(鋾), 자를 연길(淵吉)로 고쳤다. '도'는 동진에서 송(육조)로 바뀌는 시기에 활동했던 도연명의 성에서 따왔고, '연길'은 도연명의 자인 연명의 앞글자와 송나라에서 원나라로 교체되는 시기에 활동했던 김이상의 자인 길보(吉父)의 앞글자에서 딴 것이다. 즉, 그는 도연명과 김이상처럼 망국의 한을 품으면서 초야에 묻혀 지내겠다는 뜻을 드러낸 것이다.

2.4. 파리 장서 사건과 사망

1919년 2월, 곽종석은 고종의 인산일에 망곡례를 행하고 조카와 제자들을 한양으로 보내 성밖에서 곡하게 했다. 이후 3.1 운동이 한창이던 그해 3월, 김창숙 등이 그에게 찾아와 파리 강화 회의에 전달할 독립 청원서를 작성하는 데 협조해줄 것을 요청했다. 당시 유림은 "머리를 깎고 군부를 배척하는 무도한 무리와 어울릴 수 없다."며 독립 운동에 전혀 참여하지 않고 있었는데[6], 곽종석은 이를 부끄럽게 여기고 독립 청원서 작성에 동참할 뜻을 밝혔다. 그는 자신과 함께 주문팔현(洲門八賢)’으로 불리던 이진상의 수제자 장석영에게 문안의 작성을 의뢰했고, 자신의 제자 김황에게도 문안 작성을 지시했다. 이때 그는 김황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이 일을 맡는 것은 국가 대의를 위해서일뿐만 아니라 우리 유림을 위해서다.

3월 15일, 김창숙이 거창에 거주하는 곽종석을 찾아갔다. 두 사람은 파리 장서 운동 추진을 논의하며 장석영과 김황이 작성한 초안을 놓고 고심하다가 장석영의 글은 너무 장황하다고 여겨 배제하고 김황이 작성한 초안을 저본으로 삼고 부적절한 내용을 빼고[7] 필요한 내용을 추가하여 문안을 완성했다. 이를 곽종석의 호 면우를 따 '면우본'이라고 한다.

그런데 한양으로 올라온 김창숙이 상하이로 떠날 채비를 마쳤을 때 호서 지방 유학자 17인이 지산 김복한을 수석 서명자로 하는 별개의 파리 장서(지산본)를 작성해 한양으로 보내면서 뜻하지 않게 파리 장서가 2통이 되었다. 이에 호서 유림의 대표자 임석후와 영남 유림의 대표자 김창숙을 비롯한 유림들은 2개의 문서를 어떻게 통합할 지를 놓고 논의했다. 장시간의 논의 끝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곽종석의 면우본을 체택하는 쪽으로 결정되었다.

그 후 김창숙은 상하이에 가서 파리로 문서를 발송하기 전에 한 번 더 수정했다. 면우본에서는 "한국 유림 대표 곽종석 등은 파리 평화회의의 각하 여러분에게 삼가 장서를 올립니다"라고 기재되어 있었지만, 김창숙이 파리로 보낸 장서, 즉 심산본에는 "한국 유림 대표 곽종석, 김복한 등 137인은 파리 평화회의 각하 여러분에게 삼가 장서를 올립니다."로 기재되었다. 또한 면우본에는 한국 병합 이후 독립을 희구해 온 주체는 ‘우리 임금과 우리나라'로 표현되었지만, 심산본에는 '우리나라 우리 인민'으로 바뀌었다.

이후 곽종석은 파리 장서 사건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되어 심문받은 뒤 4월 16일에 대구지방법원에 출두했다. 검사가 "선생은 이 일로 인해 조선이 독립될 것이라고 묻자, 그는 "내가 알 바가 아니네."라고 답변했다. 그러자 검사가 힐문했다.
이 일이 꼭 성공할 것이라는 것도 모르면서 고의로 이 일을 한 것은 어찌 나이든 사람이 망령되이 행동한 것이 아니겠소?

곽종석이 답했다.
나는 백성이 되어 백성의 의무를 다한 것인데 도리어 나를 망령되다고 하는가?

그 후 2년 형이 구형되자, 곽종석은 "어찌 바로 종신형이라 하지 않고 꼭 2년형이라고 말하는가? 내가 여기에 온 것은 본래 살아서 돌아가는 것을 기약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1919년 5월 20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결국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아 형이 확정되었다. 이때 감옥의 관리가 공소할 것을 권유하였는데, 그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나는 공소할 곳이 없다. 나는 애초에 국가를 위해서 이 일을 했는데 결국 국가의 흥기에 도움이 되지 않는구나. 구구하게 내 한 몸 때문에 원수에게 동정을 빌어야 하겠는가? 꼭 공소를 한다면 아마 하늘에 해야 할 걸세.

관리가 물었다.
만약 공소를 하지 않으면 법을 장차 강제로 집행해야 하는데 어쩌겠소?

곽종석이 답했다.
내가 여기 온 것도 이미 강제인데, 다시 강제로 집행하는 것을 두려워하겠는가? 비록 그러하나 강제로 할 수 있는 것은 내 몸일 뿐이고, 내 마음은 끝내 강제로 할 수 없다네.

하루는 일본 법관이 순시를 하면서 통상적으로 죄수들에게 종이를 주면서 소감을 쓰도록 했다. 차례가 곽종석에게 이르자, 그는 먼저 7언시구 한 수를 지어 썼다.
몇백년 동안 힘으로 복종시키고 서로 정벌하여,
어지러이 빼앗고도 잘못한 줄을 모르는구나.
평화라는 두 글자는 하늘로부터 온 소리인데,
이상하구나! 동쪽 이웃은 귀막고 웃기만 하니.

또한 그는 이 시 뒤에다 다음과 같은 글귀를 썼다.
한 가닥 남은 숨 머잖아 다할 것 같으니 무슨 특별한 느낌이 있겠는가? 다만 하늘의 도가 잘 돌아와서 평화가 완전하게 이루어져 우리나라가 완전히 독립하였다는 이름을 얻고 일본은 이웃나라와 사귀는 정절을 보전하기를 바란다. 그렇게만 된다면 이 몸이 비록 죽더라도 혼백이나마 통쾌함이 있을 것이다.

그 뒤 병이 위독해지자 그해 7월 19일 형집행정지 출옥하여 자택으로 돌아온 그는 1919년 8월 24일 별세했다. 향년 74세. 사후 단성에 이동서당(尼東書堂), 거창에 다천서당(茶川書堂), 곡성(谷城)에 산앙재(山仰齋)가 곽종석을 기념하여 세워졌다. 또한 1963년에는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3. 사상

3.1. 심즉리설

곽종석은 퇴계학파의 비주류계열 학자인 이진상의 문인이다. 이진상은 당시 영남 학계의 거두인 안동학파와 대비되는 심즉리설과 주리설을 주창하며 한주학파를 결성한 학자다. 그러나 그의 학설이 이황의 학설을 정확히 계승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생존 당시 뿐만 아니라 사후에도 퇴계학파로부터 적지 않은 비판을 받았다. 일례로 이진상이 죽은 뒤 곽종석이 '한주문집'을 간행하여 퇴계학의 본산인 도산서원으로 보낸 일이 있었는데, 도산서원에서는 내용을 심의한 결과 이진상의 학설이 이단이라고 단정하고 문집을 반송했다. 또한 1902년에는 한주문집에 반감을 품은 영남계 유학자가 한주문집을 불태우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곽종석을 비롯한 많은 제자들이 이진상을 옹호했고, 결국 도산서원은 이진상이 퇴계학파의 학설을 계승한 것으로 인정했다.

곽종석이 이진상으로부터 이어받은 '심즉리설'은 인간의 마음 그 자체에 담긴 의지가 바로 우주를 이끌어가는 이치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인간이 의지력(心)을 가지고 도덕 문화를 적극적으로 보호, 확대시켜 나가야 이치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심즉리설은 사실상 理(또는 性)가 현실 상황에서 능동적으로 움직일 수 없다고 본 주자의 시각과 배치되는 것이었지만, 이진상과 곽종석은 이황도 理에 능동성을 부여했다고 주장했으며, 자신들은 心의 입장에서 이러한 논리를 더욱 확장시켰다고 밝혔다.
심은 리이고, 성은 리가 고요히 머물러 있는 것이며, 정은 리가 움직이는 것이다. 심은 일관된 이치이고 성정은 거기에서 나온 갈래이다.
한주문집

이러한 곽종석의 심즉리설은 현실과도 연계되었다. 당시 간재 전우를 비롯한 대다수 유학자들은 조선이 일제에게 침탈당하자 일체 외부와의 접촉을 끊고 도덕 문화의 일맥을 보존하는데 전력했다. 곽종석 역시 을사조약 및 한일병합이 발표되자 태백산, 가야산 등에 은거하며 후진 양성에 진력했다. 그러나 그는 전우 등과는 달리 국내외 현안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보였고 여러 인사들과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조선의 위기 상황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강하게 보였다. 이는 자신의 마음에 담긴 의지를 발현시켜 조선의 암울한 현실로 인해 쇠락한 이치를 되살리려는 것이었다.

한편 곽종석은 심즉리를 주장하는 과정에서 이 학설이 양명학의 심즉리와 유사한 논리를 가지고 있다며 강한 의혹을 받았다. 이에 대해 곽종석은 자신들의 심즉리는 양명학의 심즉리와는 완전히 다르다며 선을 그었다. 하지만 그가 심즉리를 강조한 배경은 양명학의 그것과 유사하다. 양명학은 성리학이 보편성에 함몰되어 구체성과 실천성을 상실해가는 것에 반발하여 심즉리를 주장해 '지행합일' 정신을 통해 실천 논리를 재발굴하고자 했고, 곽종석 역시 심의 주재성과 이의 능동성을 부각시킴으로서 외세의 침탈로부터 조선의 유교 문명을 적극 수호하는 실천 논리를 이루고자 했다. 그는 성리학의 근간인 '성즉리'의 입장을 긍정하면서도 심즉리를 주장한 것은 '성즉리'의 이론이 현실 대응 논리로서 부적절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3.2. 의병과 순절을 부정하다

곽종석은 의병, 순절 투쟁의 정신 자체는 높이 평가했지만 의병 참여 요청을 모두 거절하고 순절 역시 받아들이지 않았다. 곽종석이 최초로 의병 참여를 요청받은 것은 1895년 12월이었다. 당시 을미사변 단발령 공포로 전국적으로 반일감정이 악화되어 의병 투쟁이 본격적으로 제기되고 있었다. 이때 안동에서 봉기한 안동의진은 12월 6일 마지막 긴급회의에서 대장으로 권세연, 부장으로 곽종석을 선출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곽종석은 권세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의병봉기의 의미는 이해하지만 시기적으로 패할 것이 분명한 데도 들어가서 패하는 것은 미처 패하기 전에 후퇴하는 것보다 못하다며 거절 의사를 밝혔다. 결국 부장 자리는 공석이 되었고, 안동 의병은 관군과 일본군의 연합 작전으로 인해 이듬해 1월에 진압되었고, 일부는 태백산으로 퇴각했다.

두번째 의병 제의는 1896년 김도화로부터 있었다. 안동의병은 태세를 재정비한 뒤 1896년 1월 13일 경상도의 예안, 의천 등지의 유생들과 합세해 안동부에 입성했다. 이때 권세연은 지난번 패배의 책임을 지고 의병장 직을 사퇴했고, 뒤이어 대장이 된 김도화는 곽종석에게 참여를 요청했다. 그러나 곽종석은 이번 요청 역시 거절했고, 같은 해 1월 거창에서 이진상의 제자들이 의병 봉기를 일으키면서 참여를 요청하는 것 역시 "도모할 만한 세력이 없다."며 거부했다. 이후 김도화의 안동 의병은 전국에 격문을 돌려 참여를 호소해 제천, 예안, 풍기, 순흥, 영주, 봉화의 의병들과 함께 예천에 모여 연합 의병을 결성한 뒤 2월 13일부터 16일까지 일본군과 교전했으나 화력의 열세와 연합 진영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지방으로 퇴각했다가 고종의 효유문을 받은 것을 기점으로 6월 초 자진 해산했다.

한편 곽종석은 1895년 겨울 영월에 진지를 마련한 유인석을 직접 방문해 의병 활동 준비 상황을 살펴봤다. 그는 유인석의 의병 진용이 명령 체계는 엄격하지만 의병들이 군사적인 조련 과정을 거치지 않은 일반 농민 출신이어서 효과적인 군사작전을 수행하기 힘들 것이라고 봤다. 그의 생각대로, 유인석의 의병은 1896년 2월 17일 충주성을 함락시키며 기세를 올렸으나 5월 25일 제천 전투에서 참패한 뒤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달아났다.

1906년, 곽종석은 호남에서 의병을 준비하던 최익현으로부터 의병 참여를 요청받았다. 그런데 그는 지난해에 제자 하겸진에게 보낸 편지에서 의병 투쟁이 명예를 염두에 둔 형식적이고 명분적인 투쟁의 성격을 지녔다고 밝히면서 그 대표적인 인물로 최익현을 거론한 바 있었다. 그는 최익현에게 연합 제의를 받자 극단적인 대응을 자제해줄 것을 요청하며 국제사회의 여론 환기를 통해 조선 문제의 해결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내용의 견해를 전달했다. 그러면서 의병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종석은 오늘에 있어 반드시 죽어야 함을 정해진 법이라고 여기지 않고, 또한 반드시 죽지 않아야 함을 편리한 계책이라고 여기지도 않습니다. 또한 감히 역량이 미치지 않는 것을 가지고 임금에게 화를 재촉하고 그로 인해 백성들에게 해독을 끼치게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오로지 시세와 지세를 따르고 의리의 적당 여부를 직시하여 무릇 자기의 직분을 잃지 않을 따름입니다.

그는 또다른 편지에서는 일본이 의병들에 대해 진압, 체포, 석방하는 과정을 통해 조선의 지도층인 유학자들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일본이 이렇게 의병 투쟁을 일면 방치하는 것은 러시아가 폴란드에 대해 난을 다스린다는 구실로 세계의 여론을 막아버렸던 것과 같이 일시에 전국적인 소요를 일으키게 한 다음 한꺼번에 도멸하려는 것이라고 봤다. 이후 최익현, 임종석 등의 호남의병은 6월 4일 태인에서 시작해 정읍, 순창에 무혈 입성했지만 관군, 일본군의 집중 공격을 받고 10여 일만에 무너졌다.

1912년, 안동 유생 김세동은 곽종석을 방문해 고종의 밀지를 제시하며 의병에 참여해줄 것을 요청했다. 밀지의 내용은 '국내의 전 인사와 일본에 건너가 영토를 복원시키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곽종석은 고종의 지시 내용이 사리에 맞지 않는다고 여기고 오히려 고종에게 소장을 올려 김세동의 의병 계획을 철회하도록 명령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자 영남 유학계 내부에서 비난 여론이 일었다. 유병현은 시세로 볼때 의병 운동이 승산이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신하된 자가 목전의 위기 상황에 대해 목숨 바쳐 대항할 생각은 않고 단지 두려워하고 삼가고 늙었다하여 사양하는 것이 옳은 일이냐며 곽종석의 소극적인 자세를 강하게 질책했다. 그러나 곽종석은 원수에게 영토를 구걸하는 일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의가 아니라고 반박했다.

이렇듯 곽종석은 의병 활동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견지하며 모든 의병 가담 요청을 거부했다. 이에 대해 많은 이들이 그를 '부패한 유생', '나약한 유생'이라고 지칭하며 맹비난을 퍼부었다. 하지만 곽종석이 의병 활동을 거부한 것은 의병이 국가 전체에 미치는 악영향이 크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는 의병이 국가에 미치는 악영향을 네가지로 정리했다.
1. 한때의 분함으로 성급히 움직일 경우 곧 귀중한 기회를 놓치고 적으로 하여금 나라를 빼앗을 명분을 제공한다.
2. 왕의 군대에 대항할 경우 역신이 된다.
3. 전문적 군사훈련을 받지 않은 농민 군대로는 효과적인 전투를 수행할 수 없다.
4. 의병이 가난한 백성을 대상으로 인력, 식량을 징발함으로써 기초적인 생존마저 위협한다.

사실 의병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은 그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당시 대표적인 개화자강론 계열 단체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대한자강회, 대한협회는 의병 투쟁 과정에서 노출된 폐해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들은 의라는 것은 시의에 맞아야 하는데 오합지졸의 의병 군대가 잘 훈련되고 우수한 무기를 가진 군대와 대적하면 패할 것은 필연적이라고 봤다. 특히 황성신문은 국권을 만회하는 길은 무가 아니라 문이라고 하면서, 지금은 국민 각자가 자기 죄과를 참회하고 그 우매함을 각성하여 개명의 길로 분발해서 나아가야 할 때라고 주장했다.

한편 곽종석은 순절 역시 부정적으로 봤다. 그는 한일병합이 이뤄진 후 순절을 택한 이들을 비판하며 밝은 하늘이 회복될 때까지 옛날부터 하던 학문을 더욱 닦고 평소의 절도를 잘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한 그의 인식은 죽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남긴 유언에서 짐작할 수 있다.
군자는 마땅히 만세를 위해 도모해야지, 한 때를 위한 계책을 위해서는 안 된다.

3.3. 개방적 위정척사파

고종과 대면했을 때 유학을 진흥시키고 수신할 것을 권한 데서 알 수 있듯이, 곽종석은 구한말의 암울한 현실을 해결할 방안은 유학에 있다고 믿은 위정척사파였다. 그러나 그는 다른 위정척사파들과는 달리 유학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젊은 인재들로 하여금 유학 뿐만 아니라 국내외의 실용적인 학문, 예를 들면 법률, 외교, 물리, 군사, 공업, 기술과 같은 다양한 학문을 익히게 함으로서 여러 가지 상황 변화에 대해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힘을 기르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점은 그가 1905년 제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알 수 있다.
네가 우리를 위해 도모할 것은 다만 오로지 눈앞의 실리에 힘을 기울이고 세상의 책들을 폭넓게 연구해야 한다. 예를 들어 공법, 법령, 헌정, 물리, 병제와 기타 농업, 공업, 기술 등과 같은 종류가 마땅한 것이니, 재목에 따라 그들을 교육시켜서 나중에 스스로 진흥시킬 것을 기약해야 한다. (중략) 세상의 군자들이 이런 말을 듣는다면 역시 장차 크게 소리지르며 종석의 무지함에 대해 성토를 가할 것이다. 그러나 겸진에게 대해서는 그렇겠는가? 내 어찌 감히 품은 바를 토해내지 않겠는가? 오로지 이런 후에야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이 보존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바로 인류가 없어지게 될 따름이다.

또한 곽종석은 국권 회복을 위해서는 시세를 잘 파악해야 한다고 봤고 국제사회와의 협력이 불가피하다고 여겼다. 그는 박규호, 김황, 곽윤 등 제자들을 한양에 자주 파견해 돌아가는 상황을 살펴오게 했고, 국내 언론 매체를 참고해 고종에게 올리는 상소에 활용하기도 했다. 또한 서재필, 이승만 등 해외 독립운동 인사들과 접촉하기도 했고, 1919년 파리 장서를 발송하기 위해 상하이로 가려는 김창숙에게 "자네는 해외 사정에 생소할 터이니 외국에 있는 선구자로서 이승만, 이상룡, 안창호 같은 사람들과 상의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1896년에 서양 공사관에 일본을 토벌해줄 것을 요청하는 공문을 보냈다가 "서양 오랑캐와 함께 한다"는 비판을 받자 자신의 뜻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존왕양이의 실재는 밝은 의리에 불과하오. 저들이 진실로 의리에 복종한다면 곧 우리들에 의해 이적이 물리쳐지고 우리에게 교화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중화문명을 받드는 것이 어찌 더욱 밝게 빛나고 오래도록 이어지지 않겠습니까? 무기와 수레를 움직여 오랑캐를 몰아내고 관문과 요새를 닫아 서양을 거부하는 것이 과연 오늘날에 있어서 가능한 것이기나 하겠습니까?

한편 곽종석은 만국공법에 대해 물질과 권세에 몰두하여 결국엔 천리를 기만하고 인간질서를 파괴하여 동물에 가깝게 할 학문이라며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그는 국제 사회가 국가 상호간에 신의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당위성에 대해선 깊이 공감하며 "만국공법에서 '사람의 본성은 인의를 근본으로 삼는다'고 했는데, 우리나라가 원래 인간의 본성을 근본으로 삼으니 어찌 남들이 비난한다 하여 인의를 행하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평하기도 했으며, 만국공법에 근거하여 조선의 위기 상황을 국제사회에서 해결하려 했다.

또한 곽종석은 '공화제'와 '민주제'는 인륜 질서를 어지럽히는 제도로 간주하면서도 "지금 서양이 비록 가르침이 밝지는 않지만 오히려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정치하고 백성을 가르치기를 계속해 이 기회를 발판으로 부강을 업으로 삼았다"며 서양 정치 발전의 기초가 '애민사상'에 있으며 이것이 결국 부국강병의 근원적 배경이 되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사물을 연구하고 지식을 넓히는 개념인 '격물치지'의 원칙에 입각해 이단적 학문 내지 서양 사상을 처음부터 배제의 대상으로 취급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탐구 대상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렇듯 곽종석은 위정척사 사상을 신봉하면서도 문명개화론 및 서양사상에 대해 개방적인 태도를 취했다는 점에서 다른 위정척사파와는 구별되는 독특한 면모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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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정척사파
衛正斥邪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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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1873 ~ 1897)
한주학파 노사학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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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서학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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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술국치 후 1911년 [2] 이 그림은 그의 고향 인근의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남사예담촌에 위치한 유림독립기념관에서 볼 수 있다. [3] 청백리공 안방(安邦)파-정랑공파(正郞公派) 25세 석(錫) 항렬. [4] # [5] 정문부의 8대손이다. [6] 당대 호남을 대표하는 유학자 간재(艮齋) 전우는 독립청원서에 서명해 줄 것을 요청받자 "이씨 종사를 복벽하여 대통령 제도를 허용하지 않을 것을 분명히하고, 공자교를 세워 기독교를 배제할 것을 분명히 하고, 단발 제도를 엄금할 것을 분명히 한다면 (중략) 서명 권유에 따랐다가 몸이 만갈래로 찢겨 죽는다 하더라도 웃음을 머금고서 땅에 묻힐 수 있을 것이다."라고 대답해 사실상 거부의 뜻을 밝혔다. [7] 김황이 작성한 초안에는 '고종 독살'에 관한 내용이 들어가 있었으나, 김창숙과 곽종석은어디까지나 사실에 기초해야만 외교 문서로서 적절하며, 그럼으로써 열강 대표들을 설득할 수 있다고 판단해 이를 삭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