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18 22:48:08

이윤재(국어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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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시의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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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운동계열 생몰년도 훈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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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에서 태어난 독립운동가들과
김해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들을 포함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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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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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정 당시 기관명은 문화부(1990~1993) → 문화체육부(1993~1998) → 문화관광부(1998~2005)였다.
이달의 문화인물(1998-2005) }}}}}}}}}
파일:20190309_152446.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한뫼, 환산(桓山), 식산(植山)
본관 광주 이씨 (廣州 李氏)
출생 1888년 12월 24일[1]
경상도 김해도호부 우부면 답곡리
(現 경상남도 김해시 대성동)
사망 1943년 12월 8일 (향년 54세)
함경남도 함흥부 함흥형무소
직업 파일:대한민국 임시정부 국장.svg 국어학자, 역사학자
학력 김해공립보통학교[2] ( 졸업)
대구 계성학교 ( 졸업)
베이징대학 ( 사학 / 학사)
가족 아버지 이용준, 어머니 경주 이씨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1묘역-499호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1. 개요2. 생애
2.1. 아동기2.2. 우리말과 역사에 관심을 가지다2.3. 독립운동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하다2.4. 조선어학회 사건과 순국
3. 묘소4. 여담5. 같이보기

[clearfix]

1. 개요

"우리가 지금 일본의 총칼 밑에 잠시 눌려 산다고 언제나 이럴 줄 알아서는 큰 잘못이다. 나는 나이도 들었고, 지금 형세로는 감옥에서나 죽게 생겼지만, 너희들은 대명천지 밝은 날에 내 나라 다시 찾고, 독립 국민으로 떳떳이 살날이 꼭 올 것이다. 너희들은 틀림없이 독립을 보리라. 그러자면 지금부터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 1929년 경신학교에서 -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국어학자, 역사학자.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우리글을 연구하는 한글학자로 또 민족적 역사의식을 고취하는 교육자이며 독립운동가로 활동하였다.

2. 생애

2.1. 아동기

1888년 12월 24일 경상도 김해도호부 우부면 답곡리(現 경상남도 김해시 대성동)의 양반가에서 아버지 이용준(李容俊)과 어머니 경주 이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6살 무렵 서당에서 한문 공부를 시작하였는데, 총명하고 재능이 뛰어나서 인근 고을까지 소문이 났다고 한다.

2.2. 우리말과 역사에 관심을 가지다

당시 외세의 침략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애국계몽운동이 일어나고 있어 이윤재 선생도 생각을 같이하여 늦은 나이에 김해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21세에 졸업하였다.

졸업 후 김해 합성학교(현 합성초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며 민족의식과 민족의 얼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대구 계성학교에서 고등과정을 배우면서 선생은 우리말과 글,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1913년 마산 창신학교, 마산의신여학교(현 마산의신여자중학교)에서 우리말과 국사를 가르쳤다. 이때 주시경 선생의 학문을 스스로 배우며 한글학자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2.3. 독립운동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하다

이후 평안북도 영변군 영변면 서부동(現 평안북도 영변군 영변읍)으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기독교 숭덕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그 뒤 1919년 영변군 지역의 3.1 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체포되었고, 이른 바 보안법 위반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공소했으나 공소가 기각되었고, 이어 상고했으나 1919년 7월 31일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위 혐의에 대해 상고가 기각되어 결국 평양형무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렀다.

1921년 출옥 후 중국으로 망명, 신채호 선생의 도움으로 베이징대학 사학과에 입학하여 3년간 역사를 배우고 1924년 귀국하였다.

귀국 후 정주 오산학교를 거쳐 상경했고, 경기도 경성부 팔판동(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팔판동) 83번지로 이주해 본적을 두었고, 이후 경성부 신당동(現 서울특별시 중구 신당동) 304-57번지, 경성부 창신정(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신동) 633-10번지 등지에서 거주했다. 그리고 협성학교· 경신학교·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배재학당· 중앙고등보통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재직할 때에 독립운동가 이관술과 친분이 깊었다.

1927년 계명구락부에서 국어사전 편찬을 위한 준비를 하였을 때, 조선어사전 편찬위원으로 참가하였고, 민족정신의 보전·계승을 위한 잡지 『한빛』을 편집, 발행하였다. 1929년 조선어연구회·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의 집행위원, 1930년 한글맞춤법통일안의 제정위원이 되어 국어통일운동의 중진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1931년부터 연희전문학교에서 강의를 맡았으며, 이때부터 4년간 매년 여름 지방을 순회하며 한글강습회를 열었다. 1932년에는 조선어학회의 기관지 『한글』의 편집 및 발행 책임을 맡았으며, 1934년에는 진단학회(震檀學會)의 창립에 참여하였다. 1935년 감리교신학교에서 강의를 맡았으며, 조선어 표준어사정위원회의 사정위원이 되었고, 1936년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의 편찬전임집필위원이 되었다.
파일:이윤재(1937년).png
1937년 8월 23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그러다 1937년 6월 7일 수양동우회 사건에 연루, 체포되어 1937년 8월 1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 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에 대해 유죄 판결을 받아 당일 투옥되었다. 이듬해인 1938년 7월 29일 보석으로 출옥했으나 8월 15일에 다시 기소되었고, 1939년 1월 1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 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에 대해 원래 결정이 취소되고 경성지방법원 합의부의 공판에 회부되었다. 1939년 12월 8일 경성지방법원 합의부에서 이른 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 선고받았으나 검사 측의 공소로 인해 1940년 8월 2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 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에 대해 공소 이유 있음으로 징역 2년형(원심 미결구류 일수 중 280일 본형에 산입),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검사 측에서 상고해 1941년 7월 21일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이른 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에 대해 원심 판결이 취소되고 경성지방법원 합의부의 공판에 회부되었으며, 본 건에 부쳐 사실을 심리한다는 판결이 나왔다. 그 뒤 1941년 11월 17일 고등법원에서 이른 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에 대해 상고 파훼 및 무죄 판결을 받아 곧 출옥했다.

출옥 후에는 대동출판사(大同出版社)에 입사하여 근무하였다.

2.4. 조선어학회 사건과 순국

1940년대 일제는 민족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어 사용을 금지하였다. 조선어학회에서는 우리말을 지키기 위해 《우리말 큰사전》편찬을 시도하였고, 일제 몰래 세상에 있는 우리말을 수집하고 있었다.

그러나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일제에 발각되어 최현배, 이희승 등과 함께 검거되었다. 선생은 함남 홍원경찰서에서 모진 고문과 살기 어려울 정도의 구타와 폭력을 당하였다.

결국 선생은 수감생활 중 1943년 12월 8일 새벽 5시 옥중에서 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3. 묘소

파일:20161113_111340.jpg
순국 후 선생의 아들 리원갑이 화장을 한 뒤 유골함에 담고 경기도 광주군 방이리에 있는 집으로 모셔온 뒤 선생이 생전에 개간하여 만든 과수원 근처의 야산에 봉분도 없이 가매장하였다.

해방 뒤 감옥에서 나온 조선어학회 간부들은 봉분도 없이 매장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윤재 선생을 제대로 안장하기 위해 힘썼다.

1946년 4월 6일 조선어학회 간사장 리극로의 사회로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 방이리 유족 주택 부근 산상에서 고 이윤재 선생 이장식이 성대히 거행되었다. 봉분 옆에 묘비도 세웠다.[3] 묘비의 3면에는 순 한글로 이윤재 선생의 업적이 기술되어 있다. 이장식 이후에야 이윤재 묘소는 제대로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셋째 사위의 사업 실패로 그만 이윤재 선생의 묘소와 집터를 남에게 매도하게 되었다. 6·25전쟁 때 대구에 거처를 정한 셋째 사위는 장인이 남긴 산과 집터를 매도하여, 거기서 남은 돈을 바탕으로 장인의 유골을 수습하였다.

1973년 봄에 셋째 사위는 장인의 묘소를 경상북도 달성군 다사면 이천리 산 48번지로 다시 이장하였다. 이후 묘소는 제대로 관리되지 않다가 2013년 9월 28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1묘역으로 이장하였다. 그러나 비석은 계속 남아 있었는데, 약 3년간 방치되어 있다가 2016년 외동 나비공원 기념조형물에 비석을 안치하게 되었다.

4. 여담

  • 장남 리원갑은 아버지를 고문살해한 안정묵 형사에 대한 복수심으로, 안정묵이 근무하던 광주경찰서를 습격했다. 이 사건으로 1947년 살인방화 혐의로 징역 12년을 선고받고 복역하였으나, 한국전쟁 중에 석방되어 북한으로 월북했다.[4][5] 그의 동생 리원주 역시 월북하였고, 6.25 전쟁 때는 인민군에 가담하여 국군과 싸웠으며, 김일성종합대학 로문과에서 학업을 마치고 번역작가가 되었다. 두 형제는 북한에서 아버지를 주인공으로 한 실화소설 『민족의 얼』을 출판하였다.
  • 김해도서관 광장에 이윤재 선생을 기리기 위한 흉상과 어록비가 1991년 세워졌다.
파일:20161113_111253.jpg
  • 외동의 나비공원에 2005년에 세운 기념 조형물과 2016년 옮긴 묘비 비석이 세워져 있다.
  • 사후인 1962년에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한글 보급 운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다.
파일:E2018_11_21_163841.jpg
  • 이윤재와 허웅을 기리는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의 김해한글박물관이 나비공원과 김해문화원 사이에 2021년 11월에 개관했다.

5. 같이보기

아직도 제자리 잡지 못한 어느 독립운동가의 묘지
광복 69년이 흘렀어도 홀대받는 김해의 독립운동가들
독립운동가·한글학자 '한뫼 이윤재' 선생 묘비 뜻 깊은 귀향
'이윤재ㆍ허웅 선생 기념관' 2020년 상반기 개관


[1] 1937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는 12월 27일생으로 등재돼 있다. [2] 現 김해동광초등학교 [3] 이 비석의 글은 한글학자 한결 김윤경(1894~1969) 선생이 지었다. 글씨는 한글 궁체의 대가이자 <매일신보>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여기자로 활동한 이각경(1897~미상) 선생이 썼다. 1946년에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순 한글 비문으로서의 가치도 지니고 있다. [4] 「김해시사 10권 인물」, 김해시사편찬위원회, 2022, p. 229 [5] 북한에서는 10월인민항쟁에 참가했다가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했다고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