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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03년 10월 10일 |
평안북도
곽산군 북면 군산동 (現 평안북도 곽산군 군산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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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미상 |
본관 | 신천 강씨[1] |
부모 | 아버지 강우문, 어머니 김약로 |
형제자매 | 3남 2녀 중 3남 |
서훈 |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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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1903년 10월 10일 평안북도 곽산군 북면 군산동(현 곽산군 군산리)에서 아버지 강우문(康遇文)과 어머니 공주 김씨(公州 金氏) 김약로(金若爐) 사이의 3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그는 1924년 9월 26일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대원 김기보의 소개를 받고 10월 6일에 이진무를 옥천면에서 만나 대한통의부의 대원이 되었다. 이후 1924년 10월 25일 오후 8시에 이진무 등과 함께 평북 선천군 동면 일봉동에 소재한 금광제련소(金鑛製鍊所)를 공격하여 일본인 관리인이 소지한 총기를 습득했다. 그리고 숙직실에 있던 허경윤(許京潤)과 동리에 거주하는 김세권(金世權), 최중식(崔重植), 박희정(朴熙禎), 김치로(金致魯) 등으로부터 군자금을 받아냈다.
1924년 12월 1일 이진무와 함께 노원근(盧元根)의 집에서 회의를 열고 선천경찰서 삼봉주재소를 공격하여 무기를 획득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12월 17일 다시 노원근과 협의를 한 후 주재소 안에 있는 순사의 숫자와 무기 둔 곳 등을 탐지했다. 다음날 주재소로 향하던 중 선천군 신부면 청강동에 거주하는 삼봉주재소 장 순사의 사택을 습격해 기총(騎銃) 1정, 실포(實包) 15발이 들어 있는 탄약합(彈藥盒) 1개 등을 확보했다. 19일 오전 0시 20분경 삼봉주재소에 도착한 그는 순사 산본(山本)을 총살하고 총기를 획득했다. 이들은 1925년 1월 초순경까지 노원근, 김문학(金文學), 방원국(方元國) 등의 집에서 유숙하며 각처에서 군자금을 모집했다.
그 후 도쿄로 피신했지만 은신처가 발각되었고 1925년 5월 3일 권총을 발사하며 저항했지만 끝내 체포되었다. 1925년 11월 18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제령 제7호 위반, 살인미수, 주거침입, 강도, 강도방조, 강도상인방조, 방화, 범인장익 등의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자, 강익록은 재판장을 향해 다음과 같이 외쳤다.
"무기가 아니라 사형도 좋다!"
이후 그는 공소를 제기했지만 1926년 2월 20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는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사망일자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5년 강익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1]
정주파 38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