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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47a0><colcolor=#ffffff> 출생 | 1898년 5월 17일 |
경상북도
고령군 읍내면 봉두동 (現 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 연조리) |
|
사망 | 1980년 1월 23일 (향년 81세) |
경상북도 고령군 | |
본관 | 고령 신씨[1] |
이명 | 신우룡(申愚龍), 신룡(申龍), 신우동(申愚童) |
호 | 해영(海影) |
학력 | 신흥무관학교 (졸업)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296호 |
상훈 |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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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2. 생애
1898년 5월 17일 경상북도 고령군 읍내면 봉두동(현 대가야읍 연조리)에서 아버지 신진구(申鎭求, 1853. 10. 2 ~ 1944. 9. 15)와 어머니 달성 서씨 서선분(徐先分, 1857. 3. 13 ~ 1943. 4. 3)[2] 사이의 3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간도로 망명하여 1919년 9월 간도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1919년 11월 9일 만주 지린성 파호문 밖에서 의열단 결성에 참여했다. 의열단은 결성 후 첫 타겟으로 밀양경찰서를 정했다. 1920년 초, 신철휴는 곽재기 등과 함께 만주에서 폭탄 등 무기를 입수한 뒤 국내로 잠입했다.그러나 밀양경찰서 폭파를 준비 중이던 1920년 6월 구영필(具寧必)의 밀고로 사전에 붙잡혀 1921년 6월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7년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그는 감옥에서 가혹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의열단에 대해 발설하지 않았고, 고문의 후유증으로 인해 계절이 바뀔 때마다 늘 손끝, 입끝, 발끝에 핏방울이 맺혔고 평생 통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1925년 7월 병고로 인해 가출옥한 그는 1927년 의열단원 이종암의 '경북의열단사건'에 연루되었고, 1928년에는 '청주일심단(淸州一心團) 사건'에 연루되어 조사를 받았지만 불기소처분되었다. 이후 1928년 10월 신간회 고령지부장을 역임하기도 했지만, 형사들에게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고 이웃 마저도 외면하는 가운데 가난에 찌들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8.15 광복 후에도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없다며 외부 지원을 극구 사양했다고 한다.
1970년 음력 5월경, 서울 을지로 흥사단 건물 강당에서 40년 전 사망한 의열단원 이종암의 추도식이 열렸다. 참석자는 겨우 8명에 불과했는데, 이 중엔 의열단원 창립단원 신철휴와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을 지낸 채충식이 있었다. 신철휴는 이 자리에서 이종암을 위한 추도문을 바쳤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종암 공을 추모함
거사할 당초 생사를 같이하기로 했거늘(當初擧事死生同)
오늘 이 애통한 마음 뉘와 더불어 나누리.(是日哀情孰與通)
위험한 일로 여겨 비록 의를 저버리긴 했으나(已識險危雖負義)[3]
성공하여 의당 공을 논하리라 기대했다오.(惟期成就宜論功)
일생을 울분으로 보내며 심사 항상 격했으니(一生鬱憤心常激)
20년을 갇혀 살아 한이 끝이 없었으리.(廿載囹圄恨未窮)
와병으로 추모의 자리에 참석하지 못하나(臥病不叅追慕席)
자꾸만 흐르는 피눈물이 붉게 몸을 적시네.(數行血淚使人紅)
이승의 동지 신철휴 삼가 씀
거사할 당초 생사를 같이하기로 했거늘(當初擧事死生同)
오늘 이 애통한 마음 뉘와 더불어 나누리.(是日哀情孰與通)
위험한 일로 여겨 비록 의를 저버리긴 했으나(已識險危雖負義)[3]
성공하여 의당 공을 논하리라 기대했다오.(惟期成就宜論功)
일생을 울분으로 보내며 심사 항상 격했으니(一生鬱憤心常激)
20년을 갇혀 살아 한이 끝이 없었으리.(廿載囹圄恨未窮)
와병으로 추모의 자리에 참석하지 못하나(臥病不叅追慕席)
자꾸만 흐르는 피눈물이 붉게 몸을 적시네.(數行血淚使人紅)
이승의 동지 신철휴 삼가 씀
신철휴는 1980년 1월 23일 고령군에서 병사했다. 그의 유해는 2006년 9월 14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이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신철휴에게 건국포장을 수여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