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블리우스 데키우스 무스 라틴어: Publius Decius M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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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295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센티눔 평원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푸블리우스 데키우스 무스(아버지) 푸블리우스 데키우스 무스(아들) |
참전 | 삼니움 전쟁 등 |
직업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312년 |
전임 |
루키우스 파피리우스 쿠르소르 가이우스 유니우스 부불쿠스 브루투스 |
동기 |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
후임 |
가이우스 유니우스 부불쿠스 브루투스 퀸투스 아이밀리우스 바르불라 |
임기 | 기원전 308년 |
전임 | 독재관: 루키우스 파피리우스 쿠르소르 |
동기 |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룰리아누스 |
후임 |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 루키우스 볼룸니우스 플람마 비올렌스 |
임기 | 기원전 297년 |
전임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바르바투스 그나이우스 풀비우스 막시무스 켄투말루스 |
동기 |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룰리아누스 |
후임 |
루키우스 볼룸니우스 플람마 비올렌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 |
임기 | 기원전 295년 |
전임 |
루키우스 볼룸니우스 플람마 비올렌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 |
동기 |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룰리아누스 |
후임 |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메겔루스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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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 감찰관, 기병장관. 센티눔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다.2. 생애
평민 가문으로서 집정관에 선출되어 원로원 계급으로 진출한 데키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아버지 푸블리우스 데키우스 무스는 기원전 343년 트리부누스 밀리툼을 맡아 사티쿨라 전투에서 삼니움족의 매복에 걸린 아군을 구해내 명성을 떨쳤고 기원전 340년 집정관에 선출된 뒤 로마를 상대로 반기를 든 마르시, 펠레그니 족을 상대로 베수비오 전투를 치를 때 스스로 희생함으로써 신이 로마인들에게 승리를 안겨주기를 서원하는 데보티오(Devotio)를 이행해 로마군의 승리를 안겨주고 본인은 전사했다.기원전 312년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그는 질병에 걸려서 로마에 머물렀고, 동료 집정관은 삼니움과의 전쟁에 착수했다. 에트루리아인들이 삼니움과 동맹을 맺고 로마에 전쟁을 선포하자, 원로원의 지시에 따라 독재관으로 가이우스 술피키우스 롱구스를 선출했다.
기원전 308년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룰리아누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룰리아누스가 삼니움족과 전쟁을 벌이는 동안, 그는 에트루리아와의 전쟁을 수행했다. 해안 도시 트라퀼리니와 40년 휴전 협정을 맺은 뒤 티베르 계곡에서 볼시니의 여러 요충지를 점령하고 파괴했다. 이에 전의를 상실한 에트루리아인들은 평화 협약을 맺어달라고 호소했다.
데키우스는 자기 선에서 평화 협약을 맺기를 거부하면서도 에트루리아인들이 로마군에 1년 급여를 지급하고 모든 군인에게 튜닉 2벌을 제공하는 대가로 1년 휴전에 동의했다. 그러나 데키우스가 임무를 완수하고 로마로 돌아갈 때, 움브리아인들이 그의 진군로를 틀어막고 나머지 병력으로 로마를 급습하려 했다. 이에 룰리아누스가 북상해 메바니아 전투에서 움브리아인들을 물리쳤고, 그는 무사히 로마로 귀환했다.
기원전 306년 독재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바르바투스 휘하 기병장관을 맡았다. 두 사람은 집정관이 부재한 상황에서 고위 행정관 선거를 주관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기원전 304년 룰리아누스와 함께 감찰관에 선임되었으며, 기원전 300년 지금까지 파트리키만 맡을 수 있었던 폰티펙스에 평민 신분으로 최초로 선임되었다.
기원전 297년 룰리아누스와 함께 세 번째로 집정관이 되었다. 룰리아누스가 시디키니 족의 영역을 진군하며 여러 영지를 파괴하는 동안, 그는 소라를 공략했고 말벤툼 인근에서 아풀리아인들을 격파해 그들이 삼니움군과 합세하는 것을 막았다. 이후 룰리아누스와 함께 4개월간 별다른 저항을 맏지 않고 삼니움 전열을 약탈했다. 이듬해 룰리아누스와 함께 전직 집정관 자격으로 임페리움을 연장받았고, 무르간티아, 로물레아, 페렌티눔 일대를 공략했다. 임기가 끝날 무렵에 룰이나ㅜ스와 함께 로마의 동맹인 비스키니 족의 영토를 습격한 삼니움군을 요격하여 많은 포로를 확보했다.
기원전 295년, 룰리아누스와 함께 네번째로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사실 원로원은 루키우스 볼룸니우스 플람마 비올렌스를 룰리아누스의 동료 집정관으로 낙점했지만, 룰리아누스가 무스를 동료 집정관으로 세워주지 않는다면 집정관을 맡을 수 없다고 주장해 관철시켰다. 그 후 두 사람은 센티눔 전투에서 삼니움족과 켈트 계열인 세노네스 족 연합군과 맞붙었다. 당시 좌익을 담당하던 그는 아군이 세노네스 족의 공세에 밀려 전열이 무너지기 시작하자 과거에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데보티오를 행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폰티펙스 마르쿠스 리비우스 덴테르를 불러 자신의 뜻을 알린 뒤 하늘을 우러러 보며 외쳤다.
"
야누스,
유피테르,
마르스,
퀴리누스, 벨로나, 라레스, 노벤실레스(Novensiles), 인디게테스(Indigetes), 그외의 모든 신들이여! 부디 로마인들에게 호의를 베풀어서 그들이 승리를 거둬서 널리 번창하게 해주소서. 그리고 로마인의 적들에게 공포와 경악과 죽음을 안겨주소서. 저는 공화국, 로마인, 군단, 동맹군, 그리고 퀴리테스를 위해 적의 군단과 지원군을 나 자신과 함께 조상의 영혼과 대지에 바칩니다. 저는 적의 군기와 깃발과 갑옷을 공포와 도주, 살육과 피, 천상과 지옥의 신들의 진노로 물들게 할 것이며, 제가 이 땅에서 멸망하듯이 갈리아인과 삼니움 역시 이 땅에서 멸망하게 할 것입니다!"
그는 말을 마친 뒤 로마 군단병들을 뚫고 적군이 가장 많이 모여있는 적진을 향해 말을 몰았다. 얼마 후, 그는 적 병사들에게 에워싸여 살해되었다. 덴테르가 무스가 데보티오를 행했다고 선언하자, 금방이라도 도망치려 했던 병사들은 마음을 다잡고 적군에 대항했다. 그 후 전투에서 승리한 룰리아누스는 동료가 데보티오를 행하다 장렬하게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시신을 로마에 보내 이 사실을 알렸고, 일부 전리품을 불태우며 그의 명복을 빌었다.
아들 푸블리우스 데키우스 무스는 기원전 279년 집정관을 역임했으나, 아스쿨룸 전투에서 피로스 1세에게 패배해 목숨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