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 황제 참칭자
요안네스 IOHANN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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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
요안네스 Johannes |
출생 | 미상 |
로마 제국 | |
사망 | 425년 6월 또는 7월 |
로마 제국 아퀼레이아 | |
재위 기간 | 로마 황제 |
423년 11월 20일 ~ 425년 5월 (2년) | |
전임자 | 호노리우스 |
후임자 | 발렌티니아누스 3세 |
종교 | 기독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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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로마 제국의 비정통 황제. 서기 423년 호노리우스 황제가 사망한 뒤 귀족들의 추대를 받고 황위에 올랐으나, 425년 5월 발렌티니아누스 3세를 앞세운 동로마군에게 패배하여 생포된 뒤 공개 처형되었다.2. 생애
요안네스의 정확한 이름은 알려진 바 없으며,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도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단지 프리미케리우스 노타리오룸(primicerius notariorum), 즉 문서 담당관을 맡았다는 것만 알려져 있다. 그는 명망높은 귀족도 아니었고, 뛰어난 장군도 아닌, 그저 문서를 정리하는 일을 수행하는 일개 관료에 불과했다. 그런 그가 황위에 오를 수 있었던 건 당시 로마의 정계가 매우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당초 호노리우스 황제는 제국의 통치가 갈수록 힘겨워지자 자문관이었던 콘스탄티우스 3세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그는 417년 콘스탄티우스 3세를 누이 갈라 플라키디아와 혼인시키고, 421년 1월 8일 공동 황제로 선임했다. 콘스탄티우스 3세는 제위 참칭자 콘스탄티누스 3세를 제압하는 등 제국의 국정을 나름 잘 이끌었고, 갈라 플라키디아와의 사이에서 아들 발렌티니아누스 3세와 딸 유스타 그라타 호노리아를 낳았다.
그러나 421년 9월 2일 콘스탄티우스 3세가 돌연 병사하면서 상황이 심각해졌다. 호노리우스는 늘 심리가 불안정했는데, 특히 콘스탄티우스 3세의 사망 후 그 정도가 심해졌다. 그는 갈라 플라키디아에게 사랑을 느끼고 공개 석상에서 그녀에게 키스 세례를 퍼부었다. 그러나 플라키디아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깨닫자, 공공연히 적대감을 표출했고, 황제의 측근들과 근위병들까지 황제에게 동조하였다. 급기야 근위병들이 라벤나의 거리에서 플라키디아의 시종들을 공격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에 플라키디아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다고 여기고 423년 초 아이들을 데리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피신했다. 그 후 호노리우스는 서기 423년 8월 26일 수종에 걸려 4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리하여 황제는 죽었고, 뒤를 이어야 할 발렌티니아누스는 어머니를 따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피신했기에, 당장 제위를 이을 이가 없었다. 그러자 궁정에서 파트리키우스를 맡고 있던 플라비우스 카스티누스는 평범한 문서 관리인이었던 요안네스를 황위에 옹립하여 꼭두각시로 삼았다.
동로마 제국의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는 서방 황제의 지위가 하급 관리의 손아귀에 들어간 걸 두고 보지 않았다. 그는 갈라 플라키디아를 아우구스타로 추인하고, 발렌티니아누스를 부제로 임명하는 한편, 군대에게 그들을 이탈리아로 호위하여 적법한 제위에 앉히라고 명령했다. 한편, 요안네스는 로마에서 즉위식을 거행한 뒤 동로마군이 공격해 올 걸 예상하고 라벤나로 이동하여 방비를 강화했다.
서기 424년 말, 요안네스는 자신의 추종자 중 한 사람인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에게 훈족에게 가서 지원병을 받아내라고 부탁했다. 아에티우스가 떠난 후, 동로마군은 테살로니카를 떠나 이탈리아로 향했고, 곧 아퀼레이아에 진을 쳤다. 동로마군은 라벤나를 신속하게 포위한 뒤, 석호의 얕은 부분을 건너가 방어군을 기습하여 425년 초에 라벤나를 점거하는 데 성공했다.[1]
18개월간 황위에 있던 요안네스는 미처 피하지 못하고 체포된 뒤, 아퀼레이아로 호송되었다. 이후 오른손이 잘린 채 원형 경기장으로 끌려가 당나귀를 타고 시내를 한 바퀴 돌면서 시민들의 조롱과 모욕을 실컷 받았다. 이후 425년 6월 또는 7월에 처형되었다. 또한 동로마군은 반역자를 지지한 라벤나 시민을 응징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사흘간 라벤나를 약탈했다.
그 후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6살의 나이로 로마로 가서 새 황제로 즉위했다. 하지만 요안네스의 지시로 훈족에게 병력을 구하러 갔던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가 휘하 병력과 훈족 용병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돌아와서 무력 시위를 했다. 이에 갈라 플라키디아는 그를 마기스테르 밀리툼(군사령관)으로 임명하여 불만을 달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