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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 제76대 황제
레온 3세 Λέων 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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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온 이사우로스 (Λέων ὁ Ἴσαυρος) |
출생 | 685년 |
우마이야 왕조 마라쉬 | |
사망 | 741년 6월 18일 (향년 56세) |
동로마 제국 | |
재위 기간 | 로마 황제 |
717년 3월 25일 ~ 741년 6월 18일 (25년) | |
전임자 | 테오도시오스 3세 |
후임자 | 콘스탄티노스 5세 |
배우자 | 마리아 |
자녀 |
콘스탄티노스 5세 안나 |
종교 | 기독교 |
[clearfix]
1. 개요
로마 제국의 제76대 황제. 717년에 20년간의 혼란 이후 즉위하여 이사브리아 왕조를 개창했다. 우마이야 왕조와의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에서 대승하고, 테마 제도를 정비하여 제국을 구원한 명군이었지만 동시에 <성상 파괴령>을 내려 이후 한 세기 가량 종교적 갈등을 유발한 황제이다.[1]
2. 제위에 오르기까지
원래는 '코논'(Konon)이라는 이름의 시리아계 출신이었다. 게르마니키아(現 터키 마라쉬; Marash)에서 태어났는데 문제는 그 곳이 아예 이슬람 제국의 영토였다는 것이다.[2] 어쨌든 그래서 아랍어에 유창했고 일설로는 아예 모국어일 수도 있다고 하며, 후대의 저술가인 '고백자 테오파네스'(Theophanes the Confessor)는 아예 그를 '사라센의 정신이 있는 자'라고까지 했다.[3] 이후 자의든 타의든 어찌저찌해서 국경을 넘어 멀지 않은 동로마 제국령 소아시아 중남부의 이사우리아에 정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그래서 이 사람이 세운 왕조를 후대에 소위 이사우리아 왕조라고 통칭하는 것이다. 예전 학계에서는 이사우리아에서 태어난 것으로 파악해 왔으나, 오류로 밝혀졌다. 고향 문서 중 '출생장소'와 '성장기 연고지'를 보면 이해에 도움이 될 듯 하다.[4] 어쨌든 이후에는 거의 타의로[5] 트라키아로 이주되었고 유스티니아노스 2세를 모시는 근위대로 들어갔다. 거기서 두각을 드러내어, 이후 유스티니아노스 2세가 퇴위되었다가 복위하는 과정에서 조력하여 출세가도를 걷게 되었다.[6] 이후 외교와 군사 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아나스타시오스 2세의 치세에는 최고 중요 테마인 아나톨리콘 테마의 스트라테고스가 되었다.
테오도시오스 3세의 치세에 아르메니아콘 테마의 스트라테고스인 아르타바스도스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 쿠데타를 일으켰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해, 총대주교와 원로원을 상대로 협상을 벌여 717년 3월 25일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즉위식을 마치 《구약성경》의 모세처럼 물 위에서 즉위식을 치렀다고 한다.[7] 이후 아르타바스도스는 레온 3세의 집권을 도운 공로로 '쿠로팔라테스'를 수여받았으며, 기존 아르메니아 테마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동시에 옵시키온 테마의 지휘권까지 쥐게 되었다.[8] 이를 통해서 명목상 동급의 직책이라도 수도와 가장 가까운 옵시키온 쪽의 직책이 보다 높은 것으로 여겨졌음을 알 수 있다.
3. 통치
재위 내내 이슬람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방어하여 이슬람의 유럽 진출을 막아내는 성과를 내었다. 당장 제위에 오른 717년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을 치러냈으며, 727년 니케아, 739년 니코폴리스에서 아랍인들을 격파했고 결정적으로 740년 아크로이논 전투에서 우마이야 왕조 군대를 크게 격파했다. 하지만 이는 그만큼 이슬람 세력이 인력과 자원을 717~18년에 일어난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에서 어마어마하게 소모하고도 그리 멀지 않아 다시 아나톨리아에 국력을 투사할 역량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된다. 사학자 Judith Herrin의 《The Formation of Christendom》322p에 따르면 저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승리로 제국은 그저 생존한 것뿐이지, 그렇다고 해서 소아시아까지 온전히 건사할 수 있었던 것은 전혀 아니라고 한다. 그만큼 우마이야 이슬람 제국과의 국력 차이가 컸던 것이다.[9] 영어 위키백과 'Arab–Byzantine wars'의 'Raids under the last Umayyads and the rise of Iconoclasm' 문단에, 딱 이 레온 3세 및 후계자 콘스탄티노스 5세의 초기 치세와 일치하는, 717~718 제4차 콘스탄티노플 공방전 이후 750년에 우마이야 왕조가 멸망하기까지의 우마이야 말기의 이슬람-동로마 전쟁 상황이 기술되어 있다. 그래서 공격이 곧 최선의 방어라고, 이에 대한 예방전쟁 차원으로 해군을 보내 시리아의 라오디케아( 라타키아)를 약탈하기도 했다고 한다.[10]다만, 그렇다고 해서 717년의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의 의의를 무시할 이유는 없다. 이슬람의 팽창은 당대까지도 무시무시한 맹위를 떨치고 있었으며, 동로마 제국은 유스티니아누스 2세의 폭정과 그로부터 비롯된 이른바 20년간의 무정부 상태에서 막 벗어난 상태였다. 당장 레온 3세 본인조차도 제위에 등극한 지 1년밖에 안 된 상태였을 정도였다. 이렇게 동로마 제국은 분열되어 있었고, 동쪽으로는 이슬람, 북쪽으로는 슬라브, 서쪽으로는 롬바르드인들의 침략이라는 3면 전선에서의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다. 국고는 고갈되었고, 테마 제도가 이 시기에 확립되어 비로소 제국이 군사적으로 회복의 발판을 다질 수 있었다지만, 결국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진다면 그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 것이었다. 이슬람이 콘스탄티노폴리스라는 거대한 관문을 거쳐야만 유럽 대륙으로 넘어갈 수 있었듯, 레온 3세와 로마인들 또한 여기서 이슬람을 막아내어야만 제국의 700년 사직을 건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멋지게 성공했다.
즉 이 사람의 통치기를 거치며 제국은 중장기적인 생존이 보장되었으며, 개편된 체제가 자리잡아가기 시작하여 중흥의 발판을 닦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프린스턴 대학 비잔티움·그리스학 교수 John Haldon 또한 '동로마의 생존투쟁이 이로써 끝나며 생존은 한동안 보장되었다'는 의미를 740년 동로마 측의 아크로이논 전투 승리에 담아서 저서의 제목을 정했다: ' 《The Empire That Would Not Die: The Paradox of Eastern Roman Survival, 640-740》 (《죽지 않는 제국: 동로마 생존의 역설》)'
대표적으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이래 제국의 세제였던 양출제입의 분배세가 현대의 재무제표와 비슷한 서류에 근거한 양입제출의 세제로 바뀌어가기 시작했다. 711년 필리피코스 황제의 시대부터 시작되어 802년 니키포로스 1세의 치세에 이르러서야 완성이 되었지만, 레온 3세의 치세때 당면한 외침을 극복해내기 위한 급박한 상황에서는 도저히 할 수 없었던 인구조사와 토지조사를 실시하고 그 기반을 닦은 것은 높이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편성만 해놓은 채 둔전 지급도 제대로 되지 않고 경계도 불분명하던 테마 제도 역시 그의 치세에 점차 다듬어지기 시작하여 니키포로스 1세의 치세에 우리가 아는 행정구역의 형태로 완성되었다. 테마 제도 문서에 자세하게 나오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7/8세기의 지방행정체제를 테마 제도라고 지칭하는 것은 후대의 개념을 전대로 소급시키는 것으로서 오류이고, 이 때는 스트라티고스(Strategos)가 다스리는 구역인 스트라티기아(Strategia)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는 주장이 있다.
또한 법제에도 신경 썼다. 《에클로가》(Ecloga)[11]라는 법령집을 편찬했다. 해당되는 벌이 사형으로 규정되어 있었던 죄의 상당수를 '신체훼손형'(mutilation)으로 낮추었다. 한편 그러면서도 인구를 늘리기 위함이었는지, 낙태를 불법화했고 동성애의 최대 처벌을 사형으로 규정했으며, 이혼에 어느 정도의 제한을 가했다. 종전의 사형 수위를 낮추었으면서도 동성애에 대해서는 오히려 새로이 사형까지 할 수 있게 한 것은 인구 문제에서는 타협은 없다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730년에는 이탈리아 반도를 포함한 제국 전역에 '센서스'를 실시했다. 그런데 로마 교황은 황제에 항의하는 차원에서 본인의 힘이 직접 닿는 로마-라벤나의 이탈리아 중북부 지역에서는 센서스를 못하게 막았다고 한다.
이러한 식으로 행정이 제대로 굴러가자 경제 구조가 개편되고 군사적인 자신감이 붙자 제국 국민들의 생활이 안정되었으며, 적극적으로 이민족을 수용하여 인구 성장의 기반도 마련했다.
한편, 우마이야군을 물리친 지 얼마 안 된 719년에는, 폐위되어 수도원으로 물러앉았던 전임 황제 아나스타시오스 2세가 내응할 수도의 고위인사들과 불가리아 칸 테르벨의 군사적 협력을 약속받고서 수도원을 박차고 나와 복위를 시도했다. 그런데 서로 서신을 주고받던 도중 내응을 맡기로 된 사람들의 서신이 레온 3세의 손으로 들어가게 되어 발각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내응은 사전에 진압되었다. 한편, 아나스타시오스 2세가 불가리아군과 함께 콘스탄티노플 성벽 앞까지 당도했는데, 레온 3세가 불가리아 측에 항의하는 서신을 보내자[12] 그들은 제국 국내 문제에 끼어든 것(transgression)을 사과하면서 오히려 아나스타시오스 2세와 그 일파들을 체포해 레온 3세에게 넘겨주었고(...) 이들은 당연히 내전에 외국군을 끌어들인 외환의 죄를 지은 것이 되어 모두 처형당했다.[13]
3.1. 성상 파괴 운동
외침과 반란을 성공적으로 극복해내어 지위가 공고해지자 황제는 성상 문제를 공개적으로 건드리기 시작했다. 이런 저런 조짐을 보이더니 726년에 <성상 파괴령>을 내린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콘스탄티노플 대궁전의 정문이자 구리로 되어있다고 해서 이름붙은 할키 문[14]위의 금으로 만든 예수 성상이 제국 전체의 성상들 중 제1호 성상으로 여겨지고 있었는데 그것을 떼어내고 단순한 십자가로 교체하게끔 것이 726년이고[15], 제국 전역에서 성상을 파괴해야 함을 규정해서 칙령을 내린 것은 730년이었다.[16]
옛날부터 동방 테마들은 우상 숭배 금지를 외치며 성장한 이슬람의 영향을 받았기에 황제도 이 같은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성상을 공경하는 자국이 성상을 배제한 이슬람에게 계속 지니까 '그래, 우리도 성상 배제 한 번 해보자'는 생각도 작용했다고 한다.
또한 대내적인 이유도 있었다.
첫째, 외침이 이어지고 피난민과 이민족이 제국으로 유입되어 사회가 전반적으로 혼란스러워지자 국가의 구심점이 될 국가 종교의 정체성을 확고히 필요가 있었다.
둘째, 동양의 황제처럼 정교일치가 아니라 종교 권력과 영향력을 나눠 경쟁하던 로마의 황제로선 성상을 옹호하는 교회를 신학 논쟁으로 공격하여 영향력을 낮출 수 있었다.
셋째, 성상을 옹호하는 주교를 네스토리우스파 등의 이단으로 몰아 교회 재산을 손쉽게 몰수하여 국가 재정에 보탤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50여년 동안의 성상 파괴 운동 끝에 성상 공경은 70여 년 후인 787년의 제2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정통 신앙으로 인정받았으나, 성상 파괴주의가 완전히 사그라든 것은 843년으로[17] 100년을 넘게 골칫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라벤나 총독부와 총독부의 통제를 받던 이탈리아인들은 여전히 성상을 공경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국 정부에 반발했고, 727년에 반란을 일으켜 라벤나 총독 파울로스를 죽이고 사실상 제국에서 독립해버렸다. 730년에 실시된 제국 전국 차원의 센서스까지 교황 주도로 거부했으니 말 다 했다. 결국 이는 콘스탄티노스 5세 재위기에 있었던 라벤나 총독부의 해체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투시아에서 티베리오스 페타시오스가 반란을 일으켜 3년간 황제를 자칭하다가 진압되기도 했다. <성상 파괴령>에 완강하게 저항했던 교황에 대한 보복으로 종전에는 로마 교구에 속했던 일리리쿰과 현대 그리스의 대부분을 740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 교구로 옮긴 것도 레온 3세였다. 동방 정교회를 통상 그리스 정교회라고 하지만, 제국 전역에 걸쳐 교구가 설정되었던 때부터[18] 이 때까지 현대 그리스의 대부분은 로마 교구, 즉 가톨릭 교회에 속했다는 것은 재미있다.[19] 사실 원래 라벤나 주둔군으로는 이탈리아에서의 교황의 권위가 워낙 세져서 불가능해지니 중앙군을 보내서 이탈리아를 진압하려고 했지만 그 선단이 중간에 좌초되었다. 그래서 무력 집행은 안 되겠으니까 그 대신 교황의 관할 구역을 줄인 것이다.[20] 여하튼 이 때문에 레온 3세는 수백 년간 이루어진 동서 대분열의 책임자 중 한 명으로 꼽힌다. 결국 제국 및 정교회가 성상 옹호로 돌아갔기 때문에, 업적에 비해서 후대에 '저 사람이 성상 파괴를 시작해서 깽판 쳤었지' 하면서 나머지 잘했던 것들까지도 같이 저평가를 받는 측면도 분명히 있다.
한편 이탈리아와 거의 같은 727년 즈음에 소아시아 남부의 카라비시아노이 테마와 그리스 지역의 헬라스 테마에서 아갈리아노스 콘토스켈레스 등의 주도로 반란이 일어났지만 이탈리아와는 달리 조기에 진압이 된 것으로 보인다.[21]
4. 사망
레온 3세는 741년 6월 18일에 사망했다. 제위는 마리아 황후와의 사이에서 낳은 장남 콘스탄티노스 5세가 계승했다.
[1]
성상 논쟁을 단순한 종교적 갈등으로 치부하는 것은 큰 오류이다. 동로마 제국에서 종교 문제는 현대인의 생각보다 훨씬 중대한 사항이었고, 성상 논쟁은 약 130년간 지속되면서 제국의 힘을 갉아먹었다.
[2]
영어 위키백과
Leo III the Isaurian 중, 'Leo was of Syrian origin, his original name was Konon, was born in Germanikeia in the Syrian province of Commagene (modern Kahramanmaraş in Turkey).' Kahramanmaras는 Marash의 공식명칭이지만 현지의 통칭은 Marash인 것으로 보인다. 서로 다른 곳이 아니라 같은 곳이다.
[3]
영어 위키백과
Leo III the Isaurian 중, 'Leo was fluent in Arabic, possibly as a native language, and was described by Theophanes as "the Saracen minded."'
[4]
브라티니아 백과사전 'Isauria' 중, 'The Byzantine emperor Leo III (reigned 717–741) was once called the Isaurian, but on the mistaken belief that he had been born in Isauria.'
[5]
영어 위키백과에 'Konon's family had been resettled in Thrace'라고 수동태로 표현되어 있다. 이는 동로마 정부의 인구 재배치(사민정책)를 의미한다. 동부 출신인 코논(레온)과 그 가족을 서부인 유럽 대륙의 트라키아로 옮긴 것이다.
[6]
영어 위키백과
Leo III the Isaurian 중, 'Some, including the Byzantine chronicler Theophanes, have claimed that Konon's family had been resettled in Thrace, where he entered the service of Emperor Justinian II, when the latter was advancing on Constantinople with an army of loyalist followers, and horsemen provided by Tervel of Bulgaria in 705.'
[7]
출처: 유튜브 'Eastern Roman History'의
Leo III: The Lion of the East의 2분 55초 전후
[8]
영어 위키백과
Artabasdos 중, 'Artabasdos was awarded the rank of kouropalates ("master of the palace") and became commander (count, komēs) of the Opsikion theme, while retaining control of his original command.'
[9]
즉 740년의 아크로이논 전투 승리의 의의는 이 아나톨리아의 상시적인 위기상태가 해소된 것이었다.
[10]
출처: 유튜브 'Eastern Roman History'의
Leo III: The Lion of the East의 4분 20~50초 정도
[11]
영어로는 《Extract》. 《발췌 법령집》 쯤 된다.
[12]
아마 '불과 얼마 전에 같이 이슬람에 맞서
치열한 전투를 벌인 사이인데 당신들 이럴 꺼야?' 였을 수도 있다.
[13]
출처: 유튜브 'Eastern Roman History'의
Leo III: The Lion of the East의 5분대 후반
[14]
Χαλκῆ ,Chalke, Bronze, 동(銅)
[15]
영어 위키백과
History of the Byzantine Empire 중, 'Leo III, ordered the removal of the great golden icon of Christ that decorated the Chalke Gate or vestibule to the Great Palace of Byzantium. "Chalke" means bronze in the Greek language and the Chalke Gate derived its name from the great bronze doors that formed the ceremonial entrance to the Great Palace.' 및, 'The primary icon of all Byzantium was the golden Christ over the Chalke Gates.', 'Leo's order for the removal of the golden Christ over the Chalke Gates and its replacement with a simple cross was motivated by the need to mollify the rising tide of popular objection to all religious icons.'
[16]
영어 위키백과
History of the Byzantine Empire 중, In 730 AD, Leo III issued an edict which made iconoclasm official policy throughout the Empire.
[17]
이 성상 파괴운동의 종말 및 성상 공경으로의 복원을 '정교 승리'라고 한다.
[18]
넓게 잡으면 325년 니케아 공의회, 좁게 잡아도 6세기 중반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5대 총대주교(Pentarchy) 시스템 정립 때부터.
[19]
지도를 보면
테살로니키도 로마 교구에 속해 있었다. 현대 그리스 기준으로는 동북쪽 트라키아 쪽 일부만이 당시 콘스탄티노플 교구에 속해 있었다.
[20]
영어 위키백과
Leo III the Isaurian 중, 'in 740 Leo retaliated by transferring Southern Italy and Illyricum from the papal diocese to that of the patriarch of Constantinople. The struggle was accompanied by an armed outbreak in the exarchate of Ravenna in 727, which Leo finally endeavoured to subdue by means of a large fleet. But the destruction of the armament by a storm decided the issue against him;'
[21]
Cyril Mango의 '
The Oxford History of Byzantium'의 139p 중, 'In 727 the Carabisian Theme and the Theme of Hellas rebelled against him, possibly because of the edict; but he defeated the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