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7-23 19:58:31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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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황3. 진행4. 결과5. 관련 문서

1. 개요

한국어: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 브뤼메르 쿠데타
프랑스어: Coup d'État du 18 Brumaire
독일어: Staatsstreich des 18. Brumaire VIII
영어: Coup of 18 (Eighteenth) Brumaire
일본어: ブリュメール[ruby(十八日, ruby=じゅうはちにち)]のクーデター, [ruby(霧月政変, ruby=むげつせいへん)]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 혹은 브뤼메르 쿠데타 1799년 11월 9일, 프랑스 제1공화국에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주도 하에 실행된 쿠데타다. 프랑스 공화력으로 이 날이 브뤼메르(안개의 달, 무월) 18일에 일어난 정변이었기 때문에 보통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라는 명칭으로 잘 알려져있다. 이 쿠데타를 통하여 5인 총재정부가 전복되고 나폴레옹이 통령 자리에 오른데 이어 프랑스 제국을 선포하고 스스로 황제 자리에 오르게 된다. 사학계에서 일반적으로 프랑스 혁명을 실질적으로 종결시킨 쿠데타라고 평가받는 사건이기도 하다.

정말 나폴레옹이 주도한 건지를 놓고서는 말이 많다. 일단 쿠데타 수립 초기 단계에서는 5인 총재 중 하나였던 시에예스가 모든 것을 주도했던 게 확실하다. 나폴레옹 본인부터가 '애초에 나는 바지 사장이고 실권은 시에예스에게 있음'이라고 증언했을 정도. 다만 어쨌든 쿠데타 이후 나폴레옹은 교묘하게 모든 권력을 자신의 손으로 가져오는데 성공한다. 그래서 이를 놓고 '쿠데타 안의 쿠데타'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다.

2. 상황

테르미도르 반동 이후 자코뱅의 공포정치가 종결되고 5인의 총재가 이끄는 총재 정권이 수립되었지만 공화국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내부에서는 살아남은 일부 자코뱅과 왕당파는 양 쪽에서 총재 정부를 공격해댔고 외부에서는 오스트리아 제국이 영국과 함께 2차 대프랑스 동맹(Second Coalition)을 결성하여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이집트 원정을 떠난 사이 다시 프랑스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을 재개한다. 결국 프랑스는 혁명 전쟁 초기처럼 다시 패배를 거듭했고, 이런 총체적 난국의 상황에서 5인 총재 중 하나였던 에마뉘엘 조제프 시에예스는 총재 정부를 뒤엎을 쿠데타를 계획하기 시작한다.

한편 1799년 9월 나폴레옹이 이집트에서 프랑스로 귀환하는데, 원정결과와 상관없이 민중들은 나폴레옹을 영웅으로 열렬히 환대했다. 그리고 민중의 지지를 이끌어 낼 인물이 필요했던 시에예스는 나폴레옹을 쿠데타에 가담시키는데 성공한다. 나폴레옹의 설득하에 탈레랑, 보나파르트 주르당, 장 바티스트 베르나도트 등도 쿠데타에 참여할 것을 결정하면서 계획은 급물살을 타게 된다.

3. 진행

당초 계획은 혁명전쟁으로 인하여 파리에 배치된 군대를 활용하여 정부에 압력을 가한 뒤 총재들의 사임을 이끌어내고 원로원과 500인 의회를 해산시킨 뒤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는 것이었다.

공화국 8년 브뤼메르 18일에 나폴레옹은 동생 뤼시앵 보나파르트를 시켜 원로원에게 파리 시내에서 자코뱅이 주도하는 테러가 자행됐다고 보고했고, 이를 구실로 파리에 주둔중이던 군대의 지휘권을 맡는 한편으로 모든 정부기관을 파리 근교의 생클루(Saint-Cloud)로 이전시켜버린다. 이어 시에예스를 비롯한 5인의 총재 중 세 명이 사임한다. 하지만 남은 두 명은 열혈 자코뱅파였기 때문에 사임을 거부하였으며 결국 나폴레옹의 명령으로 체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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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다음날이 되자 원로원과 500인 의회는 슬슬 이 사건이 나폴레옹의 주도하에 진행되는 쿠데타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다. 이들의 저항을 분쇄하기 위해 나폴레옹은 소수의 척탄병과 함께 500인 의회로 진입하여 연단에 올라 의원들을 설득하기 위해 연설을 했다. 하지만 500인 의회는 나폴레옹에게 극도로 적대적이었고 단순히 야유를 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의 멱살을 잡고 신체적인 공격을 가하기까지 했다.

의원들을 설득할 수 있을 거라고 여겼던 나폴레옹은 욕설을 듣고 멱살까지 잡히자 크게 당황하여 횡설수설했고, 잠시 의회 밖으로 쫒겨났다. 그가 무력하게 낙담하는 것을 본 병사들도 나폴레옹에 대한 의구심을 품은 찰나, 이런 상황을 수습한 것은 바로 나폴레옹의 동생이자 당시 500인 의회 의장인 뤼시앵이었다. 그는 혁명 초기 열혈 자코뱅 지지세력이었기 때문에 자코뱅과도 친목이 있었다. 무력이 필요하다고 여긴 그는 직접 칼을 빼들고 나폴레옹을 겨누면서 "집권 이후 혁명의 정신을 배반한다면 내가 먼저 형을 처단하겠다!"라고 외치며 극적인 장면을 연출했고, 그 순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역시 다시 정신을 차려서 병사들에게 "내가 너희들을 믿어도 되겠는가?"라고 외치며 병사들을 고무시켰다. 그와 함께 조아킴 뮈라가 기가 막힌 타이밍에 "돌격 앞으로!"를 외치며 병사들을 이끌고 의회로 진입하여 의원들을 강제로 끌어내어 해산시켜버리면서 쿠데타는 성공리에 종결된다.

4. 결과

막후에서 쿠데타를 기획한 시에예스는 나폴레옹이 명예욕은 강하지만, 권력욕이나 정치감각은 대단치 않을 것으로 오판하고, 나폴레옹에게 상당한 수입에 종신임기가 보장되는 명예직을 미끼로 제안하여 그의 권력을 제거하려 시도했다. 하지만 이는 오판이었다. 나폴레옹은 권력만 쥐고 있으면 수입도 임기도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데 왜 명예직을 받아들이겠냐며 시에예스를 배신했고, 도리어 시에예스가 명예직을 받고 물러나는 결과로 귀결되었다.

결국 쿠데타 이후 채택된 새로운 헌법에 의거하여 시행된 선거의 결과, 나폴레옹을 제1통령으로 하는 3인 통령정부 형태의 새로운 정치기구가 들어섰다. 제1공화국의 끊임없는 정치적 혼란과 음모에 질려있던 민중들은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침묵함으로써 쿠데타를 지지했다. 지방에서 자코뱅 파들이 봉기를 일으키기는 했으나 손쉽게 진압당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점차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시작하여 임기를 10년에서 종신으로 늘리더니, 1804년 5월 18일에는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 프랑스 제1제국을 선포한다.

후일담으로 쿠데타 당시 성난 의원들로부터 나폴레옹을 보호했던 두 명의 척탄병들은 훗날 나폴레옹이 황제로 즉위한 뒤, 직접 그의 저녁 만찬에 초대를 받는 영광을 얻었다. 그리고 칼침을 막은 병사는 다이아몬드 반지를 하사받았다. 반대로, 쿠데타에서 결정적인 공을 세운 뤼시앵은 형이 황제가 되자, 환멸감에 자기 가족을 데리고 프랑스를 떠나버렸다. 자신이 선언한대로 혁명정신을 배신한 형을 처단하지는 못했지만, (나폴레옹에게 빌붙어서 여러 나라의 왕위 등을 받아먹은 다른 가족과는 달리) 형에게 동조하기를 거부한 것.

5.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