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가이우스 루벨리우스 블란두스 (Gaius Rubellius Blandus) |
출생 | 미상, 로마 제국 이탈리아 티부르(오늘날의 이탈리아 티볼리) |
사망 | 서기 38년 |
직위 | 원로원 의원, 집정관, 교육사업가 |
배우자 | 율리아 리비아(서기 33년 ~ 서기 38년) |
자녀 |
루벨리아 비사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 루벨리우스 드루수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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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원로원 의원, 집정관이며 교육사업가이다. 로마 역사상 최초로 수사학을 교육사업으로 가르친 티부르의 기사계급 출신 수사학자 루벨리우스 블란두스의 손자다.원로원에 본인 대에야 처음 입성한 신참자로 최근 북아프리카 일대에서 발견된 여러 비문을 통해 그 경력이 알려진, 프린키파투스 아래의 아프리카 속주 총독으로도 유명하다.
서기 33년 로마 제국의 2대 황제 티베리우스의 손녀 율리아 리비아와 귀천상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들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를 얻어, 황제와 원로원, 로마 사회에게 "로마를 슬프게 한 많은 슬픔"으로 규정됐다.
2. 생애
전체 이름에서 드러나듯, 로마 역사상 최초로 수사학을 교육사업으로 가르친 티부르의 기사계급 출신 수사학자 루벨리우스 블란두스의 손자다. 고향은 가문 대대로 터잡고 살아온, 이탈리아 로마 근교 도시인 티부르(오늘날의 이탈리아 티볼리).조부가 수사학을 돈을 받고 가르치면서, 막대한 돈을 벌고 이 돈으로 더 큰 재산을 불리는데 성공해 그 가족 중 처음으로 원로원에 입성했다. 경력, 총독 시절 행보에서 드러나듯, 부와 권력을 위해 야심을 드러낸 신참자이나, 로마 안에서는 젊을 적부터 결혼에 관심없고, 평생 독신주의를 고수한 원로원 의원 내지 동성애자로 유명했다. 이런 그의 행보는 후일 그의 결혼과 아들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 및 그 후손들이 비극 속에 멸족된 원인이 된다.
그의 명예로운 경력은 그가 아프리카 속주 총독을 지낸 북아프리카 일대의 여러 비문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비문들에 따르면, 루벨리우스 블란두스는 아우구스투스 생전, 아우구스투스를 모시며 행정업무를 처리한 재무관을 시작으로 영예와 경력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때 능력을 인정받아 공화정 시대 동안 내려온 평민귀족( 노빌레스), 기사계급 출신들의 전유물인 호민관, 안찰관 등을 지내고 이를 계기로 원로원 의석을 얻었다고 한다. 이후 그는 티베리우스 시대인 서기 18년 집정관을 지냈는데 2년 뒤, 2차 삼두정치의 한축인 레피두스의 손녀 아이밀리아 레피다를 '간통, 중독, 점성술사와의 교류, 거짓 주장, 전남편 독살 시도'의 죄목으로 기소해 주목을 받았다고 한다. 이때 그는 아이밀리다 레피다와 그녀의 오빠인 티베리우스 황제의 친구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의 호소에도 기어이 유죄를 이끌어내 아이밀리아 레피다를 추방형에 처하게 하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루벨리우스 블란두스는 티베리우스 황제와 원로원 동료들에게 귀족 반열의 신분을 받지 못했다. 이에 관해 로마사학자 호프먼은 두 개의 비문을 통해 분석해보면, 아마 신참자로 늦게 합류해서 그랬을 것이라고 추정 중이다. 그렇지만 이 주장은 블란두스가 조부 때부터 최상류층 기사계급이었던 점, 서기 35, 36년 연이어 아프리카 속주 총독으로 파견됐다는 점, 귀국 후 로마 화재 피해 평가 위원회 4인 중 한명이 됐다는 기록 등을 근거로 반박돼 설득력을 잃은 상태다.
서기 33년,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안에서 아우구스투스, 리비아 드루실라의 피를 이은 황녀 중 한명으로 공인된 율리아 리비아와 결혼했다. 이 결혼 당시, 로마인들은 티베리우스 황제, 원로원, 지식인, 평민 모두 "로마를 슬프게 한 많은 슬픔"이라며 그 결혼이 떳떳하지 못함과 불륜과 간통, 궁중음모로 결합된 일임을 지적하고 이를 사회적 재앙으로 평했다.
율리아 리비아와 결혼해 티베리우스 황제의 손녀사위가 됐음에도,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철저히 외면받아 없는 사람 취급을 대놓고 받았다. 그럼에도 결혼 후 얼마되지 않아 아들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를 얻었고 이후 세 돌이 될 무렵 일찍 요절한 루벨리우스 드루수스를 얻었다.
서기 38년, 병으로 죽었다.
3. 의문스러운 결혼과 그 결말
젊은 시절, 독신주의자이며 동성애자로 유명했던 루벨리우스 블란두스가 서기 33년, 네로 카이사르의 전처인 율리아 리비아와 결혼한 사건은 로마인들에게 사회적 재앙으로 불리며 조롱과 멸시, 천박함, 불륜과 음험함으로 묘사됐다. 이는 루벨리우스 블란두스가 신참자일지라도, 집정관 경력자이자 상당한 부자이며 훌륭한 교양인으로 인정받은 것을 생각해보면 이례적이었다.블란두스와 결혼한 율리아 리비아는 종종 율리아 리비아 카이사리스로 알려진 로마 황녀다. 그녀는 소 드루수스, 리빌라 부부의 장녀로, 티베리우스 황제의 손녀이며 3대 황제 칼리굴라와는 혈연상 육촌이며 사촌, 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 1세는 그녀의 외삼촌이며 오촌당숙이 된다. 따라서 율리아 리비아와 결혼한 것은, 일찍부터 로마 사회에서 평민과 귀족, 기사계급과 귀족들의 통혼이 많았던 현실에 비추어 보더라도 "로마를 슬프게 한 많은 슬픔"으로 폄하될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타키투스가 기록했듯이, 율리아 리비아와 루벨리우스 블란두스의 결혼은 나이 차이도 많이 나고, 귀촌상혼이면서도 루벨리우스 블란두스가 50대가 될 때까지 미혼으로 있다가 권력욕을 위해 의도적으로 네로 카이사르 죽음 후 사별한 공주와 결혼한 케이스인지라 처음부터 큰 논란을 일으켰다. 더욱이 루벨리우스 블란두스는 최근 연구에서 미혼 상태 내지 이른 결혼에서 사실혼으로 얻은 딸 루벨리아 바사도 있었고, 집정관을 경험한 이후 끊임없이 귀족이 되고자 노력했던 행보도 있어 로마인들이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는 대충 이해가 갈 것이다.
설상가상 부부의 결혼이 서기 33년이고, 이들의 첫 아이인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가 33년생이라는 점은 이들이 최소 네로 카이사르 몰락 직후부터 상당히 깊은 관계임을 알려주는 증거로 평가받는다.
이런 배경 때문에 루벨리우스 블란두스 부부의 결혼과 이들 부부의 아이들의 출산은 그 자체만으로, 황제, 황실, 원로원, 로마 지식인 사회 모두에게 상당한 논란을 일으키고 환영받지 못했다. 하여 타키투스는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 부모의 결혼과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의 잉태, 탄생은 100년 뒤에도 "로마를 슬프게 한 많은 슬픔" 상단에 이름을 올리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