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2 21:26:14

유시태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a11, #a11 20%, #a11 80%, #a11); color: #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단장
김원봉
고문
김대지 황상규
단원
강세우 강인수 고인덕 곽재기
권정필 권준 김광추 김기득
김방우 김병현 김상옥 김상윤
김성숙 김시현 김익상 김지섭
김철호 나석주 남정각 박문희
박자혜 박재혁 박차정 박희광
배동선 배중세 배치문 서상락
송천흠 신악 신영삼 신채호
신철휴 오성륜변절 유자명 윤세주
윤치형 이구연 이병철 이병희
이성우 이수택 이육사 이종암
이태준 정이소 최수봉 황옥불확실
최용덕 한봉근 한봉인 홍가륵
유시태 이원대 이원기 윤병구
유석현 정율성불확실 문시환 이춘암
공약 10조
① 천하의 정의의 사(事)를 맹렬히 실행하기로 함.
②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신명을 희생하기로 함.
③ 충의의 기백과 희생의 정신이 확고한 자라 함.
④ 단의(團義)에 선(先)히 하고 단원의 의(義)에 급히 함.
⑤ 의백(義伯) 1인을 선출하여 단체를 대표함.
⑥ 하시(何時) 하지(何地)에서나 매월 1차씩 사정을 보고함.
⑦ 하시 하지에서나 매 초회(招會)에 필응함.
⑧ 피사(被死)치 아니하여 단의에 진(盡)함.
⑨ 1이 9를 위하여 9가 1을 위하여 헌신함.
⑩ 단의에 배반한 자는 처살(處殺)함이다.
5파괴
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매일신보사
④ 각 경찰서
⑤ 기타 왜적 중요기관
7가살
조선총독 이하 고관
② 군부 수뇌
대만총독
④ 매국노
⑤ 친일파 거두
적탐(밀정)
⑦ 반민족적 토호열신(土豪劣紳)
조선혁명선언 황옥 경부 폭탄사건 }}}}}}}}}
유시태
柳時泰 | Yoo Si-tae
파일:유시태.jpg
<colbgcolor=#eaeaea,#191919> 이명 유시창(柳時昌), 이상준(李相俊)[1]
유시영(柳時迎)
치등(致登)
후암(后菴)
본관 풍산 유씨(豊山 柳氏)[2]
출생 1890년[3]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풍산현 하회리
(현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하회마을)
사망 1965년 2월 17일[4] (향년 74~75세)
경상북도 군위군 군위면 외량동
(현 대구광역시 군위군 군위읍 외량리)
묘소 대구광역시 군위군 군위읍 외량리

1. 개요2. 생애3. 논란 및 사건사고4. 사후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 의열단 출신 독립운동가. 이승만 대통령을 저격하려고 시도했던 사람이다.

2. 생애

1890년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풍산현 하회리(현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하회마을)에서 아버지 유철우(柳哲佑, 1870 ~ 1939.7.5)[5]와 어머니 의령 남씨(1867 ~ 1919.4.23)[6] 사이에서 7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류성룡의 형 류운룡의 13대손이다.[7]

1919년 3.1 운동 당시 충청남도 당진군[8]· 예산군 등지에서 선전부원으로 활약하면서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종사하기 시작하였다. 1921년, 의열단에 입단하여 군자금을 모집하는 일을 맡았다.

1923년 2월에는 권정필· 남정각· 유병하 등과 함께 의병투쟁에 필요한 자금을 모으기 위해 경기도 경성부 내자동[9]에 살던 부호 이인희(李麟熙)를 찾아가 5,000엔을 요구하며 3차례에 걸쳐 독립자금 출연을 강요하였으나, 같은 해 3월 3일 잠복 중이던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 일로 1923년 6월 1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폭발물 취체벌칙 위반, 총포화약류 취체령 위반, 강도 혐의로 경성지방법원 공판에 회부되었고[10], 1923년 8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다이쇼 8년 제령 제7호 위반 및 강도 혐의로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아[11]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뒤 1928년 가출옥하였다.

이후 경상북도 상주군 상주면 서정리[12] 박순서(朴順西)가 경영하는 여인숙에서 경기도 경성부 출신의 김우일(金祐逸)과 함께 투숙해 있던 중 1929년 5월 5일 상주경찰서에 검거되었고[13], 이어 일제를 비방하고 모욕한 죄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아 다시 옥고를 치렀다.

1952년 이승만 정부의 독재에 불만을 품고 6.25 전쟁 기념식장에서 김시현 이승만 당시 대통령을 저격하였으나 권총의 불발로 실패,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1953년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그 뒤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후 1960년 4.19 혁명 직후 석방되었다.

1965년 2월 17일에 경상북도 군위군 군위면 외량동[14] 자택에서 75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3. 논란 및 사건사고

이승만 대통령이 6.25 2주기 연설 중 총으로 암살하려고 했지만 불발돼서 체포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이승만 대통령 암살 미수 사건 문서 참고.

4. 사후

그의 무덤은 대구광역시 군위군 군위읍 외량리 산10번지에 있다. #


[1] # [2] 겸암(謙菴)-낭천공파(狼川公派) 26세 시(時) 수(壽) 재(在) 항렬. [3] 풍산유씨세보 권2 634쪽에는 1891년생으로 등재되어 있다. [4] 음력 1월 16일 [5] 자는 범초(範初). [6] 남경희(南敬熙)의 딸이다. [7] # [8] 당진시 [9] 서울특별시 종로구 내자동 [10] 1923년 6월 12일 경성지방법원 판결문 [11] 1923년 8월 21일 경성지방법원 판결문 [12] 상주시 서성동 [13] 1929년 5월 12일 동아일보 기사 [14] 대구광역시 군위군 군위읍 외량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