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르마니쿠스 카이사르
GERMANICVS CAESA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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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
게르마니쿠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Germanicus Julius Caesar) |
왕조 |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Julio-Claudian Dynasty) |
신상 정보 | |
출생 |
기원전 15년
5월 24일 로마 제국 로마 |
사망 |
19년
10월 10일 (33세) 로마 제국 시리아 속주 안티오키아 |
배우자 | 대 아그리피나 |
자녀 | 네로 카이사르, 드루수스 카이사르, 가이우스(칼리굴라), 소 아그리피나, 율리아 드루실라, 율리아 리빌라, 티베리우스 카이사르, 가이우스 율리우스(이그노투스 카이사르)[1] |
아버지 |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
어머니 | 소 안토니아 |
형제 |
리빌라,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입양형제, 매제) |
경력 | |
공직 |
재무관(서기 7년 - 11년)[2] 집정관 I(서기 12년) 게르마니아 인페리오르,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 갈리아 전역 총독[3] 집정관 II(서기 18년) |
참전 |
일리리아 대반란 게르마니아 전쟁 이디스타비소 전투( 베저 강 전투)[4] 앙그리바리 성벽 전투[5] |
개선식 | 게르마니아 전쟁 승리 정규 개선식(17년 5월 2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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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황족, 제위 계승권자, 정치가, 장군, 행정가, 외교관.정식 이름은 게르마니쿠스 율리우스 카이사르(Germanicus Julius Caesar)[6]이지만 보통은 게르마니쿠스 또는 게르마니쿠스 카이사르라고 부른다. 본래 클라우디우스 가문 출신이며 태어날 당시 이름은 아버지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대 드루수스)와 똑같았다.[7] 그의 아버지 드루수스는 게르만족과의 싸움에서 큰 공적을 세워서 "게르마니쿠스"(게르만을 정복한 자)라는 명예로운 호칭을 가지게 되었으며, 원로원에게 이 칭호를 대대로 쓸 수 있는 명예를 얻었다. 따라서 그의 아들인 게르마니쿠스도 이 이름을 물려받았다.
게르마니쿠스의 아버지는 후에 아우구스투스에 이어 황제가 되는 티베리우스의 동복(同腹)동생[8]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대(大) 드루수스, 네로 드루수스)이다. 그는 낙마사로 요절하기 전 로마 장군 중 최초로 라인 강을 건너 엘베 강까지 진격했으며, 게르마니아를 거의 정복하기 직전까지 갔던 사람이다. 또한 아우구스투스가 아그리파가 급사한 이후 자신의 후계자(차기 황제)로 생각한 그의 양아들이다. 어머니는 아우구스투스의 조카딸이자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소(小) 옥타비아의 딸인 소(小) 안토니아이며, 동복 동생은 리빌라와 훗날 게르마니쿠스의 아들 칼리굴라가 암살된 뒤 즉위하는 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가 있다.
즉, 게르마니쿠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외종손[9], 리비아 드루실라의 친손자, 안토니우스의 외손자이다. 따라서 그는 태생적으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가문의 피를 모두 이어받은, 아우구스투스가 생각한 ‘적합한 후계자’였다. 이런 이유로 아우구스투스는 일찍이 양자로 삼았던 외손자들이 요절하자, 자신의 일가 모두의 혈육이고 외종손인 게르마니쿠스를 일찌감치 차차기 황제로 결정내린 뒤 후계구도를 짰다. 그래서 그가 게르마니쿠스의 큰아버지 티베리우스를 공식적인 양자로 삼고 율리우스 가문의 후계자로 입양할 당시, 티베리우스에게 친아들 소(小) 드루수스(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10]가 있음에도 누나의 외손자, 아내의 친손자인 게르마니쿠스를 티베리우스의 양자로 입적시켜 자신의 법적인 손자로 삼고 그를 율리우스 가문의 일원으로 만들었다.
아내는 아우구스투스의 외손녀로 게르마니쿠스에게는 6촌 누이인 대(大) 아그리피나. 어릴 때 외종조부 아우구스투스가 직접 맺어준 아내로 성년식 직후 결혼했다. 사이에서 9명의 자녀를 얻었는데, 이중 6명의 자녀는 유년기를 넘어서도 생존했다. 그리고 이중 셋째 아들[11] 가이우스는 제3대 황제가 되었고, 장녀 율리아 아그리피나( 소(小) 아그리피나)는 외손자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를 낳았는데, 그가 바로 게르마니쿠스의 동생 클라우디우스의 양자이자 후계자인 제5대 황제 네로이다.
2. 생애
2.1. 출생과 유년기
BC 15년 5월 24일 로마에서 대 드루수스와 소 안토니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게르마니쿠스는 이들 부부의 첫째 아이였으며, 아버지 드루수스가 이탈리아에서 벌어진 소규모 전투를 승리를 이끈 뒤 갈리아 파견이 결정난 해에 태어났다. 게르마니쿠스가 태어난 이후에도 4명의 동생이 더 태어났는데, 그의 동생들은 모두 루그두눔(리옹)이 고향이다. 하지만 5남매 중 게르마니쿠스, 리빌라, 클라우디우스만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았다.본래 이름은 아버지와 같은 이름인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이는 1963년 발굴된, 아멜리아의 게르마니쿠스 청동상과 비문에서 확인된다.
BC 9년 아버지 대 드루수스가 게르마니아에서의 승리와 공적으로 ‘게르마니쿠스’라는 존칭을 얻으면서 게르마니쿠스라는 칭호를 그의 일가 이름에 붙이게 되었다. 어린 시절의 모습은 아우구스투스와 그 가족들이 장식된 부조가 담긴 ‘평화의 제단(Ara Pacis Augustae)’ 남쪽 벽면에 돋을새김으로 새겨져 있다.[12] 게르마니쿠스가 2살이 될 무렵, 갈리아 총독으로 파견된 아버지 드루수스를 따라 가족 전체가 루그두눔(리옹)의 총독 사저에서 살았다.
아버지 드루수스는 게르마니쿠스가 태어난 해, 법무관이던 동복형 티베리우스와 함께 알프스 일대 부족들과 전투를 치러 공적을 세운 이래, 갈리아 총독을 지내면서 아우구스투스의 게르마니아 전쟁의 총책임자 중 한명이 되었다. 게르마니아의 라인 강 전선으로 파견된 드루수스는 로마 장군 중 최초로 북해를 항해하고 오늘날의 네덜란드, 벨기에 땅을 넘어 라인 강까지 도달했다. 이후 그는 아우구스투스와 원로원에게 약식 개선식과 명예를 수여받고 다음해 집정관에 뽑혔다. 하지만 드루수스는 개선 군단을 이끌고 겨울(또는 여름)을 맞이한 게르마니아 땅에서 갑작스러운 불의의 낙마 사고로 불과 29세의 나이에 요절했다. 이때 맏아들 게르마나쿠스의 나이는 불과 6살이었고, 게르마니쿠스의 동생 클라우디우스의 나이는 1살이었다.
2.2. 후계자로 발탁
아버지 드루수스가 사망한 후, 가족과 로마로 돌아와 성장했다. 그의 어머니 소 안토니아는 20대 중반의 나이에 남편과 사별했다. 따라서 수많은 야심가들은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려고 로비를 하고, 아우구스투스 역시 그녀를 결혼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재혼하지 않고 3남매를 제 손으로 키웠다.[13]발굴된 비문, 고대 기록들의 공통된 이야기에 의하면, 게르마니쿠스는 어머니 소 안토니아의 기대에 늘 부응하는 아들로 그 효심, 동생들에 대한 무한한 사랑이 대단했고 겸손함이 몸에 베어 있었다고 한다. 이는 그가 후계자 후보군에 본격적으로 들어간 서기 1~2년 전부터 평가된 것으로, 그를 드높이고자 한 것이 아닌 사실이었다. 따라서 이런 그의 모습에 황실 식구들은 그를 대견해 했다.
루키우스 카이사르가 요절하기 직전부터, 일찌감치 아우구스투스, 리비아 드루실라의 계획 아래 후계구도에 포함됐다. 그가 아우구스투스 부부 모두의 친혈육인데다, 대 아그리피나와 아주 어릴 때 약혼하면서,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의 매제가 될 예정이며, 아우구스투스 누나 옥타비아, 아내 리비아가 생전의 대 드루수스(게르마니쿠스의 선친)을 후계로 밀었고 아우구스투스 역시 그 계획 아래 움직인 점,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 모두 손이 많지 않은 상황 속에서 게르마니쿠스를 특별히 봤던 점 등이 그 이유였다고 분석된다. 그는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요절하던 서기 4년 2월 직전에 이미 아우구스투스 일가 행사에 친동생 클라우디우스와 함께 카이사르 가문원으로 있었다.
서기 4년 2월,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요절하고, 로마에서 장례식이 거행된 직후부터 아우구스투스의 결정으로 입양이 정식 결정됐다. 그는 이 해 5월, 18세의 나이가 되자 황실 가족들의 입회 아래 성년식을 치렀는데, 아버지 역할은 아우구스투스가 맡아 그를 공직의 길로 이끌었다. 아버지 요절 직후, 스스로 후견인이 되어 게르마니쿠스와 두 동생 리빌라, 클라우디우스에게 아버지이자 할아버지로 모든 책임을 다한 이가, 할머니의 남편인 외종조부 아우구스투스였기 때문인데, 그럼에도 아우구스투스가 할아버지 자격으로 게르마니쿠스의 성년식에 직접 참석한 것은 단순한 의미가 아니었다.
서기 4년 6월 26일, 큰아버지 티베리우스가 정식으로 아우구스투스의 친양자, 상속자가 되어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로 개명할 때, 그에 앞서 드루수스의 아들이자 티베리우스의 아들, 아우구스투스의 손자로 인지된 선언 아래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 남성이 됐다. 아우구스투스는 손자 게르마니쿠스에게 특권을 선사받게 했다. 따라서 게르마니쿠스는 18살의 나이에 아우구스투스의 추천, 원로원의 결의에 따라 재무관 자리를 선사받고 공직 경험을 위한 명예로운 길에 들어갈 기회를 공식적으로 부여받았다.
서기 3~ 5년, 어릴 적 정혼 후 약혼했던 외종조부의 손녀인 1살 연하의 대 아그리피나와 결혼했다. 이는 보통 로마 귀족이나 상류층 남성 중 공직 생활을 하게 된 남성치고는 빨리 결혼하게 된 편이었다. 이 당시 보통 게르마니쿠스 또래 상류층 남성의 경우, 10대 중후반 결혼하는 상류층 여성들과 달리 평균적으로 20대 중후반에 결혼했던 것을 생각한다면,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 드루실라가 이 결혼을 일찌감치 결정지을 때부터 예정된 일이었다. 다만, 신부 대 아그리피나는 보통 또래들보다는 많게는 4~5살, 적게는 1살 정도 늦은 나이에 결혼식을 올렸다.
이 과정 전, 아우구스투스는 게르마니쿠스와 티베리우스의 아들로 자신이 7년간 손수 키운 소 드루수스를 마음에 두고 티베리우스를 불러 깊은 대화를 나누며 이 결정을 마무리지었다.
이때 게르마니쿠스도 아내의 남동생 아그리파 포스투무스[14]도 입양을 통해 공식적으로 율리우스 가문에 편입됐다. 따라서 이때부터 이름을 오늘날 잘 알려진 게르마니쿠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로 바꿨고, 백부 티베리우스의 양자로 입적되면서 외종조부에 의해 일찌감치 차기 제위계승자가 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자신과 혈통이 이어지는 게르마니쿠스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고 싶었지만, 아직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대신 후계자로 지목한 티베리우스의 양자로 만들고, 자신의 혈육인 게르마니쿠스가 티베리우스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될 수 있도록 만들었다.
2.3. 첫 참전과 게르마니아 파견
큰아버지의 양자가 되고 난 직후, 아우구스투스 곁에서 원로원 참관을 하며 본격적인 제왕교육을 받았다. 서기 7년이 되자마자 1월 1일자로 소 드루수스와 함께 수도 로마에 상주한 재무관에 취임해, 사무실을 마련했다. 이들은 모두 하급심 재판 판사들을 살펴보며 감찰업무도 함께 부여받았다. 그러다가 같은 해, 일리리아 대반란으로 알려진 바토스 전쟁이 터지고, 반군 일부가 이탈리아를 꾸준히 위협하는 가운데, 긴급 소집된 원로원 아래에서 할아버지 아우구스투스의 결정으로 재무관 신분의 게르마니쿠스가 군지휘권을 게르마니쿠스의 부친 대 드루수스 전례에 따라 수여받고 참전이 결정된다. 게르마니쿠스는 이탈리아 퇴역병 지원자, 자유를 얻는 조건으로 모집된 노예들로 구성된 증원 보조부대를 통솔해, 시스키아에 있는 백부 티베리우스, 일리리쿰 총독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메살리누스에게 갔다.첫 교전에서 게르마니쿠스는 부족한 경험에도 시스키아 방어전의 일부, 공세 작전에서 의미있는 승리를 거뒀다. 이후 티베리우스의 결정으로 로마측 진압군 최고 사령관 티베리우스 휘하 부장이 되어 판노니아 서부를 시작으로 일리리아, 달마티아까지 아우른 일리리쿰 반란 진압 교전 전체를 참전해 싸웠다. 총 3년에 걸친 바토스 전쟁이 거의 마무리된 직후, 아우구스투스의 명으로 승전 보고서를 들고 파견 당시 함께 간 증원 보조부대와 귀국했다. 로마 도착 후, 아우구스투스의 결정으로 원로원 앞에서 승전 보고서를 낭독했고, 그의 첫 승리와 이후 교전 참전 등을 강조받으며, 그 자리에서 원로원 의결 아래 승리 훈장을 받았다. 아우구스투스는 요절한 본인의 양자 드루수스(게르마니쿠스의 아버지)를 상기시켰고, 이 승리를 명분으로 게르마니쿠스에게 법무관 직을 추천해 참전 기간동안 이를 경험함을 선포한 다음, 전직 법무관으로 삼았다.
서기 10년 수도 담당 재무관에 다시 취임했다. 이에 앞서 아우구스투스는 참전하지 않은 소 드루수스가 그동안 이탈리아에서 재무관으로 보인 성과와 군사훈련을 받아 보인 경력을 인정해 그에게도 법무관을 게르마니쿠스가 일리리쿰에 있을 기간동안 한 것으로 인정해 인정하고, 똑같은 훈장과 지위를 내렸다. 이어 게르마니쿠스, 소 드루수스 모두에게 원로원 최우선 발언권과 함께, 현직 집정관 연설 중 질문권과 반박권을 특권으로 수여했다. 게르마니쿠스는 이 당시 하급심 재판 판사들이 평민들에게 불리한 판결을 내리는 것을 파악해 조부 아우구스투스 아래 재판을 재결하게 했다. 이어 평민들의 억울함을 변론하고, 아우구스투스의 결정으로 델라토르들에게 살인 혐의라는 중상모략 공격을 받던 동료 재무관 변호를 떠맡았다. 이때 게르마니쿠스는 차분하고, 논리적으로 동료 재무관의 무죄를 이끌었는데, 배심원들은 이 두가지 사건들을 보며 게르마니쿠스의 인품에 감격했고, 재무관 무고 재판에서는 검사로 나선 델라토르들의 호소를 거부하고 아우구스투스에게 항고하라고 결정했다고 한다. 이 일에 관해, 디오 카시우스는, 이 재판 당시 배심원들이 재판 시작부터 검사의 주장을 따르지 않고 게르마니쿠스를 찬양하고 그의 변론만을 들어 아우구스투스 아래에서 재판을 하게 했다고 한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는 본인 아래 재판에서 하급심의 부당한 양형을 재검토해 바꾸고, 게르마니쿠스의 변론을 인정했다고 한다.
이 사건 이후, 게르마니쿠스는 확실히 로마 안에서 인기가 높아졌다. 아우구스투스가 큰 홍보를 하지 않음에도 게르마니쿠스는 "드루수스의 아들이자 아우구스투스의 손자"라는 상징성 아래 인기가 크게 치솟았다. 따라서 법적 아버지인 큰아버지 티베리우스의 아들이라고 따로 홍보하는 진풍경이 벌어지는데, 이때의 일로 게르마니쿠스의 로마, 이탈리아 내 지지층이 늘어난다.
이런 상황에서 서기 9년 바루스가 토이토부르크 전투에서 3개 군단을 이끌고 있다가 궤멸된다. 일리리아에서 대규모 반란을 진압한 상황 속에서, 아우구스투스의 아들(공식 후계자)로 전선으로 복귀하게 된 백부 티베리우스가 모든 전선을 도맡을 수 없다는 이유로, 전직 법무관 자격 아래 아우구스투스에게 게르마니아 일대 총독으로 사령관 자격 아래 처음으로 전쟁에 참가했다. 그가 취임해 향한 곳의 군단들이 있던 곳은 공교롭게도 아버지 드루수스가 공적을 쌓았고 요절한 땅 게르마니아였다. 게르마니쿠스의 이곳 총독 취임은 따라서 게르마니아 인페리오르,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 일대 로마 군단들에게 큰 인상을 남겼는데, 이는 아우구스투스의 의도 중 한 가지가 게르마니쿠스의 지지기반 확보 목적 측면이 맞다면, 대성공이 된다.
AD 13년부터 티베리우스 대신 게르마니쿠스가 게르마니아 전선 전체를 담당해 지휘했고, 4년 간 게르마니아 전쟁을 수행했다. 이때 그는 6년 전 일어난 참극 현장을 찾아갔으며 여기에서 유품들을 회수하고 로마군 전사자들의 백골을 모아 매장했다. 동시에 게르마니쿠스는 아우구스투스의 계획에 따라 2살 아래인 티베리우스의 친아들 소 드루수스와 모든 공직과 사제직을 비슷한 시기에 밞아나갔고, 3년마다 그와 함께 집정관 자리를 맡도록 결정내려졌으며 각종 명예와 훈장을 함께 수여받았다.[15]
본디부터 미남이었고 키가 컸는데, 말타기를 열심히 하여 약점인 하체를 단련해서 균형잡힌 신체를 가지게 됐다. 성품도 겸허하고 남을 배려하는 습성이 몸에 배어있어 뭇사람에게 호감을 주었기에 일찍부터 기대와 신망을 한몸에 모았다.[16] 단순히 정해진 후계자였기에 생긴 현상은 아니었으며, 때문에 아우구스투스가 죽자 일부는 티베리우스 대신 그를 황제로 세우고 싶어했고 게르마니아에 주둔하던 로마의 군단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도 그들이 대안으로 생각했던 건 당대엔 아직 뚜렷한 전공도 없었던 게르마니쿠스였다.
2.4. 게르마니아 전쟁과 오리엔트 파견
서기 13년,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친혈육 게르마니쿠스를 티베리우스 후임 게르마니아 전선 사령관에 임명했다. 그는 8개 군단 전체의 지휘권을 수여받았는데, 이 군단은 로마군 전체의 1/3로 서방 전력의 핵심으로 평가받고 있었다. 부임지에 아내 대 아그리피나, 자녀들을 데리고 도착한 게르마니쿠스는 병사들 앞에서 자신의 아버지 대 드루수스의 업적을 본받고, 아르미니우스에게 당한 굴욕을 되갚고자 했다. 그는 자신과 아버지로 대표되는 카이사르 일가를 지지하는 군대의 사기를 회복하고자 했다. 게르마니쿠스의 첫 연설은 이곳 장병과 그 가족 전체를 감동시켰다. 그는 병사들에게 전쟁 내내 전우 대신 제군이라고 말했지만, 병사들에게 진솔했고, 본인의 양할아버지 아우구스투스, 본인의 선친 드루수스, 장인 아그리파를 자연스레 상기시켰다.다음 해인 서기 14년, 게르마니쿠스는 두 아들과 딸 소 아그리피나를 임신 중인 아내 대 아그리피나와 함께 이동해 게르마니아 전역 사령관으로 임기를 다시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8월 아우구스투스가 노환으로 사망했다.
아우구스투스 사후 티베리우스가 9월 즉위했다. 그런데 새황제 즉위 후, 판노니아와 게르마니아 전선에서 군단병들이 티베리우스를 상대로 항명성 반란을 일으켰다. 항명 주동자들은 서로 교감을 통해 합동으로 티베리우스에게 충성을 거부하지 않았지만, 요구는 모두 동일했다. 왜냐하면 항명 원인은 양쪽 모두 군단병들의 형편없는 급여, 장기복무 그리고 로마군 내에서 상습적으로 발생하는 구타와 학대가 일상적인 기강잡기라는 명목으로 방치됐던 일이 복합적으로 터지면서 거론됐기 때문이다. 이때 젊은 게르마니쿠스는 원로원의 결의에 따라 게르마니아 지방의 레누스 일대로 파견됐는데, 이성을 잃어버린 레누스 일대 병사들을 달래기 위해 그는 설득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복합적인 이유로 항명을 저지른 군단병들에게 통하지 않아, 게르마니쿠스가 연극을 꾸며 자살하겠다고 협박하는 방식을 사용해 여론을 움직여야만 했다. 하지만 이런 방식 역시 완벽하게 먹혀들지 않아, 게르마니쿠스는 그들의 요구를 수용하겠다는 약속까지 밝혀야만 했다.
이렇게 병사들에게 충성과 인기를 다시 얻은 게르마니쿠스는 서기 14년부터 게르마니아 정복 시도를 재개했다. 게르마니쿠스가 이끈 서기 14년부터 16년까지의 게르마니아 전쟁은 총 세 번의 원정으로 진행됐는데, 그는 아버지 드루수스처럼 울창한 숲과 늪지대로 인해 어려움을 겪던 병력 이동, 물자 수송 문제를 해결코자 해군을 이용했고 원정 내내 군사적 모험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렇게 그는 아버지 생전 개선군단으로 활약했던 레누스 일대 군단을 이끌고 여러 차례 게르마니아를 공격하여 큰 공적을 세웠고, 게르만족에게 빼앗긴 3개의 군기 가운데 2개를 되찾았다. 하지만 티베리우스는 서기 41년 초, 게르마니쿠스가 전선 사령관에 임명되기 전부터 아우구스투스와 논의를 통해 레누스와 다누비우스를 경계로 한 방어선 등을 결정한 듯 했다. 티베리우스는 게르마니쿠스와 달리 계속되는 전쟁이 제국의 제한적인 인력을 소모시키고 인적, 물적 부담까지 있다고 판단했던 듯 하다. 이는 원로원이 티베리우스 즉위 직후 이 문제를 언급하며 가진 비밀회담을 통해서도 대충 추측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티베리우스는 게르마니쿠스의 전공이 확실해지자 레누스와 다누비우스를 경계로 한 게르마니아 방어선을 확정짓고 게르마니쿠스에게 개선식의 영예를 안긴다. 따라서 게르마니쿠스는 수도 로마에서 개선식을 올렸는데, 이 행사는 로마에서 아우구스투스가 권력을 쥐고 난 이후 열린 개선식 중 가장 웅장하고 화려했다.
이후 티베리우스는 게르마니쿠스에게 명을 내려 그를 제국 동방으로 파견했는데, 게르마니쿠스가 대강 마무리 지은 서방에는 그의 파트너인 소 드루수스를 파견했다. 이 결정에 관해, 과거 로마사 연구자들은 타키투스, 수에토니우스, 디오 카시우스로 대표된 고대 로마인들의 주장을 살려 티베리우스가 법적 아들로 조카인 게르마니쿠스 카이사르를 견제코자 벌인 일이라고 해석했다. 그렇지만 20세기 이후, 연구자들은 여러 증거 등을 기반으로 티베리우스의 이 조치를 매우 합리적인 결정이었다고 평한다. 더욱이 게르마니쿠스의 파트너인 소 드루수스는 게르마니쿠스보다 정치, 행정적 능력과 후계자 훈련 측면에선 아우구스투스 생전부터 아우구스투스와 원로원이 인정한 인재였고, 로마 입장에선 판노니아, 일리리쿰, 달마티아로 이어진 다누비우스 강(오늘날의 다뉴브 강) 방어선 및 행정체계 정비 사업이 필요해, 게르마니쿠스를 동방으로 보내 새로운 공적을 쌓고 차기황제로 확고히 올라서는 것이 매우 좋은 조치였다. 즉, 티베리우스 입장에선 선황 아우구스투스가 본인을 차기 황제로 내정하면서, 로마 사회에서 고령인 본인의 후계구도 완비를 위해 게르마니쿠스&소 드루수스 쌍두 체제가 필요한 사정을 생각해 내린 결정이었던 셈이다.
따라서 게르마니쿠스는 동방으로 떠나기 전, 백부이자 양부인 티베리우스의 친아들 소 드루수스와 공동으로 키르쿠스 경기장에서 오락 경기들을 주최했다. 이때 티베리우스는 짠돌이로 이런 것에는 돈 나가는 것을 극도로 꺼렸던 과거 행보와 달리, 두 사람을 위해 막대한 돈을 풀고, 두 사람을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의 얼굴로 홍보하면서 로마와 이탈리아 내 로마인들의 관심을 최대치로 끌어 올렸다.
게르마니쿠스와 소 드루수스가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의 이름으로 주최한 오락 경기 당시, 두 사람은 자신들이 주최한 대회들에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열정적으로 임하며 민중들과 함께 했다. 두 사람은 본래부터 신분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상냥하고 호감을 얻은 미남들이라서, 아우구스투스의 혈육이라는 후광을 제외하더라도 그 인기가 높았다. 그런데 이들이 이렇게 행동하니, 티베리우스 치세 아래에서 오락 축제가 축소되어 불만이 쌓인 민중들의 열기와 지지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대단했다. 이 행사 기간 동안 게르마니쿠스는 소 드루수스와 함께 일반 민중들에게 지지를 받았는데, 둘은 민중들이 원하는 요구사항이 합리적이라면 그 자리에서 수용해주면서 그들의 불만 사항까지 해결해줬다. 이렇게 되자 두 사람의 인기는 그들이 아우구스투스의 혈육이라는 점에서 크게 높아졌고, 모든 로마인들은 게르마니쿠스와 드루수스를 칭송했다. 이 당시 로마 사람들은 두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해, 그들이 있는 자리에서 신화 속의 쌍둥이 카스토르와 폴룩스 형제에 빗대 찬사를 보냈다.[17] 이렇게 되자 평소 이런 행사 등에 있어 열정을 보이지 않던 티베리우스는 크게 만족해, 이런 여론에 즉시 반응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제대로 두 후계자의 인기를 확고히 하고자, 아들과 조카의 얼굴이 새겨진 화폐들을 주조해 배포하면서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에 대한 선전을 강화했다. 따라서 두 사람의 인기는 이들이 죽은 뒤에도 계속 로마인들의 뇌리에 남게 됐다.
키르쿠스 막시무스 경기장에서의 오락 경기가 마무리된 직후, 게르마니쿠스는 황태자 내지 공동황제에 버금가는 자격으로 제국 동방의 군 지휘권을 부여받는다. 이때 원로원과 티베리우스는 그에게 아르메니아 문제와 대 파르티아 정책을 담당하는 중책을 맡기면서, 동방 일대 총독들을 총지휘하는 시리아 총독까지 그 직속 부하로 다루는 동방 최고 책임자 직을 내렸다. 이 직책은 과거 아우구스투스 시대때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 가이우스 카이사르 정도만 부여받은 건데, 모든 로마인들은 서방에서 좋은 성과를 낸 게르마니쿠스의 파견을 최고의 선택으로 여겼다.
이 기대처럼 게르마니쿠스는 훌륭한 능력을 곧바로 증명했다. 소아시아로 임지를 옮긴 직후, 카파도키아 등을 병합해 아나톨리아 반도 대부분을 로마 직할로 만들었고, 아르메니아 문제를 잘 해결해 아르메니아를 보호국으로 묶어 두고 이 부분에 민감한 파르티아와의 관계 개선 및 설정에서도 진일보한 성과를 냈다. 이는 게르마니쿠스의 장인이었던 아그리파, 젊은 시절 동방으로 떠났던 티베리우스,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외엔 보여주지 못한 큰 성과였다.
그렇지만 이런 성과 뒤에는 수면 아래에서 벌어진 문제로 갈등의 불씨가 커지고 있었다. 티베리우스는 시리아 총독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크레티쿠스 실라누스를 해임했다. 아르메니아 왕국의 왕 보노네스 1세의 인기가 없고, 파르티아 제국이 크레티쿠스 실라누스가 총독으로 있으면 자칫 전쟁 분위기가 될 수 있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크레티쿠스 실라누스는 아우구스투스 생전에 딸이 게르마니쿠스, 대 아그리피나의 장남 네로 카이사르와 약혼해, 게르마니쿠스와 사돈 관계가 될 예정이었고, 게르마니쿠스 일가와 친분이 두터운 인사였다. 더해 이 과정에서 델라토르로 세야누스가 개입하면서, 상황은 묘하게 흘러갔다. 결국 크레티쿠스 실라누스는 소환 통보를 받고 귀국 후 해임통보를 받았고, 이후 티베리우스가 임명한 새로운 시리아 총독은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로 결정됐다. 티베리우스는 이를 통해 게르마니쿠스를 적절히 견제하면서, 냉혹하고 잔인하지만 능력이 검증된 피소 총독이 아르메니아 문제로 자칫 국경 문제가 터질 때를 대비코자 했다. 즉, 피소를 새로운 시리아 총독으로 보내, 게르마니쿠스를 후방에서 돕고 고문 역할을 하면서 게르마니쿠스가 세운 공적에 방점을 찍길 바랬다. 그런데 새로운 시리아 총독으로 파견된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는 자신에게 맡겨진 고문 역할을 남용해, 사사건건 게르마니쿠스와 충돌했다.
게르마니쿠스의 친구들, 게르마니쿠스의 아버지 대 드루수스의 옛 측근들을 비롯한 게르마니쿠스 파 인사들은 크레티쿠스 실라누스 해임 건으로 신경을 쓰고 있던 중, 피소가 도착 직후부터 월권을 행사하며 대립각을 키우자 격분했다.
피소의 행동들은 단순한 충돌 수준이 아니었다. 그는 게르마니쿠스가 내린 결정과 정책들을 비판하고 뒤엎는 일들이 많았다. 이는 황제와 원로원의 결의 아래, 게르마니쿠스가 동방 최고 책임자라는 공식 지위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명백한 명령 불복종이며 불경죄에 해당됐다. 더욱이 피소는 게르마니쿠스에게 딴죽을 거는 것을 넘어, 게르마니쿠스와 개인적, 성격적으로도 그 사이가 최악이었다. 이렇게 되니 동방에서 중요 문제를 판단, 결정하는 두 사람의 충돌이 큰 문제로 부상했다. 더 큰 문제는 게르마니쿠스와 피소의 관계가 원수가 된 상황에서, 피소의 아내 플랑키나와 게르마니쿠스의 아내 아그리피나 사이까지 견원지간이 됐다는 점이다. 부부가 쌍으로 대립하게 되면서, 젊은 황태자와 총독 겸 고문의 관계 개선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게르마니쿠스는 19년 초 황제령 아이깁투스( 이집트)를 티베리우스의 허락없이 방문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당시 로마 최고의 곡창지대인 이집트는 전임황제 아우구스투스 이래로 황제 개인영지가 된 이래, 황제와 이집트 장관의 허락없이는 누구라도 입국이 금지된 땅이었다. 따라서 게르마니쿠스는 이 문제로 티베리우스에게 호된 질책을 받고, 시리아 속주의 안티오키아로 돌아가야만 했다. 이런 상황에서 시리아 총독인 피소가 이 문제를 꼬투리삼아 게르마니쿠스를 비난하고 딴지를 걸면서 두 사람의 갈등은 매우 심각해졌다.
다행히 게르마니쿠스는 인격자답게 이 상황에서도 엄청난 인내심과 특유의 인격을 발휘해 그 갈등을 확대시키지 않았다. 이는 게르마니쿠스를 평생 인기있게 했고, 사후에도 오랫동안 추앙받게 한 특유의 인격이 발휘되었다는 측면에서 보면 매우 다행이었다. 비슷하게 로마와 이탈리아에선 소 드루수스와 세야누스 간의 대결이 심각해져, 몇 년 후 소 드루수스가 참다 못해 자기 앞에서 매를 벌면서 깐족거린 세야누스 얼굴을 주먹으로 치고 때려 눕혀 거의 반주검으로 만들 뻔한 것을 생각해보면, 게르마니쿠스의 인내심이 상상 이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어쨌든, 게르마니쿠스는 상명하복과 연장자 우대를 중시하는 로마인들의 전통을 중요시하고, 그 인내심이 대단해 피소가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해도 모두 넘어갔다. 어느 정도로 그 인내심과 행동이 훌륭했는지, 게르마니쿠스는 다른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피소가 자신을 대놓고 깎아내리며 누명을 씌우는 상황에서도, 전혀 화내거나 반론하는 일 없이 묵묵히 다 듣고 참으면서 견디는, 그 나이 치고는 믿을 수 없는 인내심을 보였다. 이후에도 그는 피소의 지시를 바로잡을망정 절대로 피소를 욕하지 않았다. 이러니 피소에 대한 여론은 더욱 더 나빠질 수밖에 없었고 게르마니쿠스에 대한 평가만 올라갔다. 이렇게 되자 피소는 자신의 명성이 실추됐다고 생각해, 게르마니쿠스를 더 미워하게 됐다. 때문에 피소는 안티오키아 총독 관저에서 상관 게르마니쿠스를 대놓고 무시한 다음 항명성으로 상관 게르마니쿠스를 떠나버린다. 이는 사상 최악의 사태였는데, 그럼에도 게르마니쿠스는 피소를 불경죄로 체포하지 않고 대단한 인격과 자제력으로 기다려줬다.
2.5. 사망
피소 부부가 떠난 직후, 게르마니쿠스는 동부 전체 속주 총독 관할 및 임페리움 명령권자 자격으로 피소에게 재차 소환을 명했다. 하지만 피소는 여전히 게르마니쿠스의 명을 따르지 않았고, 도시와 군대에 대한 모든 명령을 무시 혹은 취소하며 항명을 계속했다. 게르마니쿠스는 합리적이고 훌륭한 결정 아래, 주변에서 티베리우스와 원로원에 이를 보고하라는 조치는 최후의 수단으로 남긴 채, 피소에게 로마로 귀국하라고 명했다. 즉, 대단한 인내심을 내보이며 끝까지 피소에게 기회를 준 셈이다. 그렇지만 피소는 이조차 무시했다.이 불화 속에서 게르마니쿠스는 저녁 시간 즈음, 알 수 없는 이유로 심각한 두통과 고열을 호소 후 쓰러졌다. 이때 피소는 아내와 함께 셀레우키아 항구로 이동했는데, 그는 여전히 게르마니쿠스의 명령을 모두 무시했고, 군대에게 명을 내려 게르마니쿠스 측의 사람들을 무시하라고 했다. 이렇게 되자 게르마니쿠스 측근들은 피소가 게르마니쿠스 독살을 실행에 옮긴 뒤 셀레우키아 항구로 도피했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게르마니쿠스는 여전히 피소를 믿어주면서, 그에게 로마 소환에 앞서 독대를 위해 일단 안티오키아로 귀환할 것을 명했다.[18] 그러나 피소는 여전히 이를 무시했고, 이런 상황에서 게르마니쿠스의 측근, 부하 및 티베리우스가 보낸 황제 측 관료들이 피소 부부가 머문 집으로 들어가 수색을 한 뒤, 집 안에서 게르마니쿠스의 이름이 적힌 납 서판과 사람 신체 부위를 조각한 물건을 발견한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이는 피소 부부가 게르마니쿠스를 저주한 흑마법의 증거가 됐고, 상황을 완전히 바꿔 놓는다. 병석에 누워 있던 게르마니쿠스는 피소를 끝까지 믿다가, 아내와 친구들의 생각처럼 피소가 독살을 시도했다며 낙담했다. 게르마니쿠스는 이때 이 보고를 받고 병석에서 크게 실망한 채, 우울해 하다가 서한을 피소 측에 보내 공식적으로 우정을 파기하며 두 사람의 클리엔텔라 관계가 없음을 통보했다. 그리고 얼마 뒤인 서기 19년 10월 10일, 게르마니쿠스는 안티오키아에서 열병으로 사망한다.
당시 건강하던 게르마니쿠스가 급사하자 사람들은 피소가 평소 오리엔트 주술 등에 관심있어 하던 자기 아내 플랑키나를 시켜 그를 독살했다고 생각했다. 이는 게르마니쿠스도 비슷하게 생각했는데, 그는 아내와 지인들에게 만약 독살이 맞다면, 복수해달라는 말을 남겼다.[19] 다만, 게르마니쿠스는 이것은 티베리우스가 유죄를 확정지을 경우라고 분명하게 밝혔다. 그는 끝까지 인품이 훌륭함을 보였는데, 이 모습은 티베리우스 부하들이 보면서도 감격할 정도였다.
게르마니쿠스는 친구들과 아내에게 죽어가면서 자신의 오른손으로 그들의 손을 일일이 붙잡았다. 그는 이들에게 이성을 되찾고, 반드시 살아남아 본인의 혈육들을 지켜달라고 했다.[20] 티베리우스 측근들에게는 본인의 죽음이 만일 의심 속에서 문제가 벌어지지 않게 해달라고 밝히며, 그 죽음 속에서 헛된 희생이 없게 해달라고 했다.
이때 한 친구가 복수를 단념하느니, 자신도 목숨을 끊겠다고 맹세했고, 대 아그리피나는 죽어가는 남편 얼굴을 매만지고 펑펑 눈물을 쏟으면서 자신 역시 남편을 따라 그 앞에서 목숨을 끊겠다고 대성통곡을 했다. 티베리우스의 부하, 관료들 역시 눈물을 멈추지 못하고, 흐느끼다가 로마에 있는 티베리우스에게 그 고결한 뜻을 전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게르마니쿠스는 계속 울고 있는 아내에게 이렇게 부탁했다.
"사랑하는 아그리피나, 부디 나 자신에 대한 추억과 우리 두 사람 사이의 아이들을 위해, 당신의 자존심을 버리고 잔혹한 운명에 순종하시오. 부탁이오. 우리 아이들과 아우들[21]을 위해서라도 도시(로마)로 귀국한 뒤 권력 다툼으로 당신보다 더 강한 사람들을 자극하지 말아야 하오."
이후 게르마니쿠스는 다시 한 번 친구들에게 아내 아그리피나와 여섯 자녀를 보호해달라고 요청했고, 죽어가면서 법적 형제이자 혈연상 사촌동생인 소 드루수스에게 자신의 유언을 전달해달라고 한 다음, 함께 자신의 죽음을 슬퍼만 하지 말고 이를 기억해, 그가 이성적으로 중심을 잡아, 그 죽음이 헛되지 않게 재차 밝혔다. 이어 그는 티베리우스 측 인사에게 비슷한 이야기를 다시 하면서, 티베리우스와 소 드루수스에게 이성적으로 법적 판결 아래 헛된 또 다른 희생이 없게 해달라고 호소했다. 이후 게르마니쿠스는 알아들을 수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면서, 의식을 잃어갔는데, 사람들은 그가 아내 대 아그리피나 손을 놓는 것을 끝으로 사망한 것을 알았다.
대 아그리피나는 남편이 죽자, 완성히 이성을 상실했다. 그녀는 반쯤 정신을 잃은 채, 죽은 남편의 손을 꼭 붙잡고 소리를 지르다가 혼절했다. 이후 아그리피나는 자녀들을 데리고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하지만 시리아의 안티오키아를 떠나 있던 피소는 아내와 함께 이 소식을 듣고도 게르마니쿠스의 죽음을 믿지 않다가 그 죽음을 냉소적으로 조롱했다. 이때 피소의 아내는 남편의 이런 행동이 문제가 될 것이라고 걱정했고, 로마에 있던 피소의 아들들과 딸은 피소에게 게르마니쿠스의 죽음을 추모해야 하며, 고인이 된 그를 모욕하면 안 된다고 호소했다. 그렇지만 피소는 오히려 자녀들을 혼냈다. 이런 가운데, 대 아그리피나를 비롯한 게르마니쿠스 유족들, 친구, 측근들이 안티오키아를 떠나 배를 타고 이탈리아 남동부 끝에 도착했다.
그녀는 도착 소식이 임박했다는 소식에 판노니아에서 며칠째 잠도 못 자고 달려온 소 드루수스, 소 드루수스가 로마를 지나기 전 함께 데리고 온 시동생 클라우디우스에게 큰 위로를 받았다. 그녀는 이들에게 감사함을 거듭 표했고, 이후 장례절차가 소 드루수스가 상주가 되어 시작됐다. 이때 티베리우스는 충격으로 혼절한 소 안토니아를 병간호하고, 어머니 리비아가 충격으로 앓아 누운 까닭에 함께 있어야 된다는 이유로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대 아그리피나는 여러 정황상 증거를 이유로 티베리우스에게 증오를 품었다. 이런 점은 티베리우스의 친아들 소 드루수스도 비슷했는데, 그는 아버지가 이 정도로 비정하게 행동한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티베리우스가 게르마니쿠스를 동방으로 보내기 전에 게르마니쿠스의 친구, 친척들을 총독 직에서 해임하거나 소환한 뒤 피소를 시리아로 보낸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던 터라, 대 아그리피나 편을 들면서 일단 재판을 지켜보자고 했다.
이 사건 이후 열린 피소 재판이 열리는데, 21세기 발굴된 피소 동판에 따르면 티베리우스는 객관적 증거를 이유로 "피소가 게르마니쿠스를 죽인 것이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상관에 대한 명령 불복종은 유죄"라고 결론내린다. 그렇지만 동판에 티베리우스가 원로원과 함께 언급했듯이, 티베리우스는 본래 피소 부부 중 그 아내가 마법을 부려 게르마니쿠스가 요절하도록 사주했다는 것에는 증거가 명확하다고 유죄를 내리려고 했다가, 어머니 리비아가 피소 아내에게 면죄부를 주도록 하면서, 최악의 결과를 게르마니쿠스 유족들에게 내린 꼴이 됐다. 대 아그리피나는 티베리우스가 아우구스투스 생전부터 남편 게르마니쿠스를 법적 아버지가 되어 보호해주겠다고 했음에도 은근히 견제했다고 주장했다. 이는 아그리피나와 게르마니쿠스 친구들 입장에서 볼 때, 티베리우스를 무조건 비방하려고 벌인 어거지가 아니었다. 티베리우스는 게르마니아 전쟁 중 게르마니쿠스가 전공을 세워 원로원이 훈장과 영예를 내릴 때, 홍보를 하겠다며 게르마니쿠스 이름으로 로마군과 로마 거주 평민들에게 은사금을 내리면서도, 친아들 소 드루수스를 함께 끼워 넣었다. 게르마니쿠스의 친구로 아우구스투스 생전에 게르마니쿠스 부부의 장남 네로 카이사르 장인으로 정해진 크레티쿠스 실라누스를 견제하다가 게르마니쿠스가 시리아로 가기 직전에 해임했다. 대 드루수스(게르마니쿠스의 아버지) 쪽 인사들과 친한 빕스타누스 갈루스, 빕스타누스 메살라 형제가 게르마니쿠스를 돕지 못하게 조치를 취했으며, 즉위 직후 아우구스투스 유언장을 통해 황족 특권을 유지하고 제5 상속자, 제 6 상속자가 된 클라우디우스, 소 안토니아를 마치 유언장 조작 아래 지위를 얻은 양 무심하게 대하다가, 사실상 특권을 행사하지 못하게 했다. 또 티베리우스가 게르마니쿠스, 아그리피나 부부의 장남 네로 카이사르를 사위로 맞이하기로 아우구스투스 생전에 결정내린 시리아 총독 크레티쿠스 실라누스를 티베리우스가 해임하고 피소를 내려 보내 견제하고, 네로 카이사르의 약혼을 파기시켰다. 이 모든 일은 그 의심을 더욱 키웠다. 이렇게 되니, 아그리피나는 남편의 유언을 따르지 않겠다고 결심했고, 자신이 억울하게 죽게 된 남편을 위해서라도 티베리우스를 파멸시키겠다고 이를 갈았다.
즉, 아그리피나가 복수의 화신이 된 것은 피소 재판에서 법적 시아버지이자 남편의 백부 티베리우스 황제를 믿었다가 배신당했다는 분노 등으로 벌어진 일이었다. 하지만 티베리우스는 이후에도 게르마니쿠스를 그리워한 사람들에게 냉담했고, 가족들에게도 평소처럼 행동했다. 또 그는 아그리피나의 시어머니 소 안토니아, 시동생 클라우디우스에게도 큰 위로를 하지 않는 등 아그리피나 입장에서 보면 의심살만 한 모습만 보였다. 이런 모습에 아그리피나는 티베리우스가 아우구스투스의 친혈육인 남편 게르마니쿠스와 본인을 경계했다가, 비열하게 피소를 시켜 남편을 독살했다고 확신했다. 다른 것보다 게르마니쿠스의 죽음에 대한 사후 처리가 무척 부실하게 이루어졌던 것이 대 아그리피나의 의심을 키워서, 그녀는 이때부터 음모와 증오의 화신이 됐고, 결국 그녀는 세야누스, 리빌라의 공모 속에서 소 드루수스가 독살된 뒤에 누명을 쓰고 아들 네로 카이사르와 함께 반역 혐의로 추방됐다가 유배된 섬에서 아사했다.
3. 피소 재판과 게르마니쿠스 신화
게르마니쿠스는 소아시아에서도 바른 행동과 겸손한 처신으로 뭇사람의 인기를 끌어모았으며, 이 점이 파르티아 왕실에도 깊은 인상을 주어 게르마니쿠스가 죽었을 때 파르티아 왕 아르타바노스 2세가 한동안 사냥을 삼가면서 조의를 표했을 정도였다.[22] 인기 많았던 게르마니쿠스의 죽음을 놓고 독살설까지 나돌았으나, 현대에는 말라리아에 걸려 죽었다는 설이 대세다.그의 유해는 오늘날 터키 남부에 위치한 안티오키아를 출발해 로마로 향했고, 이때 친동생 클라우디우스와 여동생 리빌라의 남편이자 평소 그와 친형제 이상으로 사이가 좋던 양형제 소 드루수스가 임지 일리리쿰에서 로마 남쪽으로 100km 떨어진 테라치나까지 미리 마중나와 게르마니쿠스 가족들을 정중히 맞이하며 유족들을 위로했다. 소 드루수스는 게르마니쿠스가 위독하다는 보고가 전해질 때부터, 모든 업무를 제쳐두고 말을 몰아 로마까지 달려간 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게르마니쿠스의 시신이 올 모든 도시를 손수 점검하면서 로마로 다시 이동. 몸이 불편한 클라우디우스를 데리고 함께 테라치나까지 간 다음 항구에서부터 게르마니쿠스의 아내 아그리피나와 그 자녀들을 위로했다.
이때 티베리우스가 보낸 원로원 의원들과 집정관 등 국가 대표들도 이들과 함께 대 아그리피나와 그 자녀들을 위로했다. 이후 소 드루수스가 상주 역할을 맡으며, 관 옆에서 함께 이동했고, 그 운구 행렬은 로마로 귀환했다. 게르마니쿠스의 장례식은 국장으로 진행됐는데, 고인의 동생이자 매제이며 친사촌형제인 소 드루수스가 직접 추도사를 읽고 고인을 추모했다. 장례식에 앞서 소 드루수스는 게르마니쿠스의 세 아들의 보호자가 됨과 동시에, 성년식을 치른 게르마니쿠스의 장남 네로 카이사르와 차남 드루수스 카이사르의 공식 후견인이 됐다.
당시 민간에서 떠돌던 독살설 배후에는 황제였던 티베리우스와 아우구스투스의 황후 리비아 드루실라가 있다고 주장되는데, 오늘날에는 설득력이 굉장히 떨어진다고 평가받는다. 티베리우스는 자신이 사랑했던 동생의 아들이며 친조카, 양자이자 후계자인 게르마니쿠스를 아끼고 있었다. 또한 이 당시는 티베리우스가 세야누스 같은 주변 인물을 이용해 공포 정치를 펴던 시절도 아니었다. 친할머니 리비아 역시 친손자를 독살할 이유가 없었다. 리비아는 결점 없는 친손자 게르마니쿠스를 굉장히 아끼고 있었고, 굳이 견제할 이유도 없었다. 당시 아들 티베리우스와 대립 중이던 상황에서 리비아에게 아우구스투스가 차기 황제로 정해버린 게르마니쿠스는 오히려 빨리 요절하면 안 되는 카드였다. 더해서 리비아는 남편 아우구스투스와 차남 드루수스가 살아있던 당시, 자신의 친아들 중 한명을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로 만들기 위해 누구보다 집착했던 사람으로 매우 유명했다.[23]
하지만 게르마니쿠스가 죽었을 당시, 이런 사정을 전혀 모르던 민중은 원래부터 거만하고 차가운 티베리우스에 대한 반감[24]과 티베리우스의 긴축 정책에 대한 피로감 때문에 “티베리우스가 피소를 시켜서 조카를 죽였다”며 반감을 표출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로마 원로원은 시리아 총독인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를 ‘상관에 대한 명령 불복종’이라는 중죄로 고발했다. 일전에 티베리우스 역시 장례식이 끝난 직후, 초췌한 모습으로 원로원에 출석해 죽은 조카이며 양자인 게르마니쿠스의 요절에 대한 상실감을 이례적으로 밝힌 터라 원로원의 고소장 제출은 곧 티베리우스의 고소와 똑같았다.
따라서 피소는 곧바로 원로원이 주재하는 1급 재판에 넘겨지는데, 그 혐의는 다음과 같았다.
- 상관에 대한 명령 불복종
- 관할지 이탈 및 임지 불법 이동
- 군대 규율 위반
- 원로원 규율 위반
- 내전 조장 및 모반
- 부정부패 및 권한 남용
- 약식 재판 판결 조치 결정에 대한 취소 및 허위 재판 결과 강요
- 신격 아우구스투스와 그 일가에 대한 모독 및 불경
- 황제 대리인 자격 남용 및 상관 협박
피소가 기소된 혐의는 단 한 개라도 유죄가 나오면, 왕정 이래 로마를 대표한 명문 귀족 가문인 칼푸르니우스 피소 가문이라고 해도 멸문을 각오해야 할 정도로 그 죄가 엄청났다. 결론부터 말하면, 피소는 워낙 증거가 넘쳐난 까닭에 재판에서 "게르마니쿠스 독살 혐의" 외에는 모두 유죄판결을 확정받았다.
이 재판은 세기의 재판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로마인들의 관심을 모았다.
재판 내내 게르마니쿠스의 아버지이자 고발인으로 재판에 매일 출석한 티베리우스는 피소의 죄목에 대해 날카롭게 공격을 퍼부었다. 게르마니쿠스의 유가족과 형제 소 드루수스, 클라우디우스 등이 계속해서 증인을 불렀고, 이들은 그 죗값을 톡톡히 물게 하겠다고 이를 갈았다. 이렇게 되자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원로원 귀족, 지식인 등이 줄줄이 재판장에 증인으로 출석했고, 피소 측은 재판이 진행될수록 벌벌 떨었다.
이 재판에서 게르마니쿠스 친구들 중 일부는 스타로 떠오르는데, 그 중 한명이 바로 네로 사후 벌어진 네 황제의 해 당시 황제에 오른 비텔리우스의 아버지 루키우스 비텔리우스였다. 기사계급 출신의 신참자 원로원 의원 비텔리우스는 아주 형편없는 능력을 보인 아들과 달리 훌륭한 능력을 가진 인재였는데, 그는 게르마니쿠스의 친구로 재판 증인으로 출석하여 황제와 황족들, 원로원 중진들이 있는 가운데에서 주눅들지 않고 열변을 토하며 피소의 만행을 모두 폭로했다. 따라서 피소는 게르마니쿠스 독살 음모 주범으로까지 몰리게 된다. 이렇게 되자 송환을 앞둔 피소는 재판 결과가 내려진 당일, 자신이 반역죄로 기소된 모든 내용이 티베리우스와 원로원에게 모두 유죄로 선고받음을 알고 압박감에 못 이긴 나머지, 스스로 목에 칼을 대고 베어 죽는 방법으로 자살해버렸다.
피소가 이렇게 죽자, 원로원은 "범죄자가 죽었다고 해도 기소된 순간, 재판이 진행되어야 하고 그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입장을 내고 피소에게 기록말살형 선고를 내린다. 그의 개인 명의 재산은 모두 압류됐고, 피소 자택에 전시된 그의 동상, 비석, 개인 문서 등은 모조리 파괴됐다. 허나 연좌제는 허락되지 않아 피소의 딸 칼푸르니아가 결혼할 때 가지고 간 지참금, 피소의 아들들 명의의 개인 재산은 압류되지 않았고, 피소의 재산 국고 귀속 역시 피소 아들들과 딸, 사위가 추가로 4,000,000세스테르티우스를 더 낸다는 조건으로 피소 가문이 원로원 의석을 유지할 재산은 빼앗기지 않고 피소 아들들이 고루 상속받았다.
이렇게 되자 재판 결과를 크게 기대하고 있던 민중들은 티베리우스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때 티베리우스는 피소 부부와 함께 독살설의 주범으로 의심받고 있어, 대단히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평소 성격처럼 민중들에게 자신이 억울하다는 내용의 말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원로원이나 황궁 안에서도 이 소문에 관해 적극 해명하지도 않았다. 또 그는 원로원에서는 죽은 후계자에 대한 아쉬움을 나타냈음에도, 게르마니쿠스의 죽음 소식을 듣고 쓰러진 소 안토니아와 리비아를 병간호하기 위해 참석하지 못해 이 부분에서도 민중들에게 원성을 샀다. 결국, 티베리우스 주변을 통해 진실이 발표되는데, 그럼에도 이를 변명으로 치부한 민중들은 잔정없고 차가운 티베리우스가 거짓말을 한다면서 불참 사유를 믿지 않았다. 따라서 티베리우스의 게르마니쿠스 장례식 불참은 본인 스스로 일을 크게 만들었다고 오늘날까지 욕을 먹고 있다.
어쨌든 피소 재판과 뒷처리 내용이 발표되자 이탈리아에서는 분노한 군중들은 쓰레기를 신들의 제단에 쳐박거나 혹은 아예 쳐부수고, 그를 죽인 운명에 대한 분노를 애꿎게 표출하는 일까지도 벌어졌다. 황궁 안에서는 남편의 독살설을 믿고 있었어도 지나가는 소문 정도로 생각하던 게르마니쿠스의 아내 아그리피나가 재판 결과에 이의를 제기하다 못해 티베리우스를 의심해, 피소를 시켜 남편을 비열하게 죽인 티베리우스에게 자신이 복수하겠다며 반티베리우스 연합을 만들고 티베리우스와 집안팎에서 대립했다.
게르마니쿠스 신화는 이렇게 시작돼, 그의 아내와 두 아들 및 며느리 등이 티베리우스 치세 도중 비극 속에 사망하면서 완성됐다. 그리고 이는 살아남은 막내아들 칼리굴라가 즉위할 때 절정에 이르렀다. 4년만에 칼리굴라가 게르마니쿠스의 측근 출신 근위대장 카시우스 카이레아에게 암살된 이후 그 직계가 끝나게 됐지만, 민중들 사이에서 게르마니쿠스에 대한 경모의 염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게르마니쿠스의 친동생 클라우디우스는 즉위 후 게르마니쿠스의 동생이자 드루수스의 살아남은 아들로 칼리굴라 암살 직후, 게르마니쿠스 신화를 선전 전략으로 삼아 제정을 공고하게 만들 수 있었다. 클라우디우스 사후, 네로 시대에도 게르마니쿠스 신화는 여전했고 강력했는데, 게르마니쿠스의 살아남은 유일한 딸 소 아그리피나는 아들 네로와 권신 세네카, 부루스와 권력투쟁을 하면서 이를 적극 활용했다. 그리고 이 후광은 클라우디우스의 아들이자 게르마니쿠스의 조카가 되는 브리타니쿠스가 대중들에게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 드루실라의 유일한 직계손, 게르마니아 정복자 드루수스의 손자이자 게르마니쿠스의 조카"라는 이름으로 공식석상 데뷔를 하면서 네로 내각이 공포감을 느낄 정도로 절정을 찍게 된다. 그러나 소 아그리피나의 게르마니쿠스 신화 활용은 오히려 그녀와 브리타니쿠스, 클라우디아 옥타비아가 모두 네로 손에 살해당하는 비극으로 연결됐다. 네로가 몰락할 당시에도 게르마니쿠스 신화는 반기를 든 가이우스 율리우스 빈덱스와 그를 제압한 레누스 일대 병사들에게 다시 회자됐다고 한다. 따라서 네로가 국가의 적으로 탄핵되고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가 무너진 이후에도 게르마니쿠스 신화는 그가 생전 활약한 게르마니아 일대에서 여전히 살아남았다. 실제로 최소한 기원후 3세기까지 게르마니쿠스가 지휘하던 라인 강과 오늘날의 서독일,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일대 주둔 군단들과 도시들에서는 계속 게르마니쿠스와 그의 아버지 드루수스에 대한 제사를 지내고 있었음이 확인되고 있다.
4. 가족
외종조부로 아내의 외조부인 아우구스투스가 짜놓은 복잡한 친인척 구도 탓에 상당히 복잡한 가족 관계 구성을 가지고 있다. 외동딸 율리아 외에는 자녀가 없던 아우구스투스는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25]의 두 아들, 친누나 옥타비아[26]의 자녀들과 외손주들, 외동딸 율리아의 자녀들간의 결혼, 입양 등을 통해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를 만들어냈다.이런 까닭에 게르마니쿠스 역시 일찍부터 몇몇 인물들과는 가족관계가 상당히 복잡하게 됐다. 2살 아래인 사촌동생 소(小) 드루수스가 이런 가족관계의 대표적인 예인데, 아우구스투스의 결정에 따라 두 사람은 성년식을 마친 직후 모두 율리우스 가문에 입양되면서 혈연적으로는 사촌형제이지만 법적으로 입양형제가 됐고, 소 드루수스가 게르마니쿠스의 여동생 리빌라와 결혼해 형님과 매제 사이가 됐다.
- 아버지 대(大) 드루수스(친아버지) / 티베리우스(큰아버지, 양부)
- 어머니 소(小) 안토니아
- 배우자 대(大) 아그리피나
- 동생 리빌라, 클라우디우스(친형제자매) / 소(小) 드루수스(사촌동생, 입양동생, 매제)
아내 대 아그리피나와의 사이에서 5남 3녀를 얻었다. 이중 3남 3녀만 성인으로 성장했고 두 아들 중 셋째아들은 유년기때, 넷째아들은 이름을 지어주기 전에 요절했다.
게르마니쿠스는 자신의 아들들에게 대개의 로마인들이 그렇듯 본래의 가문에서 자신의 조상들이 많이 쓰는 이름을 지어줬다. 다만, 본래 클라우디우스 가문이고 아우구스투스 일가가 루키우스라는 이름 대신 드루수스[27]를 본인들의 자랑스러운 이름으로 여긴 자부심 때문에 대대로 짓고, 율리우스 가에서 애용한 개인이름(프라이노멘)이며 클라우디우스 가에서 금기시한 이름 ' 루키우스'는 자녀 모두에게 지어주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클라우디우스 가문 출신답게 율리우스 가문에서 많이 사용한 루키우스, 섹스투스, 아울루스로 대표되는 개인이름을 아들에게 븥여주지 않고, 조상 대대로 많이 사용한 프라이노멘이나 씨족 분파성씨(코그노멘)과 아우구스투스 남성 친족들의 자랑스러운 이름 드루수스를 아들의 프라이노멘으로 지어줬다. 그래서 그는 첫아이이자 자신의 장남에겐 본가의 코그노멘이자 아버지의 이름 중 하나인 네로를 붙여주고, 두번째 아이인 차남에게는 아버지의 이름 중 드루수스를 지어줬다. 그리고 유년기에 요절한 삼남에게는 큰아버지의 개인이름이자 친할아버지의 이름인 티베리우스를, 이름을 지어주기 전 죽은 사남에게는 푸블리우스 혹은 가이우스를 지어줄 계획을 했고, 막내아들에게는 클라우디우스 네로가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의 프라이노멘이자 율리우스 가에서도 대대로 많이 사용한 가이우스를 프라이노멘으로 정했다. 이는 딸들에게 마찬가지였다. 로마귀족들의 관습 그대로 그는 다섯 아들이 태어난 뒤 얻은 세 딸에게 자신의 아내, 어머니, 할머니의 이름을 나눠 지어줬다. 대개의 경우처럼, 혈통적 본가의 성씨를 여성화 시킨 클라우디아는 붙여 주지 않고, 어머니와 아내가 모두 사용한 이름이자 본인의 가문 율리우스의 여성형 이름 '율리아'를 세 딸에게 모두 지어줬다.
- 아들 네로 카이사르, 드루수스 카이사르, 티베리우스 카이사르, 이그노투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28], 가이우스 카이사르(칼리굴라)
- 딸 소(小) 아그라피나, 율리아 드루실라, 율리아 리비아
5. 평가
로마인들로부터 전쟁 영웅 그 이상으로 평가받은 사람이다. 공화정, 제정 시대 전후 로마인 중 로마 민중들과 군인 모두에게 높은 도덕성과 육체적, 정신적인 측면 모두에서 "가장 이상적인 로마인"으로 찬사를 받은 아이돌이자 영웅이었다. 이는 그가 아우구스투스의 직계혈육인 이유 때문에 벌어진 우상화 결과는 결코 아니었고, 생전 인품과 재능, 그리고 게르마니아 전쟁, 오리엔트 일대에서 보여준 헌신, 열정, 고결, 상호존중 등이 당대 로마인들과 속주민, 해방노예와 노예, 심지어 로마 바깥의 레반트 일대와 아르메니아 등 동맹국, 적국 파르티아에게 모두 찬사받은 이유 때문이었다고 한다.게르마니쿠스의 성격은 로마인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대부분의 덕목을 모두 충족하는데, 그 개인의 인격과 성격도 흠잡을 데 없었지만 그가 한 일들이 봉사와 헌신이라는 점에서 로마인들에게 매우 바람직하게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당시 봉사와 헌신은 공공과 국가(Res Publica)에 대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자기 개인의 이익보다 부모, 가족, 씨족, 신들을 위하는 일을 가리키는 신실함(Piety)까지도 포함하는 개념이었는데 로마인들은 이것을 매우 중시했다. 게다가 그의 커리어는 로마인들이 공공 경력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존경하는 성공적 군 경력이었다. 게르마니쿠스는 한마디로 그 어떤 면에서든 로마인의 이상을 그림으로 그려 놓은 것 같은 사람이었고, 상식이 있는 로마인이라면 그에게 반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게르마니쿠스의 신화는 대중에게는 음험한 인물로 비친 티베리우스나 그와 다투다 그를 암살했다는 혐의를 받은 총독 피소 등 악역을 맡은 인물이 있었기에 더욱 극적으로 보였다.
이런 이유 때문에 게르마니쿠스는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를 좋아하지 않았던 제정시대 대표적인 공화정회귀주의자 타키투스 등 지식인들에게도 "동시대 어떤 로마인들보다 도덕적, 신체적으로 위대하고 뛰어났다"고 평가를 받았다. 특히, 타키투스는 게르마니쿠스가 그리스-로마 시대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젊은 정복군주 이상으로 숭배된, 알렉산드로스 3세보다 뛰어나다고 평했다. 이 평가는 타키투스로 대표되는 후세 로마인들이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인데, 분명한 것은 게르마니쿠스가 인성 면에서는 친족들과 친구들을 죽였을 정도로 잔인성도 보여준 알렉산드로스 대왕보다 압도적으로 훌륭한 인물이었고, 가족들에 대한 사랑과 헌신도 전통적인 로마인들이 갖춰야 할 덕목이었기 때문에 타키투스같은 안티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엘리트들에게 공적인 삶, 사적인 삶 모두 찬사받을 수 밖에 없었다. 이런 태도는 타키투스 이상으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자체를 혐오한 수에토니우스 역시 비슷했다. 이때 그는 칼리굴라에 대해서는 근거없는 온갖 소문과 악담을 뇌피셜까지 만들어 써 놓으면서도, 게르마니쿠스에 대해서는 그가 해줄 수 있는 찬사를 모두 적을 정도로 게르마니쿠스를 높게 평가했다.
이런 후세의 평가 외에도 이탈리아와 그가 생전 자랐거나 활약한 갈리아, 게르마니아 일대에서의 게르마니쿠스에 대한 평가는 당대부터 절대적이었고, 그 파급력은 자발적이고 대단했다. 특히, 게르마니쿠스는 아버지 대 드루수스와 함께 게르마니아 전쟁의 무대가 된 오늘날의 라인 강 서쪽 일대에서의 평가는 찬사 그 자체였는데, 그 위상도 엄청났다. 그래서 대 드루수스와 게르마니쿠스 부자를 위해 게르마니아의 라인 강 일대에서는 최소 3세기 후반까지도 소속 병사들과 퇴역병 가족들이 자발적으로 이들 부자를 기리는 제사를 치렀고, 두 사람의 인간됨과 업적을 기리는 책은 꾸준히 읽혔으며 이들 부자를 기리는 탑을 한 바퀴 도는 기념식이 매년 개최됐다.[29]
다만 로마인들이 평했듯 게르마니쿠스는 뛰어난 정신과 육체를 갖고 있던 고결한 로마의 아이돌이었고 현대인이 보기에도 인품과 실력 모든 면에서 모자람이 없는 훌륭한 인재지만, 카이사르나 콘스탄티누스, 스피키오 등과 같은 천재적 명장으로까지 칭송하기엔 군공이 대단히 모자란 건 사실이다. 재능을 더 꽃피워보기도 전에 젊은 나이에 죽은 탓도 있겠고, 타키투스 말따나마 게르마니쿠스 같이 일찍 죽긴 했어도 모든 걸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던 전제군주였던 알렉산드로스 3세 마냥 큰 권력이 있지도 않았던 게 원인이지만, 여하튼 객관적인 업적으로 볼 때 그렇게까지 평가할 실적은 없는 건 사실이다.[30]
그는 타키투스 등 로마지식인들이 말했듯 고결하고 따뜻한 성품의 능력이 뛰어난 차기황제이자 장군, 외교관, 행정가이지만 게르마니쿠스 신화의 근간에는 큰아버지 티베리우스 시대에 대한 불만과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기 때문에 더 돋보인 면도 있었다. 따라서 수에토니우스를 제외한 다른 로마 지식인들은 게르마니쿠스를 뛰어난 장군이며, 사생활적으로는 뚜렷한 결점이 확실히 없던 도덕적인 로마인이라고 말했음에도, 과거 로마의 위대한 장군들인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술라, 폼페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 이상의 장군 또는 압도적인 군공을 세운 전쟁영웅으로는 찬양하진 않았다. 이를 증명하듯 타키투스와 동시대 사람으로 학자이며 장군 프론티누스의 《전술에 대하여》에서, 게르마니쿠스는 여러 그리스-로마 장군 중 그 전술의 특별함이 기술되지 않은 로마 장군이었다. 따라서 인품과 정치가, 행정가, 외교가로서 재능이 훌륭하고, 전략과 전술 모든 면에서 군사적 재능이 뛰어나긴 했으나, 로마사 및 세계사상 남을 천재적 명장의 반열에 들어간다고 보긴 어렵다.[31]
6. 여담
- 선남 선녀였던 친부모와 젊은 시절 미녀로 유명한 할머니, 외할머니의 외모를 물려받아서 키가 컸으며 굉장한 미남이었다.[32] 또 그의 성격과 인품은 아버지 대 드루수스를 그대로 빼닮아서 어릴 때부터 인기가 상당했고 그를 경험한 모든 이들에게 호감을 받았다고 한다. 이런 말들은 게르마니쿠스가 죽은 뒤 게르마니쿠스 신화가 나오면서 나온 말이 아니었고, 게르마니쿠스와 함께 했던 모든 이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게르마니쿠스는 어린 시절부터 쾌활하고 낙천적이었으며, 상대를 잘 배려하는 성격인데다 신분이나 국적에 상관없이 어떤 사람이라도 차별을 두지 않고 진심으로 예의바르게 대하는 등 전체적으로 매력이 상당했다. 또한 가족들에 대한 사랑과 장남으로서의 책임감도 상당해, 죽기 전까지도 홀어머니 안토니아의 자랑이었으며, 몸이 불편해 가족 대부분과 귀족 또래들에게 놀림당하고 구박받던 친동생 클라우디우스의 몇 안되는 보호자이자 친구이며 아버지같은 버팀목이었다고 한다.[33]
-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게르마니쿠스는 의외로 새 공포증이 있었다고 한다. 특히 닭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었는지 몰라도 게르마니쿠스는 상당히 닭을 무서워했다. 그래서 닭이 자신을 쳐다보는 것을 무서워했고, 닭 울음소리 역시 무서워하고 안 좋아했다고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게르마니쿠스는 젊은 시절 군 경력을 쌓는 중에 틈틈히 새들의 비행과 그 패턴을 연구했다고 한다. 이유는 신의 뜻을 이해해 전투에 활용하기 위해서였는데, 실제로 그는 이디스타비소 전투 당시, 독수리 8마리가 숲 위를 날아가자 부하들에게 “이는 신이 우리를 축복하시는 뜻이다”라고 말해 사기를 끌어 올렸다.
-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 7권에서 게르마니쿠스를 단순한 치기 어린 열정맨으로 치부하며 저평가했다. 하지만 게르마니쿠스는 시오노에게 저평가받을 정도로 열정에만 사로잡힌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현대 사가들로부터도 게르마니쿠스 신화로 알려진 사후 이미지 이상으로 한 개인의 역량이나 평가가 아주 좋았고, 인품이나 그 매력은 오늘날에도 "고결하다"고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대단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먼저 장군으로서 게르마니쿠스는 분명히 천재는 아니었어도, 로마군을 이끈 사령관들 사이에서는 분명 유능한 군사적인 역량이 있었다. 특히, 그는 아우구스투스와 대 드루수스의 후광 효과, 본인의 공식적인 지위가 아니더라도 과거 스키피오나 율리우스 카이사르 같이 한 개인으로서 묘하게 부하들을 매료시키는 재주가 탁월해 자연스레 일개 병사들까지 따를 정도로 매력도 상당했다. 또 장군이나 정치가의 자질에서 꼭 필요한 카리스마와 추진력, 협상 능력이 탁월했고, 문제의 핵심을 제 힘으로 파악해 해결하는 재능도 유능했다. 혈통 따위는 신경쓰지 않고 매사 공평무사에 적재적소가 신조였던 티베리우스가 그저 게르마니쿠스에게서 군공 세울 기회를 앗아가서 엿먹이려고[34][35] 그를 대파르티아 전선에 외교 임무를 맡도록 보내고, 또 군통수권까지 모두 부여한 게 결코 아니다. 즉, 그는 사후 고평가받긴 했다고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로마군을 이끈 사령관으로는 두루 유능했고, 결단코 열정이 지나친 나머지 본인의 재능을 드높이는 부류의 사람이 아니었다.
- 제국 동방으로 파견되기 전인 게르마니아 전쟁 당시부터 심리전 활용과 외교전술 활용에도 상당한 재주가 있었다. 게르마니아 전쟁 중 이디스타비소 전투에서는 날아가는 독수리 등을 이용해 병사들의 사기를 끌어올려 승리하기도 했고, 토이토부르크 전투에서 로마군에게 큰 상처를 준 아르미니우스를 상대로도 게르마니쿠스의 순간적인 기지와 심리전으로 로마군이 매복공격 등으로 고전하다가 위기를 넘기거나, 패배의 순간에 승리를 거둔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게르마니아 전쟁 기간동안 아르미니우스의 친동생 플라부스[36]는 로마군 장교였고, 로마군 사령관 게르마니쿠스의 부장 중 한명이었다. 이때 게르마니쿠스는 전투 전에 의도적으로 로마군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서 부장 플라부스를 아르미니우스 앞에 내보내 서로 설전을 벌이게 해 양 군대 앞에서 아르미니우스를 망신시키기도 했다. 플라부스는 전투 전 의도적으로 자신을 내보낸 게르마니쿠스의 뜻을 알아차리고 형과 말싸움을 벌였는데, 플라부스는 칼을 내밀고 자신의 손을 뻗은 뒤 아르미니우스의 아들과 아내가 그의 주장과 달리 행복하게 로마에서 살고 있다고 말하며 이를 숨기고 싶어 했던 아르미니우스를 도발했고, 그의 평정심을 흐트려 놓았다.
- 로마인들에게 단순히 사랑을 받은 사람 이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오랫동안 복무하면서 명성을 떨친 게르마니아 일대에서는 주둔 군단병, 퇴역병 및 그 가족들에게 그 인기가 사후에도 엄청났다. 따라서 황제나 원로원, 로마 정부 차원에서 먼저 요청하지 않았어도 이곳에서 게르마니쿠스에 대한 존경심과 애정은 무려 300여년이나 계속됐고 게르마니쿠스와 그의 아버지 대 드루수스를 위한 제사, 기념식은 연례행사처럼 계속 되었다.
- 로버트 그레이브스의 나는 황제 클라우디우스다에도 등장한다. 작중 주변 사람들에게 바보 취급당하는 동생 클라우디우스를 가족들중 유일하게 생각해주는 형이다. 그래서 자기 어머니조차 무시하는 자기 동생의 능력을 높게 평가하고 무시당하는 모습을 안타깝게 생각하지만 할머니 리비아 드루실라와 큰아버지 티베리우스의 음모의 희생양이 되어 암살당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 넷플릭스 드라마 바바리안 시즌 2부터 등장한다.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에서의 패배 이후 양부인 티베리우스를 따라 그의 참모로서 로마군을 지휘한다. 다만 아직 젊고 직접 게르마니아 전선을 관리하기 전이라서 그런지 실제 역사상의 게르마니쿠스와는 180도 다르게 묘사된다. 흥분을 잘하고 상황을 깊게 숙고하는 능력이 부족하며, 로마를 배신한 아르미니우스의 동생 플라부스를 지속적으로 의심하며 모욕을 준다. 결국 로마군을 이끌고 게르만 부족장 회의를 습격하여 많은 게르만 족장들과 측근들을 살해하는 병크를 저질러, 게르만족이 다시금 아르미니우스에게로 결집하게 만든다.[37] 이후 게르만족이 보복을 위해 게르마니쿠스를 납치당했는데, 로마군 진지를 기습할 때 풀려난다. 뒤늦게 게르만족이 양동작전을 사용하고 있다고 알리지만 이미 상황은 이미 걷잡을 수 없게 되어 로마군이 대패한다. 이후 티베리우스와 함께 퇴각하면서 투스넬다와 그녀의 아이를 납치하여 로마로 귀환한다.
- 게르마니쿠스 본인은 생전에 뛰어난 장군이자 인격자로서 일반 민중에서부터 이웃나라( 파르티아) 황제까지 남녀노소 모두 인기 많았으나, 안타깝게도 그가 남긴 후손들은 중에 비극을 겪지 않고 제대로 평탄한 인생을 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의 성품을 제대로 물려받질 못하고 오명속에 죽어갔거나( 소 아그리피나)[38] 또는 음모에 휘말려 억울하게 죽었거나( 네로 카이사르, 드루수스 카이사르), 그렇지 않고 황제로 즉위해도 원로원의 미움을 사서 죽고 나서도 평가가 오랫동안 박했다( 칼리굴라). 나머지 자녀들은 모두 유년기때 요절하였다.
[1]
이그노투스(Ignotus)라고도 부르는데, 아주 어릴 때 사망했다고 한다.
[2]
황족 특권에 관한 특별법 아래 남들보다 5살 어릴 때 첫 재무관이 됐고, 서기 11년까지 갱신 형태로 재무관을 지냈다. 이렇게 된 이유는 할아버지 아우구스투스의 결정이었는데, 갱신 형태 연장 방법은 선친 드루수스, 처남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의 예에 따른 것이었다. 이 연장 방법을 통해, 게르마니쿠스는
조영관,
법무관을 지내지 않고,
쿠르수스 호노룸의 꽃으로 불린
집정관 자격을 얻는다.
[3]
당시 로마군 전체 군단의 1/3의 지휘권도 함께 부여받았다. 이 임명 당시, 아우구스투스의 결정에 따라 게르마니쿠스는 제정 중기인 2세기 기준으로 보면, 로마군 주력이 집중된 라인강, 다뉴브강을 낀 로마제국 서부, 중부 방어선 전체 총독을 부여받았다. 물론, 그가 아우구스투스 치세 말인 1세기 초 당시 독식했다고 하더라도, 2세기와 달리 이 당시 로마는 판노니아, 일리리쿰 일대를 온전히 장악하지 않아, 그 권한은 3세기 당시 비슷한 권한을 받은 세베루스의 장남
카라칼라와는 전혀 달랐다. 이 조치에 앞서 아우구스투스는 사절을 보내 로마군 앞에서 게르마니쿠스의 선친인 본인의 양자 드루수스를 우선 상기시킨 다음, 개선장군용 의상을 게르마니쿠스에게 입게 하는 형태로 병사들의 자발적 충성을 받아냈다.
[4]
아르미니우스와 벌인 전쟁으로 종종 2차 게르마니아 전쟁 등으로 알려진 게르마니쿠스의 원정 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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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미니우스와 벌인 전쟁으로 종종 2차 게르마니아 전쟁 등으로 알려진 게르마니쿠스의 원정 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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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CAIVS IVLIVS CAESAR) 또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가 아니냐는 말도 있지만, 이 이름들은 아내 아그리피나의 오빠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게르마니쿠스의 3남(실제로는 5남)
칼리굴라의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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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로마인들은 대개 자신의 아들에게 자신의 이름이나 가족의 이름을 그대로 지어주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게르마니쿠스와 친동생
클라우디우스 1세 황제의 본명도 마찬가지였다.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경우, 태어날 당시 이름은 아버지 대 드루수스의 출생 당시 이름인 데키무스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를 그대로 물려받았다가, 얼마 뒤 프라이노멘(개인이름)을 친할아버지와 큰아버지의 프라이노멘과 똑같은 티베리우스로 바꿨다. 그러다가 기원전 9년 아버지가 개선식과 아우구스투스가 예정해 깜짝 발표할 예정이었던 조치를 앞두고 요절하면서,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뒤에 아버지 드루수스가 공적으로 얻은 게르마니쿠스를 더했다. 이후 서기 4년 6월, 큰아버지
티베리우스가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에 완전한 친양자이자 상속자로 들어가면서, 혈연상 외종조부이나 실제로는 양할아버지인
아우구스투스가 티베리우스의 조건을 수락한 결과, 클라우디우스 네로 가문 수장으로 남으며, 다시 개명했다. 이때 그는 친할아버지와 큰아버지가 사용한 이름인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뒤에 게르마니쿠스를 유지한 방식으로 개명했는데, 이 이름은 서기 41년 1월 즉위 전까지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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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친 리비아가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와 재혼할 당시 임신 중이었기에, 사람들은 그가 티베리우스와는 달리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의 핏줄일 것이라고 수군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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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더 정확한 표현은 외외종손일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단어는 없고, 국립국어원 역시 외종손이라는 표기를 옳다고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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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투스는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결혼했지만 얼마 안 가 홀로 된 게르마니쿠스의 여동생 리빌라를 자신의 양손자이자 티베리우스의 외아들인 그와 결혼시켰다. 따라서 게르마니쿠스는 아우구스투스가 만든 복잡한 입양관계를 통해 사촌동생이자 매제인 그와 형제관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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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는 다섯 아들 중 막내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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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 게르마니쿠스는 아버지 대 드루수스와 어머니 소 안토니아 사이에서 아버지의 토가 자락을 잡고 있는 모습으로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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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로마 상류층 귀족들이나 황실 여성들은 살면서 평균 3번 정도 결혼했으며, 자녀를 낳은 경험이 있는 젊은 상류층 부인들은 재혼상대로 인기가 높았다. 이런 까닭에 아우구스투스는 조카딸 소 안토니아(게르마니쿠스의 어머니)에게 여러 차례에 걸쳐 재혼을 명령했는데, 그녀는 자신의 이부언니들과 달리 자녀들을 홀로 키우겠다면서 모두 거절한 채 70대의 나이에 사망할 때까지 자녀들과 손주들을 키우며 홀로 살았다. 실제로 그녀의 이부언니들인 대 클라우디아 마르켈라, 소 클라우디아 마르켈라의 경우, 각각 2번, 3번의 결혼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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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투스의 외동딸 율리아와 아그리파의 막내 아들. 게르마니쿠스의 아내인 대 아그리피나의 동생이므로 처남이기도 하다. 아우구스투스는 그가 성년식을 마치고 18세가 되자 그의 매형 게르마니쿠스처럼 명예로운 공직을 경험하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포스투무스는 제어가 안 될 정도로 워낙 난폭하고 주변에서도 더이상 통제불가 상태였다. 따라서 할아버지이자 양부 아우구스투스가 원로원에서 이 문제를 건의해 상속권 박탈 및 입양관계 파양 후, 외딴 섬으로 유배보냈다. 그러다가 티베리우스가 승계하기 전 아우구스투스의 명으로 유배지에서 살해당했다. 하지만 이때 맨손임에도 힘이 장사여서 그를 죽이러 온 백부장들이 쉽게 죽이지 못했다고 한다. 이후 아우구스투스의 우려대로 그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 포스투무스의 해방노예 클레멘스가 반란을 일으키는 사태가 티베리우스 즉위 직후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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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투스의 이 조치는 과거 카이사르 가문의 두 후계자 가이우스 카아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에게 부여했던 방식과 똑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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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마니쿠스의 성격과 성품은 아버지 드루수스와 비슷했다. 드루수스는 본래부터 다정다감하고 쾌활한 성격을 가진데다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아우구스투스는 드루수스를 매우 사랑했고, 두 사람의 사이도 친부자 관계보다 돈독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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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드루수스는 게르마니쿠스에게는 사촌동생이자 양형제지간이며, 게르마니쿠스의 여동생 리빌라의 남편이었는데 민중들은 두 사람을 라이벌 정도로 생각했지만 둘은 친형제 이상으로 우애가 돈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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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습은 후일 피소 재판 과정에서 이 사실이 알려지자, 티베리우스와 원로원 모두 격분하면서, 피소가 판결 당일 아침 자결한 이유가 됐다. 왜냐하면 상관이 끝까지 항명과 반란 음모 미수를 막고자 노력해줬음에도 피소가 걷어 찬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티베리우스는 이를 거론하며 이 모습이 유죄 판결의 증거라고 밝히고, 제국 전역에 피소 재판 동판을 설치하며 수없이 강조했다. 참고로 이 판결 날, 티베리우스는 이때 피소 아내를 죽이려고 했는데, 어머니 리비아가 끼어 들면서, 이를 실행에 못 옮기고 조카며느리이자 법적 며느리인 대 아그리피나와 정적이 된다. 그러다가 시간이 흘러, 티베리우스는 후일 리비아 드루실라 사후,
세야누스 반역 음모까지 진압한 뒤, 대 아그리피나가 유배된 섬에서 아사했다는 소식을 들은 뒤에 이를 고소해하면서도, 죽은 게르마니쿠스의 일이 생각났다며 어머니의 조치로 죽이지 못한 피소 아내와 그 시종들을 이때의 일을 내세우며 자결을 강요해 보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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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당시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피소가 독살했다고 믿었다. 심지어 게르마니쿠스 본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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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마니쿠스의 요청을 받은 인사들과 그 자녀들은 이런 배경 때문에, 게르마니쿠스의 남은 혈육들이 정치적 위기를 겪거나 암살될 때마다 과민반응했다. 칼리굴라가 암살된 뒤, 그 암살을 주도한 카이레아가 군인이 아닌 존속살해범으로 처형된 것도 이런 이유였다. 또 그들은
발레리우스 아시아티쿠스가 기소됐을 때에도,
네로를 몰락시킬 당시에도, 이 점을 상기시켰다. 그들은 특히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네로 탄핵과 함께 그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해야 한다고 일갈했다. 이들이 이렇게까지 한 이유는 네로가 자신의 어머니인 게르마니쿠스의 큰딸 소 아그리피나를 죽이고, 게르마니쿠스의 친동생 클라우디우스의 아들인 그 일가의 마지막 남자혈육 브리타니쿠스를 죽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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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드루수스, 클라우디우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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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게르마니쿠스의 여동생 리빌라의 첫 번째 남편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비교되는 부분이다.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동방 속주 파견 내내 소아시아와 아르메니아에서 소란스럽고 오만한 행동으로 인망을 잃고 소란을 벌이다 다툼에 휩싸여 부상을 입고 요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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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아는 남편의 여자조카 중 소 안토니아를 일찍부터 드루수스의 아내로 점찍고 아우구스투스에게 매일 설득하고, 반드시 안토니아를 자기 며느리로 맞이 하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표출했다. 그래서 아우구스투스는 두 사람이 결혼적령기가 되자마자 리비아의 바램처럼 드루수스와 소 안토니아의 결혼을 확정짓고 결혼시켰다. 또한 리비아는 이들 부부의 장남 게르마니쿠스와 아우구스투스의 외손녀 대 아그리피나의 결혼에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24]
티베리우스는 아부를 굉장히 싫어해서 자신의 가마 주변으로 원로원 의원조차 오지 못하게 했고, 미남임에도 차가운 파란눈과 과묵함 탓에 원로원 내에서도 거만해보인다고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양아버지 아우구스투스 역시 유아기 때부터 키운 티베리우스의 몇가지 행동은 안 좋아했지만, 원로원과 민중들에게 티베리우스에 대한 오해를 해명하기 위해 열심히 변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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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마니쿠스에게는 친할머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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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마니쿠스의 외할머니. 따라서 게르마니쿠스는 태생적으로 아우구스투스의 가장 가까운 남자친족 중 한명이 되며, ‘카이사르-아우구스투스’와 마찬가지로 아우구스투스는 외종조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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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투스 사후, 벌어진 이란성 쌍둥이 형제 리보의 티베리우스, 리비아 드루실라 암살 미수 사건의 모든 조사, 재판 종결 후 티베리우스 황제와 원로원에서 이 사건을 주도, 모의한 스크리보니우스 리보 가문에게 취한 처벌 중 하나는 "아우구스투스 이래, 카이사르 가문(율리우스 카이사르 가+클라우디우스 네로 가)과 리비우스 드루수스 가문이 자랑스럽게 사용한 이름 '드루수스', '드루실라'를 사용받을 수 있는 모든 특권을 박탈한다."였다. 따라서 이 처벌을 받게 된 스크리보니우스 리보 가와 그 친인척들은 리비우스 드루수스 가에게 연이어 두 아이를 보내 얻게 된 특권을 빼앗김에 절망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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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아래 남동생이자 게르마니쿠스의 막내아들인 가이우스 카이사르(통칭 칼리굴라)와 같은 이름이라는 말도 있고 푸블리우스를 지어줄 생각이 있었다는 의견도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이름을 지어줄 8일 전에 사망해 편의상 이그노투스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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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게르마니쿠스의 막내아들 칼리굴라, 친동생 클라우디우스는 게르마니쿠스 후광 효과를 그가 생전 활약한 일대에서 계속 누렸고, 클라우디우스는 즉위 초 이 일대에서 일어난 반란이 병사들의 자발적인 반란 참가 거부로 인해 지나칠 정도로 싱겁게 끝나는 일도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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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지휘 스타일이 콘스탄티누스와 거의 비슷했던 반면 인품은 콘스탄티누스보다 훨씬 뛰어났던 그의 아버지 드루수스에게도 해당된다. 콘스탄티누스는 성정이 흉포하고 잔인했으며 간혹 터지는 화를 참지 못하는 격정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여하튼 오래 살았고 만만찮은 강적들을 야만족이든 파르티아인이든 같은 로마인이든 모조리 쳐부수어 세계사상 길이 남을 명장이 되었다. 반면 드루수스는 인격과 인품이 뛰어나긴 했어도 일찍 죽었으며 지위도 한 구획 담당 사령관에 불과했기에 콘스탄티누스만한 군공을 쌓지 못해 이렇게 평가받을 건덕지가 없다.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그도 오래 살았고 황제가 되었다면 그 정도는 했을거라곤 하겠으나 여하튼 객관적 실적이 없으니 평가받을 여지도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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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말하자면 카라칼라, 안토니우스처럼 꽤 군사적 재능이 뛰어난 장군이었다곤 볼 수 있다. 이들을 카이사르, 콘스탄티누스 급으로 보는 이들은 없지만 여하튼 명장이었던 건 사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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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투스 일가에는 당시에도 미남, 미녀가 많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우구스투스는 동시대 사람들 모두에게 굉장한 미남이라고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유명한 미남이었는데, 게르마니쿠스의 친할아버지와 친아버지 드루수스, 백부 티베리우스도 상당한 미남으로 유명했다. 이런 까닭에 게르마니쿠스의 여동생 리빌라 역시 당시 로마인들에게 상당한 미녀로 유명해서 로마의 한 시인은 그녀를 신화 속의 여신이라고 찬사를 보낼 정도였다. 또한 장애를 가지고 있던 남동생 클라우디우스도 말을 더듬고 고개가 흔들리는데다 침을 흘리는 결점이 있었음에도 키가 크고 잘생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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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마니쿠스 못지 않게 클라우디우스를 아끼고 챙기던 또 다른 황실 식구는 아우구스투스였다. 이런 까닭에 클라우디우스는 형과 양할아버지이며 외종조부인 아우구스투스를 어린 시절부터 존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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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키투스, 그리고 당대의 일부인들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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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티베리우스의 입장에선 게르마니아에서 군공을 쌓아 지나치게 인기가 높아가는 게르마니쿠스에 대해 어떻게든 조치를 취할 필요도 있었기에, 게르마니쿠스가 게르마니아에서 거둔 전공을 확실히 확립하기 전에 소환할 개연성도 충분했으며 이는 타키투스는 물론이고 이후 역사가들도 거론할 빌미를 주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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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인 플라부스에서 알 수 있듯이 금발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형과 마찬가지로 로마군에 입대해 로마 시민권을 따고 에퀴타스에 편입된 사람이지만, 그는 친형 아르미니우스의 편을 들지 않고 로마인으로 살았으며, 로마군 장교로 복무해 게르마니아 전쟁을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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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처럼 본색을 잘 드러내지 않는 티베리우스가 강하게 분노를 할 정도였다. 당시 티베리우스는 강력한 세력을 가진 친로마파 마르코마니족 족장 마로보두스를 포섭하는데 성공한 상태였다. 때문에 많은 게르만 부족들이 그를 따라 친로마로 기울어져 가고 있었는데 이걸 완전히 엎어버린 것이다. 심지어 아직 모든 군단들이 집결하지 않아 로마군의 준비가 완료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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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소 아그리피나는 자기 배로 낳은 아들 네로한테 직접 제거 당하는 가장 끔찍한 운명을 맞이한데다, 하도 평이 좋질 않아 그녀의 죽음을 아무도 슬퍼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