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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륜 吳成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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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aeaea,#191919> 출생 | 1898년 추정[1] | |
함경북도 온성 | ||
사망 | 1947년 | |
네이멍구 자치구 | ||
이칭 | 오함성(吳咸聲), 오동실(吳東實), 오범철(吳範喆), 오봉환(吳鳳煥), 전광(全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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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의열단에 가입해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을 하다 변절한 친일반민족행위자.2. 생애
1906년 아버지를 따라 만주로 건너갔다. 뒤늦게 중학교를 다니다가 3·1운동이 일어나자 군자금 모금에 열신하였다. 이 해 가을 상하이로 가서 의열단에 가입하고 압록강대교 폭파를 계획하였으나 실패하였다이후 김익상, 이종암과 함께 1922년 3월 상하이에서 부두에서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암살하려 했지만 탄환이 빗나가는 바람에 계획이 실패했고, 차를 타고 도주하다 교통사고가 나버려 결국 검거되었다. 상하이 일본영사관에서 예심을 거쳐 나가사키 재판소로 이송될 예정이었으나, 다무라 부인의 도움으로 유치장에서 탈출하여 광둥을 거쳐 독일로 갔다. 이 사건은 당시 신문에 대서특필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2]
한편, 독일에서 다시 모스크바로 가서 모스크바공산대학에서 공부하였다. 1923년 1월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와 이동휘와 상의하여 적기단(赤旗團)에 참여하였다. 1926년 광둥으로 가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김산, 김충창 등과 함께 광저우 폭동(광둥 코뮌)에 참가하였다.
1929년 다시 만주로 건너가서 계속해서 중국공산당 조직에서 활동하였다. 1936년 동만특위 서기 위극민(魏極民) 밑에서 위원을 지냈으며, 동시에 제1로군 제2군 당위원회 정치주임도 역임하였다.
1935년 코민테른 제7회 대회에서 반제국주의통일전선 채택하자, 이에 1936년 6월 10일 엄수명(嚴洙明) · 이상준(李相俊) 등과 함께 조국광복회를 발기하였다. 그리고 남만성위원회 상무위원선전부장으로서 제1로군 비서차장 겸 군수처장을 지냈다.
1941년 1월 항일운동을 하던 중 일본 관동군과 만주국 경찰의 토벌작전으로 자신이 포위당하자 투항하였고, 이후 만주국 치안부 고문을 지냈다. 그렇게 일본에 협력하며 친일 활동을 하던 중 일본이 패망했다.
그는 네이멍구 자치구에서 앓고 있던 병으로 인해 병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