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0-12-09 09:10:21

노병대

파일:노병대.jpg
성명 노병대(盧炳大)
상요(相堯)
금포(錦圃)
생몰 1856년 12월 4일 ~ 1913년 7월 10일
출생지 경상북도 상주시 화령면 관제리
본관 광주광역시 광산구
매장지 경상북도 상주시 화동면 이소리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의병을 일으키다2.3. 최후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의병장.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2. 생애

2.1. 초년기

노병대는 1856년 12월 4일 경북 상주군 화령면 관제리에서 아버지 노종구(盧宗九)와 어머니 의성 김씨(義城金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광산(光山)이며, 자는 상요(相堯), 호는 금포(錦圃)라 하였으며, 처음 이름을 병직(炳稷)으로 쓰다가 나중에 병대(炳大)로 고쳤다. 그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노수신(盧守愼)의 아우인 노극신(盧克愼)의 후손으로, 7살 때 글을 읽고 외웠으며 10살 때는 글을 직접 지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할 정도로 영특했다.

노병대는 1868년 13세에 당대 유림의 종장이었던 성재(性齋) 허전(許傳)의 눈에 들어 그의 문하에서 공부했고, 1880년 김원덕(金遠德)의 딸 의성김씨(義城金氏)와 혼인해 가정을 꾸렸다. 그리고 1889년에 창릉(昌陵)[1]을 관리하는 참봉 직을 맡았다. 그러던 1895년 10월 향교의 향사를 폐지한다는 소식을 듣고 분노한 그는 상경하여 진사 허운(許運) 등과 함께 반대상소를 올렸으나 국왕의 비답(批答)을 받지 못했다.

이후 1898년 정월 허운과 함께 중국 곡부(曲阜)에 가서 공자의 72세손 연성공(衍聖公)을 만나고 귀국하여 조종과 태학(太學)에 향교 향사의 회복을 시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한편 당시 각처 향교 부근에는 범장된 묘가 많았는데, 특히 호남지방에서 향교 부근에 묘를 쓴 곳이 열여덟 군데나 있었다. 그는 곧 사림(士林)에 통고하고, 관리를 책망하여 모두 파가도록 하였다.

2.2. 의병을 일으키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그는 서울로 올라가 전 판서 이용원(李容元)을 만나서 간청했다.
지금 국기(國基)가 기울어지고 있는데 밀조(密詔)라도 받을 수 있다면 내 스스로 거사를 하겠다.

이에 고종은 노병대에게 다음과 같은 밀조를 내렸다.
전 참봉 창의 신 노병대를 선조 계사년의 예에 따라서 분충정난 2등(奮忠靖亂二等)을 내리고, 특차 비서원 비서승(特差秘書院秘書丞)을 특별히 제수한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간 뒤 동지들과 함께 거사를 계획하고 영양의 김도현을 대장으로 추대해 거병하고자 했지만 여의치 않았고, 일시적으로 이강년 의병진에 좌종사로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07년 8월 20일, 노병대는 "종사를 보전하고 황제의 굴욕을 설치하며 국모의 원수를 갚을 목적"으로 속리산에서 거병했다. 그는 김운로(金雲老)를 맹주로 추대하고, 충북 보은·청주, 경북 성주, 경남 안의·거창, 전북 무주 등지에서 의병투쟁을 전개했다. 당시 그의 병력은 천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미원에서 병력을 둘로 나누어 우두령을 넘어 김천으로 접어들었을 때 매복했던 적이 공격해와 대다수 병력을 잃고 고작 50여 명만 챙겨 속리산으로 퇴각했다. 이후 그는 1908년 7월 13일 보은의 주점에서 일본군에게 체포되었다. 일본군의 노병대에 대한 심문이 있었는데, 그 당시의 문답은 다음과 같았다.
너는 어째서 의병을 일으켰느냐?
- 너희는 우리 원수다. 너의 종족을 다 없애려 한 것이다.
함께 일을 꾀한 사람이 몇 명인가?
- 내가 주모자이니, 다른 사람은 알 것 없다.
죽음이 두렵지 않느냐?
- 거사할 때 죽을 사(死) 자를 이마 위에 붙여 놓았다. 속히 죽여라.

노병대가 끝내 굴복하지 않자, 일본군은 그를 1908년 9월 13일 대전지점 공주지청으로 보냈다. 그는 그곳에서 심한 고문을 받았고, 급기야 왼쪽 눈 하나를 잃었다. 일본 형사가 노병대의 왼쪽 안구를 적출했다는 설과 노병대가 고문을 심하게 받은 후유증으로 한 쪽 눈이 멀었다는 설이 있는데 어느 쪽이 맞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후 그는 1908년 9월 18일 폭도내란죄로 기소되어 10년의 유배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죽기를 결심하고 단식을 시작했지만, 일본 형사들은 노병대가 혼수 상태에 빠지면 음식물을 강제로 투입해 깨어나게 한 뒤 다시 고문과 회유를 이어갔다. 또한 그의 자택인 이소리의 야로당(野老堂)이 일본군의 방화로 잿더미가 되었고 부인 의성 김씨는 집 앞 연못에 투신 자살했다.

2.3. 최후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이 발표되었다. 이에 일제는 전국에 사면령을 내렸는데, 노병대 역시 석방되었다. 노병대는 "네놈들의 경사일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난 옥에서 죽을 것이다."며 거부했지만 일본 형사들이 강제로 내쫓았다. 이후 그는 군자금과 군량미를 마련해 의병을 일으킬 준비를 하다가 1913년 4월 17일에 일본 형사에게 체포되었다. 대구지방법원은 1913년 5월 21일 노병대에게 징역 10년 형을 선고했다.

노병대는 공소를 제기했지만 동년 6월 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2년에 처해졌으며, 동년 7월 10일 고등법원에 상고했으나 기각되었다. 그 후 그는 옥중에서 단식으로 항거하다가 28일 만인 7월 10일에 피를 토하고 죽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에 노병대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1] 조선 제8대 왕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의 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