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예천군 출신 독립운동가, 장윤덕
성명 | 장윤덕(張胤德) |
자 | 원숙(元淑) |
호 | 성암(惺菴) |
본관 | 단양 장씨 |
생몰 | 1872년 7월 6일 ~ 1907년 9월 16일 |
출생지 | 경상북도 예천군 예천읍 |
사망지 | 경상북도 상주군 함창면 구향리 |
매장지 | 경상북도 예천군 보문면 수계리 보문사 인근 선영 |
추서 | 건국훈장 독립장 |
장윤덕은 1872년 7월 6일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지낸 부친 장재안(張載安)과 모친 평해 황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를 지냈으며, 장윤덕은 일찍이 부친으로부터 한학을 배우고 보문사에 들어가 공부했으며, 20살에 예천군 수서기(首書記)를 지냈다. 그러나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의 국권이 일본에게 넘어가자 수서기를 그만두고 백성들에게 항일구국사상을 고취시키고 친일반역행위를 엄단하자는 내용의 경고문을 배포했다. 그후 1907년 4월에 이토 히로부미와 매국노들을 처단하고자 서울로 상경했지만 배신자의 밀고로 실패하고 체포되기 전에 고향으로 내려왔다.
이후 그는 1907년 6월 이강년이 영춘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자신도 7월에 격문을 각지에 발송해 300명의 의병을 규합한 뒤 이강년과 합세했다. 이후 두 사람은 의병대를 이끌고 풍기, 봉화, 문경, 용궁, 예천 등지에서 활동했으며, 7월 9일에는 일본 경찰대와 교전하여 일본군 보조원 3명과 한인 순검 2명을 사살했다. 9월 12일에는 예천읍을 습격했고, 이어 16일 300명의 의병을 이끌고 상주읍을 습격해 일본 경찰의 자위단(自衛團)과 교전했다. 그러던 중 대구수비대에서 전중(田中)대위가 1개 중대를 인솔하고 출동하여 격전이 벌어졌으나 중과부적으로 의병대는 무너지고 장윤덕은 총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장윤덕은 체포된 후 혹독한 고문을 받았지만 끝까지 의병대에 관한 정보를 발설하지 않았고, 결국 1907년 9월 16일 경상북도 상주군 함창면 구향리 뒷산에서 총살되었다. 그의 유해는 경상북도 예천군 보문면 수계리 보문사 인근 선영에 안장되었다. 장윤덕 의사 기념사업회는 1967년 9월 16일 장윤덕의 묘비를 세웠으며, 묘비 전면에는 '의병대장 성암 장윤덕 선생지묘'라고 적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장윤덕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2. 영주시 출신 독립운동가, 장윤덕
성명 | 장윤덕(張潤德) |
본관 | 인동 장씨 |
생몰 | 1898년 12월 16일 ~ 1975년 2월 10일 |
출생지 |
경상북도
영천군 호문면 화기동 (현 경상북도 영주시 장수면 화기리)[1] |
사망지 | 경상북도 영주군 |
추서 | 대통령표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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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덕은 1898년 12월 16일 경상북도 영천군 호문면 화기동(현 영주시 장수면 화기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4월 11일 손달익(孫達翼)의 권유를 받아들여 송득룡(宋得龍)·손용백(孫龍伯)·황학명(黃學明) 등과 함께 장수면 호문리 웅곡산에서 주민들을 모아 대한독립만세시위를 벌이려 했다가 순회 중인 헌병보조원에게 발견되어 체포되었다. 이후 1919년 4월 18일 구류되었고, 1919년 5월 12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영주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75년 2월 10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8년 장윤덕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