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 카피톨리누스 라틴어: Quintus Lutatius Catulus Capitolin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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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기원전 121년 ~ 기원전 61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아버지) 세르빌리아(어머니) 루타티아(누이) 루타티아(딸) 갈바(증손자)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78년 |
전임 |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바티아 이사우리쿠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
동기 |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
후임 |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마메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리비아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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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집정관. 가이우스 마리우스에게 자살을 강요당한 아버지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의 원수를 갚기 위해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편에 섰다. 이후 강경 옵티마테스파로서 술라의 개혁을 보전하고자 노력했지만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등 같은 술라파가 술라가 정한 규정에 제대로 따르지 않으면서 무산되었다. 말년에 떠오르는 신진이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위험인물로 간주하고 배제하려 했으나 결국 실패했다.2. 생애
비교적 오래된 노빌레스 가문인 루타티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조상인 가이우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는 기원전 242년 가문 최초로 집정관을 맡은 뒤 아이가테스 해전에서 카르타고 해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해 제1차 포에니 전쟁을 종결시키는 공적을 세웠다. 이후 루타티우스 일족은 고위 행정관에 이름을 종종 올렸지만, 기원전 241년 퀸투스 루타티우스 케르코, 기원전 220년 가이우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 외에는 집정관을 더 이상 배출하지 못했다. 이에 대해 독일의 역사학자 프리드리히 뮌처는 루타티우스 일족이 명문가 같아보이나 실제로는 퇴락했다고 평했다.아버지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는 기원전 102년 집정관을 역임했고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함께 킴브리 전쟁에서 승리를 거뒀다. 그러나 전쟁 이후에는 마리우스에게 등을 돌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편에 섰다. 어머니 세르빌리아는 기원전 140년 집정관이며 루시타니아 전쟁을 종결시킨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의 딸이다. 누이로 기원전 69년 집정관을 역임한 퀸투스 호르텐시우스 호르탈루스의 아내인 루타티아가 있었다.
술라가 고위 행정관에 오를 연령을 제한한 법과 그가 집정관에 역임된 시기에 따라, 학자들은 그의 출생년도를 기원전 121년경으로 가정한다. 그는 군대에 복무할 나이가 되었을 때 아버지의 군단에 들어카 킴브리족과 전쟁을 벌였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당시 젊은 나이였던 그가 기원전 100년 12월 원로원 최종권고를 선고받은 호민관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 일당을 처단하기 위해 포로 로마노에 집결한 귀족 무리에 아버지와 함께 가담했다고 밝혔다. 서기 1세기의 역사가 발레리우스 막시무스는 그가 젊은 시기를 많은 사치와 즐거움으로 보냈다고 기술했다.
기원전 91년 말 동맹시 전쟁이 발발했을 때 아버지의 이부형제인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군단에 장교로 복무했을 것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동맹시 전쟁이 종결된 후인 기원전 88년 술라가 로마에 군대를 이끌고 입성한 뒤 아프리카로 달아난 마리우스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했을 때, 아버지 카툴루스는 이 조치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그러나 기원전 87년 마리우스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 등과 함께 연합하여 로마로 돌아와 반대파를 물리치고 로마에 입성한 뒤, 카툴루스 집안은 심대한 위협에 직면했다. 마리우스는 정적들을 대숙청하면서 카툴루스를 반드시 척살해야 할 인사로 간주했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카툴루스 본인이 마리우스에게 자비를 구했지만 묵살당하자 자신의 집에 틀어박혀 새로 칠한 방에서 숯불을 피우고 연기에 질식해 죽었다고 한다. 플로루스에 따르면, 그는 불속으로 몸을 던져 죽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이렇게 비참하게 살해되었을 때, 아들 카툴루스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일부 학자들은 그의 누이 루타티아와 매부 호르텐시우스가 망명하지 않았던 점을 들어 그는 로마에 남아있었을 거라고 추정하지만, 아일랜드 역사가 아서 피터 키베니(Arthur Peter Keaveney, 1951 ~ 2020)는 마르쿠스 안나이우스 루카누스(Marcus Annaeus Lucanus)의 풍자시에 "루타티우스 카툴루스 부자는 킨나의 통치 기간 동안 증오로 낙서했다"라는 대목이 있는 점, 아테네에서 발견된 비문에 카툴루스가 도시에 자선을 베푼 것을 보답하기 위해 영예를 수여한 사실이 적혀 있는 점을 볼 때 카툴루스가 발칸 반도로 도망쳐서 술라에 합류했고 술라에게 아테네를 더 이상 핍박하지 말라고 요청했을 것이라 추정했다. 이렇듯 카툴루스가 로마를 떠났는지 여부에 관해 상반된 가설이 제기되었지만, 기록이 미비해서 어느 쪽이 맞는지 분명하지 않다.
기원전 82년, 술라의 내전에서 승리한 술라는 로마로 들어온 뒤 마리우스파를 철저히 숙청했다. 이때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조카이며 기원전 84년 법무관을 역임했던 마르쿠스 마리우스 그라티디아누스가 카툴루스의 아버지가 묻힌 무덤 앞에서 눈이 뽑히고 혀가 베어지고 손이 잘려나가고 다리가 부러지는 등 심한 고문을 받은 끝에 살해되었다. 플루타르코스와 세네카는 술라의 젊은 추종자였던 루키우스 세르기우스 카틸리나가 이 잔학행위를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일설에 따르면, 마르쿠스 마리우스가 사형을 선고받았을 때 카툴루스가 술라를 찾아가서 아버지의 무덤 앞에서 그를 처참하게 죽여달라고 청했고, 술라는 이를 받아들여 카틸리나에게 사형 집행을 맡겼다고 한다.
파울루스 오로시우스는 카툴루스가 거리에서 학살이 벌어지는 것을 지켜보다가 술라에게 "평시에 무장하지 않지만 전쟁 중에 무기를 들 자들을 죽인다면 나중에 누구와 함께 외적을 물리칠 겁니까?"라고 따져물었고, 술라는 이에 따라 학살을 그만두고 구제척인 숙청자 명단을 내건 뒤 이들만 죽이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고대 역사가들이 이를 언급하지 않기 때문에 신빙성이 떨어진다. 기원전 81년 법무관에 선임된 그는 술라에게 디오도로스라는 시칠리아의 릴리바에움 시민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할 것을 부탁해 승인을 얻어냈다고 전해진다.
이후 기원전 78년 집정관 선거에 출마한 그는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와 함께 당선되었다. 그러나 그는 레피두스와 심각한 갈등을 벌이기 시작했다. 술라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카툴루스는 술라의 장례식을 국장으로 치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레피두스는 술라는 그럴 자격이 없으며 아예 장례식을 치를 명예조차 박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소식을 접한 술라의 퇴역병들이 로마에서 몰려와 항의하자, 레피두스는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고 장례식은 카툴루스의 주장에 따라 국장으로 치러졌다.
얼마 후 술라에게 로마 시민권을 박탈당하고 술라의 퇴역병들에게 시달리던 에트루리아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원로원은 두 집정관에게 반란 진압을 맡기면서 서로에게 무기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게 했다. 이후 레피두스가 에트루리아인들을 옹호하며 반란에 동조하는 기색을 노골적으로 내비치자, 카툴루스는 레피두스가 공개적으로 반란을 일으킬 때까지 군대를 소모시키지 않기 위해 군대를 후방으로 물렸다. 결국 레피두스가 에트루리아인과 합세해 반란을 일으키자, 카툴루스는 로마로 돌아와서 원로원에 당장 레피두스를 국가의 적으로 단죄하고 토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원전 91년 집정관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도 그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찬성했지만, 원로원은 레피두스를 당해내지 못할 것을 걱정해 레피두스가 반란을 중단한다면 사면하겠다고 제안하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레피두스는 개혁을 요구하며 거부하고 로마를 향해 진격했다. 이에 원로원은 원로원 최종결의를 반포하고 레피두스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한 뒤 카툴루스에게 반란 토벌을 맡겼다. 하지만 실질적인 지휘는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가 맡았다. 로마 인근의 캄푸스 마르티우스에서 벌어진 격전 끝에 레피두스는 패배하고 에트루리아로 후퇴했다가 전열을 재정비한 뒤 다시 로마로 진군했으나 또다시 패배하고 에트루리아의 코자 시로 퇴각했다. 카툴루스는 코자 시민들에게 사면을 약속했고, 시민들은 이에 호응해 레피두스를 몰아냈다. 결국 레피두스는 사르데냐로 도주했다가 그곳에서 곧 사망했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에 따르면, 그는 얼굴에 억제된 기쁨의 표정을 지으며 로마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 후 카툴루스는 폼페이우스에게 군대를 해산하라고 명령했지만, 폼페이우스는 이에 따르지 않고 히스파니아 속주에서 할거하는 마리우스파 인사 퀸투스 세르토리우스와의 전쟁을 지휘할 사령관으로 임명해달라고 요구하며 로마 인근에 군대를 배치했다. 폼페이우스를 당해낼 병력과 힘이 없었던 카툴루스와 원로원은 어쩔 수 없이 폼페이우스가 원하는 대로 해줬다. 기원전 75년 호민관 퀸투스 오피미우스가 술라에 의해 폐기된 호르텐시우스 법을 부활시키려 하자 이를 결사적으로 반대해 관철시켰으며, 기원전 73년 호민관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마케르가 또다시 호르텐시우스법을 부활시키는 안건을 제시하자 이를 반대했으나 이번에는 무산되었다. 기원전 70년 집정관을 맡은 폼페이우스와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호민관을 맡은 자는 다른 공직을 맡는 것을 금지하는 술라의 법을 폐지했다. 카툴루스는 이번에도 반대했지만, 여론이 두 집정관의 편에 서자 어쩔 수 없이 뜻을 접어야 했다.
기원전 70년, 카툴루스는 가이우스 베레스 재판의 판사를 맡았다. 이 인물은 시칠리아 총독 시절 속주민들을 과도하게 착취한 혐의로 고발되었다. 베레스를 고발한 시칠리아인들의 변호인을 맡은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탁월한 웅변술을 발휘해 베레스 측 변호를 맡은 퀸투스 호르텐시우스 호르탈루스를 압도했고, 카툴루스는 베레스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베레스는 재판이 가망이 없다는 것을 일찍이 깨닫고 판결이 내리기 전에 망명했다. 기원전 69년, 카툴루스는 기원전 83년 내전 당시에 소실된 카피톨리누스 언덕의 유피테르 신전을 재건하고 건 물 지붕을 금도금한 청동으로 덮었다. 원로원은 그의 공적을 인정해 '카피톨리누스'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기원전 67년 호민관 가이우스 코르넬리우스가 "로마 국민의 위대함을 모독하고 동료 호민관의 거부권 행사에도 불구하고 연단에서 자신의 법안을 읽은 혐의"로 고발당했다. 기소 측에는 그 외에도 메텔루스 피우스,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 루쿨루스, 마니우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있었다. 그러나 키케로가 피고측 변호인을 맡아 탁월한 변호를 하였고, 결국 코르넬리우스는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 해, 카툴루스는 폼페이우스가 해적을 토벌하기 위해 지중해 전역의 해군과 해안 지대를 3년간 관리할 권한을 부여하자는 호민관 아울루스 가비니우스의 법안에 반대했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가비니우스의 법안이 민회에 상정되었을 때 카툴루스가 민중을 돌아보며 물었다.
"많은 전쟁, 특히 해상에서는 생각지 못한 사태가 벌어질 수 있는 법이오. 폼페이우스가 이 임무에서 실패한다면, 누가 이 위험하기 짝이 없는 임무를 맡길 원하겠소?"
그러자 군중이 미리 합의한 것처럼 다음과 같이 외쳤다고 한다.
"당신이오!"
카툴루스의 열띤 반대에도 불구하고, 가비니우스의 법안은 통과되었다. 이듬 해인 기원전 66년, 해적을 3개월 만에 토벌한 폼페이우스에게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을 벌이며 로마를 계속 적대하는 폰토스 왕국의 국왕 미트리다테스 6세를 무너뜨릴 권한을 부여하자는 호민관 가이우스 마닐리우스의 법안이 제시되었다. 그는 이번에도 반대했지만, 폼페이우스에게 열광한 민중이 압도적인 표로 민회에서 통과시키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기원전 65년, 그는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와 함께 감찰관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곧 갈등을 벌였다. 크라수스는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의 라틴 시민권을 부여받은 인구를 조사하던 중 갈리아 트란살피나 속주 역시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집트의 전 파라오 프톨레마이오스 10세가 죽기 전에 "자신이 후계자 없이 사망할 경우 이집트를 로마 공화국에 맡기겠다"고 한 유언장 대로 이집트를 로마의 속주로 삼자고 주장했다. 그는 이 두가지 제안 모두 적극적으로 반대했지만 크라수스가 강경하게 나오자 도저히 크라수스와 함께 할 수 없다고 여기고 사임했다.
그가 아직 감찰관을 맡고 있을 때, 소 카토가 재무 서기관 한 명을 "의무에 대한 경솔한 태도"로 고발하자 그 서기관을 변호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카툴루스는 서기관이 무죄를 선고받을 객관적인 근거가 없다고 여기고 용서를 요청하기 시작했다. 카토가 그에게 입다물라고 요구했지만, 카툴루스는 점점 더 완고하게 주장했다. 그러자 카토는 다음과 같이 외쳤다.
"부끄러운 일이오, 카툴루스! 우리의 도덕을 감찰하는 것이 의무인 감찰관이 서기관 하나 때문에 직임을 위배해야 하다니 말이오!"
카툴루스는 그 말을 듣고 카토에게 눈을 돌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자리에 조용히 앉았다. 하지만 그는 당시 집에 병들어 누워 있던 호민관 한 명을 설득해 들것에 실어서 포룸에 와서 투표를 하도록 했고, 이로 인해 배심원의 표결이 동등하게 나뉘어지면서 무죄가 선고되었다고 한다.
같은 해, 젊은 귀족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조영관에 선출되었다. 그는 검투 경기 등 각종 행사를 대대적으로 집행하는 한편, 자신을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후계자로 공공연히 내세웠다. 민중은 카이사르의 이같은 언행에 열광적으로 환호했고, 카툴루스 등 귀족들은 카이사르에게 반감을 품었다. 기원전 63년 메텔루스 피우스가 사망하면서 폰티펙스 막시무스가 공석이 되자, 카툴루스는 즉시 선거에 출마했다. 다른 경쟁자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기원전 79년 집정관이었던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바티아 이사우리쿠스였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카툴루스는 카이사르에게 거액의 뇌물을 주고 사임하라고 권했지만 카이사르에게 거절당했다고 한다. 선거 결과, 카툴루스는 이사우리쿠스보다 더 많은 표를 얻었지만 서로 표를 갉아먹은 바람에 카이사르가 당선되었다.
기원전 63년, 집정관 선거에 연이어 낙선하면서 정치적 위기에 몰린 카틸리나는 정권을 무력으로 뒤엎을 음모를 꾸몄다. 사실 그와 카틸리나는 상당히 우호적인 관계였다. 기원전 73년 카틸리나가 베스타 여사제 파비아를 유혹했다는 고발을 받았을 때, 카툴루스가 그를 변호해 혐의를 벗겼다. 카틸리나는 그를 포섭하거나 적어도 자신을 옹호해줄 거라 여기고, 로마를 떠나 에트루리아로 가서 추종자 가이우스 만리우스가 모은 군대와 합세한 뒤 아내 아우렐리우스 오레스틸라에게 서신을 맡겨 카툴루스에게 보냈다. 그러나 카툴루스는 자신이 음모에 연루되지 않았음을 입증하기 위해 원로원으로 가서 그 편지를 공개적으로 읽었다.
이 당시 그는 카이사르를 카틸리아 음모에 엮고자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카틸리나 탄핵을 이끈 집정관 키케로에게 카이사르를 거짓으로 고발하도록 설득했다. 키케로가 이에 응하지 않자, 카이사르가 음모에 가담했다는 소문을 퍼트렸다. 이를 믿은 일부 에퀴테스들은 카이사르를 습격해 죽이려 했고, 카이사르는 가까스로 피신했다. 기원전 63년 12월 5일 카틸리나 일당을 상대로 원로원 최종 결의를 선포할 지를 논의하고자 개최된 원로원 회의가 열렸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카이사르가 카틸리나 일당에게 사형이 아닌 종신 금고형을 선고하자고 발언한 뒤 이를 반대하고 로마에 남아있는 공모자들을 처단하자고 촉구했다고 한다. 하지만 다른 역사가들은 이에 대해 별다른 설명이 없고, 연구자들은 전직 감찰관이 막 지명된 법무관보다 훨씬 일찍 발언해야 한다며 플루타르코스가 일부러 순서를 뒤바꿨다고 본다. 어쨌든 카이사르의 제안은 거부되었고, 공모자들은 같은 날 밤에 처형되었다. 카툴루스는 나중에 로마를 카틸리나 일당으로부터 구했다며 키케로를 "조국의 아버지"라고 칭송했다.
기원전 61년 1월 법무관 임기를 시작한 카이사르는 카툴루스에 대한 복수를 시도했다. 그는 카피톨리누스 언덕의 유피테르 신전 건설에 대한 재무 보고서와 작업 진행 상황을 살펴보니 미진하기 짝이 없다며 공사 집행을 폼페이우스에게 양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원로원이 이에 대해 별다른 호응을 하지 않았기에 그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후 지난 해 12월 초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가 보나 데아(Bona Dea: 순결과 출산의 신) 여신에게 바치는 비밀제의가 열리던 카이사르의 관저에 침입해 카이사르의 아내 폼페이아 술라와 밀회하려다가 발각당한 스캔들에 대한 재판이 열렸다. 클로디우스가 무죄를 선고받자, 카툴루스는 판사들에게 냉소적으로 말했다.
"당신들은 판결을 내리고 보호를 요청했다던데, 정말 그래야겠군요. 당신들은 결국 돈을 빼앗길까 두려웠을 테니까요!"
이는 클로디우스의 가문인 클라우디우스 씨족에게 막대한 뇌물을 받은 판사들이 돈을 잃을 것을 우려해 무죄를 선고한 거라고 비꼰 것이었다. 그가 언제 사망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학계에서는 기원전 61년 즈음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아내와의 사이에서 딸 루타티아를 낳았다. 루타티아는 기원전 146년 집정관 루키우스 뭄미우스 아카이쿠스의 손자인 스푸리우스 뭄미우스와 결혼해 딸 뭄미아 아카이카를 낳았다. 뭄미아 아카이카는 기원전 5년 집정관을 역임한 가이우스 술피키우스 갈바와 결혼해 훗날 로마 황제가 될 갈바를 낳았다. 즉, 갈바는 카툴루스의 외증손자였다. 갈바는 훗날 자신의 외양을 담은 입상을 세울 때 비문에 "퀸투스 카툴루스 카피톨리누스의 외증손자"라고 새길 정도로 그의 피를 물려받은 것을 자랑스러워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