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인 황제 시대의 황제에 대한 내용은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문서 참고하십시오.
로마 제국 제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 1세 CLAVDIVS |
|||
|
|||
<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게르마니쿠스 TIBERIVS CLAVDIVS NERO GERMANICVS |
||
출생 | 기원전 10년 8월 1일 | ||
로마 제국
갈리아 루그두눔 (現 프랑스 오베르뉴론알프 리옹) |
|||
사망 | 54년 10월 13일 (향년 63세) | ||
로마 제국
로마 (現 이탈리아 라치오 로마) |
|||
재위 기간 | 로마 황제 | ||
41년
1월 24일 ~
54년
10월 13일 (13년 265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 왕조 |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Julio-Claudian Dynasty) |
|
전임자 | 가이우스[1] | ||
후임자 | 네로 | ||
제호 |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Tiberius Claudius Caesar Augustus Germanicus |
||
이름 |
데키무스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2] (Decimus Claudius Drusus) |
||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3] (Tiberius Claudius Drusus) |
|||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4] (Tiberius Claudius Drusus Germanicus) |
|||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게르마니쿠스[5] (Tiberius Claudius Nero Germanicus) |
|||
배우자 | 플라우티아 우르굴라닐라 (9년 결혼 / 24년 이혼) | ||
아일리아 파이티나 (28년 결혼 / 31년 이혼) | |||
발레리아 메살리나 (38년 결혼 / 48년 사망) | |||
소 아그리피나 (49년 결혼) | |||
자녀 |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클라우디아 안토니아, 클라우디아 옥타비아, 브리타니쿠스, 네로(입양) | ||
아버지 |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 ||
어머니 | 소 안토니아 | ||
형제 | 게르마니쿠스, 리빌라 | ||
종교 | 로마 다신교 | }}}}}}}}} |
[clearfix]
1. 개요
로마 제국의 제4대 황제.태어날 당시의 이름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제위에 오르기 전의 본명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게르마니쿠스(Tiberius Claudius Nero Germanicus), 즉위 후 제호로 취한 이름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 드루실라가 부른 애칭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2. 설명
율리우스 가문이 아닌 클라우디우스 가문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황제가 된 인물로 역대 로마 황제 중 최초로 카이사르(CAESAR)를 황제 개인 성씨가 아닌 황제 자체를 뜻하는 명사로 사용한 로마 황제다. 하지만 칼리굴라 암살 직후 원로원에서도 클라우디우스를 카이사르 가문 사람이라고 정의해 강하게 즉위를 반대하면서 한 집안 사람임을 강조하며 회기 내내 갑론을박을 펼쳤고[6], 본인과 당대 로마인 모두 오늘날 역사가들과 마찬가지로 율리우스 가문과 클라우디우스 가문 모두를 같은 집안 사람이라고 말했고, 일반적인 로마인들의 관습상 한 집안 직계 혈족이 분명했기에 다른 집안 사람이 무턱대고 정통성을 위해 취한 제호는 결코 아니다.본인이 즉위 당시부터 이 부분을 꾸준히 강조했듯, 그는 아우구스투스의 외종손, 리비아 드루실라의 친손자, 소 옥타비아의 외손자인데다, 아우구스투스가 자신의 유언장에 "내 친손자"라고 명시한 카이사르 가의 직계 남자 황족이었다.[7] 따라서 네로 시대때 소 아그리피나, 네로 탄핵 당시 이를 주도한 원로원과 군대가 공개적으로 율리우스 가문과 클라우디우스 가문이 하나라는 것을 강조해 아우구스투스의 직계를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 대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와 클라우디우스, 칼리굴라와 브리타니쿠스’로 언급하면서 혈통상 같은 집안 사람[8]이라는 것을 재확인했다. 이런 이유로 인해 다른 가문에서 나온 황제로 분리할 이유도 없고, 고대부터 지금까지 두 가문은 하나의 새로운 가문, 즉 아우구스투스와 그 후손들의 왕조도 하나로 묶여 기록되고 있다. 또한 그는 루그두눔( 리옹)에서 태어난 까닭에 로마 황제 중 이탈리아 반도 밖에서 태어난 최초의 황제이기도 하다.
아버지는 로마제국 2대 황제 티베리우스의 동복동생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9] 어머니는 아우구스투스의 누나 소 옥타비아의 막내딸 소(小) 안토니아[10]이다. 티베리우스라는 이름은 아버지 드루수스가 큰형이자 훗날 황제가 되는 티베리우스에서 따온 이름이며, 친할아버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에서 따온 이름이기도 하다.
아우구스투스가 아내 리비아와 나눈 편지에서 그를 언급할 때 보면 알 수 있듯이 아우구스투스를 포함한 황실 식구들은 그를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라고 불렀으며, 아우구스투스는 그를 자신의 ‘손자’라고 말하며 생전 내내 엄청 신경쓴 것으로 로마인들에게 유명했다. 친형은 제정 시대 로마인들의 아이돌로 찬사를 받은 게르마니쿠스, 친누나는 리빌라(리비아)로 대 드루수스와 소 안토니아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 3명 중 막내이다. 그는 3대 황제였던 칼리굴라의 숙부로 칼리굴라 생전 로마 시민들에게 황숙이라고 불렸으며, 5대 황제 네로에게는 혈연상 외종조부이다.
현대 이탈리아어로는 클라우디오라고 한다. 개신교 성경에서는 '글라우디오'라고 나오는데, 이는 라틴어 인명의 탈격이다.[11]
성경 사도행전에서 바울로가 총독 페스투스와 아그리파 왕 앞에서 "카이사르에게 재판을 받고 싶다."고 말하는 구절이 있는데 바울로가 말하는 카이사르가 바로 클라우디우스 황제이다.
3. 생애
4. 평가
온화한 성격으로 야심이 큰 편은 아니었던, 역사가 황제 클라우디우스는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학식이 뛰어나고 사려깊은 모습을 보이지만 신체장애 때문에 로마 정치 엘리트의 필요조건인 군복무를 못한 데다 문약하고 심지가 약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황제가 된 뒤로는, 어릴적부터 조부 아우구스투스에게서 직접 배운 기본교육과 정국 파악능력을 기반으로 이를 극복했다.[12] 이때 그는 조부와 역사에서 배운 것을 실천하기 위해서 건실하게 노력했다. 따라서 오늘날 로마 황제 중에서 좋은 선정을 베푼 명군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선천적으로 갖게 된 장애와 충분치 못한 경험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성실성과 노력으로 제정 시스템을 한층 업그레이드시킨 명군이라고 불리고 있다.이런 이유 때문에 그는 서기 2세기 후반~3세기 초반까지 활동한, 원로원 의원 디오 카시우스에게 좋은 황제, 유능한 황제의 대표격으로 평가받았다. 디오는 그가 가진 지혜, 지식, 성실함, 책임감, 온화한 성격을 좋게 평했다. 이는 디오에게 긍정적으로 평가받음에도 내전 없는 평화라는 이름으로 로마인과 원로원을 억압해 군주라는 지위를 내세우지 않고 군주제를 만들었고, 티베리우스와 칼리굴라 시대의 본질이었다고 평가받은 아우구스투스보다도 그 평이 좋다.[13]
클라우디우스는 원로원 개혁, 내정개혁, 오스티아 건설 등에서 드러나듯, 즉위 전까지 정치, 실무 경험이 거의 없음에도 훌륭한 행정가였다. 그의 조부 아우구스투스가 생전에 그를 평가했듯 “정신만 제정신을 차린다면” 어릴 때부터 훌륭한 자질과 기품을 가진 사람답게 보다 많은 정치, 행정, 군사 실무를 쌓았을 것이라는 칭찬 그대로다.
더욱이 그는 즉위 전의 심각한 결점을 안고 있음에도 즉위한 이후 갑작스럽게 발생한 칼리굴라 암살 직후 정국을 신속히 안정화시켰고,[14] 달마티아 반란 진압, 북아프리카 마우레타니아 문제도 더 큰 혼란없이 해결해 극찬을 받고 있다. 어느 정도로 평가가 좋은지, 냉소적이고 프린키파투스가 원로원의 알맹이를 쏙 빼먹었다고 비판한 디오조차 그를 좋은 황제의 교본 중 하나로 짚고 있다. 여기에 더해 그가 보여준 행정 사무 능력, 원로원 유화책, 관료제를 통한 프린키파투스 완성은 그가 얼마나 신중하고 뛰어난 사람인지 증명하는 사례로 제시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와 프린켑스정을 다시 안정화시켰다고 평가받고 있다.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 이래로 제국의 새로운 지배계층으로 편입되던 기사계급들은 클라우디우스가 만든 새로운 개혁 시스템 아래에서 수많은 인재들이 양성돼 이후 제정이 플라비우스 왕조에 안정되는데 기여하게 됐다. 아울러 그가 즉위 후 밝혔듯이 아우구스투스의 방식을 활용하고 정책을 입안하고 수정하는 데에 있어서 과거 사례를 통해 재정비한 부분 역시 칼리굴라 때 지나치게 노골적으로 강화된 원수정으로 인한 반발[15]을 다시 줄어들게 만들었다. 하지만 위에서 지적되었듯이 클라우디우스는 아우구스투스처럼 점진적으로, 하지만 확실하게 프린켑스의 권한을 키워 나갔다. 따라서 그는 오늘날 보통 이상의 황제 내지 명군이라고 긍정적 평가를 받는다.
반면 지나치게 온화한 성품, 부족한 정치 경험, 오랜 시간 소외된 탓에 부족한 자신감은 원로원 내 반대파들과 세네카 등 당대 지식인들에게 ‘지나치게 우유부단하다’, ‘아내나 해방노예에게 이용당한다’ 등으로 까였고, 오늘날에도 그의 단점으로 지적받고 있다. 하지만 이런 단점보다 더 큰 비판을 받는 부분은 50대의 나이에 즉위한 이후에도 마땅한 후계구도를 마련하지 않고 우유부단하게 넘어갔다는 것이다. 이는 그가 예상하지 못했던 부분이라고 해도 결론적으로 최대 실책 중 하나로 평가받게 됐다. 실제로 그가 급사한 이후 뒤를 이은 네로는 친아들인 브리타니쿠스에 비해 나이가 많았음에도 제왕교육이 충분치 않은 데다 아직 10대에 불과해, 소 아그리피나가 그의 측근 3인방과 함께 네로 즉위 초 국정을 좌지우지 하면서 네로 측에 선 세네카, 브루스 등과 대립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한 이는 몇 년 후 네로와 아그리피나 간의 직접적인 권력투쟁으로 확대돼, 네로의 가까운 친척들이기도 했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직계가 모조리 네로 손에 제거되는 비극으로 연결됐다.
또한 정치술이 부족한 까닭에 선량한 의도로 원로원 의원들을 향한 고발과 재판을 신중히 검토해 메살리나, 아그리피나 등의 음모를 막은 부분도 당대에 그에게 불만을 품은 원로원 중심주의자들로부터 오해를 사게 되면서 클라우디우스가 당대에 이들에게 비판받는 이유가 됐다. 이때 이들은 클라우디우스의 신중하고 선량한 일처리를 평가절하하면서 그를 가리켜 “얼간이 같고 독단적이고 변덕스러운 황제”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일반 로마 민중들은 이런 클라우디우스의 행동을 지지했다. 왜냐하면 클라우디우스가 모든 재판에 성실히 출석해 꼼꼼하게 사건을 검토하면서, 억울하게 유죄를 받아 처벌받는 사례가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이런 연유로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문헌 등을 통해 알 수 았듯이 클라우디우스 시대에 이르게 되면서 속주 총독이나 정무관 주재 재판보다 황제 개인 법정에서의 재판 처리가 증가했다. 반면, 빗발치는 황제 측근과 아내 주도의 음모 사건들의 피해자가 된 원로원 귀족들이나 정적들은 본래부터 그의 장애 등을 이유로 클라우디우스를 미워했고, 그가 자신에게 누명을 씌우고 선정을 베푸는 행위를 한다고 비난했다. 따라서 이들은 자신을 재판하는 클라우디우스가 직접 재판을 챙겨 검토해 넘어간 사건들을 오히려 “변덕스럽다”, “얼간이 같다” 등으로 폄하했다. 하지만 이런 이들의 평가는 훗날의 황제가 했던, 진짜 변덕스러웠고 개인의 욕망을 위한 숙청을 위해 누명을 씌웠던 판결들이 나오면서 그저 까기 위해 깠던 것으로 판단되었다.
5.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뇌성마비였는가?
최근 연구(2010년대 이후)에서 위에서 언급된 클라우디우스의 '신체적 장애' 등이 사실은 뇌성마비에서 일어난 행동이라는 설이 뇌과학계에서 진지하게 연구되고 있다. 이는 1940년대 이후부터 칼리굴라가 앓았다는 간질, 정신 질환 등을 연구했다가, 고대 기록상 여러 주장이 의학적으로 모두 반박됐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기록에서 클라우디우스는 "웃음을 통제하지 못하고, 콧물을 흘리며 다리를 절고, 침을 흘리는 걸 통제하지 못 하는 것에 분노를 표출하곤 했다."고 나와있다. 신체적 장애만으로 이런 일련의 증상 전부가 나타나기는 어렵다는 평가가 나온다.
하지만 이런 의학계 논의와 별도로, 클라우디우스가 진짜 뇌성마비 환자였는가에 대한 연구는 고대 기록상으로도 의심 속에서 여러 얘기가 오고 가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많은 학자들은 실감나는 묘사 속에서도,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뇌성마비 환자였다는 평에 큰 의심을 표한다. 그가 소아마비로 인해, 다리 한쪽이 불편해 걸음걸이가 불편하고, 자신감 빈약으로 연설 중 말을 더듬거나 종종 침을 흘렸던 버릇은 사실로 보더라도, 악의적인 주장이라고 본다.
그 이유는 고대 기록의 원작자들의 신빙성 문제, 그리고 당대 황제 네로와 네로가 몰락한 뒤 등장한 당대의 클라우디우스 황제와 밀접했던 플라비우스 왕조의 두 황제 베스파시아누스, 티투스의 조치 등과 관련되어 있다.
클라우디우스를 포함해,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에 대한 근거 없는 비방과 이들을 둘러싼 중상모략의 고대기록은 상당히 많다. 대중들에게 가장 많이 읽힌 수에토니우스가 대표적인데, 그는 "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간질 환자였다", " 아우구스투스의 치열이 이상할 만큼 불규칙했고, 키가 아주 작았다.", " 티베리우스가 카프리 섬에서 소년, 소녀들과 음란한 행동을 하고, 절벽에 던져 죽였다.", " 칼리굴라가 간질환자였고, 대머리였으며, 온몸에 털이 많아 염소 같았다." 등을 주장했다. 스토아 철학자이자 실제 행적과 달리 좋게 묘사된 세네카 역시 비슷했는데, 그는 자신과 정적인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에 대한 비방과 왜곡 등을 당연시했다. 그리고 이는 이전 세대의 역사서를 참고한 디오 카시우스, 아우렐리우스 빅토르 등의 기록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이중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경우, 여러 학자들은 클라우디우스가 네로와 그를 옹립한 세네카, 섹스투스 아프라니우스 부루스에게 의도적으로 폄하되고, 최대한 과장되게 묘사하고 선전된 부분을 주목한다. 그래서 뇌성마비 주장 역시 의심을 많이 받고 있다. 이 부분은 당대의 플라비우스 왕조 창건 이후, 로마황제인 베스파시아누스, 티투스까지 지적한 사항인 터라, 의심이 아닌 정치적 논리와 네로 및 그를 옹립한 이들의 정당성을 위한 목적이었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세네카는 섹스투스 아프라니우스 부루스와 함께 네로 집권 논리까지도 자신들이 옹립한 네로가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와 다름을 강조했다. 그는 네로의 즉위 연설에서도 클라우디우스를 최대한 황제 부적격자로 묘사하는 노력을 했는데, 이는 클라우디우스를 희회화하는 풍자시까지 지어 조롱거리로 만들고 초연하면서, 대중들에게 사실처럼 알려지게 됐다. 따라서 학자들은 클라우디우스의 증세를 평할 때, 극단적으로는 그의 할아버지인 아우구스투스가 남긴 편지 등을 통해 분석한다.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손자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가 분명 육체적 질병으로 다리가 불편하고, 오랫동안 자신감을 잃었음을 여러 차례에 걸쳐 지적했는데, 그는 클라우디우스가 자존감 부족이라는 정신문제를 회복하고, 어릴 때 앓은 다리가 건강해지길 기원했다. 동시대 사람인 후대 황제 베스파시아누스 역시 이런 논조를 강조했는데, 플라비우스 왕조의 두 황제는 네로와 그 스승, 측근들에게 클라우디우스와 그 아들 브리타니쿠스가 어떤 치욕을 당했는가를 설파하면서, 이들의 복권에 힘을 쏟았다. 따라서 클라우디우스가 진짜 뇌성마비 환자인지는 되짚어볼 필요가 많다고 평가받고 있다.
더군다나 클라우디우스, 브리타니쿠스, 소 아그리피나, 클라우디아 안토니아, 클라우디아 옥타비아,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 죽음 모두에 연관된 네로가 벌인 행동들 역시 뇌성마비 주장이 네로 시대의 정통성을 위한 선전으로 강하게 의심받는 이유로 평가된다. 네로는 언급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직계들을 모조리 제 손으로 끝낸 뒤부터, 새로운 본인만의 황가 구축을 추진했다. 이때 그는 자신의 할아버지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아버지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를 집권 중기부터 띄우는 노력 속에서, 클라우디우스와 그 아들 브리타니쿠스를 비방했다. 그러면서 클라우디우스가 최대한 신체 장애가 심각하고, 일상생활이 부족한 황제 부적격자로 묘사하는데 집중했다.
따라서 우리에게 그가 이 병을 앓아 괴물과 같이 묘사된 고대기록을 제공한 수에토니우스의 기록을 비롯해, 디오 카시우스 등이 많이 인용한 세네카 저서 등의 신빙성은 이들의 행적 등으로 믿기 어렵다고 평가받는다.
6. 여담
- 아우구스투스가 자신의 혈육 중 애지중지했고, 탄생을 지켜보고 이름을 지을 때에도 함께 한 남자황족이다. 이때 아우구스투스는 대 드루수스, 소 안토니아 부부의 다섯 번째 아이가 출생 임박이라는 소식에 이례적으로 갈리아의 루그두눔으로 행차해, 이곳으로 티베리우스를 손수 부른 다음 클라우디우스가 태어나자 자신의 손자가 태어났다면서 크게 기뻐했다. 그래서 클라우디우스가 루그두눔에서 태어난 뒤, 이름을 지어준 뒤 큰 행사가 열릴 때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가 모두 참석하는 진귀한 장면이 갈리아의 루그두눔에서 연출됐다.
- 플루타르코스가 적은 구절에 나온 아우구스투스의 손자 중 할아버지 집무실에서 키케로 작품을 읽다가 깜짝 놀랐다는 사람이 클라우디우스 황제로 알려져 있다. 이 이야기에 관해, 플루타르코스는 키케로가 죽고 먼 훗날, 아우구스투스의 손자가 평소처럼 할아버지 집무실에 들어가 키케로의 저작을 읽다가 할아버지에게 발견되자 감추려고 했다고 한다. 이때 아우구스투스는 서거 직전의 노령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이때 깜짝 놀라 어쩔 줄 몰라한 손자를 나무라지 않고, 키케로가 지은 그 책을 한동안 읽다가 손자에게 다시 돌려줬다고 한다. 그러면서 아우구스투스는 손자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일화는 사실이더라도, 아우구스투스가 말한 그리스어는 작가 플루타르코스가 그리스인이었기 때문에 번역해 적은 것 일 수도 있다는 점은 주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아우구스투스는 후대 로마 귀족들에게 알려진 소문과 달리, 본인 스스로 그리스어를 잘 하지 못함을 제대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로 자신이 없었는지, 아우구스투스는 언제나 라틴어로 말했고, 그리스어로 굳이 말해야 될 때에도 라틴어로 말하면서, 통역을 할 사람에게 그리스어를 번역해 보여준 사람이었다.
- 후대의 수에토니우스로 대표되는 반대파들에게 술과 버섯요리를 탐닉하고 여성편력이 있으면서도 아내에게 잡혀산다고 비아냥을 들었다. 또 검투 경기 중 패배한 검투사의 죽어가는 표정이 궁금하다며 죽게한 행동으로 알고 보면 잔인한 면이 있다는 비판도 받았다. 그러나 이런 평가에도 클라우디우스는 아버지 대 드루수스, 형 게르마니쿠스와 마찬가지로 성품 자체가 따뜻하고 상당히 도덕적이었으며, 머리회전이 빠른데다 무척 성실했다. 성격 역시 비밀스럽지 않았고 예의를 항상 갖추어 지위에 상관없이 상당히 깍듯했는데, 클라우디우스는 죽을 때까지 원로원을 무시하거나 기사계급들에게 강압적으로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18] 또 그는 나이가 들어감에도 권위적이지 않고, 동년배의 오랜 친구 갈바와 달리 고지식하기보다는 유연한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19] 이는 큰아버지 티베리우스조차 인정할 정도의 장점이었으며, 말년의 티베리우스가 클라우디우스를 어린 가이우스(칼리굴라), 티베리우스 게멜루스의 징검다리 격의 차기황제감으로 진지하게 고려한 이유였다고 타키투스 등은 기술하고 있다.
- 역대 로마 황제 중 풍자작가들에게 조롱을 많이 받았고 수에토니우스는 클라우디우스의 즉위와 삶 자체를 평생토록 회복 불가능한 신체적, 정신적 장애로 고통받는 기괴한 사람으로 묘사하며 조롱했다. 수에토니우스는 이 사람의 즉위를 익살스러운 코미디로 희화화하며 묘사해, 오늘날 사람들에게 얼간이로 알려지는데 크게 기여했다. 더욱이 클라우디우스는 사후 세네카와 네로에게 수년간 매일 같이 고인능욕을 당했다. 세네카의 경우, 어느 정도로 심각한 조롱인지 풍자작가들조차 양심상 하지 않은 "꼽추", "목소리조차 어느 육상동물보다 못한 노인네" 등의 질 나쁜 조롱까지 클라우디우스에게 하고, 이를 네로 등과 함께 이야기하며 클라우디우스를 능욕했다. 이는 양자이자 사위, 외종손 네로의 조롱도 마찬가지였는데, 네로는 죽을 때까지 습관적으로 클라우디우스의 말더듬 장애와 걸음걸이를 조롱하고 공개석상에서 희화화했다.
- 불편한 몸과 달리, 형 게르마니쿠스와 누나 리빌라처럼 외모가 잘생기고 아름다웠다고 한다. 클라우디우스는 키가 상당히 크고 목소리가 좋았으며 신체 균형이 뛰어난 체형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목이 길면서 굵은 단점 외에는 상당한 미남이었는데, 즉위 당시부터 반백발이고 회색 눈동자를 가진 기품 있는 잘생긴 외모와 훌륭한 체형으로 인해 로마 귀족으로서의 위엄과 품격까지 느껴졌다고 한다.
- 할아버지 아우구스투스의 전폭적인 후원 아래, 어린 시절부터 리비우스를 비롯한 당대 최고의 로마, 그리스 석학들 밑에서 역사, 천문학, 지리학, 의학 등을 배운 탓에 일찌감치 역사가이자 교양 높은 학자로도 명성이 자자했다. 하지만 이런 명성은 황족인 신분보다는 본인 스스로도 계속되는 역사 연구와 골동품 수집 등을 통해 에트루리아, 카르타고 역사에서 두각을 나타낸 이유가 더 컸다. 그래서 그는 당대 최고의 로마사, 에트루리아사, 카르타고사 권위자로 유명했다. 실제로 로마 황실의 일원이자 최고명문귀족이었던 클라우디우스는 라틴어, 그리스어뿐만 아니라[20] 당시 로마 지식인들도 쉽게 구사하기 힘들었던 에트루리아어, 페니키아어까지 상당한 완성도로 구사할 줄 알았다. 황실의 일원인데도 정치에 집중할 수 없는 한계로 정치 대신 학예에 집중해서 높은 성과를 거둔 것으로는 먼 후대 동로마의 콘스탄티노스 7세와도 공통점이 있다.
- 즉위 당시부터 자신의 롤모델로 외할머니의 남동생이자 양할아버지인 아우구스투스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했다. 그런데 이는 립서비스가 아닌 진심이었고, 클라우디우스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에게 따뜻했던 할아버지 아우구스투스를 대단히 존경했다. 살아생전 아우구스투스는 진심으로 어린 손자 클라우디우스가 사회적 위축감으로 음주와 도박의 길로 빠지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고, 가정교사를 선정하는 과정과 교사들의 클라우디우스에 대한 자세까지 세심히 신경쓰기로 유명했다. 따라서 클라우디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바람대로 일찌감치 대역사가 리비우스의 개인 지도 아래에서, 로마 법과 정치 문화를 배웠다고 하며 아우구스투스가 붙여준 교사들이 제국 안에서 알아주는 그리스 과학자들과 학자들인 터라 그 인맥의 깊이 역시 다른 귀족들의 판단과 달리 대단했다고 한다. 여기에 더해 아우구스투스는 클라우디우스에게 항상 자신감을 심어주려고 노력하고, 그의 강점이 발휘되도록 대단히 신경썼다. 따라서 클라우디우스는 즉위 전 본인이 직접 아우구스투스의 일대기를 기록한 위인전을 만들어 출판했고 즉위 후에도 입버릇처럼 아우구스투스를 닮으려고 노력했다.
- 로마 귀족 중 입양 없이 즉위 전까지 이름을 여러 번 개명한 사람이다. 태어날 당시 이름은 '데키무스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였지만, 얼마 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로 바꿨고, 기원전 9년 아버지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가 요절하고 그와 유가족이 원로원에게 받은 존칭 '게르마니쿠스'를 일가가 받으면서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로 재차 개명했다. 이후, 서기 6년 6월 백부 티베리우스, 친형 게르마니쿠스, 사촌형이자 매형 소 드루수스와 육촌 사이인 아그리파 포스투무스가 아우구스투스의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에 모두 입양될 때, 다시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게르마니쿠스'로 이름을 바꿨다.
- 보통은 칼리굴라와 네로 사이에 낀 듣보잡 황제로 여겨지지만 한국에서는 시오노 나나미 덕택에 재평가되었다. 네로가 황제에 오른 이후 세네카 등이 〈Apocolocyntosis divi Claudii〉(神皇 클라우디우스의 박化. 대략 '조롱박이 된 신황 클라우디우스'로 번역할 만...)라는 제목의, 저승에 간 클라우디우스가 신이 된 아우구스투스에게 까이는 희곡을 썼는데[21] 시오노는 로마의 신들이었다면 클라우디우스를 동정해 주었을 것이고 아우구스투스도 클라우디우스의 통치를 그런 식으로 혹독히 까며 단죄하지는 않고 나름대로 인정해 줬을 것이라고 평했다.
- 서구권에서는 나는 황제 클라우디우스다로 꽤 인지도가 있던 황제이다. 로버트 그레이브스의 소설 나는 황제 클라우디우스다에서는 말더듬이에 약골이라 집안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며(심지어는 어머니에게마저[22]), 유일한 친구였던 형 게르마니쿠스 등은 할머니 리비아의 음모에 희생당하거나 죽어버리지만, 주변 사람의 도움으로 버텨나가며 약골에 바보천치로 알려진 겉모습 덕분에 최후까지 살아남는 인물로 나오며, 리비두스나 폴리오 등으로부터는 성실하고 현명한 청년으로 불린다.[23] BBC 드라마판에서는 데릭 제이코비가 열연했다.
- 헐리웃 영화에서는 잉여나 돼지로 나오는 경향이 있었다. 종교 영화 '성의'의 후속작인 '데메트리우스와 검투사'들에서는 칼리굴라 황제 옆에서 찌질거리는 팔푼이로 나오다가 마지막에 황제가 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악명 높은 포르노 영화 칼리굴라에서도 비슷한 이미지로 나오고 있다.
- Fate/Grand Order에서는 로물루스 스토리에서 불완전 소환된 역대 황제 중 한 명으로 등장한다. 인게임에서는 그냥 고스트지만.
- 4번 결혼을 했고 아내들을 진심으로 사랑하였으나, 그 아내들은 그를 무시하거나 권력쟁취의 도구로 사용했다는 점에서 현대의 퐁퐁남과 매우 유사한 결혼생활을 하였다. 특히 세 번째 아내 발레리아 메살리나와 네 번째 아내 소 아그리피나( 네로의 생모)가 이런 점에서 악명 높았다. 그나마 메살리나 사이에서 친아들 브리타니쿠스를 보긴 했으나, 그가 죽고 후계 황제 자리는 의붓아들 네로한테 가로채였다. 게다가 브리타니쿠스는 소 아그리피나에 의해 "제거"되어 버렸으니 극단의 퐁퐁남인 셈이다.
- 플라비우스 왕조에서 제위계승법을 만든 뒤, 티투스 황제 아래에서 이 법안에서 명문으로 언급된 세 황제(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의 동전 발행 때, "디부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으로 재차 강조됐다. 그렇지만 클라우디우스는 티투스 황제와 그의 선황 베스파시아누스의 의도 때문에 이름만 빌려주고, 초상 도안은 원로원의 반대 때문에 성문화된 법안에 대놓고 적히지 못한 칼리굴라가 동전에 초상이 새겨진 까닭에, 본인 입장에선 굴욕(?) 아닌 굴욕을 경험했다. 이는 베스파시아누스, 티투스가 즉위 후 연설에서 칼리굴라를 이들 세 황제와 이들의 마지막 직계혈육 브리타니쿠스 카이사르와 함께 그들의 정통성으로 언급하면서, 칼리굴라와 클라우디우스를 섞어 발행한 꼼수였다고 평가받고 있다.[24]
[1]
로마관보, 원로원 회의록 등에 따라 황제를 명기한
타키투스,
수에토니우스,
디오 카시우스 등의 기록에 의거. 일반적으로 칼리굴라라고 알려져 있다.
[2]
태어날 당시의 이름. 아버지의 출생 당시 이름으로, 아우구스투스 사저에서 태어나 그가 친부와 함께 살기 전까지 쓴 이름이기도 했다.
[3]
아버지 생전 개명해, 기원전 9년까지 쓴 이름.
[4]
아버지 생전 개명한 이름 뒤에, 아버지가 원로원에게 받은 존칭 "게르마니쿠스"를 덧붙여 취한 이름이다. 이 이름은 서기 6년 6월 27일까지 사용했다.
[5]
서기 6년 6월 27일, 큰아버지 티베리우스가 아우구스투스의 양자가 된 이후, 본가를 잇기 위해 개명해 쓴 이름.
[6]
물론 원로원의 결론은 “율리우스 가문=클라우디우스 가문이고, 같은 카이사르 가문 사람이라서 진짜 싫은데 이 사람 외에 대안이 없네. 수도 경비대까지 등을 돌려서 공화정 복귀 가능성도 없고, 근위대와 친황실파들이 죄다 클라우디우스 즉위에 찬성하니 인정이나 해주는 척하고 위신이나 지키자.”였다고 한다.
[7]
서기 14년 원로원 앞에서 소 드루수스가 낭독해 공개된 아우구스투스의 유언장에서도 "내 친혈육이며 손자인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에게 가문의 유산과 그가 받은 지위를 내린다"고 명시하면서, 모두의 앞에서 친형 게르마니쿠스와 마찬가지로 아우구스투스 유언장을 통해, 공인된 황족으로 재확인됐다.
[8]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라고 불리는 이유 자체가 어차피 두 가문은 결혼, 입양 등으로 묶인 관계이기에 사실 율리우스와 클라우디우스 가문을 분리해서 왕조를 나눌 필요가 없다. 애초에 그의 친형인
게르마니쿠스부터가 삼촌
티베리우스에게 입양되어, 시리아에서 급사하기 전까지 공인된 황위 계승 후계자였다.
[9]
흔히 대(大) 드루수스, 네로 드루수스라고 불리는 인물로 이 사람의 후손들이 바로 티베리우스 사후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3명의 황제들인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네로이다.
[10]
아우구스투스의 누나 옥타비아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사이에서 낳은 둘째 딸. 친언니는 네로의 친할머니인 대(大) 안토니아이다.
[11]
개신교 성경에 등장하는 라틴어 인명 대부분이 그렇다. '
티베리우스'를 '디베료'로, '
아우구스투스'를 '아구스도'로, '
폰티우스 필라투스'를 '본디오 빌라도'로, ''
코르넬리우스'를 '고넬료'로... 등등. 전부 들어맞는 것은 아니지만, 흔히 알고 있는 라틴어 인명의 '-us'를 '-o'로 바꾸고, 'ㅋ, ㅌ, ㅍ' 등의 격음을 'ㄱ, ㄷ, ㅂ' 등의 평음으로 바꾸면 대충 개신교 성경에서의 표기가 나온다.
[12]
아우구스투스가 클라우디우스에게 가르친 기본 교육과 정국 파악능력 습득 교육은, 말만 기본이자 습득일 뿐, 후대의 로마인 모두 말했듯이 제왕교육이었다. 아우구스투스가 한 정국 상황 파악 교육법은 저녁식사를 하면서 원로원 의원이나 총독 등을 불러 놓고, 그들이 이를 보고하고 아우구스투스가 질문을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을 넘어, 식사 후 아우구스투스에게 이를 참관하듯이 자연스럽게 들은 친혈육의 브리핑과 첨삭 지도까지 포함된 방법이었다. 이렇게 아우구스투스는 1년 365일 내내 클라우디우스를 11세부터 23세까지 지도했다. 더해 아우구스투스는 클라우디우스가 16세부터 다리에 힘이 붙고 키가 훌쩍 크면서 걸을 때, 미세하게 왼쪽 무릎만 흔들거리는 수준으로 장애를 극복했을 때부터는 프라이토리아니 장교 중 똘똘한 젊은 장교와 베테랑 장교를 따로 개인비서로 붙여주면서, 리비우스에게 본인이 직접 찾아가 그의 저술을 돕게 해달라고 하고, 그 저술까지 토론하며, 자신이 옥타비아누스 시절에 경험한 것까지 가르쳤다. 즉, 2세기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시대부터 일반화된 제왕교육을 뛰어넘는 것을 아우구스투스는 클라우디우스에게 서거 직전까지 가르쳤다. 이 방법의 교육은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 클라우디우스만 받았는데, 클라우디우스의 경우에는 세 사람과 달리 유일하게 군복무를 하지 못해,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옥타비아누스 시절 정적들의 자서전 독서까지 활용하고, 그 연구와 저술까지 포함시켰다.(하지만 리비아, 안토니아는 아우구스투스의 명에도 아우구스투스 사망 이후 이 일이 꼬투리잡힐 수 있다고 만류해, 클라우디우스는 저술을 포기했다.)
[13]
물론, 디오는 아우구스투스의 유능함, 원로원에 대한 유연한 태도에 대해선, 그가 좋은 황제의 교과서이라면서 국가의 아버지다운 인물이라고 평했다.
[14]
우유부단하다는 세간의 평가와는 달리 칼리굴라가 암살당하고 민중들이 들고 일어났으며 원로원에서는 공화정 복귀를 논하는 혼란한 정국을 24시간 내에 진압하고 즉위하여 제정을 지켜내는 비범한 행보를 보였다.
[15]
이 부분에서 칼리굴라는 퍼포먼스와 자기 우상화, 정적 숙청의 방법을 사용해 4년 만에 본인이 측근인 근위대장에게 암살되는 결과로 연결됐다. 아울러 그 결과, 자신의 병력과 지나치게 솔직하고 짓궂은 농담조 어투 등이 하지도 않은 일들과 거리의 뜬소문과 결합해 진짜 한 일로 인식되면서 구제불능의 막장 폭군으로 기록되는 불명예까지 얻게 됐다. 칼리굴라가 막장 폭군에서, 오늘날 그나마 암군 정도로(?) 재평가되는 부분
[16]
"A learned man, my child, a learned man and a lover of his country." 플루타르크. 키케로의 삶 49.3
http://penelope.uchicago.edu/Thayer/e/roman/texts/plutarch/lives/cicero*.html
[17]
겉으로보면 아우구스투스가 키게로를 높게 평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의 뜻을 보면 '근데 그 양반은 내 정적 수준은 아니었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기도 하다.하긴 아우구스투스가 키게로를 철저히 써먹은 것을 보면 정적 따위는 안된다고 생각한게 당연하기도 하다. 아버지라고 불렀다고 뛸 듯이 기뻐하며 온갖 김치국을 한사발 하셨으니 말이다.
[18]
그럼에도 원로원은 이런 클라우디우스의 신체적 장애를 이유로 무시했고, 티베리우스와 가이우스처럼 립서비스로 협조만 요청한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따라서 거의 대부분의 원로원 의원들은 늘 클라우디우스의 협조 요청을 들으면 그 진위를 항상 의심했다.
[19]
클라우디우스가 제위에 오르기 전부터 친구였던 갈바는 젊은 시절부터 지나칠 정도로 보수적이고 사고가 고지식했다. 또 그는 나이가 지긋한 앞세대의 로마 귀족들도 하지 않은 관례까지 전통적이라면서 모두 지킨 귀족이었는데, 네로가 몰락한 이후 제위에 올랐을 당시에는 젊은 시절의 총명함까지 사라지고 사생활 역시 엄격함 대신 은밀하고 이중적으로 변했다.
[20]
당시 로마 교양인들과 상류층들은 모국어인 라틴어와 지중해 동부 일대의 공용어인 그리스어 모두에 능통했다.
[21]
천국 문 앞에 와서 자신을 신으로 인정해 달라는 클라우디우스의 요청에 유피테르가 여러 신들을 모아서 그의 신격화를 인정해 줄지에 대해 회의를 열었는데, 이 자리에서 아우구스투스가 가장 강력하게 반대하면서 "저런 놈까지 신격화를 인정해 주면 앞으로 누구도 신들을 믿고 공경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주장해 결국 클라우디우스는 신격화되지 못한 채 지하세계로 내려간다는 이야기.
[22]
스파르타처럼 약골로 태어난 아이들을 절벽에서 떨어뜨려 죽이진 않았지만, 자식으로 인지하지 않고서 그냥 노예로 만들어버리는 일은 종종 있었다고 한다.
[23]
다만 리비두스에겐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갈굼당한다.
[24]
원로원이 플라비우스 황제계승법을 만들어줄 당시, 끝까지 칼리굴라 이름을 넣지 않은 이유는,
칼리굴라 암살 사건에서 밝혀졌듯이, 암살 주동자 20명과 공모하면서 이들의 배후이자 조력자가 된 이들이 원로원 그 자신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베스파시아누스는 원로원에 끝까지 남아, 갓 임기를 마친 법무관이자 칼리굴라 최측근으로서 원로원을 상대로 목숨을 걸고, 암살자 처벌과 원로원 의원들의 즉각 처벌을 외쳤고, 결국 게르만 호위대와 성난 군중 일부를 통제하면서, 원로원 의원들 일부를 때려죽이는 것을 방치했던 과거가 있었다. 따라서 베스파시아누스는 이때의 일로 클라우디우스 황제와 소 안토니아의 해방노예들에게 제대로 눈도장을 찍게 되면서, 귀족 반열까지 오르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