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12 23:10:20

카라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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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리아 왕조 미하일 2세 | 테오필로스 | 미하일 3세
마케도니아 왕조 바실리오스 1세 · 콘스탄티노스 | 레온 6세 | 알렉산드로스 2세 | 콘스탄티노스 7세 | 로마노스 1세 · 흐리스토포로스 레카피노스 · 스테파노스 레카피노스 · 콘스탄티노스 레카피노스 | 로마노스 2세 | 니키포로스 2세 | 요안니스 1세 | 바실리오스 2세 | 콘스탄티노스 8세 | 로마노스 3세 | 미하일 4세 | 미하일 5세 | 공동 즉위 조이 · 테오도라 | 콘스탄티노스 9세 | 2차 재위 테오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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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올로고스 왕조 미하일 8세 | 안드로니코스 2세 | 미하일 9세 | 안드로니코스 3세 | 요안니스 5세 | 공동 즉위 요안니스 6세 | 2차 재위 요안니스 5세 | 공동 즉위 안드로니코스 4세 · 요안니스 7세 | 3차 재위 요안니스 5세 | 2차 재위 요안니스 7세 · 안드로니코스 5세 | 4차 재위 요안니스 5세 | 마누일 2세 | 요안니스 8세 | 콘스탄티노스 11세
아우구스투스 · 카이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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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ignotus: 불명
황제 겸 집정관 }}}
201년 202년 202년 보결 203년 204년
루키우스 안니우스 파비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루키우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페르티낙스 아우구스투스 티투스 무레니우스 세베루스 가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우티아누스 루키우스 파비우스 킬로 셉티미누스 카티니우스 아킬리아누스 레피두스 풀키니아누스
마르쿠스 노니우스 아리우스 무키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카시우스 레갈리아누스 푸블리우스 셉티미우스 게타 마르쿠스 안니우스 플라비우스 리보
204년 보결 205년 206년 206년 보결 207년
루키우스 폼포니우스 리베랄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마르쿠스 눔미우스 움브리우스 프리무스 세네키오 알비누스 푸블리우스 툴리우스 마르수스 루키우스 안니우스 막시무스
ignotus 푸블리우스 셉티미우스 게타 카이사르 루키우스 풀비우스 가비우스 누미시우스 페트로니우스 아이밀리아누스 마르쿠스 카일리우스 파우스티누스 가이우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아페르
208년 209년 210년 211년 212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폼페이아누스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파우스티누스 헤디우스 롤리아누스 테렌티우스 겐티아누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아스페르
푸블리우스 셉티미우스 게타 카이사르 퀸투스 헤디우스 롤리아누스 플라우티우스 아비투스 아울루스 트리아리우스 루피누스 폼포니우스 바수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밀리우스 아스페르
212년 보결 213년 214년 215년 216년
(그나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세베루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퀸투스 마이키우스 라이투스 푸블리우스 카티우스 사비누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 데키무스 카일리우스 칼비누스 발비누스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아피우스 수에트리우스 사비누스 마르쿠스 무나티우스 술라 케리알리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아눌리누스
217년 218년 218년 보결 219년 220년
가이우스 브루티우스 프라이센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오펠리우스 세베루스 마크리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티투스 메시우스 엑스트리카투스 마르쿠스 오클라티니우스 아드벤투스 퀸투스 티네이우스 사케르도스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코마존
221년 222년 223년 224년 225년
가이우스 베티우스 그라투스 사비니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마리우스 막시무스 페르페투우스 아우렐리아누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율리아누스 티베리우스 마닐리우스 푸스쿠스
마르쿠스 플라비우스 비텔리우스 셀레우쿠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알렉산데르 카이사르 루키우스 로스키우스 아일리아누스 파쿨루스 살비우스 율리아누스 가이우스 브루티우스 크리스피누스 세르비우스 칼푸르니우스 도미티우스 덱스테르
226년 227년 228년 229년 230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아우구스투스 마르쿠스 눔미우스 세네키오 알비누스 퀸투스 아이아키우스 모데스투스 크레스켄티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비리우스 아그리콜라
가이우스 아우피디우스 마르켈루스 마르쿠스 라일리우스 풀비우스 막시무스 아이밀리아누스 마르쿠스 폼포니우스 마이키우스 프로부스 카시우스 디오 섹스투스 카티우스 클레멘티누스 프리스킬리아누스
231년 232년 233년 234년 235년
루키우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 루키우스 비리우스 루푸스 율리아누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아킬리우스 프리스킬리아누스 마르쿠스 클로디우스 푸피에누스 막시무스 그나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
티투스 플라비우스 살루스티우스 파일리그니아누스 루키우스 마리우스 막시무스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파테르누스 마르쿠스 무나티우스 술라 우르바누스 루키우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퀸티아누스
236년 237년 238년 239년 240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율리우스 베루스 막시미누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마리우스 페르페투우스 [루키우스] 풀비우스 피우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고르디아누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아피우스 수에트리우스 사비누스
마르쿠스 푸피에누스 아프리카누스 막시무스 루키우스 뭄미우스 펠릭스 코르넬리아누스 폰티우스 프로쿨루스 폰티아누스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아비올라 루키우스 라고니우스 베누스투스
241년 242년 243년 244년 245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고르디아누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베티우스 그라투스 아티쿠스 사비니아누스 루키우스 안니우스 아리아누스 티베리우스 폴리에누스 아르메니우스 페레그리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율리우스 필리푸스 아우구스투스
클로디우스 폼페이아누스 가이우스 아시니우스 레피두스 프라이텍스타투스 가이우스 케르보니우스 파푸스 풀비우스 아이밀리아누스 가이우스 마이시우스 티티아누스
246년 247년 248년 249년 250년
가이우스 브루티우스 프라이센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율리우스 필리푸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율리우스 필리푸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풀비우스 가비우스 누미시우스 아이밀리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메시우스 퀸투스 트라야누스 데키우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알리우스 알비누스 마르쿠스 율리우스 세베루스 필리푸스 카이사르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율리우스 세베루스 필리푸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나이비우스 아퀼리누스 베티우스 그라투스
251년 252년 253년 254년 255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메시우스 퀸투스 트라야누스 데키우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비비우스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비비우스 볼루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발레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발레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퀸투스 헤렌니우스 에트루스쿠스 메시우스 데키우스 카이사르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비비우스 볼루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포플리콜라 발비누스 막시무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갈리에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갈리에누스 아우구스투스
256년 257년 258년 259년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 아킬리우스 프리스킬리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발레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마르쿠스 눔미우스 투스쿠스 (눔미우스) 아이밀리아누스 (덱스테르)
마르쿠스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갈리에누스 아우구스투스 뭄미우스 바수스 폼포니우스 바수스
260년 261년 262년 263년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사이쿨라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갈리에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갈리에누스 아우구스투스 마르쿠스 눔미우스 알비누스
가이우스 유니우스 도나투스 루키우스 페트로니우스 타우루스 볼루시아누스 눔미우스 파우스티아누스 덱스테르 (막시무스)
동방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풀비우스 마크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풀비우스 퀴에투스 아우구스투스
갈리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카시아니우스 라티니우스 포스투무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카시아니우스 라티니우스 포스투무스 아우구스투스
호노라티아누스
264년 265년 266년 267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갈리에누스 아우구스투스 리키니우스 발레리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갈리에누스 아우구스투스 오비니우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아퀼리우스 파테르누스
사투르니누스 루킬루스 사비닐루스 아르케실라우스
갈리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카시아니우스 라티니우스 포스투무스 아우구스투스
마르쿠스 피아보니우스 빅토리누스
268년 269년 270년 271년
아스파시우스 파테르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아우구스투스 플라비우스 안티오키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우렐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에그나티우스 마리니아누스 파테르누스 비리우스 오르피투스 폼포니우스 바수스
갈리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카시아니우스 라티니우스 포스투무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피아보니우스 빅토리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피아보니우스 빅토리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피우스 에수비우스 테트리쿠스 아우구스투스
산크투스
272년 273년 274년 275년
티투스 플라비우스 포스투미우스 퀴에투스 아울루스 카이키나 타키투스 또는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타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우렐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우렐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유니우스 벨둠니아누스 율리우스 플라키디아누스 카피톨리누스 (아우렐리우스) 마르켈리누스
갈리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피우스 에수비우스 테트리쿠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피우스 에수비우스 테트리쿠스 아우구스투스
노빌리시무스 카이사르 가이우스 피우스 에수비우스 테트리쿠스
276년 277년 278년 279년 280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타키투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프로부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프로부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프로부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풀비우스) 아이밀리아누스 (루키우스 율리우스) 비리우스 루푸스 노니우스 파테르누스 (베티우스) 그라투스
281년 282년 283년 284년 284년 보결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프로부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프로부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카루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카리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발레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유니우스 티베리아누스 빅토리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카리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누메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 루키우스 카이소니우스 오비니우스 루피누스 마닐리우스 바수스 Ⅱ)
285년 286년 287년 288년
티투스 클라우디우스 아우렐리우스 아리스토불루스 마르쿠스 유니우스 막시무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아우구스투스
베티우스 아퀼리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아우구스투스 폼포니우스 야누아리아누스
동방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발레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서방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카리누스 아우구스투스
288년 보결 289년 289년 보결 289년 보결
… a 마르쿠스 마그리우스 바수스 마르쿠스 움브리우스 프리무스 케이오니우스 프로쿨루스
… ivianus 루키우스 라고니우스 퀸티아누스 티투스 플라비우스 코엘리아누스 헬비우스 클레멘스
브리타니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마우사이우스 카라우시우스
289년 보결 290년 291년 292년
플라비우스 데키무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유니우스 티베리아누스 아프라니우스 한니발리아누스
… ninius 막시무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카시우스 디오 율리우스 아스클레피오도투스
브리타니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마우사이우스 카라우시우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마우사이우스 카라우시우스
293년 294년 295년 296년 2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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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8년 299년 300년
아니키우스 파우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콘스탄티우스 카이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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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드 압 그리퍼드 마독 압 허웰린 오와인 글린두르 웨일스 공으로 계승
밑줄: 브리타니아 열왕사에 등장하는 전설 속의 왕이나 왕으로 서술된 실존인물
귀네드 국왕·웨일스인 웨일스 공 · 영국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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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 브리튼 제84대 브리튼인의 왕[1]
로마 제국 제21대 황제
카라칼라[2]
CARACALLA
파일:카라칼라고화질.jpg
[3]
<colbgcolor=#9F0807> 이름 루키우스 셉티미우스 바시아누스
(Lucius Septimius Bassianus)
출생 188년 4월 4일
로마 제국 루그두눔[4]
사망 217년 4월 8일 (향년 29세)
로마 제국 에데사와 카르헤 중간지
재위 기간 211년 2월 4일 ~ 217년 4월 8일 (6년 65일)
전임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후임자 마크리누스
부모 아버지 :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어머니 : 율리아 돔나
배우자 풀비아 플라우틸라
형제 게타
자녀 딸(이름 미상)[5]
종교 로마 다신교
제호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Imperator Caesar Marcus Aurelius Antoninus Augustus)
추가 제호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세베루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아우구스투스
(Imperator Caesar Marcus Aurelius Severus Antoninus Pius Augustus)[6]
별칭 카라칼라(Caracalla)
카라칼루스(Caracallus)[7]
타라우타스(Tarautas)[8]
1. 개요2. 생애
2.1. 즉위 전부터 카이사르, 공동황제 시절2.2. 후계자 쟁탈전2.3. 장인과 아내 살해2.4. 동생 살해2.5. 로마 대학살2.6. 화폐개혁과 안토니누스 칙령(212)2.7. 기행과 황제의 전쟁2.8. 동부 순행과 알렉산드리아 학살2.9. 니시비스 전투2.10. 암살
3. 평가
3.1. 부정적 평가3.2. 재평가
4. 성격, 외모5. 여담

[clearfix]

1. 개요

로마 제국 세베루스 왕조의 두 번째 황제이자 로마 제국의 제21대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큰 아들로 아버지와 공동황제를 지내다가 연년생 동복동생인 게타와 공동 황제로 제위에 오른 인물이다. 오늘날까지 콤모두스와 함께 폭군으로 공인돼, 당대 로마인들과 후세 사람들에게 부자세습의 안 좋은 사례의 대명사로 통하는 사람으로, 로마 역사상 가장 잔인한 폭군으로도 잘 알려져 있고 실제로도 그 행실과 악행 모두 막장인 황제로 평가받고 있다. 다만 폭군이기는 한데, 콤모두스처럼 암군으로는 묶일 황제는 아니고, 군사적 역량과 군공 등은 상당히 유능한 축에 속하고, 내치에서도 업적도 적지 않은 사람이라서, 폭군임에도 평가가 좀 복잡한 편이다.

본명은 루키우스 셉티미우스 바시아누스. 아버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함께 안토니누스 가문에 셀프 입적하면서 바꾼 이름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이다. 그리고 황제 즉위 후의 이름은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세베루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아우구스투스였다. 그러므로 황제로서 공적인 통칭은 세베루스 안토니누스이고, 살아생전 공식적으로 안토니누스, 로마 시민 대부분에게는 본명 바시아누스로 불렸다. 이런 이유로 당대 고대 기록을 보면, 본명인 바시아누스, 제호로 취한 세베루스 안토니누스나 안토니누스가 별칭 카라칼라와 함께 표기되어 있다.

살아생전 안토니누스로 불리긴 했지만, 상술했듯이 로마인들에게는 본명인 바시아누스로 많이 불렸고, 못생기고 키 작은 잔혹한 검투사 스타인 타라우타스의 이름에서 따온 타라우타스로 많이 불렸다. 재위 후기부터는 갈리아 망토를 짧게 만들어 입고 다녀 카라칼라로 불리거나, 아예 그 망토 자체 이름인 카라칼루스로 불렸다고 디오의 기록에는 적혀 있다. 이중 별명인 카라칼라가 가장 유명하며, 실제 통칭 역시 카라칼라로 불린다.

카라칼라는 카라칼루스라고 불린, 당시의 갈리아 식 의복에서 따온 말이다. 카라칼루스는 본래 갈리아인과 게르만족들이 입던 모자가 달린 몸에 꼭 맞는 짧은 망토였다. 그런데 세베루스 안토니누스(=카라칼라)는 이를 발까지 내려오도록 옷의 길이를 늘려 입었다. 이는 중세 시대 배경의 판타지류 게임이나 대중매체물에서 나오는 두건 달린 여행용 망토와 비슷했는데, 로마인들에게 상당히 이국적인 망토로 인식됐다. 그런데 카라칼라는 새로운 스타일의 이 망토를 좋아했다. 또 다른 일설에는 그가 직접 카라칼라를 디자인한 일이 있어서 그랬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래서 세베루스 안토니누스는 그가 창안한 디자인으로 된 망토가 인명화된 별명 카라칼라로 불렸고, 생전부터 아예 통칭이 됐다. 뭐 2세기 전에 가이우스 황제가 아기용 군화에서 딴 어린 시절 애칭 칼리굴라으로 불렸고, 오늘날 통칭이 되기도 했으니 놀라운 일은 아니다.[9]

카라칼라는 어릴 때부터 원수지간일 정도로 사이가 험악했던 친동생 게타를 재위 1여 년도 안 돼서 어머니 앞에서 칼로 찔러 죽이고 단독 황제에 올랐다. 내치에 있어서는 상당히 평이 엇갈리는 황제인데, 로마 시민권을 모든 속주민들에게 나눠준다는《안토니누스 칙령》을 발표했고, 카라칼라 목욕탕[10]이라는 공공 목욕탕 시설을 건설했으며 새로운 화폐개혁을 단행하기도 했다. 재위 기간의 대부분을 전쟁으로 보냈고 병사들과 함께 하면서 본인 스스로 군인 황제임을 과시해 군대에게 인기가 많았다.

그러나 친동생, 아내, 장인 등을 살해한 행동과 알렉산드리아에서 보여준 잔인하고 무자비한 진압 방식 등에서 나오듯 개인적인 성품은 잔인하고 포악했다. 견원지간인 친동생을 제 손으로 직접 죽인 이후, 동생의 친구들과 지지자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했으며, 군대의 환심을 사기 위해 군의 연봉을 인상시키고 죄없는 부자, 원로원 의원, 유명인, 일반 서민들을 학살하고 그 재산을 강탈했다. 내치에서도 원로원을 계속 무시하고, 협박해 귀족들과 원로원까지 적으로 만들었고 단독 통치기 이후부터 온갖 기행을 벌여 끊임없이 암살 위협에 시달렸다. 그러다가 파르티아 전쟁 원정 중 근위대장 마크리누스의 사주에 의해 칼에 찔려 암살됐다.

암살되기 전부터 일반 사병들을 제외하곤 모두에게 증오의 대상이었던 까닭에, 적절한 추모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이런 배경으로 암살된 뒤, 국가 휴일로 지정됐던 생일이 무효화됐고, 엘라가발루스가 즉위한 뒤에도 원로원 회의가 열린 장소와 많은 공공 장소에 전시된 초상과 동상이 모조리 철거됐다.

2. 생애

2.1. 즉위 전부터 카이사르, 공동황제 시절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율리아 돔나의 두 아들 중 첫 번째 아들로 188년 4월 4일 갈리아 루그두넨시스 속주의 주도 루그두눔[11]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루키우스 셉티미우스 바시아누스(Lucius Septimius Bassianus)로, 바시아누스라는 코그노멘은 외할아버지 율리우스 바시아누스에서 따왔다.

카라칼라는 아버지가 판노니아에서 총독으로 있다가 황제를 참칭하고 로마로 진군해 원로원에게 정식 황제로 인정받았다. 이후 아버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자신의 약한 정통성을 강화시키기 위해 콤모두스 암살 후 대가 끊긴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디부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2]의 양자로 셀프 입적하면서, 카라칼라는 동생과 함께 새로운 성씨로 안토니누스를 받았다.

이때 바시아누스는 195년 이름을 거창하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Marcus Aurelius Antoninus)로 바꿨다. 노멘 젠틸리키움으로 아버지와 본인, 동생이 이름을 개명하면서 스스로 끊긴 안토니누스 가문에 들어간 것이다. 허나 로마인들은 그들을 안토니누스 가문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카라칼라를 여전히 바시아누스로 불렀다고 한다. 왜냐하면 바시아누스의 개명과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안토니누스 가문 참칭은 문자 그대로 자신들의 약한 정통성을 보완하기 위한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설령 바시아누스가 위대한 두 황제의 이름들을 따서 개명했어도 진짜 안토니누스 가문을 잇는 것은 아니었던데다, 어떤 혈연도 없고 친인척 관계도 아닌 후임황제와 두 아들의 선언은 누가 보더라도 정치적 선언에 불과했다. 당장 사후 입양을 통해 노멘 젠틸리키움을 하겠다고 선언한다는 것 자체도 콤모두스 복권 선언으로 우스운 일이 됐으니, 이런 분위기는 당연했다. 그러나 바시아누스의 개명과 카이사르 임명 조치는 카라칼라의 지위를 확실히 해줬다.

카라칼라가 10살도 안 된 나이 때부터 후계자 지위가 공인된 이후, 세베루스는 장남 카라칼라에게 계속 지위, 명예, 훈장을 부여한다.

1년 뒤인 196년 카라칼라는 정식으로 카이사르 칭호를 받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카이사르로 추가 개명했다. 그 해 생일에는 임페라토르 칭호를 부여받았고, 다시 한번 안토니누스 가문 남성에 배속됐다. 이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어거지로 장남 카라칼라를 셉티미우스 (혹은 세베루스) 가문에서 안토니누스 가문으로 공식 편입한 조치였는데, 정치적 정당성을 얻고자 하는 목적이 커서, 세베루스 부자의 사후 입양 추가 조치는 여론이 반반인 제국 내 내전 상황과 수습 속에서 세베루스 진영 결집 선언과 똑같았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198년, 카라칼라에게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수여하고, 1월 28일부터 공동 황제(Co-augustus)이자 정식 황제로 지명했다. 이날은 공교롭게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197년 10월에 있었던 크테시폰 전투에서 승리한 후 파르티아의 수도 크테시폰을 성공적으로 약탈하고 파괴한 것을 축하하는 자리였는데, 아버지 세베루스는 카라칼라에게 호민관 특권까지 내렸다. 이로써 카라칼라는 일찌감치 공동 황제가 됐다.

198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자신의 공동 황제 카라칼라에게 폰티펙스 막시무스 자리를 내렸다. 그리고 이날 세베루스는 원로원에게서 파르티쿠스 막시무스 칭호를 선사받았는데, 세베루스는 차남 게타에게 카이사르 칭호를 주면서 노빌리시무스 카이사르라는 아주 거창한 칭호를 수여했다. 이어 199년 카라칼라는 프라트레스 아르발레스[13] 12인 중 한 명으로 지명됐다. 이는 카라칼라가 암살되거나, 망명하더라도 그 칭호를 받는 이상, 기록말살형의 불명예는 피할 수 있다는 조치였다. 더욱이 이 직책을 통해 카라칼라는 제국의 모든 영예를 손아귀에 넣게 됐다. 한편 이 해 말, 카라칼라는 불과 11살의 나이에 국가의 아버지 칭호를 부여받았다. 하지만 이것들은 로마 제국 역사상 빠르고 노골적인 세습 모양새였다. 더욱이 세베루스가 정적들을 박살내고 원로원이 겁에 질려 거수기로 승인만 해준 인상이 강했다. 공화정을 표방한 로마 제정에서 세베루스와 두 아들의 연이은 지위 강화는 관습과 법 준수를 가장한 편법도 많아, 이는 후일 카라칼라가 온전히 지지받지 못 한 이유 중 하나가 됐다.

동시대 사람 혹은 동시대 카라칼라를 경험한 아버지를 둔 마리우스 막시무스[14]의 저서이자 일기, 회고록인 《카이사리에스》와, 이 책을 1차 사료로 하여 인용해 적은 4세기《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따르면, 카라칼라는 확실히 총명하고 유순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중 마리우스 막시무스의 저서를 인용해 적은 <카라칼라의 생애>에 따르면, "어린 시절 바시아누스는 (성인 때와 달리) 친구들에게 사랑받았고, 원로원에게 인기가 많았으며 애정을 얻기 위해 자신의 이익을 베풀 줄 알았다."고 한다. 성인 시절과 달리 그는 지나치게 인색하지도 않고, 타인을 이해하고 용서해주는 것도 곧바로 받아들일 줄 알았다고 한다. 이 결과, 소년 바시아누스는 냉혹하고 교활한 아버지와 달리 친절하고 사랑스러운 소년으로 평가받았다고 한다.

바시아누스는 콜로세움에서 살인자, 강간범, 반역자 등 사형수들이 들짐승과 혈투를 벌이는 것을 보고, 아연실색해 고개를 돌리고 펑펑 울었을 정도로 유순했다. 마리우스 막시무스의 회고를 인용한 것에 따르면, "바시아누스는 아버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안티오키아, 비잔티움 주민들에게 니게르 편을 들었다는 이유로 가혹하게 보복하자, 무릎을 꿇고 싹싹 빌면서 관용을 베풀어 달라고 호소할 정도로 성품 역시 따뜻했다."고 한다. 이 외에도 카라칼라는 본인과 함께 어울려 놀던 친구가 유대인이 만든 종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끌려가, 채찍질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자 아버지의 잔혹함을 경멸하면서 오랜 시간 동안 아버지를 만나주지 않았다고 마리우스 막시무스는 증언한다.

이런 이유로 카라칼라는 어린 시절, 상당히 명민하고 사랑스러웠으며 부모님에게 공손한 아이로 큰 사랑을 받았고, 냉혹하기로 이름난 세베루스 황제 역시 이런 장남을 무척 귀여워했다고 한다. 이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친구이며 세베루스 왕조 개국공신으로, 카라칼라가 아버지라고 부르며 진심으로 따른 마리우스 막시무스가 직접 밝힌 것으로, 의도적 조작이 많은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작가들도 다른 경로로 확인한 내용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런 따뜻한 일화는 모두 성년식 직전까지의 바시아누스 모습이었고, 이후부터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 세베루스 왕조의 모든 남녀황족과 그 친분이 대단했던 마리우스 막시무스에 따르면, 바시아누스는 아버지 이상으로 교활했고, 냉혹했으며 무례하고 한번 화를 내면 종잡을 수 없는 성격으로 문제를 일으켰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성격 변화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은 교활함과 냉혹함으로 국가를 통치할 줄 알아야 한다고 조언한 아버지와 가정교사들이었다고 한다. 물론, 호사가로 수에토니우스를 존경해, 의도적으로 온갖 이야기를 적었던 마리우스 막시무스의 저서는 당대 출판 때부터 황색 언론이라고 평가받고, 저급하고 뜬소문까지 사실처럼 적은 서술 방식은 저서로 읽어본 로마인들에게 대차게 까일 정도로 평가가 나쁘다. 오죽했으면 위서, 황색 언론의 대표 저서로 불리며 "어디까지 진실인지 파해쳐 보자."고 조롱받는 《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조차도 26번 인용을 하는 동안 "너무 저급하고 쓰레기 같다."고 평할 정도다.

하지만 이런 악평에도 마리우스 막시무스는 세베루스 왕조 4대 전체를 관통한 당대 최고 거물 정치가라서 그 저서가 현재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쉽다고 평가받는다. 그래서 이 책 전체 내용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어, 그의 시각과 호사가 기질 특유의 성미로 그가 카라칼라의 일거수일투족을 어떻게 묘사했는지는 모른다. 즉, 카라칼라 특유의 그 천성을 부정적으로 서술한 고대 기록들처럼 싹수부터 잔혹했는지, 혹은 오늘날 평가처럼 커가면서 그렇게 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렇지만 적어도 이 책을 읽었던 로마인들의 공통된 기록에 따르면, 또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가 인용해 적은 기록에 의하면, 카라칼라는 우리 나이로 중학생에 해당될 10대 중반부터 아버지 이상으로 냉혹하고 잔혹한 언행으로 인해 사람들한테 미움을 받게 됐다고 한다.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의 마리우스 막시무스 저서 인용과 출처를 통해, 또 황실 비서관들의 기록에 의하면 카라칼라는 사춘기에 접어든 이후 완전 악인으로 변했다고 한다. 카라칼라는 그 성격이 충동적이고 잔혹하게 변해 통제불능이 됐다. 본인을 제외한 사람들을 아랫 것으로 보면서, 약간의 실수도 제 기분에 따라 극단적으로 반응했다. 이런 카라칼라의 변화는 세베루스 황제와 율리아 돔나가 크게 당황해 어쩔 줄 모르는 분위기로 자연스레 연결됐다고 한다. 더 큰 문제는 카라칼라의 부모가 갈수록 고집 쎄고 자기 중심적으로 일관하는 아들을 온전히 제어하지 못 해, 이를 연년생 동생 안토니누스 게타가 나서야만 가까스로 정리됐다는 점이었다고 한다.

이는 비극으로 연결됐다. 왜냐하면 카라칼라는 동생 게타가 명령불복종으로 여겨 이를 갈고, 더 강하게 행동했기 때문이다. 물론 아버지 세베루스는 애당초 아들에게 잡아먹힐 성격도 아니고, 본래부터 한 성격하는 사람인지라, 형제끼리 으르렁 거릴 때 카라칼라를 제어할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반면 어머니 돔나는 커갈수록 자신에게 반항하고 무례한 행동을 서슴지 않는 장남과, 이런 형의 태도에 격렬히 반발하며 형과 크게 싸운 게타 틈바구니에서 마음 고생을 크게 했다고 한다.

2.2. 후계자 쟁탈전

카라칼라는 커갈수록 아버지, 어머니에게 순종적이지 않고, 무례한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이런 행동은 세베루스 황제와 율리아 돔나 황후의 걱정거리가 됐다. 이 내용은 악명 높은 위서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만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서 사실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이런 상황에서 벌어진 묘한 분위기는 후계자 구도를 요동치게 만들었다.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와 마리우스 막시무스의 일기 등에 따르면, 카라칼라의 동생인 안토니누스 게타는 형 카라칼라의 명령으로 폄하되고, 기록말살형에 처해지는 수모를 겪었음에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부부와 황제 측근들[15]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고대 기록에 따르면, 게타는 로마 혹은 밀라노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태몽부터 부모에게 큰 기대를 갖게 한 효자였다고 한다.

게타는 어릴 적부터 부모에게 순종적이고, 효심이 대단했다. 이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율리아 돔나는 점성술에서 좋은 별자리와 운수를 가졌다고 확인받은 안토니누스 게타가 정해진 운명처럼 성장하자 무척 흐뭇해 했다고 한다. 여기에서 말한 정해진 운명이란, 안토니누스 게타가 사후 신격화된 황제가 되고 평가가 좋을 거라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사후 형 카라칼라의 지시로 "여자를 밝힌다.", "무척 사치스럽다.", "남한테 선물을 받기만 하고 베풀진 않는다."고 폄하된 것과 달리, 남동생 게타는 포도주를 섞은 물에 향신료를 넣어 먹을 정도로 사치스럽고, 평소 말투와 표정이 무뚝뚝한 부분 그리고 여타 로마인들과 달리 아주 매운 음식을 좋아해 남들보다 맵게 음식을 조리해 줄 것을 선호하는 취향 문제 정도만 단점으로 평가받을 정도로 결점도 적었다. 즉, 개인적 취향 문제로 매운 음식을 좋아하고 여느 귀족들처럼 향신료를 섞어 물을 마시는 고급진 취미 정도를 빼면, 모든 로마인들 기준에선 형과 달리 무척 좋은 후계자였던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여러 고대 기록들은 그가 형과 달리 천성적으로 부모에 대한 효심이 깊고, 남에게 받은 만큼 베풀 줄 아는 태도로, 아버지와 어머니, 원로원, 일반 병사들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말한다. 이는《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도 언급된다. 저자들은《안토니누스 게타의 생애》편에서, 당시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손수 자신들을 불러모아 "내가 어릴 적부터 여러 경로로 안토니누스 게타가 인격적으로 형 카라칼라보다 훌륭했다는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다. 헌데 왜 기록말살형을 받았는지 궁금하니 조사해봐라."고 명령하고, 이후에도 여러 번에 걸쳐 게타와 카라칼라를 비교하는 질문을 던졌다면서, "콘스탄티누스 아우구스투스 당신께서는 참으로 올바른 판단을 보여주시고 계십니다."고 찬사한 것이 게타 편 서두부터 나오고 있다. 그러면서 저자들은 "(억울하게 죽은 게타에게) 콘스탄티누스 아우구스투스께서 관대함을 베푸셨다."며, 대제가 게타의 기록말살형을 여러 차례 논의 후 사실상 철회시킬 것을 여러 번 명령했고, 그렇게 조치가 취해져 망자의 불명예가 씻긴 것은 합당한 조치라고 찬사까지 보냈다.

아버지 세베루스는 두 아들 중 카라칼라의 연년생 동생인 게타를 더 예뻐했다. 이는 어머니 돔나 역시 비슷했는데, 그녀는 남편과 마찬가지로 재주와 재치 모두 형보다 뛰어나고, 효심이 대단한 게타를 아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세베루스 황제 부부는 게타가 태어날 때부터, 점괘에 나온 부분 중 "게타가 사후 신격화된 황제가 되고 평가가 좋을 테지만, 가족 중 살인마에게 당해 더 찬사를 받을 것"이라는 것에 신경을 썼다고 전해진다. 이는 사후 살을 붙이고 붙여 나온 특유의 도시괴담일 확률이 높다. 다만, 세베루스 황제 부부가 평소 점성술을 중요시 여겼고, 게타의 점괘 중 그가 사후 평가가 형과 달리 무척 좋을 것이라는 내용은 사실이라고 한다. 어쨌든, 형제의 대립 이유, 카라칼라의 큰 결점, 게타가 자연스레 쌓게 된 인망, 게타의 효심과 주변의 평판 등은 세베루스 황제 부부에게 큰 인상을 줬다. 그래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게타에게 209년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하사한다. 즉, 게타에게 후계자의 기회들을 단순히 주지 않고, 아예 또 다른 공동황제로 삼아 차기 황제로 선언해버린 것이다.

문제는 여기에서 시작되는데, 세베루스의 이런 결정은 본래부터 원수지간에 가까울 정도로 사이가 나쁜 동복형제를 서로 정적으로 만들고 만다. 본래부터 게타는 형 카라칼라과 달리 잘생긴 외모를 가졌고 보통 정도의 키를 가지고 있었다.[16] 연설할 때 간혹 말을 더듬거리는 흠이 있었지만, 목소리는 훌륭했고, 잘 웃지 않고 무뚝뚝해도 예의가 있어 그 평이 좋았다.

더군다나 그는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대단했다. 그래서 저절로 인망이 쌓이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카라칼라는 자신보다 모든 것이 훌륭하다고 평가받는 게타를 경계 중이었다. 더욱이 게타는 어릴적부터, 해가 지날수록 난폭해지고 반항적인 형의 태도를 형에게 자주 지적해, 이 부분에서도 세베루스 황제 부부에게 차기황제 후보감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래서 카라칼라는 형인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되려 자신을 가르치려고 드는 연년생 동복 친동생 게타를 미워했다. 그리하여 형제는 같은 부모를 뒀음에도 일찍부터 서로 사이가 무척 나빴다.

따라서 자신이 누린 모든 지위가 게타에게 공식적으로 결정됐을 때, 이 소식을 알게 된 카라칼라는 격렬히 반발했다. 하지만 세베루스와 율리아 돔나 부부는 자신의 앞에서 펄쩍 뛰며 이 조치에 반발한 카라칼라의 생각을 들어주기만 할 뿐 흔들림이 없었다. 되려 두 사람은 난폭하고 거칠게 화를 내는 장남을 본 뒤 게타에게 카라칼라가 누린 모든 지위, 영예를 더 빠르고 확실하게 주기로 한다. 더욱이 이를 결단에 옮긴 이는 조언한 돔나보다는, 어쨌든 아버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였다.

이에 비추어 보면 세베루스가 죽은 뒤 카라칼라가 먼저 단독 황제가 되려는 시도를 했다는 사실이 그렇게 놀라운 일은 아니다는 것은 충분히 예상 가능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세베루스는 일찍이 198년에 장남 카라칼라에게 '임페라토르 테스티나투스'와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주었다. 그러나 두 형제의 나이 차이가 1년밖에 안 되는데도 게타가 아우구스투스 서열에 오른 것은 209년이 되어서였다. 이때 게타의 재위 계승 요구는 강력한 권한을 가진 친어머니 율리아 돔나 황후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가능했고, 결국 단독 황제가 되려는 카라칼라의 시도는 실패했다.

결국 이런 결정은 그렇지 않아도 반항적인 카라칼라를 끝내 분노조절 장애를 겪는 결점을 갖게 하고, 그 사태를 악화시키는 것으로 확대된다. 카라칼라는 일찍부터 알렉산드로스 대왕, 티베리우스, 가이우스(=칼리굴라), 술라 같은 인물들을 존경했는데, 이 결정 이후부터는 그들의 행동에 매혹적으로 빠진 나머지 측근들에게도 이들의 냉혹함과 무자비함을 노골적으로 찬양했다. 물론 카라칼라가 냉혹하고 결단력이 있는 이들을 좋아하게 된 것에 8할 이상 영향을 끼친 사람은 늘 이런 방식의 일처리를 몸소 보여주고 조언한 아버지, 그리고 후계자 시절부터 이런 방법을 교육한 가정교사들의 영향이 컸다고 하지만, 이 사건은 그가 아버지까지 정적으로 여긴 원인이 됐다. 그래서 그가 후일 게타를 제 손으로 죽였을 때부터, 카라칼라는 죽은 아버지와 동생이 계속 떠올라 무척 괴로워 했다.

여러 고대 기록들에 따르면, 게타는 형보다 온화하고 성숙한 모습을 보여줬으며 형과의 경쟁에서 확실히 인망을 얻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이런 긍정적인 모습에도 과격하고 무뚝뚝한 모습을 보인 형과 여러 번 부딪쳤다고 한다. 갈등의 원인은 카라칼라가 아랫사람들과 어머니 돔나에게 반항하고 거칠게 대한 것이 주된 이유였다. 하여 게타는 과격하게 행동하는 형에게 무례할 정도로 대들었고, 때론 형을 제지하기 위해 카라칼라에게는 "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똑같이 대응했다. 게타가 이렇게 대응한 것은 동시대, 후대 로마인들의 생각과 현대 학자들의 주장처럼 형제 간에 말싸움을 하다가, 욕설을 퍼붓고 물리력까지 행사하려는 형에게 동생이 맞대응을 하는 과정에서 생긴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되니, 게타의 맞대응[17]은 부모와 손윗 원로원 귀족들에게 보인 경건하고 효심 깊은 모습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연출시켰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인격적으로 훨씬 뛰어난 게타 역시 형과 별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이는 카라칼라와 그 측근 귀족들도 비슷했다. 동생에게 무시받고, 아랫 것들에게 체면을 구긴 카라칼라는 당연히 게타를 증오해 더 강하고 거칠게 행동했다. 또 그는 측근, 친구들과 함께 게타가 이중적이라고 생각해 게타와 그 지지자들을 내전에서 맞붙는 숙적 수준으로 증오했다.

이렇게 형제는 대립하고, 갈등의 골은 심화됐다. 그렇지만 이 당시 황실 내부에선 그 누구도 형제의 갈등을 막지 못했다. 황족 중 카라칼라의 거친 행동을 제지한 이가 연년생 동생 게타 뿐이었다는 점은 세베루스 왕조에겐 더 비극이 됐다.

그 결과, 세베루스 재위 후반부터 카라칼라와 게타가 세베루스와 율리아 돔나조차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견원지간이 되게 된다. 카라칼라와 게타는 늘 부딪쳤고, 형제는 서로를 원수로 여겨 같이 말을 섞는 것조차 싫어했다. 아버지와 사촌 형제들이 자리를 마련해도 둘은 이를 피했다. 설상가상 그들 주변에는 각자의 이익에 따라 붙은 원로원 의원, 유명 인사들이 서로 갈등하고, 양 세력의 갈등 속에는 중상모략이 가득해 사태를 악화시켰다. 그래서 두 사람이 처음 공동 집정관으로 오른 205년 1월 1일, 누구도 숨길 수 없을 정도로 갈등이 심해지게 된다. 냉혹한 황제조차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 헤맬 정도였다고 한다. 다행히 세베루스가 명령을 내려 가까스로 공동 집정관을 치루는 상황까지 연출됐는데, 그럼에도 형제의 우애는 회복되지 못 했다.

따라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사후, 공동으로 제위를 이어받은 22세의 게타와 23세의 카라칼라는 오래전부터 경쟁 상대였고 서로에게 적대감이 깊었던 상태였던 만큼, 곧 터질 시한폭탄 같은 분위기를 연출한다.

2.3. 장인과 아내 살해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생전, 카라칼라는 아버지의 동향친구이자 할머니의 조카 가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우티아누스(Gaius Fulvius Plautianus)의 딸인 푸블리아 풀비아 플라우틸라(Publia Fulvia Plautilla)와 결혼했다. 하지만 카라칼라의 장인 플라우티아누스는 근위대장인 자신의 권력을 남용해 온갖 비열하고 잔인한 행동과 악행, 폭력 등으로 사람들의 신망을 얻지 못한 위인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무사했는데, 이는 카라칼라의 아버지 세베루스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이탈리아에서 건너온 조상을 뒀고, 북아프리카의 렙티스 마그나 출신인 동향친구, 그것도 외사촌 사이인 플라우티아누스를 무척 아꼈으며 서로 연인사이라는 소문까지 돌 정도로 우정이 대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황제는 그의 비리와 악행들을 눈감아주고, 아내 돔나와 동등한 수준의 각종 혜택을 제공했다. 덕분에 플라우티아누스는 막대한 권력과 부를 얻었고, 그 위세는 대단했다.

카라칼라는 이 결혼을 반기지 않았고, 장차 황제가 될 자신에게 큰 위협이 될 장인과 아내 모두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동시대 사람으로 원로원 의원인 디오 카시우스는 이에 관해, 자신의 일기 형식으로 기술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형 게타 죽음 이후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플라우티아누스의 이러한 행동 대부분은 세베루스 자신이 알아차리지 못했으나, (사실은) 알고도 모르는 척 했다. 그렇기에 그(세베루스)의 형 게타(카라칼라-게타 형제의 큰아버지)가 임종 직전에 플라우티아누스에 대한 모든 사실을 그에게 밝혔을 때, 게타는 근위대장을 미워하고 더 이상 그(플라우티아누스)를 두려워 하지 않았기 때문에, 황제는 형의 동상을 포룸에 세웠고 그는 영예를 지킬 수 있었다. 헌데 이것 때문에 (플라우티아누스는) 그 대부분 권한이 박탈됐다. 따라서 플라우티아누스는 매우 분개했다. 그는 이전에도 자신의 딸을 무시하는 안토니누스(카라칼라)를 미워했지만, 지금은 그에게까지 무시가 계속되자 책임의 원인을 제공한 안토니누스를 그 어느 때보다 싫어했고, 그에게 다소 가혹하게 행동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이유로 안토니누스는 가장 뻔뻔한 존재인 자신의 아내에게 혐오감을 느꼈을 뿐만 아니라 플라우티아누스가 자신의 모든 일에 계속 간섭하고 모든 일에 대해 책망함에 대해 원한을 느꼈다."
디오 카시우스, 《로마사》, < 베수비오 화산 폭발과 플라우티아누스 몰락 중 일부>

디오의 지적처럼 카라칼라에게 자신의 큰아버지가 죽기 전, 현직 황제인 자신과 아버지에게 플라우티아누스에 대한 두려움을 밝히며, 현직 근위대장 플라우티아누스가 외사촌이라고 하더라도 얼마나 위험한지 경고한 유언은 꽤나 인상적으로 다가왔고 이는 그가 아내와 장인을 극도로 혐오한 이유가 됐다. 더군다나 플라우티아누스는 세베루스 황제의 형 게타의 폭로 이후, 그 증오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카라칼라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율리아 돔나의 시종들까지 협박하고 감시해 백부의 죽음 이후 증오심으로 똘똘 뭉친 카라칼라에게 큰 원한을 샀다. 이렇게 상황이 흘러가니, 그는 202년 4월 결혼식을 올린 이후 아내와 식사도 하지 않고 잠도 자지 않으려고 했으며, 자신이 정권을 잡으면 둘 다 죽이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결혼 생활 중 204년 딸을 한 명 얻었다. 그러나 이후 기록에서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딸의 언급이 없는 것을 봤을 때 일찍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권력을 놓고 다툰 카라칼라와 플라우티아누스 부녀의 갈등은 205년 1월 22일에 극도로 악화되었다. 사료마다 다르지만 이들의 갈등이 시작된 것은 카라칼라가 평소 그들을 죽여버리겠다고 일갈한 발언이 플라우티아누스의 귀에 직접 들어가면서였다고 한다. 이 외에도 세베루스 황제가 들은 형 게타의 유언, 플라우티아누스의 게타 동상 철거 요구, 율리아 돔나와 플라우티아누스 사이의 갈등이 터지면서 황실 내부의 암투로 심화됐다고 전해지는데, 어느 쪽이 진실이던 간에 플라우티아누스 쪽은 카라칼라를 없앨 계획을 세웠고, 카라칼라 역시 처가 전체를 몰살시키려고 명을 내렸다. 플라우티아누스 일가 몰살 사건에 대한 직접적인 이야기의 시작은 두 가지 버전이 전해진다. 어느 설명에 의하면, “카라칼라가 세 명의 백인대장을 설득하여 플라우티아누스를 음해하는 거짓 정보를 보고하게 했다. 그들은 조상들을 위한 축제가 끝난 후 행동을 개시했다. 그들은 저녁 식사 직전에 세베루스 황제에게 가서 플라우티아누스가 자신들과 다른 일곱 명의 백인대장들에게 세베루스와 카라칼라를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말하고 있다.

또 다른 주장에 따르면 근위대장 플라우티아누스가 음모를 통해 ‘원수보다 더 원수 같은’ 사위 카라칼라의 제위 계승을 막고 자신이 제국을 장악하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세운 계획은 황제와 황태자를 살해하기 위해 고용한 사람이 곧바로 그 사실을 알리면서 실패로 끝나고 만다. 무엇이 진실이든 간에 플라우티아누스는 아들과 함께 황궁에 비무장 상태로 왔다가 체포돼 즉시 교살됐다. 이후 카라칼라는 장모, 처남의 아내와 그들의 어린 딸[18]까지 모조리 추방한 다음 죽였다고 한다.[19] 아울러 카라칼라는 플라우티아누스 부자의 초상화들을 모조리 파괴하도록 하고, 장인과 처남의 시신을 거리에 내팽개치도록 하여 조리돌림식으로 민중의 야유를 받게 했다.

205년 1월, 카라칼라는 죽은 플라우티아누스의 딸이자 자신의 아내인 플라우틸라를 리파리 섬으로 추방했다. 이때 그는 아내와 이혼한 뒤 아예 죽여버리려고 했는데,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플라우틸라 편을 들면서 만류해 이를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고 한다. 따라서 카라칼라의 아내이자 세베루스의 며느리인 그녀는 처형되지 않았고 유배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장인과 아내를 굉장히 혐오했던 카라칼라의 증오는 없어지지 않았다. 결국 카라칼라는 아버지가 죽은 211년 2월 제위에 오른 뒤 동생 게타를 1년도 못 되어 살해한 다음 사람을 보내 추방시킨 아내를 죽여버렸다.

2.4. 동생 살해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211년 2월 4일 브리타니아 로마군 병영이 있는 에부라쿰[20]에서 65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이때 론디니움[21]에 머물고 있던 게타는 평소 효자로 이름난 사람답게, 아버지의 병세가 악화됐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에부라쿰까지 달려가 며칠 밤 아버지 곁을 지켰다고 한다. 그래서 삼부자는 처음으로 한 막사 안에서 같이 머물게 됐는데, 이때 세베루스는 숨이 끊어져가는 상황에서 다음과 같이 유언을 남기고 승하했다.
서로 사이좋게 지내라. 군인들을 부유하게 해주고 다른 모든 사람은 무시하라.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유언 중 일부

세베루스의 마지막 유언에서 드러나듯, 세베루스는 두 아들의 관계가 칼레도니아 원정기간 동안 최악의 상태로 악화됨을 끝까지 걱정했다. 실제로 카라칼라와 게타의 관계는 너무 나빠서, 세베루스는 원정길에 동행한 자신의 오랜 친구이자, 책사이며 복심인, 처가 사람 파피니아누스에게 두 아들을 지켜달라고 유지를 남긴다. 이는 몇 번에 걸쳐 계속된다.

당시 근위대장인 파피니아누스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황제가 되기 전부터 법률가, 변호사로 로마 제국 최고였고, 근위대장 취임 후 보여준 군대 지휘능력, 병사 장악력 등을 이 원정에서 검증받은 상태였다. 또 그는 긴급회의로 열린 콘실리움에서 견원지간인 카라칼라, 게타 모두에게 신망을 잃지 않고 둘을 모두 만족시켜 병석에 있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마음을 편하게 했다. 그래서 세베루스 황제는 그를 두 아들의 공동 근위대장, 공동 변호사, 국고 및 세베루스 일가 재산 관리인에 임명한다. 이때 세베루스는 숨을 헐떡이면서도 파피니아누스에게 다시 한 번 두 아들의 미래를 맡겼고, 두 아들과 제국 수뇌부들에게 유언을 남긴 후 세상을 떠났다.

다행히 카라칼라, 게타는 파피니아누스를 존중했고, 공동의 이름으로 그를 신뢰하겠다고 밝힌다. 그렇지만 두 사람은 자신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반강제적으로 끌려간 칼레도니아 전쟁 때문에 불만이 상당했다. 형제 사이는 춥고 고생만 하는 야전 환경 속에서 더 악화됐다. 이때 두 사람의 관계가 어느 정도로 최악이었는지, 둘은 영국에 있는 동안, 한 막사 안에 같이 있지 않았고 식사자리에 같이 앉아 음식을 먹지도 않았으며, 서로 멀찌감치 떨어져 증오했다.

아버지 세베루스가 죽자, 카라칼라는 남은 칼레도니아 원정을 중지시키고, 로마군을 하드리아누스 성벽 이남으로 철군시킨다. 이후 카라칼라는 로마로 귀환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힌다. 게타 역시 형과 마찬가지로 원정을 끝내고 싶어해 비슷한 입장을 낸다. 하여 카라칼라는 동생 게타, 아버지의 유지를 받든 근위대장 파피니아누스 등과 함께 로마로 돌아왔다.

로마로 귀환한 두 황제는 팔라티누스 언덕에 있는 황궁을 반으로 나누어, 각각 주 출입구를 따로 하고, 동시에 서로 연결되는 문과 통로들을 모조리 막아서 두 개의 궁으로 만들어 함께 거처할 방법을 모색했다. 그러나 이것은 본질적으로 타협이 될 수가 없었던 것이었고, 게타와 카라칼라는 각자 원로원 의원들과 그 밖에 중요한 인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암투를 벌였다. 로마 제국 내 학자들 사이에 지지층을 형성한 게타가 카라칼라보다 더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통치자로서 그 둘 사이에 선택의 여지가 많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두 황제는 관료를 임명할 때에도 자신의 사람을 앉히기 위해 안간힘을 썼으며, 서커스 경기에서도 서로 다른 팀을 지지하고 서로 다른 팀들의 지지를 받았다. 심지어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유리한 결과가 나오도록 사법, 행정에도 관여하면서 이들의 경쟁은 법 판결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이러다보니 협력이 될 턱이 없었고 오히려 갈등만 더욱 커져 동복형제인 두 황제는 서로를 곧 죽일 분위기로 악화됐다. 세베루스의 판단 그대로 파피니아누스가 중립을 유지하면서, 돔나를 도와 형제가 직접 맞붙는 것을 차단했다는 점은 다행이었다.

그렇지만 몇 달 뒤, 당대 사가 헤로디아누스에 따르면, 두 황제는 제국을 양분하는 것이 유일한 평화적 해결책임을 알고 게타는 아시아를 차지하며, 카라칼라는 유럽과 아프리카의 북서 지역을 맡기로 했다고 한다. 게타는 새 수도를 안티오키아나 알렉산드리아로 삼을 계획이었는데, 학자들은 이런 구도가 형성되었다면 제국에 평화가 찾아올 수도 있었겠지만, 그것보다는 전면적인 내란이 벌어졌을 가능성이 더 높았다고 추측한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에 대해 어머니 율리아 돔나가 두 형제에게 "제국을 서로 나눠 가질 거라면 이 엄마는 어떻게 나눠 가질 것이냐?"라며 물었고, 이 때문에 계획은 중단되었다. 당연한 말인데 돔나가 이렇게 행동하는데 큰 힘이 된 것은 파피니아누스의 공이 컸다.

이렇게 계획이 무산되자 카라칼라는 동생이 자신에게 큰 위협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동생을 죽이기로 결정한다. 그래서 211년 말부터 몇차례에 걸쳐서 동생 게타를 암살하려고 실제로 실행에 옮겼다. 그러나 이 시도들은 연달아 실패했다. 특히 211년 12월 17일의 사투르날리아 축제에서 동생의 친구와 지지자들의 노력으로 게타 암살이 실패한 일은, 카라칼라에게 뼈 아픈 것이 된다. 게타와 지지자들이 모두 카라칼라가 게타의 목숨을 노리고 있음을 알게 된 이상 카라칼라에겐 선택지는 얼마 없게 되었다. 이에 그는 본인의 손으로 동생을 직접 죽이기로 결심한다.

따라서 카라칼라는 계획을 바꿔 거짓 편지로 게타를 어머니 율리아 돔나의 방으로 유인한 뒤, 본인이 직접 무방비 상태가 될 게타를 암살하기로 하고 실행에 옮긴다. 실제로 카라칼라는 게타가 지지자들의 밀착 경호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212년 2월 저녁, 게타가 율리아 돔나와 함께 있는 때를 틈타 백인대장이 차고 있던 칼을 빼앗고 들고가서 직접 그를 살해한다. 이때 그는 근위병들을 시켜 동생을 경호하는 지지자들까지 모두 죽여버렸다.

이때에 관해, 황실 사람들과 교류를 하여 상황을 알고 있던 디오는 카라칼라가 저녁에 어머니 눈 앞에서 칼로 동생의 복부를 마구 찔러 죽였다고 하며, 놀란 어머니에게 동생이 자기를 죽이려고 해서 그런 거라고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디오는, 떠도는 이야기 그대로 게타는 "어머니, 형이 날 이렇게 했어요. 형이 날 이렇게 했어요. 도와주세요! 날 도와 주세요!"라고 외치면서 율리아의 품에서 어머니의 옷을 피로 물들인 뒤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이를 본 율리아 돔나는 자신의 자궁이 있는 배를 껴안으며 고통 속에서 경련을 일으키고 죽어가는 차남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렇지만 돔나는 장남 카라칼라가 백인대장에게서 빼앗아 든 칼을 들고, 어머니의 표정, 몸짓, 눈동자를 관찰하며 죽일 듯 노려보자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못하고 겁에 질렸다고 한다.[22]

그렇게 카라칼라는 게타를 죽이고 권력을 독점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카라칼라에 의해서 살해됨으로 인해 게타의 이미지는 순교자의 모습을 띠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제위를 계속 유지했다면 카라칼라보다 더 나은 또는 더 많은 덕을 지닌 황제가 되었을지는 의문이라는 의견도 있다. 물론 이 주장은 사후 카라칼라 명령으로 기록된 주장이 많아 걸러들을 필요가 있다고 평가받는다. 두 형제를 직접 본 마리우스 막시무스의 것을 차용한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따르면, "안토니누스 게타는 바시아누스와 달리 잔인하거나 냉혹함은 없었지만, 다양한 향신료를 넣은 음식과 포도주를 좋아하는 것과 평소 얼굴 표정과 말투가 무뚝뚝한 단점이 있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카라칼라의 명령에 따라 작성된 주장들처럼, 게타가 여자를 밝히고 자신의 옷과 보석에 돈을 많이 쓰면서도 인색하다는 주장은 거짓말로 보인다고 해도, 게타가 단독 황제가 됐을 때 좋은 황제로 기억됐을지는 의문이다. 다만 살아생전 비정함과 짠돌이의 대명사로 대중에게 알려졌던 티베리우스 황제의 경우처럼 단순히 성격에 모가 났다고 좋은 황제가 되진 못했을 거라 단정짓는 것도 잘못된 것이긴 하다. 애초에 게타는 22살 나이로 너무 젊은 나이에 죽어 실력을 입증할 기회도 얻지 못했기도 하고 더 오래 살았다면 어떤 선정을 베풀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고대 기록들이 일관되게 말하듯, 무례하고 거만한 면모가 있다고 해도, 게타는 형과 달리 온화했고 효심도 있던 터라 인망이 많았다. 더욱이 형과의 갈등 원인 중 큰 몫을 차지한 것은, 권력 투쟁 전부터 형의 반항심과 그로 인한 대립 때문이라서 확실히 게타 지지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는 성년식 이후부터 수염을 기르면서,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 붕어빵인 탓에 많은 로마인들에게 젊은 시절의 세베루스가 연상될 정도로 묘한 매력을 뿜어냈다. 이런 이유로 병사들 역시 온화한 성격의 게타를 좋아했는데, 이를 의식한 카라칼라는 수염을 기른 상태의 동생 초상화와 조각상을 중심으로 죄다 파괴하도록 명했다.[23]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Severan_dynasty_-_tondo.png [24]

카라칼라의 주장과 달리 게타 쪽이 형을 암살하라고 명령하거나 부추긴 적이 없다고 고대, 현대 사가들은 단언한다. 즉, 서로 간의 반목과 권력투쟁은 있었어도 극단적인 방법으로 골육상쟁을 택하고 실행에 옮긴 책임은 카라칼라 쪽이라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카라칼라는 단독황제가 되고 난 뒤, 동생이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며 비난했고 그 증오심이 대단했다. 그는 죽은 동생 게타의 생일 기념일을 없앴고, 212년 원로원에게 게타의 기록말살형을 추인할 것을 요청해 죽은 친동생을 기록말살형에 처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카라칼라는 게타의 대리석상들과 이것들을 받치고 있는 돌들을 깨부수게 했다. 또 위에 나온 가족 초상화처럼 게타가 들어간 작품 등에서도 게타의 얼굴들을 삭제하도록 했으며, 게타의 얼굴이 새겨진 주화들을 회수해 녹여버리라고 지시했다. 이 외에도 그는 공식석상과 사석 모두에서 동생의 이름 자체를 간접적으로 언급하는 것까지 금지했고, 어떤 사람이라도 게타의 이름을 언급하면 그 즉시 반역 혐의의 중죄로 다뤘다.

하지만 이 사건 이후부터 카라칼라는 당대 로마인들의 여러 증언처럼 저주에 시달리게 됐다. 그 시작은 그가 동생을 제 손으로 찔러 죽인 직후부터였다고 하는데, 아마도 본인 역시 눈 앞에서 죽어가는 동생을 본 정신적 충격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이유로 카라칼라는 죽기 전까지 친동생 게타를 죽인 죄책감으로 평생 심각한 고통에 시달렸다. 갑자기 아버지, 동생의 목소리가 환청으로 들리거나, 동생이 꿈에서 나오는 경험을 거의 매일 같이 했고, 가끔은 아버지와 동생이 헛것으로 보이기도 했다.[25] 더군다나 디오 카시우스가 기록했듯이 누구에게도 말하기 힘든 고통, 즉 발기부전으로 인해 후사를 얻지도 못하는 스트레스까지 겪어야 했다. 따라서 이 고통을 씻고 저주를 풀 요량으로, 제국을 순행하면서 카라칼라는 명승지 중 기도 빨이 통한다는 신전, 제단 등을 찾아가 자신이 겪고 있는 저주를 씻고자 노력했고, 늘 완전 무장을 한 채 생활하고 잠이 들 때도 반드시 칼을 찼다. 당연한 이야기인데, 카라칼라는 헛것을 보거나 환청을 들으면 두려워 하면서 칼을 휘두르고, 주변에 무기를 찬 병사들을 잔뜩 두게 한 뒤 본인 주변을 감시하라고 명령했다.

2.5. 로마 대학살

동생 게타에게는 로마 사회에서 엘리트 계층이라고 불리는 학자, 원로원의 유력 인사, 장군, 직업군인, 각 분야의 명사 등 막강한 지지자들이 있었다. 이는 카라칼라 뒤에 그를 절대적으로 지지해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아피우스 수에트리우스 사비누스, 발비누스 같은 유능하고 힘 있는 인물들이 아미투스(친구)로 버티고 있어도 양과 질 모두에서 카라칼라가 절대적으로 불리함을 뜻했다.[26] 더욱이 카라칼라가 비무장 상태의 게타를 유인해 직접 살해하고 어머니와 이모 등을 협박해 질책이 쏟아졌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후 상황은 뻔했다.

따라서 모두가 자신에게 반대할 것임을 안 카라칼라는 게타의 지지자들에게 자신의 행동이 정당한 행위였음을 강조하고, 이를 해명했다. 이때 카라칼라는 자신의 손아귀에만 들어오면 안전이 보장되고, 반대파를 억누를 수 있는 근위대를 떠올린다. 그래서 그는 선혈이 낭자한 칼을 자신의 수호신에게 스폴리아 오피마로 바치기에 앞서, 근위대 병영으로 향한다. 이후 그는 근위대 병사들 앞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안토니누스는 저녁이었음에도 마치 자기가 음모의 대상이 되어 목숨이 위태로웠던 것처럼 소리치며 군단을 장악했다. 진영에 들어서면서 그는 이렇게 외쳤다. "동료들이여, 기뻐하라. 지금 내가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 수 있는 위치에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전체 이야기를 듣기도 전에 그는 죽은 자들[27]에 대한 합당한 존경을 표할 생각이나 말을 할 수 없을 만큼 너무나 많고도 위대한 약속으로 그들의 입을 막았다. "나는 너희 중의 하나이다. 내가 너희에게만 의지하여 살 것이며, 내가 너희에게 많은 시혜를 베풀 것이다. 모든 보물은 너희들 것이다."
디오 카시우스, "카라칼라의 연설"

카라칼라는 신변 안전을 위해 가장 먼저 했던 일은 근위대를 찾아가 자신이 하마터면 동생의 손에 죽을 뻔했기에 그를 죽였고 그건 정당방위였다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이때 군인들은 그를 의심했지만[28] 카라칼라가 많은 선물을 내리고 급료를 대폭 올린다는 약속을 했기에 일단 그의 편을 들어주었다. 이렇게 그날 저녁 근위대를 자신의 편으로 일단 돌려 놓은 카라칼라는 다음 날, 원로원에 나타났다. 이때 그는 어머니, 근위대 앞에서 그랬듯이 게타가 자신을 살해하려 했다는 주장을 반복하며 자신의 행동이 정당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아직도 자신의 입지가 불안하다고 생각한 카라칼라는 모든 과정을 생략한 뒤 동생의 옛 지지자들을 학살했다. 맨 먼저 살해된 이들은 게타를 둘러싸고 지켜주던 유명 배우, 운동선수 무리였다. 이들은 게타가 피살된 직후, 황궁 안에서 게타를 기다리다가 카라칼라의 부하들에게 그 자리에서 살해됐다. 이때 카라칼라는 게타의 죽음 이후, 어머니 돔나까지 의심해 혹시라도 어머니가 자기에게 등을 돌리면 해를 가할 생각을 했고, 황궁에 살고 있던 이모 율리아 마이사와 사촌 율리아 소아이미아스, 율리아 마마이아 등도 의심해 이들을 경계했다. 그래서 마이사는 이런 조카에게 몸을 사렸다고 한다.

게타 사후 마이사의 두 딸은 카라칼라에게 총애를 받아 로마 황녀들이 받는 다양한 특권을 하사받고 황족이 됐다. 그러나 이는 게타를 살해한 직후가 아닌, 카라칼라의 단독황제 등극 이후 상황이었고, 해당 사건 당시 황가 여자 황족들은 벌벌 떨면서 눈이 뒤집힌 카라칼라의 눈치를 보고, 그를 두려워 했다. 이유는 상술한대로 카라칼라가 게타를 죽인 직후 돔나 면전에서 협박한 것이 컸다. 그러나 이들이 충격을 받고 카라칼라에게 바짝 엎드린 진짜 이유는 가정교사 킬로의 죽음 때문이었다.

카라칼라는 어릴 적부터 냉혹하고 잔혹한 통치술을 가르친 아버지나 대부분의 가정교사들과 달리, 따뜻하게 자신을 돌봐준 킬로를 "아버지"라고 부르며 따랐다. 그런데 카라칼라는 느닷없이 자신의 개인 가정교사이자 멘토로 게타의 개인교사가 아닌 킬로를 의심했다. 킬로를 의심할 당시 상황은 카라칼라가 백인대장과 경비대를 시켜 게타와 연예인, 운동선수 무리를 죽인 직후였다. 이때 그는 킬로를 체포하도록 한 다음, 재산을 압류하도록 명했다. 그러면서 그는 근위대 병사들에게 킬로를 앞으로 데리고 오게 했다.

디오의 증언에 따르면 이날 카라칼라는 마치 성군인냥 연기를 펼쳐, 저녁 무렵 이 장면을 지켜본 황실 관료와 어머니, 이모, 사촌누이 모두를 충격에 빠뜨렸다. 킬로는 저녁에 자고 있다가, 집안 전체를 난장판으로 만들고 은쟁반, 은수저 등 값이 되는 모든 재물을 빼앗긴 뒤 슬리퍼만 신은 채 끌려왔다. 그는 허름한 투니카 하나만 달랑 입고 있었고, 황궁으로 끌려왔을 때 병사들에게 두들겨 맞아 여기저기가 멍이 들고 속옷마저 찢긴 상태였다. 그래서 킬로는 범죄자처럼 끌려온 뒤 황궁 안에서 벌벌 떨었는데, 카라칼라는 웃으면서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면서 그를 위로하는 척하면서, "누가 내 아버지를 이렇게 했느냐? 내 아버지를 모욕하지 말거라! 내 가정교사 선생님을 공격하지 말거라!"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가, 킬로가 안심하자마자 대대장과 백인대장에게 명령을 내려 본인이 보는 앞에서 숨통을 끊게 했다. 이렇게 킬로가 살해된 다음, 곧바로 다음 희생자로 지목된 이는 당시 로마에서 학식이 가장 풍부하고 총명함으로 존경받던 율리아누스 아페르와 그의 아들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수재였고 학력과 재능, 지적 수준 모두 제국 안에서 알아주는 사람이었기에, 카라칼라는 게타를 죽이기 전까지는 인망을 얻을 요량으로 이들을 잘 대해주며 민중들 앞에서 존경받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따라서 이들이 카라칼라의 명령으로 터무니없게 모욕을 당했을 때, 사람들은 놀랐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도, 카라칼라는 율리아누스 아페르 부자를 죽이지 않고 풀어줬다. 그래서 이들은 석방 직후 카라칼라의 변덕스러운 성격에 더 큰 화를 입을까 두려워 급히 고향으로 도망쳤다.

그렇지만 대개의 경우, 몸을 사렸다고 해도 카라칼라에게 게타 지지자로 몰리거나, 게타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처벌받는 경우가 수두룩했다. 이 결과, 원로원 의원, 근위대장, 식민지의 총독, 궁중의 시종, 군인, 전차 기수, 게타의 옛 친구들도 재판도 없이 또는 아주 그럴 듯한 혐의를 뒤집어쓰고 처형되었다. 그들은 식사를 하던 도중에, 공공 목욕탕에서, 그리고 거리에서 살해되었다. 212년 초 몇 달 동안 무려 2만 명이 이렇게 죽어갔다.

디오에 따르면 율리아누스 아페르 부자가 화를 면한 뒤, 희생자로 점찍혀 살생부에 이름을 올린 이는 존경받는 오래된 로마 귀족 가문 출신의 원로원 의원 라에누스였다고 한다. 라에누스는 게타 쪽 인사가 아니었고, 인품이 좋고 고귀한 가문 출신이었기에 카라칼라에게 의심받았다. 다행히 당시 라에누스는 큰 병을 앓아 시한부였고, 몸상태가 너무 나빠 곧 죽을 상황이었다. 그래서 카라칼라는 그냥 병으로 죽으라는 배려 차원에서 병사들을 보내 폭행하고 고문하는 악행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라에누스와 나란히 살생부 맨 위에 이름을 올린 다른 원로원 중진들은 그 화를 피하지 못했다. 그중 1번타자로 선정되어 살해된 이는 이탈리아 혈통의 원로원 의원으로, 아버지 생전부터 세베루스 왕조에 헌신한, 196년 집정관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트라세아 프리스쿠스였다. 트라세아 프리스쿠스는 어머니 돔나의 친구임에도, 엄청난 부자이고 게타의 오랜 측근인 까닭에 게타가 죽은 직후 카라칼라의 지시로 살해됐다. 이때 그는 기소도, 재판도 없이 개처럼 끌려간 다음, 카라칼라의 면전에서 참살된 뒤 그 자리에서 머리가 잘리고 남은 시체는 거리에 버려졌다. 헌데 트라세아 프리스쿠스의 죽음은 카라칼라의 게타 지지자 제거 방법에서 아주 평범하고 일반적인 형태였다고 한다. 다행이라면 트라세아의 경우, 처가쪽이 카라칼라 최측근이고 율리아 돔나가 건재한데다 이 사람의 친구, 친척들까지 모조리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해 가문 전체가 연좌제로 멸문되는 일은 겪지 않았다. 그렇지만 다른 희생자들은 아버지가 살해될 때, 도망친 아들이나 사위, 딸을 인간사냥하듯 추격해 죽인다거나 붙잡아 강물 등에 집어 던지는 방식으로 모조리 제거했다.

로마는 엄연히 법치국가였고, 로마 시민권자는 기소된 다음 조사를 거쳐 증거가 나오면 유죄 판결 후 처벌받아야 했다. 트라세아 등이 게타가 살해되자마자 대역죄인처럼 끌려가 살해되고 머리가 효수된 것은 당시로서도 명백한 불법 행위였다. 더군다나 로마에서 연좌제가 황제의 명령 하나로 집행하는 것은 제한적이었다. 제 기분에 따라 고무줄처럼 늘어나고 줄이며 사람의 목숨을 가지고 노는 카라칼라의 인간 사냥 방법 역시 이전까지 잔혹하기로 이름난 이들도 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이렇게 되니 당연히 원로원과 근위대 장교, 관료들은 반발했다. 게타 살해 직후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한 배우, 운동선수들의 팬들은 무리를 지어 카라칼라에게 거세게 항의했다. 그러나 이런 항의는 도리어 카라칼라가 더 가혹하고 잔혹하게 대응하는 원인이 됐다고 한다. 따라서 카라칼라는 다음과 같이 일갈하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으며, 이는 더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는 이유가 됐다.
"유죄이든, 무죄이든 똑같다."

이때부터 그는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안 좋은 소리를 하거나, 그런 모습이 의심만 되면, 이유를 묻지 않고 재판없이 그들도 똑같은 방법으로 처벌했다. 이는 남녀노소를 불문했다. 카라칼라는 "속죄한다"는 명분 아래 "게타 추종자들에 대한 추방명령과 반역죄 적용"까지 명하고 이를 즉시 집행했다. 이에 대해 디오 카시우스는 남녀노소를 합쳐 약 2만명이 로마 시민권자에게 보장된 기본권 보호와 변론 기회도 얻지 못하고, 죽거나 본국 이탈리아 밖으로 추방됐다고 한다. 그 결과, 의심을 이유로, 혹은 뜬소문 때문에 억울한 피해자들도 나타났다고 한다. 가령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딸 중 유일한 생존자로,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손녀이자 콤모두스의 누나인 코르니피키아는 게타의 죽음을 슬퍼하며 울고 있는 모습이 발견된 것이 드러났다는 누명을 쓰고 살해됐다. 이는 코르니피키아의 조카로 루킬라가 두번째 남편 폼페이아누스 사이에서 낳은 아들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폼페이아누스[29]도 마찬가지였다. 루키우스 폼페이아누스는 게타와 친분관계도 없고 일찍부터 카라칼라를 도운 집정관이었음에도 게타 지지자로 의심받아 카라칼라 명령으로 변호의 기회를 얻지도 못하고 살해당했다.

이는 같은 세베루스 가문 방계황족들과 아버지의 옛 측근, 친구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세베루스 왕조의 핵심 인사 중 첫 희생자가 된 이는 로마 제국에서 가장 뛰어난 법학자 중 한명로, 고전법의 1인자로 불린 파피니아누스였다. 시리아 속주 출신인 아이밀리우스 파피니아누스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오랜 친구이자 왼팔과 같은 존재로, 스카이볼라 밑에서 세베루스와 법학을 배운 법학자였다. 그는 제국 전역 최고의 변호사였고, 조시무스에 따르면 파피니아누스는 엄격함과 정의감, 법률에 대한 깊은 이해와 지식 및 해석 능력이 탁월해 모든 로마인들에게 큰 존경을 받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세베루스 황제는 파피니아누스에게 근위대장 직을 줬고, 칼레도니아 원정길에 동행해 이곳에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를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다. 요크에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숨을 헐떡거리며, 자기가 가장 믿을 수 있고 제국의 존경을 한몸에 받던 그에게 두 아들의 미래와 세베루스 가문의 영속을 맡겼다. 이런 배경 때문에 파피니아누스는 세베루스 왕조의 카라칼라, 게타 형제의 공동변호사이자 근위대장이었고, 국고와 재무 분야 고문도 맡고 있었다.

파피니아누스는 오랜 친구 세베루스의 부탁, 율리아 돔나의 간청, 본인이 가지고 있는 책임감을 이유로, 게타가 암살되기 전까지 카라칼라, 게타의 반목을 막고, 두 사람을 화해시키고자 부단히 노력했다. 카라칼라와 게타가 법정에서 본인 파벌로 배심원을 심어 놓고 제 의견을 관철시키려고 했을 때마다 그는 본인이 가지고 있는 뛰어난 법지식과 논리로 중립을 유지했다. 형제가 제국을 나눠 가지겠다고 할 때, 돔나와 이를 막아냈다. 따라서 카라칼라는 게타를 죽이기 전부터 불만을 품었고, 게타 역시 중립적으로 대처한 파피니아누스에게 내심 불만이 있었는데, 확실히 그 불만이 더 큰 쪽은 카라칼라 쪽이었다. 그래서 카라칼라는 게타를 제 손으로 직접 찔러 죽이고, 게타의 지지자들과 자기 가정교사 등까지 살해한 다음 파피니아누스에게 자기를 변호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꼬투리를 잡기 위해 카라칼라가 한 것이지만, 파피니아누스가 카라칼라를 지지해주면 모든 것을 용서해주겠다는 최후 통첩이었다. 하지만 파피니아누스는 법학자로, 근위대장으로, 고명대신으로의 양심을 걸고 카라칼라의 마지막 제안을 거절했다. 이에 카라칼라는 원로원을 겁박해 죄없는 파피니아누스를 처형시키는 법령을 만들게 하고, 법 통과 직후 아이밀리우스 파피니아누스를 붙잡아 처형했다. 파피니아누스는 참수됐는데, 도끼로 머리를 내려 찍고 목을 벴다고 한다. 그래서 아버지가 고통 속에 비참하게 죽자, 크게 겁 먹은 파피니아누스의 아들은 이를 보고 도망치다가 카라칼라 부하들 손에 인간사냥 당하듯 살해됐다. 카라칼라와 그 측근들은 파피니아누스를 증오해 파피니아누스의 머리를 트라세아 프리스쿠스 머리 등과 나란히 전시하고, 머리가 잘린 파피니아누스의 시신을 트라세아 등의 시신을 함께 로마 시내 거리를 돌아다니며 질질 끌고 다니며 조롱하다가 버렸다.

카라칼라의 잔인함과 부도덕함은 계속됐다. 이중 만인의 질타를 받은 또 다른 사건은 211년 (혹은 212년) 전직 집정관 가이우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아페르가 죄를 뒤집어 쓰고 억울하게 살해된 일이었다. 그는 자신의 오촌동생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적극 추천해주고, 세베루스가 정치적, 사회적 위기에 빠진 순간마다 진심을 다해 그를 도운 집안어른이자 은인으로, 카라칼라에게는 몇 없는 남자친족이면서도 그의 제위를 지켜줄 유력인사이기도 했다. 하지만 카라칼라는 동생 게타를 죽인 직후부터 이런 것을 무시하며, 더 강하고 잔혹한 공포심을 심어주는 명령을 계속 내렸다. 따라서 세베루스 아페르 부부는 고령의 노인들임에도 자신들을 체포하려고 카라칼라의 병사들이 집안에 들어 닥치자 자택 옥상에서 몸을 던져 부부가 함께 목숨을 끊었다. 따라서 늙은 셉티미우스 아페르 부부와 파피니아누스의 죽음을 본 로마인들은 카라칼라가 죽어도 영혼을 구원받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세베루스 가문을 콩가루 인간말종 집안으로 여겼다.

하지만 카라칼라는 모두가 자기를 증오할수록 더 잔혹하게 행동했다. 따라서 이 시기, 카라칼라는 아내 푸블리아 풀비아 플라우틸라도 처형시키도록 명령했다. 다행히 다른 곳에 유배된 남은 처가 식구들에게는 보복하지 않아 더 큰 비난은 피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카라칼라는 아내 풀비아 플라우틸라가 확실히 죽은 것을 확인하겠다며 그녀의 머리를 가져오게 하고 이를 직접 확인했다.

동생 게타와 아내, 장인을 살해한 것과 212년에 자행되었던 게타의 지자자들에 대한 대학살 사건은 끔찍했다. 카라칼라의 심기를 건드리거나 건드릴 우려가 있던 사람들까지 재판도 없이 마구잡이로 죽여버리자, 원로원 의원들과 시민들까지 경악하며[30] 카라칼라를 질타했고, 황제와 세베루스 왕조의 평판은 크게 떨어졌다. 황제와 원로원의 관계는 악화됐고, 수많은 로마인들도 젊은 황제가 동생을 제 손으로 죽이고 평판이 훌륭한 저명인사, 장군, 옛 안토니누스 왕가 출신 인물들을 인간사냥하듯이 살해됨에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자신의 손으로 직접 죽인 동생에 대해 죄책감과 증오심이 결합된 카라칼라는 무자비해졌다. 따라서 로마 사회에서 카라칼라는 다른 계층들과도 멀어지게 되었으며, 이러한 갈등은 카라칼라의 치세 동안 계속 그림자처럼 드리워졌다.

2.6. 화폐개혁과 안토니누스 칙령(212)

카라칼라가 군심을 잡기 위해 무리해서 군인들의 연봉을 500데나리우스에서 750데나리우스로 인상시킨 조치는 국고의 일시적 고갈로 이어졌다. 따라서 카라칼라는 급히 세금을 인상해 징수케 하고, 부자들이 내는 상속세와 노예해방세를 무려 2배나 인상해 강제 징수했다.[31] 그럼에도 이는 국고 고갈 해소에 큰 도움이 되지 못 했는데, 카라칼라는 통화 가치를 약간 절하하는 방식의 새로운 화폐 안토니니아누스(Antoninianus)[32]를 발행하기에 이른다. 안토니니아누스는 2데나리우스 정도 가치면서도[33] 데나리우스 은화 2개의 80% 정도의 은만 함유했다. 세베루스 왕조 동안 데나리우스의 은 비율은 80%에서 50%로 하락하였고, 240년대의 40%, 250년대의 30%를 거쳐 갈리에누스 시대에 이르면 안토니니아누스 은화의 은 함유량은 5% 미만으로 은도금한 구리돈 수준으로 폭락하여 오히려 카라칼라가 발행한 화폐를 묻어둔 단지도 발견되기에 이른다.

테오도르 몸젠[34]부터 이어진 전통적인 학설에 의하면, 그레샴의 법칙에 따라 사람들이 데나리우스를 숨기고 안토니니아누스만 시장에 나돌게 되고 안토니니아누스의 은 함유량이 점점 내려가는 과정이 인플레이션을 일으켜 세베루스 왕조부터 아우렐리아누스 화폐개혁까지 지속되었다. 한편, 인플레이션이 세베루스 왕조 시기가 아닌 고르디아누스 3세 시기 이후로 일어났다거나, 심지어 3세기의 위기 내내 인플레이션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학설도 존재한다. 후자에 의하면 제국의 추가적 화폐 발행이 그대로 그 가치를 받아들이는 변경 지역으로 흡수되었고, 인플레이션은 오히려 아우렐리아누스나 디오클레티아누스의 화폐개혁 시도 직후에 일어났다. 로마 시대의 물가 사료가 거의 없어서 특정 학설의 완벽한 검증은 하지 못했다. 단, 3세기 동안 지속적으로 연간 600% 이상의 하이퍼인플레이션이 일어났음은 부정되었다.[35]

이어서 카라칼라가 취한 가장 역사적이고, 이후 로마의 역사를 뒤집어 놓은 조치인《안토니누스 칙령(Constitutio Antoniniana)》이 발표됐다. 그는 이 칙령을 발표하면서, 제국 내 모든 자유인들에게 동등히 시민권이 확대, 부여하고 그들에게도 로마 시민들이 부담하는 권리와 의무를 지게끔 했다. 다시 말해서 이 법으로 로마 시민권의 메리트는 사라지고, 본국 이탈리아 주민들과 속주민들, 로마 시민권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유민들, 도시 시민들과 농촌 농민들의 관계가 동등해지게 만든 것이다.

이 법령은 오늘날에는 가장 민주적이고 공평한 칙령이라고도 평가받기도 하지만, 황제들과 면담을 가질 수 있던 원로원의 실세 의원이었던 당대 역사가 디오 카시우스는 단지 세수를 늘리려는 대책에 불과했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카시우스는 원로원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카라칼라를 아주 부정적으로 평가했기 때문에, 현재 연구자들은 여러 고고학적 발견을 바탕으로 디오 카시우스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카시우스의 주장으로는, 카라칼라가 게타를 비롯한 자신의 정적들과 무고한 로마 시민 2만여 명을 잔인하게 살해한 뒤 인기를 얻기 위해 군대의 임금을 무려 250 데나리우스나 올려주는 등 무리해서 지출거리를 늘린 결과, 국고가 바닥나서 세수를 확보하기 위한 특단의 조치였다는 것이다. 특히 로마 시민을 대상으로 한 직접세였던 상속세(vicesima hereditatum)를 2배로 올렸다. 따라서 로마, 이탈리아 안에서는 카라칼라의 일방적인 징세에 항의하는 움직임이 일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카라칼라와 율리아 돔나는 자신들이 가장 믿을 수 있던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아피우스 수에트리우스 사비누스에게 서기 215년, 서기 216년에 연이어 이를 막을 수 있는 권한, 특권을 가진 관직을 내려 파견한다.

다행히 수에트리우스 사비누스는 카라칼라에게 받은 "이탈리아와 로마 내 법 질서를 수호하고 도적들을 토벌하는 권한"을 남용하지 않았다. 건국 이래, 가장 이례적인 조치로 절대적이고 무자비한 토벌권, 재판권, 수사권을 손에 쥐고 있었음에도, 되려 이탈리아 공동체와 가족 해체를 막고 로마인들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징세 불만과 재정 문제 모두를 슬기롭게 해결했던 것이다. 따라서 카라칼라는 이후 자신의 아미투스 일원 중 한 명인 그를 더 총애해, 존경까지 하게 된다.

수에트리우스 사비누스 파견에서 드러나듯, 카라칼라의 징세와 그 방식은 강압적이었다. 따라서 디오 카시우스 등 당대 사람들과 근대 학자인 에드워드 기번 등은 징세 대상 범위를 늘리고자 한 목적이 분명한 만큼, 안토니누스 칙령이 당시 사람들과 로마 제국 모두에게 상당히 부정적인 칙령이었다고 주장했다.

카시우스 등 당대 기록자들은 카라칼라가 이 칙령을 발표한 것이 불손한 의도가 있음을 적은 뒤, 속주민들을 착취하기 위한 비열한 꼼수라고 이 법령을 비난하거나 이 칙령 이후 속주민들의 삶이 얼마나 피곤해졌는지 지적했다. 이는 디오가 과장해 적었다고 보더라도 일정부분 사실임을 생각해보면 마냥 그 기록을 폄하하긴 힘들다. 따라서 이 기록을 토대로 저술한 에드워드 기번은 "속주민들은 허울뿐인 이름만 얻었고, 시간이 갈수록 속주민을 비롯해 전국 방방곳곳이 (안토니누스 칙령으로) 오히려 수탈과 학정으로 신음하게 되었다."하고 평했다.

하지만 현대 학계에서는 카라칼라의 진짜 의도가 무엇이었든 간에, 이 칙령 발표 후 후기 로마 - 동로마로 이어지는 차별 없는 로마인으로서의 공동체 의식이 만들어졌다고 평한다. 시민 - 속주민 구분 없이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로마법 체계의 근간이 되었다는 긍정적인 평가 또한 상당하고, 카라칼라의 의도가 불순했다고 해도 이는 변화를 모색해야 했던 로마 제국에게 마냥 해가 되진 않았던 것은 곳곳에서 확인된다는 평을 듣는다.

정치, 사회, 경제적 문제가 안토니누스 칙령과 관련된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도시 → 이탈리아 → 제국으로 시민권의 확대가 계속된 것 뿐이며, 특히 이탈리아인들의 시민권 획득은 로마 공화정 시기에 무려 내전을 겪고 나서 가능했는데 안토니누스 칙령으로 평화적으로 이루어졌다. 칙령 발표 이후 로마 제국 영내의 모든 주민은 자신이 로마인이라 생각하게 되었으며 이는 제국이 위기에 쳐했을 때 속주들이 떨어져 나가지 않게 되는 중요한 원인이 된다. 경제적 관점으로도, 카시우스의 주장만큼 억지로 세수를 늘릴 필요가 없었다는 고고학적 증거가 등장하고 기존 세금체계를 개혁할 필요가 있었다는 등 안토니누스 칙령을 당시 제국에 필요한 개혁을 수행한 것으로 보는 학자들도 많다.

칙령이 급격한 변화가 아니고 제국 내의 시민 비율이 늘어나고 직접세 또한 시민에게까지 보편화되는 흐름을 반영했을 뿐이라는 설도 있다. 한 예로,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 콤모두스) 시기에 이미 로마 시민권을 받더라도 납세의 의무는 그대로 유지되는 경우를 발견할 수 있다.(Tabula Banasitana) 어느 시기부터인가 (늦어도 2세기) 시민권을 받더라도 속주세가 면제되지 않았다.

비(非) 로마 시민들은 기존의 세금 뿐만 아니라 로마 시민의 세금까지 내야했으므로 세금이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늘었다.[36] 모든 속주민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는 칙령의 규모에 비해 동시대인들의 언급이나 영향에 대한 정황 증거가 의외로 적은 편이기도 하다.

군사적으로는 로마 시민으로 지원조건이 제약되었던 레기온이 제정 중기를 넘어서면서 약체화되고 군인 지원자의 대부분을 차지한 변경 속주민과 보조병의 아들들이 보조병으로 쏠리면서[37]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책이었다는 설이 있다. 레기온과 보조병의 구분은 이후로도 갈수록 흐려져 전제정 시대의 리미타네이 - 코미타텐세스 구분으로 대체되는데, 안토니누스 칙령은 이러한 변화의 한 과정이라고 보기도 한다.

2.7. 기행과 황제의 전쟁

카라칼라는 과대망상에 빠진 사람처럼 행동했고, 본인 스스로를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3세로 여겨 그가 했다는 모든 것을 그대로 따라했다. 무기와 갑옷 등이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가 입었거나 이를 모티브 삼아 만들었다면, 거액을 들여 사들이게 했다. 사생활 역시 콤모두스가 망가진 이후 보여준 것처럼 사치스럽게 변했고, 카라칼라 곁에는 권세를 위해 아부하는 무리로 넘쳐 났다. 디오에 따르면, 카라칼라는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한 군인들에게 엄청난 선물을 내리고 아첨을 한 이들을 불러 선물을 하사했다고 한다. 그래서 집정관 율리우스 파울루스는 카라칼라 앞에서 대놓고 이런 행태를 지적하고 황제와 그 무리가 어릿광대 같다는 쓴소리를 했다고 한다. 이 말을 듣자 카라칼라는 머리 끝까지 열받아, 그를 구금하도록 명령한 뒤, 당장 머리를 베어버리겠다고 협박했다. 카라칼라는 파울루스를 진짜 죽이려고 했는데, 파울루스는 무장한 경비병들의 감시 아래 강금된 상황에서도, 카라칼라의 황제답지 못한 모습을 지적하면서 계속 조롱을 퍼부었다. 그래서 경비병들조차 놀랐는데, 더 열받은 카라칼라가 칼을 빼고 죽이려고 하자 "예, 예. 그렇게 해보시지요. 그런데 그렇게 하면 당신도, 저도 모두 죽게 될 겁니다."라며 조금도 주눅들지 않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에 카라칼라는 어이가 없다며 껄껄 웃더니 그를 풀어줬고, 이후 어떤 보복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심기를 건들면 목이 날아갔다.

카라칼라는 막대한 돈이 필요했고, 병사들의 충성을 얻기 위해 부자들은 막대한 재물을 그에게 상납하라고 강요했다. 조금이라도 부를 축적하면 연례행사처럼 삥을 뜯었고, 황제 측근들에게 내려진 선물 역시 그들에게서 강탈한 재물로 구입해 충당했다. 이에 신흥귀족으로 엄청난 부를 쌓은 문예 후원가 고르디아누스 1세는 일시적으로 은퇴하는 척 하고는, 《안토니니아스》로 알려진 카라칼라 찬송 장편서사시를 손수 저술해 위기를 넘겼다.

일반 병사들에게 제 기분에 따라 보너스를 즉석에서 내리거나 혹독한 처벌을 지시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카라칼라는 어느날 스스로 멧돼지 100마리를 활로 쏘고 칼, 창으로 사냥하는 묘기를 보여줬다고 하며, 전차 기수로 데뷔해 청색당을 상징하는 파란색 옷을 입고 전차를 몰기도 했다. 또 어느날에는, 자신이 꿈속에서 태양신이 몰던 전차 운전기술을 전수받았다면서 이를 시연하는 것을 공개했다고 한다. 이 모습은 말년의 콤모두스가 완전히 정신이 나간 나머지 스스로를 헤라클레스의 환생이며, 무적의 검투사이자 최고의 전차 기수로 생각했던 것과 묘하게 비슷했다.

더 큰 문제는 카라칼라의 분노 조절과 종잡을 수 없는 변덕이었다. 디오에 따르면 이는 어머니 율리아 돔나에게서 물려받은 시리아인들의 잔혹함 때문이라고 하는데, 디오의 주장이 편향적이고 과장적이긴 해도 카라칼라의 만행은 로마인들을 벌벌 떨게 했다. 여느 황제도 하지 않던 행동들, 가령 콜로세움에서 경기가 열리면 동냥을 하려고 온 빈민들에게 호된 채찍질을 해서 모조리 쫓아내라고 명령했다. 황제가 원로원과 부자들을 협박해 내기를 강요한 다음, 게임에서 진 사람들을 경기장으로 내보내 굴욕을 줬다. 이때의 일에 대해, 디오는 카라칼라가 내기에서 진 사람들을 경기장으로 내려보내면서 거지 복장을 입게 하고, 동냥하는 연기를 하게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관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들이 관객들에게 노예들이나 할 법한 충성 맹세를 하도록 강요하고 채찍질까지 퍼부어 모욕감을 줬다. 당연한 말인데, 카라칼라는 이를 흡족해하며 지켜봤다.

이렇게 되니 213년 초, 카라칼라는 더 이상 로마에 머무르기 불편했다. 로마 전체는 그를 증오했다. 원로원과 부자, 장교, 일반 병사 중 양심 있는 이들은 카라칼라라면 이를 갈았다. 주변 동맹국 부족장들과 아르메니아 왕도 알았을 정도로 카라칼라의 잔혹함과 기행은 유명했다. 다행이라면 아버지 생전부터 장인 플라우티아누스를 작살낼 때부터 함께해온 측근 무리가 그를 지켜주고 있었고, 어머니 돔나는 카라칼라가 내치를 방치한 것을 모두 처리해 나라는 어느 정도 괜찮게 굴러갔다.

결국 로마에 머무르기 불편했던 카라칼라는 게르마니아 변경 지역을 향해 떠났다. 물론 카라칼라가 이렇게 전쟁과 모험을 함께 한 진짜 이유는 자신의 우상 알렉산드로스 대왕처럼 무용담을 직접 선보이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마차를 타고 가는 대신 병사들과 나란히 행군하고, 로마에서 특별히 수송해온 고급 음식 대신 평범한 현지 음식을 먹었다. 이런 모습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부하들과 격 없이 지냈다는 일화을 모방한 것인데, 젊은 황제의 이런 모습을 본 군인들은 황제가 솔직하고 소탈하다고 생각해 좋아했다. 원정 중 하루는 자신의 보릿가루를 직접 갈기까지 했다. 물론 군대에 대한 지원이 결코 사사로운 생각 없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단독으로 황제가 되자마자 자신을 지켜줄 수 있던 유일한 집단인 군대에 특혜를 베풀었고, 일반 병사들에게는 국고가 감당하지 못할 제안을 해 마구잡이로 하사했다. 따라서 카라칼라는 군사들의 급료를 최소 50%로 대폭 인상해줬는데, 이 일로 인해 매년 국고에서 7천만 세스테르티우스라는 막대한 비용이 빠져나갔다. 이것은 제국의 재정에 어마어마한 타격을 준 건 절대 아니었다. 왜냐하면 병사들의 임금 지불은 당시 로마 국고에서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황제가 측근들과 일반 병사들에게 제 기분에 따라 마구잡이 하사한 사치품 선물은 국고에 점점 부담이 가게 됐다.

213년 여름, 로마는 아그리 데쿠마테스(Agri Decumates) 지역과 라인란트 국경 양쪽에서 게르만 부족들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원로원은 이러한 승리에 감동하여 카라칼라에게 게르마니쿠스 막시무스 칭호를 수여했으며, 게르마니아 방벽을 넘어선 예방전쟁을 통해 원로원으로부터 파카토르 오르비스(Pacator Orbis)[38]라는 존칭을 얻었다. 하지만 카라칼라는 이런 존칭을 받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원로원에게 자신을 위한 금으로 만든 왕관을 바칠 것을 명령했다.

2.8. 동부 순행과 알렉산드리아 학살

카라칼라는 다누비우스 강을 따라 있는 수비대 진영의 문제를 처리한 후, 마케도니아 국경의 트라키아로 내려가 즉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되었다.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마케도니아인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그는 영웅의 동상과 그림을 모든 도시에서 공개적으로 전시하도록 명령했다. 그는 원로원 의사당, 나머지 신전, 실제로 로마 전체를 자신이 두 번째 알렉산드로스임을 암시하는 조각상과 그림으로 가득 채웠다.
헤로디아누스

카라칼라는 어쨌든 많이 비교되는 콤모두스와 달리 자신이 로마군 최고 사령관이라는 직책을 자각했기에 군사적으로도 대 게르만족 전선에서 상당한 전과가 있었으며[39] 기동대(벡실라티오네스)와 수비대를 분리하여 종심 방어적인 전략 사고를 도입하는 것도 그였고 이는 이후 로마 제국 방어 전략의 표준으로 자리잡았다.

이듬해(214), 카라칼라와 수행원들은 동쪽으로 길을 떠나 다키아와 트라키아를 거쳐 소아시아로 들어갔다. 그가 갑자기 알렉산드로스 대제가 되어 온갖 다양한 방법으로 대왕을 새롭게 기리게 된 것은 트라키아를 통과할 때였다고 한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카라칼라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흉내내서 여러 마리의 코끼리를 수행원들과 함께 다니게 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 학파의 철학자들을 처형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알렉산드로스의 죽음에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는 또 로마와 다른 도시들에 알렉산드로스의 시신을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카라칼라의 영웅 숭배는 극에 달했고 그는 알렉산드로스 대제와 자신의 얼굴을 반씩 조합한 두상을 그리게 했다. 따라서 이를 본 헤로디아누스는 이 두상이 본인을 비롯한 로마인들에게 우스꽝스럽고 괴이해보였다고 묘사하고 있다.

디오와 헤로디아누스의 기록 모두에 따르면, 이렇게 시작된 기행은 카라칼라가 옛 마케도니아 왕국 본토에 머무를 때부터 본격화됐다고 한다. 카라칼라는 곳곳에 우스꽝스러운 초상화[40]을 설치하도록 명령하고 마케도니아 왕국 스타일의 복장을 입고, 머리에는 태양관을 쓰고, 짧은 마케도니아식 장화를 신고 돌아다녔다. 이때 그는 마케도니아 출신 청년들을 모아 마케도니아 팔랑크스라는 이름의 부대를 만들고, 이 부대 장교는 옛 마케도니아 왕국의 유명하거나 이름난 장군들의 이름을 가진 이들로 가득 채웠다. 마케도니아 출신이라면 막대한 선물이 하사됐고, 그들은 카라칼라의 총애를 받았다.

이는 마케도니아, 트라키아를 지나 그리스 본토로 갔을 때도 계속 되었다. 그는 스파르타에 들어온 순간, 이곳 젊은이들을 차출해 라코니안, 피타나테 대대라는 부대를 만들어 옛 스파르타식 복장을 입혀 데리고 다녔다. 이후 트로이가 있다는 지역을 지날 때에는 마치 그리스 영웅을 기린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했던 일정을 그대로 따라했다. 물론 이 당시 카라칼라는 잠을 자다가 옛 영웅들과 대화를 하고 그들에게서 자신이 받고 있던 저주를 풀 치료법을 들었다면서, 페르가몬을 들린 뒤 치료를 받고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페르가몬을 지나 트로이로 향하면서, 카라칼라는 페르가몬에서 받은 치료법 대로 환청, 환각, 발기부전 고통을 치유했는데, 호전은 없었다.

첫 동부 순행 여정의 절정은 트로이에서의 일정이었다. 알렉산드로스가 그랬듯, 그는 폐허가 된 도시를 속속 돌아다녔고, 일리움의 유적지와 아킬레우스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을 찾아가 그곳을 화환과 꽃으로 장식했다. 그들이 일리움에 머무는 동안 수행원 중 황제의 친구인 황제 개인 비서 페스투스가 급사했다. 헤로디아누스에 따르면, 독살 이야기도 돌았다고 하는데, 멀쩡했던 친구 페스투스가 갑자기 죽자 카라칼라는 호메로스 아킬레우스의 친구인 파트로클로스(Patroklos)에 대해 묘사한 것을 본따서 화장용 장식을 사용해 동물 희생제를 드리며 성대한 장례식을 했다.

페스투스 장례식 당시, 카라칼라는 아킬레우스가 한 행동을 책 내용 그대로 따라했는데 이 당시 그는 게타를 죽인 이후 받은 스트레스와 고통 때문에 탈모 진행이 심해 대머리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머리숱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이 시기부터 금발 가발 머리를 착용했는데, 이때는 본인의 머리를 드러냈다. 그래서 페스투스 장례식 중 자신의 머리털에 불을 붙이는 행동을 보일 때, 주변 사람들이 속으로 낄낄 거릴 정도로 웃긴 상황을 연출했다.

트로이를 떠나기 전, 카라칼라는 얼마 없던 머리를 완전히 밀었는데, 이때 카라칼라는 자신이 평소 존경하던 로마의 장군 술라,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의 동상을 자신의 조각상 좌우에 세우라고 명령했다.

카라칼라의 여행은 다음 해에도 계속되었다. 214 ~ 215년의 겨울은 소아시아의 북서 지역에 있는 니코메디아에서 보냈지만, 215년 5월에는 이미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 도착했다. 그는 그곳에서 여름을 보냈는데, 카라칼라는 자신이 들린 도시들이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그 부하들이 건설한 터라 무척 만족스러워 했다. 헤로디아누스의 기술처럼 안티오키아 시민들이 카라칼라의 심기를 건들지 않아서 그랬던 것도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 카라칼라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갔다. 여기서 알렉산드리아 대학살이 벌어지는데, 도착 당시 그는 시민들에게 좋은 대접을 받았다.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인구는 약 50만 명으로 제국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였다. 그곳은 황제의 영웅 알렉산드로스 대제가 묻힌 곳으로 매우 특별하게 생각하는 도시였다. 카라칼라가 그곳에 가서 처음으로 한 일은 대제의 묘지를 찾아가 자줏빛 황제복과 그가 달고 있던 장식품들을 무덤 앞에 놓은 것이었다.[41]

그러나 이 시기에 알렉산드리아 사람들이[42] 카라칼라를 격노하게 만드는 어떤 사건이 발생했는데, 무슨 사건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의 목숨을 노리는 음모였을 수도 있고, 알렉산드리아 사람들이 그가 게타를 살해한 것을 비판, 또는 카라칼라와 모후인 율리아 돔나가 부적절한 관계라고 조롱했다고도 한다. 원인이 무엇이든 카라칼라는 자신을 비판한 비무장 시민들에게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잔인하게 대응했다. 황제는 도시의 젊은이들에게 거짓 약속을 한 뒤 속아서 온 비무장 시민들을 검거했으며,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을 병사들로 둘러싸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이러한 대학살은 곧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어서 비무장한 수천 명의 시민이 카라칼라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이유로 잔인하게 죽어갔다.

2.9. 니시비스 전투

카라칼라가 동부를 방문한 목적은 파르티아인들을 상대로 한 정복 전쟁이었는데 이를 니시비스 전투라고 한다. 알렉산드리아 학살 사건 이후 그는 안티오키아로 돌아와서 군대를 편성하고 전쟁을 시작했다. 원정 준비는 이미 2년 전 그가 소아시아에 있었을 때 시작되었으며 군대를 강화하고, 통신 라인을 개선했으며, 군대에 주화를 공급하기 위해 새로운 조폐국을 설립했다. 216년 초여름에 시리아 국경 지역에 집합한 군 병력은 당시로서는 대군인 8개 군단 전부 또는 일부로 구성된 상당한 규모였다. 파르티아 제국은 213년 이후, 2명의 경쟁자들이 일으킨 내란으로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에 공격하기에는 매우 적절한 타이밍이었다. 두 경쟁자 중 하나인 볼로가세스 6세는 메소포타미아 하류 지역과 수도 크테시폰을 장악했고, 다른 경쟁자 아르타바노스 4세는 이란 고원 너머 지역을 장악한 상태였다. 카라칼라는 이러한 분열된 상황을 이용하여, 아르타바노스 4세의 편을 들었고, 동맹 강화를 위해 그의 딸과 결혼하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아르타바노스 4세는 이 제안을 거부했고 카라칼라는 이를 빌미로 전쟁을 선포했다. 아르타바노스 4세가 카라칼라의 제안에 동의하여 결혼식을 주선했다가, 매복한 로마군의 습격으로 신부의 들러리를 섰던 파르티아 인사들이 대거 죽어나가고 그가 가까스로 빠져나갔다는 이야기는 후대에 카라칼라를 폭군으로 단죄하는 과정에서 지어진 이야기일 뿐이다. 그는 겨울을 보내기 위해 원정의 본부가 된, 메소포타미아 북부 도시 에데사로 가서 사냥과 전차 경주로 시간을 보내면서 다음해에 파르티아인들과의 교전에 필요한 새로운 군사 작전을 세웠으나 이 교전은 일어나지 못했다.

카라칼라가 동부에서 정복 전쟁을 벌이는 동안 황제의 목숨을 노리는 음모가 꾸며지고 있었던 것이다. 카라칼라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군대 사령관인 플라비우스 마테르니아누스(Flavius Maternianus)가 음모 소식을 알게 되었고, 카라칼라에게 서신으로 이 소식을 알리려 했지만 그의 서신은 안티오키아에서 황실의 서신을 담당하고 있는 카라칼라의 어머니 율리아 돔나에게 전해졌다. 이때 근위대장 마르쿠스 오펠리우스 마크리누스(Marcus Opelius Macrinus)가 주모자 가운데 한 명으로 의심받았다.

2.10. 암살

그러나 카라칼라가 보여준 잔인성과 난폭함, 여러 가지 악행 등의 이유 때문에 원로원 의원들은 당연히 그를 썩 좋아하지 않았으며, 일반 로마 민중들과 안토니누스 법으로 시민권을 얻게된 속주민들 역시 카라칼라의 마구잡이식 학살과 수탈에 가까운 세금 징수 탓에 카라칼라를 싫어했다. 특히, 그가 군사적, 외교적으로 많은 사고를 친 제국 동방에서는 알렉산드리아 청년 학살 사건에서 드러났듯이 여론이 당연히 최악이었다. 무엇보다 카라칼라는 성장할수록 고집이 강하고 상당히 무례한 자기 중심적인 사람이었다. 또한 분노 조절 등 감정 조절 측면에서 상당히 무절제한 사람이었고, 자신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용납하지 않던 군주였다. 이러다보니 그의 개인적, 성격적인 결함은 많은 사람들의 증오를 받게 되었고 결국 대 페르시아 원정에서 그에게 재앙으로 닥쳐온다.

카라칼라는 원정 행군 중에 뭔가 사소한 잘못을 범한 두명의 백인대장들에게 갑자기 화를 내면서 이례적으로 여러 군사들이 보는 앞에서 심하게 질책했다. 이에 앙심을 품은 두 백인대장 중 한 명인 마르티알리스는 진작부터 은근히 카라칼라를 싫어하고 황위를 넘보았던 근위대장 마크리누스에게 찾아가 황제를 죽이라고 충동질했다. 마르티알리스는 카라칼라에게 개인적인 원한이 있었는데, 헤로디아누스에 따르면 그의 형제가 입증되지 않은 혐의를 받고 며칠 전에 처형되었다고 했으며,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카라칼라가 자신을 백인대장으로 승진시켜주지 않아서 화가 나서 그랬다는 기록이 있다. 어찌 되었든 마크리누스와 마르티알리스는 둘 다 4월 8일에 에데사에서 카르헤까지 카라칼라를 동행하는 수행원단에 포함되었고 카라칼라가 위험하다고 간주하며 그를 죽이기로 결정한다. 황제는 당시 복통에 시달리고 있었고 그는 볼일을 보기 위해서 가는 길을 멈췄다. 야사에 따르면 기도를 위해 멈췄다고 하지만, 정사에 따르면 카라칼라는 기도를 위해 신전으로 이동 중이었고 이 근처에서 소변을 누기 위해 길을 멈췄다가 죽었다. 그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한 일은 소변을 누기 위해 주변에 사람을 물리게 하도록 명령한 뒤 급히 발걸음을 옮긴 일이었다. 황제가 소변을 누기 위해 멀찌감치 떨어졌기 때문에, 카라칼라 곁에는 단 한 명의 시종만 있을 뿐, 나머지 호위병들은 황제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여 등을 돌리고 있었다. 헌데 카라칼라는 소변을 누면서 마르티알리스를 불렀다. 이는 마크리누스와 마르티알리스에게 절호의 기회였다. 마크리누스의 사주를 받은 마르티알리스는 부름을 받은 척하며 앞으로 다가가서는 바지를 내리고 소변을 누던 카라칼라를 검으로 한 번에 깊이 찔렀다. 로마식 양날 단검으로 급소를 단번에 찌른 만큼, 소변을 누던 카라칼라는 그 자리에서 비명도 못 지르고 즉사했다.

결국 카라칼라는 자신이 저지른 악행만큼 최후가 매우 비참했다. 그러나 정작 카라칼라를 죽인 마르티알리스는 마크리누스에게, 황제 시해의 범인으로서 바로 즉결 처분당한다. 본디 쓰고 버리는 카드들의 용도가 다 이렇다 또는 곧바로 말을 타고 달아났으나, 카라칼라의 호위 기병이 던지는 창에 맞아 죽었다고 한다. 혹은 태양신을 참배하는 신전에서 기도 중에 살해당했다는 주장도 있다. 로마 민중들과 원로원 등 지도층 인사들에게 죄의식과 불안으로 잔인한 통치자로 평가받던 카라칼라의 삶은 이렇게 허무하게 끝났다. 그의 나이는 겨우 29살이었다.

카라칼라가 죽자 암살에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마크리누스는 자신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듯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황제의 죽음을 슬퍼했지만 물론 이는 연기였다. 그리고 마크리누스가 그를 뒤이어 황제가 된다.

카라칼라는 많은 사람들에게 증오의 대상이었지만 병사들에게는 사랑을 받았기에 시신은 정식으로 화장되었고, 유골 단지는 안티오키아의 율리아 돔나에게 전달됐다. 아들의 유해가 납골 항아리에 담겨 올 때, 율리아 돔나는 아들의 죽음과 본인 가족의 종말을 알았다. 이에 그녀는 시종들과 함께 안티오키아 사무실에 있던 모든 중요 서류와 비밀 명령 보고서를 모아 급히 불태웠다. 3일 후, 마크리누스는 동방에 주둔 중인 로마군에게 지지를 받아 옹립된 모양새로 황제가 되었다고 발표하고 황제에 올랐다. 같은 날, 돔나에게 건네진 카라칼라의 납골 단지는 다시 로마로 옮겨져 하드리아누스 영묘에 안치되었다. 이때 율리아 돔나는 남편 세베루스, 아들 카라칼라 밑에서 누린 모든 특권, 영예가 박탈되고 그들이 살아 있던 시절에 벌인 편법, 불법 행위를 이유로 안티오키아에 연금됐다. 몇 주 후, 카라칼라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아 슬픔에 빠진 율리아 돔나는 자신이 비참하게 죽을 것을 비관해, 아들 카라칼라를 따른 병사들을 모아 반격을 도모했다가 사전모의가 들통난다. 이 행동으로 율리아 돔나는 더 큰 위기에 빠진다. 돔나의 여동생 율리아 마이사의 둘째 마마이아의 남편과 마마이아의 사위, 의붓딸은 협력한 대가로 에메사로 추방됐다가 마크리누스의 명령으로 살해됐다. 이어 여동생 마이사와 조카 소아이미아스, 마마이아는 억류 후 에메사로 추방되는데, 이때 이들의 모든 재산이 압류됐다. 마크리누스는 율리아 돔나에게 더 이상 과거 같은 삶을 누릴 수 없으며, 모든 재산이 압류되었음을 알렸다. 결국 카라칼라의 어머니 율리아 돔나는 유방암을 앓아 건강이 나빠 곧 죽을 수 있다는 두려움, 본인의 모든 것이 끝났다는 비참한 현실, 하나 남은 아들의 죽음, 젊은 시절부터 누린 부귀영화가 끝났음을 깨닫고 굶어 죽는 방법으로 자살했다. 하지만 마크리누스는 이를 포장해 발표한다. 이어 그녀의 유해를 아우구스투스 영묘에 임시보관했다가 카라칼라의 납골 항아리와 함께 하드리아누스 영묘에 안치했다.

사실 카라칼라는 부친 생전 공동 황제로 재임할 당시부터 무례한 언행과 폭력을 일삼아 원로원과 제국의 중간급 장교 이상 군인들[43]들에게 증오의 대상으로 미움을 받았고, 단독 황제 시절부터는 패륜과 악행을 저질러 미움과 증오를 온 몸으로 받았다. 하지만 카라칼라가 일반 병사들에게 인기가 많은 현실도 고려해, 마크리누스와 원로원은 기록말살형에 처해지지 않는 적당한 선에서 타협한다. 그래서 카라칼라에게 황제 대우만 해주며, 그 죽음을 추모하는 선에서 마무리지었다. 이는 과거 칼리굴라 암살 당시와 묘하게 비슷했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는 "세베루스 안토니누스의 숨겨진 아들"이라는 이야기로 병사들의 지지를 받고 세베루스 왕조가 몇 달 후 재건되면서 달라진다. 이때 권력을 되찾은 이모[44] 율리아 마이사와 그녀의 외손자 엘라가발루스는 카라칼라와 모후 돔나를 신격화했다.

그렇지만 카라칼라가 워낙 원로원과 장교들, 시민들에게 증오의 대상인 탓에 초상화들은 마크리누스 생전에 원로원 눈에 보이지 않기 위해 모두 치워졌고, 카라칼라 생전 만들어진 금, 은제 초상 장신구와 조각상들도 죄다 녹여진 뒤 원상복구되지 못했다. 과거 칼리굴라처럼 황제로 인정받았음에도, 추모식이 공식적으로 없다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45]

암살 이후, 모든 로마인들에게 증오의 대상이 된 까닭에 원로원은 카라칼라의 이름이 적힌 비문에서 그 이름을 찾아내 지우거나 그 사건과 관계있는 다른 황제의 이름들로 교체시켰다. 카라칼라의 생일 등 개인 축하 기념일도 모두 철회됐고, 그가 취한 명령들 역시 복구되지 못 했다. 이는 마크리누스가 몰락하고 세베루스 왕조가 재건된 이후에도 상황이 비슷해, 세베루스 왕조의 엘라가발루스와 율리아 마이사, 율리아 소아이미아스는 카라칼라와 율리아 돔나를 신격화하는 것은 성공하고도 이들이 사실상 기록말살형에 처해진 상황과 같게 된 사회적 분위기는 되돌리지 못했다.

그럼에도 병사들 사이에서 카라칼라의 인기는 대단해, 적어도 원로원 측의 사실상의 기록말살형 조치는 군대 안에서는 온전히 성공하지 못 했다. 카라칼라는 로마제국 동쪽의 로마군에게는 진정한 군인 황제로 추앙받았다. 그 이유는 그가 병사들과 함께 먹고 자고 놀면서 지낸 까닭에 전우로 인정받음도 있지만, 마크리누스가 니시비스 전투 지휘와 이후의 굴욕 강화로 인해 죽은 카라칼라가 반사효과를 제대로 누리고, 군사적 역량에서도 확실한 눈도장을 군인들에게 재차 각인시켰기 때문이다.

3. 평가

파일:카라칼라욕.jpg
카라칼라가 세운 후 현재까지 잘 남아있는 카라칼라 목욕탕

3.1. 부정적 평가

안토니누스는 세 종족에 모두 속했다. 그리고 그는 미덕을 전혀 가지지 않았고, 그들의 모든 악덕을 모두 결합해 가지고 있었다. 갈리아인들의 변덕스러움과 비겁함, 아프리카인[46]의 가혹함과 잔혹함, 시리아인의 교활함.
디오 카시우스
이것(카라칼라의 최후)이 삶 자체가 인간성에 대한 모독이고, 그의 치세는 굴욕적으로 참기만 했던 로마인들에 대한 비난까지 불러온 폭군의 최후이다.
에드워드 기번
그는 부도덕하고 잔인했던 아버지보다도 더 잔혹했다. 그는 식탐이 있고 포도주에 중독되었다. 식솔들은 그를 싫어했으며 근위대를 제외한 모든 군사도 그를 혐오했다. 그와 동생 게타는 닮은 점이 전혀 없었다.
《로마 황제 열전》중 카라칼라의 생애, 9
고대부터 지금까지 카라칼라는 로마의 폭군이라고도 공인된 만큼 평가가 상당히 나쁘다. 당대 기록부터 지금까지 널리 알려진 역사책들을 보면, 한결같이 아주 잔인하고 난폭하며, 로마의 포악한 황제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카라칼라는 콤모두스 황제와 함께 능력이 보장되지 않는 부자 세습의 위험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제시되는 황제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안토니누스 칙령이 후대에 민주적이고 평등하다고 평가되기도 하지만 카라칼라 본인은 생애 전반에서 보여지듯 전혀 민주적인 황제가 아니었고, 헬레니즘적인 세계시민주의에 심취한 사람도 아니었다. 당대 원로원 핵심 의원이자 황제들과 직접 면담을 할 수 있던 디오 카시우스의 지적에 따르면, 안토니누스 법으로 시민권을 확대한 이유가 공공 의무를 확대하고 황실 재원을 늘리기 위해서였고, 혜택을 받았을 것 같은 속주민들은 유례없는 수탈로 신음해 민생마저 고통받게 됐다. 에드워드 기번으로 대표되는 카라칼라를 단죄하는 학자들은 카라칼라가 세금을 많이 걷기 위해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헬레니즘적인 이유 등을 내세워 시민권 확대라는 명분으로 발표한 법령 하나가 무너져 내려가던 로마 제국을 사회 전반적으로 위기로 빠뜨리게 만든, 미래를 생각도 하지 않은 최대 실책으로 평가한다.

카라칼라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그리스를 통일하고 젊은 나이에 대제국을 만든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존경했다. 그는 대왕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했고, 자신의 우상이 했다고 전해지는 것을 실제 행동으로 옮겼다. 하지만 카라칼라는 대왕처럼 자기 과시와 야망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었지만, 개인적인 매력은 전혀 없었고 독불장군처럼 행동했으며, 제 손으로 동생을 죽일 정도로 잔인성과 폭력성을 갖춰 자기절제와 분노 조절 등이 상당히 부족하다고 평가받았다. 또 아버지처럼 지나치게 원로원의 위상을 낮추고, 선군정치를 펼치면서 원로원과 민중 등 많은 이들에게 증오에 가까울 정도로 미움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동생 게타를 제 손으로 직접 찔러 죽이고, 동생의 친구들과 죄없는 로마 시민 2만여 명을 마구잡이로 죽인 이후, 군대의 급여를 2배나 인상했으며 홀로 고립되게 된 로마를 떠나 병사들과 함께 먹고 행군을 하며 전투을 치뤘다. 따라서 암살 직전 그는 다른 직업군의 사람들에게는 최악의 폭군이라고 평가받았는데, 장군 등 장교급 인사들을 제외한 일반 군인들에게는 분명히 인기가 있었던 황제였다.

그가 저지른 수많은 실책은 아무리 카라칼라가 나름 정치에 관심있어 했던 모습을 보이고, 재판에도 나름 성실히 임했다고 변호해도 가리기 어려웠다. 카라칼라가 공동황제였던 동생 게타를 살해한 이후, 2만여 명을 재판 없이 살해하면서 본국 이탈리아와 일반 로마 시민들에게 그는 역사상 가장 잔인하고 양심없는 폭군이 됐고, 군을 제외한 원로원과 로마 시민들 모두를 적으로 만들었다. 이에 그는 동생을 살해한 직후, 군대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그들의 연봉을 500데나리우스에서 750데나리우스까지 올려줬는데 이런 행동은 아슬아슬하게 안정된 국고를 순식간에 고갈시켰다. 따라서 카라칼라는 생전부터 상속세, 노예 해방세를 두 배나 인상시키고 무리하게 세금을 인상시켜 폭정을 한다고 비난받았다. 또 동방에서의 외교 실패, 파르티아 공주에게 청혼했다가 거절당한 것 등으로 제국 동방에서의 인기는 최악이 됐고, 비무장 상태의 알렉산드리아의 청년들이 자신에게 항의했다고 무고한 민중들과 함께 잔인하게 학살한 행동은 제국 전체로 퍼져나가 폭군으로 공인되기에 이른다.

이처럼 카라칼라는 기이하고 독불장군 같은 언행을 하면서 늘 적을 많이 만들었고, 자신에게 조금만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면 제아무리 비무장의 시민이라고 하더라도 자비를 베풀지 않고, 모조리 학살하는 괴행태를 저질러 당대에 이미 콤모두스 못지 않은 폭군으로 공인돼 기록됐다. 또한 카라칼라는 이전 시대의 네로처럼 후세에 폭군이라고 까이고 있음에도, 민중들에게 유쾌하고 재기발랄하며 매력적인 사람이 전혀 아니었다. 다만 카라칼라의 유년 시절을 살펴보면, 어린 시절의 그는 매력적이고 영리하며 부모를 존경하고 부모의 친구들에게 예의 바른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유년기때 그는 민중들에게 사랑받았고, 원로원 의원들에게도 인기가 있었으며 사람들의 애정을 얻을 수 있는 자신의 장점들을 더욱 발전시켜 나갔던 사람이었다고 한다. 카라칼라는 글에서도, "친절한 행위에서도 뒤쳐지지 않는 듯 보였고, 남에게 베푸는 데도 전혀 인색하지 않았으며 용서할 때에도 마지못해 하는 적이 없었다."[47]는 좋은 기록들 또한 존재한다. 그러나 이런 기록은 10대 초반의 카라칼라의 모습이었으며, 이후 그의 행동과 발언, 주변의 기록들을 보면 완전히 뒤집어진다.

부족한 자기 통제력 탓에 돌발적인 충동 제어에서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던 것 같으며,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닮고자 했던 노력과는 무관하게 제국 통치에서 오는 스트레스와 동생을 죽인 죄책감 탓에 발기 자체가 안 되는 성불구자가 되어 자식도 남기지 못하게 되고 만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카라칼라는 확연하기도 하고 은밀하기도 한 고통 때문에 몸이 아팠을 뿐 아니라, 어떤 괴로운 환영으로 고통을 받아 마음까지 병들었으며, 종종 자신이 칼을 든 아버지와 동생에게 쫒기고 있다고 생각했다." 한다. 실제로 게타를 죽인 것도 그가 황제 자리를 차지하려는 욕심 때문이 아니라 그의 극단적인 불안이 그 원인이 되었을 가능성 또한 높다. 야사에 의하면 카라칼라는 죽기 직전에 아버지가 나타나서 "네가 동생을 죽였으니 내가 너를 죽일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로마를 떠나서 군대에 함께 있을 때 가장 행복해했다. 카라칼라는 몸이 아파서 신전에서 질병 치유를 기원하기도 했지만 사실 카라칼라를 가장 괴롭힌 것은 동생을 죽인 것에 대한 죄의식과 불안감이었고 대순방 기간 동안 발생한 알렉산드리아 대학살 같은 잔인무도한 행동 뒤에는 이러한 원인이 숨어 있었다고 한다.

3.2. 재평가

카라칼라는 동시대 디오 카시우스, 헤로니아누스, 마리우스 막시무스와 4세기 저술된 위서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덕에, 최악의 폭군 중 한 명에 반드시 거론된다.

4세기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는 논외로 치고 디오, 마리우스 막시무스와 헤로디아누스만 놓고 봤을 때, 극단적인 수준으로 카라칼라를 비난하는 쪽은 원로원 중심 시각에서 본 디오와 마리우스 막시무스 쪽이었다. 다만, 마리우스 막시무스는 아버지인지 아들인지 저자가 불분명한데다 아들 마리우스 막시무스 혹은 그 후손이 문제 많은 위서 저자라는 추측이 있어 디오보다 평가가 더 안 좋다.

허나 그는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네로, 도미티아누스와 마찬가지로 현대 학계에서 나름대로 재평가되고 있다. 물론, 이 사람의 인성적 측면은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도미티아누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처럼 냉혹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보다 잔혹하고 혐오스럽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48] 이는 카라칼라의 내치 측면에 대한 재평가 역시 비슷한데, 함량 미달이라는 평은 아니더라도 재평가 뒤에도 악평은 피하지 못하고 있다.

어쨌든, 카라칼라는 과거의 악평과 달리 네로, 콤모두스 같은 암군 + 폭군 부류가 아니었다. 도리어 카라칼라는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도미티아누스 같은 황제, 즉 냉혹하고 무자비하지만 유능한 황제에 가까웠다. 왜냐하면 백번 양보해도 이 황제는 분명 한 인간으로서 보면 필요이상으로 잔혹하고 과격했으며, 이전의 어떤 로마 황제들보다 독단적이고 권위적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폭군 내지 잔인한 황제로 평가받음에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간단하다. 이미지와 달리 실제로는 제국에 일정 부분 공헌을 한 황제였기 때문이다.

부도덕스러운 잔인함과 독불장군 같은 성미와, 사치스러운 생활, 불안하고 변덕스러운 무능한 내치술과 별개로, 카라칼라는 임페라토르로서 군사적 부분에서는 상당한 책임감과 자각심을 가지고 있었다. 어쩌면 이 부분에서 그는 어떤 로마 황제들보다 독보적으로 특출났고, 그를 능가한 황제는 아우렐리아누스, 콘스탄티누스 1세 등 극소수의 천재 군인 황제들 외엔 전무하다시피했다.

카라칼라는 어릴 적부터 냉혹하기로 악명을 떨친 술라, 티베리우스, 칼리굴라를 유독 좋아했는데, 이중 술라를 진짜 좋아했다. 그 이유는 술라가 세운 군공과 뛰어난 군사적 재능 때문이었다. 다행히 카라칼라는 스키피오, 가이우스 마리우스, 술라, 카이사르, 아우렐리아누스, 프로부스 급의 군사적 재능까진 아니어도 로마 황제 중 군사적 재능이 특출난 황제였다. 어쩌면 티베리우스, 콘스탄티누스 1세처럼 군사적 재능에 있어, 평균 이상을 넘어간 인물일지도 몰랐다. 이런 까닭에 그가 세운 군사적 승리들은 당시 로마 제국의 방위에 있어 꼭 필요한 승리가 대부분이었고, 그가 일으킨 전쟁이나 방어전략은 놀라울 정도로 특출났다. 이는 전통적 입장을 가진 학자들조차 인정하는 부분인데, 카라칼라는 재위 기간 내내 제국의 서방, 동방을 오가며 게르만족을 상대로 예방전쟁을 통해 성과를 내고 파르티아를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둔 부분은 그가 친(親) 로마파 게르만족까지 싸잡아 박살냈어도 서방과 동방 일대에서 벌어질 잠재적 위기까지 조기 차단하는 효과를 가지고 왔다.

카라칼라의 여러 군공이 그의 치세기 동안 제국에 평화를 가져다 준 업적이라면, 그가 상당히 노력한 로마군 운용 개편과 군제 개혁은 제국 전체의 역사에서의 최대 업적이었다. 카라칼라의 군제 개혁과 운용 전략들은 전제정(도미나투스) 시기의 군제 개혁들의 초석을 제공했다. 이는 카라칼라가 로마 황제로 있는 동안 제국에 공헌한 가장 긍정적인 부분이다.[49] 특히 212년 안토니누스 칙령으로 시민권을 제국의 모든 남성 자유민[50]에게 처음으로 확대한 것은 고평가받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칙령으로 인해 로마인과 비로마인의 차이를 없애버림으로써 제국의 개념을 이탈리아가 지배하는 식민지가 아니라 보편제국의 형태로 강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시오노 나나미는 이 정책에 대해 비판적이지만, 적어도 이렇게 로마 시민권을 얻은 속주민들 중에 개인이 썩어서가 아닌 시민권의 브랜드가 죽어서 혹은 나라가 형편없다는 이유로 제국을 배신한 속주민은 없었다. 오히려 속주민들이 로마 시민이 되어 저항을 오랜 기간 했기 때문에 상당수 게르만 왕국들이 굳이 로마화를 자처했을 지경이었다.[51] 그리고 연구결과에 의하면 카라칼라 시대보다도 한참 뒤인 5세기 초에도 로마 시민권 자체는 여전히 로마 바깥의 야만족이나 이민족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먼 게르만족의 규모가 불어나면서 정예부대와 별개로 병력 자체는 엄청나게 필요해졌고, 시민권 취득 인원이 수백만에서 5천만으로 확대되면서 징집을 수월하게 할 수 있게 되었다.[52]

그의 시대에는 제국 밖의 상황이 이전과 크게 달라지고 있었다. 서방 국경에서는 게르만족이 상당히 강해진 상태였으며, 가까운 게르만족들과 먼 게르만족들이 끝없이 결합되고 흩어지면서 변수가 많아져 예전처럼 친(親) 로마파, 중립, 적대 세력을 구분해 방어하기 어려워진 상황이 됐다.[53] 이는 동방 국경도 비슷했다. 단독 황제 등극 직전 무렵 파르티아가 쇠락해 흔들리는 상황이 펼쳐진데다, 암살 직전 동방 순행 당시에는 파르티아 쇠락을 틈 타 사산 왕조 페르시아가 페르시아 동쪽 고원에서 일어나 왕조 교체기가 곧 벌어질 상황까지 연출됐다. 오랫동안 로마와 파르티아 사이에서 분쟁 원인이 된 아르메니아 역시 이런 흐름 속에서 줄타기 외교를 벌이며 긴장 관계를 증폭시켰다. 이는 제국 내부 상황 역시 비슷했다. 프린키파투스 체제 아래에서 황제의 국정 파트너이면서 인재풀 역할을 해야 할 원로원은 선황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노력해도 이미 그 역할을 온전히 수행하지 못 하는 집단이 된데다, 무능력하면서도 1세기, 2세기 초와 달리 (황제 입장에선) 귀족적이고 이기적인 집단으로 변질된 상태였다.[54] 더군다나 제국의 행정 관료들은 제국의 모든 사무가 전문화, 고도화된 흐름 속에서 심각한 인력난으로 업무 피로도가 심각해지고 있었다. 설상가상 제국의 한계 수익성은 이미 길게는 하드리아누스 시절부터 쭉 악화되어가고 있다가 그의 치세에 이 여파가 닥쳐왔다.

하여 카라칼라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단순하면서 쉬운 방법[55]으로 해결했다.[56] 물론 화폐 가치 절하는 인플레이션을 불러오며 제국의 경제력이 악화되었음을 나타내는 징표지만, 당장 방위 수요는 급속히 늘어나 세금 쓸 데는 빠르게 늘어나는데 화폐개혁을 하지 않는다면 군대가 유지가 안 되고, 그 결과 외적이 침입해서 영토를 까먹으며, 경제적 잠재력과 성장률이 대폭 떨어져 결국 경제는 훨씬 더욱 망가질 뿐이었다.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경제 성장이 필수였으나 농업 경제 체제 하에서 경제 성장에는 한계가 있었고, 이걸 해결하려면 외부에서 은이나 금을 가져오던가 아니면 산업혁명을 해야 하므로 카라칼라 시대로부터 최소한 1,300여 년을 더 기다려야만 했다.

다행이라면 세베루스 왕조 시대의 제국 재정은 선황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노력으로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후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 콤모두스) 시절보다 매우 양호했다. 하지만 채권이 없던 시대에서 정부의 재정이 양호하더라도 일시적 많은 지출[57]을 위해서는 금속 함유량을 줄일 수 밖에 없었다.[58] 대부분 학자들이 로마 제국 재정 부분에 대해서 서술할 때 채권이라는 개념이 없는 시대라고 적는 이유가 있다.

평가절하는 네로 황제 이후 계속 조금씩 이어졌고 3세기의 위기가 절정이었을 당시의 황제인 갈리에누스도 화폐 절하를 단행했으며, 3세기의 위기를 수습한 아우렐리아누스는 금화는 절상했지만 은화는 크게 절하시켰다. 따라서 이런 현실과 카라칼라가 세운 군공은 자칫 외세 침략으로 휘청일 제국에게 큰 힘이 됐고, 처음부터 내치 능력의 한계를 깨닫고 어머니 율리아 돔나와 아버지 시절 전문 관료들에게 내정을 전담케 한 조치는 제국의 안정으로 이어졌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이런 점을 종합해보면, 카라칼라는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실드칠 구석이 없는 폭군이었지만, 동시에 3세기 제국의 위기에서 그 돌파구를 마련해준 긍정적 공을 세운 세베루스 왕조 황제 중 그 몫이 상당히 큰 황제였고도 평할 수 있다. 당장 창건자 이후 어린 황제들이 줄줄이 집권한 세베루스 왕조의 황제들 중에서 종합적으로 보았을 때, 당대 군인들에게 가장 나은 황제는 공교롭게도 카라칼라였기 때문이다. 아니, 카라칼라보다 뛰어난 3세기 황제들도 알고 보면 몇 명 되지 않을 정도로 1인분 몫은 충분히 한 황제 중 한 명이었다. 즉, 카라칼라는 인격적 부분을 제외하자면 변화의 흐름 속에서 제국의 질서 유지에 필요한 공을 세운 군인 황제에 가까웠고, 이미지와 달리 긍정적 부분은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보다 훨씬 괜찮았다. 이런 점에서 그는 디오나 기번의 주장처럼 "제국을 강간한 잔혹한 폭군"이 아니라, 오히려 진시황 같이 폭군이되 국가에는 기여한 바가 큰 인물이라고 보는 게 맞다.

하지만 디오의 주장처럼, 카라칼라는 후대 재평가 과정에서도 분명히 행정 실무 영역에선 늘 무책임했던 황제였고, 최악이었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실제 그의 치세 기간 중 그를 대신해 내정 문제를 처리한 이는 거의 대부분 모후 율리아 돔나, 이모 율리아 마이사 부부, 파울루스와 울피아누스 등 법학자 등이 국가가 돌아갈 정도로 통제 중이었다. 원로원과의 관계, 속주 총독 관리는 수에트리우스 등이 동분서주하면서 관리해, 겨우 불만을 억누르고 있었다. 허니 카라칼라가 행정 실무 처리에 있어 늘 무책임하고 원로원을 상대할 때 늘 독단적이어도, 어머니, 이모 부부, 아버지 측근, 본인 친구 중 능력 있는 인사들의 도움으로 콤모두스처럼 내정을 개판으로 만든 폭군과는 다른 폭군이라고 봐야 한다. 다시 말하면 그는 과격하고 잔인했어도, 늘 어머니 돔나의 뜻대로 행동해줬고 아버지 세베루스가 내린 결정을 뒤집는 멍청한 행동을 벌이지 않았다. 이런 점을 보면, 카라칼라와 비교해 행정적 측면에선 월등하나 그 외적으로는 냉혹하고 자기 과시적인 칼리굴라처럼 불법은 피하고 냉혹한 통치술 아래 선대에게 받은 기반으로 통제한 독단적 황제에 가깝다는 평을 듣는다.

따라서 그는 1세기의 칼리굴라처럼, 민심에 꽤 신경을 쓴 황제였다. 다시 말하면, 원로원과의 관계가 211년 이후 늘 험악했어도, 재위 기간 내내 제국에 해를 입힌 황제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 점에서 보면 그는 논쟁이 계속되는《안토니누스 칙령》역시 디오의 주장처럼 마냥 해를 끼친 결정까진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후세 학자들의 말처럼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도미티아누스와 마찬가지로 결점이 있다고 해도 마냥 비난받기엔 무리가 있는, 본인 역시 꽤 괜찮은 통찰력과 위엄을 갖춘 황제였다고 평할 수 있다. 왜냐하면 주변을 믿으면서 자신의 결점과 한계를 황실 세력, 측근, 전문 관료에게 일임한 결단과 공로는 네로, 콤모두스, 엘라가발루스 등 폭군과 암군 기질을 가진 황제들과는 질적으로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다만, 주의할 것이 있다면 카라칼라가 재평가 중이라고 해도 그 잔혹함과 군사적 업적, 군제 개혁 외적인 부분, 즉 내치와 행정적 역량으론 함께 비교되는 칼리굴라보다도 최악이었다는 평을 알아둬야 한다. 왜냐하면 내치적 측면에선 짧게 집권한 칼리굴라는 현대 재평가에서 드러나듯, 내치와 행정 측면에선 놀라울 만큼, 그 공로가 많고, 칼리굴라의 행정, 황제권 강화 조치들은 놀라울 만큼 공이 있었기 때문이다.

카라칼라의 단독 통치기는 황제의 극단적인 불안함과 변덕스러움 속에서 진행됐고, 그가 취한 민생 정책, 경제 정책, 문화 진흥책 등은 세베루스 생전에 내려진 것이거나 집행 중 명령권자 이름만 카라칼라의 것으로 바꾼 것이 많았다. 그는 단독 통치기 내내 군사 활동 외적으로, 측근 관리와 국고 관리 모두 목적 없는 빵점짜리 황제였다. 이 외에도 그는 여러 승리와 군사적 활동에도 로마군 중간지휘체계 붕괴 속에서 이 개혁을 소홀히 하고, 부친의 군대 처우 개산 조치의 기본 틀을 망가뜨린 부분 등 쉴드를 칠 부분이 적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설상가상 그의 시대 때부터 히스파니아 출신의 내시 셈프로니우스 루푸스 같은 과거의 클레안데르 같은 이들이 출현하고, 아버지 세베루스가 한바탕 피바람을 일으켜 겨우 정리한 궁전과 황궁 내 부정부패가 카라칼라 시대부터 다시 도래했다. 세베루스 왕조의 단명 원인 중 하나인, 황제 주변의 "친구" 집단이 공식적 지위를 넘어 편법 아래 프라이토리아니, 로마군 지휘 계급들의 통제를 잃게 된 것도 카라칼라 대에 시작되고 심화됐다는 부분도 재평가론자들에게도 여지없이 비난받고 있다. 다만, 후대 황제들도 특정인의 개인 카리스마에 의존하는 체제 아래, 실패했다는 점에서 카라칼라만 욕을 먹는 것이 과하다는 참작 여지가 있다. 다만, 이 역시 후대의 아우렐리아누스 황제가 비리, 횡령 등을 벌인 이들을 기마대까지 동원해 수천명을 학살한 부분, 타키투스와 프로부스 대의 핵심 부패 관료 처형과 분명 달랐고, 카라칼라가 그들을 비호했다는 점에서 그 차이가 있음은 간과하면 아니된다. 허니 카라칼라는 명암 속에서 결국 제국은 망할 때까지 부패로 고통받게 된 측면에서 공과가 있는 폭군이라고 재평가 중이다.

4. 성격, 외모

  • 어린 시절부터 마케도니아 알렉산드로스 3세를 동경해 그 스타일을 추구했으며 본인 만의 패션 스타일도 확실했다고 한다. 따라서 별명 카라칼라에서 드러나듯, 갈리아 내 켈트족, 게르만족들이 착용한 고대 켈트 스타일 망토 카라칼루스를 변형해 입고 다녔고 선호했으며 모든 부분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많이 따라했다. 이에 관해, 동시대 로마인 헤로디아누스는 카라칼라가 동방에서 금발머리 가발을 쓰고 카라칼루스를 입고 다닌 탓에, 북방에서 온 듯한 이국적 느낌을 풍겼다고 기술했다.
  • 제우스가 연상되는 곱슬거리면서도 정제된 머리스타일, 길고 숱이 많은 수염, 경건한 표정 등을 공식 초상화로 내세운 부친, 동생과 달리 초상화부터 동전 초상화까지 지극히 현실적인 스타일을 선호했으며 군인황제다운 강인한 이미지를 강조했다. 그런데 공식이미지상 추구하는 외모와 스타일처럼 실제 성격 역시 상남자 그 자체였다고 한다. 이는 디오 카시우스가 남긴 기록 곳곳에서 살펴볼 수 있는데, 카라칼라는 성인 이전부터 다혈질이었고 화를 내면 일부러 잔인한 표정을 짓고 이를 상대에서 보여줬다고 한다. 그를 싫어한 디오를 생각해보면 잔인한 표정에 관해 온전히 해석하긴 곤란하지만, 이런 성격은 동시대 디오, 헤로디아누스에게 평가가 최악이 된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일반 병사들에게 카라칼라는 군인황제로서 강한 매력이 있었고, 자존심 강하고 직설적인 성격 탓에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래서 카라칼라의 공식 조각상과 동전 도안에서 나타난 '짧게 자른 머리+인상 쓴 표정+짧은 수염' 이미지는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같은 순수 군인 출신 황제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 아버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당대 로마인 기준으로도 작은 키였는데, 카라칼라 역시 키가 크지 않았다. 그래서 동시대 원로원 의원, 장군, 총독이었던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로마인들에게 워낙 성정이 거칠고 잔혹한데다 폭력적인 이유 등으로 인해 '타라우타스'로 많이 불렸다고 한다. 타라우타스는 이 당시 로마에서 가장 유명한, 매우 폭력적인 검투사로 키가 작았다.
  • 알렉산드로스 대왕를 존경했지만, 본받을 만한 로마인으로는 티베리우스, 가이우스(칼리굴라), 술라를 대놓고 언급해 이 부분에서 여러 로마인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이는 카라칼라가 세 사람과 상당히 비슷했다는 점에서 놀랍지 않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당대 로마인들에게 세 사람은 "유능한 측면이 있지만 냉혹하고 변덕스러운 냉혈한"인 터라 자연스레 카라칼라가 미움을 받게 된 원인이 됐다. 카라칼라는 소년 시절부터 침이 마르도록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모든 업적을 찬양했고, 공개 모임에서는 티베리우스와 가이우스, 술라가 냉혹하더라도 과감했고 유능했다고 대놓고 언급했다. 따라서 원로원 의원들은 이런 카라칼라를 아버지보다 더 교만하고 냉혹하며 야만스럽다고 깠고, 동생 게타와 달리 지나칠 정도로 예의없고 거만하다고 미워했다.
  • 동생 게타 지지자들을 살해할 때, 제 손으로 동생을 직접 찔러 죽이고 트라세아 프리스쿠스는 자신 앞에서 죽이고 목을 즉각 자르도록 명해 게타 지지자로 몰리면 살생부 명단에 올린 이들은 그 공포감으로 벌벌 떨었다고 한다. 하여 사촌 셉티미우스 아페르와 그 아내는 자신들이 카라칼라를 적극적으로 지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숙청 대상이 됐다는 말을 듣자마자 집에서 뛰어내려 목이 부러져 죽었다고 하며, 파피니아누스의 아들은 자기 아버지가 트라세아가 죽을 때 도끼에 머리가 쪼개져 죽고 머리가 효수되자 겁먹어 도망치다가 죽었다고 한다.
  • 디오, 헤로디아누스 등에 따르면, 로마 제국의 여러 출신 사람 중 오늘날의 그리스 북부와 중부 일부인 마케도니아 속주 출신들을 유독 좋아하고 그들에게만은 상당히 친절했다고 한다. 따라서 마케도니아 출신 로마인들을 만나 그 이름을 예의를 갖춰 물어본 뒤, 그들의 이름이 안티고노스, 알렉산드로스, 필리포스라는 것을 들으면 이를 확인한 다음 그들에게 상을 내렸고, 그들이 원로원 의원일 경우에는 법무관에 추천해 당선시키거나 전직법무관 자격을 수여하면서 원로원 의원에 임명하기도 했다.

5. 여담

  • 미술학도라면 누구나 친숙하게 느낄 석고상 카라칼라는 바로 그의 흉상을 모델로 한 것이다.
  • 아이러니한 것은 카라칼라의 치세를 지속적으로 생각나게 하는 것은 시민권의 확대도 악명 높은 그의 잔혹성도 아닌, 바로 그가 로마에 세운 거대한 욕장이다. 카라칼라는 거대 목욕탕과 같은 문화 시설들을 건립했는데, 오늘날 남아있는 욕장은 그 유적지만으로도 로마 제국의 강력한 힘을 보여주는 가장 인상적인 기념비 가운데 하나로 자리매김하고 있으며, 그가 로마에 남긴 공공 건축물 가운데 가장 잘 알려져 있다. 당대에는 안토니누스 욕장, 현재는 테르메 디 카라칼라(카라칼라 욕장)이라고 부르는 이 대형 욕장의 '켈라 솔리아리스' 부분은 돔 지붕 전체가 청동이나 구리 격자로 지지되어 있어, 크기가 얼마나 방대한지 역학에 조예가 깊은 건축가들도 그와 같은 방식으로는 지을 수 없다고 단언했다고 한다.
  • 통치 초기 존속살해 이후 저주를 씻겠다며, 치유의 신 세라피스를 제국 차원에서 지원하고 모시겠다며 공들였다. 그래서 212년 이후부터 발행된 주화들을 보면, 카라칼라 시대 동안 황제와 세베루스 가문 차원에서 세라피스를 극진히 모신 흔적이 드러난다.
  • 동생 게타에 대한 증오심이 대단했다. 따라서 게타를 죽인 직후, 동생의 선혈이 묻은 양날 검을 스폴리아 오피마 수준의 신격화된 무기로 삼아 이를 세라피스 신에게 복수와 치유의 재물로 바쳤다.

[1] 브리타니아 열왕사를 따른 대수 [2] 황제의 공문서상의 정식 휘는 세베루스 안토니누스. [3] 카라칼라의 초상들은 종종 성이 난듯 찌푸린 표정의 불독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거친 군인의 이미지는 마치 신과 같은 존재로 황제를 묘사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마지막 조상들에 대한 일종의 반발이었다. [4] 현 프랑스 리옹. [5] 204년 여름에 태어났다고 하며, 영아기때 죽었다. 어머니는 풀비아 플라우틸라. [6] 아버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사후, 바꾼 추가 제호이자 사망 당시까지 사용한 공식 이름이다. [7] 동시대 원로원 의원 디오 카시우스 기록 중 79권 말미에 카라칼라가 암살된 직후 로마 시민들이 일제히 축제 분위기에 빠진 채 소리쳤다면서 그를 지칭한 별명으로 언급된 것이다. [8] 카라칼라의 키가 로마인 남성 평균보다 머리 반절 이상이 작고, 못생긴데다, 성정이 거칠고 잔혹하며 폭력적인 점 때문에 로마서민들이 지어준 별명이다. 타라우타스는 당대 로마의 검투사 중 매우 폭력적인 검투사로 플레이 스타일이 잔혹하기로 유명했는데, 키가 카라칼라처럼 작고 고집불통 같이 생기면서도 못생긴 사람으로 이런 행실이 문제가 되어 살해됐다고 한다. [9] 유념할 점은 칼리굴라의 경우, 후대 로마인과 사가들에게 동명이인의 외삼촌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구분하기 위해 살아생전 그토록 싫어한 별명이 사후 그 통칭이 된 케이스이다. 따라서 필로, 세네카, 요세푸스, 대 플리니우스, 타키투스, 수에토니우스, 디오 등은 이 황제를 가이우스, 가이우스 카이사르, 가이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로 부르고 있으며, 칼리굴라는 비공식 별칭이나 본인과 그 가문에겐 멸칭과 똑같다고 기술하고 있다. [10] 고대 로마에서 두 번째로 큰 목욕 시설이다. [11] 오늘날의 프랑스 리옹 [12] 신격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13] 뜻은 들판 형제 사제단으로, 고대 로마의 사제회 중 하나다. [14] 아버지 마리우스 막시무스라면 동시대 사람이, 아들 마리우스 막시무스라면 동명이인의 아버지에게 카라칼라 시절 일화를 듣고 기록한 것이 된다. [15] 특히 마리우스 막시무스를 중심으로 한 아프리카 출신 원로원 의원 [16] 이는 게타가 성인이 된 뒤, 수염을 멋지게 기른 모습을 묘사한 흉상에서도 확연히 확인된다. 카라칼라가 부수라고 명했지만 유일하게 남은 작품인데, 부모의 장점만 쏙 뺀 모습이 상당히 인상적이라는 평을 듣는다. [17] 형에 대한 무례해보인 태도 [18] 플라우티아누스의 손녀 [19] 고대기록 주장과 달리, 카라칼라가 장모, 처남의 남은 일가까지 모조리 죽인 것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는 세베루스 시대의 여러 비문과 디오의 주장에서 확인되는데, 카라칼라의 명령으로 체포 즉시 교살된 이는 플라우티아누스와 그 장남이었고, 다른 가족들은 세베루스와 돔나의 명령으로 시칠리아로 추방되는 선에서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20] 현재의 영국 요크 [21] 오늘날 영국의 수도 런던 [22] 한마디로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동생을 죽인 것도 모자라 수틀리면 어머니도 죽이겠다고 협박한 것이다. 이정도면 패륜을 넘어서 막장 그 자체다. [23] 다행히 수염을 기른 상태의 게타 조각상이 극소수나마 남아 있는데, 확실히 형보다 아버지 외모와 비슷한 모습이다. [24] 세베루스 일가의 초상화인데, 카라칼라는 동생을 죽인 뒤, 왼쪽 하단에 그려진 동생의 얼굴을 지우게 했다. [25] 실제로 존속살해를 저지른 범죄자들이 이런 정신적 고통을 심하게 겪는다. 그래서 교도소나 출소 후에 자살하는 사람까지 있을 정도. [26] 아버지 생전부터 수에트리우스 사비누스가 세베루스 황제와 카라칼라 총애 아래 승승장구했음에도, 고명대신이며 외가 친척 어른인 파피니아누스, 육촌뻘 친가 어른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아페르 같은 원로급 주요 인사들은 중립 내지 반(反) 카라칼라 움직임을 내보였다. 왜냐하면 법적, 인륜적으로 카라칼라의 행동은 어느 황제들도 하지 않은 최악으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27] 게타와 그 지지자들 [28] 군인들은 세베루스 황제와 닮은 게타를 더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제2 파르티카 군단은 대놓고 불만을 표시했다. [29] 영화 《 글래디에이터》에서 나오는 루시우스 왕자의 실제 인물이다. [30] 특히나 아무 죄도 없는 동생을 자신이 싫어하는 이유 하나만으로 어머니 앞에서 살해한 패륜 행위는 당시로서도 좋게 볼 수 없는 악행이었다. [31] 상속세 공제범위도 없어지고 무조건 내게 바뀌었다. [32] 후대에 편의상 붙은 명칭으로, 당대에 불린 이름과는 다르다고 추정된다. [33] 학계 다수설이지만 확실한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34] 처음으로 안토니니아누스의 명칭과 평가절하를 의미하는 2데나리우스 교환비를 제시했다. [35] Money, Currency and Crisis: In Search of Trust, 2000 BC to AD 2000, edited by R.J. van der Spek and Bas van Leeuwen, Routledge, 2018 - p.24 [36] 물론 로마와 이탈리아 주민들은 계속 혜택을 받았다. 다만 이탈리아의 특혜는 세베루스 황제 때 변화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하고 아우렐리아누스 황제 때 크게 바뀌었으며 최종적으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시기에 다른 속주와 같아진다. [37] 이렇게 된 이유는 로마 시민권을 갖고 있긴 했으나 엄연히 자신의 부족에 생활 기반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로마 시민이면서도 부족의 일원이었던 것. [38] 지상에 평화를 가져온 자 [39] 라인 강 도나우 강을 잇는 게르마니아 방벽을 보수하고 선제 공격을 감행해 게르만족에게 제법 타격을 줬다. 카라칼라 황제의 방어선 손질로 20여 년간 북방 게르만 전선은 평온했다. [40] 카라칼라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얼굴과 몸이 하나가 된 조각상 [41] 카라칼라는 알렉산드로스 대제의 시신을 본 마지막 황제로 알려져있다. [42] 당시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은 스스로를 특권층이라 생각해서인지 자부심이 강했고 황제들에게 할 말은 다 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사실 알렉산드리아는 로마 이전의 지배자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절부터 걸핏하면 시민들이 폭동을 일으키는 것으로 유명할 만큼, 도시의 치안이 굉장히 불안했다. 심지어 로마의 최전성기인 트라야누스 황제 시절인 서기 116년 알렉산드리아에 살던 그리스인들이 폭동을 일으켜 수많은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ㅡ 출처: 한 권으로 보는 이집트 역사 100장면 / 손주영, 송경근 지음 / 가람기획 / 210 ~ 213쪽 [43] 이들은 황제를 잘 모르는 병사들과 달리 식견이 있는터라 카라칼라가 저지른 패륜과 악행을 좋아할리가 없었다. [44] 어머니 돔나의 여동생 [45] 정치적으로는 칼리굴라와 비슷한 평을 받았다고 해도, 카라칼라에 대한 일반 로마 사회에서의 평은 칼리굴라와 달리 카라칼라는 최악이었다. 이에 대해 디오 카시우스는 카라칼라가 소변을 누다가 마르티알리스 손에 암살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원로원 뿐만 아니라 거리의 사람들까지 기뻐하면서 축제인양 환호성을 지르고 난리가 났다고 한다. 이는 원로원에게 똑같이 증오의 대상이 된 칼리굴라가 원로원 일부와 공모한 암살자들 손에 피살된 칼리굴라 암살 사건과 다른 모습이었다. 왜냐하면 칼리굴라는 원로원에게 미움을 받았더라도, 카라칼라와 달리 일반 서민에게는 그들이 재판장에서 억울함을 당하지 않게 해주고, 여러 조치와 불우했던 성장 배경 등 때문에 동정심과 지지는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칼리굴라가 암살될 당시, 일반 서민들이 게르만족 경비대와 별도로 따로 군중이 되어, 클라우디우스 1세 베스파시아누스를 시켜 민심을 완전히 달랠 때까지의 거의 3개월 동안, 암살자 처벌 시위와 함께 원로원 의원을 겨냥한 일부 군중들의 공격이 끊이지 않아, 용의 선상에 오른 원로원 의원들과 암살범 가족들이 민중들에게 맞아 죽는 일까지 벌어졌다. [46] 오늘날 북아프리카 알제리, 모로코, 튀니지 [47] 《로마 황제 열전》중 <카라칼라의 생애> 1 [48] 카라칼라가 이렇게 평가받은 이유는, 제 손으로 친동생을 죽이고 장인과 처남을 자기가 보는 앞에서 교살하게 하고 확인하는 등, 필요 이상으로 잔혹했기 때문이다. [49] 파르티아의 중장기병을 상대하기 위해서 대규모 팔랑크스 부대를 훈련시키도 했다. 디오 카시우스에 의하면 마케도니아인 1만 6천 명으로만 구성된 팔랑크스를 편성하고 알렉산드로스 시대의 장비로 무장시켰다. 이 팔랑크스가 마케도니아식 장창병인지 트리아리식의 일반 창병, 또는 기존 로마군 진형의 다른 이름인지는 이견이 많다. # [50] 물론 노예는 빼야한다. [51] 구(舊) 서로마의 독립 왕국들도 대부분 공식적으로는 동로마 신하이자 로마의 일부를 자처했고, 로마 시민 출신들을 상당수 요직에 기용하였다. 이들이 대놓고 독립에 나선 건 동로마 제국의 영향력이 악화되고 서방에 대한 개입을 포기했음이 명백해진 이후의 일이다. [52] 물론 질적 수준은 내려가지만 이건 제국의 경제력이 개판된 것이 더 컸다. 진법 유지를 위한 훈련도, 창칼 제조도 돈이 있어야 하는 것이며, 애초에 안토니누스 법으로 시민권을 확대하지 않았다 쳐도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53] 따라서 카라칼라는 게르만족과 전쟁을 할 때, 눈 앞에 게르만족들이 보이기만 하면 전투 태세를 지시내린 뒤 약간의 낌새만 있어도 친(親) 로마파 게르만족 부락까지 박살내는 방식으로 전쟁을 벌였다. [54] 이렇게 원로원이 행동한 이유 중 하나는 그들과 세베루스 가문 사이가 냉랭한데다, 그 주류인 푸닉, 지중해 동부 출신들이 카라칼라와 게타 중 게타 편 인사가 많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55] 세금을 올리고 화폐의 질을 낮추는 것 [56] 금화인 아우레우스의 무게를 1/45 리브라에서 1/50 리브라로 10% 낮추고, 데나리우스는 1/96 리브라에서 1/108 리브라로 12.5% 낮추며(은 92% → 70%), 2데나리우스에 상당하는 안토니니아누스를 신설하여 그 무게는 1/60, 즉 2/120 리브라로 했다.(20% 절하 + 은 72% → 은 50%/동 50%) [57] 전쟁 비용, 하사금 [58] 초기 원수정 시대에 엄청나게 금화, 은화를 생산하던 금광들은 오현제 시대부터 점점 생산량이 줄어들고 있었기 때문에 초기 원수정 시대처럼 엄청난 귀금속의 공급을 기대하기 힘든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