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손승억(孫承億) |
본관 | 평해 손씨 |
생몰 | 1893년 10월 21일 ~ 1934년 4월 16일 |
출생지 |
충청북도
중원군 신니면 인석리 (현재 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 화석리 방추마을) |
사망지 | 충청북도 중원군 |
매장지 |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추서 | 건국훈장 독립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손승억은 1893년 10월 21일 충청북도 중원군 신니면 인석리에서 부친 손석우(孫錫祐)와 모친 안산 김씨 사이에서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평해 손씨 39세손으로, 그의 가문은 한성판윤(漢城判尹), 병조판서(兵曹判書),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 경연(經筵) 참찬관(參贊官) 등을 배출한 명문 양반가였다. 그의 어린 시절에 관한 기록은 남아있는 게 거의 없어서 그가 어린 시절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그의 부친이 성균관 박사를 지냈다는 기록을 볼 때 그는 부친으로부터 한학을 교육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1919년 3월 19일 충북 괴산읍 장터에서 홍명희(洪命憙) 등의 주도로 독립만세시위가 벌어졌다. 이후 충북 각지역에서 독립만세시위가 잇달아 벌어지자, 손승억은 자신이 사는 신니면에서도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결심했다. 그는 단경옥, 이강렴(李康濂), 한태억(韓泰億), 이강렴(李康濂) 등 8명의 동지와 결의하여 비밀결사 독립단을 조직하고 동지의 규합과 만세운동을 펼치기 위하여 준비했다. 그들은 3월 31일 이희갑(李喜甲)의 집에 모여 4월 1일의 용원 장날을 이용하여 장터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군중들을 독려하여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결의했다. 이때 손승억은 필경과 등사를 담당했고, 동지들과 함께 태극기를 제작했다.
이윽고 4월 1일, 손승억은 500명의 군중이 모인 신니면 용원장터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군중의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시위를 지휘했다. 이에 경찰이 즉각 달려와 칼을 휘두르며 군중을 해산시키고 만세시위를 주도한 손승억, 단경옥, 이희갑 등을 체포했다. 경찰은 체포한 주도자들의 상투를 자르고 고문을 가하며 만세운동을 제지시키고자 하였으나, 손승억 등이 완강히 항거하자 충주 헌병대로 송치시켰다. 이후 5월 13일, 손승억은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8개월을 선고받고 공소했지만 8월 16일 고등법원에서 최종기가되어 청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청주형무소에서 만기 출옥하던 날, 손승억은 옥문을 나서며 대한독립만세를 크게 외쳤고 곧바로 재수감되었다. 이후 그는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간 추가로 옥고를 치른 뒤 몸을 크게 상한 채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는 옥고를 치르는 동안 안질, 위장병, 관절염 등의 병을 얻어 자택에서 몸져누웠다. 게다가 경찰과 헌병의 감시가 삼엄했으며, 그는 물론이고 가족도 일제의 요시찰 대상으로 간주되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받았다. 이에 견디지 못한 그는 1934년 4월 16일 새벽 독립만세를 외치고 목을 매어 자살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손승억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73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