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02 23:13:41

송헌주

파일:송헌주.jpg
성명 송헌주(宋憲澍)
이명 송헌주(宋憲柱)·송헌수(宋憲樹)·송헌위(宋憲尉)
생몰 1880년 10월 22일 ~ 1965년 7월 31일
출생지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 공덕리
(현 서울특별시 마포구 공덕동)
본관 은진 송씨
매장지 로스데일 공동묘지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미국에 정착하다2.3. 이승만의 측근2.4. 독립운동 및 사회활동2.5. 재미한인단체 연합활동2.6. 해방 이후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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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초년기

송헌주는 1880년 10월 22일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 공덕리에서 아버지 송득인(宋得仁)과 어머니 창녕 성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은진 송씨로 양반이지만 7대조 때 충청도에서 고양으로 이주한 뒤 5대조 이후 관직에 나간 이가 없어서 송헌주 대에는 한미했다. 송헌주가 언제 관립영어학교에 입학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아마도 1890년대 후반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독립신문> 1898년 5월 31일자 보도에 따르면, 그는 1898년 5월 28일 훈련원에서 개최된 외국어학교 대운동회에서 영어학도로서 220보 달리기에서 2등을 해 상으로 서양 칼과 필통을 받았다고 한다.

1899년 11월 W.F 허치슨 교사가 해고되자, 영어학교 학생들이 그를 재고용하지 않으면 학교를 그만두겠다며 단체 시위를 벌였다. 이에 정부는 해당 학생 12명을 퇴학시켰는데 그 중엔 송헌주도 있었다. 그를 비롯한 퇴학생들은 허물을 뉘우친다고 청원했고, 4개월 뒤인 1900년 3월에 다시 학교에 들어왔다. 하지만 1903년 2월에 거행된 영어학교 제1회 졸업식에는 그의 이름이 기재되지 않은 것을 보아, 그는 영어학교를 끝까지 다니지 않았던 듯하다.

<구한국관보>에 따르면, 그는 1901년 2월 15일에 농상공부 전화과 주사직의 주사를 맡았지만 다음날 사임했다고 한다. 당시 관직에 임용된 후 바로 사직하는 것은 흔한 일로, 높은 관직을 획득하고자 하는 이들이 경력을 얻기 위한 방편이었다. 이후 송헌주의 국내에서의 행적은 더이상 확인되지 않고 1903년 12월 데슬러 은행의 사무원 자격으로서 하와이로 향했다. 송헌주가 하와이로 가게 된 동기가 무엇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유학을 목적으로 갔을 가능성이 높다.

2.2. 미국에 정착하다

1903년 12월 하와이로 건너간 송헌주는 데슬러 은행 사무원으로서 근무하는 한편 한인 단체와 한인 교회에서 활동했다. 1905년 5월 7일 하와이 감리교의 존 W. 와드만 감리사의 집에서 남학생 기숙학교 설립이 제안되었는데, 그 제안자들 중엔 송헌주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해 7월에는 그와 해관 통역 박윤섭(朴允燮)이 주도하여 교육회를 조직하고 와드만 목사를 회장으로 선출했으며, 8월 24일에는 호놀룰루 한인예배당에서 한인상조회가 결성될 때 그가 회장에 선임되었다. 그가 한인상조회 회장에 선임된 데에는 그가 영어에 능숙하면서도 한인사회와 교회에서 지도적 위치를 차지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1905년 12월 28일 호놀룰루에서 개최된 제1회 감리교 연회에서, 그는 <포와한인교보>의 발행인으로 선임되었다. 그 후 하와이 이민국에 근무하던 송헌주는 하와이 주재 일본영사와 선박해사가 미국 본토로 이주하려고 하는 한인들의 빙표를 선비(船費) 미납을 이유로 다수 압류하자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주협회 회장 에벤 F.비숍과 함께 담판하여 빙표를 돌려받았다. 또한 1906년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간 그는 주인에게 전하지 못한 빙표 15매를 공립신보사에게 맡겨 찾아가게 했으며, 멕시코 이민 문제를 조사할 목적으로 하와이에 왔던 외부협판 윤치호가 멕시코에 가지 못하고 1905년 10월 3일 하와이에서 귀국할 때 배까지 환송해주기도 했다.

1906년 4월, 송헌주는 하와이 생활을 청산하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4월 19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지만, 때마침 샌프란시스코 지진이 일어나는 바람에 바로 하선하지 못하고 4월 21일에야 하선할 수 있었다. 그가 샌프란시스코에서 무엇을 했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지만 얼마 안 있다가 뉴욕으로 간듯 하다. 그는 뉴욕에서 한국유학생들을 정부 관비생으로 만들기 위해 워싱턴의 일본공사관을 통해 대한제국 정부에 청원했다. 그러나 정부 관비생 문제가 재론되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주미 일본공사관이나 통감부에서 이를 고려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907년 6월, 송헌주는 버지니아 주 세일럼에 위치한 로녹대학에 입학했다. 그는 7년 후인 1914년에 경영학과를 졸업했는데, 그가 이토록 늦게 졸업한 것은 헤이그 특사의 통역관을 맡아 유럽을 오가느라고 중간에 학교를 다니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 특사 문제에 대한 소식을 들은 박용만은 송헌주를 헤이그에 보내 특사들을 돕게 했다.[1] 송헌주는 헤이그에 도착해 특사들의 통역관으로서 활동했지만, 특사들은 평화회의에 참석하지 못했고 이준은 분사했다.

이후 이상설 이위종은 송헌주를 대동하고 7월 19일 헤이그를 떠나 영국을 방문한 뒤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고자 8월 1일 뉴욕에 도착했다. 그러나 대통령 면담이 거절되자 9월 초 헤이그로 돌아가 이준의 장례식을 치렀고, 파리와 베를린, 로마 등을 거쳐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방문했다가 런던으로 이동하면서 한국의 독립을 호소했다. 1908년 2월, 송헌주는 이상설과 함께 미국으로 돌아왔고, 7월에 덴버에서 박용만의 주도로 개최된 애국동지대표회에 참석했다.

이후 로녹대학에 재입학한 그는 미식축구부, 농구부, 테니스부 등에서 활동했고, 외국인학생회 회장과 키케로축전 회장 등을 맡았고 학생 토론단체의 멤버이기도 했다. 그는 로녹대학 예과에서 역사학(아시아 및 일반), 중국어, 라틴어, 영어, 독일어, 수학, 화학을 수학했고, 대학부에서 역사학(미국사), 정치경제학, 정치학, 사회학과 같은 인문사회학을 수학했으며, 수학, 물리학, 지질학, 생물학 등의 자연과학도 이수했고, 윤리학, 심리학, 교육학 과목도 이수했다. 이후 1914년에 로녹대학을 졸업한 그는 프린스턴 대학교 대학원에서 역사학과 정치학을 전공하여 1915년 6월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 후엔 박사과정에 진학하는 동시에 프린스턴 신학교에 등록했다. 그러나 1학기 만에 대학원을 그만두고 1916년 3월 하와이 호놀룰루로 향했다.

2.3. 이승만의 측근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한 송헌주는 한인중앙학원의 교장이 되었다. 한인중앙학원은 1906년 7월에 설립된 한인기숙학교로 감리교회에서 맡아 운영하던 곳이었다. 당초엔 이승만이 박용만의 초청으로 1913년 9월 교장에 취임해 한인기숙학교를 한인중앙학원으로 변경하고 남녀공학을 만들었다. 그런데 이승만은 한인중앙학원의 여자기숙사 문제로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와 갈등을 빛었고, 새 감리사 윌리엄 프라이 목사와도 교회와 학교의 재정문제 등으로 대립하다가 1915년 6월 한인여학원을 별도로 설립하고 한인중앙학원의 교장직을 사임했다. 이후 감리교에서는 페지라는 인물을 교장에 임명했지만 한인학생들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해 결국 송헌주를 초빙했다.

송헌주는 1916년 3월부터 교장으로 일했지만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하고 1년만에 교장직을 사임했다. 그는 이어서 이승만이 운영하던 한인여학원의 부교장으로 옮겼다. 이후 그는 송메리와 결혼했다. 결혼방명록에 따르면, 송메리의 영어식 이름은 'Mary Soonamie Sah'로, 곧 순남이라는 한국 이름을 가진 여성이었다고 한다. 다만 사씨가 아니라 달성 서씨로 실제 이름은 서남순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12년 이상 뉴욕에서 살며 고등학교를 마치고 노스필드 여학교에서 1년 수학한 뒤 워싱턴 소재의 내셔널 트레이닝 스쿨에서 3년간 유치원 보모학을 익히고 뉴욕의 성경교사훈련학교에서 성서교사 훈련을 3년간 했다.

1917년 말, 송헌주는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의 부회장에 추천되었지만 이를 사양했다. 이후 그는 이승만의 막료로서 1917년 2월 <한인공보>의 창간에 관여해 총무와 재무를 맡았다. 또한 그는 이승만이 관련된 재정문제에도 관여되었다. 1917년 10월 뉴욕에서 개최된 제1차 소약국동맹회의 대표로 파견된 박용만을 지원하기 위해,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 총회장 안현경은 교민들에게 재정지원을 요청하면서 송헌주에게 의연금을 보내라고 요청했다. 이때 소요되는 경비가 500원이 될 것으로 예측되었지만 실제 의연금은 1,500원이었다. 그 차액은 송헌주의 개인구좌에 예치되었지만 장부에는 누락되었고, 이 사실이 알려지자 반발이 일었다. 1918년 1월 국민회의 대의회는 재무를 맡았던 이승만에게 해명을 요구했지만, 이승만은 별다른 답변을 하지 않았다.

이후 이승만 세력과 박용만 세력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고, 급기야 1918년 2월 이승만이 대의원 한 사람이 흉기로 자신을 죽이려 했다며 하와이 경찰에 고소했지만 하와이 법정이 이승만의 고소를 무고로 처리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일로 하와이 한인사회는 분열되었고 이승만 지지 세력과 박용만 지지 세력은 각자의 단체를 세우고 서로 격렬하게 대립했다. 송헌주가 이 장부 누락 사건에 연루되기는 했지만 개인적인 목적으로 빼돌리진 않은듯 하며, 다만 이승만을 비롯한 그 지지 세력의 재정에 관여하면서 빛어진 일인 것으로 추측된다.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한 후 4월에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임시정부는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선임했다. 하지만 이승만은 이를 'president'로 표기하면서 논란이 일어났고, 임시정부는 이에 당혹해 하다가 쓸데없는 갈등을 피하기 위해 9월 6일 대통령중심제로 개편하고 이승만을 임시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한편 송헌주는 3.1 운동이 하와이에 알려진 직후부터 하와이 한인들로부터 독립금을 기부받아 4월부터 6월까지 3만 5,000달러를 모금하고 그 가운데 2만 달러를 이승만의 워싱턴 사무소 설치된 외교활동에 사용하도록 지원했다.

1919년 8월 이승만이 구미위원부를 설치했을 때, 송헌주는 구미위원부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구미위원부는 외교활동보다는 재정문제를 담당해 하와이와 미주에서 거둬들인 돈을 이승만에게 지원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에 대해 대한인국민회는 자신들이 본래 애국금을 거둬들여 임시정부로 보내고 있었는데 이승만이 별도로 기구를 설치해 모금활동을 벌이는 것에 분개했고, 양측은 이 문제를 놓고 첨예하게 대립했다. 이에 임시정부 재무총장 이시영은 1920년 2월 대한인국민회가 관장하던 애국금 제도를 폐지하고 구미위원부가 발매하는 독립공채에 음모하라는 지시를 내려 이 문제를 해결했다.

이렇게 해서 미주의 재정관할권을 확보한 구미위원부는 공채표 판매에 직접 나섰다. 그러나 대한인국민회는 구미위원부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아 갈등의 불씨가 여전했다. 그러던 7월 22일, 이승만이 갑자기 송헌주에게 사임을 요구했고 송헌주가 응답하지 않자 7월 30일에 해임을 통보했다. 이는 이승만이 송헌주가 자신의 지시에 따르지 않고 독자적으로 활동했다고 봤기 때문이다. 이에 구미위원부 위원장 김규식은 이승만이 독단적으로 의연금 모금을 독점하려 한다고 여기고 사임서를 제출했지만 반려되자 장기 휴가원을 내고 상하이로 떠났다.

2.4. 독립운동 및 사회활동

송헌주는 구미위원부 위원직에서 해임된 뒤 하와이를 떠나 캘리포니아 중부의 리들리로 옮겼다. 그는 1921년 4월 리들리 건제회사의 이사를 맡아 식료품점을 운영했다. 또한 그는 국민회 지방회에 참여했지만 정치 문제에 관해 침묵하다가 1921년 10월 국민회 다뉴바지방회에서 개최한 단군 탄일 기념예식에서 연설을 할 기회가 주어지자 최급무는 무장투쟁이고 외교는 그 다음의 일이라고 주장하면서 이승만을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원래 우리 사회가 저같이 분노하여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했으니 우리 임시 대통령은 졍부 소지에 있어 민심을 수습하며 사직한 각원 들을 위로하여 다시 시무케 하며 단결케 해 사업이 계속될 선후 방침을 세우는 것이 마땅한 일이거늘 미국으로 건너와서 우리 독립을 미국에서 찾겠다고 하니 이 어찌 우리 동포가 낙망할 일이 아니겠는가? (중략) 전투를 벌여 피를 흘려야 외교도 할 수 있고 자유를 찾을 희망이 있으니 싸움을 준비해야 합니다.

당시 미국의 한국 독립세력은 상하이의 국민대표회의 소집에 대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이승만을 지지하는 세력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폐지를 거론하는 국민대표회의를 반대하며 1921년 12월 시사연구회를 다뉴바에서 조직했다. 이에 맞서 국민대표회의에 찬성하는 세력은 그해 11월 국민대표기성회를 조직했는데, 송헌주는 여기에 참여했다. 이로볼 때 그는 구미위원부 위원에서 해임된 뒤부터 이승만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그에 맞서 싸우기로 마음먹은 것으로 보인다.

한편, 송헌주는 노동사회개진당에서도 활동했다. 이살음이 주도한 노동사회개진당은 국민회 중심의 미국 본토에서 이승만과 구미위원부를 지지하였던 단체로 알려져 있는데, 송헌주가 이 단체의 대표원을 맡고 있었다. 이 단체의 고문부에 찬성장으로 서재필과 김규식이, 대표원으로 조소앙과 송헌주가 선임되었다. 노동사회개진당은 1925년 이승만이 임시정부 임시대통령에서 탄핵되자 임시정부에 성토문을 보냈다. 이때 송헌주가 이 성토문에 적극 가담했다는 증거는 없지만 이승만에 적대적인 국민회에서도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았다.

1923년 전후, 송헌주는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해 식료품점을 운영했다. 그는 자본금 5천 달러의 식료품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로스앤젤레스에서 개인사업을 하는 이들 가운데 5천 달러 규모의 식료품점은 3곳뿐이었다. 그는 이러한 탄탄한 재정을 바탕으로 1925년 2월 로스앤젤레스에서 조선의 기근을 돕기 위해 조직한 임시조국동포구제회의 위원장을 맡았다. 또한 그는 국내에 두고 온 딸 송순이를 미국으로 부르고자 하여 여러차레 시도했지만 일제의 허가가 나지 않아 이뤄지지 못했다. 그는 1965년에 죽기 직전 한국에 방문할 때까지 딸을 만나지 못했다.

2.5. 재미한인단체 연합활동

이후 한동안 사업가로 지내던 송헌주는 1930년에 로스앤젤레스 공동회에 참여하면서 다시 민족운동 전선에 나섰다. 로스앤젤레스 공동회는 광주학생항일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뉴욕과 시카고, 로스앤젤레스 등지에서 결성된 단체로, 송헌주는 부인 서순남이와 함께 1월 30일에 로스앤젤레서에서 발기된 공동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2월 9일에 성립된 로스앤젤레스공동회의 7인 위원 중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 로스앤젤레스공동회는 먼저 국내 학생운동 후원금을 보냈고, 국어학교 지원을 위해 진력하면서 교육위원 9인을 선출했다. 이때 송헌주는 가장 많은 표를 얻어 교육위원에 당선되었다.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발발하면서 일제의 만주 침략이 본격화되자, 상하이 한인들은 9월 25일 한교전체대회를 개최해 항일무력 항전을 결의하고 국내외 한인들의 단결을 촉구했다. 그리고 10월 1일 임시정부에서는 국내외 동포에게 혁명역량의 집중과 혁명동지들과의 연합전선을 희망하는 공함을 공포했다. 이에 호응해 국민회와 증가주공동회가 11월 9일 미주한인연합회를 발기했고, 로스앤젤레스공동회, 멕시코 자성단 등이 찬동하여 그해 12월 7일 미주한인연합회를 결성했다. 이때 송헌주는 한재명과 함께 로스앤젤레스 공동회를 대표했고, 나아가 미주한인연합회 집행부 사무장에 선임되었다. 그는 사무장으로서 임시정부의 후원과 국민선전을 목적으로 하여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미주한인연합회는 집행부 사무장 송헌주 명의로 임시 정부에 인준 청원을 했고, 임시정부에서는 1932년 1월 이 단체를 공식 기관으로 인정하며 미주의 인구세 수납업무를 위임했다. 이어 미주한인연합회에 여러 단체가 가입하고 임시정부에 인구세를 송금하는 등 지속적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여러 기성단체의 연합회여서 조직력을 발휘하기 어려웠고 내부 결속도 약했다. 특히 북미 한인사회를 주도하던 국민회의 적극적 지지가 결여되었다. 국민회는 자신들이 다른 단체와 같이 취급되고 제네바에서 외교활동을 전개하던 이승만에게 격러전보를 보낸 것에 불만을 품고 한인연합회 무용론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1933년 4월 2일, 국민회는 단독으로 김규식이 설립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에 가입해 한인연합회를 탈퇴했다. 이에 따라 증가주공동회와 나성공동회는 4월 16일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에 참여하고자 단체명을 대한독립당으로 변경했지만 양자간의 이해관계가 엇갈리면서 집회조차 제대로 열지 못했다. 송헌주는 이 과정에서 대한독립당 회장을 맡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제대로 활동하지 못하고 이름만 남은 대한독립당 회장으로서 임시정부 재무위원 직을 맡아 인구세를 거둬 임시정부에 117원 50전을 송금했지만, 결국 임시정부 재무위원 직을 사임하고 로스엔젤레스의 국어학교인 삼일학교의 교장직을 맡았다. 이후 대한독립당 역시 해산되었다.

1936년 5월 국민회가 주도하여 로스앤젤레스에서 북미 각 단체대표자들이 모여 한인사회 발전책 간담회를 개최했다. 이 간담회에서는 국민회 중심의 통합이 논의되었고 로스앤젤레스에 총회관 건립 등을 결정했다. 송헌주도 이 간담회에 참석했고 총회관 건축의연금으로 200원을 기부했다. 이 일을 계기로 국민회에서 활동하게 된 송헌주는 1937년 1월 위원제로 개정된 국민회의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으며, 이어 국민회의 숙원사업인 로스앤젤레스에 새로 건립하는 국민총회관 건축의 책임을 맡았다. 그는 건축위원회 위원장으로서 1938년 4월 17일 낙성식 때까지 총회관 건축에 진력했다.

1939년, 송헌주는 국민회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임되어 국민회 활동 전반을 관할했으며 1940년에는 국민회 중앙상무위원회 교육부장으로 봉사했다. 1940년 9월 충칭에서 한국광복군이 성립되자,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이에 호응하고자 1941년 4월 해외한족대회가 개최되었고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조직했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호놀루루에 의사부를, 로스앤젤레스에 집행부를 두었는데, 하와이의 국민회, 동지회를 비롯해 많은 단체가 참여했다. 그들은 재정모금으로 임시정부의 활동과 미주에서의 외교 및 국방 공작활동에 대한 재정후원에 주력하였으며, 태평양전쟁 이후 재미한인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기 위하여 한인 신분증도 발급했다.

송헌주는 1941년 12월 진주만 공습으로 시작된 태평양 전쟁 직후 집행부 위원으로 참여하며 국방과장을 맡아 미국을 후원하기 위한 국방공채와 스탬프 구입, 미국적십자사 모금 활동 후원 등의 업무를 담당했다.또한 1941년 12월 한족연합회 집행부가 미국 육군사령부의 허가를 받고 로스앤젤레스에 한인국방경위대를 편성했을 때, 송헌주는 정위 계급으로 임명되었다. 또 1943년 송헌주 국방과장은 한미인 전시저금회 회장으로 부임해 동포들에게 미국 국방공채의 구매를 촉구했다.

한편, 임시정부는 해외한족대회의 건의를 받아들여 1941년 6월 워싱턴에 주미외교위원부를 설치하고 이승만을 위원장에 임명해 대미교섭의 전권을 부여했다. 그러나 주미외교위원부가 이승만에 의해 운영되자, 한족연합회는 자신들이 외교위원을 선정할 권한이 있다며 주미외교위원부와 갈등을 빛었다. 결국 국민회와 한족연합회는 이승만이 자신들의 의사는 물어보지 않고 독단적으로 미국과 외교 활동을 벌이는 것에 책임을 물어 면직을 청원했고, 이승만을 지지하는 동지회는 1943년 12월 한족연합회를 탈퇴했다. 이리하여 한족연합회의 영향력은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1944년, 송헌주는 국민회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한족연합회에 파송된 국민회 대표들이 한족연합회의 워싱턴 사무소 설치를 강행하자, 송헌주는 반발했다. 그는 임시정부의 지시에 따라 설치된 주미외교위원부 외 별도의 외교기관을 세워서는 안된다고 주장했지만 자신의 의견이 묵살되자 중앙집행위원장 직책을 4개월 만에 사임하고 국민회를 탈퇴했다. 이후 그는 한족연합회에서 무소속 위원으로 지내며 민족혁명당 미주총지부 관계자들과 가깝게 지냈고, <독립신문>사의 사우로 참여했으며, 군사운동 촉진위원회 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1944년 11월 한족연합회에서는 동지회가 불참한 가운데 전체대표회를 개최해 주미외교위원부 위원 15인을 선임했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이승만과 동지회 회원들을 배제한 이 위원들을 승인하지 않고, 직접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을 각 정파별로 안배하여 일방적으로 통보하였다. 이승만이 위원장이었으며 송헌주도 위원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자 한족연합회는 격분했고, 결국 임시정부와 한족연합회는 결별하고 말았다. 이때 송헌주는 이승만과 대립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1945년 1월 이승만이 임시정부에 재정문제를 보고하기 위하여 송헌주에게 의견을 구하는 편지가 남아있는데서도 알 수 있다.

1945년 3월 임시정부는 이승만을 단장으로 샌프란시스코회의에 파견할 임시정부대표단을 구성하였는데, 한족연합회 인사들은 대체로 불참하였지만 송헌주는 참여했다. 그는 이승만과 한족연합회가 합동으로 조직한 해외한족대표단에도 참여했지만 샌프란시스코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다.

2.6. 해방 이후 행적

1945년 8.15 광복 후, 송헌주는 조국에 돌아와 일하고자 했다. 이는 김규식이 그를 추천하여 군정청의 적절한 자리를 찾아주도록 요청한 데서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그는 이승만의 대한민국 대통령 취임을 축하하는 전보를 보냈고, 이승만은 1948년 8월 20일에 로스앤젤레스 동지회를 통해 그동안의 노고에 감사를 표하는 답장을 보냈다. 그러나 그는 국내로 돌아오지 않았는데, 이에 대해 송헌주는 이승만이 자신의 귀국을 방해했다고 여겼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고령의 나이와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귀국하지 못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어서, 정확한 사유는 현재까지 알 수 없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제대로 알 수 없지만 로스앤젤레스에서 계속 식료품점을 운영했던 듯하다. 그러다가 1965년 7월 31일에 사망하니 향년 86세였다. 그는 로스데일 공동묘지에 묻혔고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2016년 5월, 송헌주의 후손들이 국가보훈처로부터 받은 독립유공자 보상금 전액을 로스앤젤레스 소재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에 기부했다. #

[1] 사실 박용만은 이승만에게 협조를 구했지만 이승만이 거부해서 송헌주를 대신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