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2 15:15:48

디오 카시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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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ignotus: 불명
황제 겸 집정관 }}}
201년 202년 202년 보결 203년 204년
루키우스 안니우스 파비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루키우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페르티낙스 아우구스투스 티투스 무레니우스 세베루스 가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우티아누스 루키우스 파비우스 킬로 셉티미누스 카티니우스 아킬리아누스 레피두스 풀키니아누스
마르쿠스 노니우스 아리우스 무키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카시우스 레갈리아누스 푸블리우스 셉티미우스 게타 마르쿠스 안니우스 플라비우스 리보
204년 보결 205년 206년 206년 보결 207년
루키우스 폼포니우스 리베랄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마르쿠스 눔미우스 움브리우스 프리무스 세네키오 알비누스 푸블리우스 툴리우스 마르수스 루키우스 안니우스 막시무스
ignotus 푸블리우스 셉티미우스 게타 카이사르 루키우스 풀비우스 가비우스 누미시우스 페트로니우스 아이밀리아누스 마르쿠스 카일리우스 파우스티누스 가이우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아페르
208년 209년 210년 211년 212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폼페이아누스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파우스티누스 헤디우스 롤리아누스 테렌티우스 겐티아누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아스페르
푸블리우스 셉티미우스 게타 카이사르 퀸투스 헤디우스 롤리아누스 플라우티우스 아비투스 아울루스 트리아리우스 루피누스 폼포니우스 바수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밀리우스 아스페르
212년 보결 213년 214년 215년 216년
(그나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세베루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퀸투스 마이키우스 라이투스 푸블리우스 카티우스 사비누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 데키무스 카일리우스 칼비누스 발비누스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아피우스 수에트리우스 사비누스 마르쿠스 무나티우스 술라 케리알리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아눌리누스
217년 218년 218년 보결 219년 220년
가이우스 브루티우스 프라이센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오펠리우스 세베루스 마크리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티투스 메시우스 엑스트리카투스 마르쿠스 오클라티니우스 아드벤투스 퀸투스 티네이우스 사케르도스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코마존
221년 222년 223년 224년 225년
가이우스 베티우스 그라투스 사비니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마리우스 막시무스 페르페투우스 아우렐리아누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율리아누스 티베리우스 마닐리우스 푸스쿠스
마르쿠스 플라비우스 비텔리우스 셀레우쿠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알렉산데르 카이사르 루키우스 로스키우스 아일리아누스 파쿨루스 살비우스 율리아누스 가이우스 브루티우스 크리스피누스 세르비우스 칼푸르니우스 도미티우스 덱스테르
226년 227년 228년 229년 230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아우구스투스 마르쿠스 눔미우스 세네키오 알비누스 퀸투스 아이아키우스 모데스투스 크레스켄티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비리우스 아그리콜라
가이우스 아우피디우스 마르켈루스 마르쿠스 라일리우스 풀비우스 막시무스 아이밀리아누스 마르쿠스 폼포니우스 마이키우스 프로부스 카시우스 디오 섹스투스 카티우스 클레멘티누스 프리스킬리아누스
231년 232년 233년 234년 235년
루키우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 루키우스 비리우스 루푸스 율리아누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아킬리우스 프리스킬리아누스 마르쿠스 클로디우스 푸피에누스 막시무스 그나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
티투스 플라비우스 살루스티우스 파일리그니아누스 루키우스 마리우스 막시무스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파테르누스 마르쿠스 무나티우스 술라 우르바누스 루키우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퀸티아누스
236년 237년 238년 239년 240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율리우스 베루스 막시미누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마리우스 페르페투우스 [루키우스] 풀비우스 피우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고르디아누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아피우스 수에트리우스 사비누스
마르쿠스 푸피에누스 아프리카누스 막시무스 루키우스 뭄미우스 펠릭스 코르넬리아누스 폰티우스 프로쿨루스 폰티아누스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아비올라 루키우스 라고니우스 베누스투스
241년 242년 243년 244년 245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고르디아누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베티우스 그라투스 아티쿠스 사비니아누스 루키우스 안니우스 아리아누스 티베리우스 폴리에누스 아르메니우스 페레그리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율리우스 필리푸스 아우구스투스
클로디우스 폼페이아누스 가이우스 아시니우스 레피두스 프라이텍스타투스 가이우스 케르보니우스 파푸스 풀비우스 아이밀리아누스 가이우스 마이시우스 티티아누스
246년 247년 248년 249년 250년
가이우스 브루티우스 프라이센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율리우스 필리푸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율리우스 필리푸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풀비우스 가비우스 누미시우스 아이밀리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메시우스 퀸투스 트라야누스 데키우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알리우스 알비누스 마르쿠스 율리우스 세베루스 필리푸스 카이사르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율리우스 세베루스 필리푸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나이비우스 아퀼리누스 베티우스 그라투스
251년 252년 253년 254년 255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메시우스 퀸투스 트라야누스 데키우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비비우스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비비우스 볼루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발레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발레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퀸투스 헤렌니우스 에트루스쿠스 메시우스 데키우스 카이사르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비비우스 볼루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포플리콜라 발비누스 막시무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갈리에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갈리에누스 아우구스투스
256년 257년 258년 259년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 아킬리우스 프리스킬리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발레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마르쿠스 눔미우스 투스쿠스 (눔미우스) 아이밀리아누스 (덱스테르)
마르쿠스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갈리에누스 아우구스투스 뭄미우스 바수스 폼포니우스 바수스
260년 261년 262년 263년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사이쿨라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갈리에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갈리에누스 아우구스투스 마르쿠스 눔미우스 알비누스
가이우스 유니우스 도나투스 루키우스 페트로니우스 타우루스 볼루시아누스 눔미우스 파우스티아누스 덱스테르 (막시무스)
동방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풀비우스 마크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풀비우스 퀴에투스 아우구스투스
갈리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카시아니우스 라티니우스 포스투무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카시아니우스 라티니우스 포스투무스 아우구스투스
호노라티아누스
264년 265년 266년 267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갈리에누스 아우구스투스 리키니우스 발레리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갈리에누스 아우구스투스 오비니우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아퀼리우스 파테르누스
사투르니누스 루킬루스 사비닐루스 아르케실라우스
갈리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카시아니우스 라티니우스 포스투무스 아우구스투스
마르쿠스 피아보니우스 빅토리누스
268년 269년 270년 271년
아스파시우스 파테르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아우구스투스 플라비우스 안티오키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우렐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에그나티우스 마리니아누스 파테르누스 비리우스 오르피투스 폼포니우스 바수스
갈리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카시아니우스 라티니우스 포스투무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피아보니우스 빅토리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피아보니우스 빅토리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피우스 에수비우스 테트리쿠스 아우구스투스
산크투스
272년 273년 274년 275년
티투스 플라비우스 포스투미우스 퀴에투스 아울루스 카이키나 타키투스 또는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타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우렐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우렐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유니우스 벨둠니아누스 율리우스 플라키디아누스 카피톨리누스 (아우렐리우스) 마르켈리누스
갈리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피우스 에수비우스 테트리쿠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피우스 에수비우스 테트리쿠스 아우구스투스
노빌리시무스 카이사르 가이우스 피우스 에수비우스 테트리쿠스
276년 277년 278년 279년 280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타키투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프로부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프로부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프로부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풀비우스) 아이밀리아누스 (루키우스 율리우스) 비리우스 루푸스 노니우스 파테르누스 (베티우스) 그라투스
281년 282년 283년 284년 284년 보결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프로부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프로부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카루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카리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발레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유니우스 티베리아누스 빅토리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카리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누메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 루키우스 카이소니우스 오비니우스 루피누스 마닐리우스 바수스 Ⅱ)
285년 286년 287년 288년
티투스 클라우디우스 아우렐리우스 아리스토불루스 마르쿠스 유니우스 막시무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아우구스투스
베티우스 아퀼리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아우구스투스 폼포니우스 야누아리아누스
동방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발레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서방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카리누스 아우구스투스
288년 보결 289년 289년 보결 289년 보결
… a 마르쿠스 마그리우스 바수스 마르쿠스 움브리우스 프리무스 케이오니우스 프로쿨루스
… ivianus 루키우스 라고니우스 퀸티아누스 티투스 플라비우스 코엘리아누스 헬비우스 클레멘스
브리타니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마우사이우스 카라우시우스
289년 보결 290년 291년 292년
플라비우스 데키무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유니우스 티베리아누스 아프라니우스 한니발리아누스
… ninius 막시무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카시우스 디오 율리우스 아스클레피오도투스
브리타니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마우사이우스 카라우시우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마우사이우스 카라우시우스
293년 294년 295년 296년 297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콘스탄티우스 카이사르 눔미우스 투스쿠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갈레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카이사르 가이우스 안니우스 아눌리누스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콘스탄티우스 카이사르 가이우스 갈레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카이사르
298년 299년 3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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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로마사》4. 평가

1. 개요

콤모두스의 치세는 한마디로 로마 제국의 재앙이었다. 지금 우리의 역사는 황금의 왕국에서 철과 녹의 왕국으로 전락하고 있다.
Dio Cassius / Lucius Cassius Dio / Cassius Dio Cocceianus
(AD 155 ~ AD 235)

일반적으로 디오 카시우스(Dio Cassius)라고 부르는 루키우스 카시우스 디오(Lucius Cassius Dio) 또는 카시우스 디오 코케이아누스(Cassius Dio Cocceianus)는 로마 제국의 정치가, 장군, 행정가이자 역사가이다.

최전성기인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부터 내전을 지나 세베루스 왕조 시대까지 살았던 디오 카시우스는 니카이아( 니케아) 출신의 그리스계 원로원 귀족이었다. 그는 두 차례에 걸쳐 집정관을 역임했고, 2번의 속주 총독 경험과 로마군 야전 사령관으로서의 10년 이상의 경력을 가진 원로원의 중진이자 숙련된 군인이었다. 여동생 카시아 마르키아나의 남편은 세베루스 왕조 시대를 대표하는 권세가였던 마리우스 막시무스였으며, 조카는 세베루스 왕조의 멸망 이후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시대에 원로원과 군인 출신 황제 사이를 중재한 마리우스 페르페투우스였다.

하지만 디오 카시우스가 오늘날까지 유명한 이유는 22년 동안 손수 기록하고 조사를 통해 꼼꼼히 작성한 80권 분량의 로마사를 쓴 저자이기 때문이다. 그가 저술한 《로마사》는 공화정 후기와 제정 초기, 제정 중기를 연구하는 현대 역사가들에게 훌륭한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2. 생애

디오 카시우스는 서기 155년 소아시아의 비티니아 지방 니카이아[1]에서 카시우스 일족 출신인 로마 제국의 원로원 의원 카시우스 아프로니우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여동생으로는 카시아 마르키아나가 있었는데, 그녀는 푸닉(북아프리카) 태생의 이탈리아계 '신참자'(노부스 호모) 귀족으로 갈리아에서 성장한 마리우스 막시무스와 결혼해, 그와의 사이에서 두 아들을 낳았고, 남편이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시절 두번째 집정관을 지낸 뒤엔 시아버지의 고향인 포에니쿠스(푸닉) 지방으로 낙향해 살다가 죽었다. 디오의 여자 형제 카시아 마르키아나는 소 루키우스 마리우스 막시무스와 루키우스 마리우스 페르페투우스를 뒀는데, 디오 카시우스의 조카들인 이들은 모두 정규 집정관을 지냈다.

디오 카시우스의 집안은 소아시아에 터를 잡고 살았던 그리스 혈통의 귀족 가문이었으며, 대대로 로마 원로원 의석을 가진 명문가였다. 전승에 따르면 그의 할아버지 또는 외할아버지가 그리스의 철학자인 디온 크리소스토모스라고 전해지고 있으나, 이 부분은 오늘날까지 확실하지 않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디오 카시우스의 아버지인 카시우스 아프로니우스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밑에서 로마군 야전 사령관과 달마티아 및 킬리키아 총독을 지낸 사람이었다. 일찍이 고향인 니케아를 떠나 이탈리아로 건너간 디오 카시우스는 아버지가 사망한 180년에 원로원 의원이 되었고, 일생의 대부분을 로마 원로원 의원으로 지냈다. 하지만 그는 이탈리아에서 오랫동안 살았음에도 자신의 고향인 소아시아 일대와 고향인 니카이아를 “나의 집”이라고 부르며 항상 그리워했다.

디오 카시우스는 오랫동안 원로원 의원을 지내면서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콤모두스, 콤모두스 암살 이후 벌어진 혼란기인 다섯 황제의 해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카라칼라 게타, 마크리누스, 엘라가발루스,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등의 세베루스 왕조 시대를 직접 경험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세베루스 왕조의 통치하에서 두 번의 집정관을 지냈으며, 콤모두스 시대부터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시대까지 여러 황제들의 곁에서 활동했다.

디오 카시우스는 카라칼라가 암살된 뒤 황제가 된 마크리누스의 명령에 따라 페르가몬과 스미르나의 행정관이 되어 파견되었고, 이 공직을 마친 이후 로마로 귀환해 생애 첫 번째 집정관이 되었다. 디오 카시우스는 전직 집정관 자격으로 아프리카 속주 총독과 달마티아 및 판노니아 속주 총독을 연이어 지냈으며, 속주 총독을 역임했다. 그는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황제가 등극한 222년 당시에는 황제 자문회의(콘실리움)에 속한 16인 위원이 아니었다. 하지만 매제 마리우스 막시무스가 은퇴하고, 율리아 마이사가 사망한 뒤인 대략 225년부터는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정부 안에서 상당한 역할을 맡았다. 그러다가 그는 울피아누스가 암살된 228년경 군율 질서 유지 실패 이후, 229년을 앞두고 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황제와 실질적인 여제로 군림 중인 황제의 어머니 율리아 마마이아의 추천으로 생애 두 번째 집정관을 지냈다.

울피아누스가 암살되기 전부터 프라이토리아니(근위대)는 본래부터 디오 카시우스를 냉소적이고 비열한 귀족으로 여겼다. 이들이 디오를 좋게 여기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디오가 다른 또래 원로원 중진들 이상으로 프라이토리아니 병사들이 그리스어 실력이 형편없다며 무시한 것 등이 있었다. 따라서 디오가 228년 늦여름 무렵부터 황제 주변에서 집정관으로 고려된다는 소식에 격렬하게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병영 근처에서는 공공연하게 "저 비열하고 냉소적인 디오를 가만 두지 않겠다."는 이야기가 돌았고, "최악의 경우에는 디오를 죽이겠다."는 경고성 이야기가 심상치 않게 터져 나왔다.

그러나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황제와 율리아 마마이아는 이런 분위기에도 울피아누스를 공개적으로 죽이고, 집단 항명으로 암살가담자들이 처벌받지 않은 상황을 해결하고자, 디오를 황제와 함께 취임할 동료 집정관으로 밀어 붙였다. 따라서 디오 카시우스는 몸이 건강함에도 본인이 포도주를 즐긴 까닭에 통풍 치료를 받아야 된다는 이유로 네아폴리스(나폴리) 근교의 개인 호화 별장으로 몸을 피했다. 하지만 황제는 디오의 생각이 분명함에도 이를 강행했고, 결국 로마로 강제 귀환한 디오는 1월 1일 두번째 집정관에 올랐다. 그러자 프라이토리아니는 디오가 자신들을 조롱하면서 연기를 했다며 진짜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이에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황제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직접 나서서 자신의 스승이며 조력자였던 디오 카시우스를 불러, 마치 황제의 명으로 디오가 문제를 일으키는 것처럼 행동했다. 이때 디오가 황제에게 크게 실망한 것은 이 말을 들었을 때였다.
"안전을 보장해줄 수 없으니, 이만 로마를 떠나 집정관직을 수행하라"[2]

이 말을 들은 뒤, 디오는 수치심을 느낀 나머지 아내와 함께 캄파니아로 갔다가 황제와 아예 인연을 끊고자, 자녀들은 이탈리아에 남겨 놓고, 아내와 함께 고향 니카이아로 돌아간 뒤 거의 모든 사람과 인연을 끊고 은둔해버린다. 디오 카시우스는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황제가 페르시아와 전투를 벌이기 위해 니카이아 근처를 방문할 때에도 거론되지 않을 정도로 황제에게 실망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디오 카시우스가 로마를 떠나지 않았다면 직속 상관인 근위대장 울피아누스도 죽여버릴 정도로 군벌화가 촉진된 근위대에 의해 해를 입었을 것이 분명하다.

서기 235년 대략 80세의 나이에 니카이아의 고향집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와 동명이인인 증손자 카시우스 디오 역시 원로원 의원을 지내는 동안 서기 291년도 집정관을 역임했다.

3. 《로마사》

원로원의 실세 의원이었던 디오 카시우스가 오늘날까지 로마 역사가들과 대중들에게 잘 알려진 이유는 22년 동안 손수 기록하고 조사해 완성한 80권짜리 역사책 《로마사》 때문이다. 이 책은 트로이의 유민인 아이네이아스의 이탈리아 상륙부터 시작되는데, 왕정 시대와 기원전 1세기 공화정의 역사에 대해서는 중요한 이야기만을 적었다, 하지만 제정이 시작되는 부분부터는 자신의 오랜 군인, 행정가, 정치가로서의 경험을 살려 정확하고 솔직한 문체를 활용해 서술했다.

세베루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시대까지 그리스어로 서술한 《로마사》는 이전에 살았던 수에토니우스와 마찬가지로 로마의 풍속 등도 기록했다. 하지만 수에토니우스와 달리 디오 카시우스는 제정 시대의 황제들을 서술할 때 온갖 풍문을 마구잡이로 적어 놓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역시 수에토니우스나 타키투스와 마찬가지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3] 도미티아누스[4]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서술했다. 다만,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역대 황제들 중 가루가 될 때까지 비난한 것은 네로였으며, 아우구스투스와 클라우디우스 1세에 대해선 상당히 긍정적으로 서술했다. 또한 티베리우스와 칼리굴라에 관해서는 전대 사람들의 기록을 통해 기록하면서도 그들이 도미티아누스, 네로, 콤모두스, 엘라가발루스와는 비슷하지 않았다는 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특히, 디오 카시우스는 클라우디우스 1세를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못지 않게 호평했고,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비교해도 현군 이상이라며 극찬을 했다. 그 이유는 디오 카시우스 자신이 살았던 시대까지의 역대 황제들 중 클라우디우스 1세는 진심으로 원로원을 나름 배려한 황제는 거의 없었고, 그만큼 문학과 지혜를 사랑한 모습을 보이고, 모든 결정이 선의에 비롯된 황제는 극히 드물어, 현군의 모범으로 추앙받기 충분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디오 카시우스는 원로원의 중진 의원 출신으로 여러 황제들을 직접 체험했고, 특히 콤모두스를 비롯해 세베루스 왕조의 황제들과 개별 면담도 한 상당한 거물급 의원이었다. 따라서 그가 직접 황제들을 만나 경험하고 난 뒤 이를 기술한 내용의 퀄리티는 상당하다. 그래서 디오 카시우스가 직접 경험한 황제들이 그 결정을 왜 내렸는지, 이들이 원로원을 어떻게 대했는지에 관해 원로원 의원이자 원로원 중심론자의 입장에서 세세히 적고 있다. 이런 이유로 디오 카시우스가 로마 원로원 의원으로 생활하는 동안 경험한 콤모두스 시대나 세베루스 왕조 시대의 서술들은 그 시대를 이해하기 위한 제1급 사료로 상당히 높게 평가받고 있다.[5]

디오 카시우스의 저서에서 나타나는 또 다른 특징은 그가 무작정 특정 황제나 특정 인물을 선과 악으로 묘사하지 않은 것을 들 수 있다. 그는 상술했듯이 선대 황제들 중 아우구스투스와 클라우디우스 1세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는데, 이 와중에도 그들을 마냥 절대 선과 같은 명군이라고 찬사를 늘어 놓지는 않았다. 이는 디오 카시우스와 개인적인 친분이 깊고, 사적인 교류도 많았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에 대해서도 비슷했고, 젊을 적 직접 보고 면담도 해본 콤모두스에 대해서도 같았다. 디오 카시우스는 콤모두스가 본래부터 네로 같은 악인도, 함량 미달인 엘라가발루스 같은 자도 아니었다며 나름 감싸면서 주변 인물들, 특히 누나인 루킬라의 질투와 야망으로 인해 참담한 비극이 시작되었음을 분명히 짚고 넘어갔다.

사적으로는 친구였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에 대해서도, 그가 가진 엄격하고 절제적인 사생활과 결단력 및 책임감을 매우 높게 평가했다. 또 그가 페르티낙스 황제가 저지른 실책을 만회해 이를 긍정적으로 바꿨다고도 호평하면서, 세베루스가 이룬 업적이 대단했음을 짚고 넘어갔다. 그렇지만 디오 카시우스는 원로원 중심주의자답게 세베루스를 거칠게 비판했고, 콤모두스가 망가진 뒤 얼마나 무책임했는지를 정확히 정리해 이들을 비난했다. 그래서 디오 카시우스의 기록을 보면 세베루스가 어떻게 원로원의 권위와 의무를 압살하고, 정적이나 타인들을 탄압했는지, 세베루스와 그의 아들인 카라칼라가 얼마나 비열하고 잔혹했는지 등을 거론하고 있다. 이는 디오 카시우스를 스승처럼 따른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정치적인 조언자로 디오 카시우스를 대우한 율리아 마마이아에 대해서도 비슷한데 그는 반강제로 은퇴한 뒤 느낀 감정 때문인지 이들을 경험한 일을 무미건조하게 묘사했다.

디오 카시우스는 역대 황제들 중 네로, 카라칼라, 엘라가발루스에 대해서는 매우 부정적으로 기록해놓았다. 어쩌면 이들에 대한 혹평은 과거의 타키투스가 티베리우스를 증오하면서 까고, 수에토니우스가 거리의 뜬소문까지 집어 넣어 칼리굴라와 도미티아누스를 묘사했듯이 혐오했던 감정까지 느껴지는데, 이중 네로는 그가 유일하게 겪어 보지 않은 황제였다.

디오 카시우스가 이들 세 명의 황제들을 평가한 것을 보면 타키투스와 비슷한 특징이 있다. 그는 카라칼라를 잔혹하며 비열했다고 지적했고, 통치술에서는 정치적으로 티베리우스, 칼리굴라[6]와 같이 냉혹하고 필요 이상으로 혹독했고 비정했다고 했다. 또 카라칼라가 불규칙하고 예측불가능한 황제였다며 재위 중 큰 영향을 행사한 모후 율리아 돔나의 밀실정치가 정상으로 보였음을 간접적으로 지적해 평했다. 반면 네로와 엘라가발루스에 대해서는, 두 인물이 공통적으로 무책임과 함량 미달을 넘어 인간적인 측면에서도 최악 그 자체라고 혹평했다. 특히, 엘라가발루스에 대한 평가를 보면 그가 이 황제를 직접 경험하고, 여러 정보망을 통해 귀로 듣고 교차검증하면서 느낀 바가 고스란히 드러날 정도이다. 네로의 경우에는 콤모두스보다 추악하고 비겁한데다가 악인이었다고 비난했다. 그러면서 디오 카시우스는 네로가 스승으로 모신 세네카와 나눈 편지들에서 악행을 모의했다고 비난하면서, 젊은 네로가 일평생동안 가증스러운 말을 잘 늘어놓고, 양심이 없었다는 것을 서술하고 있다. 그러면서 네로가 어머니 소 아그리피나와 대립하면서 세네카, 부루스, 티겔리누스 같은 인사들에게 둘러 쌓여 망가졌다고 평가했다. 또 네로의 어머니 소 아그리피나가 아들을 제위에 올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목숨을 죽였는지를 언급하면서, 그녀의 이런 선택이 종국적으로는 네로에게 비극이 되었다고 적었다.

디오 카시우스의 기록이 제정 시대의 사료들 중 높게 평가받는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적은 예리한 분석 때문이다. 먼저 그는 현대인들의 관점이 아닌 로마인의 관점, 특히 원로원의 입장에서 볼 때 어떤 황제가 현군인지를 적어 흥미를 끌고 있다. 이에 관해, 디오 카시우스는 좋은 황제의 기준을 이렇게 적었다.
"타인을 과장되게 행동하게 하거나, 타인을 비하해서는 안 된다. 그(황제)는 다른 사람들을 자신과 동등하게 대해야 한다. 유덕하고 평화로우면서도 여전히 전쟁을 잘 수행하는 것으로 보여야 된다."
''훌륭하고 존경받는 황제란 원로원에게 아버지와 같은 좋은 황제를 뜻한다.'

디오 카시우스는 자신의 저서를 통해, 그가 살던 동시대의 로마인 및 지식인들과 달리 로마 제정의 시작 년도를 기원전 31년이라고 적어 이 부분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는 수에토니우스로 대표되는 제정 시대의 로마인들이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종신 독재관에 오른 해를 기준으로 제정이 시작되고 '황제'라는 자리가 생겼음을 인식한 태도와는 다른 모습이다. 이에 대해 디오 카시우스는 이렇게 지적했다.
"이런 식으로 시민과 원로원의 권력은 모두 아우구스투스의 손에 넘어갔고, 그의 시대부터 엄밀히 말하면 두 세 사람이 나중에 집권하게 되더라도 '군주'라는 가장 정확한 이름이 되도록 했다."

"로마인들이 군주제라는 이름을 너무 싫어해 황제를 독재자나 왕이라고는 부르지 않았다."

또한 그는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넘어간 아우구스투스의 시대가 독재가 맞다고 서술했다. 그러면서도 디오 카시우스는 제정 시대의 사람들처럼 아우구스투스를 높게 평가하면서, 그의 독재가 내전이 없는 평화속에서 높이 평가받았다고 밝혔다. 따라서 이런 디오 카시우스의 기록은 오늘날까지 아우구스투스 시대, 티베리우스 시대, 칼리굴라 시대에 이르는 율리우스 황실의 시대 내지 초기 원수정의 수립과 확립 기간을, 원로원 의원들이 어떻게 평화의 시대에서 변덕스러움과 냉혹함의 시대로 묘사했는지에 대해 확실히 알게 해줬다는 평가를 듣는다.

다만, 디오는 그 기술이 특유의 날카로움 아래 번뜩이고, 제정의 본질을 꿰뚫어 평한 재주가 뛰어남에도 몇가지 항목에서는 비난을 듣고 있다. 그는 로마 건국 ~ 선대 황제를 평한 부분에서 지나치게 냉소적이면서도 이중잣대로 인물이나 사건을 평했다. 또 원로원 중심으로 황제, 사건을 기술할 때, 어느 때는 항상 대충 짚고 넘어가면서 본인의 주장이나 생각이 맞다는 생각을 교묘하게 밝히고 오류가 없다는 투의 기술이 많다고 평가받는다. 또 당대 인물이나 사건 중 본인이 직접 관련되었고 이득을 본 때의 일은 모두 제3자처럼 기록하면서도 통째로 적지 않거나 적어도 마치 사실인양 적었다고 비난받는다.

하지만 디오 카시우스의 《로마사》 80권 중 플라비우스 왕조부터 세베루스 왕조까지를 기술한 부분은 사료적 가치가 높다고 평가받는다. 디오 정도의 권세가가 그래도 나름 숨기지 않고 비평하면서 성실히 적었고, 대차대조하더라도 모두 숨기지 않아, 사료적 가치가 훌륭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80권은 오늘날 전체가 남아 있지 않고, 분실되거나 단편적으로 남아있는 경우가 많다. 1권부터 21권까지는 현전하지 않으나 디오의 《로마사》를 참고하고 많이 인용한 요안니스 조나라스의 《역사 초록》을 통해 어떤 내용이었는지 추측할 수 있으며, 22권부터 35권은 단편들만 남아 있다.

이후 공화정 말기인 폼페이우스 시대부터 클라우디우스 1세의 붕어(서기 54년)까지를 다룬 36~60권은 거의 온전하게 현전하고 있다.[7]

디오 카시우스가 직접 체험한 동시대의 기록인 61권부터 80권은 현전하지 않으나 다행인 점은 서기 11세기에 살았던 요안니스 크시필리누스(Joannes Xiphilinus)[8]의 요약 기록을 통해 남아있다는 것이다. 상단의 콤모두스에 대한 평가도 크시필리누스의 기록을 통해 남아있다.

4. 평가

디오는 라틴어보다 항상 그리스어를 썼고,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집권 후 프라이토리아니, 원로원 내에서 라틴어 사용 빈도가 높아지는 것을 노골적으로 비판하는 서술을 남겼다. 이런 서술처럼 그는 동시대 로마인에게 훌륭한 군인, 행정가라고 평가받았지만, 동시에 매우 귀족적이며, 노골적으로 냉소적이며, 상대를 출신과 혈통으로 평가하는 것이 노골적이었다고 평가받았다. 또 저서에서 언급했듯이 이탈리아 카푸아에 있는 자신의 고급 별장을 "내가 이탈리아에 있을 때마다 시간을 보내는 곳"으로 평하면서, 아주 어릴 때 살았고 말년에 반강제 은퇴 후 살게 된 고향 니카이아를 "나의 집"이라고 불렀다. 그는 저서 곳곳에 자신이 그리스인이자 그리스 귀족임을 인지함에도 자신이 로마 시민이기 앞서 로마 귀족임을 우선하는 모습을 내보였다. 따라서 개인적으로는 로마 귀족, 로마 시민이라는 이중적 지위 중 로마 귀족을 강조했고, 그리스 귀족, 그리스인이라는 자부심을 강조했다고 평가받는다. 그리고 이런 디오의 언행은 그가 프라이토리아니 장교와 병사들에게 암살될 뻔 했고, 강제 은퇴로 정치 수명이 끊긴 이유가 됐다고 평가받는다.

하지만 디오는 원로원 의원으로서 원로원이 갖는 존엄과 그 상징성, 그리고 귀족 중심 과두정 체제의 완벽성을 중요시 여긴 인물로, 날카로운 비평가로 훌륭한 권세가였다는 평을 듣는다. 동시에 앞세대의 타키투스와 똑같이, 황제의 원로원 권리 침해와 황제 중심의 관료제 체제에 대해 비판적으로 기술해, 본인의 가치관이 뚜렷하다고 평가받는다. 이는 동시대의 역사가였던 헤로디아누스와 비슷하면서도, 비교되는 부분이다. 왜냐하면 헤로디아누스는 로마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디오 카시우스처럼 생동감있게 전달했음에도 불구하고, 엘라가발루스 황제에 대한 평가에서 드러나듯이 자신의 출신지인 동방 속주의 입장에서 일정 부분 편파적으로 서술했다는 비난을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헤로디아누스는 원로원 의원이 아니었기에 타키투스나 디오 카시우스처럼 친 원로원적인 성향에 따라 황제를 비판하지는 않았으며, 당시 속주 총독들과 관료의 입장에서 황제와 원로원 모두를 관찰자로서 기록했다. 따라서 수사학자와 공무원로 있었기에 디오 카시우스처럼 원로원만 편들지 않고 서술한 부분 등을 높게 평가받는다.

저술 방법을 볼 때, 그는 매부 마리우스 막시무스가 많이 참고해 활용한 수에토니우스가 사용한 방법을 지양하고 좋게 여기지 않았다. 따라서 수에토니우스, 마리우스 막시무스처럼 소문과 풍자시 등에 의존해 공문서상의 기록과 자신이 조사한 길거리 소문을 짜맞추기식으로 편집해 이야기를 지어내지는 않았다고 평가받는다. 또한 디오 카시우스는 서기 4세기 말의 저작인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로마 황제 열전》)처럼 자신의 정치 성향에 따라 의도적으로 편집하거나, 자신이 싫어한 황제들에 관해 대놓고 왜곡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이런 측면에서 디오 카시우스의 기록은 제1차 사료로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리고 디오 카시우스의 기록은 타키투스의 사라진 역사책인《연대기》속 기록들을 추론하는 것과 고대 로마의 정치체제 및 원로원과 황제 사이의 관계에 대해 연구하는데 있어서 유용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동시대 헤로디아누스처럼 상당히 현장감 있게 이야기를 표현했더라도, 그는 자신과 연관된 일을 어물쩍 넘기거나 아예 넘어가는 서술로 무언가를 숨기는 방법을 많이 썼다. 따라서 타키투스, 헤로디아누스와 달리 이런 부분에서는 평가가 좋지 못하다. 또 그는 타키투스와 달리 앞세대 인물들의 기록에 의거해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플라비우스 왕조의 역대 황제들을 서술하는 점 등에서 아쉬움이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1] 니케아 [2] "로마에서 그 누구도 지금 당신에게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라는 말도 있다. [3]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는 원로원 중심의 공화정을 없애고 세습왕조를 구축한 까닭에 원로원과 이 시대를 살지 않았던 타키투스 등의 공화정 회귀주의자들, 세습 원로원 의원들에게는 평가가 공통적으로 상당히 나빴다. 따라서 원로원 의원이었던 카시우스 디오 역시 이들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았으며, 200여 년 가까이 지난 시대에 활동한 까닭에 이들에 대한 부정적인 서술이 많았던 타키투스 등 바로 앞 세대의 역사서들을 많이 참조했으므로 이 왕조에 대해 긍정적으로 기술하지 않았다. [4] 도미티아누스는 오늘날 재평가되면서 폭군으로 단죄될 인물로 평가받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생전부터 사후까지 로마 세계에서의 평가는 원로원과 로마 상류층에 의해 최악이었다. 모든 평가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다섯 황제 중 가장 평가가 나빴던 네로보다도 안 좋았고, 로마 최악의 폭군이라고 공인된 콤모두스와 동급 수준으로 악평을 받았다. 실제로 콤모두스 암살 당시 디오 카시우스가 속한 원로원에서 대놓고 도미티아누스를 악랄하며 잔인하다고 평가했다. 또 디오 카시우스가 참고한 타키투스 등 당대의 저서에서도 공과 사 모두 대차게 까였던 사람이 도미티아누스인 탓에 좋게 서술할 가능성은 애초부터 높을 리 없었다. [5] 디오 카시우스가 체험한 황제들과 당시 원로원의 분위기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그가 지방관, 총독, 군사령관을 지내면서 당시 황제들이 내린 결정 등이 실제로는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6] 고대 로마 기록 그대로 디오는 칼리굴라를 가이우스로 적고 있다. [7] 단 이중 55권은 분실된 내용이 좀 있다. [8] 11세기 경에 살았던 동로마 제국의 수도승으로, 동로마 제국의 황제 미카일 7세 두카스의 명령에 따라 디오 카시우스의 《로마사》 35~80권의 내용을 요약해 서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