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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1년 1월 20일 |
황해도 신천군 | |
사망 | 1934년 3월 18일 |
중국 상하이 | |
본관 | 전주 최씨 |
서훈 |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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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 및 중국의 공산주의자. 한국의 항일운동가.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2.1. 초년기
최중호는 1891년 1월 20일 황해도 신천군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을 때 부친은 이미 사망했기에, 모친 황성애(黃聖愛)가 그를 홀로 길렀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고, 17살 때 유중현(柳重賢)과 결혼했다. 결혼 후 아들 둘을 뒀지만 모두 홍역으로 잃었고, 1914년에 낳은 셋째 최채(崔采)가 사실상 장남이 되었으며, 그 외에도 최윤신, 최윤경, 최윤애를 낳았다.최중호는 1906년 황해도 안악군에서 김구와 만나 그와 함께 신학문을 공부했고, 1907년 김구가 양산학교에서 소학부 교사를 역임하고 있을 때 그의 집에서 하숙을 하며 양산학교 중학부에서 공부했다. 양산학교는 1907년 김효영과 손자 홍량 등이 교육구국운동을 펼치기 위해 설립한 초등교육기관이었다. 이후 최중호는 평양에 있던 대성학교에서 공부했다. 백범일지에 따르면, 최중호는 김구로부터 총애를 받은 학생 중 한 사람이었고, 최중호 또한 누구보다도 김구를 따르고 존경했다고 한다. 김구는 직접 상투를 자른 뒤 가위를 들고 최중호의 상투를 잘라주기도 했다.
1911년 2월, 최중호는 105인 사건에 휘말렸다. 한달 전에 먼저 체포된 김구가 자신을 존경하는 후배의 이름을 대라는 말에 자기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말하고 만 것이다. 김구는 이에 대해 백범일지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그놈들이 또한 정신을 잃도록 가혹하게 고문하였다. “학생 중에는 누가 너를 가장 사랑하더냐?”라는 말에 졸지에 내 집에 와서 공부를 하던 최중호를 말하고선 혀를 끊고 싶었다. ‘젊은 것이 또 잡혀 오겠다.’고 생각하였으나 눈을 들어 창밖을 보니 벌써 언제 잡혀왔는지 반이나 죽은 것을 끌고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최중호는 일제 경찰에게 체포된 뒤 서대문 형무소에서 미결수로 9개월간 옥고를 치른 뒤 유배형을 선고받고 진도에 유배되었다. 1914년 유배에서 풀려난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경신학교 교사로 부임해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군자금 모금을 목적으로 일본 관청을 습격했다는 혐의를 뒤집어쓰고 또다시 체포되어 해주지방법원에서 15년 징역을 선고받았고, 이에 불복해 항소했지만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13년을 선고받았다. 최중호는 평양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17년 탈옥했다.
2.2. 항일운동
최중호는 탈옥 후 신의주를 거쳐 만주 안동, 하얼빈 등지를 전전하며 활동하다가 1919년 3.1 운동 이후 상하이로 망명했다. 그는 이름을 황훈(黃勳, 黃塤)이라고 개명하고 상하이 프랑스 조계 영경방 10호에서 김구 가족과 함께 거주했다. 김구 일가는 2층에 살았고, 그의 일가는 1층에 살았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해 내무부 경무국에서 활동하며 상하이에 침투한 일제 밀정을 색출하여 처단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하지만 그는 1920년 2월 24일 그 자리를 사임하고 육군무관학교에서 공부에 전념했다.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한 최중호는 1920년 5월 8일 상해 대한거류민단에서 거행된 제1회 졸업생에서 4명의 최우등생 가운데 한 사람이자 6개월 동안 하루도 결석이 없는 정근생으로서 상을 수여받았다. 이후 그는 1921년 7월경 광동으로 가서 모종의 임무를 수행한 뒤 돌아왔고, 1921년 10월 경 상하이에서 박태하, 황일청, 김성근 등과 함께 일제 기관 등에 대한 폭탄 투척을 계획했다. 또한 한자신문 <사민보(四民報)> 발간에 적극 참여해 박시창, 박경신, 박태하, 김문세, 이영운 등과 함께 신문의 편집, 발행을 맡았다.
1924년 3월 8일, 최중호는 상해 대한교민단 제11회 정기의사회에서 교민단 의사원에 선출되었다. 교민단의 기본 업무는 교민의 생활을 보호하고, 임시정부 기반조직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었고, 그 외에 중국인이나 기타 외국인과의 사이에서 발생하는 시비와 분규를 해결하는 임무도 병행했다. 그는 이듬해인 1925년 10월 안공근, 김두봉, 최석순 등과 함께 교민단 의사원에 선출되었다. 또한 그는 1924년 교민단에서 경영하는 인성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인재 양성에 주력했다. 그의 자녀들도 인성학교에 재학했다. 최채는 7기생으로서 1927년에 졸업했고, 장녀 최윤신은 10기생으로서 1930년에 졸업했다.
1926년 10월, 최중호는 인성학교 학감(學監)에 취임했다. 그는 재정난에 시달리는 인성학교의 운영을 정상화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교민단이나 유지회, 찬조회 등을 조직해 인성학교의 재정을 지원하고자 했지만, 재정난은 좀처럼 개선되지 않았다. 게다가 1932년 4월 훙커우 공원 의거 이후 임시정부가 일제의 추적을 피해 난징으로 피신하자, 상하이 일본총영사관은 인성학교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1935년 10월, 일본영사관은 인성학교에게 일본어 교육을 실시하라는 압력을 넣었다. 결국 인성학교는 1935년 11월 11일 일제의 요구를 거부한 선우혁 교장이 폐교를 결정하면서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장남 최채의 회고에 따르면, 최중호는 임시정부에서 일했지만 월급을 받지 못해 조선일보 상해지국장이라는 명목으로 신문을 팔아 생계를 이어갔지만, 신문을 사 보는 사람이 적어 수입이 미미했다. 그래서 그의 부인 유중현이 한인 상점에서 바느질하고 녹두전이나 떡도 팔아 겨우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또한 최채는 신문배달을 하고 사과도 팔아 가계를 보탰고, 장녀 최윤신도 13세부터 삯바느질을 했다. 이무렵 병에 걸린 그는 약을 먹으며 근근히 버텼다.
최중호는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도 임시정부를 위해 노력했다. 1926년 7월 8일 안창호 등이 임시정부 경제후원회를 조직했을 때, 그는 여기에 참여해 임시정부의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1928년 만주의 한인동포들이 황고둔 사건 이후 중국인들에게 박해당하자 그들을 돕기 위해 의연금을 내기도 했다. 한편, 그는 1926년 7월 16일 혁명청년사에 가입하여 김규식, 송병조, 이유필, 정인교, 강경선, 최석순, 곽헌 등과 함께 프랑스 한인교회 삼일당에서 6.10 만세 운동에 대한 연설회를 개최했다.
최중호는 본래 민족주의자였지만, 이 무렵 공산주의에 경도되었다. 1927년 중국 관내지역 유일당 촉성운동에 적극 참여해 상해 조선공산당 책임자인 홍남표, 여운형 등과 함께 한국유일당 상해촉성회를 조직하여 상해촉성회 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유일당 촉성운동은 민족진영 내 좌우세력의 인식 차이와 당시 중국의 국공분열의 영향을 받아 해체되고 말았다. 1929년 상해촉성회가 해산되고 좌파세력에 의해 재상해 한국독립운동자동맹이 조직되었다.
최중호는 동맹의 위원 겸 조직부장으로 임명되었고, 1931년 11월 동맹이 상해한인청년동맹과 연합하여 상해한인반제동맹으로 구축될 때까지 동맹 조직부장으로서 김원식, 고가헌, 정태희 등과 함께 항일투쟁을 지속했다. 또한 국내에서 고려공산당이 해체되자 일국일당의 원칙에 따라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상하이의 한인 공산주의자들로 조직된 중국공산당 강소성위원회 법남구(法南區) 한인지부의 책임자로 발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