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2-22 14:34:30

포카스

 
{{{#FCE774 {{{#!wiki style="margin: -26px -10px -5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8F0E09, #9F0807 20%, #9F0807 80%, #8F0E09)"
{{{#!folding [ 펼치기 · 접기 ]
{{{#181818,#E5E5E5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font-size: 0.95em; letter-spacing: -0.35px"
원수정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아우구스투스 | 티베리우스 | 가이우스(칼리굴라) | 클라우디우스 | 네로
네 황제의 해 갈바 |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 | 비텔리우스
플라비우스 왕조 베스파시아누스 | 티투스 | 도미티아누스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네르바 | 트라야누스 | 하드리아누스 | 안토니누스 피우스 | 공동 즉위 루키우스 베루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 콤모두스
비정통 아비디우스 카시우스
다섯 황제의 해 페르티낙스 | 디디우스 율리아누스 | 페스켄니우스 니게르 | 클로디우스 알비누스 |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세베루스 왕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 공동 즉위 게타 · 카라칼라
- 마크리누스 · 디아두메니아누스
세베루스 왕조 엘라가발루스 |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군인 황제 시대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 공동 즉위 고르디아누스 1세 · 고르디아누스 2세 | 공동 즉위 푸피에누스(막시무스) · 발비누스 | 고르디아누스 3세 | 필리푸스 아라부스 · 필리푸스 2세 | 데키우스 | 공동 통치 데키우스 · 헤렌니우스 에트루스쿠스 | 공동 즉위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 · 호스틸리아누스 · 볼루시아누스 | 아이밀리아누스 | 공동 즉위 발레리아누스 · 갈리에누스 |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 퀸틸루스 | 아우렐리아누스 | 타키투스 | 플로리아누스 | 프로부스 | 카루스 | 공동 즉위 누메리아누스 · 카리누스
비정통 스폰시아누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등장
- 카리누스 · 디오클레티아누스
서방 동방
양두정치 막시미아누스 양두정치 디오클레티아누스
사두정치
막시미아누스 | 콘스탄티우스 1세 | 발레리우스 세베루스 | 막센티우스 | 2차 재위 막시미아누스 | 콘스탄티누스 1세 사두정치 디오클레티아누스 | 갈레리우스 | 리키니우스 | 막시미누스 다이아 | 발레리우스 발렌스 | 마르티니아누스
통일
콘스탄티누스 왕조 콘스탄티누스 1세
서방 동방
콘스탄티누스 왕조 공동 즉위 콘스탄티누스 2세 · 콘스탄스
비정통 마그넨티우스 · 율리우스 네포티아누스 · 베트라니오
콘스탄티누스 왕조 콘스탄티우스 2세
통일
콘스탄티누스 왕조 콘스탄티우스 2세
서방 동방
콘스탄티누스 왕조 율리아누스 콘스탄티누스 왕조 콘스탄티우스 2세
통일
콘스탄티누스 왕조 율리아누스
- 요비아누스
발렌티니아누스 왕조 발렌티니아누스 1세
서방 동방
발렌티니아누스 왕조 발렌티니아누스 1세 | 그라티아누스 | 발렌티니아누스 2세 발렌티니아누스 왕조 발렌스
비정통 프로코피우스
비정통 에우게니우스
테오도시우스 왕조 마그누스 막시무스 · 플라비우스 빅토르 테오도시우스 왕조 테오도시우스 1세
통일
테오도시우스 왕조 테오도시우스 1세
서방 동방
테오도시우스 왕조 호노리우스 | 콘스탄티우스 3세 | 발렌티니아누스 3세
비정통 히스파니아의 막시무스
테오도시우스 왕조 아르카디우스 | 테오도시우스 2세 | 마르키아누스
비정통 콘스탄티누스 3세 · 프리스쿠스 아탈루스 · 요안네스
최후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 | 아비투스 | 마요리아누스 | 리비우스 세베루스 | 안테미우스 | 올리브리우스 | 글리케리우스 | 율리우스 네포스 |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 레오 왕조 레오 1세 | 레오 2세 | 제노 | 바실리스쿠스 · 마르쿠스 | 2차 재위 제노
동방
레오 왕조 2차 재위 제노 | 아나스타시우스 1세
유스티니아누스 왕조 유스티누스 1세 | 유스티니아누스 1세 | 유스티누스 2세 | 티베리우스 2세 | 마우리키우스 · 테오도시우스
- 포카스
이라클리오스 왕조 이라클리오스 | 공동 즉위 콘스탄티노스 3세 · 이라클로나스 · 다비드 티베리오스 | 콘스탄스 2세 · 콘스탄티노스 4세 · 이라클리오스 · 티베리오스 | 유스티니아노스 2세
20년간의 혼란 레온티오스 | 티베리오스 3세 | 2차 재위 유스티니아노스 2세 | 필리피코스 | 아나스타시오스 2세 | 테오도시오스 3세
이사브리아 왕조 레온 3세 | 콘스탄티노스 5세 | 아르타바스도스 · 니키포로스 | 2차 재위 콘스탄티노스 5세 | 레온 4세 | 콘스탄티노스 6세 | 이리니
니키포로스 왕조 니키포로스 1세 | 스타브라키오스 | 미하일 1세 랑가베스 · 테오필락토스 · 스타브라키오스
- 레온 5세 · 콘스탄티노스
아모리아 왕조 미하일 2세 | 테오필로스 | 미하일 3세
마케도니아 왕조 바실리오스 1세 · 콘스탄티노스 | 레온 6세 | 알렉산드로스 2세 | 콘스탄티노스 7세 | 로마노스 1세 · 흐리스토포로스 레카피노스 · 스테파노스 레카피노스 · 콘스탄티노스 레카피노스 | 로마노스 2세 | 니키포로스 2세 | 요안니스 1세 | 바실리오스 2세 | 콘스탄티노스 8세 | 로마노스 3세 | 미하일 4세 | 미하일 5세 | 공동 즉위 조이 · 테오도라 | 콘스탄티노스 9세 | 2차 재위 테오도라
- 미하일 6세
콤니노스 왕조 이사키오스 1세
두카스 왕조 콘스탄티노스 10세 | 미하일 7세 · 콘스탄티오스 두카스 · 안드로니코스 두카스 · 콘스탄티노스 두카스 | 로마노스 4세 · 레온 디오예니스 · 니키포로스 디오예니스 | 니키포로스 3세
콤니노스 왕조 알렉시오스 1세 · 콘스탄티노스 두카스 | 요안니스 2세 · 알렉시오스 콤니노스 | 마누일 1세 | 알렉시오스 2세 | 안드로니코스 1세
앙겔로스 왕조 이사키오스 2세 | 알렉시오스 3세 | 2차 재위 이사키오스 2세 | 알렉시오스 4세 | 알렉시오스 5세
니케아
라스카리스 왕조 테오도로스 1세 | 요안니스 3세 | 테오도로스 2세 | 요안니스 4세 | 미하일 8세
비정통 콘스탄티노스 라스카리스
동방
팔레올로고스 왕조 미하일 8세 | 안드로니코스 2세 | 미하일 9세 | 안드로니코스 3세 | 요안니스 5세 | 공동 즉위 요안니스 6세 | 2차 재위 요안니스 5세 | 공동 즉위 안드로니코스 4세 · 요안니스 7세 | 3차 재위 요안니스 5세 | 2차 재위 요안니스 7세 · 안드로니코스 5세 | 4차 재위 요안니스 5세 | 마누일 2세 | 요안니스 8세 | 콘스탄티노스 11세
아우구스투스 · 카이사르
{{{#FCE774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width: 37px; padding: 0 6px"
}}}}}}}}}}}}}}}
포카스 관련 틀
[ 펼치기 · 접기 ]
----
 
{{{#FCE774 {{{#!wiki style="margin: -26px -10px -5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8F0E09, #9F0807 20%, #9F0807 80%, #8F0E09)"
{{{#!folding [ 펼치기 · 접기 ]
{{{#181818,#E5E5E5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font-size: 0.742em; letter-spacing: -0.35px"
{{{#!wiki style="" <tablewidth=100%><tablealign=center> 라틴어 문구 색상 범례
  • Annus A post consulatum B (et C): B(와 C)의 집정관 집권으로부터 A년 뒤
황제 겸 집정관 }}}
601년 602년 603년 604년 605년
플라비우스 마우리키우스 티베리우스 아우구스투스 플라비우스 마우리키우스 티베리우스 아우구스투스 플라비우스 포카스 아우구스투스 Annuspost consulatum Focae Augusti Annuspost consulatum Focae Augusti
606년 607년 608년 609년 610년
Annuspost consulatum Focae Augusti Annuspost consulatum Focae Augusti Annuspost consulatum Focae Augusti Annuspost consulatum Focae Augusti Annuspost consulatum Focae Augusti
헤라클리우스
플라비우스 헤라클리우스
611년 612년 613년 614년 615년
플라비우스 헤라클리우스 아우구스투스 Annuspost consulatum Heraclii Augusti Annuspost consulatum Heraclii Augusti Annuspost consulatum Heraclii Augusti Annuspost consulatum Heraclii Augusti
플라비우스 헤라클리우스 노부스 콘스탄티누스 아우구스투스
616년 617년 618년 619년 620년
Annuspost consulatum Heraclii Augusti Annuspost consulatum Heraclii Augusti Annuspost consulatum Heraclii Augusti Annuspost consulatum Heraclii Augusti Annuspost consulatum Heraclii Augusti
621년 622년 623년 624년 625년
Annuspost consulatum Heraclii Augusti Annuspost consulatum Heraclii Augusti Annuspost consulatum Heraclii Augusti Annus ⅩⅢ post consulatum Heraclii Augusti Annus ⅩⅣ post consulatum Heraclii Augusti
626년 627년 628년 629년 630년
Annus ⅩⅤ post consulatum Heraclii Augusti Annus ⅩⅥ post consulatum Heraclii Augusti Annus ⅩⅦ post consulatum Heraclii Augusti Annus ⅩⅧ post consulatum Heraclii Augusti Annus ⅩⅨ post consulatum Heraclii Augusti
631년 632년 633년 634년 635년
Annus ⅩⅩ post consulatum Heraclii Augusti Annus ⅩⅪ post consulatum Heraclii Augusti Annus ⅩⅫ post consulatum Heraclii Augusti Annus ⅩⅩⅢ post consulatum Heraclii Augusti Annus ⅩⅩⅣ post consulatum Heraclii Augusti
636년 637년 638년 639년 640년
Annus ⅩⅩⅤ post consulatum Heraclii Augusti Annus ⅩⅩⅥ post consulatum Heraclii Augusti Annus ⅩⅩⅦ post consulatum Heraclii Augusti Annus ⅩⅩⅧ post consulatum Heraclii Augusti Annus ⅩⅩⅨ post consulatum Heraclii Augusti
플라비우스 콘스탄티누스 헤라클리우스 아우구스투스
641년 642년 643년 644년 645년
Annus ⅩⅩⅩ post consulatum Heraclii Augusti 플라비우스 콘스탄스 아우구스투스 Annuspost consulatum Constantis Augusti Annuspost consulatum Constantis Augusti Annuspost consulatum Constantis Augusti
646년 647년 648년 649년 650년
Annuspost consulatum Constantis Augusti Annuspost consulatum Constantis Augusti Annuspost consulatum Constantis Augusti Annuspost consulatum Constantis Augusti Annuspost consulatum Constantis Augusti
651년 652년 653년 654년 655년
Annuspost consulatum Constantis Augusti Annuspost consulatum Constantis Augusti Annuspost consulatum Constantis Augusti Annuspost consulatum Constantis Augusti Annus ⅩⅢ post consulatum Constantis Augusti
656년 657년 658년 659년 660년
Annus ⅩⅣ post consulatum Constantis Augusti Annus ⅩⅤ post consulatum Constantis Augusti Annus ⅩⅥ post consulatum Constantis Augusti Annus ⅩⅦ post consulatum Constantis Augusti Annus ⅩⅧ post consulatum Constantis Augusti
테오도시우스
파울루스
661년 662년 663년 664년 665년
Annus ⅩⅨ post consulatum Constantis Augusti Annus ⅩⅩ post consulatum Constantis Augusti Annus ⅩⅪ post consulatum Constantis Augusti Annus ⅩⅫ post consulatum Constantis Augusti Annus ⅩⅩⅢ post consulatum Constantis Augusti
666년 667년 668년 669년 670년
Annus ⅩⅩⅣ post consulatum Constantis Augusti Annus ⅩⅩⅤ post consulatum Constantis Augusti 플라비우스 콘스탄티누스 아우구스투스 Annuspost consulatum Constantini Augusti Annuspost consulatum Constantini Augusti
671년 672년 673년 674년 675년
Annuspost consulatum Constantini Augusti Annuspost consulatum Constantini Augusti Annuspost consulatum Constantini Augusti Annuspost consulatum Constantini Augusti Annuspost consulatum Constantini Augusti
676년 677년 678년 679년 680년
Annuspost consulatum Constantini Augusti Annuspost consulatum Constantini Augusti Annuspost consulatum Constantini Augusti Annuspost consulatum Constantini Augusti Annuspost consulatum Constantini Augusti
681년 682년 683년 684년 685년
Annus ⅩⅢ post consulatum Constantini Augusti Annus ⅩⅣ post consulatum Constantini Augusti Annus ⅩⅤ post consulatum Constantini Augusti Annus ⅩⅥ post consulatum Constantini Augusti Annus ⅩⅦ post consulatum Constantini Augusti
686년 687년 688년 689년 690년
플라비우스 유스티니아누스 아우구스투스 Annuspost consulatum Justiniani Augusti Annuspost consulatum Justiniani Augusti Annuspost consulatum Justiniani Augusti Annuspost consulatum Justiniani Augusti
691년 692년 693년 694년 695년
Annuspost consulatum Justiniani Augusti Annuspost consulatum Justiniani Augusti Annuspost consulatum Justiniani Augusti Annuspost consulatum Justiniani Augusti Annuspost consulatum Justiniani Augusti
696년 697년 698년 699년 700년
Annuspost consulatum Justiniani Augusti Annuspost consulatum Justiniani Augusti Annuspost consulatum Justiniani Augusti 티베리우스 아우구스투스 Annuspost consulatum Tiberii Augusti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width: 37px; padding: 0 6px"
}}}}}}}}}}}}}}}


로마 제국 제65대 황제
포카스
PHOCAS | Φωκάς
파일:PhocasNew.png
<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플라비우스 포카스 아우구스투스
Flavius Phocas Augustus
출생 547년
동로마 제국 트라키아
사망 610년 10월 5일 (향년 62-63세)
동로마 제국 콘스탄티노폴리스
재위 기간 로마 황제
602년 11월 23일 ~ 610년 10월 5일 (8년)
전임자 마우리키우스
테오도시우스
후임자 이라클리오스
배우자 레온티아
종교 기독교
1. 개요2. 생애
2.1. 즉위 전 행적2.2. 통치
2.2.1. 끊임없는 반란과 숙청2.2.2. 사산 왕조의 침략2.2.3. 발칸 전선2.2.4. 이베리아 전선2.2.5. 이탈리아 전선
2.3. 이라클리오스의 난과 몰락
3. 평가

[clearfix]

1. 개요

로마 제국의 65대 황제. 서기 602년 마우리키우스 황제를 쿠데타로 몰아내고 제위에 오른 뒤 610년 이라클리오스에 의해 폐위될 때까지 8년간 제국을 다스렸다.

2. 생애

2.1. 즉위 전 행적

부친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으나 모친은 도멘치아(Domentzia)라고 하며, 동생 도멘치올루스, 코멘티올로스가 있었다. 그의 기원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일부 학자들은 훗날 아나톨리아에서 활약한 동로마 장성들 중 '포카스'라는 성이 자주 등장한 것을 근거로 그 역시 아나톨리아 출신이었을 거라고 추정하지만, 다수의 학자들은 트라키아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그는 트라키아 출신의 레온티아와 결혼하여 딸 도멘치아를 낳았다. 훗날 그가 황제가 되었을 때 레온티아 역시 황후가 되었는데, 이전의 황후인 아일리아 아나스타시아 콘스탄티나가 새겨진 주화가 별로 없는데 비해 레온티아의 초상화를 담은 동전이 다량 주조되었다. 이로 볼 때, 그녀의 원래 신분은 남편보다 높았을 가능성이 있다.

7세기 초, 포카스는 아바르 슬라브의 침략으로부터 다뉴브 전선을 방어하기 위해 마우리키우스 황제에 의해 파견된 군대의 장교였으나 정확한 직책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라클리오스에 호의적인 동로마 저자들의 기록에는 그를 하급장교 또는 백인대장으로 묘사하지만, 서유럽측 기록에서는 그가 고위 관리의 범주에 속한다고 밝혔다. 8세기의 이탈리아 수도자이자 역사가 파울 부제(Paul the Deacon)는 포카스가 스트라토르(strator: 말을 돌보거나 조달하고 지휘관의 참모 역할도 수행하는 고위 관직)였다고 기술했으며, 7세기 프랑크 역사가 프레데가르는 포카스가 귀족이자 중요한 군사 계급을 맡은 장군이었다고 서술했다. 또한 아랍의 치하에 들어간 이집트에서 콥트 정교회 수도자로 활동했던 니키우의 요한(John of Nikiu)은 포카스가 트라키아 방면군의 네 사령관들 중 한 명이라고 서술했다. 현재 학계는 이러한 사료의 불일치 때문에 포카스가 하급 장교였다는 기존의 통설에 지극히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다.

당시 마우리키우스 황제는 서방 및 동방과의 끊임없는 전쟁으로 국고가 바닥나자 지출을 줄이기 위해 군 감축을 진행하고 있었다. 서기 588년 모든 군량의 4분의 1을 감축하자 동방군이 폭동을 일으켜 이를 진압하는 데 상당한 희생을 치뤄야 했고 599년에는 아바르족이 잡아간 제국군 포로 1만 2천 명의 몸값을 지급하는 것을 거부해 포로들이 모조리 학살당하는 비극을 초래했다. 급기야 602년, 마우리키우스 황제는 도나우 강 너머에 진군한 군대에게 진지로 돌아오지 말고 거기서 겨울을 보내라는 지시를 내렸다. 마우리키우스 황제가 이런 지시를 내린 건 병사들이 귀환하기 위해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병사들은 이 지시를 도저히 수용할 수 없었다. 그들은 8개월 동안 도나우 강 너머의 야만족과 격전을 치렀기 때문에 심신이 고단했다. 비록 아바르족과 싸워 이겨 상당량의 전리품을 가지고 있었으나 집에 돌아가서 시장에 팔기 전에는 그런건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게다가 야만족이 곳곳에 도사리는 위험한 곳에서 겨울을 보내는 것은 누가 봐도 너무 위험했다. 당연히 병사들은 분노했고 세쿠리스카 요새에 이르렀을 때 더이상의 진군을 거부했다. 지휘관 페트루스는 조금만 더 참아보자고 호소했지만, 병사들은 황제의 동생이니 황제 편을 드는 게 당연하다며 비웃고는 포카스를 방패 위에 올리고 지도자로 선출했다. 페트루스는 간신히 목숨을 건진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와 반란 소식을 전했다.

당시 마우리키우스는 지난 겨울 동안 기근이 시작된 이래로 아사자가 속출하는 상황에 반감을 품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이 봉기를 일으키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페트루스가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전하자, 황제는 심히 당황했다. 이때 페트루스는 반란군 측이 황제에게 전하는 전갈을 가지고 왔다. 이 전갈에 따르면, 반란군 병사들은 정작 포카스를 황제로 뽑은 것은 아니며 마우리키우스 황제를 거부할 뿐 황실에 대한 충성 자체를 포기한 것은 아니라고 밝혔다. 그들은 황제의 17살짜리 아들 테오도시우스나 장인 게르마누스를 새 황제로 받들겠다고 선언했다. 마우리키우스는 즉각 테오도시우스와 게르마누스를 반역자로 규정하고 소환했다. 테오도시우스는 매질을 당했고 게르마누스는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으로 피신해 지지자들을 동원하여, 자신을 잡으러 온 황궁 근위대를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마우리키우스는 반란을 진압하려 했으나 병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원형 경기장에 민중을 소집한 후 지지를 호소했다. 당시 원형 경기장엔 청색당과 녹색당이 파벌을 나뉘어 수도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마우리키우스는 이 두 파벌의 충성을 확인한 후 두 당이 힘을 합쳐 반란군을 막는다면 위기를 넘길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청색당원의 지지는 확인했지만 녹색당원의 지지는 불확실했다. 그러다가 황제가 지금까지 제물을 베풀어주지 않고 인색하게 군 것을 성토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고, 이내 기근을 해결하지 못하는 무능한 황제를 몰아내자는 목소리가 빗발쳤다. 급기야 군중은 폭동을 일으켜 황궁 앞 광장까지 진격했다. 마우리키우스는 수도 경비대에게 진압을 명령했으나 오히려 그들이 거부했다.

결국 602년 11월 22일 밤, 마우리키우스는 아내와 여덟 명의 자식, 그의 충신인 동방의 민정 총독 콘스탄티누스 라르디스와 함께 변장을 하고 황궁을 빠져나간 다음 일전에 자신의 도움을 받아 제위에 복귀한 바 있던 사산 왕조 샤한샤 호스로 2세에게 의탁하려 했다. 한편, 게르마누스는 대성당에서 나온 뒤 민중의 지지를 받아 제위에 오르려 했다. 그는 청색당 편에 속했지만 수적으로 더 많은 녹색당의 지지를 얻고자 녹색당의 지도자 세르기우스에게 지지를 부탁하고 황제가 될 경우 충분한 대가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녹색당은 게르마누스가 제위에 오르게 될 경우 입을 싹 씻고 청색당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정국을 이끌 것이라 판단해 이를 거부하고 포카스를 황제로 추대하기로 결정했다.

포카스는 당초 추대하고자 했던 테오도시우스와 게르마누스가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하자 비로소 황제가 되겠다는 야심을 품고 병사들을 포섭한 다음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군했다. 그리하여 11월 23일, 백마가 끄는 전차를 타고 노변에 운집한 군중에게 금가루를 뿌리며 수도에 당당하게 입성했다. 이튿날에는 정식으로 황제로 즉위했는데 이때 병사들에게 전통적으로 주는 하사금을 내렸고 화려한 행사를 열어 백성들을 즐겁게 했으며 자신의 아내 레온티아에게 황후를 뜻하는 아우구스타의 직함을 수여했다. 그런데 마지막 행사에서 청색당과 녹색당 사이에 난투극이 벌어졌고 그 과정에서 청색당원 몇 명은 이렇게 외쳤다.
" 마우리키우스는 죽지 않았다는 걸 명심해라!"
물론 포카스는 그걸 잊지 않았다. 얼마 후, 그는 병사들을 보내 도망치고 있던 마우리키우스 일행을 체포했다. 마우리키우스와 아들들은 모조리 참살당했고 시신들은 갈기갈기 찢겨진 뒤 바다에 버려졌다. 또한 수급들은 따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송되어 헵도몬에 내걸렸다. 또한 전 황제의 밑에서 군비 마련을 위해 무거운 세금을 부과해 민중의 미움을 샀던 콘스탄티누스 라르디스 등 주요 관료들도 곧 체포되어 처형되었고, 마우리키우스의 동생 페트루스, 선황제의 태자 테오도시우스 같이 제위를 위협할 만한 이들도 심한 고문을 가한 후 처형했다. 다만 게르마누스는 포카스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사제가 된다는 조건하에 목숨을 건졌다. 마우리키우스 황제의 아내 콘스탄티나는 세 황녀와 함께 수녀원에 감금되었다.

2.2. 통치

2.2.1. 끊임없는 반란과 숙청

반란을 통해 황위를 찬탈한 뒤 전임 황제와 자식들을 잔혹하게 살해한 후, 포카스는 수많은 반란자들의 도전에 직면했다. 우선 동방 방면군 사령관 나르세스가 마우리키우스 황제가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진압군 사령관 게르마누스를 상대로 에데사 인근에서 승리했고, 게르마누스는 전투 중에 부상을 입고 11일 만에 사망했다. 포카스 황제는 레온티오스 장군에게 진압 명령을 내렸다. 레온티오스는 나르세스를 에데사에 몰아넣고 공세를 가했지만, 나르세스는 기회를 틈타 포위망을 벗어난 뒤 히에라폴리스에 자리를 잡았다.

포카스는 레온티오스가 일부러 나르세스를 놓아줬다고 의심해 604년 레온티오스를 체포해 감옥에 집어넣고, 자신의 동생인 도멘치올루스를 새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도멘치올루스는 나르세스를 무력으로 응징하기보다는 협상하기로 하였고, 나르세스는 신변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귀순하였다.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동했지만, 포카스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나르세스를 산채로 불태웠다. 테오파네스의 연대기에 따르면, 페르시아인들에게 공포를 안겨줄 만큼 뛰어난 장수였기에, 페르시아인들은 나르세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 날뛰었다고 한다.

605년, 지난날 수도원에 들어갔던 게르마누스가 무리를 모아 포카스를 암살하고 황제가 되려는 음모를 꾸몄다가 발각되었다. 포카스는 이에 연루된 자들을 모조리 처형하게 했는데, 그 중에는 콘스탄티나 황후도 있었다. 콘스탄티나는 세 딸과 함께 칼케돈에서 처형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수원장 게오르기우스 케드레누스는 콘스탄티나의 머리가 효수되었고 시신은 보스포루스 해협에 던져졌다고 기록했다.

포카스는 처음 집권했을 때 녹색당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녹색당의 권세가 강해지는 것을 경계한 포카스가 녹색당 지도자 세르기우스를 처형해버리면서, 그와 녹색당과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609년, 군중이 히포드롬에 들어선 포카스를 향해 "술에 취한 것 아니냐"고 야유를 보냈다. 이에 분노한 황제는 군대를 풀어서 야유를 퍼부은 군중들을 학살하게 했다. 녹색당은 이에 대응해 수도 곳곳에 불을 질렀고, 이로 인해 많은 공공건물이 파괴되었다.

이렇듯 수많은 반란과 음모에 시달렸고 이에 대응해 가혹한 숙청을 단행했지만, 모든 귀족을 적으로 돌리지는 않았다. 그는 제국 근위대인 엑스쿠비토레스의 지휘관인 프리스쿠스를 자신의 딸 도멘치아와 결혼시켰다. 그러나 프리스쿠스는 종종 황제의 의심을 사 숙청 위협을 받아야 했다고 전해진다. 고대의 여러 기록은 프리스쿠스가 아프리카 총독부의 총독 대 헤라클리우스에게 반란을 선동하는 편지를 보냈다고 밝히기도 했지만, 진위 여부는 불분명하다.

2.2.2. 사산 왕조의 침략

603년, 호스로 2세는 자신을 마우리키우스의 장남 테오도시우스라고 사칭한 자를 전면에 내세우며, 찬탈자를 몰아내고 은인의 아들을 복위시키기 위한 성전이니 로마인들은 적대하지 말라고 선전하며 전쟁을 단행했다. 물론 실제 의도는 591년 제위를 되찾았을 때 로마 제국에 할양해야 했던 영토를 되찾으려는 것이었다. 사산 왕조군은 타우루스 산맥의 북쪽과 남쪽으로 나뉘어 공격했고, 포카스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나르세스가 여기에 호응했다. 호스로는 다라 요새를 포위하였고, 별동대를 파견해 에데사에서 토벌군에게 포위된 나르세스를 돕게 하였다. 사산 왕조군은 에데사에서 로마군을 격파하였고, 나르세스는 가짜 테오도시우스를 에데사에서 보호받게 하였다. 포카스는 도나우 강 건너편의 아바르족과 평화 협약을 체결한 뒤 나르세스-사산 연합군을 상대로 반격하였으나 패배했다.

포카스는 나르세스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유인해 죽인 뒤, 여러 장군들을 반역을 일으킬 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체포해 처형하거나 감옥에 가두었다. 사산 왕조군은 동로마군이 포카스의 이같은 조치로 인해 약해진 틈을 타 맹공을 퍼부었고, 그 결과 604년 다라 요새를 함락시켰고 591년 이전의 옛 영토를 모두 회복하였다. 이후 간간히 습격대를 보내서 적을 피로하게 만들면서 숨을 고르다가, 607년 대대적인 원정을 감행했다. 당시 동로마군 사령관은 포카스의 동생 도멘치올루스였으나, 군사적 역량은 별로 없었다. 사산 왕조군은 그를 상대로 연전연승하여 메소포타미아 서부와 시리아, 아르메니아, 카파도키아, 파플라고니아, 갈라티아 등지를 모조리 휩쓸었고, 608년엔 사산 별동대가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빤히 바라다보이는 칼케돈까지 이르러 무력시위를 한 뒤 돌아갔다. 여기에 테오도시오폴리스가 가짜 테오도시오스를 영접한 뒤 사산 왕조에 귀순하였고, 609년 에데사도 함락되었다.

포카스는 이렇듯 동방 속주가 사산 왕조군의 맹공으로 흔들리는 상황에서도 유대인들을 기독교로 강제 개종시키려 했다. 이에 유대인들은 608년 대대적으로 봉기해 안티오키아 총대주교를 살해하고 현지 기독교도들을 대량 학살했다. 여기에 티레와 아크레에서도 610년 유대인 반란이 일어났으나 곧 진압되었고, 티레의 유대인들은 기독교인들에 의해 집단 학살되었다. 이렇듯 제국의 동방 영토에서 기독교 신자들과 유대인들 간에 꼬리에 꼬리를 무는 유혈극이 벌어지면서, 유대인들은 동로마 제국에 대해 강한 반감을 품게 되었다. 이는 614년 사산 왕조군이 시리아에 이르렀을 때 유대인들이 동로마 제국을 상대로 대규모 반란을 일으키고 사산 왕조군의 편에 선 계기가 되었다.

2.2.3. 발칸 전선

동방 전선이 혼란스럽게 돌아간 반면, 발칸 전선은 그의 치세 내내 평온했다. 지난날 마우리키우스 황제의 대대적인 원정으로 인해 아바르와 슬라브인들이 막대한 피해를 입었기에 전쟁을 재개할 여력이 되지 않기도 했을 테지만, 포카스를 황제로 옹립한 발칸 방면군의 충성도가 강력했기 때문에 변고가 일어날 여지가 적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포카스는 아바르족에게 상당한 공물을 보내 평화 협약을 맺고 발칸 전선군을 동방으로 보내 사산 왕조의 공세를 최대한 막아보려 노력했다.

아바르족은 평화 협상을 맺어놓고 이를 거리낌없이 어기고 제국을 침략하기로 악명높았다. 그런 그들이 그의 치세에는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은 것을 볼 때, 포카스가 병력을 다른 곳에 보내고도 다뉴브 전선 방위를 여전히 굳건히 해뒀기 때문으로 보인다. 한편 몇몇 사료에서는 슬라브인들이 그의 치세에 테살로니카를 습격했다고 기술되었지만 다른 사료와 교차검증되지 않기에 신빙성은 의심된다.

발칸 전선이 본격적으로 무너지는 시기는 포카스가 이라클리오스에 의해 축출된 직후였다. 이는 포카스의 실각으로 그를 추종했던 발칸 방면 로마군의 조직력이 붕괴되었고, 아바르와 슬라브인들이 이를 기회로 삼아 대대적으로 침략했음을 암시한다. 다만 포카스가 다른 전선에 몰두하느라 다뉴브 전선에 신경을 잘 쓰지 못했기에 단기간에 전선이 붕괴되었을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 없다.

2.2.4. 이베리아 전선

603년 6/7월 리우바 2세를 축출하고 서고트 왕국의 국왕에 오른 위테리크 유스티니아누스 1세 때 동로마 제국의 영토가 된 베티카 남부 일대에 대한 공세를 감행했다. 그러나 위테리크의 공세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사군툼에서 일부 동로마군을 사로잡은 것 외에는 특별한 승전을 거뒀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세비야의 이시도르는 그가 로마 병사들과 자주 싸웠지만 적절한 영광을 거두지 못했다고 기술했다. 다만 610년 툴레도 공의회에 카르타헤나 인근의 비가스트룸 시 주교가 참석한 것을 볼 때, 비가스트룸 시가 그의 치세 때 서고트 왕국의 영토로 귀속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포카스가 이베리아 전선에 신경을 썼다는 기록은 전무하며, 아마도 이베리아 총독이 자체적으로 지방군을 이끌고 저지했을 것이다.

2.2.5. 이탈리아 전선

파일:Colonna_di_Foca_Forum_Romanum_Rome.jpg
포로 로마노 한가운데에 있는 포카스를 기리는 기둥[1]

전임 황제 마우리키우스는 교황청과 심각한 갈등을 벌였다. 588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요한네스가 '세계 교회'라는 용어를 채택해, 자신이 교황을 포함한 모든 고위 성직자보다 우위에 있다고 주장했다. 교황 펠라지오 2세는 이에 분노해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를 비판하는 설교를 했다. 뒤이어 교황에 오른 그레고리오 1세는 마우리키우스에게 제국의 평화를 위해 총대주교에게 주의를 주라고 권고하는 편지를 보냈다. 요한네스가 그런 용어를 쓴 것은 적그리스도의 시대가 왔음을 명백히 보여주는 증거라는 것이다. 그러나 마우리키우스는 자신은 총대주교를 전폭적으로 지지한다는 내용의 답신을 보냈고, 이로 인해 양자의 관계는 소원해졌다. 여기에 마우리키우스는 랑고바르드 왕국과 평화 협약을 맺어달라는 교황들의 간절한 호소를 무시하고 라벤나 총독부에 전쟁을 지속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교황들은 자연히 이런 마우리키우스에게 반감을 품었다.

반면에, 포카스는 교황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자 했다. 그는 그레고리오 1세로부터 즉위를 축하한다는 서신을 받고, 이에 대한 보답으로 로마 교황이 보편 또는 세계 교회의 수장임을 인정한다는 칙령을 반포했다. 또한 교황청의 호소를 받아들여 라벤나 총독을 교체하고 랑고바르드 왕국과 평화 협상을 추진해 605년 4월 평화 협정을 성사시켰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만투아와 크레모나를 포함한 여러 주요 도시를 랑고바르드 왕국에게 빼앗겼다. 로마 교황들은 전임 황제와는 달리 자신들의 호소를 귀담아 들어주는 그에게 깊은 호감을 품었고, 포로 로마노 한 가운데에 포카스를 기리는 기둥을 세우는 것을 받아들였다.

2.3. 이라클리오스의 난과 몰락

608년, 아프리카 총독 대 헤라클리우스가 반란을 일으켰다. 당시 동로마 제국의 다른 지역은 외세의 침략으로 고통받는데 비해 아프리카 속주만은 평온했다. 그런 곳의 총독이었던 대 헤라클리우스가 반란을 일으킨 동기는 불분명하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대 헤라클리우스는 자신을 총독으로 선임했던 마우리키우스 황제가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황제를 추도하는 의식을 거행했다고 한다. 하지만 마우리키우스의 복수를 위해 거병했다기에는 6년이 지나서야 반란을 일으킨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다. 황제의 사위였던 프리스쿠스가 그에게 반란을 부추기는 편지를 보냈다는 기록도 있으나 진위 여부는 불분명하다. 친 이라클리오스 성향의 사료들은 그가 포카스의 폭정으로부터 제국을 구하고자 떨쳐 일어났다고 주장했지만, 시카고 대학 역사 교수이자 동로마 역사 사학자인 월터 캐기(Walter Kaegi)는 황위를 장악할 적기를 노려 반란을 일으켰을 거라고 추정한다.

대 헤라클리우스는 먼저 이집트를 정복하기 위해 조카 니키타스를 이집트로 파견했다. 니키타스는 베르베르인으로 구성된 보조군으로 충원된 육군을 이끌고 키레나이카와 이집트로 쳐들어갔다. 키레나이카는 쉽게 공략되었지만, 이집트의 나일 강 삼각주의 요새인 세마누브와 아트리브는 포카스를 지지하는 보노수스 장군이 올 때까지 버텼다. 보노수스는 팔레스타인의 반란을 잔인하게 진압한 인물로 유명했다. 그는 이집트에 도착한 뒤 니키타스의 부관 보나키스를 격파하여 사로잡은 뒤 처형하였고, 니쿠를 공략하여 반란을 지지했던 주요 인물들을 처형했다.

그러나 이집트의 중심지인 알렉산드리아에서 포카스를 지지하는 청색파와 이라클리오스를 지지하는 녹색파간의 내전이 벌어졌고, 곧 청색파가 이라클리오스 지지로 선회하면서 알렉산드리아가 니키타스에게 넘어갔다. 보노수스는 알렉산드리아를 되찾으려 했지만 실패하자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갔고, 니키타스는 610년 여름에 이집트 전역을 공략했다. 이로 인해 이집트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공급되어야 하는 밀이 끊어지면서, 포카스의 입지는 매우 약해졌다.

한편, 포카스는 대 헤라클리우스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자 대 헤라클리우스의 아내 에피파니아와 그의 아들 이라클리오스의 약혼자인 파비아 에우도키아를 네아 메타토니아(Nea Metanoia, 새로운 회개) 수도원에 연금했다. 그러나 헤라클리우스는 이에 개의치 않고 이라클리오스를 발칸 반도로 파견했다. 이라클리오스는 테살로니카로 진군해 유럽의 모든 불만분자들을 병사로 받아들이고 610년 여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군했다. 이라클리오스는 수도로 진군하는 동안 여러 도시에 들러 지지자들을 확보했다. 이때 포카스에 의해 억류되었던 에피파니아와 파비아 에우도키아가 녹색당에 의해 풀려나 이라클리오스에게 보내졌다. 이라클리오스는 이에 마음을 놓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했다.

파일:phocas-is-delivered-to-heraclius-from-worldhistoryplus-com.jpg

610년 10월 3일, 이라클리오스는 마르마라 해를 거쳐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입성했다. 이틀 뒤, 포카스는 달아나려 했다가 원로원이 파견한 관원에게 체포된 뒤 이라클리오스 앞으로 끌려왔다. 파스칼레 연대기에 따르면, 이라클리오스는 자신 앞으로 끌려온 포카스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대가 바로 제국을 이 꼴로 만든 자인가?"

포카스가 답했다.
"그대가 다스린다면 나을 거라 생각하는가?"
이라클리오스는 그의 뻔뻔한 태도에 격노해 포카스를 참수하고 그의 몸을 여러 조각으로 잘라낸 뒤 사냥개들의 먹이로 던졌다고 한다. 또다른 기록에 따르면, 청색당과 녹색당의 공동 처분에 맡겨진 뒤 그들의 손에 처형당했다고 한다. 여기에 포카스의 동생이자 동방군 총사령관이었던 도멘치올루스와 핵심 지지자인 보노수스 역시 체포된 후 처형되었다. 또다른 동생 코멘티올로스는 두 형의 원수를 갚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지만 610년 말 또는 611년 초 부하 유스티누스에게 피살되었다.

3. 평가

포카스는 동시대와 후대 역사가들 모두에게 비판받았다. 이라클리오스는 그를 최악의 폭군이라고 단죄하고 기록말살형을 선포했으며, 이라클리오스를 섬기던 시인 피시다의 게오르기오스는 포카스를 " 고르고의 현신" 또는 "지상의 레비아탄"이라고 지칭했다. 시모카타의 테모필락투스는 그를 "야만인", "반 켄타우로스", "반 키클롭스"라고 불렀다. 그러면서 포카스가 붉은 곱슬머리에 툭 튀어나온 짙은 눈썹, 추한 얼굴에 화를 낼 때마다 붉은색으로 변하는 커다란 상처 자국까지 있는 끔찍한 인상이었다고 서술했다.

현대 학자들 역시 포카스에게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루이 브레이에(Louis Bréhier, 1868~1951)는 포카스를 "교양없는 군인, 독재자, 쉽게 분노하고 잔인하고 보복을 일삼는 기질을 가진 자"라고 평했다. 게오르크 오스트로고르스키(1902~1976)는 포카스의 치세는 "무제한적인 공포정치"였다고 밝혔다. 존 핼던(John Haldon, 1948~)은 포카스가 제국에 닥친 위기에 맞서 싸우는 기술이나 경험이 없었던 자라고 평가했으며, 미셸 카플란(Michel Kaplan, 1946~)은 심각한 내부 불안정의 시기에 통치를 시작한 한탄스러운 지도자라고 비평했다.

하지만 월터 캐기(Walter Kaegi, 1937~2022) 교수 등 일부 역사가들은 포카스의 통치가 대체적으로 부정적이었던 것은 동의하지만 지나치게 가혹한 비난을 받고 있다고 주장한다. 동로마 제국의 전선 붕괴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부터 쌓여온 내부의 모순과 갈등, 재정 압박, 갈수록 강력해지는 외세의 압력이 맞물린데서 비롯됐는데, 그것을 전적으로 포카스만의 책임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라클리오스 치세 초기에 사산 왕조의 시리아, 이집트, 소아시아 공략과 발칸 전선 붕괴에 포카스가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2년간 이어진 이라클리오스 부자의 반란 역시 이 사태를 촉발한 주요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1] 기록상 남아있는 로마 원로원의 마지막 활동이 바로 포카스에게 즉위를 축하하는 서신을 보낸 것이다. 이후 원로원은 점차 쇠퇴해 어느 순간 소리소문없이 사라졌고, 교황 그레고리오 1세는 이탈리아와 로마가 혼란한 와중에 원로원은 도대체 어디로 간 거냐고 한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