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47a0> 출생 | 1896년 1월 12일 |
황해도 봉산군 문정면 중탑동 | |
사망 | 1983년 10월 27일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동 |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
이명 | 강복원(姜復元), 강승원(姜承園), 강양원(姜陽園) |
상훈 |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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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2. 생애
강명규는 1896년 1월 12일 황해도 봉산군 문정면 중탑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경성사립오성학교(京城私立五星學校)를 졸업하고 보성전문학교 상과에 재학하다가 3.1 운동 후 국내에서 무력 항쟁을 벌이기 위해 동지를 모으다가 일제 경찰에게 발각되자 상하이로 망명했다. 1921년 임시의정원 황해도 의원으로 선임되었으며, 1922년 2월에는 상인위원회 제4과 위원으로 선임되었지만 곧 사직했다.이후 나석주, 이성(李成), 송호(宋虎), 김기덕(金基德) 등과 함께 중국 한단육군군관강습소(邯鄲陸軍軍官講習所)에 입소하여 군사학을 수학했으며, 1923년에는 바오딩육군공병단훈련소(保定陸軍工兵團訓鍊所)에 입소하여 공병군사학을 전공했다. 병단훈련소를 졸업한 후에는 보정 비행장에 있는 육군공병단 철도대에서 훈련을 받았다.
1924년 만주로 향한 강명규는 통의부 군사부 의용군사과장 겸 지도부장에 임명되어 봉천성 흥경현 왕청문 이도구에서 통의부 산하 독립군을 훈련시키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러던 중 일본군이 통의부 지휘부가 있는 흥경현 북전자를 기습하자, 그는 이에 맞서 싸우다가 부상을 입었다. 이후 통의부가 조직 내 이념갈등으로 분열되자, 그는 1925년경 정의부로 옮겨 중앙심판원 겸 생계부 이재과장(理財課長)을 역임했다.
1927년엔 백산학교 교원에 선임되었고, 1928년엔 동광학교 교원을 맡았으며, 1929년 신민부 중앙위원을 역임했고, 1930년 대한농민당 중앙위원, 1931년 대한독립군 참모장, 1932년 신한농민당 위원을 맡았다. 1933년 대한혁명당 위원을 역임한 강명규는 그해 5월 신근원(辛槿園), 권호범(權豪範), 김일(金一), 윤덕산(尹德山) 등과 함께 240여명의 독립군을 조직하고 중국구국군 총사령 이두(李杜)의 지휘하에 횡도하자, 석도하자, 해랑강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압도적인 군사력을 당해내지 못하게 되자, 그는 중국 관내로 피신했고 193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합류하여 구국동지회 회장을 역임했다. 이후 임시정부와 함께 충칭으로 옮긴 그는 1945년 광한단(光韓團) 부단장을 역임했다. 8.15 광복 후에는 귀국하여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에 자리를 잡았고, 한국독립당 중앙감찰위원, 반민특위 조사관을 역임했으며, 6.25 전쟁 때는 육군 대위에 복무했다. 이후 연희동 자택에서 말년을 보내던 그는 1983년 10월 27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강명규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그가 사망한 지 이틀 후인 1983년 10월 17일에 서울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