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 제45대 황제
콘스탄티우스 2세 CONSTANTIVS I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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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비우스 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 (Flavius Iulius Constantius) |
출생 | 317년 8월 7일 |
로마 제국 판노니아 시르미움 | |
사망 | 361년 11월 3일 (향년 44세) |
로마 제국 킬리키아 몹수에스티아 | |
재위 기간 | 로마 황제 |
337년 5월 22일 ~ 361년 11월 3일 (24년 196일) | |
전임자 | 콘스탄티누스 1세 |
후임자 | 율리아누스 |
부모 |
아버지 :
콘스탄티누스 1세 어머니 : 플라비아 막시마 파우스타 |
형제자매 | 콘스탄티누스 2세, 콘스탄스, 플라비아 발레리아 콘스탄티나, 헬레나 |
배우자 | 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의 딸, 플라비아 에우세비아, 파우스티나 |
자녀 | 플라비아 막시마 콘스탄티아 |
종교 | 아리우스파 기독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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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48대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의 셋째 아들이다. 콘스탄티누스의 세 아들들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살아남아 제국을 통치했다.
2. 생애
2.1. 3형제가 통치하던 시기
원래 콘스탄티누스 1세는 자신의 사후, 제국을 그의 세 자식과 조카 둘에게 나눠 통치하게 하려고 했으나 콘스탄티우스 2세가 주도하여 친척들을 죽여 버렸기에 이는 실현되지 않았다.( 337년 콘스탄티누스 황족 학살 사건) 그 후 조카들의 담당 구역은 콘스탄티우스 2세와 막내 콘스탄스의 휘하에 들어가게 된다.이에 불만을 품은 콘스탄티누스 2세가 바로 옆 지역을 담당하고 있던 콘스탄스에게 북아프리카의 통치권을 요구했지만 콘스탄스는 무시했고, 결국 340년에 콘스탄티누스 2세가 쳐들어왔다가 전투에서 패배하고는 살해되고 말았다. 해서 콘스탄티누스 2세가 통치하던 지역은 콘스탄스의 영역이 되고 이후에는 막내인 콘스탄스가 사실상 선임 황제가 되고 마는데, 콘스탄티우스 2세는 아리우스파였던 반면 콘스탄스는 아타나시우스파에 기울어지고 있었다.
콘스탄티우스 2세는 역대 동서 분할 제국 중 가장 크고 강력한 서로마 제국을[1] 통치하는 콘스탄스에게 압도되어, 생전에는 아타나시우스파에게 함부로 하질 못했다. 아타나시우스파를 탄압하자 콘스탄스가 대군을 이끌고 "항의"하러 왔을 때는 아무 소리도 못하고 그 조치를 철회해야만 했던 일도 있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콘스탄티우스 2세는 그런 상황에서도 전력을 기울여 제국 방어에 전념하고, 그러던 중 콘스탄스가 350년도에, 야심만만한 휘하 장수 마그넨티우스에게 살해된다.
2.2. 마그넨티우스 반란 이후
그 당시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 전쟁 중이던 콘스탄티우스 2세는 서둘러 페르시아와 강화를 맺고 반란 진압에 나선다. 마그넨티우스가 반란을 일으킬 당시에 도나우 강 중류를 담당하고 있던 사령관 베트라니오도 황제로 들어섰기 때문에 콘스탄스가 통치하던 지역에 황제가 둘이나 있었다. 베트라니오에 대해서는 항복을 권유하여 그 휘하의 병사들을 흡수했고 베트라니오 본인에 대해서도 관대한 처우를 했지만[2], 마그넨티우스에 대해서는 3년 동안 내전을 벌여 마그넨티우스 휘하의 병사들의 2/3 이상이 죽고 마그넨티우스는 결국 자살하게 된다.그 사이에 혹시라도 있을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대비해 콘스탄티우스 2세는 카파도키아 지역에 유폐해두고 있었던 사촌[3] 콘스탄티우스 갈루스를 351년에 부제로 임명해 동방을 담당하게 했다. 하지만 갈루스는 오랜 유폐 생활로 콘스탄티우스 2세를 끊임없이 경계하고 혐오했으며, 결국 마그넨티우스 반란이 진압된 이후 354년에 정제 살해 음모죄로 처형되었다.
2.3. 의심 많은 황제
콘스탄티우스 2세는 그의 밑에서 관료생활을 한 아우렐리우스 빅토르의 평가처럼 명민하고 성실한 행정가이자 황제였다. 그렇지만 후기 로마 제국 기준이 아닌 현대 기준으로 봐도 콘스탄티우스 2세는 본인이 가진 역량, 안정성에 해가 갈 만큼의 결함이 분명했다.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의 기록에서 묘사되듯, 매우 매우 음험하고 의심이 많은데다 음모 꾸미는 데도 달인이었다.물론 당시 로마 제국 황제들에게 있어 생존을 위협하는 최대 경쟁자는 황위 찬탈을 시도하는 반란자들이었지 외부에서 쳐들어오는 이민족들이 아니었던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유능한 장군들과 억울한 희생자가 한둘도 아니고 연좌제로 잠재적 정적, 반란자와 그들의 가족, 부하, 노예들까지 여럿 제거한 경우는, 콘스탄티우스 2세 뿐이다.[4]
마르켈리누스의 기록에 따르면, 콘스탄티우스 2세의 치세 동안 장교들과 관료들은 승진을 위해서 상급자를 밀고하는 것이 횡행했다고 한다. 당시 '해몽 백작'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던 한 밀고자는 사람들이 아무 생각 없이 털어놓은 꿈 이야기를 황위에 대한 야망으로 교묘하게 왜곡하는 재주가 있어서 많은 지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고 한다. 콘스탄티우스 2세가 신뢰하던 신하 '쇠사슬 파울루스'라는 관리는 무고한 사람들에게 날조한 증거를 들이대며 절대 빠져나갈 수 없도록 옥죄기로 유명했다고 한다.
이런 기록을 토대로 유추해보면, 콘스탄티우스 2세는 분명코 말해 의심 많고 음험하면서도 영악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고 평가받는다. 이런 건 3~4세기 황제 기준으로도 어느 정도 정상은 아니었다. 군인 황제 시기로 불린 3세기 동안, 아니 그 이전인 세베루스 왕조 후기인 율리아 마마이아가 권세를 휘두를 무렵부터 로마 정치계는 배신, 음모, 술수가 난무했다지만, 콘스탄티우스 2세는 분명 지나친 면이 많았다. 더욱이 그의 제위는 군인 황제 시기 황제들처럼 군권을 쥔 야심 많은 장군이나, 권모술수에 능한 3세기 원로원의 행태로 흔들릴 확률이 적었다. 이는 부황 콘스탄티누스 대제 아래에서 정리되고 개혁되면서, 지나친 숙청을 굳이 벌일 이유가 적었다는 말이 된다. 1세기 중반의 칼리굴라처럼 숙부 클라우디우스 1세, 아버지 게르마니쿠스와 고모부 소 드루수스, 이들을 따른 인사들의 비호 외엔 10대부터 늘 암살, 궁중음모 속에서 자기경계, 냉혹한 보복을 '본인과 가문의 존속을 위한' 숙명으로 받아들일 분위기도 아니었다. 즉, 제위를 지키기 위해 억지로 죄를 만들어 잠재적 정적으로 '의심'될 만한 이들을 옥죄거나 제거할 이유가 적었다는 말이다. 즉, 주관적, 객관적 이유를 근거로 볼때 이 정도라면 개인 성격 문제라고밖엔 할 수가 없다. 아버지인 콘스탄티누스 1세 같은 경우도 억울하게 죽었다고 할 수 있는 자는 크리스푸스 뿐이며 이마저도 콘스탄티누스 1세의 본의가 아니었다는 반론이 있다.
동서고금의 군주 중 음험하고 의심 많은 이들이 늘 그렇듯, 콘스탄티우스 2세는 의심과 주관적 예측만으로 직방계 혈육들을 계속 옥죄였다. 그는 과도한 친족 숙청으로 제위 승계 인재풀을 줄였고, 살아남은 친족들도 자기 통제 안에 넣고 이마저도 의심하고 처벌했다. 이렇게 되니 그가 급사했을때, 마땅한 제위계승자들은 거진 사라지거나 있어도 콘스탄티우스 2세 생전부터 여러 리스크를 안고 제위를 이어야 했다.
결국 이런 결함 탓에 콘스탄티누스 1세의 위업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콘스탄티누스 왕조는 단명하고 만다. 어떻게 보면 1세기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가 게르마니쿠스,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네로 카이사르, 드루수스 카이사르, 브리타니쿠스라는 제대로 된 정통성 있는 후계자들이 요절, 간신 세야누스의 궁중음모, 네로와 세네카의 숙청계획과 의도적인 경쟁자 제거 등으로 사라지면서 단명하게 된 이유와 비슷하다.
그의 시대인 후기 로마 제국은 혼자 다스리기에는 너무 광범위하였고, 동시대 한-위진 제국 혹은 훨씬 훗날의 동로마 제국과는 달리 행정 체계도 발달이 덜 되어, 그 한계가 명확했다. 제 아무리 프리키파투스보다 도미나투스 아래에서의 황제가 절대적이라고 해도, 콘스탄티우스 2세는 이 제국을 도저히 혼자 다스릴 순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제대로 된 협력자는 필수였고, 그 대상자가 친족이면 콘스탄티누스 왕조의 안정성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후광 아래 견고했다. 허나 그의 예민함과 의심은 이런 이점을 갉아 먹고 말았다.
더 비극이 된 것은 남은 남자 황족이 본인이 숙청한 숙부의 아들들인 갈루스와 율리아누스였다는 현실이었다. 이는 의심 많고 예민한 콘스탄티우스 2세가 이들을 계속 감시하고 의심한 이유가 됐다. 즉, 그나마 부황인 대제의 혈육이라는 타고난 정통성을 앞세울 대타조차도, 콘스탄티우스의 직간접적인 견제와 의심으로 언제 죽을지 몰랐던 상황이 초래된 것이다. 다행이라면 개인적인 측면에서 콘스탄티우스 2세의 성격적 결함이 큰 단점이라고 해도, 그가 상당히 영리하고, 네로처럼 즉흥적이지 않았던 부분일 것이다. 어쩌면 칼리굴라, 도미티아누스, 하드리아누스처럼 예민하고 냉정하면서도 의심있는 면이 더 강했던 황제라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 모른다. 따라서 그는 네로처럼 세네카, 부루스, 티겔리누스 같은 권신이나 간신에게 휘둘리지 않았던 황제였고, 이 점은 제국에게 마냥 해가 되지 않았다.
이는 게르만 대부족들을 상대할 때도 크게 도움이 되었는데, 게르만 대부족 족장들은 앞장서서 자신들을 쳐죽여대는 전사 황제 콘스탄티누스에게 의외로 상당한 경외심을 갖고 있었고 콘스탄티누스도 게르만족에 대해선 두려움을 가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콘스탄티우스는 아버지와는 달리 군재는 꽝이었고 당연히 전투도 대부분은 부하들에게 맡겼기에 아버지만한 카리스마는 가지지 못했다.[5] 그러나 콘스탄티우스는 음모의 대가였기에 배신과 술수라면 그못지 않게 도가 튼 게르만족 족장들이 그를 당해내지 못했다. 게르만족들이 거짓 항복을 한 후 협상장을 기습해서 콘스탄티우스를 비롯한 로마 고위층들을 다 죽여버리기로 했는데, 역사는 해당 협상장에서 도리어 도륙을 당한 쪽은 게르만족 족장들이었다고 전한다. 이후 게르만족에 대한 대대적인 복수전이 전개되는데 족장들을 대거 잃어버린 게르만족들이 콘스탄티우스의 로마군에게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자세한 부분은 전하지 않으나 콘스탄티우스가 이미 알고 대응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허나 이런 성격적인 단점은 상술했듯 아우구스투스의 후광 이상을 갖고 있던 콘스탄티누스 왕조가 콘스탄티우스 2세 생전부터 여러 위험요소를 갖고 단명한 이유가 됐다. 당장, 황실 존속에 필수인, 정제-부제 협력 체제가 잘 굴러갈 수 없게끔 됐다. 그는 갈루스를 결국엔 부제로 삼았지만, 기어오른다는 핑계로 숙청했다. 이런 근시적인 숙청은 제국을 혼자서 통치하기엔 역부족인 근본적인 모순을 해결하지 못했다. 더 재미난 사실은 콘스탄티우스 2세가 명민하고 정치, 행정적 감각이 평균 이상이어서 다시금 협력자가 필요했다는 점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현실이었다. 그래서 그는 필연적으로 마지막 남은 혈육인, 갈루스의 동생 율리아누스를 부제로 삼아야 됐다. 허나 아무리 율리아누스가 순종적이고 딴마음을 품지 않는다고 해도, 여러 선례는 종국적으로 협력자, 후계자이며 부제인 율리아누스와 그 휘하 관료, 장군들이 콘스탄티우스 2세를 경계한 원인이 됐다. 사실 이복형제라고 해도 친형과 다름없는 갈루스가 제거된 것을 본 이상, 율리아누스 입장에서 콘스탄티우스 2세는 만악의 근원이라고 여겨도 콘스탄티우스 2세는 별 할말이 없다.
따라서 콘스탄티우스 2세는 자신이 벌인 여러 행보 때문에 본인 스스로 경계를 끊임없이 해야 되는 상황이 되고 만다. 이러한 상황은 근시적인 이득만 쫒은 본인이 스스로가 자초했다는 비난 속에서, 그가 꽤나 명민한 황제임에도 제 스스로 저평가받게 만든 제1원인이 됐다.
실제 콘스탄티우스 2세는 율리아누스의 급성장에 위험을 느낀 나머지, 페르시아와의 전쟁이라는 명목으로 무리하게 율리아누스의 정예병 절반을 압수하려고 했다. 이에 서방 출신자가 많아서 고향과 지나치게 먼 동쪽 끝의 페르시아 전선으로 가는 것을 싫어했던 율리아누스의 군사들은 반발했고, 결국 제국은 다시금 내전 상황이 일어나게 됐다.
아버지 콘스탄티누스는 음모와는 꽤 거리가 먼 전형적인 항우형 맹장이었고 성격도 화끈하고 잔인했으며, 외조부 막시미아누스는 군사적 재능과 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 지킨 의리와는 어울리지 않게 현대인 기준으로 봐도 푼수끼가 다분할 정도로 정치적으론 천진난만한 사람이었다. 그와 이름이 같은 할아버지 콘스탄티우스 1세는 매우 온화하고 나서기를 삼가는 선량한 사람이었는데 이런 조상들에게서 궁중 음모에 닳고닳은 페르시아 왕중왕 샤푸르 2세와 역시 음모 꾸미고 배신하는데 도가 큰 당대 게르만 대부족 족장들 뒤통수를 친 천부적인 음모의 달인 콘스탄티우스 2세가 나온 건 매우 미스테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콘스탄티우스 2세의 치세에 여러 번 반란이 일어난 것도 콘스탄티우스 2세 특유의 의심병 지분이 상당하다. 하지만, 콘스탄티우스 2세에겐 인내심, 조직력, 결단력, 책임감이란 강점이 있었고, 율리아누스의 반란 외엔 모든 반란 진압에 성공하였다. 이와 같은 장점들은 후술할 단원들에서 드러난다.
2.4. 탁월한 내치와 군대 장악
357년, 로마로 입성하는 콘스탄티우스 2세.[6] |
콘스탄티누스 1세와는 달리 야전 사령관으로는 영 자질이 없고, 성격적으로 음험하고 의심 많고 영악한 면이 많았다. 그렇지만 그는 대제 사망 당시 생존한 아들 중 그 재능이 평균 이상이었고, 황제에게 필수적인 몇 가지 능력에선 성실하고 명민했다. 심지어 그는 조직력이 뛰어났고 책임감도 대단했다. 이는 섹스투스 아우렐리우스 빅토르의 증언에서 드러난다. 아우렐리우스 빅토르는 콘스탄티우스 2세 밑에서 제국 관료 생활을 시작해 율리아누스 시대에 원로원 의석을 받았고 율리아누스의 신임 아래 판노니아 세쿤다 총독을 지냈다. 이후 그는 테오도시우스 1세때인 389년 프라이펙투스 우르비까지 지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겪어본 황제들을 바로 곁에서 보면서 전문 행정관료의 관점에서, <황제 열전>을 저술했다. 이 책에서 그는 자신이 모신 콘스탄티우스 2세를 "명민했으며 책임감이 대단하고 성실했다"고 논평했다.
이런 평가처럼 콘스탄티우스 2세는 내치와 법률 집행에 관심을 두고 직접 관리할 정도로 세세한 부분까지 꼼꼼히 챙긴 황제였다. 심지어 그는 관료들의 탐학을 막는 법률도 여러 차례 제정해 이를 철저히 관리했다. 359년에는 로마 시에만 있었던 특별시장(Praefectus Urbi)[7][8]를 콘스탄티노폴리스에도 설치해 행정 효율성과 전문성을 향상시켰다. 또한 Byzantine Senate(동로마 즉 콘스탄티노폴리스 원로원)[9]을 로마 원로원과 동급으로 격상시키고 정원을 2000명으로 확 늘림으로써,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완전히 기존의 로마 시와 행정적, 법적으로 동급의 수도로 만들었다. 이 전에 콘스탄티노폴리스는 트라키아 속주로부터 행정적으로 독립되어 있지는 않았던 점을 생각해보면, 그의 시대를 거치면서 노바 로마 내 정치, 행정, 사회 부분이 향상되고 훨씬 세밀해지게 된 것이다. 부황 콘스탄티누스 1세의 324년~ 330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건설과정은 잘 알려져 있지만, 이 점은 의외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는 점에서 이 사람 입장에서 아쉬운 면일 수도 있다.
그는 야전군 관리와 군인들 생활상에도 관심이 많았고, 이들을 확실히 장악하는 법도 잘 알았다. 콘스탄티우스 2세는 황궁의 사치스런 생활을 즐겼던 동생 콘스탄스와는 달리 국경 지대 순행에 열의를 쏟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황궁에 있던 시간은 의외로 얼마 되지 않았다. 때문에 콘스탄스와는 달리 야전군을 확고하게 장악하게 됐고, 재위 기간 내내 본인의 성격적 결함 등으로 반란이 터지는 가운데에서도 로마군의 신망을 크게 잃지 않았다. 후술할 율리아누스의 반란은 진압하지 못하고 병에 걸려 죽었지만, 그 시점에서도 콘스탄티우스가 원래부터 장악력을 높여 놓은 동방의 로마군은 대놓고 그를 배신하진 않았었다. 때문에 군심 관리가 최종적으로 실패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나마 중병 걸려 쓰러진 상황에서 더는 억지 부려 봐야 소용 없다고 판단하여 포기하고 율리아누스를 공식적으로 후계자로 인지한 걸 보면, 적어도 나름대로는 상황에 맞춰 자존심을 굽히는 융통성이 발휘되었다고 봐야 한다.
콘스탄티우스의 꼼꼼한 성격과 야전군 장악은 대 페르시아 전선에서 빛을 발하였다. 일리리쿰 속주와 아카이아와 마케도니아 속주까지 죄다 서방 제국에게 넘겨준 상태의 동방 제국을 가지고[10] , 한창 다시 무시무시한 상승세를 타고 있었던 사산 왕조에게 한 치도 밀리지 않는 대등한 승부를 벌인 것은 콘스탄티우스 2세의 조직력과 행정적인 수완 덕택이었다. 아미다를 잃은 것이 로마인 이야기에서는 집중적으로 부각되는데, 콘스탄티우스 2세가 다스렸던 동방 제국은 역대 동서 로마 분할통치기 제국들 중 최약체[11]였음을 유념해야 한다. 때문에 한참 전성기에 있었고 또 역대 가장 뛰어난 장군 황제를 보유했던 사산 왕조와 샤푸르 2세[12]는, 성장 동력만 낭비한 채 세월만 보내게 된다.
콘스탄티우스가 방어전만 수행한건 아니고 단독 황제가 된 후에는 서방에 머물면서 야만족에 대한 대대적인 군사 원정도 감행했다. 제국을 계속해서 약탈하던 알레만니족에 대해 353년부터 354년까지 성공적인 원정을 벌여 토벌했기 때문에 알레만니족은 한동안 쭈그러져 지내야 했다. 그 후 357년에는 모에시아 인페리오르 속주를 침입한 콰디족과 사르마티아족을 몰아내고 역으로 다뉴브강을 도하해 콰디족, 사르마티아족에 대한 반격 작전을 지휘했다. 역시나 결과는 로마의 승리.
콘스탄티우스 시대의 군제 개혁도 그의 업적이라고 볼 수 있다. 갈수록 강해지는 사산 왕조를 상대하고, 중앙군을 강화하려면 황제 직속의 야전군이 필요하다는 판단 하에, 프레센탈 야전군을 제1프레센탈군과 제2프레센탈군으로 증설 개편하여 2배로 늘린 것 역시 콘스탄티우스 2세 아래에서 결정된 노력의 결실이었다. 또한 그전까진 그저 말 탄 보병에 불과했던 제국 기병들이 정말로 말타고 싸우는 기병이 되기 시작한 게 그의 치세부터며, 기병 비율을 대폭 늘린 것도 그의 조치다.
더 대단한 점은 콘스탄티우스 2세의 이 군 조직 개편이 이후로 무려 400년 넘는 기간동안 기본 틀을 유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2.5. 교회 일치 노력
당시 기독교는 선친인 콘스탄티누스 1세때부터 아리우스파와 아타나시우스파가 험악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이 대립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심해져서 나중에는 심지어 같은 아리우스파끼리도 강경파와 온건파가 대립하는 등(아타나시우스파도 마찬가지) 각 지역의 기독교 세력끼리 사분오열되는 양상을 보였다.[13] 콘스탄티우스 2세도 기독교인이었는데 그의 신앙은 대체로 아리우스파에 가까웠다. 하지만 종교성향이 그리 강한 인물은 아니었기 때문에 딱히 자신의 신앙에 얽매이지는 않았으며, 자신이 로마 유일의 황제가 된 이후 당시 분열되어 있던 기독교 세력을 통합하기 위해 재임기간 동안 여러 번 공회의를 개최하였다.콘스탄티우스 2세의 기독교 통합 노력은 신앙적인 차원이 아니라 정치적 안정을 얻기 위함이었기 때문에 교리에 대해서는 비교적 유연성이 있었다. 그 점은 아버지 콘스탄티누스 1세와 같았다. 그는 자주 공의회를 개최하여 주교들 간의 대화 기회를 늘렸으며, 아리우스주의와 아타나시우스주의에서 극단적인 주장을 배제하고 온건한 주장들을 모아서 양측이 받아들일 수 있는 신경(creed)을 작성하려고 하였다. 이 과정에서 양측의 강경파들을 축출하고 성직을 박탈하는 한편, 유명한 기독교 명망가들을 적극 회유하였다.
이와 같은 시도는 그럭저럭 성공을 거두는 것처럼 보였으나 문제는 당시 알렉산드리아에서 건재하게 버티고 있었던 아타나시오스 주교였다. 자신의 이름을 딴 교파의 맹주였던 그는 아리우스파와의 어떠한 타협도 거부하였으며, 그것은 황제의 통합 의지에 배치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결국 콘스탄티우스 2세는 355년 그를 반역 혐의로 체포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아타나시오스는 지지자들로부터 체포 계획을 미리 전해듣고 알렉산드리아에서 도망쳐서 이집트의 사막지대 여기저기 옮겨다니며 도피생활을 하였으며, 콘스탄티우스 2세의 감시망을 피해서 이집트를 중심으로 자신의 지지세력을 공고히 하였다.[14]
콘스탄티우스 2세는 아타나시오스를 일시적으로나마 축출한 후, 직권을 발동하여 시르미움 공의회(Sirmium Council)에서 선친 시절에 채택된 니케아 신경을 아리우스파의 주장이 많이 반영된 새로운 신경으로 대체하도록 강행하였다. 하지만 이 신경은 당연히 친 아타나시오스파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으며 아리우스파 강경파들은 반대로 성부와 성자 예수와의 관계를 규정하는 부분이 너무 모호하다고 반발하였다. 결국 콘스탄티우스 2세 사후 이 신경은 유야무야되어 버렸으며, 이후 알렉산드리아로 복귀한 아타나시오스와 그의 지지세력에 의해 니케아 신경이 기독교 세계의 유일한 교리로 다시 부활하였다.
한편으로 콘스탄티우스 2세는 기독교 선교에도 열의를 보였는데, 고트족 선교로 유명한 울필라스(또는 불필라, Ulfilas, Wulfila)가 바로 이 콘스탄티우스 시대에 활약했던 선교사이다. 덕분에 콘스탄티우스 2세 시절에 다수의 게르만 부족이 아리우스파 기독교로 개종을 했다.[15][16]
2.6. 부제 율리아누스
갈루스를 처형한 다음, 355년에는 갈루스의 동생이었던[17] 율리아누스를 부제로 임명하여 갈리아를 담당하게 한다. 이후 악조건에서도 율리아누스가 활약하는 동안, 도나우 강 일대와 동방을 담당하면서 정제로서 통치했다.359년, 사산 왕조의 재침공으로 제국 동방 방위선에 있던 아미다가 점령당하자 콘스탄티우스 2세는 반격에 나설 채비를 했고, 이 일환으로 부제 율리아누스의 주력 부대를 보내올 것을 요청했다. 실제 전력을 보강받기 위함도 있었거니와 전술했듯 율리아누스의 병력을 줄이기 위함도 당연히 있었다. 이에 반발한 부제의 병사들이 율리아누스를 정제로 옹립하여 다시 내전이 시작되게 되었다. 율리아누스 측이 먼저 움직임으로써 도나우 방위선의 병력까지 접수하고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쳐들어오던 와중에 중병이 들었고, 황제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그 상태에서 세례를 받고, 쳐들어오는 율리아누스를 후계자로 임명한 다음 향년 만 44세로 숨을 거두었다.
3. 여담
- 세베루스 황제 이후로 확고히 로마의 영토로 확립되었던 니시비스는 오히려 율리아누스의 원정 실패로 사산 왕조에게 넘어간 후론 영영 로마의 품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반면 아미다는 이후에 제국이 도로 페르시아에게서 빼앗아오게 되며, 아랍에게 빼앗긴 후에도 9~10세기 반격기에 수복하여 적어도 바실리오스 2세 치하까진 제국의 수중에 있게 된다.
- 로마 시의 원로원 내에 있었던 승리의 제단(Altar of Victory)을 폐쇄했다. 이는 율리아누스가 다시 살렸다가, 그라티아누스가 다시 없앴다. 다시 살리려는 로마 고위층의 여러 청원이 있었지만 그 뒤의 황제들에게 모두 거부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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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우스 시기 이탈리아는
로마 다신교가 여전히 강세였는데 그는 다신교를 적극적으로 탄압하거나 적대하지는 않았다. 그가 적극적으로 탄압한건 다신교가 아니라
유대교와
유대인들이었다.
[1]
동서 간에 늘 논란의 대상이었던
일리리쿰에,
아카이아와
마케도니아
속주까지 가지고 있었다! 동방의 경제력이 더 우세했다는 점을 미뤄보면 적어도 경제적인 면에선 1:1로 나눠가진 셈이지만 군사력과 인구적인 면으로는 확실히 압도적인, 다시 말하자면 콘스탄티우스 2세에겐 극도로 불공평한 분할이었다. 315년,
콘스탄티누스 1세에게 패한 후
리키니우스가 통치한 영역과 거의 겹칠 정도이다.
[2]
영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아버지라 불렀으며, 위로용 만찬을 크게 내어 대접했고,
아나톨리아의 프루사(현
부르사)에서 여생을 편안히 보내게끔 노후보장도 해주었다고 한다.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 마그넨티우스에
선택과 집중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3]
콘스탄티누스 1세에게는
배다른 동생이 둘 있었고[18], 이들 중 첫째
플라비우스 달마티우스에게서 난 두 조카(
한니발리아누스,
달마티우스 : 이 둘은 동복이다)는 사후 공동 황제로 정했으나 콘스탄티우스 2세의 음모에 살해당했다. 당시 나이가 어렸던 둘째 동생
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의 자식들은 유폐되어 있었다. 사실 이들은 모계쪽으로도 친척이고 이렇게 보면 콘스탄티우스 2세가 두 형제의 당숙. 율리아누스 형제의 할머니인 테오도라는 콘스탄티우스 2세의 모친인 파우스티나의
씨다른 언니였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계모의 여동생을 아내로 맞이해서
족보가 꼬였다.
[4]
유능한 지휘관으로서 멀쩡히 알레만니 족 토벌을 잘하고 있던
클라우디우스 실바누스를 신하들의 모함만 믿고 잡아죽이려 하는 바람에, 궁지에 몰린 실바누스가 정말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살해되기도 했다.
[5]
부친의 군재를 가장 많이 물려받은 건 막내 콘스탄스였다.
[6]
콘스탄티우스 2세 생애 첫 로마 방문이었다. 357년 4월 28일부터 같은해 5월 29일까지 로마에 머물렀다.
[7]
뜻만 보면 도시의 총독/관구장이라는 뜻이다. 다른 Praefectus(영어로 Prefect)는 속주 상위의 대관구장을 뜻하는데, 수도 로마는 일개 도시이지만 수도이니만큼 드넓은 관구와 동급 취급을 해서 이 용어를 쓴다. 이런 점은 도와 동급인 우리나라의 특별/광역시와 같다.
[8]
이 당시에는 원로원의 수장직을 겸했다.
[9]
속주의 일정 규모 이상의 도시마다 원로원이 시의회마냥 있었다.
[10]
즉 유럽에는
트라키아만 영유한 상태로
[11]
리키니우스가 콘스탄티누스 1세에게 한 차례 크게 패배하고 난 다음 317년에 보전했던 영역과 거의 정확히 일치한다. 여기서의 동로마 제국은 동로마사 전체를 통틀은 개념이 아니라 로물루스 폐위 이전 기준이다.
[12]
콘스탄티우스 2세 때문에 인생이 크게 꼬인 또 한명의 불운한 명군
[13]
콘스탄티누스 1세는 당시 나름 탄탄한 조직체계를 가지고 있었고 교리상으로도 유일신 개념을 가진 기독교가 로마 사회의 통합에 일조할 것으로 기대했는데, 예상과 달리 오히려 분열의 씨앗을 들인 셈이 됐다. 이들의 대립과 분열은 이후 로마의 통치자들에게 지속적으로 부담을 안겨주었다.
[14]
당시 아타나시우스는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큰 지지세력을 확보하고 있던 인물이었으며 자신의 지지세력을 부추겨서 폭동을 일으키거나 적대 인물의 고문/암살등을 자행했다는 혐의를 여러 개 받고 있었다. 때문에 경쟁자를 모두 물리치고 유일한 황제가 된 콘스탄티우스 2세조차도 그를 쉽게 다룰 수 없었다. 그래서 콘스탄티우스 2세가 아타나시오스를 그냥 주교직에서만 내쫓은 상태로 적당히 방치했다는 견해가 우세한데, 굳이 그를 붙잡아서 처형할 경우 주요 도시의 지지자들이 그를 순교자로 떠받들면서 반란이나 폭동을 일으킬 우려가 높았기 때문이다.
[15]
울필라스 자신이 고트족 출신이었기 때문에 고트어와 문화에 정통한 인물이었다. 그의 이름 자체가 고트어로 '작은 늑대'라는 뜻이다. 그는 문자가 없었던 고트어를 기록하기 위해
고트 문자를 창안했는데 이 고트 문자로 번역한 성경의 일부가 현재까지 남아 있다. 현재 고대 게르만어 관련 자료가 매우 부족한 상황이기 때문에 그가 남긴 고트어 성경은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16]
사실 울필라스가 전파했던 기독교를 딱히 아리우스파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당시 게르만족은 삼위일체니 단성론이니 따위의 복잡한 형이상학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성부와 성자의 관계 설정은 선교에서 큰 쟁점이 되지 못했다. 다만 울필라스 이후 게르만족이 믿었던 기독교를 아리우스파로 규정한 것은 게르만족들이 동서로마 모두에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소위
삼위일체 정통파(
니케아-
칼케돈)기독교[19]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측면이 강하다.
[17]
이 둘은 또 이복형제다.(...)