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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계백

파일:송계백.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여산 송씨
출생 1896년
평양부 영유군 중부면 괴현동[1]
(현 평안남도 평원군 평원읍 괴천리)
사망 1922년 1월 12일
평안남도 평원군 영유면 자택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무후선열 위패-46호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2.8 독립 선언2.3. 최후2.4.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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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초년기

송계백은 1896년 평양부 영유군 중부면 괴현동(현 평안남도 평원군 평원읍)에서 태어났다.

그는 상경하여 1911년 보성중학교에 입학했고, 최린, 현상운, 최승만 등과 교제하며 민족의식을 키웠다. 보성중학교 졸업 후에는 경성기독교청년회학관 영어과에 편입하여 수학했고, 1916년 3월 경성기독교청년회학관을 수료한 후에는 일본 유학을 떠나 도쿄 와세다대학 정치과에 입학했다.

그가 일본에 유학갔을 무렵, 한국 유학생들은 조선유학생학우회, 동경 조선기독교청년회, 조선학회, 그리고 경도(京都) 조선유학생친목회 등의 조직을 만들어 상호간의 친목을 도모하고 권익을 신장하며 민족운동의 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 조선유학생학우회가 전체 유학생들을 통할하는 중추적인 조직이었다. 송계백은 조선유학생학우회에 가입해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유학생들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데 기여했다.

2.2. 2.8 독립 선언

1918년 1월 8일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 제1차 세계 대전의 전후처리 지침으로 민족자결주의를 천명하자, 도쿄의 한국 유학생들은 이 기회를 이용해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했다. 1918년 여름 조선유학생학우회의 간행물 <학지광>의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던 최팔용(崔八鎔)은 "윌슨이 민족자결론을 내세운 지금 우리가 조국 광복을 부르짖기에 가장 좋은 기회이니 우리도 이 기회에 일어나자"고 제의하고, 비밀리에 유학생들의 의사를 타진하면서 동지들을 규합했다.

같은 해 11월 11일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고 이듬해 1월에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 후 영국인이 고베에서 발행하는 신문 <재팬 애드버타이저(The Japan Advertiser)>에서 "세계약소민족동맹회에서 윌슨 대통령에게 약소민족의 독자적 권리를 인정해줄 것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제출했다"는 소식을 보도하자, 최팔용 등은 12월 30일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서둘러 독립 선언을 발표하기로 결의했다.

송계백은 이 계획에 적극 동참하여 최팔용, 백관수, 김도연, 윤창석, 이종근, 최근우, 김상덕, 전영택 등과 함께 10인 실행위원의 한 사람으로 선임되었다. 실행위원들은 독립운동 방략으로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여 그 이름으로 독립선언서와 결의문 및 민족대회소집청원서를 작성 발표하고, 이를 일본 각계와 각국 공사관에 발송할 것을 결정하는 등 구체적 실천 계획을 추진했다. 그들은 밀사를 각지에 파견하기로 하고 국내에는 송계백을, 상하이엔 이광수를 파견하기로 했다.

송계백은 1919년 1월 중순 국내로 잠입하여 현상윤을 찾아가 2.8독립선언서의 초안을 보여주며 도쿄 유학생들의 거사 계획을 알렸다. 현상윤은 이것을 가지고 가서 중앙학교 교장 송진우 최남선에게 보였고, 다시 최린을 찾아가 보여주고 그를 통해 손병희에게도 전달했다. 손병희는 이것을 보고 "젊은 학생들이 저렇게 운동을 한다고 하니 우리 선배들로서도 좌시할 수 없다”고 하면서 지금까지의 독립운동 추진 계획을 가속화하고, 나아가 다른 종교계와 접촉하여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모색하도록 했다. 아울러 독립운동의 구체적인 방법과 진행을 권동진, 오세창, 최린 등에게 일임했다. 이렇게 해서 3.1 운동 계획이 긴급하게 추진되기 시작했다.

1월 30일 도쿄로 돌아간 송계백은 나머지 실행위원들과 함께 2.8 독립선언을 준비했다.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은 국문, 일문, 영문 등 3개 국어로 백관수의 지도 아래 최원순, 정광호 등 10여 명의 학생들이 등사판으로 만들었고, 민족대회소집청원서는 일문 활자로 1000매 인쇄했다.

이윽고 1919년 2월 8일 오전 10시, 송계백을 비롯한 조선청년독립단 대표들은 독립선언서와 결의문 민족대회소집청원서를 각국 대사관 및 공사관, 일본 국회, 조선총독부, 도쿄 및 각 지역의 신문사와 잡지사, 학자들에게 우편으로 발송했다. 그리고 오후 2시부터 조선기독교 청년회관에서 400여 명의 유학생들이 참가한 가운데 유학생 대회를 개최하고 독립선언식을 거행했다. 이때 일본 경찰이 대회의 해산을 요구하면서 송계백을 비롯한 학생 대표들을 체포했다.

2.3. 최후

국가보훈처 자료에 따르면, 송계백은 1919년 6월 26일 도쿄지방재판소에서 금고 7개월 15일형을 선고받은 뒤 옥고를 치르다가 1920년 초 도쿄 감옥에서 2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고 한다. 하지만 한반도통일역사문화연구소의 최태육 사무국장에 따르면, 송계백은 1920년 출옥 후에도 몇 년 동안 살아있었다고 한다. 1921년 3월 29일 <동아일보> 기사에는 "평원군 교회당에서 송계백씨가 대연설을 했다."는 내용이 있으며, 1922년 1월 15일 동아일보 기사에는 "宋繼白氏(송계백씨) 宿疴(숙아)로 因(인)하야 永柔 自宅(영유 자택)에서 治療中(치료중)이던 바 今月 十二日 午前 十時 逝去(금월 12일 오전 10시 서거)"라고 되어 있으므로, 1922년 1월 12일 오전 10시 평안남도 평원군 영유면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했음을 알 수 있다. 국가보훈처에서 무슨 이유로 1920년 초에 도쿄 감옥에서 옥사했다고 단정지은 것인지 석연치 않다.

그는 후손이 없었고 어느 곳에 매장되었는지를 알려주는 기록도 없기 때문에, 그의 묘지는 현재 알 수 없다. 그래서 국립서울현충원은 1975년에 그를 '무후선열'로 지정하고 무후선열제단에 그의 위패를 세웠다. 또한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송계백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2.4. 가족

조카가 군인 출신으로 유신정우회 국회의원을 지낸 송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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