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8 21:36:07

알렉시오스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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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b0000> 로마 제국 제115대 황제
알렉시오스 3세 | Αλέξιος Γ΄
파일:알렉시오스 3세.jpg
이탈리아 모데나 에스턴스 장서고에 있는 알렉시오스 3세의 초상화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Alexios_III_-Angelos.jpg
기욤 루엘레가 묘사한 알렉시오스 3세의 그림[1]
생몰 1153년~ 1211년
재위 1195년 4월 8일~ 1203년 7월 18일[2]
제호 알렉시오스 3세
Αλέξιος Γ΄
앙겔로스
Αγγελος
알렉시오스 앙겔로스
Αλέξιος Άγγελος
가문 앙겔로스 왕조
배우자 에우프로시나 두케나 카마테리나
자녀 이리니 앙겔리나, 안나 앙겔리나, 에우도키아 앙겔리나
종교 기독교( 정교회)
참전 아센과 페터르의 난
4차 십자군

1. 개요2. 즉위 이전
2.1. 망명 생활2.2. 지휘관2.3. 찬탈
3. 치세
3.1. 권력 장악3.2. 민심 수습3.3. 재정 위기
4. 군사
4.1. 반란 진압
5. 외교6. 4차 십자군7. 4차 십자군 이후
7.1. 탈출과 장외투쟁7.2. 최후
8. 평가9. 참고 문헌10. 대중 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로마 제국 제115대 황제, 동로마 제국 앙겔로스 왕조 제2대 황제. 동로마제국의 중시조, 라스카리스-바티치스 왕조부터 모든 황제는 외가로서 이 사람과 연관되거나 후손이다.[3]

그의 치세에 동로마 제국은 4차 십자군으로 인해 몰락을 맞았고, 이에 따라 상당한 악평을 듣게 된 황제이다. 다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황제라는 시각과 동정론 역시 존재한다.

2. 즉위 이전

2.1. 망명 생활

군사령관 안드로니코스 앙겔로스의 6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난 알렉시오스는 1182년, 안드로니코스 1세의 쿠데타를 막기 위해 파견되었다가 정부와 반군 사이에 고립된 아버지를 따라 나머지 다섯 형제와 함께 안드로니코스에게 몸을 의탁했다.[4]

이들에게도 콤니노스 황실의 혈통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에 안드로니코스가 알렉시오스 2세를 옹위하면서 자신들도 잘 돌봐주리라 생각했던 것 같으나, 오히려 안드로니코스는 자신의 권력 장악에만 집중했다. 앙겔로스 7부자는 각급 최고위 관료들이나 황족들과 결탁하며 안드로니코스 제거를 약속했다. 그러나 이것이 발각되자 정국에는 피바람이 불었다. 사회 보수파들을 끌어들여 권력을 안정시키려고 했던 안드로니코스는 분노하며 닥치는 대로 음모자를 학살했다. 이 와중에 안드로니코스 앙겔로스와 알렉시오스 앙겔로스는 저 멀리 바그다드까지 망명길에 올랐고, 남은 다섯 아들 중 콘스탄티노스, 요안니스, 미하일은 바로 체포되어 눈을 잃었다. 넷째 테오도로스와 막내 이사키오스는 소아시아의 비티니아로 도망쳐 프루사와 니케아에 망명했고, 비티니아에서 안드로니코스의 폭정에 맞서는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유일하게 멀쩡하게 살아남아 안드로니코스의 볼모로 머물던 이사키오스는 1185년 9월 11~12일,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의 봉기를 일으키는 기폭제가 되었고, 앙겔로스 가문의 행적과 공로로 인해 안드로니코스를 몰아내고 황제가 되면서 앙겔로스 왕조를 개창했다.

시리아 다마스쿠스를 거쳐 이라크의 바그다드까지 도주했던 안드로니코스, 알렉시오스 부자는 살라흐 앗 딘의 도움을 받아 이집트 카이로를 거쳐 레반트 아크레에 자리를 잡았다. 이러한 배경에는 이사키오스 2세의 시대에 들어 동로마 제국 아이유브 왕조 사이의 관계가 군사 동맹으로까지 발전한 덕으로 보인다. 이사키오스는 예루살렘의 왕인 기 드 뤼지냥 아크레를 포위하자 이곳에 갇힌 형을 구원하기 위해 80척의 군함을 보내기도 했다.[5]

이후 알렉시오스는 1190년 무렵에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왔다.

2.2. 지휘관

알렉시오스는 이사키오스 2세 치세에 주로 군사령관으로 활동했다. 1190년, 동로마군 불가리아군의 매복에 걸려 궤멸된 트르야브나(Tryavna) 전투에 출정하여 선봉대를 이끌며 거의 피해를 내지 않았다. 또한 1192년에는 가짜 알렉시오스 2세가 유목민을 거느리고 마이안드로스 강 유역을 추풍낙엽같이 휩쓸며 동로마군을 격파하자, 최후의 수단으로서 전선에 파견되었다. 그는 섣불리 싸움에 나서지 않는 가운데 방어를 점검하고 민심을 다독이며, 상황을 대치 국면으로 전환했다. 그리고 1193년 1월 6일에 위장한 사제를 파견하여 가짜 알렉시오스 2세를 제거함으로써 전쟁을 마무리지었다.

이외에도 특정되지는 않지만 불가리아 전선에서도 나름 무서운 장수로서 이름을 날렸던 것으로 보인다. 1195년에 그가 황제가 되었을 때 동로마인들은 물론이고 불가리아 측에서도 '새로운 황제가 불같은 성정과 용략이 있으니 차라리 평화를 맺는 게 낫겠다'는 이야기가 나왔을 정도였다.[6]

그리고 1195년 4월에 이사키오스 2세가 일전을 각오하며 모든 재력과 병력을 집결시켰던 킵셀라(Kypsella)에 알렉시오스 역시 머물러 있었다.

2.3. 찬탈

이 무렵 이사키오스 2세의 상황은 심각했다. 연이은 전쟁과 지방의 반란에 부딪혀 정권은 실각 직전이었고, 영토 자체도 황폐해지고 있었다. 바로 이전 해였던 1194년에는 트라키아의 수도인 아르카디우폴리스(Arcadioupolis)[7]에서 제국군의 양대 축인 서부군, 동부군 총사령관이 연합한 병력이 불가리아-쿠만 연합군에게 박살나기까지 해 국고는 물론 군사력이 더욱 피폐해졌다.

그러나 이사키오스 2세는 여론에 밀려 기어코 일전을 하기 위하여 모든 국력을 쥐어짰다. 정부와 국내에 회의적인 의견들이 팽배했으며 알렉시오스는 이때문에 찬탈을 결정하게 되었다. 1195년 4월 8일 아침, 원로원과 지휘관들의 지지를 얻으며 알렉시오스는 이사키오스 2세가 산책을 떠난 사이에 황제를 자칭했다. 수백 미터 떨어진 곳에서 이 소리를 들은 이사키오스 2세는 수십 킬로미터를 도주하였다가 마크리(Makre)에서 붙잡혀 두 눈을 잃고 수감되었다.

3. 치세

3.1. 권력 장악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며칠 뒤에 찬탈의 소식이 전해졌는데 사람들은 이사키오스 2세에 대하여 혐오를 느끼고 있어 알렉시오스 3세의 등극을 환영하였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길 기원했다. 수도의 치안과 정권 장악을 위하여 알렉시오스 3세의 부인인 에우프로시나 두케나 카마테리나가 궁정으로 건너가 알렉시오스를 지지하는 원로원 의원들의 도움을 받으며 정부 기능을 접수했다. 뒤이어 총대주교와 시민 대표단이 궁정을 방문하여 미래의 새 통치에 대한 질의응답을 하는 시간을 가졌다. 에우프로시나는 훌륭하게 이에 대응하면서 시민들을 설득했다. 만족한 시민들은 이후 원로원과 협력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 거리를 단장하고 알렉시오스 3세의 입성을 축하하였다. 이로서 정권의 인수인계가 완료되었다.

3.2. 민심 수습

니키타스 호니아티스 연대기의 언급에서는 알렉시오스 3세의 등장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그가 전선에서 화려한 활약을 보여줄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1192~3년경, 알렉시오스 3세는 소아시아를 발칵 뒤집어놓았던 가짜 알렉시오스 2세의 반란으로 지방군과 지역민들이 허망하게 무너지고 있던 상황에 군단을 거느리고 남하하여 민심과 병력의 사기를 진정시켰으며, 붕괴상태에 놓여있던 전황을 대치국면으로 전환시키는 데까지 성공했다. 또한 그가 군의 통솔과 작전 능력에 일가견이 있다는 평가가 있어 불가리아 제국 역시 그의 황제 즉위에 긴장감을 가졌다.

하지만 알렉시오스 3세는 당시 제국에 임박한 위기가 단순히 전술적 역량으로 헤쳐나갈 대상은 아니라고 보았던 듯하다. 전장의 장수로서 있을 때에는 용장으로서 이름났던 그였지만, 정치가가 된 이후에는 극적으로 노회하고 신중한 모습으로 변화하였다.

우선 1195년의 시점에서 급한 것은 민심의 수습과 변경 방어의 유지였다. 동생 이사키오스 2세가 지방 문제에 대해서 제대로 손을 쓰지 못한 까닭에 그리스와 소아시아는 물론 사방에서 유력자들이 민회의 여론을 장악, 지방군을 마음대로 휘두르면서 정부의 장악 능력은 극도로 악화되고 있었다. 사서에서는 가장 큰 문제가 된 4, 5개의 세력을 언급하고 있지만, 아드라미티온을 비롯하여 1198년경, 에게 해 연안 각지의 도시들도 공공연히 반란 혹은 이탈을 일삼고 있었다.

1195년에는 두 번째 가짜 알렉시오스 2세가 등장하여 비티니아 일대를 크게 흔들었다. 이번엔 룸 셀주크 술탄국까지 개입하여 전방에서 대규모 전쟁이 일어났다. 더군다나 비티니아 방어의 요충지인 말라기나(Malagina)의 주민들까지 반란에 가담했다. 알렉시오스 3세는 직접 비티니아 각지를 순회하며 여론 진작에 나섰으며 말라기나에서는 주민들을 친히 설득하는 작업에도 들어갔다. 1199년에 재차 니케아 등지에도 방문하여 수비대 역량을 강화하겠다고 민심을 달랬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룸 술탄국의 정권 교체로 술탄위에 쫓겨난 케이휘스레브 1세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망명하게 된다.
주민: 당신께서도 그를 본다면 기뻐하실 겁니다, 저의 군주이신 황제 폐하. 그의 길고 노란 빛을 띤 붉은 머리칼은 금가루와도 같이 빛이 납니다. 그 사람은 키가 훤칠하며 안장에 단단히 고정된 것마냥 흔들림 없이 말을 잘 타는 기수였습니다.

알렉시오스: 마누일 대제의 아들인 알렉시오스는 이미 오래 전 안드로니코스의 명령에 의하여 처형되었다. 그렇기에 이제 출현한 저 자는 콤니노스 가문의 사람이 아니다. 설사 그가 살아있다고 해도 이제 와서는 짐이야말로 이의의 여지가 없는 권리를 가진 황제가 아니겠느냐?

주민: 말씀이야 그렇습니다만 폐하, 폐하께서는 그 소년의 정체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시고 그 소년의 죽음에 대해서도 확신을 내리지 못하시지 않습니까? 제국을 3세대 동안 상실했고 제위와 국가로부터 불의한 방식으로 격리되었던 소년을 긍휼히 여기는 저희에게 청컨대 노여워 하지 마십시오.

이후에도 계속하여 지방을 순회하며 반역 동조자들을 설득한 끝에 알렉시오스 3세는 가까스로 가짜 알렉시오스 2세의 동조 세력이 불어나는 것을 어느 정도 저지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1197년 가짜 알렉시오스 2세가 자객에 의하여 살해된다.

1200년과 1201년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비만자 요안니스 콤니노스의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고, 부패한 관리들로 인한 봉기도 발생했다. 그러나 알렉시오스 3세는 암군 이사키오스 2세나 폭군 안드로니코스 1세처럼 퇴위되거나 찬탈당하지 않았다. 정치적 능력이 더 좋았던 까닭일수도 있겠지만, 그의 통치 양식이 미친 긍정적인 영향이 더 클 것이다. 그는 이전 두 군주와 달리 무고에 의하여 누군가를 처형하거나 실명시키지 않았다. 안드로니코스 1세에게는 항의성 질문을 하기 위하여 사람들이 주저한 끝에 다가갔지만, 알렉시오스 3세에게는 누구나 대놓고 큰 소리로 항의를 해도 안전에 위협을 느끼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점점 알렉시오스 3세의 입지는 강화되어갔고, 이러한 지지 기반은 4차 십자군으로 수도가 함락된 이후에도 알렉시오스 3세가 각지에서 로마 황제의 이름으로 저항을 이어갈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3.3. 재정 위기

재정 위기는 지방 이탈이 가속화된 시점에서는 이미 필연적인 결과였다. 징세관이 파견되어도 수도 밖으로 나가면 살해되기 마련이었기 때문에 징세관들은 파견 근무를 질색했다. 육군도 유지하기 버거웠을 것이며, 관료들 봉급조차도 지불하기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시청사 감옥 관리인 같은 경우에는 부하 관리들 몫의 경비를 챙겨주기 위해서 죄수들을 풀어주는 일을 공공연히 했을 정도였으며, 정부에서 공개적으로 관직을 매매하는 원인이 되었다.

특히 당시 불가리아-쿠만 연합과의 전쟁은 더욱 극성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유목민 군대는 수시로 남하하여 마케도니아 트라키아 각지를 약탈하고 살육했다. 1180년대와 1190년대 초에는 동로마군이 무장과 훈련도에서 앞서 있었기에 전면전에서 유리했지만, 점차 이들이 동로마군의 무기고를 약탈하고 무장함에 따라 전황도 불리해졌다. 1194년에 벌어진 아르카디오폴리스 전투에서는 동로마군의 최고위 장성 2명과 주력 군대가 궤멸당하는 대패를 경험하기도 했다. 이사키오스 2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1년 뒤인 1195년에 더욱 대규모로 자금을 동원하며 대규모 전쟁을 준비했다. 결국 이것이 이사키오스 2세의 몰락을 불러온 요인도 되었다.

알렉시오스 3세는 이후 반드시 필요한 일이 아니면 군사 활동을 극도로 자제했다. 해군은 사실상 존폐의 위기에까지 몰렸는데, 이는 주로 에게 해의 관구에서 세금을 중앙으로 끌어와 운영하는 해군 특성상 필연적인 위기였다.[8] 반면 육군은 최소한의 힘을 보존한 끝에, 여러 모로 상황이 개선된 1201~2년경 가장 위험한 반란군 세 집단을 한 번에 궤멸시켜버리는 위업을 달성하게 되었다.

다만 재정적인 궁핍함 자체는 알렉시오스 3세 통치기에는 해결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방을 진압하는 작전이 먼저 이루어져야 하는데 마침 그 시점에 닥쳐온 것이 4차 십자군이었으니...

4. 군사

재정 부분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알렉시오스 3세 재위 전반기에는 군사적인 활동이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최대한 수세적인 정도로 한정되었다. 그 결과는 소아시아 여러 부분에서의 후퇴로 귀결되었다. 하지만 닥쳐온 위기의 강도와 달리 그의 시대에 상실된 영토는 대체로 동로마 제국의 입장에서 변경에 국한되었다. 알렉시오스 3세는 외교적인 방법을 집중 동원하여 우선 닥쳐온 위기를 피하는데 주력하였으며, 군사활동을 전개할 수 있을 정도로 국제적인 입장이 개선되자 비로소 군사활동을 재개하였다.

또한 그는 금군(禁軍)의 역량이 약화되었으며 지방 토호들의 지지가 매우 미약하다는 점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전에 비하여 유래없을 정도로 원로원을 개방하는 정책을 실시했다. 즉 원래는 주로 황족들에게나 분봉되었던 명예작위인 '세바스토스'(Sebastos) 등이 실제 가치에 비해서도 훨씬 저렴하게 여러 사람들에게 주어졌다. 이는 대제 마누일 1세 시대 이후 사라졌던 중앙-지방의 조화를 재차 시도한 행동이었다. 지방의 유력자들은 지방군과도 밀접하게 연관이 있었기에 이들을 포섭한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결과적으로 불가리아의 숱한 남침에도 불구하고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에서는 사실상 전혀 영토상실이 일어나지 않았다.

4.1. 반란 진압

1201년, 알렉시오스 3세는 3로로 대군을 일으켰다. 맏사위 등이 지휘관으로 참전한 이 작전에서 1202년까지 동로마군은 마누일 카미치스, 요안니스 스피리도나키스의 대규모 반란을 진압했다. 특히 이 반란들은 불가리아 제국과의 암묵적인 연계가 염려될 정도로 국경에 인접한 요충지에서 발생한 것들이라 그 진압이 갖는 의의는 결코 작지 않았고, 불가리아 제국이 17년에 이르는 전쟁을 끝내도록 마음을 굳히는 한 요인이 되었다.

또한 1201년에는 중부 그리스에서 군사적으로 세력을 확대하던 레온 스구로스를 진압하기 위해 해군 총사령관을 파견했다. 실제적인 성과는 거두지 못했지만, 적어도 이미 보이오티아의 티베를 함락한 상태였던 스구로스의 군대는 십자군이 침입하여 금군이 개입할 우려가 없어지기 전까지는 추가적인 활동을 멈추었다. 이들은 1204년 초에 아티카 지방의 수도 아티나를 공격하게 되지만, 니키타스 호니아티스의 형이자 아티나의 총대주교인 미하일 호니아티스를 중심으로 결집한 민병대에 의해 큰 피해를 입고 격퇴당했다.

5. 외교

그의 외교 정책은 기본적으로 대제 마누일 1세의 시기의 기조로 돌아가는 데 방점이 찍혀 있었다. 안드로니코스 1세가 파괴해버린 국제 공조 체제는 이사키오스 2세에 의하여 살라흐 앗 딘이나 남이탈리아의 시칠리아 왕국 등 주요 강국과의 공개적 동맹을 통한 안전보장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는 한창 패권국으로 떠오르던 신성 로마 제국을 자극하는 조치였고, 다른 잠재적 동맹자를 제외해버렸으며, 살라흐 앗 딘과의 동맹은 서유럽 가톨릭으로부터 적개감을 사는 악수가 되었다. 1195년에 시칠리아 왕국이 신성 로마 제국에 의해 무너지고 호엔슈타우펜 가문이 상속받게 되자, 이것이 시칠리아 왕국의 발칸 반도 침입의 계기가 되었다.

하인리히 6세는 1185년에 시칠리아의 대군이 동로마군의 반격에 무너졌던 사례를 생각하여 먼저 외교적으로 동로마 제국을 압박했다. 그 사절단은 정권이 교체된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한다. 알렉시오스 3세는 상당한 압박감을 느끼게 되었으며, 결국 협의 끝에 1196년, 막대한 공물을 제공하는 형식으로 패권을 인정하는데 합의하였다. 알렉시오스 3세는 신민들에게 '독일세'를 강요하여 순식간에 인기를 잃어버렸으며, 그마저도 세금으로 충당할 수 없자 황가의 무덤을 파헤쳐 나온 보물들로 보충했다. 그 와중에 다행히도 하인리히 6세가 1197년 사망하면서 저 공물을 지불할 필요가 없어졌지만, 이 경악스러운 파묘 사태를 경험한 동로마인들은 알렉시오스 3세의 위기 대처 능력에 대해 충분히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

초기의 외교적 위기가 지나가자, 알렉시오스 3세는 이후 다방면의 외교 활동을 전개하여 전선을 줄이고자 했다. 통상 마찰이 계속 있어왔던 베네치아와는 1198년에 통상 겸 동맹 조약을 체결하였고, 베네치아를 다시 견제하기 위하여 피사, 제노바 등과도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1198년에는 역시 교황청과도 교회일치 문제나 십자군 문제를 두고 외교를 재개해 언제든 부활할 여지가 있는 신성 로마 제국의 호엔슈타우펜 왕조에 맞선 잠재적 동맹자로까지 지위를 강화했다.

이외에도 룸 술탄국 왕조에서 벌어진 내분으로 망명한 술탄 케이휘스레브 1세를 잘 대접하여 추후 술탄이 정계로 복귀한 이후에는 유력한 동맹자의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이어졌던 룸 술탄국과의 전선도 안정 국면에 접어들고, 더 이상의 영토 상실도 피할 수 있었다.

그는 1200년 여름에 수도를 방문한 키예프 공국의 사절단도 융숭히 대접하는 가운데, 갈리치아-볼히니아 공국의 군주 로만 므스티슬라비치와도 조카를 결혼시키면서 관계를 수립했다. 이후 로만은 1200~1년에 걸쳐 쿠만족의 본거지를 대대적으로 공략했다. 불가리아 제2제국의 주 병력원이었던 쿠만이 전쟁에서 사실상 이탈하자 한결 마음 놓은 제국 정부는 1201년에 바로 군대를 일으켜 대대적으로 반란을 진압한다. 이런 정세 변화를 맞닥뜨린 불가리아는 결국 1202년에 이르러 동로마 제국의 상황이 안정되었음을 인식하고 결국 오랫동안 거부해왔던 평화 조약을 먼저 제의하여 체결했다.

이 모든 외교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동로마 제국의 계속되는 위신의 실추는 막아낼 수 없었다. 알렉시오스 3세의 치세에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동로마의 종교적 영향권으로 보였던 지역들이 단계적으로 로마 교황청으로 이탈한 것이었다. 한 예로 알렉시오스 3세는 둘째 사위 스테판 네마니치가 세르비아 대공에 오른 것을 계기로 세르비아에 영향력을 다시금 행사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스테판은 형과 권력 투쟁을 벌이면서 앞다투어 로마 교황청에 충성을 맹세하였고, 이 와중에 자신의 아내가 걸림돌이 될 것을 우려하여 1201년에 그녀를 추방해버렸다. 세르비아는 이내 헝가리와 불가리아 세력의 각축장이 되어버렸고, 여기에 왕년의 큰어른이었던 동로마 제국의 지분 따위는 없었다.

칼로얀이 이끄는 불가리아 역시 기꺼이 원교근공을 택함으로써 동로마 제국에 정신적 충격을 주었다. 그는 로마 교황청에 추기경을 보내달라고 요청하여, 1204년에 칼로얀은 로마 교황청에 의해 불가리아 왕으로 임명되었고 불가리아는 교황청의 수하에 들어갔다. 불가리아는 동로마 제국이 인정하는 '차르'를 택하느니, 로마 교황청에 의해 한 단계 낮은 '왕'으로 봉해지는 것을 택한 것이다. 이는 각지의 반란으로 인해 제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 동로마 제국의 처지를 생각해봤을 때 전혀 놀라울 일이 아니었다. 마누일 1세 사후 동로마 제국의 국제적 지위는 비참하리만큼 추락해버린 것이었다.

6. 4차 십자군

널뛰기를 타는 듯한 정세 속에서 8년동안 정권을 지켜낸 알렉시오스 3세였지만, 그를 몰락시킨 것은 반란군도 불가리아도 아니었다. 같은 기독교 세력[9] 4차 십자군의 역습으로 동로마 제국이 송두리째 무너진 것이다.

4차 십자군은 그 때까지 이루어졌던 십자군 중 가장 졸속이었고 병력 수도 형편없었기에, 그런 십자군에게 동로마 제국이 전복되어버렸다는 것 때문에 알렉시오스 3세는 현재까지 악평을 듣고 있다. 니키타스 호니아티스에 의하면 알렉시오스 3세의 묵인 아래 황제의 친척인 제독이 그나마 있던 해군 선박의 닻과 돛과 삭구를 모조리 팔아먹었기에, 동로마 제국은 사실상 해군이 유명무실해진 상태였다. 한마디로 말해, 알렉시오스 3세는 만일 하나 있을 서방의 침공으로부터 제국을 해상으로 방비할 대책을 세워놓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알렉시오스 3세에게도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1202년 11월 26일,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알렉시오스 4세를 지원하는 군대가 없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부는 1203년 5월에 디라히온에서 십자군이 알렉시오스 4세를 노출시킨 다음에야 관련 정보를 습득할 수 있었다. 그런데 십자군 함대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해 6월 23일이었다. 정보가 전해지는 시간을 고려해본다면 사실상 한달이 안 되는 정도의 시간이다.

알렉시오스 3세와 정부 각료들은 크게 당황했으나 어떻게든 교섭을 진행시키려 했다. 황제는 사절을 보내 같은 기독교인인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침입한 것에 항의했으나, 십자군은 '찬탈자를 끌어내리고 정통 황제를 그 자리에 오르게 하기 위해 왔다'고 일축했을 뿐이었다. '조카에게 순순히 황위를 넘긴다면 용서하고 관대한 처분을 내리겠다'는 조롱은 덤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전쟁 뿐이었다.

서로 정세를 관망하던 양군은 7월에 들어 전쟁에 돌입했다. 동로마군은 베네치아의 압도적인 함대 전력에 위압을 느끼면서도 갈라타 상륙 작전 시작 무렵에 상당히 조직적으로 저항하였다. 그러나 수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알렉시오스 4세가 약속한 보상에 대해 엄청난 기대를 갖고 있던 십자군의 기세를 당해낼 수 없었다. 갈라타는 금세 함락되었고, 금각만으로의 진입을 차단하던 쇠사슬은 파쇄되었으며, 베네치아의 갤리선들이 순식간에 무방비의 항구를 장악했다.

십자군은 7월 17일 양동공세를 계획하였다. 십자군이 제국군 주력을 육로로 끌어낸 뒤 베네치아의 해군으로 수도를 점령하는 것이 그 작전이었다. 알렉시오스 3세는 양동공세 계획을 듣고 이들의 작전을 간파했지만 관료, 귀족, 상류 시민들의 재촉을 이기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육로로 나가게 된다. 벌써 공개적으로 알렉시오스 3세에게 나아가 '그렇게 계속 소극적으로 대처한다면 십자군의 요청에 따라 조카에게 제위를 넘겨주겠다'고 협박하는 이들이 나왔던 것이다. 평시라면 반역에 해당하는 불경죄였지만, 알렉시오스 3세는 잠자코 이들의 요청에 따라 대군을 이끌고 나갈 수밖에 없었다.

황제는 수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참호를 파고 수세로 일관하였다. 그러다가 도제 엔리코 단돌로의 저돌적인 지휘하에 금각만 쪽의 성벽으로 침투한 베네치아군이 스물다섯 개의 망루를 모조리 장악하고 시내까지 진입하자, 알렉시오스 3세는 바랑인 친위대를 투입하여 이를 격퇴하도록 했다. 이 과정에서 베네치아군은 시내에 불을 질렀고, 이로 인해 2만여명의 이재민이 발생하였다.
황제는 '도시들의 여왕'의 참담한 불운을 목도하고 인민의 근심을 지각하게 되어서야 무기를 들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적군의 기세가 더욱 등등하며 더럽혀진 도시를 위한 어떤 도움도 오지 않는다는 데 대해 분노하고 거친 언사를 쏟아냈다. 이제 군대의 심약함과 용기 및 과단의 결핍이 도시를 뒤덮어버림으로서 이 도시는 운명의 폭력 가운데에서 안쓰러운 시신이 되었다. - 니키타스 호니아티스 초기 연대기 판본

황제 자신은 마침내 17개 사단을 이끌고 육로에서 십자군을 치러 갔다. 십자군의 앙리[10] 공작은 즉시 대군의 출현을 알아채고 본영에 연락을 취했고, 십자군은 위협적인 전열을 가다듬었다. 두 진영이 일촉즉발의 상황에 놓이는 동안 육로의 십자군이 동로마 제국의 대군과 맞닥뜨렸다는 소식이 베네치아군에 전해졌고, 엔리코 단돌로는 즉시 금각만 방면에서 후퇴하여 십자군에 합세하였다. 베네치아군이 육지 방면에서 십자군과 합세하는 것을 보고 알렉시오스 3세는 후퇴를 명했고, 이번에도 이렇다 할 육상 전투 없이 상황이 마무리되었다.

십자군 입장에서도 황제를 눈 앞에서 놓치고, 훨씬 많은 동로마의 군세를 확인해야 했다는 점에서 절망적이었지만, 알렉시오스 3세 역시 수비를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비난에 직면해야 했다. 갈라타 전투에 이어 이번에도 동로마 제국군은 훨씬 적은 수의 십자군에 대해 거의 어떤 타격을 입히지 못했고, 오히려 그 와중에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시가지만 대화재로 막중한 손실을 입었다. 시민들은 겁쟁이 알렉시오스 3세가 대군을 동원하고도 적극적으로 요격에 나서지 않았기에 처음으로 도시가 잿더미가 되는 사태가 빚어졌다고 개탄했다.

이 전투가 끝난 뒤, 알렉시오스 3세는 쿠데타의 기운을 감지하였다. 알렉시오스 4세가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 코웃음을 친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이었지만, 이제 불필요한 공방전으로 도시가 더 피해를 입느니 십자군의 요구사항대로 알렉시오스 4세가 '정당한 황제'로서 다시 등극하는 편이 더 나은 것으로 여겨졌다. 주위에 불안한 시선들이 오가고 있었고, 미하일 5세 안드로니코스 1세의 전철을 밟을 것에 대해 공포에 빠진 알렉시오스 3세는 도시를 빠져나가야 한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리고 마침내...

7. 4차 십자군 이후

바로 그 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알렉시오스 황제는 수송할 수 있는 최대한의 재물을 취하고 자신의 사람들 중 갈 수 있는 최대한의 사람들을 추려내었다. 그리고 그렇게 도주함으로서 도시를 버렸다. - 조프루아 드 빌라르두앵
그리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들어가 알렉시오스를 찾았지만 (십자군은) 그를 찾지 못했는데, 왜냐하면 그는 5,000명의 사람과 함께 왈라키아의 왕인 이반에게로 달아났기 때문이었다. -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라틴 제국 초대 황제 보두앵 1세(1204~1205)
알렉시오스 황제는 이러한 협상 및 시내의 신민들이 절망으로 인해 혼란으로 기울어지고 반란의 기운으로 전염이 되는 것으로 인해 위축되었다. 그를 목도한 사람에 의하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다윗의 구원은 도주에 있었다." 그리고는 국고로부터 상당 액수의 재화를 취하고 아내를 데리고 도망했다. - 요르요스 아크로폴리티스

7.1. 탈출과 장외투쟁

블라케르나이 궁전의 사람들은 알렉시오스의 도망에 대해 극도로 참을 수 없었으며, 임박한 재앙에 대해 혼란과 경악에 빠져들었다. 이제 바로 앞에 진을 치면서 도시에 즉각적인 무장 공격을 감행하고 성벽을 관통할 라틴인들을 지연시킬 자가 아무도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 니키타스 호니아티스

1203년 7월 18일 오전 2시에 알렉시오스 3세는 수도를 빠져나왔다. 1000파운드에 달하는 황금과 그외 챙길만한 보석들, 그리고 장녀 이리니 앙겔리나를 대동한 채 말이다. 기습적으로 이루어진 탈출에 환관 콘스탄티노스 필록시니티스를 위시한 궁내 사람들조차 황제가 사라진 것을 몰랐으며, 처음엔 에우프로시나 황후가 음모를 꾸몄다고 착각했을 정도였다. 이내 상황 파악이 완료되자, 그들은 감옥에 있는 이사키오스 2세를 복위시키는 것밖에 할 일이 없었다. 알렉시오스 3세가 수도에 내버려둔 황후는 그대로 이사키오스 2세에 의해 포로가 되었고, 이윽고 십자군이 알렉시오스 4세와 함께 의기양양하게 수도로 입성했다. 알렉시오스 3세 정권의 종말이었다.

그러나 그의 투쟁은 이후로도 계속되었다. 충분한 재화를 갖고 도망친 그는 지방에서 어렵지 않게 세를 규합하여, 십자군은 그가 애초에 5,000여명과 함께 이탈했다고 착각했을 정도였다. 8월 이후 십자군이 알렉시오스 4세와 함께 북진하자, 여기에 잠시 맞서던 그는 불가리아와 갈리치아로 원병을 청하기 위하여 잠시 전장을 벗어났다. 불가리아로 간 황제는 발칸 서부 지역의 통제권을 불가리아에게 넘겨주는 대가로 원병을 요청했지만 불가리아가 미온적인 가운데 알렉시오스 5세 두카스의 사악한 음모와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소식이 전해지자(1204년 4월) 그는 다시 트라키아로 남하하였다. 이때 그는 불가리아에 엘리트 계층들을 상당수 남겨두었는데, 이들은 차후 불가리아-십자군 전쟁에서 큰 역할을 맡게 된다.

그 사이 알렉시오스 3세가 빠져나온 수도는 더욱 더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알렉시오스 4세는 수도에서의 거듭되는 반 라틴 정서로 인해 혼란스러워진 통에 알렉시오스 5세의 쿠데타로 축출되어 죽임을 당했고, 쿠데타로 즉위한 알렉시오스 5세는 십자군과 최후의 일전을 벌였으나 수도 함락을 막아내지 못했고,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철저한 약탈과 파괴를 당했다. 제국은 전리품으로서 분배되었고, 십자군이 군주가 된 로마니아 제국이 출범했다.

모시노폴리스에서 알렉시오스 3세는 수도를 잃고 빠져나온 알렉시오스 5세와 조우했고, 그를 사로잡은 뒤 실명형에 처했다. 알렉시오스 5세는 알렉시오스 3세 시절에 이미 공주에게 작업을 건다거나 찬탈 음모로 수감되기도 했던 문제적 인물로서, 알렉시오스 3세는 늘 혐오해왔던 그를 '황제'로 대할 마음이 전혀 없었던 것이었다. 이후 알렉시오스 5세는 십자군에 신병이 인도되었고, 잔인하게 처형되었다.

이후 알렉시오스 3세는 십자군의 추격을 피하며 테살로니키, 테살리아와 테르모필레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코린토스까지 이동하면서 최대한 저항했다. 그 과정에서 반란자인 레온 스구로스를 회유하여 십자군에 저항하기도 했다. 그러나 8월에 이르러 코린토스를 탈출하다가 체포됨으로서 그의 저항은 끝이 났다. 다만 그의 막내딸 안나 앙겔리나의 남편인 테오도로스 1세 라스카리스는 1203년 여름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출한 후에 니케아로 가서 황제의 대리 자격으로 방어를 강화했다. 또한 알렉시오스 3세의 지시였는지는 확정할 수 없으나, 아나톨리아의 실력있는 토호인 테오도로스 만카파스도 석방되어 아나톨리아에서 군대를 일으켜 십자군에 대항했다. 그리고 프루사(Prousa) 지방군이 1205년 3월 19일, 아나톨리아로 침투한 십자군 부대를 크게 무찌르기도 했다.

더 나아가 알렉시오스 3세가 체포되자 그를 따르던 엘리트 계층들은 고향으로 돌아가 1205년 봄에 트라키아에서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마침 십자군과 불화가 일던 불가리아 제국은 지원 명목으로 머무르던 동로마군의 협조를 받으며 남하, 4차 십자군을 사실상 전멸시켜버림으로서 4차 십자군과 라틴 제국의 초기 원동력을 완전히 없애버렸다.

7.2. 최후

테살로니키에서 탈출을 기도하다가 발각된 뒤 이탈리아 몬페라토에 유배되어 있던 알렉시오스 3세는 1209년에 이르러 이피로스를 지키고 있던 미하일 1세 콤니노스 두카스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고국에 돌아오게 되었다.

그가 다시 돌아오기 위해 고생하고 있던 사이 그의 사위였던 테오도로스 1세는 장인이 포로가 된 이후 황제 자리에 올라 제국의 재건을 준비했다. 그는 아나톨리아에 잔존해 있던 구 제국의 신하들을 회유하거나 격파하면서 아나톨리아의 세력을 효과적으로 규합해냈다. 이른바 니케아 제국의 출범이다.

이에 알렉시오스 3세는 미하일에게 부관 직위를 내려준 뒤[11] 아내 에우프로시나를 이피로스에 두고 홀로 니케아로 건너가 사위 테오도로스 1세에게 제위를 요구했다.

당연하지만 사위는 이를 터무니없는 요구라 보고 거부했다. 이미 알렉시오스 3세는 다른 '사위'였던 알렉시오스 5세를 속여 실명형에 처해버린 전력이 있었기에, 그가 전(前) 황제라는 이유만으로 제위를 넘긴다면 테오도로스 1세 자신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었기에 테오도로스 입장에서는 생존을 위해서라도 이 요구를 거절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자 알렉시오스 3세는 권력을 되찾기 위해 룸 술탄국으로 가서 사위를 공격해달라고 요청하는, 이른바 외환의 죄를 저지른다.

알렉시오스 3세는 1190년대 이후 룸 술탄국과 동맹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이미 황제의 유력한 신하였던 마누일 마우로조미스 등도 룸 술탄국의 궁정에 합류한 상태였다. 구실을 잡은 룸 술탄국은 1211년에 니케아 제국을 침공했고 만약 여기서 니케아 제국이 패망했으면 동로마 제국이 복원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테오도로스 1세는 훨씬 수가 많았던 이 연합군을 메안데르의 안티오키아 전투에서 기적적으로 격파하는 데 성공한다. 테오도로스 1세는 술탄과 1대1 대결을 벌여 직접 그의 목을 베어버렸다. 알렉시오스 3세도 덩달아 포로로 잡혀버렸고 이것으로 알렉시오스 3세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그는 사위에 의해 두 눈을 잃고 유폐되었으며 곧 사망했다.

8. 평가

파일:1204년 동로마 제국.png
알렉시오스 3세 시기 동로마 제국의 강역.

알렉시오스 3세는 권력욕에 사로잡힌 나약한 인물로서, 몰락의 시대의 전형적인 산물이었다. 제국이 아무리 부패하고 기진해 있더라도 이사키오스 2세 치하에서는 그래도 아직 버틸 수 있었지만, 이제 이 나라는 마지막 저항력을 상실했다. 해가 지남에 따라서 내부적인 몰락이 분명해졌고, 대외정치적으로도 1195년의 정변은 여러 면에서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 게오르크 오스트로고르스키
알렉시오스 3세 앙겔로스는 개인적으로 살아남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재능은 갖추고 있었지만 장래를 생각지 않는, 혐오스럽고 게으른 인물이었다. 그의 권력 장악은 이미 유행병처럼 번져버린 음모와 반란이 더 많이 한꺼번에 일어나도록 부추기는 결과밖에 초래할 수 없었다.
― 워렌 트레드골드
현대 역사학자들은 니키타스 호니아티스의 기록에 의거하여, 알렉시오스 3세를 재앙에 가까운 황제이자 무능력하고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인물로 다뤄왔다. 그러나 이러한 묘사는 잘못된 것이다.
― 앤서니 칼델리스[12]

알렉시오스 3세의 치세에 대한 평가는 일반적으로 매우 좋지 않다. 그의 통치기간은 본인의 찬탈로 말미암은 각종 스노우볼을 수습하는 것으로 점철되었으며, 4차 십자군이라는 끔찍한 형태로 종말을 맞았다. 즉, 알렉시오스 3세 본인의 치세의 혼란이 안드로니코스 1세의 폭정과 이사키오스 2세의 실정 이외에도 본인의 찬탈도 어느정도 원인제공을 했다는 점에서 본인 또한 혼란의 책임에 있어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물론 알렉시오스 3세 역시 이러한 문제점을 인지하고 있었기에 해결하려 노력했으나 명분이 부족한 찬탈이라는 방식으로 즉위한 이상 그 효과는 한계에 부딪힐 수 밖에 없었다.[13] 그 때문인지 대중적 인식 역시 좋지 않은데, 국내에서 구할 수 있는 동로마 관련 서적에서 이 사람을 긍정적으로 조망하는 책은 사실상 전무한 실정이며, 해외의 동로마 관련 유튜버들이 최악의 황제를 꼽을 때 포카스, 알렉시오스 4세와 더불어 당당하게 꼴찌를 다툴 정도이다.

서방에서는 그를 지리멸렬한 인물로 비웃었고, 동시대의 그리스인인 니키타스 호니아티스도 그를 재앙에 가까운 게으른 인물로 묘사하며 한탄했다.[14] 학계에서의 평가 역시 대체로 부정적이며, 워렌 트레드골드나 조나단 해리스 같은 비잔티움 연구의 대가들도 이러한 당대인들의 악평으로부터 중립적으로 보려 노력했으나 결국 평가를 바꾸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미 전임자들의 삽질로 인해 산산조각나고 있었던 제국의 운명 속에서 이 인물이 부당하게 파국의 오명을 뒤집어썼다는 시각 역시 존재한다. 한 예로, 그를 최악의 암군으로 낙인찍는데 일조한 니키타스 호니아티스의 서술에서도 알렉시오스 3세에 대한 최종평은 그렇게까지 박하지 않으며, 오히려 암군으로 일단락할 수 있는지 다시 생각해 볼 여지를 제공하는 점이 있다.
(전략) 국사의 행정에 있어서 온전히 뛰어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다른 영역에서까지 비판을 받을 정도는 아니었다. 방식의 부드러움에 있어서 그는 타인을 능가했다. 그는 접근을 불허했던 사람도 아니었고 흉포한 얼굴로 시민을 물리친 적도 없었다. ….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와서 청원할 수 있었고 때때로는 발언의 자유에 제한도 받지 않은 채 항변할 수 있었다. … 그가 우울이 깃든 자줏빛 옷을 입고 있는 동안에는 어떤 여성도 어두운 죽음을 맞은 자신의 남편을 애도하기 위해 검은 모자를 쓰지 않았다.

폴 막달리노(Paul Magdalino)는 자신의 책 『 마누일 1세 콤니노스의 제국, 1143-1180』(Empire of Manuel I Komnenos, 1143-1180)에서 알렉시오스 3세 정권을 다음과 같이 짤막하게 평가한다.
알렉시오스 3세의 정부는 그러므로 상당한 영토적인 기반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마침내 그 정권이 국내적인 지위를 안정시킨 1202년 이후에는 잃어버린 영토를 수복하는데 이 기반 영토를 이용할 수 있었다. 그러한 모든 가능성을 쓸어버린 것이 4차 십자군이며... (후략) - 에필로그 중

앤서니 칼델리스(Anthony Kaldellis) 또한 본인의 저서 'Byzantine Republic'의 112쪽에서 사회지도층(관료층-magistrates, 원로원-Senate)과 일반시민(demos)을 불문하고 동생 이사키오스 2세에 대한 알렉시오스의 쿠데타가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In 1195, Isaakios II Angelos was deposed by his brother Alexios III.
“The magistrates of the politeia had already acclaimed him, and his
entrance had been prepared in advance by his wife Euphrosyne. As
for the Senate, at least a part of it happily accepted what had hap-
pened. When the dêmos heard the announcement, they engaged in
no seditious behavior: from the start all of them were calm and ap-
plauded the news, neither protesting nor becoming inflamed with
righ teous anger at the fact that the army had removed from them
their customary right to appoint the emperor.”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지독하게 인기가 없었던 동생을 폐출시킨 형에 대해 제국의 사람들이 환호했다는 것에 불과하지,[15] 찬탈이 대외적으로도 납득 가능한 행보로 여겨졌다는 뜻은 아니다. 조선 인조나 베트남의 호계리의 예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찬탈은 이유를 불문하고 외국에게 좋은 침략의 명분이 된다. 바로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6세는 찬탈자 알렉시오스 3세에 대해 침공을 할 조짐을 보였고, 알렉시오스 3세는 이를 막기 위해 독일세를 걷고 황가의 무덤을 파헤치는 등 촌극을 벌여야 했다. 이런 추태 속에서 알렉시오스 3세 역시 동생처럼 금세 신망을 잃어버렸고, 최종적으로는 자형의 후원을 받은 알렉시오스 4세의 역습으로 자신의 정권까지 전복당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알렉시오스 3세는 적어도 무능한 동생이 키워놓은 문제점들에 대해 대처하려는 노력을 했고, 어떤 방면에서는 의외로 성과를 거두기도 했으므로, 오늘날까지 '(예상치 못한) 4차 십자군이 아니었다면 과연 어떻게 통치를 이어나갔을까' 하는 궁금증을 많이 남기는 인물이기도 하다. 오늘날 알렉시오스 3세에 대한 평가는 상당히 논쟁적이며, '동로마 최악의 황제'라는 혹평 일변도였던 과거로부터는 어느 정도 일신된 평가라고 할 수 있다.

9. 참고 문헌

Charles M. Brand, Byzantium Confronts the West 1180-1204, Harvard University Press, 1968.
Niketas Choniates, Harry J. Magoulias Tr., O City of Byzantium, Annals of Niketas Choniates, Wayne State University Press, 1984.
Paul Magdalino, The Empire of Manuel I Komnenos 1143-1180,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3.
Ruth J. Macrides, 1204: The Greek Sources, Urbs Capta: The Fourth Crusade and its consequences, Lethielleux, 2005.
Jonathan Harris, Constantinople: Capital of Byzantium, Hambledon Continuum, 2007.
Anthony Kaldelis, The New Roman Empire: A History of Byzantium, Oxford University Press, 2023.

Alexander V. Maiorov, Angelos in Halych: Did Alexios III Visit Roman Mstislavich?, Greek, Roman, and Byzantine Studies 56, 2016.
Balduinus Constantinopolitanus Imperator, Epistolae Et Diplomata, Documenta Catholica Omnia, MPL209, 0913 - 0928C.
Dejan Dzelebadzic, Provincial Sebastoi, From the End of 12th to Mid 13th Century, Recueil des travaux de l’Institut d’études byzantines L, 2013,
Ruth J. Macrides, A Translation and Historical Commentary of George Akropolites' History, King's College, 1970.

10. 대중 매체에서

푸른 늑대와 흰 사슴시리즈의 2편에선 리처드 1세,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칭기즈 칸과 함께 플레이 가능 군주. 거기다가 군주들중 가장 동안이다.

원조비사에선 CCBD의 그저 그런 장군. 그것도 유저 시나리오에 가야 나온다. 비슷한 능력이지만 차라리 매력이 B인 알렉시오스 4세가 훨씬 낫다.
파일:attachment/알렉시오스 3세/알렉시오스3세.png
징기스칸 4 일러스트[16]

징기스칸 4에선.시나리오 1에서 동로마로 시작하면 위험요소로 여겨진다. 정치 52, 전투 57, 지모 65으로 썩 좋지는 않지만 그래도 4세보다 능력치와 병과 적성이 조금 더 놓다.

크루세이더 킹즈 2에서는 1185년경부터 선택할 수 있는데. 교육계와 1개의 특성이 랜덤이며 태만, 겁쟁이, 야망을 고정 특성으로 달고 있다. 이후 크루세이더 킹즈 3에서도 1178년 캠페인에서 이피로스의 둑스인 아버지의 후계자로서 등장한다.

대체역사물 동로마를 다시 위대하게에서는 크루세이더 킹즈 2를 그대로 따라 실제 모습과 달리 무능한데 야심은 넘치는 인물로 그려진다. 이는 전통적인 평가에 부합하는 묘사이지만, 최근의 재평가 기조에는 어긋나기 때문에 비판을 받기도 했다. 사실 고증 측면에서 많은 무리수와 왜곡이 있는 작품이다 보니, 알렉시오스 3세에 대한 단순한 묘사 역시 비판을 받은 측면이 있다.

십자군 세계의 고인물 에서는 마셜의 도움을 받아 로마의 황제로 즉위한 뒤 마셜을 사위로 맞고 4차 십자군의 도움을 받아 불가리아를 재통합하고 호라즘이 쓸고간 아니톨리아도 통합한다.

물의 백작의 두번째 동로마 대역인 사칭황자의 카르타고 디펜스에선 대공으로 등장하는 알레시아가 그를 모티브로 삼았다. 대공시기의 황제가 안드로니코스고 알레시아 그의 성이 앙겔로스라는점, 그리고 가짜 알렉시오스가 나온다는점에서 배경만 7세기인 12세기 말이다. 이후 주인공과 함께 폭군 안드로니코스를 끌어내리고 본인이 황제가 되나, 하필 시대가 이슬람 라이징이라 많은 영토를 잃게 된다. 그리고 후반부에 이리클리오스 황제로 대체된다.


[1] 둥그렇게 써 있는 어구는 'Alexius Fratricid', 즉 알렉시오스 ' 형제 살해자' [2] 정확히 표기하기는 어렵다. 이 문서에 기입된 날짜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출한 날짜에 불과하기 때문.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십자군을 고려해서 즉각 폐위되었다지만 그외 제국령에서는 사실상 황제의 역할을 하고 다녔던 유일한 인물이었으므로 이 점을 감안한다면 4차 십자군에 의해 붙잡히는 1204년 8월까지는 사실상 황제였다고 볼 수도 있다. [3] 미하일 8세와 테오도로스 2세 모두 이사람의 외외중손이다 [4] 나머지 5형제의 이름은 순서대로 콘스탄티노스, 요안니스, 미하일, 테오도로스, 이사키오스 2세이다. [5] 그러나 아버지인 안드로니코스는 이사키오스가 황제가 되기 전인 1185년 9월 12일 직전에 숨을 거두었다. [6] 물론 알렉시오스는 제위에 오른 뒤 국가의 문제가 단순히 전장에서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님을 인지하고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7] 지도를 찾아봐도 아르카디우폴리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겨우 100여 km 정도 떨어진 데 불과한 중심지였으니,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다. [8] 불과 20년 전까지만 해도 100여척의 함대를 편성하여 베네치아 해군을 격파했던 걸 생각하면, 폭군 안드로니코스 1세와 암군 이사키오스 2세의 실정으로 인한 재정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 수준으로 떨어졌는지 알 수 있다. [9] 다만 십자군의 종교는 가톨릭이고 제국의 종교는 정교회이니 만큼 완전히 같은 기독교 세력이라 보기엔 무리가 있긴 하다. [10] 2년 후 라틴 제국의 2대 국왕으로 즉위하는 인물로, 굉장히 재능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11] 이게 시간이 흘러 데스포테스 직위를 내려 준 것이라 와전되었다. 당연하겠지만 학자들은 이를 부정한다. [12] 니키타스 호니아티스의 알렉시오스 3세에 대한 서술이 불공정하다고 여기는 입장이다. 파국 속에서 정신없이 대처하는 와중에 공도 있었고 과도 있었는데, 공에 대해서는 어물쩡 넘어가고 과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개탄한다는 식이다. [13] 물론 동생이었던 이사키오스 2세도 형처럼 찬탈로 즉위했고 그 역시 부정부패와 불가리아와의 전쟁에서의 패전등으로 실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이는 불과 3년만에 나라를 재기불능 상태로 만들어버린 불세출의 폭군(...)안드로니코스 1세의 폭정이라는, 찬탈 명분이 확실했던 탓에 알렉시오스 3세에 비할바는 아니었다. [14] 다만 후술하듯 동정적인 시각 역시 가미했는데, 이 부분이 부풀려져 한국에서는 '니키타스 호니아티스의 저작이 안 알려진 까닭에 알렉시오스 3세가 폄훼당했다'고 이상한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당연히 당대의 1차 사료 중 가장 신뢰도 높은 자료인데 연구자들이 접하지 않았을 리가... 도서로서의 영어 번역본 역시 나온지 한참 되었다. [15] 한 예로 제국의 친서방 기조를 청산해줄 것으로 여겨진 안드로니코스 1세가 불과 12년 전에 얼마나 많은 기대 속에 즉위했는지 생각해보면 된다. 급격하게 하락세를 겪는 제국의 신민들 역시 변덕스러웠다. [16] 동유럽 클론무장 얼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