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padding-top: 5px; min-height: 2em; background: linear-gradient(to right,#002395 30%, #fff 30% 70%, #ED2939 70%);" {{{#000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text-align: center; word-break: keep-all;" |
<colbgcolor=#fff,#000><colcolor=#000,#fff>~ 843년 | 갈리아 켈트족 | ||||
로마 공화국 | ||||||
로마 제국 갈리아 제국 |
||||||
서로마 제국 수아송 왕국 |
||||||
프랑크 왕국 (메로비우스 왕조) |
부르군트 왕국 · 코르누아이유 · 돔노네 · 브로에렉 | |||||
프랑크 왕국 (카롤루스 왕조) |
서고트 왕국 · 브르타뉴 왕국 | |||||
843년 ~ 1940년 |
프랑스 왕국 (카페 왕조) |
아키텐 공국 · 노르망디 공국 · 브르타뉴 공국 | ||||
프랑스 왕국 (발루아 왕조) |
||||||
제1식민 제국 |
프랑스 왕국 (부르봉 왕조) |
부르고뉴 백국 | ||||
부르고뉴 공국 부르고뉴국 |
||||||
제1공화국 | ||||||
제1제국 (보나파르트 왕조) |
||||||
프랑스 왕국 (부르봉 왕조) |
||||||
프랑스 왕국 (부르봉-오를레앙 왕조) |
||||||
제2공화국 | ||||||
제2식민 제국 |
제2제국 (보나파르트 왕조) |
|||||
제3공화국 | ||||||
1940년 ~ | 자유 프랑스 | 비시 프랑스 |
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 |
|||
프랑스 임시정부 | ||||||
제4공화국 | ||||||
제5공화국 |
노르망디 공국 Duchie de Normaundie Ducatus Normanniae |
|||
존속기간 | 911년 ~ 1204년[1] / 1469년[2] | ||
위치 |
프랑스
노르망디 영국 채널 제도 |
||
수도 | 루앙 | ||
국가원수 | 공작[3] | ||
주요 공작 |
롤로(911~927) 리샤르 1세(942~996) 기욤 2세(1035~1087) |
||
언어 | 고대 노르만어, 라틴어 | ||
종교 | 가톨릭 | ||
종족 | 노르만족 | ||
성립 이전 | 서프랑크 왕국 | ||
멸망 이후 | 프랑스 왕국 |
언어별 명칭 | |
중세 프랑스어 | Normendie |
고대 노르드어 | Norðmanndi |
중세 영어 | Normandie |
라틴어 | Ducatus Normanniae |
노르만어 | Duchie de Normaundie |
프랑스어 | Duché de Normandie |
영어 | Duchy of Normandy |
1. 개요2. 역사
2.1. 건국2.2. 루앙 백국2.3. 노르망디 공국
3. 역대 군주4. 여담2.3.1.
리샤르 2세2.3.2.
리샤르 3세와
로베르 1세2.3.3.
정복왕 윌리엄2.3.4.
로베르 2세
2.4.
앙주 제국2.5. 프랑스 왕국의 지배와
백년 전쟁2.6. 이후2.3.4.1.
윌리엄 2세와의 첫 번째 분쟁2.3.4.2. 일시적인 휴전2.3.4.3. 윌리엄 2세와의 두 번째 분쟁2.3.4.4.
헨리 2세와의 분쟁과 타협2.3.4.5. 앨턴 협정의 결렬2.3.4.6. 몰락
2.3.5.
헨리 1세2.3.5.1.
기욤 클리토 및
루이 6세와의 분쟁2.3.5.2.
블랑슈네프호 침몰 사고 이후
2.3.6.
무정부시대와
조프루아 5세[clearfix]
1. 개요
노르망디의 공국.원래 이곳의 영주 노르망디 공작은 프랑스 국왕의 봉신이었으나 1066년 노르망디 공작 기욤 2세가 잉글랜드를 정복하여 잉글랜드 왕 윌리엄 1세가 되면서 노르망디 공이 잉글랜드 국왕을 겸하게 되었다. 이후 프랑스와 잉글랜드 사이의 분쟁의 원인이 되었으며, 1204년 필리프 2세가 존 왕을 꺾고 노르망디 공국 전역을 제패한 뒤 1259년 잉글랜드 왕국이 노르망디 공국의 주권을 포기한다는 내용의 파리 협약이 체결되면서 프랑스 왕국의 직할령이 되었다. 백년전쟁 시기 일시적으로 잉글랜드 왕국의 영토로 돌아갔지만, 프랑스가 최종적으로 승리하면서 도로 프랑스의 영역이 되었다. 이후 노르망디 공작이 몇 차례 선임되었으나 명목상 칭호에 그쳤다.
2. 역사
2.1. 건국
9세기 초, 서프랑크 왕국은 바이킹( 노르드인)들의 연이은 침략으로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바이킹은 845년 파리를 점령하고, 철수하는 대가로 막대한 배상금을 챙기기도 했으며, 876년 센 강 하구에 쳐들어가서 네우스트리아 일대를 심각하게 약탈하기도 했다. 이렇듯 프랑스 각지를 휘젓던 바이킹 중에는 롤로라는 인물이 있었다. 이 인물의 기원은 불분명하며 초기 행적 역시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뒤동 드 생캉탱(Dudon de Saint-Quentin, 960년 또는 970년 ~ 1026)이 롤로의 손자인 리샤르 1세의 의뢰에 따라 집필한 <노르만인의 역사>(Normannorum)에 따르면,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덴마크 왕이 롤로의 아버지이며 귀족이었던 사람과 롤로의 형제 구림(Gurim)을 살해하자, 어쩔 수 없이 해외로 망명했다고 한다. 그 후 덴마크인과 노르웨이인이 섞인 바이킹 무리를 이끌고 북해 해안과 영국 해협을 종종 습격한 것으로 추정된다.뒤동에 따르면, 롤로는 885년에서 887년 사이에 벌어진 바이킹의 파리 공방전을 진두지휘했다. 당시 서프랑크 왕국의 제5대 왕이었던 비만왕 카를 3세[4]는 상당한 금을 주어 물러나도록 했다. 그러나 그는 금만 받아 챙긴 후 파리에서 물러나 다른 지역을 약탈했다. 이 파리 약탈로 인해 신망을 잃은 카를 3세는 조카인 아르눌프를 중심으로 한 귀족들의 쿠데타로 축출되었고, 파리 공방전에서 바이킹을 막아낸 공을 세운 로베르 가문 출신의 파리 백작 외드가 귀족들의 추대를 받아 서프랑크의 제6대 왕이 되었다.
뒤동에 따르면, 롤로는 890년 바이외에 상륙하여 카롤루스 왕실의 방계 후손이었던 바이외 백작 베렝가리오 2세를 살해하고, 그의 딸인 포파를 납치해 부인으로 삼았다. 이후 890년경 브르타뉴 왕국을 침공했지만 그곳의 국왕 알란 1세에게 격퇴된 뒤 누아용(Noyon)으로 후퇴해 겨울을 보냈다. 그 후 롤로는 네우스트리아를 떠나 영국에서 수년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898년경 또는 905년에 돌아와서 루앙으로 진군하다가 루앙 대주교와 쥬미에쥬에서 만난 뒤 막대한 공물을 받아내는 대가로 루앙을 약탈하지 않는다는 협약을 체결했다. 이후 루앙에 정착했으며, 911년 샤르트르를 포위했지만, 외드의 동생 로베르 1세가 부르고뉴 공작 리샤르, 푸아티에 백작 아르누울 2세의 역습을 받아 참패하고 루앙으로 퇴각했다.
당시 로베르 1세와 권력 투쟁을 벌이던 단순왕 샤를 3세는 롤로가 이대로 로베르 1세에게 무너지면 로베르 1세의 위상이 지나치게 강해질 것을 우려해, 그를 회유해서 로베르 1세를 견제하는 데 써먹기기로 했다. 루앙의 대주교 프랑콘 또는 전임자 기가 그를 찾아가서 협상을 제안했고, 때마침 샤르트르에서의 참패로 입지가 불안해진 롤로도 이에 응하기로 했다. 로베르 1세는 처음에는 롤로와 협상하는 걸 탐탁지 않게 여겼지만, 이내 롤로의 대부가 되는 조건으로 협약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911년 7월 20일, 샤를 3세와 롤로는 생클레르쉬레프트 조약을 정식으로 체결했다. 뒤동에 따르면, 조약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샤를 3세는 "에델강과 바다" 사이의 지역을 루앙 대주교가 참석한 가운데 롤로에게 양도한다.[5]
2. 롤로는 기독교로 개종하고 루앙 대성당에서 세례를 받는다.
3. 롤로는 센 강을 통해 프랑스 깊숙이 침입하는 바이킹과 프랑크군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맡음으로써 왕국을 지키며, 프랑크 국왕에게 경의를 표한다.
2. 롤로는 기독교로 개종하고 루앙 대성당에서 세례를 받는다.
3. 롤로는 센 강을 통해 프랑스 깊숙이 침입하는 바이킹과 프랑크군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맡음으로써 왕국을 지키며, 프랑크 국왕에게 경의를 표한다.
기독교식 세례를 받는 흐롤프르(롤로). |
뒤동에 따르면, 롤로는 경의의 표시로 왕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을 거부하고, 친척 한 명이 왕의 발에 키스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러나 그 노르만인은 왕의 발을 너무 높이 들어올렸고, 샤를 3세는 그 바람에 균형을 잃고 뒤로 넘어졌고, 롤로와 전사들은 폭소를 터트렸다고 한다. 현대 학자들은 이 기록은 뒤동이 노르만 공작에게 아첨하기 위해 지어낸 일화로 간주한다. 롤로는 가톨릭으로 개종한 뒤 대부가 되어준 로베르 1세의 이름을 딴 로베르라는 세례명을 받았으며, 흐롤프르였던 본명은 이때부터 프랑스식 이름인 롤로로 일컬어졌다. 또한 그는 루앙 백작이자 바이킹의 침입으로부터 센 강을 방어하는 사람의 칭호를 수여받았다.
그렇게 롤로가 센강 하구에 자리를 잡자,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많은 사람들이 이주해 해안 인근과 바스센 등 프랑스 북부 지역에 정착했다. 후에 이 지역을 북부인의 땅이란 뜻에서 노르망디로 부르게 되었다. 그들은 프랑크 왕국의 언어와 풍습, 종교를 받아들이고 약탈을 자제했다. 이 프랑스어를 쓰고 기독교를 믿는 금발벽안의 인물들은 노르만족(Normands)으로 일컬어졌다.
2.2. 루앙 백국
2.2.1. 롤로
초대 루앙 백작 롤로가 이끄는 생클레르쉬레프트 조약 이후 수년간 정착지를 개척하는 데 힘을 기울일 뿐 별다른 약탈 원정을 단행하지 않았다. 전승에 따르면, 롤로가 루마레 숲의 나무에 금반지를 매달아 두었는데, 3년간 누구도 감히 훔치지 못했다고 한다. 또한 롤로는 루앙 대주교의 협조를 받으며 수도원 여러 곳을 재건하는 등 기독교 신앙에도 충실했다. 그러던 922년 6월 29일, 프랑스 귀족들이 샤를 3세가 바이킹과 싸우러 나간 틈을 타 로베르 1세를 국왕으로 추대했다. 샤를 3세는 이를 반역으로 간주하고, 로베르 1세를 절대로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곧바로 치러진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샤를 3세는 로트링겐으로 도주해야 했다.샤를 3세로부터 구원을 요청받은 롤로는 로베르 1세가 장악한 파리 인근 지역을 약탈했다. 이에 로베르 1세가 롤로를 막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자, 샤를 3세가 이 틈을 타 수아송으로 진격했다. 베르 1세는 이 소식을 듣고 친히 나머지 군대를 이끌고 샤를 3세를 막으려고 했다. 이어진 수아송 전투에서, 로베르 1세가 샤를 3세의 전사들에게 암살당했지만 로베르 1세의 아들인 대(大) 위그의 활약으로 샤를 3세가 참패했다. 그 후 샤를 3세는 베르망두아 백작 헤르베르트(에르베르) 2세에게 의탁하러 갔다가 오히려 그에게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고, 로베르 1세의 사위인 라울이 프랑크 왕위에 올랐다.
롤로는 라울을 왕으로 따르길 거부하고 약탈 원정을 재개하기로 했다. 10세기 연대기 작가 랭스의 플로도아르(Flodoard de Reims, 894 ~ 966)에 따르면, 923년 루아르 강에서 활동하던 바이킹 지도자 라게놀드가 "루앙에 살던 동포들"을 설득해, 그들과 함께 플란드르에서 보베까지 이어지는 약탈 원정을 단행하여 프랑크인 1,000명을 납치했다고 한다. 이에 라울 왕과 헤르베르트가 924년 루앙 백국을 침공했지만, 롤로에게 격파되어 우아즈 강 너머로 퇴각했다. 이후 양자는 평화 협약을 논의한 끝에, 베생과 멘 일대가 롤로에게 넘어가고 롤로는 새 국왕에게 경의를 표하는 조건으로 협약이 성사되었다.
925년, 롤로는 평화 협약을 깨고 군대를 일으켜 프랑스 왕국의 영토였던 플란데런 백국으로 쳐들어가 보베, 아미앵, 아라스, 누아용 시를 차례로 약탈하고 불태웠다. 이에 라울 왕과 헤르베르트가 재차 군대를 일으켜 루앙 백국을 쳐들어가 약탈을 자행했다. 롤로의 군대는 이들을 물리쳤지만, 베생 주민들이 그에게 불복해 반란을 일으켰기에 더 이상 라울 왕을 몰아붙이지 못했다. 이후 플란데런 백작 아르눌 1세가 반격을 개시해 브레슬을 점령한 뒤 전 병력을 이끌고 노르만족의 외 요새를 포위했다. 롤로는 1,000명 가량의 병력을 파견해 요새를 지키게 했지만, 아르눌 1세는 끝내 요새를 함락하고 그곳에 있던 주민들과 함께 불태웠다. 이후 롤로는 플란데런 백국에게 빼앗아갔던 영토를 돌려주는 대가로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2.2.2. 기욤 1세
925년에서 927년 사이 또는 932년에서 933년 사이에 롤로가 사망한 뒤, 아들 기욤 1세가 제2대 루앙 백작이 되었다. 931년, 브르타뉴인들이 대대적으로 봉기해 브르타뉴 방면 바이킹 지도자 펠레칸을 비롯한 다수의 바이킹을 살해했다. 이 소식을 접한 기욤 1세는 인콘을 지원해 브르타뉴 반군을 물리치고 반란을 주도한 알란 2세를 축출했다. 뒤동은 그가 "노르만인과 브르타뉴인의 공작"을 칭했다고 밝혔으며, 고고학자들은 몽생미셸에서 그를 브르타뉴 공작이라고 지칭하는 동전을 발견했다. 이로 볼 때, 그는 이 시기에 브르타뉴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933년, 기욤 1세는 서프랑크 국왕 라울에게 "바다 해안에 위치한 브르타뉴인의 땅" 에 대해 경의를 표했다.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이 영지를 코탕탱 반도 및 아브랑챙 일대로 추정한다. 이 지역은 66년 전 샤를 2세가 브르타뉴 전임 국왕인 살로몬에게 하사한 땅이었는데, 이 시점에 기욤 1세의 수중에 넘어간 것이다.934년, 코탕탱 및 아브랑챙 일대의 지도자 리울프가 이끄는 노르만인이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의 기원은 불확실한데, 일각에서는 기욤 1세가 서프랑크 왕국에 지나치게 우호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에 반감을 품은 노르만인들이 리울프를 앞세워 독자적인 나라를 세우려 했을 거라고 추정하며, 또다른 이들은 루앙 백작의 통치로부터 벗어나려는 노르만인들의 독립 시도였을 거라고 추정한다. 리울프는 루앙 성벽 아래 몽 리부데 계곡 인근으로 진군한 뒤, 그곳에 숙영지를 세웠다. 기욤 1세는 이에 맞서 청지기인 안슬레크 드 브릭퀘벡, 노르만 귀족 베르나르, 베생 백작 보톤과 함께 몽토말라드 언덕으로 진군했다. 이후 기욤 1세는 중갑옷을 입은 프랑스 기병대의 지원을 받아 반란군을 몰아붙여 진압했다.
기욤 1세는 935년경 베르망두아 백작 에르베르 2세의 딸인 리에트가르드와 기독교식으로 결혼했다. 이때 그녀의 지참금으로 롱그빌, 쿠드르, 일리에레베크를 받았다. 또한 서프랑크 왕국에서 가장 강력한 거물인 대 위그의 승인을 받아 누이 아델과 푸아투 백작 기욤 3세 사이의 결혼 계약을 맺었다. 이후 몽생미셸 수도원에 기부했으며, 생피에르 드 쥬미에쥬 수도원을 복원했다. 또한 누이 아델에게 푸아티에의 생시프리앙 수도원에서 12명의 수도자를 루앙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뒤동은 그를 평화와 질서의 회복자라고 호평하며, 그의 치세에 노르만인들이 진정한 기독교인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고 밝혔다.
936년 라울 왕이 급사하자 루이 4세를 서프랑크 왕으로 추대했다. 939년, 몽트뢰유 백작 에를뤼앙이 플란데런 백작 아르누울 1세에 의해 몽트뢰유를 빼앗긴 뒤 기욤 1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기욤 1세는 군대를 이끌고 몽트뢰유로 진군해 탈환했고, 에를뤼앙은 기욤 1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이리하여 기욤 1세는 피카르디를 통제하고 플란데런 공국이 남쪽으로 확장하는 걸 저지했다. 그는 여세를 몰아 플란데런으로 쳐들어가 여러 영지를 약탈했다가, 교황청으로부터 기독교 영주를 해쳤다는 이유로 파문당했다. 941년 루이 4세가 루앙에서 중재한 평화 협약이 브르타뉴와 노르만인 사이에서 체결되었다. 942년 12월 17일, 기욤 1세는 아르누울 1세의 초대를 받고 피퀴니 인근의 솜강의 한 섬으로 가서 평화 협상을 논의했다. 그런데 평화 협약이 성립된 직후, 캉브레 백작의 아들인 보두앵이 아르누울 1세의 사주를 받아 그를 암살했다.
2.2.3. 리샤르 1세
기욤 1세가 암살당한 뒤, 10살된 아들 리샤르 1세가 제3대 루앙 백작에 선임되었고, 베르나르, 라울, 안슬레흐 드 브릭퀘벡, 오스몬드 드 콩텔빌로 구성된 섭정 위원회가 신설되었다. 어머니 스프로타는 기욤 1세가 암살된 후 아스페를렝 드 피트르라는 이름의 부유한 노르만 귀족과 데인족 방식으로 재혼해, 나중에 리샤르 1세와 그의 아들인 리샤르 2세를 보좌한 라울 디브리를 낳았다.그러나 서프랑크 왕국의 국왕 루이 4세는 리샤르 1세를 영주로서 교육해주겠다는 구실을 대고, 그를 섭정 중 한 명인 오스몬드와 함께 라옹에 있는 자기 궁정으로 이송시켰다. 그는 그곳에서 943년부터 945년까지 머물렀고, 루이 4세는 루앙 백국을 잘게 쪼개 프랑크 공작 대 위그에게 베생과 코탕탱 백국을 수여하고, 몽트뢰유 백작 에르뤼앙에게 루앙 관리를 맡겼으며, 플란데런 백작 아르누울 1세에게 루앙 백국의 나머지 영지를 관리하도록 했다. 이에 반감을 품은 베르나르, 라울, 안슬라흐 등은 945년 다른 귀족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에르뤼앙을 살해했고, 리샤르 1세는 오스몬드의 도움으로 탈출한 뒤 반란군과 가세해 노르망디를 통치하겠다고 선언했다.
루이 4세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대 위그와 함께 공세를 개시했다. 루이 4세는 페이 드 코를 공격했고, 대 위그는 가체, 에브뢰를 점령한 뒤 바이외를 포위했다. 노르만인들은 이에 대응해 "바다의 왕"을 칭하던 시그트리그(Sigtrygg)에게 구원을 요청했지만, 시그트리그의 노르드 군대는 투르모드가 이끄는 프랑크군에게 격파되었다. 랭스의 수도자 리샤르에 따르면, 9,000명에 달하는 노르만인[6]이 이 전투에서 죽거나 사로잡혔다고 한다.
뒤동 드 생캉탱(Dudon de Saint-Quentin, 960년 또는 970년 ~ 1026)에 따르면, 섭정 중 한명인 베르나르는 루이 4세와 대 위그 사이를 이간질하기로 했다. 그는 먼저 루이 4세에게 노르만인들이 그에게 항복하겠다고 약속해 적대 행위를 종식했다. 이후 그는 대 위그에게 사절을 보내 자신이 왕에게 속았으며 왕에 대항해 위그를 돕겠다고 약속했다. 서프랑크 왕위를 차지할 야욕이 있었던 대 위그는 이를 믿고 루이 4세를 상대로 전쟁을 단행했다. 또한 베르나르는 최근 노르망디에 상륙했거나 오랫동안 정착한 또다른 바이킹 지도자인 하랄드와 연합했다. 945년 7월 13일, 베르나르와 하랄드의 군대는 코봉 전투에서 프랑크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한 뒤 루이 4세를 생포해 대 위그에게 넘겼고, 대 위그는 루이 4세를 파리에 1년간 감금했다.
946년, 대 위그는 로마왕이자 작센 공작 오토 1세의 압력에 굴복해 루이 4세를 풀어줬다. 이후 루이 4세는 대 위그와 대적해 랭스를 탈환하는 한편, 노르만인들이 대 위그와 연합하는 걸 막기 위해 오토 1세, 플란데런 백작 아르누울 1세, 부르고뉴의 왕 콘라드, 브르타뉴 공작 알란 2세와 연합을 결성했다. 이들은 엡테 강을 건너 루앙을 포위했지만 공략에 실패했고, 이에 역습을 당해 아미앵으로 후퇴했다. 947년, 리샤르 1세는 자기와 화해하려 애쓴 루이 4세에 의해 루앙 백작이자 노르망디의 지배자로 정식으로 인정받았다.
이리하여 노르망디의 지배자로 인정받은 리샤르 1세는 아버지 기욤 1세와 마찬가지로 교회 복원에 힘을 기울였다. 960년 지난날 바이킹에 의해 파괴되었던 생방드리유 수도원에 새로운 수도자들을 보내 파괴된 수도원을 복원하도록 했다. 또한 자기가 태어난 마을인 페캉에 공작의 궁전을 세웠고, 인근에 수도원을 건립했다. 그는 이 수도원에 클뤼니 수도원장 마율을 초대하려 했지만, 마율이 거절하면서 실패했다. 여기에 오랫동안 공석이었던 리지외, 세스, 아브랑챙 교구에 새로운 주교를 세웠고, 바이외, 루앙, 에브뢰, 쿠탕스 교구는 갱신되었다.
954년, 루이 4세가 사망한 뒤 아들 로테르이 서프랑크 왕국의 왕이 되었다. 2년 후인 956년, 프랑크 공작 대 위그가 사망했다. 대 위그의 아들 루이 카페는 당시 나이가 어렸고, 대 위그의 가신이었던 블루아 백작 티보 1세가 섭정했다. 뒤동에 따르면, 티보 1세는 리샤르 1세를 무너뜨릴 계획을 세웠다. 그는 로테르 왕과 그의 어머니 게르베르가, 쾰른 대주교 브루노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다. 로테르와 브루노는 리샤르 1세를 2차례 초대했지만, 리샤르 1세는 함정이라고 여기고 가지 않았다. 플로도아르 드 랭스(Flodoard de Reims, 894 ~ 966)에 따르면, 리샤르 1세는 961년에 로테르 왕이 수아송에서 개최하고 있던 공의회를 방해하려 시도했지만 실패했다고 한다.
그 후 로테르는 티보 1세의 설득을 받아들여 드루에에 군대를 모은 뒤 에브뢰를 점거하고 티보 1세에게 넘겼다. 그 후 여세를 이어가 노르망디 공국의 수도인 루앙을 향해 진군했지만, 962년 리샤르 1세가 루앙 인근에서 역습을 가해 로테르를 격파했다. 그 후 양자간의 전쟁은 수년간 이어졌다. 리샤르 1세는 적과 맞서기 위해 이베리아 반도에서 약탈을 자행한 뒤 돌아오던 바이킹들을 고용해 샤르트르를 파괴했다. 티보 1세는 전세가 불리해지자 에브뢰를 그에게 돌려주는 대가로 평화 협약을 맺었고, 로테르 왕은 965년에 에페 강둑에서 리샤르 1세와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노르만족은 모든 군사 활동을 중단하기로 했고, 로테르는 노르망디에 대한 모든 종주권을 포기하기로 했다.
이렇듯 로테르 왕과 티보 1세를 성공적으로 격퇴하는 한편, 리샤르 1세는 위그 카페와 손잡기로 했다. 960년, 그는 위그 카페의 여동생인 엠마와 결혼했다. 그리고 위그 카페는 968년에 롤로의 손녀이자 리샤르 1세의 사촌인 아키텐의 아델라이드와 결혼했다. 968년 헌장에서 리샤르 1세는 자신을 위그 카페의 봉신이라고 선언했고, 위그 카페가 왕위에 도전하는 걸 도와주기로 했다. 991년, 위그 카페가 멜룬을 포위 공격할 때 앙주 백작 풀크 3세와 함께 그를 도왔다. 그러나 앙주 백작이 낭트와 렌에 지배력을 행사하자, 브르타뉴를 자국의 영향권으로 간주했던 노르망디 공국은 동맹 관계를 뒤집기로 마음먹었다. 리샤르 1세는 블루아 백작 외드 1세와 동맹을 맺었고, 뒤이어 아키텐 공작 기욤 4세, 플란데런 백작 보두앵 4세, 렌 백작 코난 1세와 함께 반 앙주 연합을 결성했다. 그는 동맹을 굳건히 하기 위해 후계자인 리샤르 2세를 코난 1세의 딸 주디트와 결혼시켰고,코난 1세는 자기 아들 조프루아 1세를 리샤르 1세의 딸 하와이즈와 결혼시켰다. 그 후 노르만군은 992년 브르타뉴인들과 함께 코난 1세가 풀크 3세를 상대하는 걸 도왔지만, 풀크 3세가 콩퀴어뤼일 전투에서 승리하고 코난 1세를 사살하는 걸 막지 못했다.
한편, 리샤르 1세와 잉글랜드 왕국과의 관계는 다소 험악했다. 잉글랜드 국왕 애설레드 2세는 리샤르 1세가 자기 왕국을 약탈하는 데인족을 도와준다며 비난을 퍼부었고, 리샤르 1세의 딸인 엠마를 납치하려 했다. 그 후 교황 요한 15세가 전쟁을 막기 위해 특사를 보냈고, 양자는 특사의 중재를 받아들여 991년 3월 18일 각자의 적을 돕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노르망디 공국과 잉글랜드 왕국 사이의 상업 관계가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2.3. 노르망디 공국
2.3.1. 리샤르 2세
996년 11월 21일, 리샤르 1세가 페캉에서 사망하고 아들 리샤르 2세가 제4대 루앙 백작이 되었다. 그는 아직 미성년자였고, 이로 인해 분쟁이 발생했다. 11세기 노르만 연대기 작가 기욤 드 쥬미에쥬(Guillaume de Jumièges, ? ~ 1070)에 따르면, 그가 집권한 직후 농민들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킨 뒤 스스로 통치하기 위해 의회를 결성했다. 리샤르 2세의 삼촌인 라울 디브리[7]가 진압에 착수해 수많은 반군을 살육하고 주동자들의 손과 발을 잘라냈다.또한 기욤에 따르면, 리샤르 1세의 사생아이자 리샤르 2세의 이복형인 이에모아 백작 기욤 리샤르가 리샤르 2세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라울 디브리가 재차 원정대를 이끌고 기욤을 체포했다. 그러나 이에모아 백작의 가신들은 이에 맞서기로 마음먹고, 1001년경 감옥에 갇혀 있던 기욤을 구출했다. 하지만 기욤은 더 이상 항전하길 포기하고 리샤르 2세에게 가서 용서를 구했고, 리샤르 2세는 용서해줬지만 이에모아 백국이 동요할 것을 우려해 이에모아를 돌려주지 않았다. 그 대신, 기욤을 외 백작에 선임하기로 했다.
이렇듯 집권 초기에 분쟁이 벌어졌지만 삼촌 라울 디브리의 활약으로 잘 수습되었고, 리샤르 2세는 1001년경부터 친정을 시작했다. 이후 재위 30년간 공국의 내부 개편을 단행했다. 그는 스스로 초대 노르망디 공작을 자처했고, 노르망디의 가장 중요한 주교단 및 백국인 바이외, 루앙에 형제를 앉혔으며, 이브리, 에브뢰, 모르탕, 이에모아, 외, 브리온을 백국으로 편성하고 백작을 선출했다. 이 백작들은 각 영지에서 자율적으로 통치할 수있었지만, 공작의 뜻에 따라 직위와 영지를 몰수당할 수 있었고, 공작의 권한에서 분리된 권한을 대표단에 의해서만 행사할 수 있었다. 그의 통치가 끝날 무렵, 리샤르 형제들은 5개 백국과 2개 주교직을 보유했다. 또한 리샤르 2세는 백국이 없는 지역에 자작을 세웠다. 이리하여 봉건제가 그의 치세에 노르망디에서 부분적으로 확립되었다.
리샤르 2세는 조부 기욤 1세, 아버지 리샤르 1세 처럼 수도원 복원 사업을 이어갔다. 1001년,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거주지인 페캉에 베네딕도회 수도자이자 이탈리아 수도원 개혁가 굴리엘모 다 볼피아노(Guglielmo da Volpiano, 962 ~ 1031)를 초대했다. 굴리엘모는 동료 수도자 12명과 함께 페캉으로 가서 그곳 수도원을 이끌었으며, 에브뢰의 생토랭 수도원, 몽테빌리에 수도원, 노트르담 드 베르네 수도원의 재건 또는 건설에 기여했다.
또한 리샤르 2세는 서기관이자 고해신부인 뒤동 드 생캉탱에게 자신의 조상들을 주변 영주와 노르망디 귀족들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노르망디 공국을 건설한 도덕적으로 올바른 기됵교 지도자들로 묘사하는 내용의 연대기를 집필하도록 했다. 이것은 노르만인들의 정착을 정당화하기 위해 고안된 선전 작품이었기에 신빙성이 떨어지는 이야기가 많이 실렸지만, 현대 학자들은 노르망디 공국 초기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인정한다.
한편, 리샤르 2세의 초년기 동안 바이킹은 잉글랜드 왕국에 대한 원정을 수행하기 위해 노르망디 정부의 동의에 따라 공국 서쪽을 후방 기지로 사용했다. 1000년경, 잉글랜드 국왕 애설레드 2세는 이들을 뿌리뽑기 위해 노르망디 공국을 향한 원정에 착수했다. 그러나 코탕탱 반도의 레빌에 상륙한 애설레드 2세의 군대는 코탕탱의 자작인 넬 드 생 소뵈르의 역습으로 참패했다. 그 후 성년이 된 리샤르 2세는 잉글랜드 왕국과 동맹을 맺기 위한 협상을 시작한 끝에 1002년 여동생 엠마를 애설레드 2세와 결혼시키기로 했다.
그런데 1002년 11월 13일, 애설레드 2세는 사악한 음모를 계획했다는 이유로 잉글랜드 왕국에 사는 모든 데인족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성 브릭티우스 축일의 학살) 이에 분노한 데인족은 스벤 트베스케그의 지휘하에 1003년, 1004년, 1006년, 1009년에 잉글랜드를 침공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고, 결국 1013년에 잉글랜드 왕국을 정복했다. 애설레드 2세, 엠마 및 그들의 아이들은 노르망디 공국으로 피신해 리샤르 2세의 보호를 받아야 했다. 1014년 스벤 1세가 사망한 뒤 애설레드 2세가 잉글랜드로 돌아왔지만 얼마 안 가 사망했다. 그 후 스벤 1세의 아들인 크누트 대왕이 잉글랜드를 재차 정복한 뒤 엠마와 결혼하고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다. 애설레드 2세와 엠마의 아들인 참회왕 에드워드는 노르망디에 그대로 남았고, 리샤르 2세는 크누트 대왕의 집권을 용인했다.
리샤르 2세는 아버지처럼 카페 왕조를 주군으로 받들고 그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이어갔다. 특히 위그 카페의 뒤를 이어 프랑스 국왕이 된 로베르 2세는 그처럼 교회 개혁에 관심이 많았기에 두터운 친분을 맺었다. 1003~1005년 부르고뉴 공국의 지배권을 놓고 로베르 2세와 부르고뉴 및 마콩 백작 오도 기욤간의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군대를 이끌고 로베르 2세에게 가담해, 로베르 2세가 부르고뉴 공국을 장악하는 데 일조했다. 1006년 5월 30일 페캉에 찾아온 로베르 2세에게 경의를 표했다. 1006년 9월, 플란데런 백작 보두앵 4세가 신성 로마 제국의 영역인 발랑시엔을 점령하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2세는 로베르 2세, 리샤르 2세를 끌어들여 보두앵 4세와 대적했으나 발랑시엔을 끝내 되찾지 못했다.
리샤르 2세는 브르타뉴 공국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당시 브르타뉴 공작이었던 조프루아 1세는 브르타뉴에 강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앙주 백국으로부터 독립하기를 간절히 희망했다. 하지만 아버지 대부터 렌 정권을 지원했던 블루아 백국은 새 백작인 외드 2세가 동쪽 지역으로 관심을 돌렸기에 별다른 지원을 기대할 수 없었다. 이에 노르망디 공작 리샤르 2세와 동맹을 맺기로 마음먹고, 리샤르 2세의 누이인 하와이즈와 결혼하기로 했다. 여기에 더해, 여동생 주디트를 리샤르 2세의 아내로 삼게 함으로써, 양국간의 관계를 두텁게 다졌다.
1008년, 브르타뉴 공작이자 누이 하와이즈의 남편인 조프루아 1세가 로마 순례를 다녀오던 중 알려지지 않은 사유로 사망하자, 조프루아 1세의 두 형제 알란 3세와 에우돈이 공동 공작에 취임했다. 이때 그는 자신의 조카인 두 형제의 대부가 되어줬다. 1009년, 리샤르 2세는 몽생미셸 수도원장 메이너드 2세에게 압력을 행사해 르동의 생소뵈르 수도원으로 밀어내고 힐데베르트 1세를 몽생미셸 수도원의 새 수도원장으로 세웠다.
리샤르 2세는 1005년 이전에 여동생 마틸드를 블루아 백작 외드 2세와 결혼시키고 드뢰 절반을 지참금으로 제공하는 등, 블루아 백작과 평화로운 관계를 구축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녀는 아이를 낳지 못한 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리샤르 2세는 관례에 따라 지참금을 돌려받으려 했지만, 외드 2세는 단호하게 거부했다. 리샤르 2세는 드뢰의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무력을 행사하기로 마음먹고, 1013년 틸리에르 요새를 건설했다. 외드 2세는 멘 백작 위그 3세, 멜룬 자작 갈레랑 1세와 함께 틸리에르 성채가 완공되기 전에 공격했지만 수비대에게 격퇴했다.
1014년, 리샤르 2세는 자기 형제이자 루앙 대주교 로베르에게 세레를 받은 올라프 2세 하랄드손을 사주해 돌을 일시적으로 점령하게 했으며, 브르타뉴 공국에 압박을 계속 가해 양국의 국경을 셀루네 강에서 셀룬 강까지 밀어냈다. 그 후 로베르 2세의 중재를 받아들여 쿠드레에서 블루아 백작 외드 2세와 평화 협약을 맺고, 블루아 백작이 드뢰를 갖고 자신은 틸리에르 및 아브레 강둑을 가지기로 했다.
1026년, 리샤르 2세는 샬롱쉬르손에 포로로 잡혀 있던 사위 부르고뉴 백작 르노 1세를 구출하기 위해 행동에 나서기로 했다. 먼저 샬롱 백작이자 오세르 주교인 위그 드 샬룡에게 그를 석방해달라고 요청했고, 위그가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고 죄수의 경비를 강화하자 아들 리샤르 3세에게 군대를 소집해 그를 응징하도록 했다. 그러나 샬롱 침공이 본격적으로 벌어지기 전인 1026년 8월 19일에 페캉에서 사망했고, 리샤르 3세가 브르타뉴 공작에 선임되었다.
2.3.2. 리샤르 3세와 로베르 1세
리샤르 3세는 제2대 노르망디 공작에 등극한 직후 남동생 로베르 1세의 반란에 직면했다. 이에 군대를 이끌고 팔레스에서 반란군을 포위했고, 로베르 1세는 곧 항복하고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 리샤르 3세는 이에 만족해 동생이 직위와 영지를 유지하도록 해줬다. 그 후 아버지 생전에 명령받은 대로 원정을 속행하기로 마음먹고, 1027년 초 부르고뉴로 진입한 뒤 샬롱으로 접근했다. 11세기 노르만 연대기 작가 기욤 드 쥬미에쥬(Guillaume de Jumièges, ? ~ 1070)에 따르면, 그는 멜리낭드 성을 점령한 뒤 그곳에서 항전했던 기사들과 주민들 상당수를 산채로 불태웠다고 한다. 이후에도 각지를 약탈하던 그는 샬롱 성을 포위했고, 위그 드 샬롱은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그에게 찾아가 사과하고 르노를 풀어줬으며, 담보와 인질을 넘겼다.샬롱 원정을 마치고 귀환한 리샤르 3세는 프랑스 국왕 로베르 2세의 딸 아델과 결혼해 조부 리샤르 1세부터 이어진 카페 왕조와의 우호 관계를 이어갔다. 그는 아델에게 셰르부르 성, 홀무스 성, 브루오툼 성, 쿠탕스 시, 오몬빌, 바르플뢰르, 베르, 세렌세스, 아공, 발로뉴 일대를 수여했다. 그러나 1027년 8월 6일, 그는 돌연 급사했다. 기욤 드 쥬미에쥬에 따르면, 그는 독살당했다고 한다. 몽생미셸 수도원장이자 노르만 연대기 작가 로베르 드 토리니(Robert de Torigni, 1110 ~ 1186)에 따르면, 그를 독살한 자는 남동생인 로베르 1세였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로베르 1세가 형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노르망디 공작을 꿰찬 것만은 분명하다.
1027년 또는 1028년, 노르망디 남부 국경 지역인 벨렘의 영주인 기욤 1세가 로베르 1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로베르 1세는 즉시 군대를 이끌고 알랑송에서 반란군을 포위했다. 반란군은 곧 항복했고, 로베르 1세는 기욤 1세에게 맨발로 걷고, 말 안장을 등에 지고 자기 앞에 나타난 뒤 경의를 표하는 조건으로 용서했다. 이후 비이외의 주교이자 아이브리 백작 위그 디브리가 자기가 노르망디 궁정에서 홀대받는 것에 분개하여 프랑스에서 군인을 모집하는 등 반란을 일으킬 준비를 한다는 첩보가 입수되자, 그는 곧바로 군대를 이끌고 가서 위그가 프랑스에서 돌아오기 전에 아이브리 성앞에 진영을 세웠다. 위그 디브리는 성으로 피난한 신자들의 안전을 위해 그와 협상해야 했고, 1032년까지 노르망디로 돌아오지 않는 조건으로 용서받았다.
한편, 로베르 1세는 즉위 직후 수도원과 대성당으로부터 토지를 빼앗아 젊은 로제 1세 드 몽고메리 등 젊은 추종자들에게 나눠줬다. 노르망디 공작 리샤르 1세의 아들이며, 에브뢰 백작이자 루앙 대주교였던 로베르가 이에 항의하자, 로베르 1세는 군대를 일으켜 에브뢰를 포위했다. 루앙 대주교이자 에브뢰 백작 로베르는 한동안 항전하다가 프랑스 국왕 로베르 2세에게 망명한 뒤 노르망디에 성무 금지령을 내렸다. 많은 성직자와 신도들이 루앙 대주교에게 호응하자, 로베르 1세는 루앙 대주교와 화해하고 그가 백작과 대주교의 책무를 다시 맡는 걸 허용했다.
이후 로베르 1세는 루앙 대주교와 함께 교회 진흥 정책을 실시했다. 앞서 몰수했던 토지들을 도로 수도원과 성당에 돌려줬으며, 기존에 가지고 있는 토지의 영유권을 확인했다. 또한 아버지 리샤르 2세의 정책을 이어받아 세리시라포레 수도원을 건설했고, 고모인 노르망디의 베아트릭스의 설득을 받아들여 몽티빌리에 수도원을 재건하고 수도자들을 수녀로 대체했다. 그의 가신들도 주군을 본받아 수도원을 잇달아 건설했다. 아르케 자작 고슬랭은 1030년 몽스의 성 삼위일체 수도원을 건설했고, 1042년 루앙의 생아망드 수도원을 복원했다. 보몽르로제의 영주인 온프로이 드 비에유는 레 프레오에 수도원을 세웠고, 기사 헤르루인은 리슬 강변에 노트르담 뒤 베크 수도원을 세웠다.
1030년, 로베르 1세는 자기에게 경의를 표하길 거부한 브르타뉴 공작 알란 3세를 응징하기 위해 브르타뉴를 침공했다. 그는 먼저 브르타뉴와 노르망디 국경에 셰루에익 또는 샤루엘 성을 세워서 거점으로 삼은 뒤, 브르타뉴 해안을 황폐화시킨 해군의 지원을 받으며 브르타뉴로 진격했다. 알란 3세는 아브랑챙에서 맞섰지만 큰 손실을 입은 채 격퇴되었다. 이후 루앙 대주교 로베르의 중재하에 몽생미셀 수도원에서 평화 협약을 맺고 로베르 1세와 화해했다.
1031년, 프랑스 국왕 로베르 2세가 사망하고 앙리 1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곧 어머니 아를의 콩스탕스의 지지를 얻어낸 남동생 로베르의 반란에 직면했고, 블루아 백작 외드 2세도 로베르 왕자에게 가세했다. 이에 앙리 1세는 노르망디 공국의 페캉으로 피신했고, 그는 앙리 1세를 돕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일으킨 뒤 삼촌인 모제 드 코르베유에게 지휘권을 맡겼다. 이어진 빌뇌브생조르주 전투에서 반란군을 참패했고, 앙리 1세는 남동생 로베르의 항복을 받아내면서 프랑스 왕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앙리 1세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로베르 1세에게 벡생 지역에 대한 영주권을 수여받았다. 한편, 플란데런 백작 보두앵 4세도 아들 보두앵 5세의 반란으로 권좌에서 밀려나자 로베르 1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로베르 1세는 플란데런으로 진군해 초크 성을 공략했다. 플란데런 귀족들이 이에 겁을 집어먹고 로베르 1세에게 항복하자, 보두앵 5세는 어쩔 수 없이 보두앵 4세에게 권력을 돌려주고 화해하기로 했다.
이 무렵, 노르망디 궁정에서는 잉글랜드 전임 국왕 애설레드 2세와 엠마의 두 아들이며, 크누트 대왕에게 밀려난 에드워드와 앨프리드 왕자가 있었다. 로베르 1세는 잉글랜드에서 추방된 두 사촌을 도와주기로 하고, 크누트 대왕에게 사절을 보내 두 아이에게 왕국을 돌려달라고 요청했다. 크누트 대왕이 단호히 거부하자, 로베르 1세는 노르만 귀족들을 소환하여 잉글랜드를 침공하기 위한 함대를 만들라고 명령했다. 식량, 무기, 병력을 실은 함대는 페캉에 모인 뒤 항해를 시작했지만, 폭풍에 직면하자 저지 섬으로 피신했다가 다시 노르망디로 귀환했다.
1034년, 로베르 1세는 예루살렘으로 순례하기로 마음먹었다. 많은 연대기 작가들은 그가 형제 리샤르 3세를 독살한 것을 참회하려고 순례를 결심했다고 기술했지만, 진위는 불분명하다. 그는 떠나기 전에 귀족들을 페캉에 소집한 후 당시 7살된 어린 아들 기욤을 후계자로 인정해달라고 요청했다. 루앙 대주교 로베르, 지역 주교, 대영주 모두가 기욤에게 충성하겠다고 맹세했다. 사실 많은 귀족은 사생아인 기욤이 후계자가 되는 걸 탐탁지 않게 여겼지만, 로베르 1세의 분노를 살 것이 두려워서 마지못해 따랐다. 그 후 로베르 1세는 프랑스 국왕 앙리 1세의 궁정에 기욤을 맡기고, 브르타뉴 공작 알란 3세를 기욤의 대부로 삼았다.
1035년 초, 로베르 1세는 시종 터틴 고츠, 오돈 스티간드, 드로곤 드 베생 등 귀족 몇 명과 함께 순례를 떠났다. 그는 육로를 통해 로마로 간 뒤, 바닷길로 가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동해 동로마 제국 황제 미하일 4세의 영접을 받았다. 이후 예루살렘에 도착했지만, 귀환 중이던 1035년 7월 2일 니케아에서 병사했다.
2.3.3. 정복왕 윌리엄
2.3.3.1. 어린 공작의 시련기
로베르 1세가 니케아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뒤, 당시 7살이었던 기욤 2세가 큰삼촌인 루앙 대주교 로베르, 프랑스 국왕 앙리 1세의 지원을 받은 덕분에 노르망디 공작이 되었다. 그러나 1037년 3월 로베르 대주교가 사망한 뒤, 많은 노르망디 귀족들은 사생아 출신인 어린 공작에게 복종하길 거부했다. 연대기에 따르면, 여러 친척이 귀족들에게 자기를 공작으로 추대하라고 부추겼다고 한다. 브르타뉴 공작 알란 3세는 기욤 2세의 대부로서 그의 권리를 보호한다는 구실로 노르망디에 개입했지만, 실제로는 자기가 어머니를 통해 노르망디 공작 리샤르 1세의 진정한 후계자라고 자처했다. 그러던 1040년 10월 1일, 노르망디 원정에 착수했던 알란 3세가 비무티에에서 중독이 의심되는 증세를 보이며 사망했다.이후 로베르 3세의 사촌이었던 브리온 백작 질베르 드 브리온(Gilbert de Brionne, 1000 ~ 1040)이 노르망디 보안관을 맡아 기욤 2세을 대신해 노르망디를 다스렸지만, 그 해 3월 루앙 전임 대주교 로베르의 아들인 라울 드 가스(Raoul de Gacé, ? ~ 1051)의 사주를 받은 자객의 습격으로 암살당했고, 라울 드 가스가 노르망디 보안관을 맡았다.이때 기욤 2세의 스승이었던 투르체틸도 살해당했다고 전해진다. 여기에 1040년 또는 1041년에 보드레이유에서 기욤 2세의 침실을 습격한 자들에 의해 노르망디 총독 오스베른 드 크레퐁이 살해되었고, 기욤 2세도 목숨을 잃을 뻔했지만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11세기 연대기 작가 기욤 드 쥬베이쥬( Guillaume de Jumièges, ? ~ 1070)에 따르면, 오스베른을 살해한 범인은 몽고베리 영주 로제 1세의 아들 기욤이었다고 한다. 이후 기욤 2세의 외삼촌인 고티에는 조카를 가난한 사람들의 오두막에 숨겨서 자객이 침입하는 걸 막아줬다.
기욤 2세가 암살 위협에 시달리는 동안, 로베르 1세의 두 형제인 루앙 대주교 모거와 아르퀘 백작 기욤, 노르망디 보안관 라울 드 가스를 비롯한 여러 귀족들이 치열한 정쟁을 벌였다. 연대기에 따르면, 봉건 영주들 사이에 불화가 생겨 피비린내 나는 충돌로 이어졌다. 공작의 소유였던 성 몇 곳이 무단으로 함락되었고, 봉건 영주들은 새로운 성을 무단으로 건설했다. 여기에 전염병과 기근이 창궐하면서 수많은 백성의 목숨을 앗아갔다. 하지만 이런 혼란에도 노르망디의 행정체제는 무너지지 않았다. 봉건 임대료는 공작 재무부에 정기적으로 지불되었고, 주교들은 공작에게 충성을 유지하면서 교회 영지에서 지불해야 할 금액을 그에게 내주었다. 공작 궁정의 주도적인 지위를 차지한 에브뢰 백작 리샤르 데브뢰는 군대를 모아 여러 차례 성공적인 군사 작전을 수행해, 공작의 권위가 붕괴되는 걸 저지했다.
기욤 2세는 매일 밤 장소를 바꿔가며 암살 위협에서 벗어났고, 친구와 친척들의 협조 아래 숨어 지냈다. 그러다가 19살 무렵인 1046년, 크룰리 영주인 하몬 르 덴투(Hamon le Dentu), 생소뵈르 남작 넬 2세(Néel II de Saint-Sauveur), 플레시 영주 그림몰트, 베생 영주 라이눌프, 튜리아르코트의 영주인 라눌프 테숑 등이 부르고뉴 백작 르노 1세와 연합하여 전임 노르망디 공작 리샤르 2세의 딸 아들라이드의 아들인 기 드 브리옹을 노르망디 공작으로 추대했고, 노르망디 공국의 서부 지역인 베생, 코탕탱, 싱글레 일대가 반란에 가담했다. 그들은 바이외에 집결한 뒤 발로뉴에 머물던 기욤 2세에게 자객을 보내 죽이려 했지만, 기욤 2세는 충직한 광대 골레의 고변을 받고 밤에 코탕탱과 베생으 경계인 베이 만을 건넜고, 베생의 소규모 영주 휴베르 드 라이스(Hubert de Ryes)의 도움을 받아 팔레즈 성으로 피신했다.
기욤 2세는 자신의 주군인 프랑스 국왕 앙리 1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앙리 1세는 병사 10,000명을 이끌고 북상한 뒤, 기욤 2세가 이끌고 온 기사 350명과 병사 1,000명과 합세했다. 1047년 8월, 앙리 1세와 기욤 2세 연합군은 캉에서 남동쪽으로 12km 떨어진 발에스듄 평원에서 25.000명에 달하는 반란군과 대면했다.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 반란에 가담한 영주 중 한 명이었떤 라눌프 테숑이 돌연 기욤 2세의 편으로 돌아섰고, 반란군은 얼마 안가 궤멸되어 많은 기사들이 도주하다가 아티스 여울목에서 오르네 강을 건너려 하다가 익사했다.
기욤 2세는 대체로 반란군 지도자들에게 관용을 베풀었고, 상당수 공모자는 성채가 해체되는 걸 지켜본 뒤 추방되거나 많은 노르만족 동포가 살고 있던 이탈리아 남부로 자발적으로 망명했다. 다만 플레시 영주 그림몰트만이 기욤 2세에게 체포된 후 처형되었다. 그 후 기욤 2세는 캉에서 영주들을 소집하여 대규모 회의를 연 뒤, 영주들 간의 사적인 전쟁과 불법적인 요새화를 엄격히 금지했다. 기 드 브리옹은 브리옹 성에서 항전했지만 1050년경 모든 영지를 상실하고 해외로 망명했다. 이로써 기욤 2세는 진정한 노르망디 공작으로 군림했다.
2.3.3.2. 세력 강화
기욤 2세는 발에스듄 전투 승리로 노르망디 공작으로 군림할 수 있었지만, 여전히 그의 자리를 노리는 정적이 곳곳에 도사렸다. 이에 기욤 2세는 입지를 다지기 위해 플란데런 백국의 백작 보두앵 5세의 딸이며, 프랑스 왕 로베르 2세의 외손녀인 플랑드르의 마틸다와 결혼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1049년 10월, 랭스 공의회를 주관하던 교황 레오 9세가 두 사람의 결혼 승인을 거부했다. 사유는 기욤 2세와 마틸다가 먼 친척이라 근친상간이라는 것이었다.레오 9세는 그레고리오 7세의 개혁 이전에 교회를 쇄신하고자 노력한 교황이었으므로, 당연히 원론적 입장에서 근친상간을 반대한 점도 있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레오 9세가 당시 남부 이탈리아에서 급격하게 세력을 키우면서 행패를 일삼던 노르만족에게 반감을 품었기에,[8] 노르만족의 본진인 노르망디의 권세가 플란데런 백국과 결합해 지나치게 강성해지는 걸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교황청의 거부에 부딪혔지만, 1053년 이전에 외에서 기욤 2세와 마틸다의 결혼식이 강행되었다. 그 후 부부는 병원 4개와 수도원 2개를 건설하는 등 교회의 인정을 받고자 노력했다. 그럼에도 레오 9세는 죽을 때까지 반대했고, 이후 여러 교황도 반대했으나 결국 1059년 교황 니콜라오 2세가 승인했다.
1051년 3월 26일, 멘 백작 위그 4세가 사망했다. 당시 위그 4세와 첨예하게 대립했던 앙주 백작 조프루아 2세 마르텔은 이 때를 틈타 멘 백작령의 중심지인 르망 주민들을 꼬드겨 자신에게 복종하도록 하고, 뒤이어 멘 백작령을 석권했다. 이후 북동쪽 방향으로 진군하여 동프롱과 알랑송 성채를 점령했다. 이제 앙주 백작령이 노르망디 국경까지 이르자, 이에 위협을 느낀 기욤 2세는 조프루아 2세에 대항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앙주 백작을 물리치기 위해 군대를 일으킨 프랑스 국왕 앙리 1세가 멀헤른 성을 포위할 때 지원군을 제공했으며, 조프루아 2세가 앙리 1세에 맞서기 위해 군대를 돌린 틈을 타 1051년 말에 알랑송과 동프롱을 기습 공략했다.
1052년, 프랑스 국왕 앙리 1세는 노르망디 공작의 권세가 너무 강해졌다고 판단하고, 조프루아 2세 마르텔과 화해하기로 했다. 여기에 루앙 대주교 모거가 동생인 탈루 백작 기욤을 부추겨서 기욤 2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게 했고, 기욤 2세의 권력이 강해져서 자기들이 누리던 자치권이 침해받고 있다고 여기던 일분 노르만족 귀족들이 대거 가세했다. 기욤 2세는 1053년 내내 반란을 일으킨 귀족들을 토벌하기 위한 군사 작전을 수행했다. 1054년 2월, 노르만 반군의 구원 요청을 받은 앙리 1세가 노르망디를 향한 공세를 단행했다. 앙리 1세는 에브뢰 백국을 침공했고, 이복 형제인 오도가 이끄는 별동대는 노르망디 동부를 침공했다.
기욤 2세는 군대를 둘로 나눈 뒤, 자기는 본대를 이끌고 앙리 1세에 대적했고, 외 백작 로베르, 롱그빌 영주 고티에 1세 기파르, 모르테메르의 로제, 기욤 드 바렌이 이끄는 별동대는 오도와 대적했다. 롱그빌 영주 등이 이끄는 별동대는 모르테메르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뒀고, 앙리 1세의 이복 형제 오도는 생포되었다. 당시 기욤 2세와 대치 중이던 앙리 1세는 이 소식을 듣자 경악하여 나머지 군대를 이끌고 파리로 철수했다. 이후 기욤 2세에게 반기를 들었던 노르만족 영주들은 항복한 뒤 모조리 추방당했다. 다만 퐁티외 백작 기는 2년간 투옥 생활하다가 기욤 2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풀려났다. 또한 기욤 2세는 리지외에서 열린 공의회에서 루앙 대주교 모거의 폐위를 선언했다. 모거는 채널 제도로 피신했다가 1055년에 그곳에서 사망했다. 그리고 기욤 드 탈루의 영지는 압수되어 루앙 백국의 일부가 되었고, 기욤은 불로뉴로 망명한 뒤 더 이상 기욤 2세에게 대항하지 않았다.
1054년, 기욤 2세는 멘을 침공해 약탈을 자행했다. 1057년, 앙주 백작 조프루아 2세와 프랑스 국왕 앙리 1세는 다시 노르망디를 침공해 오른 강 서쪽의 노르망디 공국 영토를 약탈했다. 그러나 그들이 이듬해에 바라빌에서 디베 강을 건너던 중, 기욤 2세가 이끄는 노르만군의 기습을 받으면서 후위대가 완전히 궤멸되었다. 1058년, 기욤 2세는 드뢰 백국을 침공하여 틸리에르쉬르아브르와 티메르를 함락했다. 이에 앙리 1세는 1058년 6월 29일에서 8월 15일 사이에 프랑스군을 이끌고 티메르를 탈환하려 했다. 포위 공격은 이듬해까지 이어졌고, 발루아 백작 랄프 4세와 블루아 백작 티보 3세도 가세했다. 그러나 티메르가 좀처럼 함락되지 않자, 앙리 1세는 1059년 5월 23일 아들 필리프 1세를 공동 왕으로 선임한 뒤 기욤 2세와 협상했다. 그러나 협상은 좀처럼 이뤄지지 않았고, 앙리 1세는 계속 공성전을 이끌었지만 1060년 8월 4일에 병사했다. 그 후 티메르는 새 국왕 필리프 1세에게 항복한 뒤 파괴되었고, 노르만인들은 1061년 인근에 샤퇴뇌프앙티메레 요새를 건설했다.
1056년, 기욤 2세는 모르탱 백작 기욤 드 제를랑이 반역 음모를 꾸몄다고 비난하고 그를 추방한 뒤, 이부 형제인 로베르에게 모르탱을 넘겨줬다. 여기에 외 백작 기욤 1세의 둘째 아들인 기욤 드 부샥 역시 반역을 꾸미고 있다는 혐의를 적용해 추방했다. 이후 귀족들은 기욤 2세에게 다시는 대들 엄두를 내지 못했고, 공작 직속의 노르망디 행정체계가 완성되었다. 기욤 2세의 가장 중요한 관리들은 자작이 되었고, 이 직위는 세습되었다. 또한 그는 교회 업무에 많은 관심을 가져 클뤼니 운동의 정신에 따라 교회 기관을 개혁하는 데 힘을 기울였으며, 주교와 수도원장의 임명에 간섭하는 걸 자제해 지역 고위 성직자들과 교황청의 호감을 이끌어냈다.
이렇게 노르망디의 지배권을 굳건히 하고 전쟁에서 승승장구하는 동시에, 기욤 2세는 이웃 영주들과 인맥을 다지려 노력했다. 1053년 여동생 아들레이드와 결혼했던 폰티유 백작 앙게랑 2세가 사망하자, 기욤 2세는 노르망디의 가신이었던 오말레 백작령을 빼앗아 아들레이드에게 양도한 뒤 불로뉴 백작 외스타슈 2세의 남동생인 렌 백작 랑베르 2세와 아들레이드의 결혼을 주선했다. 랑베르 2세는 플란데런 백작 보두앵 5세의 측근이었기에, 학자들은 이 결혼이 플란데런 백국과의 관계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추정한다. 1054년 랑베르 2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3세와 대적하다가 릴 공방전 도중 사망하자, 기욤 2세는 트루아 및 상파뉴 백작 외드 3세 드 블루아와 결혼시켰다. 외드 3세는 기욤 2세와 절친한 사이가 되었고, 나중에 윌리엄이 잉글랜드 원정을 단행했을 때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060년, 기욤 2세는 드뢰에서 프랑스의 새 국왕 필리프 1세에게 경의를 표했다. 이 무렵 앙주 백작 조프루아 2세가 사망했고, 멘 백작위를 놓고 분쟁이 벌어졌다. 기욤 2세는 위베르 2세가 멘 백작이 되도록 주선한 뒤 그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아냈으며, 위베르 2세의 여동생인 마르그리트를 자신의 장남인 로베르와 약혼시켰다. 그러나 1062년 위베르 2세가 사망한 후, 멘 귀족들은 기욤 2세를 상대로 반기를 들었고, 앙주 백작 조프루아 3세가 이들을 지원해 아미앵과 벡생 백작 고티에 3세가 멘 백작이 되도록 했다. 기욤 2세는 이에 대응해 1063년 멘 백국을 공격하여 각지를 황폐화하고 르망을 공략했으며, 고티에 3세와 그의 아내 비오타를 생포했다. 뒤이어 마엔 시를 포위하여 함락한뒤 초토화했다. 고티에 3세와 비오타는 팔레즈 성에 투옥되었고, 같은 해 불분명한 상황에서 사망했다. 여기에 기욤 2세의 장남 로베르와 약혼했던 마르그리트도 급사하자, 기욤 2세는 스스로 멘 백작을 칭했고 나중에 아들 로베르에게 물려줬다.
1064년, 기욤 2세는 자기에게 경의를 표하길 거부한 브르타뉴 공작 코난 2세를 견제하기 위해 콩부르 영주인 리왈론 1세 드 돌이 반란을 일으키도록 부추겼다. 코난 2세는 군대를 이끌고 리왈론 1세를 돌 성채에서 포위했지만, 기욤 2세가 역습을 감행하는 바람에 격퇴된 뒤 렌에 이어 디낭까지 추격당했다. 그러나 기욤 2세는 브르타뉴에 너무 깊숙이 진군했다가 보급로가 끊어지는 바람에 병사들이 기아에 시달리자 결국 노르망디로 철수해야 했다.[9] 그 후 코난 2세는 가신들의 지원을 받아 돌을 점령하고 리왈론을 추방했다.
2.3.3.3. 잉글랜드 원정
기욤 2세는 잉글랜드 국왕인 참회왕 에드워드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그는 에드워드 왕의 어머니인 노르망디의 엠마의 조카였으며, 에드워드는 지난날 크누트 대왕이 잉글랜드를 정복했을 때 노르망디 궁정에 망명하여 25년간 지내기도 했다. 리지외 대주교이자 <노르만 연대기>의 저자인 기욤 드 푸아티에(Guillaume de Poitiers, 1020/1027 ~ 1087/1090)에 따르면, 에드워드는 기욤 2세를 형제나 아들처럼 사랑했기 때문에 기욤 2세를 상속자로 지명했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사료에는 이를 뒷받침하는 기록이 없어서 교차검증되지 않기에, 학자들은 기욤 드 푸아티에가 기욤 2세가 잉글랜드를 정복하는 걸 정당화하려고 꾸며낸 이야기로 추정한다. 다만 에드워드가 노르만인들에게 지극히 우호적인 태도를 보인 건 분명하다. 그는 잉글랜드 왕국을 통제하는 강력한 앵글로색슨족과 데인족 출신 귀족들에 맞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노르만 기사와 성직자들을 잉글랜드로 불러들여 높은 지위와 토지를 수여했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나중에 앵글로색슨-데인족 귀족의 지도자 고드윈 백작의 압력에 굴복하여 노르만인들을 궁정에서 추방했다.1066년 1월 5일, 참회왕 에드워드가 직접적인 상속인을 지명하지 않은 채 사망했다. 기욤 드 푸아티에에 따르면, 에드워드는 1064년에 죽음이 다가오고 있음을 감지하고 가장 강력한 가신인 해럴드 고드윈슨을 기욤 2세에게 보내 잉글랜드 왕위 계승자로서 충성을 맹세하도록 했다. 그러나 해럴드는 도중에 폰티외 백작 기 1세에게 생포된 뒤 기욤 2세 앞으로 끌려왔다. 기욤 2세는 그를 풀어줬고, 해럴드는 증인 앞에서 자발적으로 성물 앞에서 기욤 2세를 영국 왕위 계승자로 인정하고 그를 지원하기 위해 모든 조치를 취할 것을 맹세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대의 많은 역사가들은 이 기록의 신빙성이 별로 없다고 보며, 기욤 2세가 헤럴드 2세에게 위증 혐의를 뒤집어 씌워서 그를 타도한 걸 정당화하고자 이야기를 꾸며낸 거라고 추정한다.
참회왕 에드워드 사후, 잉글랜드 귀족들은 해럴드 고드윈슨을 잉글랜드 국왕 해럴드 2세로 추대했다. 해럴드는 교회의 축복을 받으며 왕관을 쓰고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다. 대관식은 켄터베리 대주교 스티건드가 집전했는데, 그는 당시 교황 알렉산데르 2세와 첨예하게 대립하던 터라 교황청으로부터 공식적으로 필리움을 받지 못했다. 따라서 헤럴드 2세의 대관식은 교회법으로 볼 때 불법으로 간주될 여지가 있었고, 기욤 2세는 바로 이 점 역시 헤럴드 2세의 정통성을 공격하는 무기로 적절하게 활용했다.
기욤 2세는 헤럴드 2세를 왕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자신은 선왕 에드워드가 살아있을 때 왕위를 약속했다고 주장하면서 잉글랜드 왕위에 올라야 한다고 선언했다. 교황 알렉산데르 2세는 헤럴드 2세가 성물 앞에서 한 맹세를 어겼으니 자기가 왕위에 오르는 걸 지지해달라는 기욤 2세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이후 기욤 2세는 노르만 귀족들을 대거 소환했고, 프랑스 북부의 많은 기사들도 그의 높은 명성에 경도되어 군대에 가세했다. 노르만인들은 기욤 2세 군대의 1/3 이하를 구성했고, 나머지는 멘, 아키텐, 플란데런 백국 및 프랑스에서 왔다. 그 결과, 기욤 2세는 1066년 8월까지 약 7,000명에 달하는 잘 무장된 군대를 보유했다. 기욤 2세는 영국 해협을 한 번에 건너기 위해 가능한 한 많은 선박을 고용하거나 건조했다.
당시엔 북풍이 심해서 기욤 2세가 좀처럼 건너지 못하고 있었는데, 결과적으로는 그 사이에 노르웨이의 하랄 3세가 먼저 잉글랜드를 침공했다가 해럴드 2세가 이를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에서 물리쳐 유력한 경쟁자 하나는 저절로 줄고, 주적은 힘이 빠져 버리는 행운으로 다가왔다. 여기에 해럴드 2세가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를 마치자마자 풍향이 바뀌었고, 기욤 2세는 아내 마틸다에게 노르망디 섭정을 맡긴 뒤 1066년 9월 27일 솜 강 어귀에서 배를 타고 영국 해협을 건너서 다음날 아침 페벤지 시 인근 잉글랜드 해안에 상륙했다. 그 후 기욤 2세는 헤이스팅스로 진군했고, 그곳에서 나무로 만든 성채를 짓고 적군이 오기를 기다렸다.
해럴드 2세는 기욤 2세가 상륙했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남쪽으로 달려갔다. 요크에서 헤이스팅스까지 9일만에 질주한 앵글로색슨군은 10월 13일 기욤 2세의 진지에 접근했다. 10월 14일 이른 아침, 양군은 헤이스팅스 전투를 치렀다. 전투는 하루 종일 지속되었다. 궁수들의 결투로 군대의 승패가 결정되지 않은 후 노르만 병사들은 도보로 공격을 시작했고 기병대가 뒤따랐다. 그러나 언덕 위에 포진하여 방패벽을 형성한 앵글로색슨군은 끝까지 버텨냈고, 노르만군은 점점 밀려났다. 여기에 기욤 2세가 타던 말이 투창에 맞아 쓰러지면서 윌리엄이 전사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노르만인들이 동요했다. 이에 기욤 2세은 새 말로 갈아탄 뒤 투구를 벗고 최전선을 돌면서 장병들에게 맨 얼굴을 보임으로써, 자기가 살아있음을 입증했다.
첫번째 공격이 무위로 돌아간 뒤, 기욤 2세는 잠시 휴식을 취한 후 2번째 공격을 개시했다. 앵글로색슨군이 이번에도 굳건히 버티자, 노르만인들은 후퇴하는 척했다. 이걸 본 앵글로색슨족 일부가 추격했다가 노르만 기병대의 역습으로 학살되었다. 이리하여 앵글로색슨군의 대열이 흐트러지던 그 때, 눈 먼 화살이 해럴드 2세의 눈에 꽂혔고, 해럴드 2세는 낙마했다. 그 후 기욤 2세는 기병대를 재차 파견했다. '바이외 태피스트리'에 따르면, 볼로뉴 백작 외스타슈 2세, 위그 2세 드 몽포르, 위그 드 퐁티외, 고티에 지파드 등 기욤 2세에게 신임받는 4명의 기사가 낙마한 해롤드에게 달려들어 해치웠다. 다른 전승에 따르면, 기욤 2세 본인이 해럴드 2세를 죽였다고 한다. 해럴드 2세가 정확히 누구에게 살해된 건지는 분명하지 않다. 어쨌든 해럴드 2세가 전사한 뒤, 앵글로색슨군은 전의를 완전히 상실하고 패주했다.
잉글랜드 성직자 및 일부 영주들은 헤이스팅스 전투 이후에도 항전을 이어가기로 하고, 에드먼드 2세의 손자이며 망명자 에드워드의 아들인 에드거 2세를 새 국왕으로 옹립했다. 이에 기욤 2세는 공세를 이어가 도버와 켄트 일부를 확보하고, 잉글랜드 왕실 재무부가 있는 캔터베리와 윈체스터를 차지했다. 이후 런던을 남쪽과 서쪽에서 압박하면서, 가는 길에 있는 모든 것을 불태웠다. 12월 초 노르만군이 윌리어퍼드에서 탬스 강을 건너자, 캔터베리 대주교 스티건드가 귀순했고, 뒤이어 수많은 앵글로색슨족 영주와 귀족들이 귀순했다. 결국 에드거 2세도 1066년 12월 초 런던에 입성한 기욤 2세에게 항복했다. 기욤 2세는 1066년 크리스마스에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정식으로 잉글랜드 왕 윌리엄 1세로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이때부터 잉글랜드 왕은 노르망디 공작을 겸하면서 프랑스 왕의 신하가 되었다.
2.3.3.4. 돌 전투의 패배와 장남 로베르의 반란
그 후 잉글랜드 북부에서 연이어 일어난 반란을 혹독하게 진압하고 외세의 침공에 맞서는 것 외에는 잉글랜드에 별로 들리지 않고 노르망디에서 통치를 행사하던 윌리엄 1세는 1075년 브르타뉴 공작 호엘 2세가 팡티에브르 백작 에우돈의 아들인 조프루아 1세 드 팡티에브르, 렌백작 조프루아 그레노나트, 포르호에트 영주이자 렌 자작 에우돈 1세의 반란에 직면해 자신에게 지원을 호소하자 즉시 응했고, 호헬 2세는 윌리엄 1세의 도움을 받아 반란군을 상대로 우세를 점했다. 그러나 1076년 9월, 프랑스 국왕 필리프 1세가 돌 성채를 포위하던 윌리엄을 기습 공격해 격파했다. 윌리엄은 막대한 손실을 입고 노르망디로 퇴각했고, 호엘 2세는 윌리엄의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되자 점점 밀려나다가 1077년 반군에게 생포되었다. 하지만 그의 아들 알란 4세가 반란군을 물리친 덕분에 곧 풀려났다. 브르타뉴의 반란은 1079년 팡티에브르 백작 에우돈이 사망한 뒤 양자가 화해하기로 하면서 종결되었다.돌에서의 참패는 언제나 승리를 거듭했던 윌리엄에게 뼈아픈 타격을 가했다. 그는 이로 인해 명성에 손상을 입었고, 정적들은 이를 틈타 그를 약화하려 애썼다. 1076년 말, 앙주 백작 풀크 4세가 멘을 침공했다. 윌리엄은 원군을 보내 이를 저지하게 했지만, 예전과는 달리 풀크 4세를 압도하지 못했다. 1077년, 아미앵, 베생, 블루아 백작 시몽이 코다트 수도원으로 은퇴하자, 필리프 1세가 베생을 별다른 반대 없이 자기 영지로 가져갔다. 이에 윌리엄은 더 이상 필리프 1세와 싸우는 건 무익하다고 여기고 엡테 강변에서 평화 협약을 체결했고, 1078년에는 앙주 백작과 평화 협약을 맺었다. 이제 모든 시련이 끝나는 듯 했지만, 1년 후 가장 큰 시련이 닥쳤다.
윌리엄의 장남 로베르는 1063년 아버지에 의해 멘 백작으로 즉위했고, 공식적으로 후계자로 인정받았지만, 별다른 권력을 갖지 못했다. 1073년 윌리엄이 멘을 다시 정복했을 때, 로베르는 원정대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후 로베르는 아버지가 자기에게 충분한 영토를 맡기지 않아 자신의 재정적 필요를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사실에 좌절했고, 자기에게 통치할 기회를 주지 않는 아버지를 원망했다. 결국 그는 1078년 로베르 2세 드 벨렘, 기욤 드 베르퇴유, 로저 피츠리처드와 함께 반란을 일으킨 뒤 노르망디 공국의 수도 루앙을 장악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티메레 성에 파산해 그곳에서 농성했다. 윌리엄은 성을 포위해 공성전을 벌인 끝에 공략했고, 로베르는 추종자들과 함께 필리프 1세의 궁정으로 피신했다. 필리프 1세는 로베르가 강력한 군대를 모으는 걸 도왔고, 노르망디 국경지대인 제르베로이 요새를 넘겨줬다. 이후 로베르는 그곳을 거점으로 삼고 아버지에 대적했다.
에드먼드 에반스 작, <아버지에게 상처를 입힌 로베르 커트호즈>, 1864.
1079년 1월, 윌리엄이 제르베로이 성을 포위했다. 이에 로베르는 극비리에 성에서 출격해 포위군을 습격해 많은 병사를 사살했다. 연대기 작가 우스터의 존(John of Worcester, ? ~ 1140)에 따르면, 로베르는 전투 도중에 아버지의 팔에 상처를 입힌 뒤, 아버지의 목소리를 뒤늦게 인식하고 말에서 내린 뒤, 자기 말을 타고 떠나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현대의 많은 학자들은 이 기록은 실제로 벌어진 일이라기 보다는 다윗이 아돌람 굴에서 사울을 살려준 성경의 일화에서 착안해 창조한 것이라고 추정한다. 아무튼 윌리엄은 3주간 포위 공격을 퍼부었지만 공략에 실패해 루앙으로 후퇴했고, 로베르는 플란데런 백국으로 이동했다. 오더릭 바이탈에 따르면, 자기 아들들이 로베르의 반란에 가담한 것에 심적 부담을 느낀 노르만 대귀족들은 윌리엄에게 로베르와 화해하고 그의 동료들을 사면해달라고 요청했다. 윌리엄은 이를 받아들이기로 했고, 양자는 1년간 협상한 끝에 1080년 4월 12일에 화해했다. 윌리엄은 로베르를 상속인으로 확인했고, 로베르는 삼촌인 오돈 드 바이외와 함께 잉글랜드를 통치할 책무가 주어졌다.
2.3.3.5. 말년
1082년, 장남 로베르가 윌리엄과 갈등을 겪은 끝에 노르망디를 떠나 프랑스 국왕 필리프 1세의 궁정에 피신했다. 이후 1083년 여름 오랫동안 윌리엄의 충실한 왕비로서 여러 자녀를 낳고 훌륭히 보좌해줬던 마틸다가 중병에 걸렸고, 1083년 11월 2일에 캉에서 사망했다. 마틸다의 유언에 따라 잉글랜드에 있는 그녀의 많은 땅은 막내 아들 헨리에게 넘어갔고, 왕비의 관은 캉에 있는 성 삼위일체 수녀원에 넘겨졌다. 윌리엄은 오래도록 함께 했던 아내를 잃은 상실감에 빠졌고, 전쟁에 더 이상 뛰어들고 싶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윌리엄의 부하이며 보몽과 멘의 자작인 위베르 드 보몽오멘이 생트수잔에서 1083년부터 3년간 생트수잔 성에서 멘의 반란군을 이끈 위베르 드 생트 수잔(Hubert de Sainte-Suzanne)에게 여러 차례 포위당했고, 알란 르 루가 지휘하는 노르만군은 이를 구하려 했지만 위베르에게 여러 차례 패배했다. 많은 기사들의 죽음에 낙담한 윌리엄은 마침내 1086년 4월 21일 위베르에게 보몽과 프레네이 일대를 넘겨주고 평화 협약을 맺었다.1086년, 윌리엄은 필리프 1세에 대항하기 위해 딸 콩스탕스를 브르타뉴 공작 알란 4세와 결혼시켰다. 1087년 7월, 윌리엄은 프랑스의 망트를 침공해 그곳을 불태웠다. 그러나 그곳에서 병을 얻거나 부상을 입어 수도 루앙으로 돌아갔고, 루앙의 성문에 있는 생 제르베 수도원에 며칠간 누워 있다가 1087년 9월 9일에 사망했다. 이때 그는 죽기 직전에 장남인 로베르를 용서하고 노르망디 공국을 물려주겠다고 밝혔고, 둘째 아들 윌리엄에게 잉글랜드 왕위를 물려주며, 셋째 아들 헨리에게 많은 돈을 주겠다고 밝혔다. 마지막으로, 그는 공공 질서를 어지럽히지 않겠다고 약속한 모든 죄수를 석방하라고 명령했는데, 그 중엔 5년간 루앙 탑에 갇혀 지냈던 이부형제 오돈도 포함되었다.
2.3.4. 로베르 2세
2.3.4.1. 윌리엄 2세와의 첫 번째 분쟁
윌리엄 1세 사후, 셋째 아들 윌리엄 2세는 서둘러 잉글랜드로 돌아간 뒤 윈체스터의 왕실 재무부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했다. 그 후 교회의 권리를 옹호하고 모든 일에서 캔터베리 대주교의 조언을 따르겠다고 약속한 끝에, 켄터베리 대주교 랑프랑크의 대관식 집전을 통해 잉글랜드 국왕으로 등극했다. 그러나 노르만 귀족들은 영국 해협을 사이에 둔 잉글랜드와 노르망디 양쪽에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데 동시에 두 명의 주군을 섬겨야 하는 걸 몹시 껄끄러워했고, 윌리엄 1세 생전에 윌리엄 2세를 잉글랜드 국왕으로 세우겠다는 언질도 없었는데 갑자기 아버지의 유언이 있었다고 주장하며 대관식을 갑작스럽게 감행한 처사에 불쾌해 했다. 그들은 1066년 잉글랜드 원정 때 윌리엄 1세의 후계자로서 충성을 서약한 대상인 로베르를 잉글랜드와 노르망디 공국의 유일한 군주로 받들기로 마음먹었다.1087년, 지난날 윌리엄 1세에게 체포되어 5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로베르에게 풀려난 바이외 주고 오돈이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그는 그 해 크리스마스에 윌리엄 2세의 궁정에 참석한 뒤, 잉글랜드 영지와 켄트 백작이라는 칭호를 돌려받았다. 그러나 그는 로베르를 유일한 군주로 받들기 위해 반란을 일으키기로 마음먹고, 노섬브리아 백작 로버트 드 모브레이, 노퍽과 서퍽의 보안관 로저 비고트, 러스터셔와 햄프셔 보안관이자 대지주인 휴 드 그랑메닐, 런던, 미들섹스, 에식스, 하트퍼드셔 보안관이자 런던 탑 순경인 조프루아 드 맨더빌 등과 함께 거사를 모의했다. 당시 잉글랜드에서 가장 부유하고 영향력이 강한 거물 10인 중 윌리엄 드 워렌, 앨런 더 레드, 휴 다브랑슈 만이 윌리엄 2세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고, 슈루즈버리 백작 로저 2세 드 몽고메리를 비롯한 거물 7명은 오돈과 함께 로베르를 받들기로 했다. 로베르 역시 잉글랜드 침공을 위해 함대를 해안지대에 집결했다.
1088년 4월 부활절, 귀족들은 왕의 호출에 응하지 않고 바이외 주교 오돈의 지도하에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은 각자의 성채의 방어력을 강화하면서, 노르망디에서 올 지원군을 기다렸고, 오돈은 런던과 켄터베리 사이에 위치한 로체스터에 군대를 집결했다. 여기에 불로뉴 백작 외스타슈 3세와 로저 2세 드 몽고메리의 아들들과 함께 노르망디에서 파견된 선봉대가 오돈과 합세했다. 윌리엄 2세는 이에 맞서 런던에서 군대를 소집하면서, 전국에 모든 불공정한 세금을 폐지하고 공정하게 통치할 것이며, 평민들이 숲에서 나무를 베고, 짐승을 사냥하는 걸 허용하겠다고 약속해 호응을 이끌어냈다.
그 후 윌리엄 2세는 군대를 이끌고 톤브리지를 신속하게 점령했고, 오돈과 오돈의 동생이자 모르탱 백작 로베르가 피신한 펜버시 성을 포위했다. 로베르가 파견한 구원군은 잉글랜드 함대에 의해 차단되었고, 펜버시 수비대는 6주간 공방전을 벌인 끝에 굶주림을 버티지 못하고 항복했다. 뒤이어 로체스터도 함락되자, 반란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항복했다. 많은 반란군은 목숨을 건졌고, 그 중 많은 이가 윌리엄 2세의 용서를 받고 영지를 누릴 수 있었다. 반면 오돈 주교는 잉글랜드 영지를 몰수당하고 잉글랜드에서 영원히 추방되었다.
한편, 로베르와 윌리엄 2세의 동생인 헨리는 아버지가 사망한 뒤 3천 파운드를 바치는 대가로 코탕탱 백작이라는 칭호를 로베르에게서 받아냈다. 그 후 헨리는 어머니가 물려준 글로스터셔와 버킹엄셔의 영지를 얻기 위해 잉글랜드로 갔다. 그러나 윌리엄 2세는 이미 반란을 진압하는 데 도움을 준 로버트 피츠하몬을 켄트 보안관으로 선임해 그 땅을 다스리도록 했고, 헨리는 빈손인 채 로베르 드 벨렘과 함께 노르망디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노르망디로 쫓겨난 오돈 주교는 로베르의 고문이 된 뒤 헨리와 로베르 드 벨렘을 체포하라고 권유했다. 그는 로베르 드 벨렘이 지난날 윌리엄 1세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자기가 소유한 모든 성에서 윌리엄 1세가 배치해둔 공작 소속 부대를 쫓아낸 전적이 있다는 걸 상기하면서, 헨리와 로베르 드 벨렘이 윌리엄 2세와 손잡고 그에 대항하여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게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로베르는 이에 설득되어 헨리와 로베르 드 벨렘이 배에서 내리자마자 체포했다. 그 후 헨리 왕자는 바이외에 감금되었고, 로베르 드 벨렘은 뇌이레베크로 보내졌다. 헨리는 곧 풀려났지만, 로베르 드 벨렘은 1년 이상 감금되었다.
아들 로베르 드 벨렘이 감금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슈루즈버리 백작 로저 2세 드 몽고메리는 즉시 노르망디로 가서 자기가 소유한 모든 성에에 로베르 공작에 맞서 대항할 준비 태세를 갖추라고 명령했다. 이에 오돈 주교는 로베르 공작에게 로베르 드 벨렘의 모든 성을 무력으로 점령하라고 사주했고, 로베르 공작은 이를 받아들여 군대를 일으켜 공세를 개시했다. 그는 먼저 발롱을 공격해 상당한 손실을 입은 끝에 함락했다. 뒤이어 생세네리 성을 포위했지만, 수비대가 악착같이 저항하면서 더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다가 생세네리 수비대가 식량이 바닥나 굶주림에 시달린 끝에 항복했지만, 막대한 손실을 입은 것에 분노한 로베르 공작은 수비대 지휘관 로베르 카스텔란을 실명형에 처했고 수비대 장병들을 신체 절단형에 처했다.
이후 로베르 공작은 더 이상 로베르 드 벨렘의 성을 점령하는 시도를 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군대를 해산한 뒤 루앙으로 돌아갔다. 그 후 로저 2세 드 몽고메리가 보낸 사절로부터 아들을 풀어달라는 요청을 받자, 로베르 2세는 이에 따르기로 했다. 1089년, 멘 백작령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 로베르는 이를 진압할 군대를 마련하는 데 애를 먹자, 앙주 백작 풀크 4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풀크 4세는 에브뢰 백작 기욤의 조카 베르트라다 드 몽포르가 자신과 결혼하고, 윌리엄 1세의 삼촌이었던 랄프 드 가스가 소유했던 땅을 자기에게 양도하는 조건으로 수락했다.
한편, 로베르는 통치 초기에 프랑스 왕의 영토 근처에 위치한 아이브리 성을 기욤 데브뢰의 조카인 기욤 드 브레퇴유에게 하사했고, 그 대가로 전 카스텔란인 로저 드 보몽에게 브리온 성을 하사했다. 하지만 아이브리 성은 곧 아셀린 고엘의 소유로 넘어갔다. 아셀린 고엘은 증조부 때부터 대대로 물려받은 아이브리 성을 자신의 유전적 소유물로 여기고 있었기에, 로베르 공작이 자기를 정당한 소유자로 임명하기를 바라며, 아이브리 성을 로베르에게 넘겨줬다. 그러나 로베르는 기욤 드 브레퇴유에게 1,500 리브르를 받고 아이브리 성을 판매했다. 이에 격분한 아셀린 고엘은 반란을 일으켰고, 1091년 2월에 기욤 드 브레퇴유를 체포했다. 여기에 로저 드 보몽의 아들인 로베르 드 멜룬도 로베르 공작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지만, 로베르 공작은 로베르 드 멜룬을 체포한 뒤 로저 드 보몽에게 넘겼던 브리온 성을 클레어 가문의 대표인 로저 드 비엔페에게 넘겼다. 로저 드 보몽은 로베르 공작의 궁정에 찾아가서 막대한 돈을 넘기고 나서야 아들이 풀려나게 할 수 있었다.
얼마 후, 로베르 공작은 브리온 성을 로베르 드 멜룬에게 돌려주기로 했다. 로저 드 비엔페는 이에 반발해 브리온 성을 넘겨주길 거부했지만, 로베르 공작은 로저 드 보몽과 함께 공세를 개시해 브리온 성을 빠르게 접수했고, 로베르 드 멜룬에게 클레어 가문으로부터 빼앗은 영지를 넘겨줬다. 한편, 랄프 드 콘테스와 기욤 데브뢰 사이에도 전쟁이 벌어졌다. 랄프는 로베르 공작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하자 잉글랜드 국왕 윌리엄 2세에게 개입해달라고 청원했다.
이렇듯 노르망디에서 잇달아 분란이 터졌지만, 로베르는 이를 수습하는 데 애를 먹었다. 이에 대해 오더릭 바이탈은 그가 권력을 잡은 순간부터 무척 방탕하고 나태한 모습만 보였다고 기술했다. 이 주장은 20세기 초반까지 널리 받아들여졌지만, 현대 학자들은 로베르가 이끈 노르망디 공국은 이전에 잉글랜드로부터 상당한 수입을 받았지만 이제는 끊어진 데다, 윌리엄 1세가 프랑스와 마지막으로 전쟁을 벌일 때 들어간 군사 비용, 헨리 왕자에게 유산으로 나눠줄 막대한 돈을 지불하느라 재정난에 허덕이고 있었으며, 로베르 공작은 이 때문에 군대를 집결하고 모집하는 데 들어가는 막대한 비용을 마련할 수 없어서 소극적으로 나설 수 밖에 없었다고 본다.
그러는 사이, 윌리엄 2세가 노르망디를 차지하기 위해 여러 노르망디 귀족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고자 막대한 뇌물을 제공했고, 노르망디 공국의 수도 루앙 내 반 로베르 세력을 회유하는 데 공을 들였다. 그 결과 1090년 10월 말, 코난 빌라도라는 이름의 유력자가 윌리엄 2세와 손잡은 노르망 기사들을 루앙으로 끌어들였다. 11월 3일, 코난 빌라도의 추종자들은 윌리엄 2세와 손잡은 노르만 기사 레이날드 드 바렌스의 기사단을 루앙에 진입하도록 했다. 뒤이어 로베르 공작에게 충성하는 길베르 드 라들이 현장에 도착했지만, 시민들은 성문을 닫고 거부했다.
한편, 루앙에 있던 로베르 공작은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닫고 루앙에서 병사를 급히 모은 뒤 레이날드 드 바렌스와 대적했지만, 전세가 불리해지자 도시에서 탈출했다. 오더릭 바이탈에 따르면, 로베르 공작은 동료들의 조언에 따라 수도를 떠나 센 강 반대편에 있는 노트르담뒤프레 수도원에 들어가서 반란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이후 그의 추종자들이 루앙으로 진군해 남쪽 문을 돌파하고 루앙 시내로 쇄도했다. 피비린내 나는 접전 끝에 코난 빌라도가 체포되었고, 탑에서 던져졌다.
2.3.4.2. 일시적인 휴전
1091년 초, 윌리엄 2세가 노르망디에 상륙했다. 로베르 공작은 프랑스 국왕 필리프 1세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필리프 1세는 이에 응해 프랑스군을 이끌고 노르망디로 진군했지만, 도중에 윌리엄 2세로부터 막대한 뇌물을 받고 철수했다. 이후 로베르 공작과 윌리엄 2세는 서로의 입장차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걸 선호해 무력 대결을 자제했고, 더럼 주교인 기욤 드 생칼레의 중재로 1091년 2월 캉에서 협약을 체결했다. 캉 평화 협약에 따르면, 양자 중 한 사람을 지지했던 영주들은 몰수되었던 영지를 돌려받으며, 로베르는 노르망디, 팔캉 수도원, 세르부르와 몽에 대한 잉글랜드 국왕의 종주권을 자기 소유물로 삼았고, 헨리 왕자가 소유하던 코탕탱 반도 영지를 몰수하며, 윌리엄 2세는 잉글랜드 왕국의 주권을 온전히 인정받았다. 또한 두 사람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땅에 대한 통제권을 확립하는 데 상호 지원하기로 했으며, 로베르는 윌리엄의 상속자로 지명되고, 윌리엄 역시 로베르의 상속자로 지명되었다.헨리 왕자는 이 조약에 반발해 몽생미셸 성에서 용병을 끌어모아 농성했지만, 두 형의 군대에게 포위되어 몇 주간 항전한 끝에 4월에 성이 함락되자 브르타뉴로 망명했다. 또한 지난날 윌리엄 1세와 맞서 싸웠다가 1086년 윌리엄 1세에게 귀순한 뒤 노섬브리아의 소규모 영지를 다스리던 에드거 2세 역시 영지를 몰수당하고 스코틀랜드로 망명했다. 1091년 5월, 스코틀랜드 국왕 말 콜룸 3세가 노섬브리아를 침공하자, 그 해 여름 로베르가 윌리엄 2세를 돕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로 이동했다. 그 해 가을, 윌리엄 2세는 로베르의 중재를 통해 말 콜룸 3세와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로베르는 크리스마스 직전에 윌리엄 2세의 궁정을 떠나 노르망디로 돌아갔다.
1092년 봄, 로베르는 프랑스 국왕 필리프 1세와 함께 기욤 드 브레퇴유가 브레발을 공략하는 걸 도왔고, 아셀린 고엘을 몰아붙인 끝에 아이브리 성을 다시 양도받았다. 하지만 그 사이에 헨리 왕자가 노르망디 서부 귀족들을 포섭해 로베르에게 빼앗겼던 영토를 확보하려 들었고, 윌리엄 2세도 헨리 왕자를 지원했다. 얼마 후, 헨리 왕자는 지역 주민들의 지원으로 동프롱에 확고히 자리를 잡았다. 로베르 공작은 동프롱이 당시 노르망디에서 가장 강력한 영주인 로베르 드 벨렘의 영지이므로, 동생이 그곳을 취하는 건 노르망디 공작에게 도전할 수 있는 위험한 봉신을 약화할 좋은 기회라고 여겼기에 동생과 싸우지 않았다.
2.3.4.3. 윌리엄 2세와의 두 번째 분쟁
1093년, 로베르는 자기가 동생 윌리엄 2세를 위해 잉글랜드에 직접 군대를 이끌고 가기도 했건만, 윌리엄 2세는 자기를 위해 병력을 지원해주지 않을 뿐더러 자기에게 대드는 헨리 왕자를 지원하는 것에 반감을 품었다. 그는 그해 크리스마스에 런던으로 사절을 보내 조약 조건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으면 그들 사이에 체결된 계약을 위반한 것으로 간주할 거라고 선언했다. 윌리엄 2세는 조약 서명에 참석한 증인들이 분쟁을 해결할 수 있도록 루앙에 출두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에 윌리엄 2세는 중재인들을 매수하기 위한 상당한 자금을 모은 뒤 1094년 3월 노르망디에 도착했다. 이후 루앙에서 열린 재판 결과, 거물들은 공작의 주장이 타당하다고 판결했다. 그러나 윌리엄 2세는 평결에 동의하지 않고 센 강 북쪽에 거주하는 노르만 귀족들을 끌어모은 뒤, 3월 11일 외에 상륙한 후 로베르를 따르던 부레스앙브레이를 접수했다.한편, 로베르와 프랑스 국왕 필리프 1세는 지난 해 잉글랜드에서 사망한 슈루즈버리 백작 로저 2세 드 몽고메리의 영지를 회수하기 위한 공세를 개시했다. 로저 2세 드 몽고메리의 아들인 로저 드 푸아테뱅은 군대를 아르장탕에 소집해 맞서 싸우려 했지만, 곧 마음을 바꿔 프랑스 국왕에게 항복했다. 그 후 윌리엄 2세가 부레스앙브레이를 접수하고 여러 노르만 귀족이 가세했다는 소식을 접한 로베르는 프랑스군과 함께 윌리엄 2세가 거점으로 삼은 외로 진군했지만, 외에서 40km 떨어진 곳에서 필리프 1세가 태도를 바꿔 윌리엄 2세의 편을 들자, 결국 무력으로 윌리엄 2세를 꺾으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군대를 해산했다.
1094년 말, 윌리엄 2세는 그루퍼드 압 키난이 웨일즈에서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접하자 잉글랜드로 급히 돌아가서 그루퍼드 압 키난의 반란군을 토벌했다. 뒤이어 로베르 드 몽브레유가 주동한 또다른 반란군을 성공적으로 토벌했다. 1095년 봄, 윌리엄 2세는 헨리 왕자에게 자금을 쥐어주고 노르망디로 보내 로베르 공작에 맞서 군사 활동을 벌이도록 했다. 이에 대응한 로베르 공작의 활동은 전해지지 않는다. 1095년 프랑스의 클레르몽에서 공의회를 소집한 교황 우르바노 2세는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한 십자군을 선포했다. 그 후 1096년 초 교황 특사가 노르망디로 파견되어 윌리엄 2세와 로베르 사이의 평화 협정을 맺도록 종용했고, 두 형제는 이에 따르기로 했다.
2.3.4.4. 헨리 2세와의 분쟁과 타협
1096년, 로베르 2세는 명예를 드높여서 형제들과의 분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기 위해 제1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했다. 그가 예루살렘으로 떠난 동안, 잉글랜드 국왕 윌리엄 2세가 그를 대신해 노르망디를 관리헀다. 윌리엄 2세는 공작의 권력을 강화하는 데 성고얬지만, 윌리엄 2세의 결정 중 일부는 로베르에게 많은 문제를 야기했다. 윌리엄 2세의 섭정 기간 동안 아버지의 땅을 물려받은 로베르 드 벨렘의 세력은 더욱 강화되었고, 1097년 사망한 바이외 주교 오돈을 대신해 윌리엄 2세에게 선임된 투롤 드 브레모이는 성직자와 지역 주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여기에 오돈 주교가 이전에 영향력을 누렸던 베생의 지배권은 헨리 왕자에게 넘어갔다.1100년 9월에 노르망디에 도착한 로베르 2세는 1100년 8월 2일에 윌리엄 2세가 사냥하던 도중에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에 맞아 사망했고, 헨리 왕자가 곧바로 잉글랜드 국왕 헨리 1세로 즉위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는 이에 불만을 품었지만, 일단 노르망디의 통치 체제를 재정비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는 주민들이 불만을 제기했다는이유로 투롤의 권력을 박탈해 바이외를 사실상 통치했고, 리지외 교구를 윌리엄 2세의 총신이었으나 헨리 1세에게 체포되어 런던 탑에 수감되었다가 탈출해 노르망디로 망명한 라눌프 플램바드의 통제하에 두게 했다. 또한 세 교구는 로베르 드 벨렘의 통제하에 두도록 했다. 이로 인해 교구 수입이 대거 넘어가자, 세 주교인 세를롱 도르제르는 로베르 드 벨렘을 파문한 뒤 지역 수도원장과 대 집사와 함께 헨리 1세의 궁정으로 망명했다.
1101년 6월, 로베르는 200척의 대함대를 르 트레포르에 집결해 잉글랜드로 진격할 준비에 착수했다. 로베르 드 벨렘, 페벤시 성주 윌리엄 드 모르탱, 서리 백작 윌리엄 드 워렌 등 잉글랜드 거물들이 그를 지지했고, 볼로뉴 백작 외스타슈 3세와 에브뢰 백작 앙리도 그를 지지했다. 헨리 1세는 이에 맞서 샤이어에서 군대를 소집한 뒤, 병사들이 다 모일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가용 병력과 함께 남쪽으로 가서 페벤시 인근에 숙영지를 세웠다. 7월 20일, 로베르의 함대는 잉글랜드로 출항했다. 그는 영국 해협에서 헨리가 보낸 배들을 만났지만, 그들은 곧장 로베르 편으로 돌아섰다. 노르만 함대는 서쪽으로 항해해 8월 초에 포츠머스 항구에 도착했다.
로베르의 군대는 윈체스터를 향해 진군했지만, 윈체스터 시민과 수비대가 항복을 거부하고 농성하자 공략을 포기하고 런던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후 앨턴에서 헨리 1세의 군대와 조우했지만, 로베르는 전투를 벌이는 대신 평화 협상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가 그렇게 한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대부분의 연대기 작가들은 왕위를 주장하는 두 사람의 동맹자들의 노력을 통해 화해가 이루어졌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오더릭 바이탈은 거물들은 전쟁을 열망했지만, 헨리 1세가 로베르와 직접 만나 평화적으로 해결하자고 설득해 동의를 얻어냈다고 주장했다. 일부 학자들은 기름부음받은 군주를 상대로 무기를 든 로베르를 파문할 준비가 되어 있던 안셀무스 대주교의 강경한 태도가 로베르로 하여금 헨리 1세와 타협하기로 마음먹은 계기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두 형제는 앨턴에서 1091년 로베르와 윌리엄 2세가 체결한 캉 조약과 유사한 조건의 조약을 맺었다. 로베르는 잉글랜드 왕위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포기했고, 헨리도 노르망디에 대한 자신의 소유권을 포기했다. 또한 두 형제는 적법한 후손이 없을 경우 서로를 상속자로 삼기로 했다. 그리고 헨리 1세는 로베르에게 매년 은화로 3천 마르크를 지불할 의무가 있었는데, 이는 잉글랜드 수입의 10분의 1에 달했다. 그리고 분쟁에 참가한 모든 당사자는 자기 영지로 돌아가며, 형제들은 전쟁이 일어나면 서로 돕기로 했다. 로베르는 미카엘의 날(9월 29일)까지 잉글랜드 궁정에 머무른 뒤 노르망디로 귀환했다.
2.3.4.5. 앨턴 협정의 결렬
1102년 봄, 헨리 1세는 로베르 드 벨렘이 45개의 중범죄를 저질렀다고 규탄했다. 그 후 그는 몇 달간 로베르 드 벨렘이 속한 몽고메리 가문의 잉글랜드 영지를 모조리 압수했다. 헨리 1세는 로베르에게 앨턴 협정에 따라 반역자 로베르 드 벨렘을 처벌해달라고 요청했다. 로베르는 이에 따라 로베르 드 벨렘이 숨은 비니 성을 포위했지만, 그의 진영에 있던 공모자들이 자기 천막에 불을 지르고 도망치면서 군대가 와해되었다. 이후 로베르 드 벨렘의 군대는 이웃 영주들의 영지를 약탈했다.그 후 헨리 1세는 노르망디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노르만 귀족 라울 3세 드 토스니가 아버지 사후 잉글랜드에서 상속받은 땅을 접수하기 위해 찾아오자, 헨리 1세는 노섬브리아 백작 월테오프의 부유한 상속녀인 아델리자와 라울 3세의 결혼을 주선했다. 1103년 1월 12일, 기욤 드 브레퇴유가 적법한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사망했고, 사생아 외스타슈가 이 땅을 접수했다. 그러자 기욤의 조카들이 강하게 반발했고, 외스타슈는 헨리 1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헨리 1세는 그를 지원해주겠다고 약속하고, 자신의 사생아인 줄리아나 드 퐁트브로와 결혼시켰다. 이후 헨리 1세의 지시를 받은 로베르 드 멜룬이 군대를 이끌고 가서 조카들이 외스타슈에게 복종하도록 강요했다. 여기에 더해, 헨리 1세는 또다른 사생아인 마틸다를 로베르 드 벨렘의 정적인 페르샤 백작 로트루 3세와 결혼시켰다.
이렇듯 헨리 1세가 노르망디 정계에 광범위한 개입을 행사하는 동안, 로베르는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1103년 로베르 드 벨렘을 상대로 군사 원정을 벌이기로 했다. 아르눌프 드 몽고메리가 알메네스 성을 접수한 뒤 로베르에게 넘겨주자, 로베르 드 벨렘은 반격을 가해 알메네스 성을 접수하고 그곳의 수녀원을 불태웠으며, 수비대 일부는 위생이 좋지 않은 감옥에 감금되어 기나긴 옥살이를 해야 했고, 나머지는 신체 절단형에 처해졌다. 뒤이어 로베르 드 벨렘은 로베르와 그의 동맹군을 격파하고 주변의 여러 성을 접수했다.
1103년 여름, 제2대 서리 백작 윌리엄 드 워렌이 핸라 1새애개 영지를 몰수당한 뒤 로베르를 찾아와서 왕을 설득해서 재산을 돌려주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로베르는 이에 응해 잉글랜드로 가서 헨리 1세와 접견했다. 그 결과 헨리 1세는 서리 백작에게 영지를 돌려주는 걸 받아들였지만, 그 대신 로베르는 1101년 침공 이후에 받았던 연금 3,000마르크를 포기해야 했다. 1104년, 헨리 1세는 윌리엄 드 모르탱이 왕국 남동부의 영지를 불법적으로 점유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윌리엄 드 모르탱은 노르망디로 망명했고, 헨리 1세는 그의 잉글랜드 영지를 몰수했다. 그 해 8월, 헨리 1세는 노르망디에 있는 자기 영지를 방문했고, 그의 가신들로부터 명예로운 영접을 받았다. 그 후 헨리는 로베르와 만나서 그가 자기 가신들 사이에 체결된 계약 조건을 위반했다고 비난했다. 이에 로베르는 기욤 데브뢰가 헨리 1세의 봉신이 되는 걸 받아들이겠다고 밝혔다.
1105년 초, 칼바도스 지역의 크룰리 영주이자 노르망디 망슈 지역의 영주이며, 글로스터 남작인 로버트 피츠하몬이 노르망디로 가서 바이외 근처의 조상 영지 근처에서 군사 작전을 벌이다가 로베르의 지지자들에게 패배해 생포되었다. 헨리 1세는 자신의 주요 추종자인 로버트 피츠하몬의 생포 소식을 듣자 로베르에게 그를 풀어달라고 요청했다. 로베르가 받아들이지 않자, 헨리 1세는 앨턴 협정이 파기되었다고 선언하고 노르망디 침공을 단행했다.
2.3.4.6. 몰락
1105년 4월, 헨리 1세는 노르망디 원정을 개시했다. 잉글랜드군은 바르플뢰르에 상륙한 뒤 부활절에 카랑탕에 도착했다. 그들은 이곳에서 멘 백작 엘리 1세, 앙주 백작 조프루아 4세 마르텔의 군대와 합세했고, 노르망디의 주요 거물들의 지원을 받았다. 로베르에게 가담한 거물은 로베르 드 벨렘과 윌리엄 드 모르탱 뿐이었다. 로베르는 프랑스 국왕 필리프 1세와 플란데런 백작 로베르 2세에게 원군을 요청했지만, 헨리 1세가 이들에게 막대한 자금을 보내며 중립 약속을 받아냈기 때문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4월 중순 바이외에 도착한 헨리 1세는 로버트 피츠하몬을 석방한 뒤 바이외 수비대에 항복을 요구했다. 수비대가 이를 거부하자, 헨리 1세는 무력으로 공략한 뒤 약탈과 방화를 자행했다. 그 후 캉으로 진군한 헨리 1세는 캉 시민들이 성주를 추방하고 도시를 넘겨준 덕분에 무혈 입성할 수 있었다. 헨리 1세는 여세를 이어가 팔레즈 성을 맹렬하게 공격했으나 공략에 실패했다.1105년 5월 말, 헨리 1세는 생토에서 로베르의 사절단과 협상했지만 별다른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 그러다가 성직자 서임권 논쟁으로 인해 켄터베리 대주교 안셀무스와 갈등이 생기자, 헨리 1세는 일단 원정을 중단하고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그 해 겨울 로베르 드 벨렘과 로베르 공작의 사절단이 영국을 방문해 평화 협상을 논의했지만 별다른 결론을 얻지 못했다. 1106년 봄, 안셀무스와의 분쟁이 해결되자 원정을 재개한 헨리 1세는 팔레즈 근처 생피에르쉬르디브의 요새화된 수도원을 재빨리 점령한 후, 남쪽으로 방향을 돌려 팅슈브레 성을 포위했다. 팅슈브레는 노르망디 남서쪽, 모르탱 백작의 국경에 있으며, 로베르에게 여전히 충성하는 몇 안 되는 중요한 노르만 거물인 윌리엄 드 모르탱이 지키고 있었다. 이에 로베르 공작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가서 헨리 1세와 대치했다.
헨리 1세는 로베르에게 평생 연금을 받는 대가로 노르망디의 권력을 넘겨달라고 제안했다. 프랑스의 저명한 은둔 수도자 비탈 드 사비니도 로베르에게 형제와 화해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로베르는 더 이상 헨리 1세에게 우롱당할 수는 없다고 여기고, 전투를 감행하기로 했다. 이후 벌어진 팅슈브레이 전투는 한 시간 동안 벌어진 끝에 수적으로 우월한 헨리 1세의 승리로 끝났다. 로베르의 군대 대부분은 포로가 되거나 사망했고, 로베르는 윌리엄 드 모르탱과 함께 생포되었다. 로베르 공작의 후위대를 지휘했던 로베르 드 벨렘은 탈출에 성공한 뒤, 노르망디 전역을 지배하게 된 헨리 1세에게 귀순했다.
헨리 1세는 로베르를 생포한 뒤 팔레즈로 진군해 항복을 받아낸 후, 로베르의 4살된 아들 기욤 클리토를 자신의 부하인 아크라 백작 엘리아 드 생상스의 관리하에 두도록 했다. 그 후 로베르는 잉글랜드로 이송되어 죽을 때까지 연금 생활을 하다가 1134년 2월 3일 향년 79~80세의 나이로 카디프 성에서 사망했다.
2.3.5. 헨리 1세
2.3.5.1. 기욤 클리토 및 루이 6세와의 분쟁
헨리 1세는 로베르 2세를 꺾고 노르망디를 손아귀에 넣은 뒤 윌리엄 1세 치세에 존재했던 국가 행정을 신속하게 복원했다. 로베르 2세가 노르만 귀족들에게 배포한 땅과 성은 공작의 직할령으로 반환되었다. 그는 공공 평화를 위반하는 모든 이들을 잔인하게 처벌했으며, 지역 영주들이 불법적으로 건설한 요새를 파괴했다. 공작의 권력이 급격하게 강화했으며, 재정 및 사법 시스템의 간소화로 노르망디에서 국고로의 재정 수입이 크게 증가했다. 그러나 노르망디의 여러 귀족은 이 때문에 자신들의 자치권이 심하게 침해된 것에 깊은 반감을 품고, 로베르 2세의 유일한 아들인 기욤 클리토를 노르망디 공작으로 내세울 기회를 엿보았다.한편, 프랑스 국왕 루이 6세는 헨리 1세가 노르망디를 공략하면서 잉글랜드 국왕의 권세가 강해지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 플란데런 백국과 앙주 백국을 끌어들였다. 1110년 앙주 백작 풀크 5세는 노르망디 공국의 봉신으로 여겨졌던 멘 백국을 물려받았지만 헨리 1세에게 경의를 표하길 거부했다. 또한 플란데런 백작 로베르 2세는 윌리엄 1세 치세 말기부터 잉글랜드-노르망디 연합에 강한 적개심을 드러냈다. 헨리 1세는 이에 맞서기 위해 자기 누이 아델의 남편이며 루이 6세의 정적인 블루아 백작 티보 2세를 동맹으로 끌어들였다.
헨리 1세의 노르망디에서의 통치 기간 대부분은 이웃 국가들과의 끊임없는 전쟁이었다. 첫번째 전쟁(1111 ~ 1113)은 매우 성공적으로 끝났다. 플란데런 백작 로베르 2세는 1111년 티보 2세가 루이 6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걸 진압하기 위해 출진했다가 모 공방전 도중 치명상을 입고 마른 강에 떨어져 익사했다. 여기에 반(反) 헨리 1세 성향의 노르만 귀족 로베르 드 벨렘은 1112년 헨리 1세에게 생포되어 잉글랜드로 끌려간 뒤 도셋의 워헴 성에 감금되어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지내야 했다. 또한 헨리 1세의 맹공으로 알랑송을 상실한 앙주 백작 풀크 5세는 멘 백작으로서 헨리 1세에게 경의를 표하기로 했다. 결국 모든 동맹이 이탈하자, 루이 6세는 어쩔 수 없이 헨리 1세와 타협하기로 했다. 1113년, 루이 6세는 노르망디 뿐만 아니라 멘과 브르타뉴에 대한 주권을 헨리 1세가 갖는 걸 인정했다.
1115년, 헨리 1세는 노르망디로 가서 귀족들이 합법적인 아들 윌리엄 애설링에게 충성 서약하도록 했으며, 뒤이어 루이 6세와 협의해 아들이 노르망디 공작 후계자임을 인정받는 대가로 상당량의 자금을 지불하기로 했다. 그러나 루이 6세는 플란데런 백작 보두앵 7세의 강력한 권고에 따라 기욤 클리토의 노르망디 공국에 대한 권리를 인정하기로 했다. 이후 양측 군대가 각자의 국경 마을을 약탈하는 일이 빈번하게 벌어지면서 전운이 감돌았다. 1116년, 루이 6세는 플란데런 백국과 앙주 백국과 손잡고 노르망디를 향한 공세를 개시했다. 1118년 아마우리 3세 드 몽포르가 이끄는 귀족들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보두앵 7세가 파견한 군대와 합세해 노르망디 동부 전역을 휩쓸었으며, 기욤을 노르망디 공작으로 받들었다. 1118년 5월 1일 스코틀랜드의 마틸다 왕비가 웨스트민스터 궁전에서 사망했지만, 헨리 1세는 노르망디의 상황이 너무 심각했기에 마틸다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이렇듯 상황이 다급했지만, 헨리 1세는 침착하게 상황을 수습했다. 그는 가신들의 봉기를 하나둘씩 제압했고, 조카인 블루아 백작 티보 4세와의 동맹을 강화했다. 여기에 플란데런 백작 보두앵 7세가 아크라 요새를 포위공격하던 중 심각한 부상을 입고 이듬해 사망하는 행운이 따랐고, 이로 인해 반란군의 기세가 꺾였다. 1119년 6월, 헨리 1세는 자기 아들 윌리엄 애설링과 앙주의 마틸다의 결혼식을 리지외에서 벌이고 앙주 가문에 막대한 자금을 보냈다. 그 결과 풀크 5세는 헨리 1세 편으로 돌아섰고, 얼마 후 예루살렘으로 순례하면서 멘 백작령의 관리를 헨리 1세에게 맡겼다. 이제 헨리 1세는 루이 6세와 기욤 클리토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1119년 여름 벡생을 침공한 헨리 1세는 8월 20일 브레뮐에서 루이 6세의 프랑스군과 맞붙어 압승을 거두었다. 이때 그는 적 기사가 휘두른 칼에 맞았지만 탄탄한 갑옷 덕분에 경상에 그쳤다. 루이 6세와 기욤 클리토가 도주한 뒤, 헨리 1세는 루앙으로 귀환했다. 1119년 10월, 루이 6세는 랭스에서 열린 공의회에 사절을 보내, 교황 갈리스토 2세의 개입을 청원했다. 그러나 교황은 두 군주 중 한 사람에게 호의를 베풀기를 거부하고 평화를 맺을 것을 권고했다. 결국 루이 6세는 헨리 1세와 평화 협약을 맺기로 하고, 양자는 1120년 6월 평화 협약을 맺었다. 이에 따르면, 윌리엄 애설링은 프랑스 국왕에게 경의를 표하는 대가로 노르망디 공작으로 인정받았다.
2.3.5.2. 블랑슈네프호 침몰 사고 이후
그러던 1120년 11월 25일, 블랑슈네프호가 노르망디의 바르플뢰르 항을 떠나 잉글랜드로 돌아가다가 암반에 부딪혀 최소 300명이 사망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블랑슈네프호 침몰 사고) 이때 헨리 1세의 유일한 적출자인 윌리엄 애설링과 사생아 마틸다 피츠로이, 링컨의 리처드 등이 목숨을 잃었다. 헨리 1세는 이 충격적인 소식을 듣고 며칠간 앓아 누웠다가 겨우 정신을 되찾았다. 연대기 작가들에 따르면, 헨리 1세는 이후로 다시는 웃지 않았다고 한다. 1121년 1월 24일, 헨리 1세는 하부 로타링기아 공작이자 루뱅, 브뤼셀, 브라반트 백작 고드프리 1세 드 루뱅의 딸인 루뱅의 아델리자와 재혼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서는 자식이 끝내 태어나지 않았다.이제 기욤 클리토가 윌리엄 1세의 마지막 후손으로서 노르망디 뿐만 아니라 잉글랜드 왕국의 상속인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헨리 1세는 자기와 대적한 기욤 클리토가 그리 되기를 원하지 않았고, 자기 누이 아델의 아들인 에티엔 드 블루아를 후계자로 선포하려 했다. 하지만 많은 노르망디 귀족들은 기욤의 권리를 지지하기로 했는데, 에브뢰 백작 아이머리 3세 드 몽포르, 멜룬 백작 갈레랑 4세 드 묄룬이 대표적인 기욤 지지파였다.
1122년, 예루살렘에서 귀환한 앙주 백작 풀크 5세는 딸 마틸드와 결혼했던 윌리엄 애설링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마틸드의 지참금으로 보낸 자금과 멘에 있는 요새의 반환을 요구했다. 헨리1세는 마틸드를 보내줬지만 지참금과 요새를 돌려주기를 거부했다. 이에 격분한 풀크 5세는 1123년 또다른 딸 시빌과 기욤 클리토의 결혼을 주선했고, 기욤 클리토를 멘 백작으로 내세웠다. 헨리 1세는 교황청에 시빌과 기욤이 가까운 친족이니 근친혼이므로 결혼을 무효로 처리해달라고 요청했고, 갈리스토 2세는 1124년에 이를 받아들였다.
1123년, 노르망디에서 기욤을 지지하는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반란군 내부의 이해관계가 엇갈렸고, 구심점이 될 만할 인물이 없어서 분열되었다. 1124년 3월, 헨리 1세가 파견한 왕실군은 루앙 남동쪽 부르크테롤드에서 전투를 벌여 반란군을 격파하고 주동자들을 생포했다. 프랑스 국왕 루이 6세는 반란군을 지원하려 했지만, 그 전에 반란군이 소멸되면서 무산되었다. 1124년 여름, 프랑스 왕국은 헨리 1세의 딸 마틸다와 결혼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5세의 공격을 받았다. 루이 6세는 제국군을 성공적으로 격퇴했지만 기욤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걸 포기했다.
1125년, 헨리 1세는 조카 에티엔 드 블루아와 불로뉴 여백작 마틸드의 결혼을 주선하는 등 에티엔을 후계자로 점찍는 듯한 행보를 보였다. 그러던 1125년 5월 23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5세가 사망했다. 이 소식을 접한 헨리 1세는 이듬해 딸 마틸다를 잉글랜드로 소환한 뒤 자신이 아들을 두지 못한 채 죽는다면 마틸다가 자신을 계승할 거라고 선언했다. 1126년 크리스마스, 잉글랜드 귀족들은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 초대되어 마틸다와 그녀의 미래 후계자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다. 하지만 여자가 왕위 계승 후보로 나서는 건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궁정 신하 상당수는 여왕의 등극에 반대했고, 루이 6세는 마틸다의 왕위 계승자로서의 지위에 단호히 이의를 제기했다.
1127년, 플란데런 백작 샤를 1세가 후계자를 두지 못한 채 사망했다. 이에 루이 6세는 기욤 클리토를 플란데런 백작으로 선임했다. 그 후 기욤은 헨리 1세로부터 노르망디를 되찾기 위해 부유한 플란데런 도시들에 막대한 세금을 부과해 잉글랜드군과의 전쟁을 위한 군자금을 모았다. 이때 그는 건물에 대한 새로운 세금과 박람회 거래 수수료를 부과했으며, 각 도시의 정치에 깊게 간섭하려 했다. 이에 시민들은 강한 불만을 품었다. 여기에 플란데런 백국의 주요 무역 상품인 직물 제조업에 가장 중요한 원재로인 양모를 공급하는 국가인 잉글랜드에 대한 기욤의 적대 행위는 플란데런 상인들의 이권을 위협했다. 이에 플란데런인들은 티에리 드 알자스를 플란데런 백작으로 세우기로 마음먹었고, 헨리 1세로부터 재정적, 군사적 지원을 얻었다.
1128년 2월, 생오메르와 겐트 주민들이 기욤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뒤이어 브뤼헤가 3월에 반기를 들었고, 릴도 5월에 반란을 일으켰다. 오직 플란데런 백국 남쪽의 소규모 지역만이 기욤의 통제하에 남았다. 이에 기욤은 브뤼헤를 공격했고, 6월 21일 악풀 전투에서 티에리 드 알자스의 노르만-로렌 연합군을 격파했다. 이후 브라반트 변경백 조프루아 1세의 군대와 합세한 뒤 7월 12일 티에리 드 알자스가 피신한 알스트를 포위했다. 그러나 기욤은 공방전을 치르던 중 석궁에 치명상을 입었고, 1128년 7월 28일 2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기욤 클리토가 이렇게 죽어버리자, 헨리 1세는 루이 6세와 평화 협정을 맺고 1123년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체포되어 이때까지 수감 중이던 노르망디 귀족들을 석방했다.
1128년 6월 17일, 헨리 1세의 딸 마틸다와 앙주 백작 풀크 5세의 장남 조프루아 5세의 결혼이 성립되었다. 사실 마틸다는 한때 신성 로마 황후였던 자신이 일개 백작의 아내가 된 걸 몹시 못마땅하게 여겨 조프루아 5세와 결혼하길 무척 꺼렸지만, 마틸다가 여왕으로서 자리를 확고히 하려면 앙주 가문을 아군으로 끌어들여야 한다고 확신한 헨리 1세의 강압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마틸다와 조프루아 5세의 결혼은 처음에는 결실을 맺지 못하는 듯했다. 부부는 잘 지내지 못했고, 마틸다가 지참금으로 가져와야 할 노르만 요새들은 좀처럼 정해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1133년과 1134년에 두 아들 헨리와 제프리가 각각 출생하면서, 헨리 1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러나 헨리 1세의 통치 마지막 몇 달은 헨리 1세와 조프루아 5세와 마틸다 부부 간의 관계 악화로 점철되었다. 1135년 초, 마틸다는 아버지에게 노르망디에 있는 왕실 성을 넘겨주고 노르만 귀족들에게 지금 즉시 자신과 조프루아 5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헨리 1세는 이걸 받아들일 경우 조프루아 5세가 노르망디에서 자신의 권위를 영구적으로 확립할 것을 우려해 격렬하게 거부했다. 얼마 후, 노르망디 공국 남부에서 퐁티외 백작 기욤 1세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마틸다와 조프루아 5세 부부가 지원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헨리 1세는 그 해 가을 노르망디에서 자신의 권위를 재확립하기 위해 곧바로 노르망디로 향했지만 1135년 11월 용라포레에서 사냥하다가 급병에 걸렸고, 1135년 12월 1일 6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3.6. 무정부시대와 조프루아 5세
헨리 1세의 사망이 공표되었을 때, 마틸다와 조프루아 5세 부부는 앙주에 있었고, 노르망디에서 벌어진 반란을 지원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더욱이, 헨리 1세의 원정에 동행했던 귀족들은 고인이 된 왕이 매장될 때까지 노르망디에 머물겠다고 맹세했고, 이 때문에 즉시 잉글랜드로 돌아갈 수 없었다. 일부 노르만 귀족은 블루아 백작 티보 4세를 왕으로 옹립할 지를 논의했다. 그러던 중 티보 4세의 형제이며 한때 헨리 1세에 의해 왕위 계승 후보로 고려되었던 에티엔 드 블루아가 소규모 병력을 이끌고 불로뉴에서 영국 해협을 건넌 뒤 런던에 입성했고, 1135년 12월 22일 윈체스터 주교인 남동생 앙리 드 블루아와 노퍽 백작 휴 비고드의 지지를 받으며 잉글랜드 국왕이자 노르망디 공작 스티븐 왕으로 즉위했다.1136년 초, 앙주 백작 조프루아 5세가 아내 마틸다가 잉글랜드 왕위를 되찾도록 돕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노르망디 공국을 침공해 여러 마을을 약탈했다. 스티븐은 내란과 스코틀랜드의 침공, 웨일스인들의 봉기에 대처하느라 노르망디로 갈 여유가 없었기에, 심복인 갈레랑 4세 드 묄룬을 노르망디 왕실 보안관으로 선임했다. 갈레랑 4세는 노르망디 공국 방어 조직을 맡았고, 1136년 9월 조프루아 5세의 침공을 격퇴했으며, 마틸다 지지파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인 로저 드 토스니를 체포했다.
1137년, 노르망디로 이동한 스티븐 왕은 프랑스 국왕 루이 6세, 블루아 백작 티보 4세와 만났다. 루이 6세는 자신에게 경의를 표하는 대가로 스티븐 왕의 아들 외스타슈 4세가 차기 노르망디 공작이 되는 걸 인정했고, 위세를 떨치는 앙주 백국을 견제하겠다고 약속했다. 그 후 스티븐은 1135년 말부터 조프루아 5세가 지배하는 노르망디와 앙주 국경 요충지인 아르장탕을 공략하기 위해 군대를 조직했다. 그러나 그가 최근에 고용한 플란데런 용병대장인 기욤 디프르와 현지 노르만 남작들이 지휘하는 플란데런 용병들 사이에 마찰이 벌어졌고, 급기야 자기들끼리 전투가 벌어지는 불상사가 벌어졌다. 이대로는 원정을 벌여봐야 소용이 없다고 판단한 스티븐 왕은 조프루아 5세와 협의한 끝에 평화를 유지하는 대가로 연간 2,000 마르크를 지불하기로 합의했다.
이후 마틸다가 글로스터의 로버트 등의 지원을 받으며 잉글랜드에서 스티븐 왕과 대적하는 동안, 조프루아 5세는 노르망디를 향한 공세를 이어갔다. 1141년, 조프루아 5세는 캉, 바이외, 리지외, 팔레즈 등 여러 도시를 공략하고 센 간 남쪽과 리슬강 동쪽의 하부 노르망디 일대를 석권했다. 1142년 6월 24일, 마틸다는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좀더 많은 병력이 필요하다고 여기고, 글로스터의 로버트를 남편에게 보내 대규모 병력을 보내달라고 요청하게 했다. 그러나 조프루아 5세는 노르망디 공국 정복에 열을 올렸을 뿐, 아내를 돕는 데엔 큰 괌심이 없었다. 결국 로버트는 300~400명의 기병만 확보할 수 있었고, 조프루아 5세와 마틸다의 장남인 헨리 플랜태저넷과 함께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1143년, 노르망디 공국의 주요 항구도시인 아브랑슈가 조프루아 5세의 손에 넘어갔다.
1144년 1월 14일, 조프루아 5세는 노르망디 공국의 수도인 루앙에 입성했다. 그 해 여름, 그는 프랑스 국왕 루이 6세로부터 노르망디 공작이라는 칭호를 수여받았다. 하지만 상부 노르망디의 여러 도시들, 특히 영국해협과 인접한 항구도시들은 여전히 그에게 굴복하기를 거부했다. 1146년 노르망디 공국의 아르케라바타이유를 공략했지만, 몽트뢰유벨레이 공략은 1148년부터 1151년까지 3년이나 지체되었다. 한편, 그는 바이외와 루앙의 주조장을 폐쇄하고, 앙주 데나르가 노르망디 공국 전역에 유통되도록 했다. 이에 대해 일부 학자들은 그가 노르망디를 앙주의 속국으로 간주했다고 추정한다.
1150년, 조프루아 5세는 장남 헨리를 노르망디 공작으로 내세우면서, 주권자인 프랑스 국왕과의 협의를 생략했다. 이에 분개한 프랑스 국왕 루이 7세가 1151년 스티븐 왕의 장남인 외스타슈 4세가 노르망디 공작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전쟁을 개시하자, 조프루아 5세는 앙주와 노르망디에서 자기에 대항하는 반란이 종종 터지는 와중에 프랑스 왕국과 대적하는 건 곤란하다고 여기고 루이 7세와 화해하기로 했다. 1151년 9월,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의 중재 아래 조프루아 5세와 루이 7세가 평화 협약을 맺었다. 조프루아 5세는 벡생을 루이 7세에게 양도하기로 했고, 루이 7세는 조프루아 5세와 헨리 부자가 파리로 와서 자신에게 경의를 표하는 대가로 헨리가 노르망디 공작에 선임되는 걸 인정하기로 했다. 1151년 9월 7일, 조프루아 5세가 프랑스 궁정에서 귀환하던 중 루아르 강에서 수영한 후 감기에 걸려 골골하다가 멘 백국의 샤토뒤루아르에서 급사했다. 사후 장남 헨리가 노르망디 공작이 되었다.
2.4. 앙주 제국
2.4.1. 헨리 2세
2.4.1.1. 영역 확장
헨리 2세가 프랑스 내에서 소유했던 영토 |
1151년 조프루아 5세가 사망하면서 노르망디 공작이자 앙주 백작이 된 헨리 2세는 1152년 3월 11일 프랑스 국왕 루이 7세와의 결혼을 무효로 처리한 아키텐 여공작 엘레오노르 다키텐과 푸아티에에서 만나 5월 18일 결혼했다. 이에 루이 7세는 헨리가 자신의 동의 없이 결혼을 감행한 것과 엘레오노르 사이에서 낳은 두 딸 마리와 알릭스가 어머니의 영지를 상속받기 곤란해진 것에 분개했고, 기존에 가지고 있던 노르망디 공국, 앙주 백국에 이어 아키텐 공국까지 확보하면서, 프랑스 왕실보다 훨씬 더 큰 영토를 소유하게 되었으니, 자칫했다간 프랑스 왕국의 주권이 헨리 쪽으로 넘어갈 수도 있는 상황에 불안감을 품었다.
루이 7세는 헨리를 응징하기로 마음먹고, 스티븐 왕, 스티븐 왕의 아들이자 불리뉴 백작 외스타슈 4세, 샹파뉴 백작 앙리 1세, 페르슈 백작 로베르와 연합했다. 여기에 헨리의 동생 조프루아도 가세했다. 그는 헨리가 자기에게 돌아가야 할 영지까지 독점했다고 주장하며 앙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후 전쟁이 발발했고, 샹파뉴의 앙리 1세와 페르슈 백작 로베르가 노르망디 국경지대의 요충지인 뇌프마르세쉬르를 접수했다. 여기에 루이 7세는 아키텐 공국으로 곧장 진군했으며, 스티븐 왕은 템스강 계곡에서 헨리에게 충성하는 주요 요새인 월링포드 성을 포위했다. 헨리는 이에 대응해 아키텐에서는 농성을 고수해 루이 7세와의 전면전을 회피하는 한편, 노르망디 국경 수비를 강화해 적군이 더 이상 침투하지 못하도록 했다. 여기에 벡생을 습격해 약탈을 자행했고, 앙주로 진군해 조프루아의 주요 성 중 하나인 몽소르를 점령했다. 이후 루이 7세가 병에 걸려 철수하자, 조프루아는 어쩔 수 없이 형과 평화 협약을 맺었다.
1153년 11월, 헨리 2세는 스티븐 왕과 월링포드 협약을 맺으면서 스티븐 왕의 후계자로 인정받았다. 그 후 스티븐 왕이 1154년 10월 25일에 병사하고 헨리가 12월 19일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르면서, 헨리 2세는 잉글랜드 국왕을 겸임했다. 이리하여 플랜태저넷 왕조는 잉글랜드 왕국에 더해 노르망디 공국, 멘 백국, 앙주 백국, 루뱅 백국, 아키텐 공국에 이르는, 프랑스 왕국의 절반 이상에 달하는 막대한 영역을 누렸다.
프랑스 국왕 루이 7세는 이에 위협을 느끼고, 어떻게든 플랜테저넷 왕조를 견제할 방안을 강구했다. 루이 7세가 플란데런 백작 티에리 드 알프스를 포함한 여러 영주를 포섭하자, 헨리 2세는 루이 7세에게 등을 돌린 블루아 백작 티보 5세와 동맹을 맺었다. 이후 헨리 2세가 루이 7세에게 프랑스 내 영지에 대한 연공을 바치지 않으면서, 양자 간의 갈등은 고조되었다. 그러던 1158년, 두 사람은 파리와 몽생미셸에서 잇달아 만나서 헨리 2세의 가장 나이 많은 생존한 아들인 청년왕 헨리와 루이 7세의 딸 마르그리트를 약혼하는 데 동의했다. 결혼 계약에는 루이 7세가 마르기르트에게 양국의 분쟁 지역인 백생 백국을 양도하는 것이 포함되었다. 이리하여 헨리 2세와 루이 7세는 영구적인 평화를 맺는 듯했다.
한편, 헨리 2세는 자신의 영토와 인접하면서도 독자적인 주권을 누리고 있던 브르타뉴 공국으로 관심을 돌렸다. 이보다 앞선 1148년 9월 17일, 브르타뉴 공작 코난 3세가 사망했다. 그는 죽기 전에 모든 사람이 자신의 합법적인 아들로 여겼던 호엘 3세가 사실은 사생아라며 작위와 영지 승계를 거부하고, 딸 베르테를 브르타뉴 여공작으로 세웠으며, 베르테와 첫 남편인 리치먼드 백작 알란 르 루의 자식인 코난 4세를 유일한 상속인으로 지명했다. 이후 코난 3세가 눈을 감았지만, 호엘 3세는 베르테의 집권을 용납하지 않고 낭트 일대에서 할거하며 브르타뉴 공작을 칭했고, 1149년 생폴 드 레옹 주교와 1152년 캥페르 주교로부터 공작으로 인정받았다. <브르타뉴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결국 코난 4세의 섭정이며 베르테의 두 번째 남편인 포허 자작 에우돈 2세에게 굴복해 브르타뉴 공작에서 사임했다고 한다. 하지만 1153년부터 다시 공작을 칭하고 브르타뉴 공작으로서 헌장을 발표했다.
1154년, 코난 4세는 성년이 된 자기에게 권력을 돌려주지 않는 계부이자 포허 자작인 에우돈 2세에게 반기를 들었다. 그는 호엘 3세와 손잡고 에우돈 2세와 전쟁을 벌였지만 패배해 리치먼드 백국으로 피신했다. 하지만 이내 세력을 재정비해 브르타뉴로 돌아와서 1154년 12월 16일 레제 인근에서 에우돈 2세를 물리치고 브르타뉴 외곽으로 쫓아냈다. 1156년, 호엘 3세는 낭트 사람들에 의해 추방되었고, 낭트 시민들은 앙주와 멘 백작인 앙리 2세의 남동생인 조프루아 6세를 낭트 백작으로 추대했다. 1158년 7월 조프루아 6세가 사망하자, 코난 4세는 즉시 낭트를 장악했다. 이러한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던 헨리 2세가 리치먼드 백작령을 일시적으로 압수하고 브르타뉴로 진격하려 하자, 코난 4세는 1158년 9월에 아브랑슈로 달려가서 헨리 2세에게 경의를 표하고 낭트 백국을 넘기는 대가로 리치먼드 백작령을 돌려받았다.
헨리 2세는 전통적으로 아키텐 공국의 가신이었지만 당시엔 아키텐으로부터 사실상 독립했던 툴루즈 백작령도 복속하려 했다. 헨리는 먼저 툴루즈 백작 레몽 5세의 정적인 바르셀로나 백작 라몬 베렝게르 4세와 동맹을 맺었고, 1159년에는 툴루즈 백작을 폐위하기 위해 침략하겠다고 위협했다. 루이 7세는 헨리 2세가 남프랑스 전역을 석권하는 걸 절대로 바라지 않았기에, 여동생 콩스탕스를 레몽 5세와 결혼시켰다. 이후 헨리 2세가 툴루즈를 침공했지만, 루이 7세가 툴루즈를 방문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자신의 주권자인 루이 7세와 직접 교전하기엔 시기상조라고 여겼기에 주변 마을들을 약탈하고 케르시 지방을 점거하는 것으로 만족하며 철수했다.
이후 툴루즈를 둘러싸고 헨리 2세와 루이 7세간의 갈등이 고조되었다가, 군사적으로 열세한 루이 7세가 1160년 헨리 2세에게 먼저 사절을 보내 평화 협약을 맺자고 제안했다. 이 조약은 청년왕 헨리와 마르그리트의 약혼과 벡생 백작령 거래를 재확인했으며, 청년 왕 헨리가 루이 7세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것이 포함되었다. 그 후 두 번째 아내 콩스탕스가 사망하자, 루이 7세는 블루아와 샹파뉴 백작의 자매인 아델과 세 번째로 결혼했다. 여기에 엘레오노르의 딸들을 아델의 형제인 블루아 백작 티보 5세와 샹파뉴 백작 앙리 1세와 약혼시켰다. 그는 이를 통해 헨리 2세와 동맹을 맺었던 블루아 백국과 샹파뉴 백국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일 계획이었다. 이에 분노한 헨리 2세는 1160년 11월 청년왕 헨리와 마르그리트가 각각 5살과 3살밖에 안 되었음에도 교황 특사들을 협박해 그들을 즉시 결혼시키고 벡생 백작령을 압수했다.
이제 양자 간의 전쟁이 재개되었고, 티보 5세는 투렌과의 국경 지대에 군대를 배치했다. 헨리 2세는 이 소식을 듣자마자 블루아의 쇼몽 성을 기습 공격해 함락했다. 1161년 양자 간의 소규모 접전이 벌어졌지만, 양자 모두 대규모 전쟁을 벌이길 꺼려 그해 가을 프레트발에서 휴전 협약을 맺었고, 1162년 교황 알렉산데르 3세의 중재 하에 평화 협약을 맺었다. 하지만 프랑스 왕실은 이 일을 계기로 헨리 2세를 어떻게든 약화해야 자기들의 입지를 지킬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2.4.1.2. 대반란
1173년, 헨리 2세는 프랑스 왕국, 스코틀랜드 왕국, 플란데런 백국의 지원을 받은 아들들의 반란에 직면했다. 반란의 배경에는 여러 원인이 있었다. 청년왕 헨리는 공동 왕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실질적인 권력이 없으며, 부하들에게 급료를 지급할 돈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하는 현실에 강한 반감을 품었다. 또한 전직 가정교사인 토머스 베켓의 죽음에 아버지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아버지의 후원으로 브르타뉴 공작이 될 예정인 조프루아 2세도 1171년 브르타뉴 공작 코난 4세가 사망했지만 아직 코난 4세의 딸 콩스탕스와의 결혼이 거행되지 않아서 영지가 없어서 재정적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여기에 헨리 2세에게 강한 불만을 품은 엘레오노르 다키텐이 아들들을 부추겼다.1173년 헨리 2세가 막내 아들 존에게 청년왕 헨리의 소유인 주요 요새 3개를 주기로 결정하자, 청년왕 헨리는 이에 항의하다가 파리로 망명했고, 형제 리처드와 조프루아도 뒤따랐다. 엘레오노르도 이들과 합류하려 했지만 4월에 헨리 2세의 군대에 붙잡혔다. 이후 세 아들은 루이 7세의 후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고, 스코틀랜드 국왕 일리엄 1세, 불로뉴, 플란데런, 블루아 백작들이 여기에 가세했으며, 포허 자작 에우돈 2세와 푸제르 남작 라울 2세도 반군에 가담했다. 잉글랜드, 브르타뉴, 멘, 푸아투, 앙굴렘에서는 주요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노르망디에서는 일부 변경 영주들이 봉기했다. 이렇듯 규모가 엄청난 반란이었지만, 대부분의 잉글랜드와 노르망디 귀족들, 그리고 앙주 전역은 헨리 2세를 여전히 따랐으며, 주요 도시와 요새도 헨리 2세를 따랐다.
1173년 5월, 루이 7세와 청년왕 헨리는 노르망디 수도 루앙으로 가는 주요 경로인 벡생을 침공했다. 여기에 플란데런과 블루아 백작들이 출격해 노르망디를 침공했고, 브르타뉴의 반군은 서쪽에서 진군했다. 이에 헨리 2세는 군대를 조직한 뒤 노르망디에서 반란을 일으킨 자들을 모조리 학살하고 생존자들을 노르망디 국경 너머로 밀어냈다. 이후 브르타뉴 공국으로 쳐들어가서 돌(Dol)을 장악하고 돌 마을 인근에서 브르타뉴 반란군을 궤멸했다. 이후 헨리 2세의 용병들은 루제와 라 게르슈 성을 황폐화하는 등 브르타뉴 각지를 휩쓸었다. 헨리 2세는 아들들에게 평화 협약을 제안했고, 지조르에서 협상이 이뤄지기도 했지만, 곧 결렬되었다.
1174년 1월, 청년왕 헨리와 루이 7세의 군대가 다시 공격하여 노르망디 중부로 진격하려 했다. 그러나 공격은 강력한 국경 요새에 가로막혀 지지부진하다가 겨울 날씨가 찾아오면서 중단되었다. 1174년 초, 헨리의 적들은 그를 잉글랜드로 유인한 뒤 노르망디를 장악하려고 시도했다. 스코틀랜드 국왕 일리엄 1세가 잉글랜드 북부 반군의 지원을 받아 잉글랜드 북부를 침공했고, 반군 귀족들이 순조롭게 영역을 장악하던 미들랜드에 스코틀랜드 분견대를 파견했다. 그러나 헨리 2세는 잉글랜드로 가기를 거부하고, 대신 프랑스 남서부에서 반군을 분쇄하는 데 주력했다. 일리엄 1세의 원정은 헨리의 사생아인 제프리에게 격퇴되면서 중단되었다.
플란데런 백작 필리프 1세는 잉글랜드를 침공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동앵글리아에 선발대를 파견했다. 그러자 헨리 2세는 7월 초에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드디어 그가 미끼를 물자, 루이 7세와 필리프 1세는 육로를 통해 노르망디 동부로 침공하여 루앙을 포위했다. 이에 헨리 2세는 1174년 7월 12일 캔터베리에서 공개적으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폴리엇을 포함한 모든 주교가 자신에게 막대기로 다섯 대를 때리도록 했으며, 캔터베리 대성당의 수도자 80명이 각각 왕에게 세 대를 때리도록 한 다음, 베켓의 성지에 선물을 바치고 베켓의 무덤에서 밤샘 기도를 올렸다. 그는 이를 통해 성직자들의 지지를 확보했고, 흔들리던 왕권을 회복했다.
그 후 헨리 2세는 스코틀랜드 국왕 일리엄 1세가 노섬벌랜드의 알닉에서 지방군에게 패배하고 생포되었으며, 북부의 반란이 진압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8월에 노르망디로 돌아왔다. 루이 7세와 필리프 1세는 그때까지 루앙을 공략하지 못하고 있었고, 헨리 2세는 프랑스군이 루앙에 대한 마지막 공격을 시작하기 직전에 급습을 가했다. 루이 7세는 막심한 타격을 입고 파리로 퇴각한 뒤, 헨리 2세를 당해낼 수 없다고 여기고 평화 협약을 제시했고, 헨리 2세는 이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헨리 2세는 몽루이에서 협상을 열고 전쟁 전의 현상 유지를 기반으로 관대한 평화를 제안했다. 헨리 2세와 청년왕 헨리는 서로의 추종자들에게 복수하지 않기로 맹세했다. 청년왕 헨리는 3개의 요새를 존에게 양도하는 데 동의했고, 헨리 2세는 그 대가로 아들 헨리에게 노르망디에 있는 2개 성과 15,000 앙주 파운드를 주기로 했다. 리처드 1세와 조프루아 2세는 각각 아키텐과 브르타뉴에서 얻는 수입의 절반을 받았다. 반면에 반란의 주동자인 엘레오노르는 올드 새럼 성에 감금되었다. 반란군 영주들은 잠시 감옥에 갇혔고 어떤 경우에는 벌금을 물었고 그 후 토지로 반환되었다. 잉글랜드와 아키텐에 있는 반란군의 성은 파괴되었다. 스코틀랜드 국왕 일리엄 1세는 1174년 12월까지 연금되었다가 팔레즈 조약에 동의하고 나서야 풀려났다. 이에 따르면, 그는 헨리 2세에게 공개적으로 충성을 맹세하고 헨리의 부하들에게 스코틀랜드의 주요 요새 5개를 넘겨줘야 했다. 필리프 1세는 헨리 2세에 대적하는 동맹에 가담하지 않겠다고 맹세했고, 그 대가로 헨리 2세로부터 정기적인 재정 지원을 받기로 했다.
2.4.1.3. 아들들과의 지속되는 불화와 최후
청년왕 헨리는 아버지에게 노르망디 공국을 수여해서 자신과 가족을 품위 있게 부양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했다. 헨리 2세는 거부했지만, 아들의 수당을 늘리는 건 동의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청년왕 헨리를 달래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헨리 2세는 리처드와 조프루아가 청년왕 헨리에게 그들의 땅에 대한 충성을 바치도록 해, 또 다른 내전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리처드는 청년왕 헨리가 아키텐에 대한 권리가 없다고 여기고 거부했다. 이에 분개한 청년왕 헨리는 리처드의 통치에 불만이 있는 아키텐의 일부 불만스러운 영주들과 동맹을 맺었고, 조프루아 2세는 청년왕 헨리 편을 들어 브르타뉴에서 용병 군대를 일으켜 푸아투를 위협했다. 급기야 1183년, 청년왕 헨리가 반란을 일으키기 위해 추종자들을 대거 끌어들였고, 이 소식을 접한 헨리 2세는 리처드 편을 들어 청년왕 헨리를 응징하려 했다.그러던 1183년 6월, 청년왕 헨리는 반란을 일으키기 직전에 이질에 걸려 사망했다. 그 후 헨리 2세는 왕위 계승 계획을 재정비했다. 그는 리처드 1세를 잉글랜드 왕으로 세우기로 하면서도, 자기가 죽을 때까지는 실질적인 권력을 갖지 못하게 했다. 조프루아 2세는 브르타뉴 공국을 계속 유지했고, 헨리 2세의 총애를 받는 존은 리처드 대신 아키텐 공작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리처드는 아키텐 공국에 깊은 애착을 가졌으며, 잉글랜드의 공동왕이라는 무의미한 역할과 바꾸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는 "아키텐 공국은 어머니의 영지인데, 왜 아버지가 멋대로 공작을 정하는가?"라고 격렬하게 항의했다. 이에 분노한 헨리 2세는 존과 조프루아 2세에게 아키텐으로 진군해 리처드를 물리치라고 명령했다. 이렇게 벌어진 짧은 전쟁은 1184년 말에 웨스트민스터에서 양자 간의 휴전 협정으로 끝났다. 헨리 2세는 1185년 초 엘레오노르를 노르망디로 데려와서 리처드에게 아버지의 명령에 복종하라고 지시했고, 만약 이를 따르지 않으면 노르망디와 잉글랜드를 조프루아에게 넘길 수도 있다고 위협했다. 이에 리처드는 아키텐에 있는 공작의 성을 헨리 2세에게 넘기기로 했다.
1186년, 브르타뉴 공작을 맡던 조프루아 2세가 파리에서 열린 마상창시합에 참여했다가 어린 자녀 2명을 남기고 사망했다. 그 후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가 브르타뉴 공국과 조프루아 아이들의 양육권을 요구했고, 리처드가 툴루즈에 파견한 군대를 철수하라고 요구하라고 권고했다. 그러면서 만약 자기 뜻을 따르지 않는다면, 노르망디 공국을 침공하겠다고 위협했다. 여기에 더해, 오랫동안 지지부진하던 리처드 1세와 아델 간의 결혼을 완료하거나 청년왕 마르그리트의 사망으로 과부가 된 마르그리트의 지참금인 벡생 백국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헨리 2세가 무응답으로 일관하자, 필리프 2세는 군대를 일으켜 베리를 침공했고, 헨리 2세는 교황의 개입으로 휴전이 이루어지기 전에 샤토루에서 프랑스와 맞선 대규모 군대를 동원했다 이후 양자 간의 협상이 이어지던 중, 필리프 2세는 리처드 1세에게 헨리 2세에 대항하여 동맹을 맺자고 제안했고, 리처드 1세는 이를 진지하게 고민했다.
1187년, 예루살렘이 살라흐 앗 딘 유수프에게 공략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새로운 십자군을 일으켜 예루살렘을 탈환해야 한다는 여론이 전 유럽을 휩쓸었다. 리처드 1세는 이에 열광해 십자군에 가담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헨리 2세와 필리프 2세는 1188년 초에 비슷한 의도를 밝혔다. 군자금 조성을 위한 특별세가 전국에 부과되었고, 물자와 수송에 대한 계획이 세워졌다. 리처드 1세는 십자군을 조성하는 한편, 1188년 아키텐에서 자신의 정적들을 물리친 뒤 다시 툴루즈 백작을 공격했다. 이는 헨리 2세와 필리프 2세 사이의 휴전 협약을 훼손했고, 양측은 전쟁이 다시 벌어질 것을 예상해 대규모 병력을 동원했다. 필리프 2세가 단기 휴전 제안을 했지만, 헨리 2세는 거부했다. 이 소식을 접한 리처드 1세는 아버지가 자기가 십자군으로 떠나는 걸 저지하려고 일부러 휴전을 맺기를 거부하고 있다고 여기고 강한 반감을 품었다.
1188년 11월, 필리프 2세는 평화 회담을 열고 헨리 2세에게 평화 협정을 공개적으로 제안했다. 그는 리처드 1세와 아델의 결혼을 거행하고, 리처드를 후계자로 공식 지명한다면, 자기가 내건 영토 요구를 철회하겠다고 제안했다. 헨리 2세가 이 제안을 거부하자, 리처드 본인이 아버지에게 자신을 후계자로 인정해달라고 요구했다. 헨리 2세는 침묵했고, 리처드 1세는 공개적으로 편을 바꿔서 모인 귀족들 앞에서 필리프 2세에게 경의를 표했다. 이때 교황청이 개입해 기독교인끼리 싸울 때가 아니라고 호소했고, 1189년 라 페르테 베르나르에서 새로운 회의가 열렸다. 이번 회담에서, 헨리 2세는 리처드가 아닌 존이 아델과 결혼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지만 거부당했다.
아버지가 자기가 아닌 존을 후계자로 세우려는 뜻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사랑하는 어머니 엘레오노르를 여전히 감금해 두는 것에 강한 반감을 품은 리처드 1세는 마침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르망에 있던 아버지를 기습 공격했다. 헨리 2세는 가까스로 탈출한 뒤 알랑송으로 피신했다. 이후 리처드 1세가 프랑스군과 힘을 합쳐 노르망디를 압박하자, 헨리 2세는 적의 추격에 이리저리 쫓기다가 관리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남쪽의 앙주로 방향을 돌렸다. 당시 출혈성 궤양을 앓던 헨리 2세는 극도로 더운 날씨로 인해 병세가 악화했다. 그러다가 적군과 마주칠 위기에 몰리자 쉬농 성으로 피신했다. 이후 리처드 1세와 필리프 2세가 협상을 제안하자, 헨리 2세는 동의했다.
이제 병세가 완연하여 죽음을 눈앞에 둔 헨리 2세는 말에 간신히 앉은 채 발랑에서 두 사람을 만났다. 그는 필리프 2세에게 경의를 표하고, 아델을 보호자에게 넘기고, 그녀가 십자군이 끝난 뒤 리처드와 결혼하는 것에 동의했으며, 리처드를 자신의 상속인으로 인정했다. 또한 필리프 2세에게 보상을 지불하고 주요 성을 보증으로 주기로 했다. 헨리는 들것에 실려 쉬농 으로 돌아갔는데, 그곳에서 존이 내전 도중에 기사들과 함께 리처드 편을 들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고 아꼈던 막내아들 존마저 휘하의 부하 기사들과 함께 리처드의 편에 섰다는 사실에 크게 상심한 헨리 2세는 열병과 궤양에 화병 증세까지 겹쳐 쉬농에서 병마에 시달리다가 1189년 7월 6일 5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4.2. 리처드 1세
리처드 1세는 헨리 2세의 작위를 계승한 직후 제3차 십자군 원정에 뛰어들었고, 어머니 엘레오노르 다키텐과 더럼 주교이자 대법원장 휴 드 퓨세와 법무장관이자 엘리 주교 윌리엄 드 롱챔프를 그녀의 조언자로 세웠다. 그 후 엘레오노르는 리처드의 이름으로 프랑스 내 영지를 통치했고, 월터 드 쿠탕스가 잉글랜드 왕국을 통제했다. 그녀는 공식 문서에 "엘레오노르, 신의 은총으로, 잉글랜드의 왕비"라고 서명했으며, 'teste me ipsa'(내가 직접 증언한다)라는 문구를 덧붙였다. 그녀는 섭정으로서 무난한 통치를 보였고, 백성들은 왕이 오랫동안 부재한 상황에서도 생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그러나 1191년 말 리처드 1세와 함께 십자군 원정을 떠났던 필리프 2세가 프랑스로 돌아오면서 상황이 복잡해졌다. 필리프 2세는 리처드 1세의 명예를 훼손하려 했고, 리처드 1세와의 약혼이 깨진 뒤에도 여전히 엘레오노르의 보호를 받고 있던 이복동생 아델의 귀환을 강하게 요구했다. 그러던 1192년 초, 필리프 2세는 잉글랜드에 있던 존에게 땅을 내주고 아델을 결혼시키게 해줄 테니 리처드 1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라고 권유했다. 존은 이에 따라 윌리엄 드 롱챔프를 포섭해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 이 상황을 감지한 엘레오노르는 2월 11일에 잉글랜드로 돌아갔고, 그해 대부분을 교회 분쟁을 처리하고 롱챔프와 존의 야망을 억제하는 데 소비했다.
그러던 1192년 10월, 리처드 1세가 귀국 도중에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 5세에 의해 생포된 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6세에게 넘겨졌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존은 기회를 포착하고 파리로 달려가서 필리프 2세와 동맹을 맺었다. 그는 이사벨라와의 결혼을 무효로 처리한 뒤 필리프 2세의 누이 아델과 결혼하기로 했다. 그 후 존은 용병 부대를 이끌고 런던으로 진격하여 섭정 위원회에 복종을 요구하였고, 형에 대한 흉흉한 소문을 일일이 열거하며 설득했다. 그러나 호응을 받지 못하자, 왕이 되기 위해 내전을 단행했다. 여기에 필리프 2세도 직접 출진하여 노르망디를 침공했다.
그러나 존은 리처드 1세를 꿋꿋이 지지하는 영주들을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했고, 어머니 엘레오노르가 간절히 설득하자 결국 휴전 협정을 맺기로 했다. 엘레오노르는 1193년 12월 리처드의 몸값을 가지고 독일로 출발했고, 1194년 1월 17일 슈파이어에 도착했다. 그녀는 그곳에서 필리프 2세와 존 왕자가 리처드를 구금하는 대가로 그녀보다 더 높은 가격을 제시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에 그녀는 연례 공물을 포함한 추가 제안을 했고, 하인리히 6세는 2월 4일에 리처드 1세를 석방하기로 했다.
그렇게 잉글랜드로 돌아온 리처드 1세는 엘레오노르의 설득에 따라 존과 화해한 뒤, 자기가 감금되어 있는 동안 노르망디를 침공해 일부 성채 및 마을을 빼앗은 필리프 2세와 전쟁을 벌였다. 그는 압도적인 전투력과 전략전술을 발휘해 프랑스군을 연파하고 노르망디의 요새들을 하나둘씩 탈환했다. 이에 필리프 2세는 리처드 1세의 아키텐 봉신들을 선동해 그의 발목을 잡았다. 리처드 1세가 남프랑스로 진군해 반군 귀족들을 쳐부수려 하자, 필리프 2세는 아키텐 귀족 반란군을 돕기 위해 남하했다.
1194년 7월 3일, 리처드 1세는 프레티발 전투에서 필리프 2세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그 후 조프루아 드 랑송과 앙굴렘 백작 임마흐의 반란을 단번에 격파하고, 기사 300명과 병사 40,000명을 생포했다. 필리프 2세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노르망디로 쳐들어가서 리처드 1세의 봉신들의 군세를 와해시키고, 존과 아룬델 백작의 수하물을 탈취했다. 7월 23일, 교황청이 파견한 사절단의 중재로 띠예흐에서 두 왕의 대리인이 만나 다음해 1195년 11월 1일까지 휴전하기로 합의했다.
1195년 여름, 필리프 2세는 신성 로마 제국으로 가는 잉글랜드 사절단을 억류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에 필리프 2세는 리처드 1세가 신성 로마 제국과 동맹을 맺어 프랑스 왕국을 협공하려 한다고 주장하고, 이는 띠예흐 협정을 위반한 것이라고 규탄한 뒤 노름망디를 기습 공격해 보드회이 요새를 공략하고 파괴했다. 이후 리처드 1세가 군대를 이끌고 오면서 양자가 대치하다가, 그 해 8월 평화 협약이 맺어졌다. 이에 따르면, 리처드 1세는 필리프 2세의 누나 아델을 돌려줬고, 조프루아 2세의 딸 엘레오노르와 필리프 2세의 후계자 루이의 약혼을 맺고, 리처드 측은 이에 대한 지참금으로 지조흐, 부드몽, 노르망 벡쌍, 베흐농, 이브히, 빠씨 등의 영지와 20,000마르크를 제공하고, 필리프 2세는 오말르, 오슈, 아흑슈와 노르망디 요새 몇 채를 반환하기로 했다.
그 후 리처드 1세는 필리프 2세가 노르망디 공국을 침략하는 걸 저지하기 위해 1196년부터 1198년까지 가이야르 성을 건설했다. 당대 기록에 따르면, 이 성을 건설하는 데 들인 비용은 15,000 파운드에서 20,000 파운드에 달했다고 한다. 이 성은 당대 유럽에서 가장 훌륭한 성으로 손꼽힐 정도로 강력한 요새였으며 리처드 1세 생애 마지막 몇 년 동안 가장 좋아하는 거주지였다. 이후 리처드 1세는 필리프 2세와 여러 차례 전쟁을 치르고 휴전을 맺기를 반복했으며, 양자가 파견한 습격대는 서로의 영토를 습격해 약탈을 자행하고 포로의 눈을 뽑았다. 전투 결과는 대부분 리처드 1세가 승리를 거뒀지만, 필리프 2세가 강력한 요새에서 농성하면서 영주들을 포섭해 군대를 빠르게 재건하고 반격을 가하기 일쑤였기에, 좀처럼 결판을 내지 못했다.
그러던 1199년 3월, 리처드 1세는 필리프 2세의 사주를 받아 반란을 일으킨 리모주 자작 아데마르 5세를 토벌하고자 리모주로 진군했다. 리모주 자작이 농성하던 샬루샤브롤 성을 포위한 리처드 1세는 1199년 3월 25일 평상복 차림으로 성벽 가까이 거닐며 전선을 살피다가 성에서 날아온 석궁 화살에 목에서 가까운 왼쪽 어깨 부위를 맞고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뒤 열흘간 고통을 겪다가 1199년 4월 6일에 4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4.3. 존 왕
2.4.3.1. 계승 분쟁
리처드 1세 사후, 동생 존 왕이 형의 작위와 영지를 물려받았다. 필리프 2세는 앙주 가문 간의 내전을 유도하기 위해 조프루아 2세의 아들인 12세의 소년 아르튀르 1세 드 브르타뉴를 잉글랜드 국왕으로 지지한다고 선언했고, 아르튀르는 1199년 5월 필리프 2세와 접견한 뒤 프랑스 내 영지의 주권자로서 경의를 표했다. 브르타뉴군은 앙제를 점령했고, 앙주, 멘, 투렌이 뒤따라 아르튀르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러자 엘레오노르 다키텐은 영지 전역을 돌면서 귀족들에게 존을 주권자로 받들라고 호소했고, 노르망디와 푸아투, 아키텐 귀족들은 엘레오노르의 뜻을 받아들였다.존은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른 뒤 프랑스로 돌아갔고, 앙주, 메인, 투렌의 세네샬 기욤 드 로슈의 중재로 아르튀르 1세 간의 화해가 이뤄졌지만, 1199년 9월 말 아르튀르가 파리로 이동한 뒤 잉글랜드 왕위를 노렸다. 이에 존은 군대를 이끌고 프랑스 남부로 이동하는 한편, 영주들에게 노르망디 동부와 남부 국경을 따라 방어 태세를 취하도록 했다. 플란데런 백작 보두앵 9세와 불로뉴 백작 르노는 리처드 1세와 맺었던 반(反) 프랑스 동맹을 갱신하겠다고 밝혔고, 앙주의 대귀족 기욤 드 로슈는 본래 아르튀르 편을 들었다가 대세가 기울었다는 걸 확인하고 존으로 편을 바꾸었다.
상황이 이처럼 존 쪽으로 유리하게 돌아가자, 필리프 2세는 교황청의 화해 촉구에 따라 1200년 1월 존과 만나 평화를 위한 가능한 조건을 협상했다. 그해 5월, 양자는 르굴레 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필리프 2세는 20,000 마크 상당의 자금을 받는 대가로 존 왕이 노르망디 공국, 앙주 및 아키텐 공국 등 유럽 대륙 영주권을 가지는 걸 인정하며, 존 왕은 아버지 헨리 2세의 손녀인 카스티야의 블랑슈의 지참금을 위해 부르주, 이소둔, 그라카이 등 베리 영지를 필리프 2세의 아들인 루이 왕자에게 양도하고, 그 대가로 필리프 2세는 브르타뉴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고 아르튀르 1세는 존 왕에게 경의를 표해야 했다.
2.4.3.2. 앙굴렘의 이자벨 결혼 문제
1200년, 존 왕은 앙굴렘 백작 에메르 테일페르의 외동딸인 앙굴렘의 이자벨과 결혼하기로 마음먹었다. 존 왕은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 현재 왕비로 삼았던 글로스터 여백작 이사벨라와 헤어지기로 했다. 그는 이사벨라가 자신과 사촌지간이며, 결혼할 때 받아야 할 교황의 결혼 허가를 받지 못했다고 주장해, 그녀와의 관계를 정리했다. 그런데 앙굴렘의 이자벨은 이미 푸아투의 대귀족 위그 9세 드 뤼지냥과 약혼했으며, 위그 9세의 형제인 외 백작 라울 1세는 동부 노르망디 국경지대에 걸쳐 대규모 영지를 소유했다. 뤼지냥 가문의 입장에서는, 이대로 이자벨과의 약혼이 끊어지면 아키텐을 가로지르는 왕의 상품과 군대의 주요 경로를 제공하는 뤼지냥 가문의 이익을 위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존 왕은 이를 신경 쓰지 않았고, 앙굴렘 백작은 딸이 왕비가 되는 걸 흔쾌히 받아들이고 이자벨을 뤼지냥 가문에서 빼돌렸다. 1200년 8월 24일, 존 왕과 앙굴렘의 이자벨은 결혼식을 거행했다.이후 존 왕이 뤼지냥 가문에 적절한 보상을 해주긴커녕 위그 9세를 경멸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자, 뤼지냥 가문은 격분해 반란을 일으켰다. 존 왕이 즉시 군대를 투입해 위그 9세를 축출하고, 위그 9세를 돕기 위해 반란을 일으킨 라울 1세를 압박하자, 위그 9세는 1201년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에게 이 문제에 개입해달라고 간청했다. 필리프 2세는 존을 프랑스의 법정에 소환했다. 잉글랜드 왕이 가지고 있는 프랑스령은 프랑스 국왕에게서 봉토를 받은 형태로, 프랑스령에 한정해서는 필리프 2세가 주군이고 존은 가신이었기 때문에 이런 요청이 가능했다. 존은 자신은 노르망디 공작이라는 특별한 지위에 올랐으므로 필리프의 법정에 출석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필리프는 존을 노르망디 공작이 아니라 그런 특별한 지위가 아닌 푸아투 백작으로서 소환한다고 답했다. 존이 여전히 가기를 거부하자, 필리프는 1202년 존이 봉건적 책임을 위반했다고 선언하고, 프랑스 왕국에 속한 존의 모든 영지를(노르망디 공국 제외) 아르튀르에게 넘기겠으며 노르망디는 프랑스 왕실에 귀속된다고 선언했다.
2.4.3.3. 미르보 전투의 승리와 앙주 제국의 붕괴
존 왕은 프랑스군을 상대로 전면전을 회피하고 주요 성채를 신중하게 방어했다. 그러던 1202년 8월, 이제 15살이 된 브르타뉴 공작 아르튀르 1세가 존 왕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그의 할머니 엘레오노르 다키텐이 피난처로 삼은 루덩 인근의 미르보 성을 포위했다. 엘레오노르는 항복하라는 요구를 거부하고 존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존 왕이 급파한 브람버 제4대 영주 기욤 3세 드 브리우즈가 앙주의 세네샬 기욤 드 로슈와 함께 역습을 가해 적군을 물리치고 아르튀르를 생포했다. 이 소식을 접한 필리프 2세는 아르튀르가 무너지면서 남쪽 측면이 약화하는 걸 막기 위해 남쪽으로 군대를 돌려야 했다.미르보 전투 승리로 존 왕의 입지는 상당히 강화되었지만, 그다음의 처세는 실로 부적절했다. 존은 자신을 도와줬던 기욤 드 로슈가 본래 아르튀르 파였다가 자기편으로 돌아섰던 전례를 고깝게 여기고 있었기에, 그가 이번에 자기를 도와준 공로를 인정하지 않고 무시했다. 기욤은 이에 강한 반감을 품고 존에 대한 충성심을 거둬들였다. 게다가 존은 생포한 귀족 22명을 태양빛 한 점 안 들고 침수돼서 썩은 물이 바닥에 흥건한 지하 감옥에 가둬두어 굶기고 학대하여 옥사하게 했다. 이들은 친족 관계를 통해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기에, 이들과 연관된 노르망디 귀족들은 존의 행동에 극심한 분노를 터뜨렸다.
한편, 아르튀르 1세는 기욤 3세 드 브라우즈에게 넘겨진 뒤 팔레즈에 갇혔다가 다시 루앙 탑으로 이송되었다가 1203년 무렵에 돌연 실종했다. 브르타뉴 공작위는 본래 아르튀르의 누나 엘레오노르가 물려받아야 했지만, 그녀는 1202년 존 왕에게 생포된 뒤 1241년 8월 10일 브리스톨에서 사망할 때까지 억류되었다. 이에 분노한 브르타뉴 귀족들은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고, 기욤 드 로슈 및 존의 다른 지역 동맹들은 필리프 2세 지지로 돌아섰다. 이렇게 동맹이 이탈하면서, 존의 입지는 급격히 약화했다. 그는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사절을 보내 분쟁에 개입하도록 설득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1203년 후반, 존 왕은 노르망디 동부 국경 요새인 가이야르 성을 필리프 2세의 포위로부터 구원하려 했다. 그는 부대를 둘로 나눈 뒤, 한 부대는 본인이 직접 이끌고 배를 타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서 배다리를 파괴해 프랑스군을 양분하고, 윌리엄 마셜이 이끄는 육군이 배다리가 파괴되면서 후퇴할 수 없게 된 프랑스군 분견대를 섬멸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후의 전개는 그의 계획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배에는 군대와 선원 외에도 수비대를 위한 보급품이 많이 실려 있었고, 조류와 조수에 맞서 상류로 노를 저어 가는 데 계획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사이에 마셜이 적군을 급습하면서 일시적으로 우세를 점했지만, 해군이 좀처럼 오지 않는 가운데 적군이 배다리를 건너 본대와 합류해 재정비해 버렸다. 이후 프랑스군은 반격을 가해 마셜의 육군을 몰아냈다. 이윽고 잉글랜드 해군이 배다리에 도착했을 때 프랑스군은 방어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결국 잉글랜드군은 상당한 손실을 보고 퇴각했다. 가이야르 성은 이후에도 꿋꿋이 버텼지만, 프랑스군의 압도적인 공세에 시달린 끝에 1204년 3월 6일에 항복했다.
존 왕은 필리프 2세는 동부 노르망디에서 끌어내기 위해 브르타뉴로 진군하여 브르타뉴 대부분을 성공적으로 황폐화했지만, 동부 노르망디를 빠르게 상실하는 걸 막지 못했다. 그 후 필리프 2세는 압도적인 군세와 지역 귀족들의 열띤 호응에 힘입어 1204년 6월 24일 노르망디 공국의 수도 루앙을 접수하고 노르망디 공국의 모든 귀족으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아냈다. 뒤이어 남쪽으로 진군해 앙주와 푸아투에 무혈 입성했으며, 브르타뉴 여공작으로 알릭스 드 투아르를 세우고 알릭스의 아버지 기 드 투아르를 브르타뉴 보안관으로 세웠다. 존은 전세가 기울자, 잉글랜드 왕국으로 피신했고, 유럽 대륙에서 존이 유일하게 소유한 영토는 아키텐 공국만 남았다.
2.4.3.4. 존 왕의 영지 회복 시도와 좌절
1205년, 잉글랜드로 철숳나 존 왕은 필리프 2세가 잉글랜드까지 쳐들어오는 걸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각 주가 지역 징집병을 동원하는 체계를 수립했다. 이후 필리프 2세가 침략하지 않는다는 게 분명해지자, 그는 푸아투를 향한 잉글래드 대규모 원정대를 편성했고, 본인은 새로운 함대를 창설해 노르망디로 항해하려 했다. 그는 이를 달성하기 위해 잉글랜드 기사 10명 중 1명꼴로 전쟁에 동원하고 나머지 9명은 재정적으로 지원하도록 했으며, 기사들은 전쟁이 지속되는 동안 왕의 휘하에서 복무하도록 했다.존은 공성전을 준비하고자 강력한 공병대 및 상당한 수의 전문 석궁병 부대를 창설했으며, 제3대 솔즈베리 백작 윌리엄 롱게스피, 윌리엄 마셜, 로저 드 레이시, 웨일스 변경백 윌리엄 드 브라오스를 포함한 군사 전문 지식을 가진 유력한 남작들의 지원을 받았다. 존 왕은 전통적으로 사용되는 항구인 도버 항 등 잉글랜드 남동부의 다섯 개 항구 외에도 포츠머스를 추가로 확장했으며, 1204년부터 1212년까지 104척을 건조했다. 잉글랜드 행정관 로섬의 윌리엄이 "갤리선의 수호자"로 임명된 뒤 잉글랜드 남쪽 해안에 흩어진 함대와 상선을 하나의 작전 함대로 통합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렇듯 준비를 철저히 했지만, 상황은 잘 풀리지 않았다. 1205년에 감행하려던 원정 계획은 잉글랜드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킬 조짐을 보이는 걸 수습해야 했기에 중단되었고, 윌리엄 롱게스피가 이끄는 소규모 병력 만이 푸아투로 투입되었다. 1206년, 존은 직접 푸아투로 진군했지만,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국왕 알폰소 8세가 가스코뉴를 위협하자 남쪽으로 방향을 바꿔야 했다. 알폰소 8세의 군대를 국경지대에서 저지하는 데 성공한 뒤, 존은 다시 북쪽으로 이동해 앙주 백국의 중심지인 앙제를 점령했다. 필리프 2세는 존과 대결하기 위해 남쪽으로 이동했지만, 양자 모두 섣불리 전면전을 벌이지 않으면서 교착 상태가 이어지다가 2년간 휴전 협약을 맺었다. 존 왕은 휴전 기간 동안 노르망디를 탈환하기 위한 공세를 준비했다. 그는 막대한 돈을 모집한 뒤, 새로운 동맹을 맺는 데 활용했다. 우선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놓고 프리드리히 2세와 경쟁하던 조카 오토 4세를 회유했으며, 뒤이어 불로뉴의 르노 백작, 플란데런의 페랑 백작을 포섭했다.
1213년 1월, 필리프 2세는 잉글랜드를 침공해 존 왕을 폐위하라는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지시에 순종하겠다는 수아송에서 프랑스 귀족들을 소집한 뒤 교황 특사 판둘프 베라치오의 격려하에 잉글랜드를 침공하기 위한 대규모 함대를 소집하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1213년 5월 존 왕과 교황청 간의 합의가 비준되자, 필리프 2세는 판둘프 베라치오의 권유에 따라 잉글랜드에 대한 원정을 포기하기로 했다. 그 대신, 존 왕이 아직 파문 중이었을 때 수아송에서 소집한 회의에 불참하고 잉글랜드 원정에 동참하기를 거부한 불충한 봉신인 플란데런 백작 페랑을 응징하기로 하고, 당초 잉글랜드를 치려던 대규모 함대를 플란데런 침공으로 돌렸다.
이 소식을 접한 존 왕은 윌리엄 롱게스피에게 플란데런 백작을 도우라고 명령했다. 윌리엄은 잉글랜드 및 플란데런 무장병 700명과 수행원 수백 명, 많은 용병을 수백 척 함대에 태운 뒤 5월 28일 출항해 5월 30일 즈윈강 어귀에 이르렀다. 이때 프랑스 함대는 잉글랜드 함대가 플란데런에 온다는 걸 사전에 인지하지 못한 채 대부분의 함선을 담 해변에 정박하고 겐트를 포위했으며, 많은 선원들은 주변 마을들을 약탈했다.
윌리엄 롱게스피는 프랑스 함대와 이렇게 빨리 마주칠 줄 몰랐기에, 처음에는 플란데런 함대일 거라 짐작했다. 하지만 정찰선을 보내 살펴본 결과 프랑스 함대임을 인지했고, 함선들이 거의 텅 빈 상태인 걸 알게 되자 즉시 공격해 정박해 있던 함선 300척을 나포하고 100척을 불태웠으며, 배에 남아있던 선원들을 약탈했다.( 담 해전) 다음 날 육지에 상륙한 뒤 담 시를 공격했지만 격퇴되자 남은 프랑스 함선들을 사냥하려 들었다.
나중에 이 소식을 접한 필리프 2세는 매우 격노해 6월 2일 담에 도착한 뒤 그곳에 주둔한 프랑스 수비대를 구제했다. 하지만 그곳에서 잉글랜드 선박 무리가 프랑스의 남은 선박을 거의 마음대로 약탈하고 포획하거나 불태운 뒤 유유히 본국으로 돌아가는 걸 보고 이를 갈았다. 이후 다수의 선원이 최근까지 잉글랜드의 영토였던 푸아티에나 노르망디 출신인 점을 의심해 살아남은 선박을 불태우고 담 마을도 파괴하라고 명령했다. 존 왕은 담 해전의 대승에 고무되어 프랑스 원정을 서두르기로 마음먹었다.
1214년 2월, 존은 필리프 2세로부터 노르망디를 탈환하기 위한 원정을 감행했다. 많은 영주들이 군 복무를 거부했기 때문에, 용병 기사들을 대거 고용해야 했다. 존은 푸아투에 상륙한 뒤 북동쪽으로 파리를 향해 진군하고, 동맹 세력인 오토 4세, 불로뉴 백작 르노, 플란데런 백작 페랑이 윌리엄 롱게스피가 이끄는 잉글랜드 분견대와 합세한 뒤 플란데런에서 프랑스 북동부를 침공하기로 했다. 작전이 잘 먹히면 필리프 2세는 군대를 양분할 수밖에 없으니, 연합군은 적을 성공적으로 협공할 수 있을 것이었다.
원정은 초기엔 잘 진행되었다. 존 왕은 필리프 2세의 중앙 집권 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위그 9세 드 뤼지냥과 화해하고 자기편으로 끌어들였고, 느베르 백작 에르베도 그의 편애 섰다. 그 후 존은 3월에 푸아투를 장악한 뒤 루아르강을 건너 앙주를 침공했다. 필리프 2세는 이를 막기 위해 아들 루이 왕자과 함께 정예병을 이끌고 남하했다. 그는 소뮈르와 쉬농을 거쳐 아키텐으로 향하는 존의 퇴각로를 차단하려고 노력했다. 존 왕은 이를 알게 되자 앙주를 버리고 남쪽으로 재빨리 이동해 4월 3일 리모주에 도착했다. 존 왕은 필리프 2세를 가능한 남쪽으로 유인해, 연합군이 플란데런에서 프랑스 북동부를 실컷 유린하도록 유도하려 했다.
그러나 필리프 2세는 존 왕을 더 이상 쫓기를 거부하고, 푸아투의 반란 세력이 지닌 영지를 약탈한 후, 샤토루에서 수천 병력을 아들에게 넘긴 뒤 파리로 귀환했다. 존 왕은 필리프 2세가 떠났다는 소식을 듣자, 방향을 바꿔서 5월에 푸아투로 이동했다. 이후 루아르강을 빠르게 건너 앙주를 재차 침공했고, 루이 왕자의 추격을 교묘하게 따돌려 많은 마을을 접수한 뒤 6월 19일 로슈오무앵 성을 포위했다. 이후 15일간 공방전을 이어가고 있을 때, 루이 왕자가 기욤 드 로슈와 아이머리 1세 드 크라옹이 이끄는 앙주 징집병들의 지원을 받아 인근으로 진군했다.
존 왕은 이들을 요격하려 했지만, 앙주에서 모집한 귀족과 장병들이 그를 위해 프랑스 왕자와 싸우길 거부했다. 결국 존 왕은 7월 3일에 루아르강을 다시 건너 라 로셀로 후퇴했는데, 그 과정에서 후위대가 루이 왕자의 군대에 요격되어 막대한 피해를 보았다. 얼마 후, 존 왕은 1214년 7월 27일 부빈 전투에서 오토 4세, 르노 1세, 페랑이 이끄는 연합군이 필리프 2세의 프랑스군에게 완패했다는 비보를 접했다. 그 후 필리프 2세와 협상한 끝에 앙주를 필리프 2세에게 반환하고 보상금을 지불하며, 6년간 휴전을 맺는 평화 협약을 맺고 1214년 10월에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이후 존 왕은 마그나 카르타를 내세우며 반란을 일으킨 잉글랜드 귀족들 및 그들에 의해 잉글랜드 국왕으로 추대된 루이 왕자를 상대로 제1차 남작 전쟁을 치르다가 1216년 10월 18일 노팅엄의 뉴어크 성에서 이질에 걸려 사망했다.
2.4.4. 헨리 3세의 영지 회복 시도
2.4.4.1. 1230년 프랑스 원정
1227년, 친정을 시작한 헨리 3세는 아버지 대에 프랑스 왕국에 빼앗긴 조상들의 영지를 되찾겠다는 열망에 불탔다. 그는 외교 서신에서 "상속 재산 회수", "권리 회복", "영토에 대한 법적 권리 방어" 같은 용어를 자주 사용했다. 여기에 프랑스 왕실이 통제력을 강화하는 것에 반감을 품은 노르망디와 앙주 귀족들이 헨리 3세에게 비밀리에 사절을 보내 경의를 표하면서, 가급적 빨리 자기들 영지에 군대를 이끌고 와달라고 호소했다. 브르타뉴 공작 피에르 1세 드 브르타뉴도 잉글랜드 왕국과 동맹을 맺고 프랑스 왕국의 통제에서 벗어나길 희망했다. 1226년 10월 19일, 잉글랜드로 파견된 브르타뉴 사절이 웨스트민스터에서 "대륙 공통의 적"에 대한 동맹 조약을 체결했다. 여기에 그의 딸 욜랑드와 헨리 3세 사이의 결혼도 고려되었다.1226년 11월 8일, 프랑스 국왕 루이 8세가 급사하고 12살밖에 안 된 루이 9세가 프랑스 왕위에 올랐다. 그 후 1227년 프랑스 각지의 대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피에르 1세는 즉각 참여했다. 하지만 프랑스군이 반란을 빠르게 수습하고 브르타뉴를 압박하자 즉각 항복했다. 이후 프랑스 당국은 그를 회유하기 위해 생잠 요새, 벨렝 요새, 라 페리에르 요새를 양도하는 방돔 조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피에르 1세는 여전히 독립할 때를 노렸고, 1229년 10월 포츠머스로 가서 헨리 3세에게 경의를 표했다.
1230년 4월 30일, 헨리 3세는 휴버트 드 버그. 라눌프 드 블론드빌, 길버트 드 클레어, 윌리엄 마셜[10]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포츠머스에서 출항했다. 잉글랜드군은 5월 2일 건지 섬에서 휴식을 취한 뒤 5월 3일 생 말로에 상륙했다. 당시 헨리 3세는 왕관과 홀, 흰색 비단 망토를 착용했고, 브르타뉴 공작 피에르 1세의 영접을 받았다. 이후 노르망디로 진군해 프랑스에 대항해서 반란을 일으키기로 약속한 현지 귀족들과 합세하려 했지만, 휴버트 드 버그가 프랑스군과 정면 대결해서는 곤란하다며, 대신 남하하자고 진언하자 이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잉글랜드군은 5월 8일 디낭으로 진군했고, 뒤이어 낭트에 입성해 헨리 3세의 어머니 앙굴렘의 이자벨과 그녀의 새 남편인 위그 10세 드 뤼지냥과 재회했다.
한편, 프랑스 동부에서는 불로뉴 백작 필리프 1세, 쿠시 남작 앙게랑 3세가 섭정단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프랑스 주력군은 이들을 토벌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고, 잉글랜드군의 남하를 저지하는 프랑스군은 앙제에 주둔한 일부 병력뿐이었다. 헨리 3세는 낭트 인근의 우동에서 귀족들이 가세하기를 기다렸지만, 프랑스 동부와는 달리 프랑스 서부에서는 공개적인 반란이 일어나지 않았다. 많은 브르타뉴 귀족은 그에게 경의를 표했지만, 일부는 그에 맞서 성을 요새화했다. 푸아투 영주들은 일반적으로 그에게 경의를 표했지만, 라마르슈 백작 위그 10세는 주저했고, 투아르 자작 기 1세는 루이 9세 편을 들었다.
1230년 6월 말, 헨리 3세는 앙주 백작령을 거쳐 진군해 7월 말 미르보 성을 점령하고 푸아투 백작령으로 들어간 후 가스코뉴로 진입해 가스코뉴 귀족들의 열띤 호응을 얻었다. 이후 브르타뉴로 돌아와 낭트에서 몇 주를 머문 후 브르타뉴 공작 피에르 1세에게 체스터 백작 라눌프 드 블론드빌과 윌리엄 마셜이 지휘하는 잉글랜드군 1500명을 넘긴 뒤 잉글랜드로 돌아가서 1230년 10월 27일 포츠머스에 상륙했다. 그 사이, 루이 9세의 어머니이자 섭정인 카스티야의 블랑카는 브르타뉴 공작 피에르 1세를 반역자로 규탄하고 그의 직위를 박탈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피에르 1세에게 반감을 품었던 아보구르 영주 앙리 1세, 비트레 자작 앙드레 3세, 푸제르 자작 라울 3세, 샤토브리앙 영주 조프루아 4세, 코부르 영주 겔두인 2세, 디낭 영주 리샤르, 레옹 자작 기요마르크 4세 등 주요 영주들이 그로부터 이탈해 프랑스군에게 가담했다.
프랑스군은 1231~1232년 브르타뉴 원정을 단행해 국경 요새들을 공략했고, 생토뱅코르미에까지 진군했다. 게다가 1231년 윌리엄 마셜이 급사하면서 잉글랜드군 단독 지휘관이 된 라눌프 드 블론드빌은 프랑스군과 대결하길 기피하다가 프랑스 측과 1234년까지 이어지는 휴전 협약을 맺고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결국 피에르 1세는 프랑스 왕국에 항복했고, 앙주와 푸아투 귀족들은 루이 9세에게 재차 복종했다.
2.4.4.2. 생통주 전쟁
1241년 말, 푸아투의 대귀족인 라마르슈 백작 위그 10세 드 뤼지냥이 카페 왕조의 통제로 자치권이 점점 상실하는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다른 푸아투 귀족들과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루이 9세는 이에 대응해 1242년 1월 5일 쉬농에서 푸아티에의 알퐁스 백작 초대로 모여든 푸아티에 귀족들을 포섭해 지지를 확보한 뒤, 4월에 대군을[11] 집결한 후 반란 진압에 착수했다. 위그 10세는 압도적인 군세로 몰아붙이는 프랑스군에 대응하기 위해 헨리 3세에게 사절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헨리 3세는 1242년 5월 20일 군대를 이끌고 프랑스 남서부의 항구 도시 루아양에 상륙한 뒤 반란을 일으킨 푸아투 귀족들과 합세해 병력 3만 명가량을 편성했다. 이후 헨리 3세는 루이 9세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화해를 물색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해 7월 21일, 양자는 샤랑트강의 주요 다리 근처에 있는 타이부르에서 다리를 사이에 둔 채 대치했다. 루이 9세와 푸아티에 백작 알퐁스는 샤랑트 강 위의 다리를 내려다보는 샤르텐 성에 주둔했다. 헨리 3세와 라마르슈 백작은 강 반대편에 주둔했다. 샤랑트강은 북쪽으로는 생장당젤리와 푸아투, 남쪽으로는 생트와 아키텐을 잇는 전략적 통로였다.
7월 22일, 잉글랜드군은 프랑스군이 샤랑트강을 건너는 걸 막기 위해 2개의 석궁대를 다리 양옆에 배치한 가운데 다리 입구에 상당한 보병대를 편성했다. 루이 9세는 기사와 무장병들에 적을 돌파하라고 명령했지만, 3차례 공격에도 잉글랜드군이 돌파되지 않자, 최고의 기사 8명과 함께 직접 현장으로 달려가서 선봉대를 이끌고 재차 공세를 개시했다. 프랑스군은 앞장서서 돌격하는 왕의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고 거세게 몰아붙였고, 잉글랜드군은 결국 다리에서 밀려나 본대로 퇴각했다. 기어이 다리를 돌파한 프랑스군의 기세에 짓눌린 헨리 3세는 생트로 퇴각하기로 했다.
루이 9세는 생트로 퇴각하는 적을 즉시 추격했고, 선봉대가 투르네 마을에서 잉글랜드군을 따라잡았다. 잉글랜드 측은 수백 명의 플란데런 출신 프랑스 경보병대만 현장에 도착했고, 자신들은 약 20미터 높이의 고원에 자리잡고 있기에, 적이 추가 부대가 올 때까지 가만히 있을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플란데런인들은 오히려 경사면을 올라가 잉글랜드군을 정면에서 공격했다. 적군이 이런 무모한 행동을 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방심했던 잉글랜드군이 크게 당황해서 쩔쩔매는 사이, 프랑스 지원군이 현장에 도착한 뒤 즉각 전투에 참여했다. 이 때문에 잉글랜드군의 수적 우위는 상쇄되었고, 전투는 그들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바뀌었다.
그래도 잉글랜드군은 최선을 다해 항전했지만, 헨리 3세가 포로나 전사의 운명을 피하고자 동생인 콘월 백작 리처드에게 지휘권을 맡기고 생트로 도망치자, 전의를 급격히 상실하고 왕의 뒤를 따라갔다. 잉글랜드군은 생트 성벽으로 후퇴했다가 프랑스 기병대의 추격으로 수많은 사망자와 포로가 발생했다. 이후 잉글랜드군은 와해하여 각지로 흩어졌고, 헨리 3세는 생트마저 공격당하게 생기자 7월 28일 밤에 생트를 떠나 블레이로 피신했다. 다음 날 아침, 루이 9세는 생트 시민들로부터 도시의 열쇠를 받고 생트에 무혈 입성했다. 한편, 위그 10세 드 뤼지냥은 가망이 없다는 걸 깨닫고 7월 24일에 아내와 세 아들과 함께 루이 9세를 찾아가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구했다. 루이 9세는 그의 생명을 보장해 줬지만, 그가 가지고 있던 푸아티에 성은 몰수되었다.
헨리 3세는 루이 9세가 여세를 이어가 아키텐과 가스코뉴를 완전히 점령하기 위해 남하하는 걸 막기 위해 해군을 통해 항구 도시인 라 로셸을 봉쇄했다. 그러나 라 로셸은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고, 그 사이에 반란에 가담했던 툴루즈 백작 레몽 7세마저 푸아 백작 로제 4세의 훼방에 시달리다가 루이 9세가 이끄는 왕실군의 강력한 압박에 직면한 끝에 1243년 1월에 항복했다. 헨리 3세는 더 이상 가망이 없다는 걸 깨닫고 1243년 3월 12일 루이 9세와 5년간 휴전을 맺자고 요청했다. 루이 9세는 마침 군중에서 이질이 창궐했기 때문에 이에 응하기로 했다. 휴전 협약은 1243년 8월 1일 퐁스에서 체결되었다.
2.4.4.3. 파리 조약
생통주 전쟁에서 실패하면서 자력으로 조상의 영지를 되찾을 길이 없자, 헨리 3세는 외교로 승부를 보기로 하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를 포섭해 자기편을 들거나 그의 귀족들이 자신의 작전에 가담하도록 허용하기를 바랐다.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의 차기 황제 선거에 개입해 동생인 콘월 백작 리처드를 독일왕으로 옹립하기 위해 제국 내 잠재적인 지지자들에게 기부금을 지불했다. 리처드는 1256년 독일왕에 선출되는 데 성공했고, 독일에 종종 들렀지만,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국왕 알폰소 10세와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했다. 헨리 3세는 동생이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되면 프랑스를 압박해서 잃어버린 조상의 영지를 되찾는 길이 될 거라 믿었지만, 잉글랜드 귀족들은 그가 공연한 일에 막대한 재원을 낭비하고 자기들의 재산에 손을 댄다고 여겨 반감을 품었다.결국 잉글랜드 귀족들은 1258년 헨리 3세를 상대로 반기를 들었고, 헨리 3세는 그들과 협상한 끝에 왕의 자의적인 통치를 중지하고 귀족으로 구성된 15명의 위원회가 사법관, 수상, 재무관을 임명해 국정을 통치하며, 3년마다 한 뻔씩 열리는 의회가 위원회를 감시한다는 내용의 <옥스퍼드 조례>에 서명했다. 1259년, 헨리 3세는 왕권이 귀족들에게 휘둘리는 현 상황에서 프랑스 왕국과 갈등을 이어가는 건 아무 소용 없고, 도리어 유럽 대륙에 그나마 간직하고 있는 가스코뉴마저 프랑스에 빼앗기게 될 거라 여기고, 프랑스 왕실과 종전 협약을 맺기로 마음먹었다. 그해 말, 헨리 3세와 엘레오노르 왕비는 시몽 드 몽포르와 귀족 위원회의 많은 인사들의 호위를 받고 파리로 향했다. 그 후 루이 9세와 평화 협상을 이어간 끝에, 1259년 12월 4일 파리 조약이 체결되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루이 9세는 잉글랜드 왕실의 영지인 샤랑트강 남쪽의 리무쟁, 페르고르, 기옌, 케르시, 아제네 및 생통주의 소유권을 인정한다.
2. 헨리 3세와 후계자들은 이 영지들의 영주로서 프랑스 국왕에게 경의를 표해야 하며, 매년 임대료를 파리에 바친다.
3. 잉글랜드 국왕은 프랑스 국왕이 노르망디 공국과 투렌, 앙주, 푸아투, 멘 일대의 지배권을 그대로 가지는 걸 인정한다.
4. 잉글랜드 국왕이 보유해야 할 섬은 프랑스의 귀족이자 아키텐 공작으로서 잉글랜드 국왕의 소유물이 된다.
2. 헨리 3세와 후계자들은 이 영지들의 영주로서 프랑스 국왕에게 경의를 표해야 하며, 매년 임대료를 파리에 바친다.
3. 잉글랜드 국왕은 프랑스 국왕이 노르망디 공국과 투렌, 앙주, 푸아투, 멘 일대의 지배권을 그대로 가지는 걸 인정한다.
4. 잉글랜드 국왕이 보유해야 할 섬은 프랑스의 귀족이자 아키텐 공작으로서 잉글랜드 국왕의 소유물이 된다.
이리하여 카페 왕조와 플랜태저넷 왕조간의 백여 년간 이어진 갈등은 일시적으로 종식되었고, 헨리 3세는 루이 9세에게 경의를 표하고 그의 호의를 얻었다. 이후 노르망디 공국은 프랑스 왕실의 직할령으로 귀속되었다.
2.5. 프랑스 왕국의 지배와 백년 전쟁
프랑스 국왕들은 노르만족의 충성심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에, 프랑스 출신 세네샬을 노르망디의 수도 루앙에 파견해, 그곳에서 군림하며 통치를 행사하도록 했다. 그렇지만 노르망디는 왕실 영지 내에서 몇 가지 독특한 특징을 유지했다. 먼저, 노르망디의 지역 법은 계속해서 법원 판결의 기초로 사용되었다. 1315년, 노르망디 귀족과 도시민들은 자신들의 자유에 대한 왕권의 끊임없는 침해가 벌어지고 있다며, 프랑스 왕실에 노르망디 헌장을 승인해달라고 요청했다. 노르망디 헌장은 왕의 자의적인 통치가 노르망디 영주와 도시의 자유를 침해하는 걸 원천적으로 금지했다. 루앙 재무부의 판결은 노르망디에서 최종 판결로 규정되었고, 파리 법원은 루앙에서의 판결을 뒤집을 수 없었다. 또한, 프랑스 왕은 노르만 영주들의 동의 없이는 새로운 세금을 부과할 수 없었다. 그러나 프랑스 국왕들이 점점 강력한 권력을 확보하면서, 노르망디 헌장은 여러 번 무시되었다.프랑스 왕실의 직할령으로 편입된 이래 오랫동안 선임되지 않았던 노르망디 공작은 1332년 4월 26일 장 왕자가 프랑스 국왕이자 아버지인 필리프 6세에 의해 노르망디 공작으로 선임되면서 부활했다. 필리프 6세는 장남 장 왕자를 후계자로 공인함으로써 갓 출범해서 입지가 불안정한 발루아 왕조를 안정시키려 했다. 장 왕자는 노르망디 공작으로서 뒤이은 백년 전쟁에서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의 침략에 맞서 항전했다. 그 후 1350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프랑스 왕위에 오른 장 2세는 1355년 12월 7일에 장남 샤를 왕자를 노르망디 공작으로 선임해 후계자로 공인했다. 노르망디는 백년 전쟁 시기에 잉글랜드군의 침략으로 고통받았고, 나바라 국왕이자 에브뢰 백작 카를로스 2세 등 많은 영주가 잉글랜드 편을 들기도 했지만, 프랑스 왕실은 끝까지 노르망디 공국의 주도인 루앙을 지켜냈고, 이를 기반삼아 노르망디 공국을 유지했다.
그러던 1417년, 잉글랜드 국왕 헨리 5세는 프랑스에서 부르고뉴 공작 용맹공 장이 이끄는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냐크 백작 베르나르 7세 다르마냐크와 오를레앙 공작 샤를 1세가 이끄는 아르마냑파가 내전을 벌이느라 혼란한 틈을 타 대대적인 공세를 개시했다. 그는 1420년까지 2차 캉 공방전, 루앙 공방전 등 여러 전투에서 승승장구한 끝에 노르망디 전역을 휩쓸었다. 1420년 5월 21일, 프랑스 국왕 샤를 6세는 파리 인근까지 진군한 헨리 5세의 압력에 버티지 못하고 트루아 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헨리 5세는 이제까지 확보한 영토를 인정받고, 샤를 6세와 이자보의 딸인 카트린 드 발루아와 결혼하고, 샤를 6세가 사망한 뒤 프랑스 국왕이 되며, 헨리 5세와 카트린의 아들이 뒤이어 프랑스 국왕이 될 것이었다. 이리하여 잉글랜드 왕국은 1204년 존 왕이 노르망디를 상실한 지 216년 만에 노르망디를 되찾았다.
1422년 8월 31일 헨리 5세가 병사한 뒤, 헨리 5세와 카트린 드 발루아의 외아들인 헨리 6세가 잉글랜드 국왕이자 노르망디 공작이 되었고, 여러 총독이 왕을 대신해 노르망디를 통치했다. 그러나 잉글랜드군은 샤를 7세를 위시한 프랑스 왕국군의 반격으로 점점 밀렸고, 노르망디 내에서도 막대한 세금을 뜯어가고 걸핏하면 약탈을 일삼는 것에 분노한 노르망디 백성들의 연이은 봉기가 터지면서 점점 통제력을 잃어갔다. 급기야 1449년 11월 1일, 노르망디의 수도 루앙이 샤를 7세의 진두지휘에 힘입은 프랑스군의 맹렬한 공격으로 함락되었고, 1449년 12월 프랑스 포병대장 장 뷔로가 노르망디의 항구도시 아르플뢰르를 공략했고, 1450년 1월엔 몽플뢰르가 함락되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잉글랜드 전역이 발칵 뒤집혔고, 수많은 시민이 길거리에서 대규모 항의 시위를 벌였다. 잉글랜드 당국은 민심을 수습하고 잃어버린 노르망디 영토를 탈환하기 위해 토머스 키리엘에게 2,500명 가량의 병력을 맡겼다. 키리엘은 포츠머스에 군대를 집결시킨 뒤 1450년 3월 노르망디로 출항하여 3월 15일 셰르부르에 상륙했다. 키리엘은 바이외에서 프랑스군의 위협을 받고 있는 수비대를 강화하기 위해 행군하다가 프랑스군이 점령한 발로뉴를 포위했다. 이때 서머셋 공작 에드먼드 보퍼트의 군대가 가세하면서, 그의 군대는 4,000명에 이르렀다. 4월 18일 발로뉴 수비대의 항복을 받아낸 키리엘은 바이외로의 행군을 재개했다. 그러나 그가 발로뉴를 공략하느라 시간을 허비한 사이, 프랑스군이 이들을 격멸하기 위해 집결했다. 클레르몽 백작 장 2세는 3,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노르망디 해안을 따라 코탕탱 반도로 이동해 카랑탄에 자리를 잡았고, 아르튀르 드 리슈몽이 이끄는 2,000명은 쿠탕스에서 북상했다.
키리엘은 행군 도중에 적이 기다리고 있는 카랑탄을 지나는 대신 썰물 때만 접근할 수 있는 수 마일 길이의 둑길을 통해 바레 강 하구를 건넜다. 장 2세는 적의 이같은 행보를 확인했지만 섣불리 공격하지 않고 리슈몽에게 적군의 이동에 대해 알리는 전갈을 보낸 뒤 멀리서 잉글랜드군을 추격했다. 4월 14일 밤 바이외에서 10마일 떨어진 포미니 마을에 숙영한 키리엘은 자신들을 추격하는 장 2세의 프랑스군을 이곳에서 격퇴하기로 하고 전투를 준비했다. 그 후 1450년 4월 15일에 벌어진 포미니 전투에서, 잉글랜드군 4,000명이 전멸하고 토머스 키리엘과 헨리 노베리가 생포되었다. 반면 프랑스군의 사상자는 500~1,000명에 불과했다.
포미니 전투 소식은 노르망디 전역에 빠르게 확산되었고, 수많은 도시들이 잇따라 프랑스군에 항복했다. 잉글랜드 정부는 패전 소식을 듣고 급히 존 파스톨프가 이끄는 3,000명의 새로운 군대를 창설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노르망디의 잉글랜드 잔여 병력은 서머셋 공작 에드먼드 보퍼트의 지휘하에 캉에 들어가서 농성했지만 6월 12일 샤를 7세의 지휘를 받은 프랑스군의 맹공을 버티지 못하고 항복했다. 그리고 1450년 8월 12일 노르망디 내 최후의 잉글랜드 거점인 셰르부르가 함락되면서, 잉글랜드는 노르망디를 완전히 상실했다.
2.6. 이후
1465년, 프랑스 국왕 루이 11세는 자신에게 반기를 든 공익연맹의 압력에 따라 18세의 동생 샤를 드 프랑스를 노르망디 공작으로 세웠다. 1466년, 샤를은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2세와 불화를 빚는 데다 노르망디 귀족들을 복종시키는 데 실패해 통치에 애를 먹었다. 이 상황을 본 루이 11세는 왕실군을 파견해 노르망디를 순식간에 석권했다. 샤를은 브르타뉴 공국으로 도망친 뒤 프랑수아 2세와 화해했다. 1468년 여름, 루이 11세는 투르에서 삼부회를 소집한 뒤 노르망디를 왕실 직할지로 반환하기로 했다.1468년 9월 2일, 루이 11세는 군대를 일으켜 브르타뉴 공국을 침공해 앙센을 포위해 5일간의 공방전 끝에 9월 7일에 함락했다. 그 후 9월 10일에 교황청의 중제하에 프랑수아 2세와 동생 샤를로부터 "왕의 훌륭한 종이 되겠다"는 서명을 받아낸 뒤 두 사람을 사면하기로 한 앙센 협약을 체결했다. 그 후 샤를은 연간 연금 12,000 리브르를 받는 대가로 노르망디의 주권을 정식으로 포기했다.
1469년 11월 9일, 루이 11세는 노르망디 재무부 회의를 소집한 뒤 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공작의 반지를 모루 위에 올린 후 깨뜨렸다. 이는 프랑스 왕실이 노르망디를 왕실 고유의 영토로 간주하며, 두 번 다시 신하에게 양도하지 않을 거라는 분명한 의사표시였다. 이후 노르망디 공작은 사실상 사라졌다. 1660년 루이 14세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국왕으로 막 복위한 찰스 2세의 동생인 요크 공작 제임스에게 노르망디 공작 칭호를 수여했지만, 실질적인 권한은 없었다. 1785년, 루이 16세는 갓 태어난 아들 루이 샤를에게 노르망디 공작 칭호를 수여했다. 그 후 프랑스 왕국은 프랑스 대혁명으로 무너졌고, 노르망디 공작은 두 번 다시 프랑스 내에서 등장하지 않았다.
한편, 영국의 군주는 채널 제도에 한해 비공식적으로 노르망디 공작을 칭한다. 채널 제도는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 1세의 후손 영국 국왕 찰스 3세가 재위하고 있는 왕실의 속령이기 때문에, 영토가 엄청나게 줄어들었을 뿐 노르망디 공국은 채널 제도에 여전히 존속한다는 농담도 있다. 물론 채널 제도의 건지, 저지 자치정부는 공식적으로는 찰스 3세를 국왕이라 칭하지만, 아직도 채널 제도의 현지 주민들은 노르망디 공작(Duke of Normandy)이라 부른다고 한다. 엘리자베스 2세가 1967년 노르망디 본토를 방문했을 때도 프랑스 국적인 노르망디 본토의 현지 주민들이 여공작 만세!(Vive la Duchesse!)라고 외치며 환호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한편 자코바이트파는 명예혁명을 ' 의회가 왕을 자신들 마음대로 갈아치운 쿠데타'로 간주하여 명예혁명 이후에 즉위한 영국 역대 왕들의 정통성을 모조리 부정하기 때문에 이들의 노르망디 공작 칭호 또한 불법적으로 사용한 칭호로 여기며, 그에 따라 현 자코바이트 왕위 요구자이면서 바이에른 왕국과 그리스 왕국 비텔스바흐 왕조의 왕위 요구자이기도 한 프란츠 폰 바이에른을 명목상의 노르망디 공작으로 내세운다.
3. 역대 군주
노르망디 공작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루앙 백작 | 노르망디 공작 | ||
노르만 왕조 | ||||
롤로 | 기욤 1세 | 리샤르 1세 | 리샤르 2세 | |
노르망디 공작 | ||||
노르만 왕조 | ||||
리샤르 3세 | 로베르 1세 | 기욤 2세 | 로베르 2세 | |
노르만 왕조 | 블루아 왕조 | 플랜태저넷 왕조 | ||
앙리 1세 기욤 클리토 기욤 아델린 |
에티엔 | 조프루아 | 앙리 2세 | |
플랜태저넷 왕조 | ||||
리샤르 4세 | 장 1세 | 앙리 3세 | ||
프랑스 왕국 치하 노르망디 공작 | ||||
발루아 왕조 | 부르봉 왕조 | |||
장 2세 | 샤를 1세 | 샤를 2세 | 자크 | |
부르봉 왕조 | ||||
루이 샤를 | ||||
랭커스터 왕조 치하 노르망디 공작 | ||||
앙리 4세 | 앙리 5세 | }}}}}}}}} |
- 루앙 백작
- 노르망디 공작
- 잉글랜드 정복
- 앙주 제국
- 프랑스 왕국 치하 노르망디 공작
- 랭커스터 왕조 치하 노르망디 공작
- 명예 칭호
4. 여담
2018년 게임 토탈 워 사가: 브리타니아의 왕좌에서 후반 위기를 조성하는 세력으로, 바이킹 세력으로 분류된다. 인게임 후반부에 잉글랜드 남부 바다에서 등장하며, 노스 세력과 함께 논플레이어블 세력이지만 고유 로스터를 가지고 있다. 멀티플레이에서는 사용이 가능하다.
[1]
'결지왕' 존이 땅을 잃어 실질적으로 멸망한 시점.
[2]
최종 소멸
[3]
잉글랜드 왕이 겸직하기도 함.
[4]
카롤루스 대제의 아들인 경건왕
루도비쿠스 1세의 손자로 본디 동프랑크의 국왕과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였지만 일시적으로 서프랑크의 왕위를 획득했다.
[5]
역사가들은 롤로가 양도받은 영토가 어느 정도인지에 대해 의견이 엇갈린다. 여러 학자는 루앙, 에브뢰, 리지외 지역을 양도받았을 거라고 추정하지만, 노르만 중세 역사가 피에르 보댕(Pierre Bauduin, 1964 ~ )은 루앙 시와 그 주변 일대만 수여받았을 거라고 추정한다.
[6]
리샤르는 이들을 이교도라고 지칭했으며, 리샤르 1세가 이들의 압력에 굴복해
기독교를 저버리고 우상을 숭배했다고 주장했다.
[7]
리샤르 1세의 어머니 스프로타가 스페를렝 드 피트르라는 이름의 부유한 노르만 귀족과
데인족 방식으로 재혼해서 낳은 아들이다.
[8]
1053년에는 레오 9세 본인이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노르만족을 공격했지만
치비타테 전투에서 대패하여 인질로 잡혀 있다가 노르만족의 칼라브리아와 아풀리아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하는 조건으로 풀려나 간신히 로마로 돌아오기도 했다.
[9]
기욤 2세의 잉글랜드 원정을 다룬 '바이외 테피스트리'에서는 코난 2세가 디낭에서 기욤 2세에게 도시의 열쇠를 바치며 항복했다고 묘사되었지만, 현대의 많은 학자들은 브르타뉴 원정 실패를 감추려고 꾸며낸 것으로 간주한다.
[10]
헨리 3세의 섭정이었던
윌리엄 마셜의 아들이자 제2대 펨브로크 백작
[11]
동시대 연대기 기록에는 5만 명에 달했다고 기술되었지만, 현대 역사가들은 2만 5천 명이었으리라 추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