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R.R. 톨킨의 소설에 등장하는 존재에 대한 내용은 아이누(레젠다리움)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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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홋카이도, 도호쿠 북부( 아오모리현, 아키타현, 이와테현) 그리고 러시아의 사할린, 쿠릴 열도, 캄차카 반도 등지에 걸쳐서 분포했던 민족.아이누는 크게 '홋카이도 아이누', ' 사할린 아이누', ' 쿠릴 아이누'로 나뉜다. 옛날 아이누인들 사이에서는 각각 '카이(Kai)', '쿠이(Kuyi)' 또는 '쿠예(Kuye)', '쿠르(Kur)'[1]라 불렸다.
혼슈의 도호쿠에도 에미시라고 불리던 "도호쿠 아이누" 세력이 존재했고 헤이안 시대에 일본 관군과 충돌하기도 했다. 하지만 역사 시대를 거치며 일본에 단계적으로 복속되어 에도 시대인 17세기 기록에는 43가구 정도 남아있던 걸로 보고될 정도로 감소했다. 현재는 야마토 민족에 동화되어 대부분 사라졌으며 이들의 흔적은 도호쿠 내 일부 지명이나 도호쿠벤 내 몇몇 요소 등으로 남아있다.
이외에도 "캄차카 아이누" 혹은 " 아무르 아이누" 등이 각각 18세기, 20세기까지 존재했으나 현재는 러시아인, 캄차달인, 울치족 등에 동화되었다.
언어는 본래 아이누의 고유언어인 아이누어를 사용했으나 현대에 들어와서는 일본어가 많이 쓰인다.
2. 명칭
- 일반적인 로마자 표기: Ainu
- 아이누어: アィヌ(Aynu)[2], ウタリ(Utari)[3]
- 일본어: アイヌ( 아이누, Ainu)[4]
- 러시아어: Айны( 아이니, Ajny)[5][6]
옛날 일본에서는 턱수염을 새우에 비유해 '蝦夷'라고 쓰고 발음은 에미시(えみし), 에비스(えびす), 에조(えぞ)[7] 등으로 불렀다.
아이누라는 명칭은 아이누족이 자신들과 교역을 하는 일본인들에게 자신들을 오랑캐 취급하는 '에조' 대신 불러달라고 요구한 명칭이다. 반면에 자기들끼리 자기 민족을 부르는 명칭은 '동포'를 의미하는 우타리(ウタリ, Utari)이다. 즉 '아이누'는 다른 민족이 자신들을 지칭할 때 불러주길 바라는 명칭이고, '우타리'는 아이누족이 스스로를 부르는 명칭인 셈.
17~18세기 일본 문헌에 아이노(アイノ)로 기재된 경우도 많다. 아이누어의 /u/는 일본어의 う(우~으)단과 동일하지 않아서 일본인들 귀에 お(오)처럼 들리기도 하기 때문이었다.
3. 인구
이른 시기 문명권에 동화된 도호쿠 아이누(에미시)를 제외한 대다수 아이누족은 대대로 홋카이도와 사할린, 쿠릴, 캄차카 등에 거주했다.일본 홋카이도의 아이누는 2017년 기준 12,300~13,000명으로 집계된다. 1억 명이나 되는 인구를 자랑하는 일본인에 비하면 훨씬 적지만 아래 러시아 지역의 아이누들에 비하면 압도적으로 많다. 비공식적으론 대략 20만 명으로 추측되나 일본의 인종차별 문제와 야마토 민족과의 통혼 및 일본인으로 동화로 인하여 정확한 인구 수는 알 수 없다. 홋카이도 다음으로 많이 사는 곳이 도쿄 및 수도권 지역으로 1989년 조사에 따르면 약 1만 명 이상이 살고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러시아의 아이누는 2021년 기준 300명, 대부분의 인구가 캄차카 반도에 살고 있다. 러시아 지역 아이누들은 일본 패망 이후 대부분이 일본인으로 간주되어 이들 중 90% 이상이 일본인들과 함께 추방당했다. 소련에 남아있었던 이들 또한 강제 수용소로 끌려갈 위험 때문에 일본식 성씨를 슬라브 성씨로 바꾸고 러시아인들과 통혼해서 후손 스스로가 자신이 아이누인지를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때문에 러시아 연방 인구 조사국에서는 아이누는 러시아에서 멸종된 소수민족으로 보고 있으며 2012년에 러시아 아이누들은 러시아 내 공식 민족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민족 명단에서 러시아인이나 캄차달 혹은 무국적자로 분류된다고 한다. 또한 수가 매우 적고 자신을 아이누로 인식하는 이들 또한 아이누어를 쓰지 않고 러시아 아이누 문화를 보전하려고 하는 행동 등을 보이지 않아서 다른 극동 지역의 소수민족들과는 다르게 어업이나 사냥할 권리 등과 같은 혜택을 받지 못한다고 한다.
4. 외모
일본의 국립유전학연구소와 도쿄대학이 만든 본토 일본인, 류큐인, 아이누와 동아시아 민족들의 계통수. 한국인과 본토 일본인이 유전적으로 서로 가장 가까웠고, 아이누와 가장 가까운 민족은 류큐인이었다. |
전 세계에 존재하는 42개 인구 집단 간의 유전적 거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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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인(해당 도표에서는 Northeast Asian, 즉 동북아시아인으로 표기되어 있다.)에 속하는 민족과 그 밖에 여러 민족의 대분류와 유전적 거리를 알 수 있다. |
아시아에 존재하는 39개 인구 집단 간의 유전적 거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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홋카이도 아이누 | |
사할린 아이누 | 쿠릴 아이누 |
러시아 탐험가와 홋카이도 아이누 |
북극 문화권의 최남단 민족으로[8][9][10] 외모는 주위의 일본인이나 한국인과 같은 동북아시아 계열보다는 상대적으로 유라시아인이나 인도인과 좀 더 닮았으며, 체모가 많다.[11]
아이누인들은 고아시아인의 분파로서 그 기원이 굉장히 오래된 인종이며, 근대 유럽의 탐험가들이 이들을 보고 처음에는 러시아 농부 혹은 집시와 닮았다며 착각한 경우가 많았다. 한때 "극동에 백인이 살고 있다"며 놀라기도 했고, 그 덕에 아이누 백인설이 퍼지기도 했지만 사실 고아시아인은 유럽의 코카시아 인종과 유전적 거리가 멀다. 반대로 러시아인을 처음 본 일본인들은 그들을 ' 붉은 아이누(피부색이 붉은 아이누)' 혹은 '금발 아이누'라고 말한 바 있다. 사실 당시에는 인종적 개념이 잡히지 않은 상태로 조선시대에 온 외국인들도 영양 상태가 좋은 양반을 보고 아리아인 또는 백인의 후손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다.[12] 마찬가지로 이 당시 서구에서 아메리카 원주민이나 무어인에 대한 차별은 인종 개념보단 기독교를 믿지 않는다는 명목이었다[13]. 러시아에도 아이누들이 살고 있으므로 연구가 오랫동안 진행되었는데, 그들의 외모는 어보리진 및 폴리네시아인에 가까운 외형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그들의 특징으로는 눈이 들어가 있으며 흰 피부[14]에서부터 까만 피부까지, 코가 짧고 넓은 형태, 긴 인중, 사냥을 위해 손과 발이 발달되어 있다.
기본적으로 황인에 속하나 일본 열도로 이주 또는 고립되기 이전에 살던 대륙에서 고대 북유라시아인(ANE) 그룹과 관련된 '고대 북시베리아인(ANS)'[15] 혈통을 일부분 물려받았기 때문에 이들 사이에서 ANE 관련 유전자가 높은 빈도로 나타난다.[16] 아이누인들이 중앙아시아와 거리가 멀리 떨어져있는 곳에서 주거했음에도 서양인과 닮은 이국적인 외모를 보이던 것도 상대적으로 고대 북유라시아인들과 많이 혼혈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조몬인은 아이누인의 혈통 비율 중에서 66%~79.3%를 차지한다. 그 다음은 류큐인이 가장 높은 비율을 보이는데, 조몬인은 류큐인의 혈통 비율 중에서 27%를 차지한다.[17]
조몬인은 현대 일본인의 혈통 비율 중에서 3.3%~13%를 차지한다. 즉, 도래인 계통의 야요이인은 현대 일본인의 혈통 비율 중에서 87%~96.7%를 차지한다. (연구 모델을 조몬인과 야요이인을 염두에 두고 설계했다.)[18]
또한 주의해야 할 점이 있는데, 종종 일본인에 관한 생물학적인 연구를 할 때, 일본 내에 존재하는 류큐인, 아이누인, 본토 일본인( 야마토 민족)을 각각 비슷한 숫자로 표본을 수집하여 일본인이라는 하나의 집단으로 연구 결과를 낼 때도 있다. 이렇게 되면 1억 2천만 명이 넘는 일본 인구 중 류큐인과 아이누인은 소수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유전 형질 비중( 조몬인 계통)이 심하게 과대평가된다. 과학계에서 이런 식으로 표본을 편향되게 수집하여 의도적으로 원하는 결과를 유도하는 행태가 아예 없는 게 아니므로 주의해야 한다. 의도한 부분은 아니었겠지만 암내 유전자 비율을 조사할 때도 유사한 경우가 있었다.
일본 열도의 양극단에 위치한 홋카이도와 오키나와에서 살아온 아이누와 류큐인이 본토 일본인보다 조몬인 혈통 비율이 눈에 띄게 높다는 것은 한반도를 통한 인구 유입이 그만큼 많았고, 일본인의 직계 조상인 야요이인이 한반도를 통해 유입되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지명에 기반한 언어학적 관점에서 옛날 아이누의 분포를 파악하면 위 그림과 같다. 의외로 혼슈 동북부 지방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고전후 시대까지 도호쿠 아이누(에미시)는 일본 동북부 지방에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자체적인 국가 형성에는 실패했고, 7세기 무렵부터 11세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 진행된 본격적인 일본의 정복 활동과 압박에 복속하거나 투항하여 야마토 민족에 완전히 동화되었다.
홋카이도의 레분 섬에서 발견된 조몬인 여성의 유골 DNA를 분석한 결과, 밝은 갈색 눈, 젖은 귀지, 알코올 분해가 가능한 형질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유전적 구성이 한국인, 울치족, 대만 원주민과 유사했다. #
5. 신화 및 설화
자세한 내용은 아이누 신화 문서 참고하십시오.6. 문화
6.1. 음악
아이누어로 노래를 우포포(ウポポ)라고 한다.묵쿠리의 모습
톤코리의 모습과 톤코리를 연주하는 여성
아이누의 전통 악기로는 주즈하프(Jew's harp)를 닮은 채명악기인 묵쿠리(ムックリ, Mukkuri)와 사할린 지역에서 쓰인 오현금(五弦琴)인 톤코리(トンコリ, Tonkori) 등이 있다. 묵쿠리는 위 사진의 오른쪽 손잡이 부분을 왼손으로 꽉 잡고 중간 목 부분을 이빨로 물고 오른손으로 왼쪽의 줄을 퉁기듯이 채면 그 탄력으로 악기가 진동하며 칼림바 비슷한 독특한 소리가 난다. 물고있는 위치를 조절해 제한적인 고저 조절을 하고 악기를 놓지지 않도록 오른손으로 고리줄을 움켜쥔다.
아이누 음악 뮤지션으로는 톤코리 연주자인 오키(OKI, 본명 가노 오키·加納沖)와 그가 이끄는 밴드 '오키 덥 아이누 밴드'(Oki Dub Ainu Band), 안도 우메코(安東ウメ子, 2004년 작고) 등이 있다.( 아이누 음악 스튜디오 CHIKAR STUDIO 사이트)
안도 우메코의 페캄베 욱(Pekambe Uk, 밀 수확 노래). 톤코리 반주는 오키의 연주다. |
사할린 록(Sakhalin Rock) |
수마 무카르(Suma Mukar) |
6.2. 요리
아이누 요리는 사냥으로 얻은 육류나 해산물을 많이 이용하며 야생에서 채집하는 식물이나 소규모 농경으로 수확한 작물들을 사용한다. 현재 홋카이도에 아이누 음식점이 드문드문 있다고 한다.- 오하우(オハウ, Ohaw): 생선, 육류, 산나물, 채소 등을 넣어 끓이는 국. 연어를 많이 쓰는 모양. 홋카이도의 일본요리인 연어 전골 이시가리나베(石狩鍋)가 오하우의 영향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 라타스켑(ラタシケㇷ゚, Rataskep): 채소나 산나물, 콩과 기름(생선기름이나 비계)을 소금간 하여 섞어 만드는 요리. 요즘 만들어지는 것은 버터를 쓰며 비주얼이 단호박 샐러드나 감자 샐러드 비슷하다.
- 사요(サヨ, Sayo): 식물 피나 쌀 등으로 만드는 죽 요리
- 시토(シト, Sito): 아이누의 떡 요리다. 고대 일본에서 먹던 떡인 시토기(しとぎ)가 기원으로 추정된다.
- 치타탑(チタタㇷ゚, Citatap): 생선이나 육류를 다져 만든 요리다.
- 루이베(ルイベ, Rui-be): 연어를 얼려서 익히지 않고 먹는 것.[19]
- 토노토(トノト): 식물 피나 다른 잡곡을 원료로 해서 빚은 아이누 전통주이다.
홋카이도를 배경으로 한 청년 만화인 골든 카무이는 요리만화 수준으로 아이누 요리가 많이 나온다. 이 문서보다 골든 카무이 문서가 아이누 요리에 대해 더 자세하게 다루고 있을 정도.
7. 역사
7.1. 선사시대
유골 등을 통한 고고학 연구에 의하면, 아이누인들은 일본사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조몬 시대를 주도한 조몬인들의 직계 후손으로 추정된다. 단, 아이누인들이 완전히 순수한 조몬인의 후예는 아니고, 북방에서 내려온 퉁구스 계통이나 니브흐 계통, 후대에 들어온 일본인들과 어느 정도 유전자가 섞였다. 다만 광범위하게 진행되지 않았을 뿐이다.고고학적으로 홋카이도에서 발견되는 찰문토기(擦文土器)로 대표되는 사츠몬 문화(擦文文化, 7세기~13세기)를 현재 아이누 문화의 기원으로 추정한다. 어업을 중심으로 사냥과 소규모의 농경으로 식량을 구했으며, 철기도 제조하고 사용했다. 수혈식주거(움집) 생활을 했다. 출토되는 동전과 거울을 통해 야마토 왕권과의 교류를 통해 대륙 문명적 요소를 어느 정도 받아들였다.
또한 아무르강에서 남하한 말갈 계통의 오호츠크 문화도 아이누 문화에 영향을 끼쳤다. 이들 오호츠크계 민족들은 형제인 아무르 지역의 흑수말갈 부족들과도 자주 교류했다.[20] 이들은 결국 11세기 경에는 일본 열도에서 북상한 아이누의 직계조상들인 사츠몬 문화와의 경쟁에서 밀려났으나, 곰 숭배 신앙이나 어업 위주 생활상 같은 몇몇 깊은 문화적 유산을 남겼다.[21]
7.2. 고대
' 일본사'의 영역은 규슈와 간사이부터 동쪽으로 군사적으로 정복하면서 팽창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은 아이누를 포함하여 야마토 조정의 통치가 닿지 않는 국가들을 싸그리 에미시(えみし)라고 부르며 정복했는데, 이를 군사적으로 달성하는 직책의 이름이 정이대장군(征夷大将軍), 즉 쇼군이었다.정이대장군이 되면 북방 정복을 위해 마련된 군사력을 손에 넣을 수 있었고, 그 세력이 미치는 국가 지역은 혼슈 동북부였는데 이는 혼슈 서부에 위치한 천황과 제법 거리가 떨어져 독자 군대 세력을 구축할 수 있었다. 이 정이대장군이 군대를 이끌고 '에미시'를 정복하고 혼슈 북부를 점령해 갔으며, 이후 차차 중앙의 통제력이 떨어져가자 종국에는 둘의 권력이 뒤집혔다는 것이 일반적인 분석이다.
나라 시대부터 강력한 황권을 바탕으로 일본 조정은 동북부 지방 정복과 개척을 더욱 가속화했다. 이에 에미시들은 반란을 일으켜 일본의 거점 성들을 공격했고 때론 일본에 귀순하거나 협력했다. ' 후슈'라 불리는 이 귀순자들은 일본인에 완전히 동화된 상태다. 결국 헤이안 시대 초기인 8세기 말~9세기 초에는 이와테-아키타 중부 이남의 영역이, 헤이안 후기인 11세기 중후반에 이르면 혼슈 전역이 일본의 영토에 편입되었다.
주의할 점은 당시 일본에서 ' 에조' 내지는 ' 에미시'라는 단어는 자국의 세력에 들지 않은 동북방의 주민들을 일괄적으로 싸잡아 지칭하던 표현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 오랑캐'와 유사한 의미였다. 에미시라는 범주에 속하는 대다수가 아이누의 조상을 비롯한 조몬계 민족들인 것은 사실이나, 일부 독립적인 도래인계 소집단 역시 포함된다. 때문에 완전히 아이누와 일치하는 개념은 아니다.
훗날 홋카이도 개척이 시작된 시점부터 에조와 아이누가 확실히 같은 대상을 지칭하는 표현을 지칭한다고 해석된다. 이 시기에 와서는 혼슈 섬이 일본 문화권에 완전히 속하면서 일본 본토와 홋카이도의 아이누 계통이 확실하게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7.3. 중세
나라 시대~ 헤이안 시대 북벌의 영향으로 이후 에미시들의 귀순과 거주지 이주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가마쿠라 시대 이후에는 소규모의 부락들을 제외하면 도호쿠 지방은 야마토 민족에 완전히 동화되었다. 다만 도호쿠보다도 먼저 동화된 가고시마현의 민속이 하야토의 문화요소를 일부 계승하는 것처럼[22], 도호쿠에도 에미시의 흔적이 남아있으며 각종 지명에서 에미시 언어의 흔적이 발견된다. 또한 마타기라는 수렵민 세력, 그리고 가고시마벤처럼 이질적인 도호쿠벤은 에미시 문화의 잔재로 여겨진다.몽골 제국은 사할린 아이누가 살던 사할린 섬을 타타르 해협을 건너 1264년, 1284년, 1285년, 1286년에 침공하기도 했다. 원사 세조본기에 따르면 1만의 병력을 투입했는데, 아이누인들에게 이는 가히 날벼락이었다. 몽골군은 사할린을 정복한 후 군사 거점을 확보하고 둔전을 설치하면서 많은 아이누들을 학살했다. 하지만 하필 1287년 몽골 제국 본토에서 대규모 군사반란이 발발하자 사할린에 주둔중이던 몽골군이 반란군들을 진압하기 위해 다시 몽골 제국 본토로 철군하면서 몽골 제국은 곧 사할린 직접 지배를 포기하는 대신 조공 체제로 변경하여 사할린을 간접적으로 지배했다.
비슷한 시기에 했던 몽골 제국군의 쓰시마 · 규슈 침공과 어떤 연관이 있지 않을까 짐작하기 쉽지만, 원나라, 명나라 대의 군사 지도를 보면 사할린과 홋카이도, 혼슈가 쭉 이어졌다는 지식이 당시에 부재했다.[23]
무로마치 시대인 15세기 경 홋카이도 끝자락인 오시마 반도에 일본인들이 도래했다. 다케다 일족의 분파인 카키자키(蠣崎) 가문이 오시마 반도의 마츠마에 번을 거점으로 삼아 다스리기 시작했다. 카키자키 가문은 도요토미 정권으로부터 이 에조치(蝦夷地, 에조의 땅)의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이들의 지도 하에 개간된 지역을 통틀어 '와진치'(和人地, 화인들의 땅)이라고 한다.
7.4. 근세
검은색: 와진치(和人地) 하얀색: 에조치(蝦夷地) |
센고쿠 시대가 끝나고 일본에는 평화와 안정의 시대가 찾아왔다. 이는 다시 인구의 증가와 도시의 발전으로 귀결된다. 전 일본을 오가는 상단이 출현하였으며, 따뜻한데다 주요 국내 교통로로 쓰였던 세토내해 일대에서는 상품작물 재배가 촉진되었다. 특히 이전까지는 조선에서 거의 전량 수입에 의존했던 면직물을 일본이 자급하게 되면서, 면화 농장과 염료인 쪽 농장이 곳곳에 생겨났다. 그러나 면화는 지력을 엄청나게 소모하는 작물이었기에 비료 투입이 필수적이었는데, 이때 일본인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때마침 홋카이도 일대 해역에 폭증하기 시작한 청어 떼였다. 마쓰마에로 몰려든 일본인들은 상품 청어는 건조하여 긴키 지방에 팔았고,[25] 하품 청어는 쪄서 어유를 분리해 등유로 내다 팔고는 남은 깻묵을 비료로 만들었다. 이외에도 말린 연어나 말린 다시마 역시 수익성 좋은 상품이었기에,[26] 수많은 일본 상인들과 어부들이 서일본 항로를 타고 마츠마에로 올라왔다. 이로써 홋카이도는 본격적으로 일본사에 편입되기 시작했다. 아이누들은 몰려드는 일본 상인들에게 임노동자로 고용되며 서서히 종속되어 갔다.
아이누들은 자신들의 생선과 모피를 마츠마에 번이 가져오는 철제 무기, 금속 도구나 쌀 등으로 맞바꾸었다. 아이누와의 무역을 독점한 마츠마에 번이 주도한 이러한 무역 관계는 아이누들을 탄압하면서 진행했기에 아이누들에겐 절대적으로 불리하게 적용되었다. 불만이 폭발한 결정적 계기는 다름아닌 어떤 아이누 소년 때문이었다. 1457년 코샤마인의 난이 발발하기 전 어떤 아이누 소년은 인근 일본인 대장장이에게 날카로운 강철검인 소도(小刀)의 제작을 부탁하기 위해 시노사토(현 하코다테)로 갔으나, 일본인 대장장이는 소도 제작에 터무니 없이 비싼 가격을 제시했고 이에 항의한 아이누 소년을 보고 화가 난 일본인 대장장이는 자신의 검으로 그 아이누 소년을 베어 죽였다. 이 사건이 결국 자신들의 영토들이 에도 막부의 식민지가 되어 탄압받았던 아이누들의 불만을 폭발시켜 결국 각종 반란들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따라서 코샤마인의 난(1457년)이나 샤쿠샤인의 난(1669년), 쿠나시르 메나시 전투(1789년)같은 대규모 전투와 대규모 반란들이 종종 발발했다. 지금도 이 당시에 아이누들이 건설한 챠시(チャシ)라는 전쟁성채 유적들은 여럿 남아 있다. 그러나 마츠마에 번은 이러한 아이누 반란군들을 에도 막부의 군사적 지원을 받아가며 제압해 마츠마에 번의 명예와 입지를 강력하게 떨치는 용도로 사용했고, 1807년 전 에조치가 에도 막부의 식민지에 들어가면서 홋카이도 아이누들도 에도 막부의 완전한 영역으로 복속되었다.
이 사건의 배경엔 당시 북쪽의 막부 호족인 난부 일족(南部氏)과 안도 일족(安東氏)이 자신들의 세력확장을 위해 아이누족을 이용했다는 설과 다케다 노부히로가 에미시들의 영토를 식민지배하기 위해 일부러 반란을 부추겨서 일으키게 만들었다는 설이 있다. 아이누인들의 항쟁은 그 후에도 약 1세기가 넘게 계속되었지만 최종적으로 다케다 노부히로의 군대가 아이누들을 거의 다 학살하면서 끝이 났다. 결국 아이누에 대한 지배권을 갖게 된 다케다 노부히로는 마쓰마에 번(松前藩)을 만들었다. 그러나 마쓰마에 번의 형성 후에도 마쓰마에 번의 사무라이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명검이 얼마나 날카로운지 시험용도로 살아있는 아이누들을 베어 죽이는 츠지기리를 행하는 등 아이누인들을 아주 잔인하게 학살하거나 탄압했기 때문에 이러한 학살과 차별과 핍박에 대한 증오는 앞서 전술했던 샤쿠샤인의 반란, 쿠나시리 및 메나시 전투 등 아이누의 대규모 반란들을 계속해서 터져나오게 만들었다.
에도 막부 말기에 들어서는 북쪽에서 내려오는 러시아 제국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에조치 전체가 막부 직할령이 되었다. 다만 얼마 안 가서 다시 마츠마에 번이 다스리기 시작했는데, 군사적 중요성이 높게 평가되어 이전의 3배인 고쿠다카 3만 석에 책정됐다. 또한 방위를 위해 거점인 마츠마에에 예외적으로 성의 건설을 허가했으며, 이 성은 가장 북쪽에 있는 일본식 성으로서 오늘날에도 남아 있다.
7.5. 근대
1868년 에도 막부가, 1869년 보신전쟁을 통해 에조 공화국이 멸망하고 홋카이도는 에도 막부를 뒤이은 일본 제국 치하에 들어갔다. 일제는 아이누를 구 토인(旧土人)이라고 불렀으며, 일본의 인류학자들은 아이누를 '인간의 덜 진화된 모습'으로 간주했다. 1899년 제정된 《홋카이도 구 토인 보호법(北海道旧土人保護法)》은 아이누인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말이 보호법이지 그 내용은- 아이누의 토지 몰수
- 수렵 금지
- 아이누 고유 풍습 금지
- 일본어 사용 의무화
- 일본식 이름으로 개명
등으로 아이누 말살법이었다. 또한 이 시기에 홋카이도 개척 관련 법에 따라 아이누인에게 따로 농지를 나누어 주기는 했는데 수렵 생활을 해온 아이누인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농사를 강요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또한 오랫동안 수렵생활을 해와 토지의 소유권 및 임대에 대한 인식이 미비했던 아이누인들은 농사에 익숙한 이주 일본인들에게 농지를 빌려주다가 빈곤 문제로 농지를 팔거나 사기당하는 일도 잦았다. 결국 새로운 농지에 정착하지 못하고 수렵도 금지당한 아이누인은 빈민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아이누 여성들 또한 일본인의 첩으로 들어가 혼혈아를 낳아야 하는 참담한 역사도 있었다.
아이누 다큐멘터리 <당신은 아름답다>에서 보면 아이누의 후손들은 돌을 맞고 개라고 놀림받았으며[27] 결혼이나 취직에도 불이익을 당했다고 한다. '사카이 미나'라는 아이누족 여성은 학창 시절 아이누라고 놀림당해 자신의 털을 상처나면서까지 깎아야했고, 아이누 노인의 말에 따르면 아이누인들은 일터에서 아이누어를 쓰다 걸리면 감독관에게 꾸중들었다고 한다.
한때는 일본 내 공교육에서도 아이누의 취급은 미묘했는데, 홋카이도 개척사를 다루면서 "홋카이도에는 사람이 없고 곰과 아이누만 살았다."고 황당한 서술을 해버린 탓에, 아이들이 아이누를 인간이 아닌 무슨 동물의 일종으로 알고 자랐다.
러시아 제국에서는 쿠릴 열도와 사할린에 살고있는 아이누들을 일본인으로 간주하고, 정체성을 아이누로 인지하는것을 금지하고 러시아식 이름을 강요했다.
아이누의 비극적 역사에 관한 좋은 참고 자료로는 가야노 시게루가 쓴 '아이누 민족의 비석'이라는 책이 있다. 국내에도 번역 출간되어 있다. 이 책은 주로 가족과 개인의 체험을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는데, 이보다 더 민족의 전체상을 다룬 내용을 원한다면 '변경에서 바라본 근대(부제: 아이누와 식민주의)'라는 책도 일본의 아이누에 대한 폭압적인 식민정책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 밖에 야스히코 요시카즈의 ' 왕도의 개'에서도 19세기 일본의 이른바 홋카이도 '개척'에 의해 자신이 살던 땅에서 노예 취급을 받으며 살아가는 아이누의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노다 사토루의 골든 카무이가 정발되는 등 일본 근현대사에서도 제대로 다루지 못한 아이누의 차별이 조금씩 재조명되고 있다.
7.6. 현대
패전 이후 민주화가 달성되면서 아이누인들은 일본 사회에서 스스로의 권익을 찾기 시작했다.1997년 니부타니 댐 건설 금지 소송은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홋카이도 비라토리 정(平取町) 니부타니(二風谷) 일대는 원래 아이누들이 연어잡이 의식을 치르는 종교적 성지였으나, 1973년 정부에서 댐을 건설했으며 아이누들의 피해는 보상금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그러나 가야노 시게루를 비롯한 아이누들은 이를 거부하고 니부타니 댐 건설 금지 소송을 제소했다.
1997년 "토지 몰수는 위법이나, 이미 건설된 댐을 파괴하는 것은 공익에 위배되므로 불가능하다."라고 최종 판결이 나왔다. 하지만 이때 법원에서 아이누족이 일본의 원주민족이라는 것과 아이누의 권리를 인정했으며, 이는 아이누인들에게 있어서 크나큰 의의였다. 또한 아이누 측이 원고 패소했음에도 불구하고 재판비용을 부담하지 않게 되었다.
또한 1994년에 학자이자 니부타니 댐 반대운동을 주도했던 가야노 시게루(萱野茂, 1926~2006)가 아이누 최초의 참의원 의원이 되었으며,[28] 1997년에 구 토인 보호법을 폐지하고 《아이누 문화 진흥법》을 제정하는 업적을 이루었다.
아이누족은 2008년까지도 일본 정부에서 "민족"으로서 인정받지 못했다. 특히 1986년에는 총리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일본은 단일민족국가다."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일본 정부가 간신히 "일본에 소수민족이 존재한다"고 인정한 게 1996년이며, 그나마 아이누를 소수민족으로 인정한 건 2008년의 일이다. 아이누를 민족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즉 아이누에게 국제법상의 민족자결권이 인정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경우에 따라 아이누족이 이를 근거로 독립을 요구할 수도 있기 때문에 신중해질 수밖에 없는 문제로, 자국 내의 소수민족을 인정하지 않는 경향은 대체로 어느 나라에나 있다. 그러나 국제인권법은 국내에 소수민족이 존재한다고 결정하는 것은 국가의 재량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일본 정부는 2019년에 아이누족들을 '원주민'으로 인정한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서는 러시아와의 쿠릴 열도 분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 아이누를 자국의 소수민족으로 인정하고, 분쟁 지역을 자국민이 대대로 거주해온 곳이라고 주장한다면 국제 사회에서 상당한 우위를 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 사회에서 아이누에 대한 인식 개선이 이루어지는 시점과 러시아와의 영토 분쟁이 본격화되는 시점이 거의 일치한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8. 현대 일본에서의 입지
문화를 지키려는 아이누족과거와 달리 현대 일본에선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는 아이누에 대한 긍정적 인식도 늘었다. 일본 제국 시절에는 야요이인을 뿌리로 하는 야마토 민족 중심의 단일민족이 곧 일본인이라는 것이 진리였다. 그렇기에 아이누는 탄압당했고 전후에도 그 잔재가 남아서 여전히 아이누에 대한 인식이 안 좋았지만, 현대에는 인식 개선이 많이 이루어졌다. 그래서 아이누의 문화와 관련된 것들이 각종 상품으로 나오기도 한다. 특히 과거에 아이누의 땅이었고 현재도 아이누 문화의 영향이 강하게 남은 도호쿠와 홋카이도에서 아이누 문화는 그야말로 훌륭한 관광자원이다. 그래서 창작물 속 도호쿠 출신 캐릭터와 홋카이도 출신 캐릭터가 굳이 아이누 혈통으로 설정되지 않더라도 아이누 문화와 엮이는 경우가 많다.
다만 지금도 차별이 아예 사라진 건 아니고,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일본인이 근대 시기 홋카이도에서 원주민 아이누의 권리를 빼앗고 탄압했다"는 인식이 아직 다수를 차지하지는 않는다. 일본의 역사 교육에서도 홋카이도의 아이누인 탄압보다는 일본인의 홋카이도 개척을 좀더 중시하는 경향을 보인다. 아이누인의 탄압 역사를 완전히 인정하게 된다면 근대 시절 홋카이도로 이주한 일본인의 홋카이도에 대한 권리 등도 아이누인들에게서 빼앗았다는 이유로 권리 보유의 정당성을 다시 논해야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극우 세력 중에는 아이누가 일본 열도의 거주민이었다는 것을 부정하고 아이누에 대한 탄압의 역사도 인정하지 않는 이들이 꽤 많다. 오히려 아이누가 오히려 일본 정부에 혜택을 받았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반대로 이런 탄압의 역사 때문에 아이누에 대한 동정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일본에는 아이누 민족의 권익을 지키고 고유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아이누 민족당이라는 정당이 있다. 그러나 가리유시 클럽(구 류큐 독립당)이 류큐의 독립을 주장하는 것과 달리, 아이누 민족당은 그러지 못하고 있다. 아이누족은 류큐인들의 오키나와현이나 아마미 군도와 달리 자신들끼리의 근거지를 상실한 상태[29]이고 이미 일본인 정체성에 동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누 민족당은 현실적으로 접근해서 일본 사회 내에서 아이누족의 권익을 보호하고 아이누 문화 보존을 지원하는 것을 요구하는 정도이다.
홋카이도 시라오이군에 아이누 박물관이 있다. 아이누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홈페이지에 방문하거나 직접 갈 만하다. 우뽀뽀이(민족공생상징공간)
9. 아이누 출신
9.1. 실존 인물
- 가야노 시게루 - 일본의 정치인[30].
- 가야노 시로 - 아이누 민족당의 창립자이자 가야노 시게루의 차남이다.
- 안도 우메코 - 일본의 가수, 아이누어 교사, 아이누 문화 보전 운동가.
- 아테루이 - 중세시대 도호쿠 아이누족의 족장.
- 우카지 시즈에 - 아래 우카지 타카시의 모친이자 아이누 민족당 부대표.
- 우카지 타카시 - 일본의 배우.
- OKI - 일본의 음악가이자 예술가.
- 이보시 호쿠토 - 일본의 와카 작가, 사회운동가
- 코샤마인 - 무로마치 막부 시대 홋카이도의 아이누족 지도자로, 코샤마인 반란[31]의 주인공.
- 샤쿠샤인 - 샤쿠샤인의 난을 일으킨 아이누족 수장.
- 히라무라 펜리우쿠 - 메이지 시대의 아이누 지도자. '아이누의 아버지'라 불리는 영국인 성공회 선교사이자 아이누 연구가인 존 배철러 대부제에게 아이누어를 가르쳤으며, 한국에서 유명한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일본 기행문에도 기록되어있는 사람이다.
- bless4 - 일본의 혼성 4인조 가수[32].
- OTYKEN - 시베리아 아이누 원주민으로 구성된 러시아의 혼성 인디 밴드.
9.2. 가공 인물
※ 아이누의 문화가 모티브인 경우는 ◇ 표시.- 고바야시네 메이드래곤 - 칸나 카무이◇[33], 키문 카무이
- 골든 카무이 - 아시리파, 인카라맛, 키로란케, 우이루쿠, 에노노카[34]
- 나루토 - 이누즈카 키바◇
- 닌자보이 란타로 - 아토이
- 무한의 주인 - 요시노 도우아
- 모노노케 히메 - 아시타카 & 산
- 몬스터 헌터 시리즈
- 별난 양반 이선달 표류기 - 털렁털렁발, 수염주머니 노인, 그 외 아이누인들
- 사무라이 스피리츠 시리즈
- 사키 -Saki- - 시시하라 사와야◇[38]
- 샤먼킹
- 호로호로
- 피리카
-
앙상블 스타즈!! -
아마기 히이로, 아마기 린네[39] - 야타가라스 - 쥬즈마루
- 에버소울 - 하루◇
- 오오카미 - 오이나 족◇
- 왕도의 개 - 등장 아이누인들
- 용사다 시리즈 - 아키하라 셋카◇
- 장갑악귀 무라마사 - 에미시◇
- 칭송받는 자 - 등장인물 대다수◇[40]
- 칼 이야기
- 쿠마미코 - 아마야도리 마치[41]
- Pokémon LEGENDS 아르세우스 - 영빈(포켓몬스터)◇, 윤슬(포켓몬스터)◇
- 함대 컬렉션 - 카모이◇[42]
- Fate 시리즈 - 시토나이◇
- 몬스터 스트라이크 - 폭절 몬스터 테이네모시리[43]
10. 매체에서
- 조정래의 아리랑에도 한국-아이누 혼혈에 대한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아이누 마을로 탈출해 그들과 함께 살던 한국인 노동자에게 아이누족이 "우리들은 샤모(아이누족들이 일본인을 부르는 호칭)보다 사람 수가 적어서 졌지만, 당신네 조선인들은 덩치도 크고 힘도 좋으면서 왜 샤모에게 졌느냐?"라고 묻는 장면이 나온다. 물론 조롱하는 말투가 아니라 다분히 염려하는 어조이다.
- 이상일 감독의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는 주인공 일행을 따라온 고로( 야기라 유야)가 아이누족 혼혈로 나온다. 일본 영상매체에서는 매우 드물게 19세기 핍박받는 아이누족의 실태를 잘 묘사했다,
- 특촬물 아이언 킹[44]의 초반에 나오는 적 조직인 ' 시라누이 일족'[45]은 바로 아이누를 의미한다는 말도 있다. 다만 전근대 일본(야마토 정권)에서 억압받은 민족은 아이누만이 아니므로 단정은 금물. 시라누이(不知火) 자체가 규슈 지방에서 유래한 것이라서 규슈 일대에 있었던 옛 민족(현재는 동화됨)인 구마소(熊襲) 또는 하야토(隼人)를 뜻할 수도 있고, 규슈에서 멀지 않은 류큐를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 왕도의 개에서는 초반부 주인공 일행을 도와주는 조력자로 등장한다. 주인공 역시 중간에 살아남기 위해 아이누족 행세를 하는데 일본인들이 진짜 아이누인 줄 알고 갖은 폭행과 모욕, 면박, 조롱 등 거의 부라쿠민 수준의 대우를 한다. 당시 일본 사회에서 아이누인들을 대하는 모습을 잘 알 수 있다.
- 칭송받는 자 시리즈 중 1편에 나오는 신인류의 복식과 문화는 아이누 복식이나 문화를 많이 참고했다고 한다.[46] 또한 세계관 용어 중에도 아이누 언어를 참고한 사례가 제법 있다.[47]
- C.S.A.: The Confederate States of America에서는 실제 역사와 반대로 남북 전쟁에서 승리하고 미국을 파시스트 국가로 만든 남부맹방이 일본을 침략해서 점령하는데, 이들도 노예로 끌려갔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11. 여담
- 아이누족은 자신들의 땅을 사람이 사는 곳이라는 뜻의 아이누 모시르(아이누어: アィヌモシ/Ainu mosir, Aynu mosir, 일본어 표기: アイヌモシリ)라고 한다.[48]
朝登岸。看察烟氣。以審人家。則西方十餘里許回角未見之處。頗起浮烟。似是人家炊飯之烟。卽移舟向進遠視。果有七八人家。甚似我國鹽人之煮鹽者然。疑其捉魚海夫倭之幕。未及泊舟。五六人出來船艙。察其貌樣。皆着黃衣。髥髮長鬚面黑。
諸人皆驚。停船不進。余令船人。呼爲進來狀。而默然相顧。無乃渠亦曾未所見之人。而有此默者也。詳察其貌。實非倭人。終不知某物。恐被殺害。驚怖益甚。老者數輩。身着黑毛皮衣。乘小船而近前宣言。太不似倭語。彼此無聞。默然相望。一老者拱執草葉。裹數塊烹魚也。
仍指其家而搖首喧語。頗似引歸其家者然矣。恐怖甚急。雖欲遠避。不卞方土。走無所歸。不得已以死爲限。進船止泊。其船艙船人。一時下去。察其器械。別無鎗劍利刀之物。只佩一小刀。其家似是鹽幕。而元無隱密處。所藏之物。不過乾魚熟鰒魚油皮之衣外。其他器械。則鎌斧及半餘把木弓。一尺木箭鏃造鹿角而已。
試其强柔。貌雖兇惡。本非害人之類。見我拱手而獻恭。知非殺害之物。而驚怖漸息。
其家前無數作架。掛魚如林。鯨脯山積。本無文字通識之風。彼此言語旣不通知。故指口腹而試說飢渴之狀。則只進魚湯一小器。而無意供飯。男女或着木皮所織黃布長衣。或着熊皮與狐皮貂皮毛衣。頭毛只長寸餘。鬚髥皆勒。或尺或把。耳懸大銀環。身生黑毛。目眦皆白。男女不着鞋韈。形容皆同。而女獨無鬚。故以此辨其男女而已。一老者年可六十。項垂靑囊。請解見之。其鬚甚長。苦其長而造囊藏懸。手執把之。一把半餘也。至暮又進魚湯一器。鯨脯數片之外。終無作飯之擧。余念天下之人。
皆食穀飯。而此類旣化人形。豈無炊飯之風。而必忌我累口饋飯之費。而吝其米升。有此不炊。家家往探其炊飯之擧。則皆不炊飯。獨以魚湯。和魚油以食之。定知其本不炊飯食者也。船乏糧米。無可奈何。出示行器。請得升米之語。而不知所答。余以介米視指。掉頭不答。厥類正不知米太者也。人皆飢宿其處。朝欲移向他方。而未定所歸之方。余登一岸。遙視四方。則東北宛在陸土。請謂船人等曰。此處旣不供飯。
아침 해안으로 올라 가, 연기 나는 곳을 살펴 인가를 찾아보았더니, 서쪽으로 10리쯤의 잘 보이지 않는 모퉁이를 도는 곳에서 연기가 제법 떠올랐는데, 인가에서 밥을 짓는 연기같이 보였다. 곧 배를 이동시켜 나아가면서 멀리서 바라보니, 과연 7~8채의 인가가 있었는데, 우리나라 소금 고는 사람들의 소금 고는 곳과 매우 비슷하였다. 그것들은 고기잡이 하는 해부(海夫)인 왜인의 움막일 것이라 여기고, 미처 배를 정박시키지 못하고 있을 때, 대여섯 사람이 선창(船艙)으로 나왔다. 그들의 모습을 보니, 모두 누른 옷을 입었고, 검푸른 머리칼에 긴 수염에다가 얼굴은 검었다.
우리들은 모두 놀라, 배를 멈추고는 나아가지 않았다. 나는 선인들로 하여금 불러오라는 시늉을 하였다. 그러나 묵묵히 서로 바라다보기만 하였으니, 그들도 이제까지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어서 이처럼 묵묵히 있는 것이나 아닐까? 그들의 모양을 자세히 살펴보니 실로 일본인들은 아니고, 끝내 무엇들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우리는 살해당하지나 않을까 하여 더욱 놀라고 공포에 떨었다. 그들 중의 늙은 몇 사람은 몸에 검은 털가죽의 옷을 입고 있었다. 자그마한 배를 타고서 가까이 다가와서 말을 하였는데, 일본어와는 아주 달랐다. 우리와 그들은 서로 아무 말도 교환하지 못한 채 다만 묵묵히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다. 그중 한 늙은이가 손에 풀잎을 받쳐 들고 있었는데, 그 속에는 삶은 물고기 몇 덩어리가 있었다.
이어서 그들의 집을 가리키고 고개를 흔들며 야단스럽게 지껄이고 있었는데, 우리를 자기들의 집으로 데리고 가고자 해서 그러는 것 같았다. 우리는 심히도 공포에 떨어, 멀리 피하고 싶었지만 방향을 분별할 수가 없었고, 달아나 보았자 갈 곳이 없었다. 부득이 죽기를 각오하고 배를 저어 가 정박하였고, 그곳 선창의 뱃사람들과 일시에 하선(下船)했다. 그들의 연장을 살펴보니, 별로 창검(鎗劍)이나 예리한 칼 같은 것은 없고, 다만 조그마한 칼 한 자루만을 차고 있었다. 그들의 집은 염막(鹽幕)과 같고, 은밀한 곳이란 없었다. 그들이 저장하고 있는 물건은 말린 물고기, 익힌 복어(鰒魚), 유피(油皮)의 옷들에 불과했고, 그 밖의 연장으로는 낫, 도끼, 반 발(1발은 양팔을 벌린 길이) 정도의 크기로 된 나무활[木弓], 사슴의 뿔로 만든 화살촉을 단 한 자[尺] 정도 길이의 나무화살 등뿐이었다.
그들이 강한가 부드러운가를 시험해 보니, 모양은 흉악하게 생겼지만, 원래 사람을 해치는 무리들은 아니었다. 나에게 두 손으로 공손히 드리는 것을 보고 살해를 하지 않는 것들이라 알고는, 놀라고 무서워하는 마음이 점점 없어졌다.
그들의 집 앞에는 횃대를 무수히 만들어 놓아 물고기를 숲처럼 걸어 놓았고, 고래의 포(脯)도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들은 본시 글자로 서로 통하는 풍습이 없고, 피차 말로 통할 수가 없기 때문에, 입과 배를 가리키며 배가 고프고 목이 마르다는 시늉을 시험삼아 해 보였더니, 다만 어탕(魚湯)을 작은 그릇 하나에 담아 줄 뿐, 밥을 주려 하지 않았다. 남녀가 혹은 나무 껍질로 짠 누른 베의 긴 옷을 입었고, 혹은 곰 가죽과 여우 가죽 또는 담비 가죽으로 만든 털옷을 입었다. 그들의 머리털은 겨우 한 치[寸] 남짓하였고, 수염은 다 매었는데, 혹은 한 자[尺] 혹은 한 발이나 되었다. 귀에는 큰 은고리를 달았고, 몸에는 검은 털이 나 있었다. 눈자위는 모두 희고, 남녀가 신과 버선을 신지 않고 있었다. 형용(形容)은 남녀가 모두 같았는데, 여자는 수염이 없어서 이것으로 남녀를 분별할 뿐이었다. 60세 가량의 늙은이가 목에다 푸른 주머니를 달고 있어서 풀기를 청하여 그것을 보니, 수염이 매우 길어서 귀찮아, 주머니를 만들어 그 안에다 수염을 담고 있는 것이었다. 손으로 수염을 잡아 재니, 한 발 반 남짓이나 되었다. 날이 저무니, 그들은 또 어탕 한 그릇과 고래 포 몇 조각을 주는 것 외에는 끝내 밥을 짓는 거동이 없었다. 나는,
“천하의 인간은 다 곡식밥을 먹는다. 이 무리는 사람의 모양을 하고 있는 터이니, 어찌 밥 짓는 풍속이 없겠는가? 이것은 반드시 우리 여러 사람의 밥을 먹이는 비용을 꺼리고, 쌀을 아끼느라 이처럼 밥을 짓지 않는 것이다.”
생각하였다. 그리고는, 집집마다 가서 밥을 짓는가를 알아 보았더니, 모두 밥을 짓지 않고, 다만 어탕에다 물고기의 기름을 섞어서 먹고 있어서, 그들이 본시 밥을 지어 먹지 않는 자들임을 알았다. 배에는 쌀이 떨어졌기에 어찌할 수가 없어서 여행용 그릇을 내보이면서 쌀을 달라고 청해 보았지만, 대답할 바를 몰랐다. 나는 쌀알을 가리켜 보였지만 머리를 흔들고는 대답하지 않는 것을 보니, 그 무리는 정말로 쌀이나 콩을 모르는 자들이었다.
*
조선 시대에 선달 이지항이라는 사람이 일행과 함께 표류해서 홋카이도 북방의 제도에 살던 아이누를 만났던 기록이 있다.
표주록이라는 책을 남겼는데 자세한 이야기는
여기와
여기를 참조.
諸人皆驚。停船不進。余令船人。呼爲進來狀。而默然相顧。無乃渠亦曾未所見之人。而有此默者也。詳察其貌。實非倭人。終不知某物。恐被殺害。驚怖益甚。老者數輩。身着黑毛皮衣。乘小船而近前宣言。太不似倭語。彼此無聞。默然相望。一老者拱執草葉。裹數塊烹魚也。
仍指其家而搖首喧語。頗似引歸其家者然矣。恐怖甚急。雖欲遠避。不卞方土。走無所歸。不得已以死爲限。進船止泊。其船艙船人。一時下去。察其器械。別無鎗劍利刀之物。只佩一小刀。其家似是鹽幕。而元無隱密處。所藏之物。不過乾魚熟鰒魚油皮之衣外。其他器械。則鎌斧及半餘把木弓。一尺木箭鏃造鹿角而已。
試其强柔。貌雖兇惡。本非害人之類。見我拱手而獻恭。知非殺害之物。而驚怖漸息。
其家前無數作架。掛魚如林。鯨脯山積。本無文字通識之風。彼此言語旣不通知。故指口腹而試說飢渴之狀。則只進魚湯一小器。而無意供飯。男女或着木皮所織黃布長衣。或着熊皮與狐皮貂皮毛衣。頭毛只長寸餘。鬚髥皆勒。或尺或把。耳懸大銀環。身生黑毛。目眦皆白。男女不着鞋韈。形容皆同。而女獨無鬚。故以此辨其男女而已。一老者年可六十。項垂靑囊。請解見之。其鬚甚長。苦其長而造囊藏懸。手執把之。一把半餘也。至暮又進魚湯一器。鯨脯數片之外。終無作飯之擧。余念天下之人。
皆食穀飯。而此類旣化人形。豈無炊飯之風。而必忌我累口饋飯之費。而吝其米升。有此不炊。家家往探其炊飯之擧。則皆不炊飯。獨以魚湯。和魚油以食之。定知其本不炊飯食者也。船乏糧米。無可奈何。出示行器。請得升米之語。而不知所答。余以介米視指。掉頭不答。厥類正不知米太者也。人皆飢宿其處。朝欲移向他方。而未定所歸之方。余登一岸。遙視四方。則東北宛在陸土。請謂船人等曰。此處旣不供飯。
아침 해안으로 올라 가, 연기 나는 곳을 살펴 인가를 찾아보았더니, 서쪽으로 10리쯤의 잘 보이지 않는 모퉁이를 도는 곳에서 연기가 제법 떠올랐는데, 인가에서 밥을 짓는 연기같이 보였다. 곧 배를 이동시켜 나아가면서 멀리서 바라보니, 과연 7~8채의 인가가 있었는데, 우리나라 소금 고는 사람들의 소금 고는 곳과 매우 비슷하였다. 그것들은 고기잡이 하는 해부(海夫)인 왜인의 움막일 것이라 여기고, 미처 배를 정박시키지 못하고 있을 때, 대여섯 사람이 선창(船艙)으로 나왔다. 그들의 모습을 보니, 모두 누른 옷을 입었고, 검푸른 머리칼에 긴 수염에다가 얼굴은 검었다.
우리들은 모두 놀라, 배를 멈추고는 나아가지 않았다. 나는 선인들로 하여금 불러오라는 시늉을 하였다. 그러나 묵묵히 서로 바라다보기만 하였으니, 그들도 이제까지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어서 이처럼 묵묵히 있는 것이나 아닐까? 그들의 모양을 자세히 살펴보니 실로 일본인들은 아니고, 끝내 무엇들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우리는 살해당하지나 않을까 하여 더욱 놀라고 공포에 떨었다. 그들 중의 늙은 몇 사람은 몸에 검은 털가죽의 옷을 입고 있었다. 자그마한 배를 타고서 가까이 다가와서 말을 하였는데, 일본어와는 아주 달랐다. 우리와 그들은 서로 아무 말도 교환하지 못한 채 다만 묵묵히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다. 그중 한 늙은이가 손에 풀잎을 받쳐 들고 있었는데, 그 속에는 삶은 물고기 몇 덩어리가 있었다.
이어서 그들의 집을 가리키고 고개를 흔들며 야단스럽게 지껄이고 있었는데, 우리를 자기들의 집으로 데리고 가고자 해서 그러는 것 같았다. 우리는 심히도 공포에 떨어, 멀리 피하고 싶었지만 방향을 분별할 수가 없었고, 달아나 보았자 갈 곳이 없었다. 부득이 죽기를 각오하고 배를 저어 가 정박하였고, 그곳 선창의 뱃사람들과 일시에 하선(下船)했다. 그들의 연장을 살펴보니, 별로 창검(鎗劍)이나 예리한 칼 같은 것은 없고, 다만 조그마한 칼 한 자루만을 차고 있었다. 그들의 집은 염막(鹽幕)과 같고, 은밀한 곳이란 없었다. 그들이 저장하고 있는 물건은 말린 물고기, 익힌 복어(鰒魚), 유피(油皮)의 옷들에 불과했고, 그 밖의 연장으로는 낫, 도끼, 반 발(1발은 양팔을 벌린 길이) 정도의 크기로 된 나무활[木弓], 사슴의 뿔로 만든 화살촉을 단 한 자[尺] 정도 길이의 나무화살 등뿐이었다.
그들이 강한가 부드러운가를 시험해 보니, 모양은 흉악하게 생겼지만, 원래 사람을 해치는 무리들은 아니었다. 나에게 두 손으로 공손히 드리는 것을 보고 살해를 하지 않는 것들이라 알고는, 놀라고 무서워하는 마음이 점점 없어졌다.
그들의 집 앞에는 횃대를 무수히 만들어 놓아 물고기를 숲처럼 걸어 놓았고, 고래의 포(脯)도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들은 본시 글자로 서로 통하는 풍습이 없고, 피차 말로 통할 수가 없기 때문에, 입과 배를 가리키며 배가 고프고 목이 마르다는 시늉을 시험삼아 해 보였더니, 다만 어탕(魚湯)을 작은 그릇 하나에 담아 줄 뿐, 밥을 주려 하지 않았다. 남녀가 혹은 나무 껍질로 짠 누른 베의 긴 옷을 입었고, 혹은 곰 가죽과 여우 가죽 또는 담비 가죽으로 만든 털옷을 입었다. 그들의 머리털은 겨우 한 치[寸] 남짓하였고, 수염은 다 매었는데, 혹은 한 자[尺] 혹은 한 발이나 되었다. 귀에는 큰 은고리를 달았고, 몸에는 검은 털이 나 있었다. 눈자위는 모두 희고, 남녀가 신과 버선을 신지 않고 있었다. 형용(形容)은 남녀가 모두 같았는데, 여자는 수염이 없어서 이것으로 남녀를 분별할 뿐이었다. 60세 가량의 늙은이가 목에다 푸른 주머니를 달고 있어서 풀기를 청하여 그것을 보니, 수염이 매우 길어서 귀찮아, 주머니를 만들어 그 안에다 수염을 담고 있는 것이었다. 손으로 수염을 잡아 재니, 한 발 반 남짓이나 되었다. 날이 저무니, 그들은 또 어탕 한 그릇과 고래 포 몇 조각을 주는 것 외에는 끝내 밥을 짓는 거동이 없었다. 나는,
“천하의 인간은 다 곡식밥을 먹는다. 이 무리는 사람의 모양을 하고 있는 터이니, 어찌 밥 짓는 풍속이 없겠는가? 이것은 반드시 우리 여러 사람의 밥을 먹이는 비용을 꺼리고, 쌀을 아끼느라 이처럼 밥을 짓지 않는 것이다.”
생각하였다. 그리고는, 집집마다 가서 밥을 짓는가를 알아 보았더니, 모두 밥을 짓지 않고, 다만 어탕에다 물고기의 기름을 섞어서 먹고 있어서, 그들이 본시 밥을 지어 먹지 않는 자들임을 알았다. 배에는 쌀이 떨어졌기에 어찌할 수가 없어서 여행용 그릇을 내보이면서 쌀을 달라고 청해 보았지만, 대답할 바를 몰랐다. 나는 쌀알을 가리켜 보였지만 머리를 흔들고는 대답하지 않는 것을 보니, 그 무리는 정말로 쌀이나 콩을 모르는 자들이었다.
- 일제강점기 당시, 홋카이도의 광산 등지로 강제노역에 끌려간 한국인들 중 일부가 광산에서 탈출하여 도망치다 아이누인 마을로 숨어들고, 현지 여성과의 사이에서 혼혈아를 낳은 사례가 있었다. 자신을 이런 이들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이가 2ch에 스레를 세운 적이 있다. 또한 글쓴이에 따르면 자신이 아는 모든 한국-아이누 혼혈들은 자신들을 그냥 아이누 출신이라고 말한다고 했다.
-
아이누 여성들은 성인이 되면 얼굴과 팔에 문신을 새겼는데, 얼굴에 미소 짓는 모양의 문신을 새겼다. 문제는 이게 멀리서 보면 거대한 콧수염으로 보인다는 것. 때문에 현대의 아이누 여성들은 이 문신을 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 아이누 대책위원회가 있다.
[1]
쿠릴이란 말의 어원이다.
[2]
아이누어 로마자 표기법에 따른 표기이다. 하지만 흔히 쓰이는 관습 표기는 Ainu이다. 아이누족은 다른 민족이 자신들을 아이누라고 불러주길 희망해서 이 명칭으로 불리고 있다. 이 단어는 원래 '사람'이라는 뜻이며 아이누어에서 여전히 이 뜻으로도 사용한다.
[3]
'동포'라는 뜻의 자칭.
[4]
17~18세기 일본 문헌에는 アイノ(아이노, Aino)로 적힌 경우가 많다.
[5]
러시아어의 로마자 표기법 중에 ISO 9:1995에 따른 표기법이다.
[6]
다만, 아이누어를 가리킬 때는 айны итак이 아닌 айну итак(아이누 이탁)으로 쓴다.
[7]
에미시·에비스·에조는 모두 하나의 발음에서 나온 단어이다. 이 단어들은 아이누어의 아어(雅語)로 사람을 일컫는 말인 엔추(エンチュ; 또는 그 고어형)가 일본어로 정착된 것 아닌가 하는 설이 있다. 이 설은 아이누어 연구로 유명한 일본의 언어학자·민속학자인 긴다이치 교스케(金田一京助, 1882~1971)가 처음 제시했다.
[8]
남방 한계선은
쓰가루해협(혼슈의 도호쿠 지방).
[9]
아이누는
베링해 근처 시베리아 민족 문화와 많이 얽혀있으며, 심지어
에스키모라 불리는 북아메리카의
알류트와
이누이트와의 교류도 있었다.
[10]
아이누와 가깝고도 적대적 관계인
니브흐족 역시 북극 문화권에 속하며,
니브흐어는
고시베리아 제어에 속한다.
[11]
그래도 외모를 자세히 잘 보면 동양인스럽게 생긴 아이누인들이 많은 편이기도 하고 외모가 동양인과 비슷한 경우가 있는 편이기도 하다.
[12]
조선시대 양반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공부하느라 햇빛을 잘 안보기 때문에 피부가 흰 편이다. 다만 양반이 아닌 신분의 일반 조선인들은 밖에서 일하니 피부가 탈 수 밖에 없다.
[13]
물론, 이미
기독교로 개종한
아메리카 원주민이나
발트계 민족들, 혹은 원래부터 기독교를 믿어온
아랍계 기독교인에 대해서도
인종차별을 일삼거나 대대적으로
학살을 자행했던 것을 보면, 그냥
백인 우월주의 및
제국주의 성향을 감추기 위한 핑계에 불과했다.
[14]
일본에서는
야마토 민족 내지는
퉁구스 계통의
홋카이도 원주민들(
윌타족,
오로치족 등)과의 혼혈로 인해 피부색이 밝은 아이누족이 생겨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15]
러시아의 사하 공화국에 위치한 야나 강 하류 인근의 유적지 '야나 코뿔소 뿔 유적(RHS)'에서 발견된 젖니를 통해 그 존재가 확인됐다. 이곳에서 발견된 2구의 남성 인골의 부계 하플로그룹은 P로, K2b의 하위 계통이자 Q와 R의 상위 계통이기도 하며 약 3만 년 전의 유골이다.
[16]
특히
조몬인 형질이 가장 강한
홋카이도와
도호쿠 일대는 신석기 시기부터
연해주와
사할린을 거쳐 고대 북시베리아인들과의 유전적 교류가 활발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조몬인의 ANE의 출처는 바로 이들인 셈.
[17]
#
#
[18]
조몬인 혈통 비율 3.3%
3.3% (2020)
8% ~ 9.8% (2019)
9% ~ 13% (2019)
[19]
러시아 북부의
사하 공화국에서도 스트로가니나라는 비슷한 요리가 있다.
[20]
또한 그들을 통해 당시 연해주의 패권을 장악했던
발해와도 간접적으로 교류했다. 가령 발해가
당나라에 선물로 보내곤 하던
해표 가죽은 홋카이도와 사할린 일대 오호츠크 문화권 부족들이 채집한 것도 상당수 있었다. 발해는 자국의 동북쪽 강역에 직간접적으로 속한 흑수말갈 부족들의 중계로 이 가죽들을 사들여 다시
중국과
신라 등지에 내다 팔았다.
[21]
가령 오늘날에도 아무르 일대에 사는
나나이족에게는 곰 숭배 문화가 있는데, 흑수말갈과 오호츠크 문화의 직계 후손이라 그렇다. 근처에 사는
니브흐 민족 역시 오호츠크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비슷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
[22]
가고시마 사투리는 표준 일본어와 굉장히 이질적인 것으로 유명하다.
[23]
원의 군사 지도를 참고했을 가능성이 큰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만 봐도
연해주와
일본 열도는 실제로는 좁은 해협을 사이에 두고 이어져 있지만 지도에는 약간 다른 위치로 나온다. 지도에서는 일본 열도가 대륙의 먼 남쪽에, 연해주와 사할린이 대륙의 동쪽에 위치한다. 이러한 세계적 지리적 인식은 17~18세기 비교적 정교한 세계 지도가 나오는 시점까지 이어졌다.
[24]
훗날 시베리아, 사할린, 쿠릴 등 극동 지역을 탐사하던 러시아 탐험대도 홋카이도를 마츠마에 섬으로 기록했다.
[25]
오늘날
교토의 명물로 꼽히는 건청어 제품인 '미가키니싱', 그리고 이것을 이용한 향토
소바 요리인 '니신 소바'가 바로 이때 홋카이도산 청어가 들어오며 만들어진 것이다.
[26]
연어는 일본 국내에서 소비되었고, 다시마는
청나라에서 약으로 쓰기 위해 사 갔다.
[27]
アィヌ에서 ア를 빼면 イヌ(이누), 일본어로
개라는 뜻이 되는데 그걸 갖고 놀리는 거다.
[28]
당선자가 심장마비로 사망하여 자리를 물려받았다.
일본사회당-
사회민주당 소속이었으나 1996년에 민주당으로 당적을 옮긴다.
[29]
홋카이도 내 일부 지역에 아이누족 거주자가 많지만 아이누 인구는 홋카이도 인구의 극히 일부이다.
[30]
전술된 니부타니 댐 반대운동을 주도했던 학자이며,
일본사회당 -
사회민주당 -
민주당 출신이며,
일본 역사상 최초로
국회의사당에서
아이누어로 발언한 정치인이라는 이력이 있다.
[31]
에도 막부시대,
일본의 수많은 지방 다이묘(영주)들 중 하나였던 다케다 노부히로의 사무라이들이
홋카이도를 식민지배하기 위해 침략하자 이에 맞서서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으나 끝내 패배하여 결국 홋카이도는 에도 막부의 식민지가 된다.
[32]
멤버들 전체가 아이누족 출신이긴 하나, 아이누족들의 본향인
홋카이도가 아닌
오키나와 출신이다.
[33]
아이누 신화의 번개의 신이 모티브.
[34]
이 작품에서는 아이누식 문화 고증은 물론, 차별받는 아이누인의 대우도 고스란히 묘사하고 있다.
[35]
정확히는 아이누에서 디자인 모티브만 따온 고양이들.
[36]
이름과 소재로 제작하는 무기 이름을 아이누어에서 따 왔다.(
#)
[37]
아이누+류큐 혼혈
[38]
아이누 신화를 모티브로 한 이능력을 사용하고 있다.
[39]
과거 유년기 복식이 아이누 모티브로 보였지만 이후 수정되었다.
[40]
엄밀히 말한다면 이들 대다수는 인간도 아니지만(...) 아이누에게서 모티브를 얻은 것은 확실하다.
[41]
쿠마에 산은 혼슈에 있긴 하지만 옷의 무늬가 아이누풍이라는 언급이 나온다.
[42]
다만 해당 캐릭터의 모티브가 된 실제 함선 카모이는 일본이 아닌 미국에서 건조되었기 때문에 좀 애매하며 이 때문에 사실은 미국출신이라는 2차 창작이 많이 생겼다.
[43]
정확히는 아이누의 지옥과 저승 출신.
[44]
이 작품의 각본가이자
울트라맨에 참여하기도 한 사사키 마모루는 고대사에 조예가 깊었고, 일본 원주민론을 주장하며 아이누나 류큐를 소재로 한 드라마를 썼다.
[45]
야마토 조정으로부터 정복당해 2천 년간 억압받았다는 원주민족(선주민족)이라는 설정이다. 그들은 일본 정부를 야마토 정권이라 부른다.
[46]
잘 보면 일본풍인 것 같으면서도 기묘하게 이질적인 느낌이 있다.
[47]
그 예시가 우타와레루모노 1편에 나오는 국가 중 하나인 쿤네카문이다. 쿤네는 아이누어로 검다, 카문은 아이누어로 신(神)을 가리키는 말인 '카무이'의 다른 표기이다. 즉 쿤네카문은 아이누어로 '검은 신'이라 해석 가능하다.(벼락의 신으로도 해석 가능)
[48]
오늘날은 주로
홋카이도를 가리키지만
쿠릴 열도와
사할린도 포함시키는 경우가 있다. 이에 대해 신(神)이 사는 곳은 카무이 모시르(아이누어: カムィモシ/kamuy mosir, 일본어 표기: カムイモシリ)라고 부른다.
혼슈는 '이웃 사람의 섬'이라는 뜻의 시삼 모시르(아이누어: シサㇺモシ/sisam mosir, 일본어 표기: シサムモシリ) 또는 '이웃 섬'이라는 뜻의 사모르 모시르(아이누어: サモㇿモシ/samor mosir, 일본어 표기: サモロモシリ)라고 불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