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47a0> 출생 | 1891년 6월 1일 |
평안북도 창성군 창성읍 평로동 | |
사망 | 생몰년도 미상 |
사망지 미상 | |
이명 | 강기수( 康記守), 필성공(必成功) |
직업 | 독립운동가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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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강제하는 1891년 6월 1일 평안북도 창성군 창성읍 평로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4월 1일 평북 창성군 읍내 서문 밖에서 기독교와 천도교 간부 신용철(申容澈)·강이달(姜利達)·선우명(鮮于明)·문창수(文昌洙)·한선학(韓善學) 등과 함께 3.1 운동에 참여했다. 이후 대한독립청년단(大韓獨立靑年團)에 가입하여 부단장으로 활동하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자금 조달에 적극 참여했으며, <반도청년보(半島靑年報)>를 간행하여 임시정부의 입장을 널리 선전했다.강제하는 여러 차례에 걸쳐 단원을 국내에 파견하여 군자금을 모집했고, 관공리의 사직을 권고하는 경고문을 배포했다. 또한 1920년 9월에 미국 의원단이 한국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접하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파견원으로 정운(鄭雲)과 함께 국내에 들어가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하였으나 경계가 엄중하여 성공하지 못했다. 이후 그는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에 가담하여 권업부장으로 활동했고, 1924년 말부터 1925년 초까지 통의부에서 재무부장으로서 중앙위원장 현정경 등과 함께 했다. 그리고 1924년에 정의부(正義府)가 조직되자 여기에도 참여했다.
1926년 10월~11월, 강제하는 길림성 반석현에서 제3회 중앙의회에 참석하여 현익철, 김동삼, 김원식(金元植), 김철(金鐵), 이욱(李旭) 등과 함께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다. 또한 화성의숙의 재무로서 활동했고 1928년 5월 만주지역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위한 전민족유일당조직회의(全民族唯一黨組織會議)가 개최되었을 때 정의부 대표로 지청천, 이관일(李貫一) 등 대표들과 함께 참여했다. 1929년 3월 1일에는 조선혁명당 창당을 위한 회의에서 현익철, 최동오(崔東旿)와 함께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어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이후의 행적은 알려진 바 없으며, 사망년도, 사망지 역시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그의 유해가 평양 애국렬사릉에 매장되었으며 '애국지사'라고 적힌 비문이 세워진 것이 확인되었다. #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강제하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