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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 | 마문호(馬文鎬) |
출생 | 1867년 2월 16일 |
함경북도 길주군 동해면 불노리 | |
사망 | 1930년 5월 17일 (향년 63세) |
만주 지린성 둔화현 | |
서훈 |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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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1867년 2월 16일 함경북도 길주군 동해면 불노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가족과 함께 만주로 이주했으며, 1916년 만주 태랍자 장재촌에서 창동학교(彰東學校) 교장으로 부임해 민족교육을 실시해 애국지사를 양성하려 했다. 그리고 창동학교 및 명동학교(明東學校) 교직원 120명을 모아 항일투쟁결사대인 충열대(忠烈隊)를 조직, 1919년 3월 13일 용정에서 벌어진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했다.이후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를 조직, 부회장으로서 독립운동을 이끌었지만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자 잠시 노령 방면으로 피신했다. 그러다가 다시 명동촌 태랍자로 이동해 김정(金精), 김상진(金尙鎭), 정동학교 교사 백유창(白楡昌), 지송(池松) 등과 함께 국내진입 및 군자금 모집과 일본 밀정 주살을 위한 폭탄제조를 계획했다. 또한 대한독립기성총회를 조직해 부회장을 맡아 회장 구춘선 등과 함께 활동했다.
한편 명동학교를 중심으로 결사대를 주직해 국내로 잠입할 계획을 세우고 천보산(天寶山) 광업용 폭발물을 입수하는 등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했으며, 함경북도 무산군에 한창섭(韓昌燮)과 함께 잠입해 민심의 동향과 일본군의 방어 경계 상태를 점검했다. 또한 1920년 1월에는 명동학교 학생 및 졸업생을 중심으로 정행단(正行團)을 조직하여 항일 무장투쟁을 준비했으며, 김하석(金夏錫), 남세극, 정재면 등과 국민회지회 설치계획을 세웠다.
1920년 2월, 화룡현 지신사 장재촌에 국민회 남부지방총회를 조직하고 회장에 취임했으며, 3월에는 국자가의 간민회(墾民會) 분회장으로서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또한 동년 12월에는 총합부(總合部)를 설립해 구춘선을 총합부장으로 추대하고 사관학교를 설립해 독립군을 양성했으며, 노령에서 암살대 200명을 조직하여 국내 진입을 시도했다.
그러나 일제는 1921년 1월 화룡현 지사 왕명신(王銘紳)에게 압력을 가해 그가 더이상 활동하지 못하게 했으며, 일본군 토벌대를 파견하여 그의 집을 소각해 버렸다. 마진의 일가는 다행히 사전에 피신했지만, 이후로는 1923년 1월 적기단을 창설한 것 외엔 뚜렷한 활동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1930년 5월 17일 지린성 돈화현에서 아들 마천목(馬天穆)과 함께 일본군에게 붙들려 살해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마진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